고봉 기대승의 장례식이 수많은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다. 신사무옥(辛巳誣獄)의 주동자 송사련(宋祀連)이 죽다. 정철과 이이, 박순의 벼슬길 부침과 함께 동서당쟁이 더욱 격화되다. 이이의 스승 백인걸, 정철의 막내누이가 세상을 떠나다. 면앙정 송순의 회방연에서 정철 조선 최고의 대풍류객 백호(白湖) 임제(林悌)를 만나다.
1573년(선조 6) 2월 8일 고봉 기대승의 장례식이 있었다. 대철학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기대승의 친구, 당대의 고관대작, 제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철은 제문(祭文)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애도했다.
제문(祭文)-정철
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망천(望川) 사우(社宇)에 유풍만 방불합니다.
기대승의 장례식 날에는 무려 55개에 이르는 만장(輓章)이 상여를 끌고 가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김계휘(金繼輝), 이이, 노수신, 허엽, 심의겸, 양사기(楊士奇), 우성전(禹性傳), 윤근수, 김성일(金誠一), 정유길(鄭惟吉), 정유일(鄭惟一), 박순, 정철, 유근(柳根), 최경회 등은 만시(輓詩)를 써서 고인을 애도했다.
기대승의 장례식에 참석차 담양에 내려갔던 정철은 소쇄원에도 들렀던 것 같다. 정철은 소쇄원에서 선공감 감역(善工監監役),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 등을 지낸 홍징(洪澄)을 만나 그의 부채에 시를 써 주었다.
소쇄원서홍징선(瀟灑園書洪澄扇)-소쇄원에서 홍징의 부채에 쓰다(정철)
柳市橋邊飮(류시교변음) 버들거리 다릿가에서 술 마셨지
依然歲丙辰(의연세병진) 지난 병진년 세월이 어제 같은데
衰容初不記(쇠용초불기) 야윈 얼굴 처음엔 기억 못하더니
驚笑十年人(경소십년인) 놀라서 웃는구려 10년 전 사람아
梁園連谷口(양원연곡구) 양원은 곡구와 잇닿아 있거니와
花鳥鬧芳辰(화조뇨방신) 호시절 봄이라 꽃 피고 새 우네
偶爾牽幽興(우이견유흥) 우연히 그윽한 흥취에 이끌려서
尊前逢故人(준전봉고인) 술통 앞에서 옛 벗님을 만났고야
병진년이면 1556년이고, 두 사람이 17년만에 만났다니 1573년이다. 홍징은 1515년생이니 정철보다 21살 연상이다. 하도 오랜만에 만난지라 홍징은 정철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시에는 '自註余於丙辰秋, 與洪飮永平大橋上, 轉眄十七年矣, 今年春相遇於瀟灑園, 洪已不能識矣(내가 병진년 가을에 홍과 더불어 영평대교 위에서 술을 마셨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십칠 년이나 지났다. 금년에 소쇄원에서 만났는데 홍은 이미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의연(依然)'은 전과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양원(梁園)'은 한(漢)나라 때 양효왕(梁孝王) 유경(劉景)의 호화로운 동산이다.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 있다. '뇨(鬧)'는 '시끄러울 뇨'다. '시끄럽다, 흐트러지다, 무르익다, 잦다' 등의 뜻이 있다. '방신(芳辰)'은 좋은 계절, 곧 봄철을 말한다.
그해 38살의 정철은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사헌부 집의에 이어 정3품 군기시 정(軍器寺正) 등을 지냈다. 4월 모친상을 당한 정철은 경기도 고양군 신원리에서 40살이 되던 해 5월까지 약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때에도 예를 다해 시묘살이를 해서 주위의 큰 칭송을 받았다.
같은 해 박순은 양명학(陽明學)의 태두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이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直提學), 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었다. 이이의 천거로 성혼은 2월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7월에 정6품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에 이어 12월에는 정5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이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이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574년(선조 7) 정3품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오른 이이는 1월 왕명으로 조정과 사회 풍습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상소문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성혼과의 문답을 확립한 이기론과 심성론을 바탕으로 거경, 궁리, 역행을 뼈대로 한 수양론과 경세론을 제시했다. 이이는 우부승지에 이어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뒤 종2품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1575년(선조 8) 1월 명종 말~선조 초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순왕후 심씨가 1월에 죽었다. 인순왕후의 죽음으로 외척인 심의겸의 권력 기반은 급격하게 위태로와질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외척 심의겸을 축출하려는 동인과 심의겸의 편에서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서인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서인들은 정치적 전횡을 일삼던 외척의 축출을 주장하는 동인들에게 대의명분면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송강정
3월 서인이 위기에 처하자 황해도 관찰사로 있던 이이는 병을 이유로 체직하여 파주로 돌아왔다. 그는 선조로부터 홍문관 부제학을 제수 받고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결국 허락받지 못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5월 서인의 영수 좌의정 박순 등은 선조에게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선구자로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서경덕의 증직을 청했지만 선조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이는 선조를 설득하여 결국 서경덕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토록 했다. 이는 동서분당 초기 서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박순, 민순(閔純), 남언경(南彦經), 박민헌(朴民獻) 등 서경덕 제자들의 뜻을 수용함으로써 전체 서인의 결집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6월 40살의 정철은 시묘살이를 마치고 복직하여 내자시 정(內資寺正), 의정부 사인에 이어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이 무렵 이조 판서 노진(盧禛)이 병으로 사직했다. 후임 이조 판서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정철은 상의차 이이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이는 부제학의 직책상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정철은 자신의 서운한 심정을 '시율곡(示栗谷)'에 담아 노래했다.
시율곡(示栗谷) -율곡에게 보이다(정철)
君子辭黃閣(군사사황각) 군자가 황각을 물러나니
小人秉東銓(소인병동전) 소인이 동전을 잡았구나
賢邪進退際(현사진퇴제) 군자와 소인 들고 나는데
副學心恬然(부학심념연) 부제학의 마음 태연하네
이조(吏曹)는 인사권을 쥐고 있는 매우 중요한 부서였다. 하지만 이이는 이조 판서 임명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이이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정철의 실망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황각(黃閣)’은 대신의 집무실, 즉 의정부를 뜻한다. 대신의 주택을 황금옥, 황비(黃扉) 등으로 표현한 예에 따른 것이다. '동전(東銓)'은 이조를 말하며, 천관(天官)이라고도 한다. 동반, 서반의 전선(銓選, 인사관리)을 관장했기 때문에 병조와 아울러 양전(兩銓), 전조(銓曹)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이조는 인사의 전권을 가진 부서였기 때문에 동인당과 서인당은 이조의 판서와 전랑(銓郞)을 자당 출신으로 임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부학(副學)'은 부제학이다. 당시 이이의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이었다.
서인의 핵심 인물로 동인과의 대립에 앞장서던 정철은 신료들의 분열을 중재하려는 이이에게 불만을 품고 벼슬을 내던진 채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낙향했다. 정철은 선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면서 불렀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쓴 시가 '증별율곡(贈別栗谷)'이다.
증별율곡(贈別栗谷)-이이에게 주고 이별하다(정철)
君意似山終不動(군의사산종부동) 그대 뜻은 산 같아 끝내 움직이지 않고
我行如水幾時廻(아행여수기시회) 내 걸음 물 같으니 어느 때 돌아오려나
如水似山皆是命(여수사산개시명) 물 같고 산 같음도 모두 다 운명이런가
白頭秋日思難裁(백두추일사난재) 가을날 흰머리로도 헤아리기 어려워라
'믿었던 이이가 도와주지도 않고 산처럼 요지부동이다. 그러니 차라리 물 같은 내가 떠나가련다. 이게 다 운명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네' 하고 한탄하는 시다. 이이에 대해 서운해하는 감정이 물씬 느껴진다.
창평에서 정철은 서하당을 오가며 김성원과 어울려 지냄으로써 울분과 시름을 달랬다. 정철은 서하당에 올라 마당의 벽오동을 보고 '번곡제하당벽오(飜曲題霞堂碧梧)'란 시를 지었다. 서하당 바로 옆 부용당(芙蓉堂)이란 정자 앞에는 작고 아담한 연못이 있다. 정철과 김성원은 이 연못 이름을 부용당(芙蓉塘)이라고 불렀다. 정철은 이 연못을 보고 '부용당(芙蓉塘)'이란 시 한 수를 남겼다.
담양 서하당과 부용당
飜曲題霞堂碧梧(번곡제하당벽오)-하당의 벽오동을 번곡하여 적다(정철)
樓外碧梧樹(루외벽오수) 누각 마당에 벽오동나무 있건만
鳳兮何不來(봉혜하불래) 봉황은 어찌하여 오지를 않는가
無心一片月(무심일편월) 허공엔 한 조각 달빛만 무심한데
中夜獨徘徊 (중야독배회) 한밤중에 나만 홀로 배회하노라
정철은 마당의 벽오동나무에 전설 속의 길조 봉황이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로부터 봉황이 출현하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고, 군자가 천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했다. 정철이 봉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선조가 다시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뜰을 서성이는 정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芙蓉塘(부용당) - 연꽃 연못(정철)
龍若閟玆水(용약비자수) 용이 이 물에 숨어 나오지 않으면
如今應噬臍(여금응서제) 이제 와서는 응당 후회할 것이라
芙蓉爛紅白(부용란홍백) 연꽃이 희고도 붉게 흐드러졌으니
車馬簇前溪(거마족전계) 거마가 시내 앞으로 모여드네 그려
부용당 연못에는 언제 사라졌는지 지금은 연꽃이 보이지 않는다. '부용(芙蓉)'은 연꽃의 다른 이름이다. 부용당에 정작 연꽃이 없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비(閟)'는 '문을 닫다, 멈추다, 끝나다, 숨기다'의 뜻이다. '서제(噬臍)'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치는 것이다. '족(簇)'은 '조릿대, 모이다, 살촉, 가는 대'의 뜻이다.
같은 해 정철의 셋째 형 정황(鄭滉)이 김제군수로 있었다. 장빈자(長貧子) 윤기헌(尹耆獻, 1548~?)의 야사집 '장빈호찬(長貧胡撰)'에 '송강 정철의 셋째 형인 정황이 김제군수가 되었다. 송강이 태헌(苔軒) 고경명과 같이 죽정(竹亭)에 묵게 되었는데 송강이 태헌에게 말하기를, "선생이 운수를 점치는 술법은 제가 탄복을 하는 터인데, 어찌 저에게는 한 말씀도 없으십니까?" 하니, 고태헌은 대답하기를, "여러 말 말고, 사주만을 말하오." 하고, 새벽녘에 송강에게, "나는 공과 사귀기를 바라오. 공은 틀림없이 좌상이 될 터이나, 그러나 만년에 만약 송(松)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강(江)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 말하였다. 송강이 자세히 물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버렸다. 아마 고태헌의 말은 송강으로 은퇴하지 않으면 강계(江界)로 귀양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송강이 만년에 강도(江都)에서 죽었으니, 강이라 한 것은 과연 어느 강을 지칭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기록이 있다.
정철이 백광훈과 함께 부안의 변산에 놀러갔을 때가 아마도 이 무렵이 아닌가 한다. '여백옥봉광훈유변산(與白玉峯光勳遊邊山)'이란 시에 당시 변산에서의 시흥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부안의 명기 매창(梅窓)을 만났을까? 매창의 나이 12~13세 밖에 안 되었을 때라 그녀의 이름이 아직 널리 알려지기 전이기는 하다.
여백옥봉광훈유변산(與白玉峯光勳遊邊山)-옥봉 백광훈과 변산에서 놀다(정철)
水淺窺龍窟(수천규용굴) 물이 앝으면 용굴이 엿보이고
松疎露鶴巢(송소로학소) 솔이 성글면 학집이 드러나네
欲知仙在處(욕지선재처) 신선이 사는 곳 알고자 한다면
須入白雲高(수입백운고) 흰 구름 높이 들어가야 한다네
한양에 연고가 별로 없던 백광훈이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정철은 큰 의지가 되었다. 정철을 고인(故人)으로 부르며 매우 가까이 지냈던 그는 정철이 서궁, 즉 덕수궁에서 숙직을 할 때 그에게 부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정철의 둘째 형 정소는 순천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정철은 어머니를 뵈오러 순천에 다니러 갔다. '시이경빈(示李敬賓)'이란 시는 이 무렵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이경빈(示李敬賓)-이경빈에게 보이다(정철)
溪寒敬賢院(계한경현원) 경현원이라 시냇물 싸늘하고
月近喚仙亭(월근환선정) 환선정이라 달조차 가깝구나
釣罷携餘興(조파휴여흥) 낚시를 파하자 여흥에 끌려셔
沙頭有玉甁(사두유옥병) 모래톱에 옥술병 놓여 있구나
小築臨溪上(소축임계상) 시냇가에 조그만 초당 짓고서
幽懷寄竹林(유회기죽림) 그윽한 회포 죽림에 의지하네
淸風夜半起(청풍야반기) 맑은 바람 한밤중에 일어나니
草屋奏鳴琴(초옥주명금) 초옥에서 거문고 소리 울리네
小屋圍金橘(소옥위금귤) 조그만 집에 금귤나무 두르고
名茶煮玉川(명다자옥천) 옥천의 물에 좋은 차를 달이네
生涯此亦足(생애차역족) 한평생 또한 이것으로 족하니
君是峽中仙(군시협중선) 그대는 산골짜기의 신선이라네
'이경빈(李敬賓)'은 정철의 둘째 형 정소의 사위다. 정철에게는 조카사위다. 정소는 을사사화 이후 벼슬길에 환멸을 느끼고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소라포(召羅浦), 달래도(達來島) 등지에 은둔해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짓고 낚시를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경현원(敬賢院)'은 경현당(景賢堂)을 말한다. 경현당은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추모하기 위해 1564년(명종 19)에 순천 부사 이정(李禎)이 세웠다. '환선정(喚仙亭)'은 승평 군수 심통원(沈通源)이 1543년(중종 38)에 지금의 순천시 동외동 죽두공원 활터에 건립한 정자다. '옥천(玉川)'은 다가(茶歌)를 지은 당나라 사람 노동(盧同)의 호다. 순천에는 실제로 옥천이란 하천이 있다.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다.
6월 성혼은 지평에 제수되어 상경했으나 병으로 사양했다. 이에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 보내고, 공조 좌랑과 사헌부 지평 등을 제수했지만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사헌부 지평, 예빈시 판관(禮賓寺判官),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종묘서 령(宗廟署令),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종4품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정4품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8월 황해도 재령군에서 종이 상전을 죽인 사건에 대해 좌의정 박순이 위관을 맡아 죄인을 하옥(下獄)시켜 죄를 다스렸다. 이에 동인의 종주(宗主) 대사간 허엽(許曄), 사간 김효원 등은 박순의 옥사 처리가 정당성을 잃었다고 하여 탄핵을 주장했다. 양사에서는 서인인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 정언(正言) 조원(趙瑗)만이 박순에 대한 추궁이 잘못이라고 반박했다. 이이도 김계휘와 조원을 제외한 양사의 관원 모두 체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이의 주장에 따라 조원을 제외한 양사의 관원이 모두 물러나게 되었다. 대사헌 김계휘는 평안 감사, 형조 판서 이후백(李後白)은 함경 감사로 나갔다. 이조 참판 유희춘(柳希春)은 벼슬에서 물러나 처가가 있는 전라도 담양으로 낙향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젊은 지도자 김효원에 주목하게 된 이이는 후환을 없애려면 반드시 그의 기세를 꺾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이는 서인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학문에도 정력적으로 매진했다. 그는 경연 등을 통해 자신의 철학과 정치론을 선조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9월 이이는 신유학적 제왕학(帝王學)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10월에 이이는 대윤으로서 소윤의 이기를 탄핵한 바 있는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대사간 정지연(鄭芝衍) 등을 움직여 심의겸에게는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효원에게는 함경도 부령 부사(富寧府使)를 제수하여 외직으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부령이 너무 외지고 험지라는 여론이 일자 김효원은 다시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나가게 되었다. 김효원을 지지하던 이성중(李誠中)도 논핵을 받아 철산 군수(鐵山郡守)로 좌천되고, 정희적(鄭熙績)과 노준(盧畯) 등도 외직으로 밀려남으로써 당쟁은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10월 24일 이이는 선조에게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大學)' 주석서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면서 수양론의 핵심인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뜻을 설명했다. 11월 28일 밤에는 선조에게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대해 강론했다. 12월 이이는 박순과 서신으로 태허(太虛)에 대해 논변을 벌였다. 이 논변을 통해서 이이는 서경덕에 대한 학문적 부채를 완전히 청산했다.
1575년 말 이이는 병으로 체직되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호군은 위(衛)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 호군청(護軍廳)에 입직해 궁궐과 도성 숙위, 성문 경비를 담당했다. 그해 신사무옥(辛巳誣獄, 1521)의 주동자 송사련(宋祀連)이 죽었다. 송사련은 송익필, 한필 형제의 아버지였다. 기묘사화 당시 사림파가 숙청될 때 조광조의 개혁파를 추종하면서 두둔한 혐의로 안당(安瑭)이 좌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 안처근(安處謹) 형제는 부친을 탄핵하여 파직시킨 남곤, 심정, 김전(金㙉) 등이 자신들마저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처겸, 처근 형제는 주위에 불평을 하고 다니면서 남곤, 심정, 김전 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 모의를 엿들은 송사련은 안처겸, 처근 형제가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무고하면서 신사무옥이 일어났다.
신사무옥으로 안당과 안처겸, 처근 형제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다. 안처겸의 동생 안처함(安處諴)은 청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면되었다. 신사무옥으로 안당의 집안은 거의 멸문되고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였으며, 그 공으로 벼슬도 당상관(堂上官)인 중추부 첨지중추부사(中樞府僉知中樞府事)까지 오르게 되었다. 선비들의 비난과 배척에도 송사련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양반으로 부귀를 누렸다. 공신에 책봉되고 양반이 된 송사련으로 인해 송익필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파주 화석정
1576년 2월에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으로 내보낸 일로 인해 이이는 안팎으로 탄핵을 받아 정치적인 주도권을 잃고 파주로 돌아가 임진강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화석정에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박순은 이이의 은퇴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선조에게 청했지만, 선조는 한문제(漢文帝)와 가의(賈誼)를 예로 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이를 옹호한 박순도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의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이이는 파주와 해주를 오가면서 동인의 강경파 이발(李潑)과 서인의 강경파 정철, 심의겸에 비판적이었던 성혼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이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조에게 상소하여 자신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에 입각한 동서화합론(東西和合論)인 붕당론(朋黨論)을 알리기도 했다. 그의 붕당론은 김효원과 심의겸, 동인과 서인이 모두 옳은 점도 있고 그른 점도 있어서 둘 사이의 시비를 가리는 다툼은 국정의 운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이들을 조정하여 화합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이의 양시양비론에 입각한 동서화합론은 외척의 국정 관여를 배제하자는 동인의 주장에 대해 사실상 명분에서 밀리는 서인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이가 서인으로 몰리면서 동인의 공격을 받자 그의 학문적 동반자 성혼도 서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때부터 성혼은 점차 동인과 서인의 당쟁 속에 깊이 연루되어 갔다.
1577년(선조 10) 11월 42살의 정철은 계림군에게 출가했던 막내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군 신원으로 가서 지냈다. 막내누이가 죽자 정철은 역모로 몰려 참수형을 당한 자형(姉兄)이 그리웠던지 계림군의 정자에서 하루 묵으면서 시 '숙계림형강정(宿桂林兄江亭)'을 읊었다.
숙계림형강정(宿桂林兄江亭)-계림형의 강가 정자에서 묵다(정철)
王孫畵閣抗楊花(왕손화각항양화) 왕손의 단청 누각이 양화도에 솟았나니
一水中分兩岸沙(일수중분양안사) 강물은 나뉘어 모래섬 양쪽으로 흐르네
落月滿天飛白雪(낙월만천비백설) 지는 달빛은 하늘 가득 흰 눈 날리는 듯
宿雲鋪地走靑蛇(숙운포지주청사) 머문 구름은 땅에 퍼져 달리는 뱀같아라
菱歌相間棹歌發(능가상간도가발) 마름 따는 노래와 뱃노랜 서로 뒤섞이고
帆影遠隔山影斜(범영원격산영사) 돛 그림자는 멀리 산그늘 너머로 비끼네
四十二年如去鳥(사십이년여거조) 사십이 년 세월은 날으는 새처럼 빠르고
浮生不飮奈愁何(부생불음내수하) 덧없는 삶 술 아니면 이 시름을 어어하리
자형 계림군은 오래전에 죽고, 이젠 막내누이마저 죽었으니 정철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유수, 인생무상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다. 이 시에는 '名瑠, 於公姉兄, 尹任甥姪, 尹元衡動危言, 竟死(이름은 류, 공에게 자형이고, 윤임의 조카다. 윤원형의 위언으로 마침내 죽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화각(畵閣)'은 단청(丹靑)을 한 누각이다. '양화(楊花)'는 양화도(楊花渡), 또는 양화진(楊花鎭)을 말한다. 양화도는 한양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다. 또,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였다. 계림군의 정자가 양화진에 있었던 모양이다. '능가(菱歌)'는 채능가(採菱歌)다. 마름을 딸 때 부르는 노래다. '도가(棹歌)'는 뱃노래다.
같은 달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죽자 정철은 대궐에 들어가 문상을 하고, 이어 송익필을 만나 자신의 거취를 상의했다. 이 무렵 송익필은 서인의 제갈공명으로 막후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교육과 교화 사업에 힘썼다. 12월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였고, '해주향약(海州鄕約)'과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 향약과 사창법을 제정하여 실시했다.
1578년(선조 11) 5월 43살의 정철은 다시 조정에 나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등을 지냈다.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된 정철은 진도 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 옥사 처리 문제로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다. 12월 정철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지만, 이수의 옥사 이후 계속해서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같은 해 이이는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 은병정사 북쪽에 주자사(朱子祠)를 세우고 조광조와 이황을 배향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철은 아마 이 무렵 '봉승기율곡(逢僧寄栗谷)'이란 시를 지은 듯하다.
봉승기율곡(逢僧寄栗谷)-스님을 만나 율곡에게 부치다(정철)
折取葛山葵(절취갈산규) 갈산에서 해바라기 꺾어
逢僧寄西海(봉승기서해) 스님 만나 서해로 부치네
西海路漫漫(서해로만만) 서해 길은 멀고 아득하니
能無顔色改(능무안색개) 안면몰수나 하지 마시길
정철이 향일규(向日葵), 선플라워(sunflower), 해바라기를 꺾어 보내는 마음을 이이가 알아달라는 노래다. 이이만큼은 자신과 뜻을 함께 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시다. 정철과 이이는 같은 서인당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과 뜻은 서로 그렇게 잘 맞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갈산(葛山)'은 드렁칡이 얽혀 있는 산을 말한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는 실제로 갈산이란 곳이 있다. '규(葵)'는 아욱보다는 해바라기라고 풀이해야 한다. 해바라기는 해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식물이다. 여기서 해바라기는 정철, 해는 이이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이이를 태양처럼 존경하고 있으니 안면몰수나 하지 말란 것이다. '서해(西海)'는 해서(海西)라고도 하며, 황해도(黃海道)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황해도를 서해도(西海道)라고 했다.
같은 해 17세의 이덕형(李德馨)은 부제학(副提學) 이산해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청풍 군수를 지낸 이지번의 아들이자 토정 이지함의 조카였다. 관상을 잘 보던 이지함은 이덕형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내다보고 이산해의 둘째 사윗감으로 적극 추천했다. 이덕형은 혼인을 한 이듬해 진사와 생원 양과에 합격하고, 20세에 별시문과에 수석으로 급제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해 예조 판서 옥계(玉溪) 노진(盧禛)이 죽었다. 정철은 '만노옥계자응진(挽盧玉溪子膺禛)'이란 만시를 지어 노진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만노옥계자응진(挽盧玉溪子膺禛)-노옥계 자응 진을 위한 만시(정철)
母恩無路答天恩(모은무로답천은) 어머니 은혜 인해 천은에 답할 길 없더니
萬死餘骸更國門(만사여해갱국문) 만번 죽고도 남은 몸 다시 한양 성문이라
銓敍責隆罷鑑識(전서책륭피감식) 인재등용의 책임감 높아 감식에 지쳤는데
膏肓病革謝精魂(고황병극사정혼) 고황의 병이 더해 정혼 마르고 시들었네
傳家德義千金重(전가덕의천금중) 가문에 전하는 덕의는 천금처럼 무거웠고
曠世聲名四海尊(광세성명사해존) 당대에 드문 명성은 온 세상에 드높았네
未遂西林讀書願(미수서림독서원) 서쪽 숲에 글 읽자던 소원 이루지 못하니
此生長是此心昏(차생장시차심혼) 이 삶 길이길이 이 마음 어둡고 어둡구나
이 시에는 '戊寅冬(무인년 겨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무인년이면 1578년이다. 노진은 노모의 봉양을 위해 두 번이나 외직으로 나갔을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평소 조식, 김인후, 기대승 등의 학자들과 도의로써 교유했던 노진은 지방 수령으로 나갔을 때에는 직무를 신중히 수행하였고, 이익을 욕심내거나 치적을 뽐내지도 않았다. 그는 당시의 가장 큰 병폐가 빈부 격차와 토지 겸병에 있다고 여겨 균전제(均田制)의 시행을 역설하였다.
'전서(銓敍)'는 인재를 가려서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노진이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있었음을 이른 것이다. '피(罷)'는 '고달플 피'다. '극(革)'은 '중해질 극'이다. '사(謝)'는 '조사(凋謝)'다. 시들어 떨어짐, 쇠해짐의 뜻이다. '광세(曠世)'는 '당대 최고, 세상에 드묾'의 뜻이다.
1579년(선조 12) 5월 44살의 정철은 형조 참의(刑曹參議), 6월 승정원 우부승지에 이어 8월에는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지만 계속해서 벼슬을 사양했다. 그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지켜보다가 정치 현실에 울분과 실의를 느끼고, 그동안 머물렀던 한양과 고양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두 번째 낙향했다.
같은 해 박순은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이는 주희(朱熹)가 지은 '소학(小學)'에 제설(諸說)을 인용하여 주석한 '소학제가집주(小學諸家集註)'를 완성했다. 이 책의 끝에는 성혼이 쓴 '소학집주발(小學集註跋)'과 이항복(李恒福)이 쓴 '소학발(小學跋)' 등의 발문(跋文)이 있다.
그해 '곽사원(郭士源)의 제방 송사'가 터졌다. 토목공사를 둘러싼 부정 사건에 송익필의 동생 송한필(宋翰弼)의 사위가 관련되었다.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이 등은 의혹이 있는 송익필 일가의 뒤를 적극적으로 봐주었으며, 사건을 은폐하기까지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동인의 강경파 이발(李潑), 이길(李佶), 백유양(白惟讓) 등은 서인의 모주(謨主)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를 집중 논핵하였다.
9월 29일 이이와 성혼의 스승 백인걸이 죽었다. 백인걸은 절친들의 스승이었으니 정철에게도 스승격이었다. 정철은 '백참찬인걸만시(白叅贊仁傑挽詩)'를 지어 스승을 잃은 이이, 성혼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백참찬인걸만시(白叅贊仁傑挽詩)-백참찬 인걸을 위한 만시(정철)
孤忠一代無雙士(고충일대무쌍사) 외로운 충신 당대에 필적할 선비 없고
獻納三更獨啓人(헌납삼경독계인) 헌납으로 밤 중에도 홀로 아뢰던 사람
山嶽降精生此老(산악강정생차노) 산악의 정기가 내려 이 분을 낳았으니
歸天應復作星辰(귀천응부작성신) 하늘로 돌아간 뒤 다시 별이 되었으리
만시에서 보듯이 정철은 백인걸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존경했음을 알 수 있다. 백인걸은 훈구파에 맞선 사림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특히 1545년의 을사사화 때 윤원형의 음모에 목숨을 걸고 온몸으로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그는 허례와 허식을 비판하였고, 이는 그대로 이이에게 이어졌다. 이이의 인간에 대한 솔직하고 냉정한 자세는 많은 오해를 불러 동료나 원로대신들에게 오국소인(誤國小人)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특히 허엽과 이준경 등은 이이를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분을 터뜨렸으며, 그러한 비판은 스승인 백인걸에게도 돌아갔다. 백인걸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산 26번지에 묻혔다.
같은 해 10월 87세를 맞은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담양의 면앙정에서 열렸다. 과거 급제 60돌을 축하하는 그의 회방연에는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고경명, 정철을 비롯해서 전라 감사(全羅監使) 송인수, 지역 수령 등 백여 명이 참석했다. '담양부지(潭陽府誌)'는 이날의 모습을 '경하의 연회를 베풀기를 신은(新恩)의 날과 같이 하니 온 도에서 높이 받들었고, 밤이 깊은 뒤에 취하여 따뜻한 방으로 내려오니 수찬 정철이 말하기를 "공을 남여(藍輿)로 모시어 나쁠 것이 없다. 우리들이 대나무 남여를 메겠다."고 하고, 헌납 고경명, 저언 임제, 도백(道伯)과 읍재(邑宰) 등이 일시에 공을 부축하여 내려가니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전부 차탄(嗟歎)하여 "전고에 없는 감사(監司)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제는 한국 풍류사에서 임형수(林亨秀)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정철은 송순의 회방연에서 조선 최고의 대풍류객 백호(白湖) 임제를 만나 술자리를 함께 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풍류객은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고 송순의 집에서 하루 묵었던 모양이다. '별임자순제작(別林子順悌作)'이란 시는 아마도 이때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별임자순제작(別林子順悌作)-임자순 제를 이별하고 지음(정철)
曉起覓君君不在(효기멱군군부재) 새벽에 일어나 찾으니 그대는 가버리고
長河雲氣接頭流(장하운기접두류) 은하수 구름 기운만 두류산에 드리웠네
他日竹林須見訪(타일죽림수견방) 언젠가 죽림으로 기꺼이 찾아주신다면
濁醪吾與老妻謀(탁료오여노처모) 내 아내와 함께 막걸리 준비하겠소이다
영웅은 호걸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정철이 새벽에 임제를 찾았다. 해장술이라도 한 잔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러나 임제는 벌써 떠나고 없다. 인사도 없이 떠나간 임제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지는 시다.
'자순(子順)'은 임제의 자다. '장하(長河)'는 큰 강, 또는 은하수를 가리킨다. '두류(頭流)'는 지리산이다. 담양의 면앙정에서 지리산이 보일까? '탁료(濁醪)'는 탁주, 곧 막걸리다.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會津縣, 지금의 다시면)에서 태어난 임제는 남인(南人)의 당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외조부로 문장과 시에 뛰어난 천재였다. 그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피를 튀기며 다투는 것을 보고 이를 개탄하였다. 스승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이 죽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채 조선 천지를 방랑하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임제는 35세 때 평안도 도사(平安道道使)로 부임하면서 개경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묘 앞에서 관복을 입은 채 술잔을 올리고 조시(弔詩)를 지어 바칠 정도로 대단한 낭만주의자였다. 이 일로 그는 조정의 탄핵을 받고 파직을 당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임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감수성이 뛰어난 섬세한 사람이면서도 기개가 호방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이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온다.
임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부친 임진(林晉)을 뵈러 떠나던 날은 배를 띄울 수 없을 만큼 풍랑이 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문과급제자에게 내린 어사화 두 송이와 거문고, 칼 한 자루만 들고 배에 오른 뒤 뱃전에 서서 유유하게 파도를 바라보며 이 시를 읊었다.
기행(記行)-임제
거문고에 보검이면 길차림이 넉넉하건만
바둑판과 찻잔으로 세상일이 사그라졌네
한강 어구에 지는 해는 기러기 따라 돌아가고
광릉의 연기와 달도 스님 따라 한가로워라
파강의 비바람이 외로운 배에 몰아치니
용포의 솔숲 대숲이 하룻밤 내내 차가워라
어촌에서 술 사 마시니 계절 더욱 아름다운데
옥경으로 돌아가는 길이 구름 사이로 보이네
큰 파도에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한 배 위에서 태연자약하게 시를 읊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담대하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임진은 부하 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몰아치는 제주항에서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무슨 일을 결심하면 꼭 하고야 마는 아들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임제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위대한 천재가 살기에는 너무 좁고,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사회였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에 물들기 싫어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지만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당시에는 백의종군하면서 왜적을 물리친 호방한 무인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두고 자손들 앞에서 마지막 남긴 유언을 보면 그의 사나이 대장부다운 기개를 알 수 있다.
물곡사(勿哭辭)-곡하지 말라(임제)
四夷八蠻皆呼稱帝(사이팔만개호칭제) 사방의 모든 나라마다 황제라 부르는데
唯獨朝鮮入主中國(유독조선입주중국) 오로지 조선만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네
我生何爲我死何爲(아생하위아사하위) 이런 나라에 산들 어떻고 죽은들 어떠리
勿哭(물곡) (이런 지지리 못난 조선에 태어났으니 내가 죽더라도) 곡하지 말라
그의 유언은 무능한 조선의 지배계급인 왕과 벼슬아치들에 대한 통렬한 일침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천재 시인 임제를 미치광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세상 사람들을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었다.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는 '물곡사(勿哭辭)' 같은 글이 실려야 한다. 당시 사회에 대한 임제의 현실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임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도 썼다. 그의 시를 보면 당시의 세태가 지금의 세태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천재들이 요절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세상의 갑남을녀들이 옹졸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것에도 있다. 천재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면 얼마나 미치고 환장하겠는가! 그래서 천재들은 화병(火病)에 걸리기 쉽다. 임제도 그래서 요절했을 것이다.
류별성이현(留別成而顯)-성이현과 헤어지며(임제)
出言世爲狂(출언세위광) 말을 하면 미쳤다고들 하고
緘口世云癡(함구세운치) 입을 다물면 바보라고 하네
所以掉頭去(소이도두거) 그래서 고개 젓고 떠나지만
豈無知者知(기무지자지) 어찌 알아줄 사람 없으리오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바보라고 비웃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면서 미친 세상이 싫어서 떠나지만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읊고 있다.
임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도시(哀悼詩)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소인배들이 우글거리는 속세에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내 죽음을 스스로 슬퍼하다-임제
강한(江漢)의 풍류(風流) 생활 사십 년 동안
맑은 이름이 세상 사람들을 울리고도 남았네
이제 학(鶴)을 타고 티끌 그물을 벗어났으니
바다의 반도(蟠桃) 복숭아가 새로 익겠지
시적 화자는 강호를 유람하며 풍류 생활을 즐기면서 신선처럼 살아간 자신의 고결한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제 죽어서 신선이 되어 서왕모(西王母)의 정원에서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 복숭아가 익으면 팔선(八仙)들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임제는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다. 또,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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