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척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던 윤원형이 방귀전리(放歸田里)된 뒤 자결하다. 사림파의 집권으로 을사사화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사사된 선비들이 신원(伸冤)되다. 조선의 정계는 경북 안동에서 후진을 양성하던 재야의 이황과 조정의 현직 관료 이이를 추종하는 신료들로 분열되다. 정철과 이이 훈구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다. 조선의 정계 인사권 요직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라지다. 정여립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다. 정철의 스승 고봉 기대승과 사촌 김윤제 세상을 떠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삼년상을 마친 이이는 29살이 되던 1564년 7월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하고, 8월에는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정6품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제수받았다. 같은 해 부친상을 당한 성혼은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후 정철은 형조(刑曹), 예조(禮曹), 공조(工曹), 병조(兵曹) 좌랑(佐郞)과 공조, 예조 정랑(正郎) 등의 내직을 거쳐 1565년(명종 20) 30살에 외직인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갔다. 도사는 감사의 보좌관으로 파견한 종5품직 지방관이었다. 정철의 경기 도사 재직 기간은 겨우 한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같은 해 이이는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었다. 이이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보우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다. 대사간(大司諫) 박순은 대사헌(大司憲) 이탁(李鐸)과 함께 승려 보우(普雨)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 제주도에 유배된 보우는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정치적 지위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鄭蘭貞)에 의해 독살된 본부인 연안 김씨의 계모 강씨가 윤, 정을 관아에 고발하였다.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요구가 빗발치자 박순은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함으로써 세도를 부리던 척신들을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 방귀전리(放歸田里)의 명을 받고 경기도 강음현(江陰縣)에서 자결하였다.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윤원형은 금부도사가 온다는 이야기를 잘못 듣고, 사형당하기 전에 미리 정난정과 함께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고 한다.
담양 송강정
1566년(명종 21) 1월 31살의 정철은 형조 정랑(刑曹正郎)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사사되거나 유배당한 선비들을 신원(伸寃)시켜 줄 것을 건의했다. 3월에는 인종의 숙의(淑儀, 종2품)로 들어가 귀인(貴人, 종일품)이 된 맏누이가 세상을 떠났다. 9월 정철은 북관 어사(北關御史)로 임명되어 함경도를 순시하였다. 함경도를 순시하던 도중 그는 우연히 시조 한 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명종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하여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형조 정랑에 이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 지평 등을 차례로 역임한 정철은 그해 10월 종6품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었다.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經書)나 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관서였다.
같은 해 박순은 대사헌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이어 정2품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겸임하였다. 이이는 정6품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올랐다. 종3품 이하 당하관의 문관 인사는 이조의 정랑과 좌랑, 무관의 인사는 병조의 정랑과 좌랑이 관장했다. 이들에 따라서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조, 병조의 정랑, 좌랑은 요직 중에서도 최요직이었다. 그래서 이조, 병조의 정랑, 좌랑을 전랑(銓郎)이라고도 했다.
그해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안당의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伸寃) 복권되고, 그 직첩(職牒)이 환원되었으며, 무고자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었다. 1567년(명종 22, 선조 즉위년) 10월 을사사화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사사된 선비들이 신원(伸冤)되고, 유배되었던 사람들도 풀려나 명예가 회복되었다. 정철의 부친 정유침도 이때 판관 직첩이 회복되었다. 11월 32살의 정철은 정6품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올랐으며, 이이와 함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인 호당(湖堂)에 선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갔다. 정여립은 진사가 되었다.
1568년(선조 1) 선조 즉위 초 조선의 정계는 경북 안동에서 후진을 양성하던 재야의 이황과 조정의 현직 관료 이이를 추종하는 신료들로 분열되고 있었다. 2월 성혼은 일찌기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고 있다가 경기 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종9품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 이황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3월 33살의 정철은 이이에 이어 이조 좌랑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파주 파산사원
같은 해 박순은 대제학이 되었고, 이이는 정5품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올랐다. 이이는 백인걸과 함께 파주에 파산서원(坡山書院)을 세웠다. 6월 정철은 원접사(遠接使) 박순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까지 나가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면서 시재(詩才)를 발휘했다. 원접사는 정1품 의정(議政)을 제외한 2품 이상의 관원이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통군정(統軍亭)'이란 시는 이 무렵 쓴 것으로 보인다.
통군정(統軍亭) -정철
我欲過江去(아욕과강거) 내 이 강을 건너 가서
直登松鶻山(직등송골산)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西招華表鶴(서초화표학) 서녘 화표주 학을 불러
相與戱雲間(상여희운간) 구름 속에서 노닐고져
'통군정(統軍亭)'은 평안도 의주성에서 가장 높은 북쪽의 삼각산 장대(將臺)로 세워진 누정 이름이다. 장대란 군사 지휘소를 말한다. 의주의 통군정은 강계의 인풍루(仁風樓), 선천의 동림폭(東林瀑), 안주의 백상루(百祥樓),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성천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의 세검정(洗劍亭),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와 함께 관서팔경(關西八景) 중의 하나다. '과강(過江)'은 '압록강을 건너다'의 뜻이다. '송골산(松鶻山)'은 압록강 맞은편에 있는 산이다.
'화표학(華表鶴)'은 '푯말에 앉은 학'이란 뜻이다. 한나라 태소관(太霄觀)의 도사(道士) 정영위(丁令威)가 죽은 뒤에 학이 되어 고향 성문 푯말(華表柱)에 앉아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古人民非, 何不學仙塚累累(새야 새야 정령위 새야. 집 떠난지 천 년만에 이제사 돌아왔네. 성은 예전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다르구나.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첩첩할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정영위가 죽어서 학이 되어 이승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알아 볼 사람도 없어서 도로 하늘로 돌아갔다고 한다.
같은 해 동부승지와 병조 참지, 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지냈던 임억령이 세상을 떠났다.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했던 임억령은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존경하였으나 이직(吏職)에는 맞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그는 전라남도 동복(同福)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1569년(선조 2) 5월 34살의 정철은 정5품 홍문관 수찬과 교리,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정철, 이이 등이 사림의 정계 진출을 도모하자 훈구파(勳舊派)의 거두 대사헌 김개(金鎧)는 '오늘날 사류의 폐습은 거의 기묘(己卯) 연간과 같다.'고 하면서 홍담(洪曇) 등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양사의 사림파 언관 17인을 논죄하고 탄핵하려 하였다. '기묘 연간'이란 기묘사화 당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 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철은 선조 앞에 나아가 김개 등을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비교하면서 그들의 잘못됨을 조목조목 논박했다. 정철은 '격탁양청(激濁揚淸)'을 부르짖으며, 사림파를 적대시하던 김개를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했다. 김개가 축출되자 홍담은 불안하여 병을 사칭하고 물러났다.
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이이와는 달리 정철은 다혈질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이어서 할 말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의 허물을 보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화를 입더라도 앞장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조는 그런 그에게 ‘정철은 그 마음이 바르고 그 행실이 모나지만 그 혀가 곧기 때문에 시속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 직책을 맡아 충직하며 맑고 절개 있으며 떳떳하게 몸이 닳도록 행하니 초목도 그 이름을 알 것이다. 진실로 이른바 봉황의 대열에 드는 한 마리 수리요, 전당 위의 사나운 범이다.’라고 평했다. 정철의 시조에서도 그 성격이 드러난다.
쇠나기 한 줄기미 년니페 솟다로개
물 무든 흔적은 전혀 몰라 보리로다
내 마음 뎌 가타야 덜믈 줄을 모르고져
정철은 '소나기가 퍼부어도 연잎은 젖지 않는다. 물 묻은 흔적조차 전혀 몰라볼 것이다. 내 마음도 연잎 같아서 물 묻을 줄 모른다.'고 읊었다. 자신은 강직하고 결백해서 결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는 시조다.
이이가 이성적이고 온화한 성품의 온건파였다면, 정철은 다분히 감성적이고 외고집, 외골수의 강경파였다. 이처럼 성격이 달랐기에 두 사람은 같은 서인당이었지만 당론을 정할 때도 의견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이이와 정철은 서인당론을 정하다가 정치적인 의견이 갈렸던 모양이다. 정철의 '증율곡(贈栗谷)'이란 시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증율곡(贈栗谷) - 율곡에게 주다(정철)
欲言言是垢(욕언언시구) 말하고 싶어서 말하면 때가 되고
思黙黙爲塵(사묵묵위진) 묵묵히 생각만 해도 티끌이 되네
語黙皆塵垢(어묵개진구) 말하건 말건 다 티끌과 때가 되고
臨書愧故人(임서괴고인) 글로 쓰려니 또 벗에게 부끄럽네
君言有斟酌(군언유짐작) 그대의 말에 헤아림이 있는 건지
我意沒商量(아의몰상량) 나의 생각에 융통성이 없는 건지
爛漫同歸日(난만동귀일) 의견이 통해서 함께 돌아가는 날
方知此味長(방지차미장) 곧 내 방책이 낫다는 것을 알리라
이 시에는 '時與栗谷爭東西黨議未契有是作(율곡과 더불어 동서당론을 논의할 때 마무리 되지 않아 이 시를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이이가 이해할 줄 알았는데, 정철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림짐작만 하는 것에 대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방책이 옳았다는 것을 알겠지만 그때는 이미 때는 늦으리라는 것이다.
'짐작(斟酌)'은 '술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따름, 일의 형편 등을 어림쳐서 헤아림'의 뜻이다. '상량(商量)'은 '헤아려 생각함'의 뜻이다. '난만 (爛漫)'은 '꽃이 활짝 많이 피어 화려함, 광채가 강하고 선명함, 주고받는 의견이 충분히 많음'의 뜻이다.
파주 파산서원
같은 해 성혼은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 종6품 적성 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조헌 등 제자들의 양성에만 힘썼다. 그는 파주의 파산서원을 중심으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며 그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 성혼은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자들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이이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그해 9월 이이는 11조로 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선조에게 올려 유학의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통한 사회개혁론을 제시했다. 그는 관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제도의 개선에 두면서 경장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이이는 신분제에 기초한 봉건사회의 근본 모순이 전제왕조정권 체제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박순, 성혼, 정철, 송익필도 마찬가지였다.
진정한 개혁은 구시대의 유물인 전제왕조정권을 폐기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지만 이들은 왕권 체제에 편승해서 봉록과 특권을 보장받은 기득권자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회 기득권자들의 개혁론은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다. 개혁 대상자들이 개혁을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이것은 21세기에 접어든 요즘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이황은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한양을 떠나 안동으로의 귀향길에 올랐다. 이황이 한양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철은 광나루까지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별퇴도선생(別退陶先生)'을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별퇴도선생(別退陶先生)-퇴계 선생과 이별하며(정철)
追到廣陵上(추도광릉상) 퇴계선생 뒤쫓아 광나루 이르렀건만
仙舟已杳冥(선주이묘명) 선생님 타신 배 이미 멀리 아득하네
秋風滿江思(추풍만강사) 가을바람 부는 강가엔 그리움만 가득
斜日獨登亭(사일독등정)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올라서 바라보네
이황의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문에 대한 정철의 존경심과 흠모의 정이 담겨 있는 시다. 서인의 원조 이이와 정철, 성혼은 비록 파당은 달랐지만 동인의 원조 이황을 대학자로서 존경했다.
'광릉(廣陵)'은 광릉진(廣陵津) 곧 광나루를 말한다. '선주(仙舟)'는 '신선이 탄 배'란 뜻이다. 이황을 신선에 비유한 표현으로 극찬이라고 할 수 있다. 광나루 언덕의 정자에 올라 멀어져 가는 이황을 바라보는 정철의 모습이 그려진다.
1570년(선조 3) 35살의 정철은 홍문관 교리, 정5품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4월 부친상을 당한 정철은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2년 동안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모든 의례와 절차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시묘살이를 해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같은 해 10월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처가가 있는 해주 석담(石潭)과 파주를 오가며 지냈다.
같은 해 정여립은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에 두 번째로 급제한 뒤 성균관 정록소(正錄所)에서 종9품 학유(學諭)로 벼슬길에 올랐다. 성균관 학유로 그는 독서에 전념하면서 이이, 성혼 등과 교류했다. 정여립은 정연한 이론으로 논변을 잘하고 총명했으며, 특히 시경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사물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 다른 학유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해 12월 8일 동인의 원조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벼슬길에서의 진퇴를 거듭하던 이이는 1571년(선조 4) 6월 청주 목사로 부임했다. 청주 목사로 부임한 이이는 사족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서 성리학적 윤리를 전파하고 하층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서원향약'을 지었다.
1572년(선조 5) 7월 37세의 정철은 시묘살이에서 돌아와 상복을 벗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이조 정랑,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과 종4품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종3품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등을 차례로 지냈다. 같은 달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은 죽기 직전에 선조에게 '붕당의 사론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차(遺箚)를 올렸다. 이준경의 유차는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동생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하고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붕당(朋黨)을 형성할 조짐이 있음을 경고한 것이었다. 이에 선조가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자 이이를 비롯한 사림파는 이준경의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이이는 이준경을 반박하는 '논붕당소(論朋黨疏)'를 올려 심의겸을 옹호했다. 정철도 심의겸의 편에 섰다.
직제학, 대사간 등을 지내면서 노장사류(老壯士類)와 교류가 많았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 심의겸은 척신이기는 했지만 척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사람파를 옹호했다. 명종대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이 중종의 3비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등에 없고 전권을 휘두르자 명종은 이량(李樑)을 이조 판서로 기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량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림을 탄압하자 심의겸은 명종의 밀지를 받고 대제학(大提學) 기대항(奇大恒)에게 상소케 하여 이량을 탄핵했다. 이량은 인순왕후와 심의겸의 외숙부였다.
명종대 소윤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노장사류들은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파의 동조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소윤의 몰락 이후에 등장한 김효원(金孝元) 등의 청빈사류(淸貧士類)들은 급진적으로 척신정치의 적폐를 척결하고자 했다. 노장사류들은 척신들의 전횡과 적폐 청산을 외치는 청빈사류에게 명분면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오건(吳健)은 조정의 요직인 이조 전랑(吏曹詮郞) 자리를 떠나면서 문과 장원급제를 한 문명 높은 선비로서 직무에도 충실하여 청빈사류의 지지를 받고 있던 김효원을 추천했다. 당시에는 전임 전랑이 후임 전랑을 천거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하지만 심의겸은 척신이자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의 집에 머무른 사실이 있는 김효원을 전랑 같은 요직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결국 이조 전랑에 임명되었다.
김효원이 이조 전랑 자리를 떠날 때 노장사류들은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추천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심충겸이 왕실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인사를 처리하는 막중한 전랑의 직책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이조 전랑 임명을 놓고 벌어진 두 차례의 논쟁으로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청빈사류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노장사류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김효원의 집은 한양의 동쪽인 낙산(洛山) 밑의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림을 동인(東人), 심의겸의 집은 한양의 서쪽인 정동(貞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을 서인(西人)으로 부르게 되었다. 동서분당은 후에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발전해 국정의 혼란과 국력의 소모를 초래했다.
같은 해 박순은 정1품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이는 벼슬을 사직하고 다시 파주로 돌아갔다. 일찌기 이황을 사숙했던 성혼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회의를 품고 1572년 여름 파주로 돌아간 이이와 9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성혼은 '중용' 서(序)에서 주희(朱熹)가 인심도심(人心道心)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이기호발설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이는 성혼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 등에 대해 토론하면서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 심시기(心是氣), 성심정의일로(性心情意一路) 등 이기론(理氣論)과 심성론(心性論)의 핵심 명제들을 제시했다. 이 무렵 이이는 자신의 철학적, 정치적 입장을 확실히 정했다.
그해 11월 1일 정철의 스승 기대승이 세상을 떠났다. 기대승의 제자에는 고경명을 비롯해서 정철, 정운룡(鄭雲龍), 최경회(崔景會),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었다. 기대승은 특히 정철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에 관한 일화가 있다. 기대승이 어느 날 제자들과 산에 올라가 기이하게 생긴 수석 하나를 발견했다. 제자들이 '세간 사람으로서 인품이 이에 비길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기대승은 '오직 정철이 그러하다.’고 대답했다.
기대승이 쓴 '억계함(憶季涵)'이란 시가 있다. 이 시를 보면 기대승이 정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억계함(憶季涵)-계함을 생각하다(기대승)
夢裏梅花滿樹新(몽리매화만수신) 꿈속의 매화 나무에 가득히 새로우니
覺來淸想在元賓(각래청상재원빈) 깨어도 맑은 생각은 원빈에 가 있노라
人間有累難藏拙(인간유루난장졸) 사람은 얽매임 있어 옹졸함 못 감추고
物外無營足養眞(물외무영족양진) 사물 경영 없으니 참을 기르기 족하네
殘暑一回須退減(잔서일회수태감) 늦더위는 한 차례 지나면 물러가지만
斯文千古未埃塵(사문천고미애진) 문왕의 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노라
何時邂逅成佳會(하시해후성가회) 언제 서로 만나 좋은 만남을 이룰까나
對月臨風意自親(대월임풍의자친) 달과 바람 대하니 뜻이 절로 친해지네
'계함(季涵)'은 정철의 자다. '원빈(元賓)'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제자 이관(李觀)의 자다. 이관은 스승 한유와 막상막하라 불렸다. 기대승도 제자인 정철을 그에 비유한 것이다. '사문(斯文)'은 공자의 말에서 나온 문구다. 문왕(文王)이 죽은 뒤에 자신이 이어받은 이 도(道)라는 뜻이다. 후세의 선비들은 유학(儒學)을 사문(斯文)이라고 한다. 유학이라고 풀이해도 뜻은 통한다.
같은 해 환벽당의 주인이자 정철의 스승 김윤제도 세상을 떠났다.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했다. 정철은 한해에 두 명의 스승을 잃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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