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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2

林 山 2017. 7. 7. 11:21

을사사화로 가문이 풍비박산 난 정철은 전라도 담양에서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송천 양응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만나다.


1540년(중종 35) 18세의 박순은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진사(進士) 3등(三等) 51위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그는 성균관에서 홍인우(洪仁祐)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 등과 함께 공부했다. 


파주 화석정


1541년(중종 36) 무렵 6세의 이이는 어머니를 따라 강릉에서 한양으로 올라와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에서 살았다. 이후 그는 한양과 파주를 오가며 살았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1543년(중종 38) 8세의 이이는 파주시(坡州市) 파평면(坡平面) 율곡리(栗谷里) 임진강(臨津江) 남안 언덕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른바 '8세부시(八歲賦詩)'였다.  


팔세부시(八歲賦詩)-이이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숲속 정자에 가을 깊어가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단풍은 해 바라보며 붉었네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 리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가나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저녁 구름 속에 소리 끊기네


1934년 7월 1일자 동아일보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쓴 '적벽유(赤壁遊)'라는 기행문(紀行文)에는 '팔세부시'는 이이의 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팔세부시'는 창녕 지역이나 성씨와 관련된 문인으로 보이는 창녕후인 매연거사(昌寧後人梅莲居士)라는 별호(別號)를 가진 성명 미상((姓名未詳)의 누군가가 지었다는 것이다. 이은상은 이이와 신사임당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이다.


화석정은 원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고려 말 유학자 길재(吉再)가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터가 있던 곳이었다. 길재의 사후 그를 추모하여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1443년(세종 25)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으며, 이숙함(李淑瑊)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다.


1544년(중종 39, 인종 즉위년)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 소생의 세자 환(緝)을 즉위시키려는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명종(明宗)의 외삼촌 윤원형을 영수로 한 소윤(小尹)과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이자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 1487~1545)을 영수로 한 대윤(大尹)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이 심화되자 성혼의 부친 성수침은 일족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파주 파산(坡山)의 우계(牛溪)로 이주하였다.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년) 정철이 10살 때 인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의 이복동생 경원대군(慶源大君)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이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호시탐탐 정권 장악을 노리고 있던 윤원형 등 소윤 일파는 명종의 즉위와 함께 정적인 윤임 등 대윤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을사사화는 소윤 일파인 경기 감사 김명윤(金明胤)이 '인종의 병환이 위중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대윤의 윤임이 임금의 아우 경원대군 대신 계림군을 추대하려 한다'고 밀계를 올림으로써 시작되었다. 을사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윤원형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기(李芑)였다. 이기는 인종의 즉위로 대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대윤의 영수 윤임과 영의정(領議政) 유관(柳灌),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인숙(柳仁淑) 등에게 탄핵을 받은 적이 있어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소윤의 영수 윤원형은 이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순붕(鄭順朋), 호조 판서(戶曹判書) 임백령(林百齡), 공조 판서(工曹判書)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함께 명종을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윤임, 유관, 유인숙 등 대윤파 정적들을 탄핵했다. 임백령은 금산 군수로 있던 형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만류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과 권벌(權橃) 등이 탄핵의 부당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윤임과 유관, 유인숙은 사사되었다. 백인걸은 의금부에 갇혔고, 그에게 동조했던 양사(兩司)의 관원들은 파직되었으며, 권벌도 체직(遞職)되었다. 대윤 숙청에 성공한 뒤 임백령은 임억령에게 원종공신(原從功臣) 문서를 보내왔지만, 그는 이를 불사른 뒤 금산 군수직을 내던지고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 은거했다.   

  

정철의 매형인 계림군도 대윤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밀고가 있자, 겁에 질린 나머지 강원도 안변으로 피신하여 이웅(李雄)의 집에 숨어 있었다. 계림군에 대한 수배령이 내리자 당시 사온령(司醞令)이었던 정철의 부친 정유침과 이조 정랑(吏曹正郞)이었던 맏형 정자(鄭滋)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계림군은 안변에서 황해도 강음으로 가던 도중 토산에서 체포되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계림군은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형(凌遲刑)을 당했다. 계림군이 역모죄로 처형되자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서 돌아왔다. 자는 심문을 받고 곤장형에 처해진 뒤 전라도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 


1546년(명종 1)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전횡이 시작되던 해 전주(全州)에서 익산 군수를 거쳐 첨정(僉正) 벼슬을 한 정희증(鄭希曾)과 박찬(朴纘)의 딸 사이에 조선의 풍운아 정여립(鄭汝立1546∼1589)이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고려의 무신 정중부(鄭仲夫)의 태몽을 꾼 후 그를 수태했고, 출산하는 날에도 정중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태어나면서부터 푸른 빛이 도는 붉은 색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라면서 체격이 늠름했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통솔력 또한 뛰어났다. 두뇌가 명석했던 정여립은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두루 통달하였다. 


1547년(명종 2) 9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났다.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에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명종에게 바쳤다.(문정왕후에세 바쳤다는 설도 있다.) '여주'는 문정왕후를 뜻했다. 윤원형, 이기, 정순붕, 윤인경(尹仁鏡), 허자(許磁) 등 소윤파의 주청으로 명종은 윤원형을 탄핵했던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했다. 그리고,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백인걸, 정철의 형인 정자와 정황(鄭熿), 유희춘(柳希春), 김만상(金彎祥), 권응정(權應挺), 권응창(權應昌), 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중종의 아들 봉성군(鳳城君) 완(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른바 정미사화(丁未士禍)이다. 양재역벽서사건은 소윤 일파가 대윤 일파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정치공작이었다.


정미사화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다시 경상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다. 전라도 광양에 유배되었던 정자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경원(慶源)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도중 장독이 도져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정철의 둘째 형 정소(鄭沼)는 맏형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자 벼슬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과거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順天)에 은거한 채 학문과 수양으로 세월을 보냈다. 


정철의 셋째 형 정황은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김제 군수와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에 올라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황의 딸은 나중에 선조의 후궁 귀인 정씨(貴人鄭氏)가 되었다. 


이처럼 정철의 집안은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풍비박산이 났다. 정철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관북(關北)의 정평, 영남의 영일 등 유배지를 떠돌던 정철은 권력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권토중래하리라 마음먹었다. 정철이 권력을 지향하면서 정적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것은 아마도 이때의 고통스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1548년(명종 3) 13세의 이이는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장원으로 올라 학문의 명성이 자자해졌다. 1549년(명종 4) 박순은 그의 시조묘(始祖廟)가 있는 대전에 '사암(思菴)'이란 서실(書室)을 짓고 글을 읽었다. 그는 일찌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달통했으며, 특히 '주역(周易)'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문장에 뛰어났고, 시에도 능했으며, 글씨도 잘 썼던 박순은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순은 스승 서경덕의 방법론 그대로 독자적인 학문 연구를 통해서 높은 경지에 올라 주위의 유생들과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암선생(思庵先生)이라 높여 불렀다. 이때부터 그는 사암이란 호를 주로 썼다. 박순은 학문의 폭을 넓히기 위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다.  


1551년(명종 6) 16세의 이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데다가 아버지가 맞은 서모 때문에 가정의 불화가 잦아지자 신사임당의 상을 치른 후 금강산으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로 지낸 기간은 1년 정도였지만, 이때의 경력은 그를 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같은 해 순회세자(順懷世子) 탄생으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사면령을 받고 6년 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정유침은 식솔들을 이끌고 정철의 조부 묘가 있는 전라도 담양부(潭陽府) 창평현(昌平縣)의 당지산(唐旨山) 기슭으로 이사했다. 당지산은 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송강정 뒷산이다. 정철은 둘째 형 정소가 모시고 있던 어머니를 뵈러 순천을 향해 가다가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성산(星山, 별뫼, 493m) 기슭의 지실마을 맞은편의 환벽당(環碧堂) 근처에서 스승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를 만났다.  


환벽당


김윤제를 만난 것은 어쩌면 정철의 운명이었다. 어느 한여름 날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선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소에서 한 마리 용이 놀고 있었다.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냇가에 내려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정철이었다. 몇 마디의 대화로 정철의 재질을 알아본 김윤제는 그의 순천행을 만류하고 환벽당에 머물게 했다. 김윤제는 정철을 만난 것을 기념하여 증암천변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이른바 쌍송(雙松)이다.

 

증암천변의 쌍송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나주 목사에서 물러나 증암천변 동산에 환벽당을 짓고 조일전쟁(朝日戰爭) 때의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과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金德齡, 1567∼1596)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 등의 후학들을 가르쳤다. 정철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송순, 김윤제, 임억령을 비롯해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 당대 최고의 문인, 학자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는 한편 김성원, 고경명 등과 교유하면서 성장했다. 


증암천 유역 일대는 경관이 뛰어나 조선시대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가사문학의 꽃을 피웠던 곳이다. 증암천 상류에는 양산보의 소쇄원을 비롯해서 김윤제의 환벽당, 임억령의 식영정(息影亭),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이 있고, 하류에는 송강정이 있다. 이들 누정(樓亭)들은 오례천변(五禮川邊) 제월봉(齊月峰)의 면앙정과 함께 누정문학(樓亭文學)의 중심이 되었다. 소쇄원의 이름은 송순, 소쇄원 제월당(齊月堂)과 광풍각(光風閣)의 이름은 호남 최고의 사림 김인후가 지었다.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에서 시작된 호남가단(湖南歌壇) 식영정과 서하당, 소쇄원 공동의 성산가단(星山歌壇)으로 확대되면서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한국 가사문학의 대표작들을 낳았다. 정철은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며 임억령과 김윤제에게 학문을 배웠고, 서하당을 오가며 '관동별곡(關東別曲)'과 더불어 한국 가사문학의 백미라 일컫는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었다. 정철이 식영정에서 지은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은 후에 '성산별곡'의 모본이 되었다. 식영정과 서하당, 환벽당, 송강정을 아울러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억령과 김성원, 고경명, 정철을 식영정 4선(四仙)이라 일컫는다.


여기서 정철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박상은 호남 사림의 원조이자 호남가단의 정신적 지주였다. 송순은 박상의 제자다. 김인후와 임억령도 박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 송순, 김윤제, 김인후, 임억령, 기대승양응정은 정철의 스승이다. 양응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화가인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아들이다. 양팽손이 소쇄처사 양산보의 6촌 형이니까 양응정은 양산보의 7촌 조카뻘이다.


양산보는 송순의 외제(外弟, 고종사촌동생)로 10살 연하다. 송순의 고모가 양산보의 어머니다. 임억령은 양산보의 4종매와 결혼했다. 양산보의 첫 번째 부인이 김윤제의 여동생 김윤덕인데, 아들 자홍(子洪)과 자징(子澂), 자정(子渟), 딸 앵두를 두었다. 양자징은 김인후의 수제자로 김성원의 사위가 되었다. 자징과 자정은 고경명과 절친이었다. 양산보의 손자 천회(千會), 천경(千頃)은 1589년(선조 22) 정철이 위관을 맡은 기축옥사(己丑獄事) 2년 뒤에 일어난 신묘옥사(辛卯獄事) 때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을 무고한 죄로 죽었다. 


김인후는 양산보와 유희춘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다. 임억령과 유희춘은 해남이 고향으로 동향인이었다. 김성원은 김윤제의 조카로 임억령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從甥姪女) 사위다. 김윤제의 외손녀가 정철의 부인이다. 김성원은 11살 어린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으로 정철의 장모와 6촌 간이다. 


정철은 김성원을 매우 따랐으며, 때로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는 김성원의 서하당을 자주 드나들었다. 때로는 서하당에서 밤을 새며 '하당야좌(霞堂夜坐)'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정철과 김성원 두 사람 사이의 평생지기 우정은 '요기하당주인김공성원(遙寄霞堂主人金公成遠)'이란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하당야좌(霞堂夜坐)-밤에 서하당에 앉아서(정철)


移席對花樹(이석대화수) 자리를 옮겨 꽃나무와 마주하고

下階臨玉泉(하계임옥천) 뜰에 내려가 맑은 샘에 다다랐네

因之候明月(인지후명월) 이곳에서 밝은 달을 기다렸더니

   終夜望雲天(종야망운천) 밤새 구름 낀 하늘만 바라보았네  


 요기하당주인김공성원(遙寄霞堂主人金公成遠)

멀리 서하당 주인 김성원에게 부치다(정철)

   

骨肉爲行路(골육위행로) 골육간에도 가는 길이 다르고

 親朋惑越秦(친붕혹월진) 친한 벗도 혹은 앙숙이 되나니

 交情保白首(교정보백수) 사귀는 정 늙도록 지키는 이는

  海內獨斯人(해내독사인) 세상에 오직 그대 하나 뿐일세 


'행로(行路)'는 세상을 살아가는 길, 노선을 말한다. '월진(越秦)'은 월나라와 진나라처럼 서로 원수처럼 지내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뜻한다.


김성원은 정철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학문과 문학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김성원이 거문고의 대가임을 알아준 사람도 정철이었다. 


금헌(琴軒) - 거문고 있는 집(정철)


君有一張琴(군유일장금) 그대에게 거문고 한장 있어

聲希是大音(성희시대음) 소리 세상에 드문 대음일세

大音知者少(대음지자소) 대음을 알아주는 이 적어서

彈向白雲深(탄향백운심) 흰구름 깊은 곳에서 타는가


'금헌(琴軒)'은 거문고가 있는 집, 곧 김성원의 서하당을 뜻한다. '군(君)'은 김성원을 가리킨다. '대음(大音)'은 천지간에 진동하지만 귀로 듣고자 하여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말한다. 대음희성(大音希聲)이란 말이 있다. '아주 큰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뛰어난 음악은 소리가 없는 듯하다.'는 뜻이다. '백운(白雲)'은 신선들이 사는 선계를 상징한다. 신선들이나 김성원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철은 김윤제의 후원으로 대학자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가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의 저서에서 핵심을 발췌한 송학(宋學)의 입문서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선비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도리를 익혔다. 기대승이 죽자 정철은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21세 때부터는 양응정을 스승으로 모셨다. 또 당대의 유명한 시인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웠다. 


같은 해 성혼은 순천 군수 신여량(申汝樑)의 딸 고령 신씨와 혼인하였다. 그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급제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복시(覆試)에는 응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과거 경력이었다. 그해 겨울 귀양에서 풀려난 백인걸이 파산에 와서 머물자 성혼은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백인걸은 사림파의 영수 조광조의 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