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의 활빈당 혁명이 실패하다. 서인의 뿌리 사암 박순, 구봉 송익필, 우계 성혼, 송강 정철, 율곡 이이 태어나다.
전라남도(全羅南道) 담양군(潭陽郡) 봉산면(鳳山面) 제월리(齊月里)에 있는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2)의 면앙정(俛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을 돌아본 뒤 담양군 고서면(古西面) 원강리(院江里) 쌍교(雙橋)에 있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을 찾았다. 송강정은 쌍교 유산(柳山)사거리와 쌍교숯불갈비 사이 낮으막한 동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 주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유산교에서 바라본 증암천(甑岩川)
송강정 바로 앞에는 증암천(甑岩川)이 흐르고, 그 건너편으로는 영산강(榮山江)과 증암천 사이에 드넓은 죽록들이 펼쳐져 있다. 송강정 앞을 흐르는 증암천을 죽록천(竹綠川), 송강(松江), 창계천(蒼溪川), 자미탄(紫薇灘)이라고도 한다. 정철은 강 이름을 자신의 호와 정자명으로 삼았다. 노송으로 둘러싸인 정자와 소나무 숲이 비친 냇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철이 왜 송강을 자신의 호로 삼았는지 알 수 있다.
증암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무등산(無等山, 1,187m)에서 나와 용담대(龍潭臺) 아래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고산천(高山川)과 합하여 담양부의 원율천(原栗川)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의 무등산 북사면에서 발원한 증암천은 북서쪽으로 흘러 광주호(光州湖)로 들어간다. 광주호에서 담양군 고서면의 북쪽으로 흐르던 증암천은 주산리(舟山里)에서 석곡천(石谷川)과 창평천(昌平川)을 합친 다음 봉산면 와우리(臥牛里)에서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길이는 15.64km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송강정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에 들러싸여 남동향으로 앉아 있다. 정자 한가운데에는 중재실(中齋室)이 한 칸 마련되어 있고, 사방으로 마루를 깔았다. 남동쪽 정면 처마에는 '松江亭(송강정)', 북동쪽 측면 처마에는 '竹綠亭(죽록정)' 편액이 걸려 있다. 송강정 앞에 서면 남쪽으로 무등산이 우람하고 듬직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정철은 죽록정에 머물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비롯해서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문학사에서는 정철을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손꼽는다. 정자의 남서쪽 마당에는 '사미인곡'을 새긴 '송강정선생시비(松江鄭先生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1955년 송강정을 다시 고쳐 지을 때 세운 것이다. 시비 바로 앞에는 아름드리 노송 한 그루가 정자를 지키고 있고, 노송 뒤에는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송강정 문미(門楣)에는 시나 글을 새긴 판액(板額)이 7개 걸려 있다. 7개의 판액 가운데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시 외에는 모두 정철과 그 후손들의 시나 글 뿐이고, 호남가단의 쟁쟁한 문인들의 글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왜일까? 서인(西人)의 행동대장 정철은 조선의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 고변(告變)에서 촉발된 기축사화(己丑士禍)에서 수사를 지휘하는 위관(委官)을 맡았다. 그는 정여립 모반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2,000여 명 이상의 동인(東人)들을 학살했다. 이때 죽임을 당한 동인들 중 1,000여 명 이상이 호남의 선비들이었다. 기축사화로 인해 호남의 선비들은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쇄원(瀟灑園)의 주인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손자 두 명도 이때 죽임을 당했다. 기축사화 이후 호남의 선비들은 정적에게 무자비했던 정철을 피에 굶주린 '동인백정(東人白丁)'이라고 부르면서 치를 떨었다. 송강정에 호남 사림의 시나 글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타임 머신을 타고 1500년대 조선시대 초로 돌아가 보자. 조선은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법률체계를 완비하면서 연산군(燕山君)에 이어 중종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기틀을 다졌지만, 조정에서는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도우면서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勳舊派)와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의 관계를 논한 중국 남송대 이후의 유교철학인 성리학(性理學)으로 무장하고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며 출사한 사림파(士林派)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조정 관료들의 권력투쟁에 편승한 지방의 수령과 이속들도 파당을 이루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자 도탄에 빠진 수많은 양민들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거나 도적이 되었다. 조선 왕조의 기틀이 잡히면서 신분제에 기초한 봉건제도의 모순은 점점 더 심화되어 갔다.
연산군대 전라도 장성현(長成縣) 아곡리(亞谷里) 아치실 출신의 서얼(庶孼) 홍길동(洪吉童, 1440?~1510?)은 충청도 충주(忠州)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들을 습격하여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약탈한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의적으로 일컬어졌다. 백성들은 홍길동의 활빈당(活貧黨)이 조선 왕조와 탐관오리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를 고대했다. 평안도 우후(平安道虞候)를 지냈던 당상관(堂上官) 엄귀손(嚴貴孫)을 비롯해서 권농(勸農, 면장)과 이정(里正, 이통장),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도 홍길동의 활빈당과 내통하거나 가담한 사람들이 많았다. 홍길동 활빈당이 백성들 뿐만 아니라 벼슬아치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조선 왕조는 근본적으로 피지배층과 모순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
1500년(연산군 6) 10월 홍길동과 엄귀손이 체포되면서 활빈당의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실록에는 홍길동에 대한 처분 기록이 없다. 홍길동은 부하들과 함께 옥문을 부수고 탈출하여 추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산간벽지로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들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사림파(士林派)들을 숙청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사림파들이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솎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자, 훈구파들은 이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농단한다고 몰아세웠다. 중종(中宗)은 훈구파들의 주장을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사림파의 숙청을 목격하고 이를 비관한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송순은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 그는 사림파의 개혁 정책이 실패하자 이를 몹시 안타까와했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볕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사림파의 숙청과 개혁 정책의 실패로 인한 암담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다. 다투어 반짝이는 뭇 별은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훈구파, 가라앉는 산천의 기운은 국운, 또는 사람파의 몰락을 암시한다. 시인은 훈구파들 속에서 사림파의 몰락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이 시에 자신들을 헐뜯는 뜻이 있다고 훈구파들이 트집을 잡아 송순은 하마터면 큰 화를 당할 뻔했다고 한다.
사림파가 몰락하자 김안로(金安老, 1481년 ~ 1537년 10월 27일)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발탁되었다. 김안로는 자신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자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좌의정에 오른 그는 동궁(東宮,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권력을 장악해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켜 반대파들을 제거하였다. 김안로 일파에 의해 정광필(鄭光弼), 이언적(李彦迪), 나세찬(羅世纘), 이행(李荇), 최명창(崔命昌), 박소(朴紹) 등 많은 인물들이 사사(賜死)되거나 유배되었다.
1523년(중종17)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은 한양에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였던 아버지 육봉(六峰) 박우(朴祐)와 어머니 당악 김씨(棠岳金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박우는 대쪽 같은 선비였으며, 박순의 백부는 호남 사림의 원조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이었다. 박상은 대쪽 같은 성품으로 올바른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고 행동하는 선비였다. 그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으로 충주 목사를 지냈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 1491~1515)가 세자(世子, 인종)를 낳고 죽자 경빈 박씨(景嬪朴氏)는 아들 복성군 이미(福城君 李嵋)를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1527년(중종 22)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눈과 귀, 입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경빈 박씨가 혐의를 받아 작호(爵號)를 빼앗기고 서인(庶人)으로 되어 귀양갔다가 1533년 모자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왕실 외척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 1509∼1565)도 실각했다. 이 사건은 8년 뒤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가 사건을 조작한 진범으로 밝혀져 신원(伸寃)되었다.
1534년(중종 29) 2월 10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판관(判官) 송사련(宋祀連)과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鄭氏) 사이에 3남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 태어났다. 송사련은 정승 안당(安瑭)의 아버지 안돈후(安敦厚)가 비첩(婢妾)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 감정(甘丁)과 평민 출신 갑사(甲士) 송린(宋璘)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송사련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안당 가문의 재산에 속했다. 진외할머니가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송익필과 그의 동생 운곡거사(雲谷居士) 송한필(宋翰弼)도 미천한 신분이었다.
송사련은 안당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직에 올라 잡직인 관상감 판관(觀象監判官)을 지냈다. 하지만 송사련은 노비 출신의 생모가 낳은 서얼 신분이었으므로 아들들의 장래에 누가 될까봐 걱정하였다. 송익필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 7~8세에 붓을 잡았으며, 스승 없이 독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535년(중종 30) 6월 25일 한양의 순화방(順和坊,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조광조의 문인으로 현감(縣監)을 지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판관 사원(士元)의 딸 사이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태어났다. 그의 조부 성세순(成世純)은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등 언로(言路)의 요직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고, 부친 성수침은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천거되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여 유일(遺逸)로 명성이 높았다. 성혼은 함흥차사로 유명한 성석린(成石璘)의 종6대손이기도 했다.
1536년(중종 31) 윤12월 6일 정철은 한양의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청운동)에서 아버지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 정유침(鄭惟沈)과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철의 자(字)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칩암거사(蟄菴居士)이다. 같은 해 음력 12월 26일 강릉의 오죽헌(烏竹軒)에서 아버지 증좌찬성(贈左贊成) 이원수(李元秀)와 현모양처의 사표로 일컬어지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사이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났다.
정철의 외할아버지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안팽수(安彭壽)였다. 정철의 본관은 경북 영일(迎日)이다. 그의 또 다른 호 임정(臨汀)은 영일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병조 판서(兵曹判書), 증조할아버지는 김제 군수(金堤郡守)를 지냈다. 하지만 정철의 출생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벼슬이 없었다.
정철의 맏누이는 당시 중종(中宗, 1488~1544)의 세자였던 인종(仁宗, 1515~1545)의 후궁인 숙의(淑儀)로 입궐하고, 막내누이는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의 손자인 계림군(桂林君) 유(瑠, ?~1545)에게 출가했다. 월산대군은 성종(成宗, 1457~1495)의 형이었다. 정철의 누이들이 왕실과 혼인함으로써 그의 조부와 부친에게도 벼슬이 내려졌다. 맏누이로 인해 정철은 어려서부터 궁중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자연스레 왕자들과 어울려 친교를 쌓았다. 특히 훗날 명종(明宗)이 된 경원대군(慶源大君, 1534~1567)과는 소꿉동무로 정분을 쌓았다.
1537년 김안로는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尹氏, 1501~1565)의 폐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왕의 밀명을 받은 이조 참판(吏曹參判) 윤안인(尹安仁)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사사되었다. 당시 김안로는 허항(許沆), 채무택(菜無擇)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졌다.
2017.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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