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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3

林 山 2017. 7. 8. 11:22

조선조 서인의 뿌리 송익필, 성혼, 정철, 이이 경기도 고양 구봉(지금의 파주 심학산) 기슭에서 만나 의기투합하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조선 왕조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봉기한 임거정 농민군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다. 정철은 담양에서 유강항의 딸과 결혼하고 가사 '성산별곡'을 쓰다.


1552년(명종 7) 17살의 정철은 김윤제의 주선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김윤제는 정철을 자신의 외손녀사위로 삼고 싶어서 사위 유강항에게 그 뜻을 전했다. 하지만 유강항은 객지에서 온 정철이 사윗감으로 탐탁치 않았다. 유강항이 결혼에 난색을 표하자 김윤제는 사위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장인의 완강한 태도에 당황한 유강항은 결국 정철과 딸의 결혼을 승낙하고 말았다. 정철과 문화 유씨는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다. 


같은 해 임억령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와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이어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고경명은 사마시(司馬試)에 제1위로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다. 


1553년(명종 8) 박순은 정시문과(庭試文科)에서 장원한 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교리(校理),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등을 차례로 지냈다. 박순은 젊은 이이, 성혼과도 깊이 사귀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또 동향의 기대승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송강정


1554년(명종 9) 성혼은 백인걸의 문하에서 같은 고을의 이이와 처음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이이는 가문의 농장이 파주에 있었기 때문에 성혼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왕조정권과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유리걸식(流離乞食)하거나 도망하여 도적이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같은 해 이황의 문인 안서순(安瑞順)은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명종에게 올리기까지 했다. 정치를 잘 하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안순서(安順瑞)로도 불렸던 그는 성격이 맑고 깨끗하며 굽힘이 없기로 유명했다.


이이는 20살 되던 해인 1555년(명종 10)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승려가 되었던 일을 반성하고 다시 학문에 전념하여 관직에 나아갈 것을 결심했다. 같은 해 안서순은 막후실세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는 승려 보우(普雨)의 머리를 벨 것을 상소하였다. 문정왕후에 의해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는 조선의 억불정책 속에서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세우고, 도첩제도(度牒制度)와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키는 등 불교의 중흥을 위해 힘쓴 승려였다. 당시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전국의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1556년(명종 11) 21살의 정철은 동갑내기이자 같은 고을 출신의 이이와 처음 만나 평생지기가 되었다. 이이가 송익필과 친교를 맺게 된 데에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역할이 컸다. 이지번의 아들이 선조대 영의정을 지낸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였다.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이이의 집안은 원래 대대로 친하게 지냈던 까닭에 이이는 경기도 고양의 구봉(龜峯, 파주 심학산, 193m) 부근 산남리(지금의 파주시 산남동)에 살고 있던 이지번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이이는 이때 구봉에 살고 있던 송익필과도 지기가 되었다. 정철과 성혼은 이이를 통해서 송익필과 인연을 맺었다. 이지함은 이이와 정철, 성혼, 송익필을 '우리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철과 이이, 성혼, 송익필 네 사람은 이후 학문적, 정치적 평생 동지가 되었다. 조헌(趙憲)은 이지함을 스승의 예로 모셨다.   


같은 해 안서순은 다시 '간신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유관 등 세 명을 억울하게 죽이고, 송인수와 임형수(任亨秀)를 죽인 것 역시 무죄하니 하늘이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임금이 간신의 말에 따라 사람을 잘못 죽이니 근래에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상소하였다. 이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윤원형이 안서순을 김인후와 연좌시켜 잡아들였으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폈다. 결국 안서순은 참형에 처해지고 집은 적몰되었다. 이른바 안서순상소사건이다. 안서순의 배후로 지목된 김인후는 1543년 중종이 참석한 경연에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임을 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을 신원(伸冤)해 줄 것을 최초로 개진한 문신이었다.  


1557년(명종 12) 9월 이이는 성주 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소쇄원의 주인이자 조광조의 문인 양산보가 세상을 떠났다. 1519년 겨울 기묘사화 때 사림파의 원조 조광조가 '주초위왕(走肖爲王)'을 날조한 훈구파의 모함을 받고 전라도 능주(綾州, 지금의 화순)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양산보는 그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무등산 북쪽 기슭에 소쇄원을 짓고 은둔한 채 학문과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 양산보는 죽으면서 '소쇄원을 절대로 남에게 팔지도 말고,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며,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송순은 '외제소쇄처사만(外弟瀟灑處士挽)', 양응정(楊應鼎)은 '만종형소쇄처사산보(輓宗兄瀟灑處士山甫)', 기대승은 '만모인(挽某人)'을 지어 양산보의 죽음을 슬퍼했다.


외제소쇄처사만(外弟瀟灑處士挽)-외제 소쇄처사를 애도하다(송순)


珍重林泉鎖舊雲(진중림천쇄구운) 귀하고 소중했던 곳 옛 구름에 잠기고

路迷何處覓徵君(로미하처멱징군) 길도 잃었으니 어디서 자넬 찾을까나

謝家庭畔蘭方郁(사가정반란방욱) 저 사가의 뜨락엔 난초 한창 무성하고

曾氏堂前日欲曛(증씨당전일욕훈) 증씨의 집 앞은 해 지려 어둑어둑하네

穿石巖溪空自咽(천석암계공자인) 바위 구멍 물소리는 괜히 홀로 목메고

引墻花木爲誰芬(인장화목위수분) 담장곁 꽃나무 누굴 위해 향기 내는가

故園永與新阡隔(고원영여신천격) 옛정원은 새 길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老樹啼禽不忍聞(노수제금불인문) 고목에서 우는 새소리 차마 못 듣겠네


이 시에는 '丁巳冬(정사년 겨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양산보의 어머니는 송순의 고모였고, 나이는 송순이 양산보보다 열 살 많았다. '사가(謝家)'는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시인 사영운(謝靈運), '증씨(曾氏)'는 효(孝)를 지극히 중시한 현인(賢人) 증자(曾子)를 가리킨다.


만종형소쇄처사산보(輓宗兄瀟灑處士山甫)-종형 소쇄처사 산보를 애도하다(양응정)


天人湧出海中山(천인용출해중산) 바다 가운데 산에서 천인 태어났으니

符彩雲孫尙被斑(부채운손상피반) 풍채도 좋은 후손들 아롱진 옷 입었네

誠篤白華傾慕悅(성독백화경모열) 효심 돈독한 자손 추모의 정 기울이고

識高前輩斷追攀(식고전배단추반) 학식 높은 선배들도 따라 높여 받드네

遺賢藪澤民何福(유현수택민하복) 어진 이 덕 백성에겐 얼마나 복 될까만

 値歲龍蛇壽亦慳(치세용사수역간) 용과 뱀의 해 만나 수명 또한 짧았을 터

 漠漠九原應結痛(막막구원응결통) 아득한 구천에서도 응당 통곡할 것이니

  北風萱草日摧顔(북풍훤초일최안) 삭풍에 원추리풀도 나날이 고개 꺾이네 


양산보의 부친 창암(蒼巖) 양사원(梁泗源)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재종형(再從兄, 6촌형)이고,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은 양팽손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양산보는 양응정의 삼종형(三從兄, 8촌형)이 된다. '운손(雲孫)'은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손이라는 뜻으로, 잉손(仍孫, 7대손)의 아들인 팔대손(八代孫)을 이르는 말이다. '구원(九原)'은 저승이다. 


만모인(挽某人)-아무개를 애도하다(기대승)


 瀟灑園林僻(소쇄원림벽) 소쇄원 원림은 외지고 한적한데 

淸眞志槪悠(정진지개유) 순결한 의지와 기개는 오래였네

裁花開煖蘂(재화개난예) 꽃을 심어 따뜻한 꽃잎이 열리고

引水激淸流(인수격청류) 물을 끌어오니 맑은 물 솟구쳤네

靜與貪非厭(정여탐비염) 고요하게 즐김을 싫어 아니하고

閒仍老不憂(한잉노불우) 한가로이 늙음 걱정하지 않았네

那知遽觀化(나지거관화) 어찌 갑자기 떠나실 줄 알았으랴

怊悵白雲浮(초창백운부) 슬프도다 흰 구름만 떠돌고 있네


이 시는 '만모인 5언 4운 5수(挽某人五言四韻五首)' 중 제1수다. 양산보라는 이름을 적지 않고, '모인(某人)'이라고 쓴 것은 세상에 드러나기를 싫어했던 고인의 뜻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양산보는 은일시인 도연명(陶淵明)을 흠모하여 평소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독산해경(讀山海經)'을 즐겨 읽었다. 자연에 숨어 은자의 삶을 살다 간 양산보에게 이름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었을까? 기대승은 그런 양산보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1558년(명종 13) 이이는 처가인 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 안동(安東)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에 들러 당시 58세였던 이황을 방문하고 이틀 동안 학문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았다. 이후 이이는 이황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황의 철학과 사상을 파악했다. 이 시기 '천도책(天道策)'이나 '성책(誠策)'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이는 이기론(理氣論)에서는 기의 측면에서 하나의 존재를 체(體), 용(用)으로 보는 기일분수(氣一分殊), 학문수양론에서는 주희(朱熹)의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에서 발전된 거경궁리(居敬窮理)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이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혼은 이이와 이황의 이론을 절충하는 입장을 취했다. 


구봉송선생유허기념비


같은 해 10대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20대에 이미 문장력을 인정받은 송익필은 25세 때 아우 송한필과 함께 소과 초시(小科初試)에 합격하였다. 이이는 한성시(漢城試)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송익필은 문관(文官)을 선발하는 대과(大科)에도 합격했으나 사관(史官) 이해수(李海壽) 등이 상소를 올려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니 그 상직(賞職)을 없애야 한다.'며 '그 자식들은 역시 얼손(孼孫)들이니 법을 어기고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고 규탄하면서 과거 응시가 정지되고 벼슬길이 막혀버렸다. 송사련의 무고에 대한 비난과 신분 때문에 세간의 비난을 받았던 송익필은 결국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경기도 교하군(交河郡, 지금의 파주시 금촌읍, 교하읍, 탄현면 일대) 구봉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호 구봉(龜峰)은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파주 심학산(구봉)


송익필은 벼슬길이 막히자 정철, 이이, 성혼 등과 사귀면서 성리학을 논했으며, 경학과 예학에도 뛰어나 서인의 이론가가 되었다. 특히 그는 문장에 능해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등과 함께 선조대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는 또 구봉 기슭에 서당을 짓고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이이의 수제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은 송익필의 예학을 이어받아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고, 그의 학문은 후대의 송시열(宋時烈), 윤선거(尹宣擧), 송준길(宋浚吉) 등에게 계승되었다. 윤두수(尹斗壽)와 그의 동생 윤근수(尹根壽)도 송익필의 절친이 되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 조헌은 송익필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 무렵 여러 해 계속된 흉년에다가 척족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이 권력을 잡고,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수탈이 횡행하자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 홍길동 활빈당의 정신을 계승한 혁명가가 나타났으니 바로 경기도 양주의 백정 출신 임거정(林巨正, 林居叱正, 임꺽정)이었다. 임거정은 신분제에 기초한 봉건체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지배층의 학정과 수탈로 도탄에 빠져 유리걸식하거나 도적이 된 농민들과 불평등한 사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이끌고 조선 왕조정권에 저항했다.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이 거지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참상은 정철의 '도봉개자(道逢丐子)'란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도봉개자(道逢丐子)-길에서 거지를 만나다(정철)


夫篴婦歌兒在背(부적부가아재배) 지아빈 피리불고 애업은 아낸 노래부르며

叩人門戶被人嗔(고인문호피인진) 남의 집 문 두드리다 바가지로 욕을 먹네

 昔有問牛今不問(석유문우금불문) 옛적 문우고사 있어 지금 물어보진 않지만

 不堪行路一沾巾(불감행로일첨건) 지나는 길에 눈물 적시는 건 차마 못참겠네


'문우(問牛)'는 '병길문우(丙吉問牛), 병길우천(丙吉牛喘), 문우천(問牛喘)'이라고도 한다. 벼슬아치로서 거지가 된 사람들의 사연을 묻기가 죄스럽고 부끄럽다는 뜻이다.


병길문우(丙吉問牛)는 '한서(漢書)' 위상병길전(魏相丙吉傳)에 나오는 고사다. 전한(前漢) 병길의 자는 소경(少卿)이니, 노(魯)나라 사람이다. 선제(宣帝) 때 승상(丞相)이 되었다. 


吉又嘗出,逢清道群鬥者,死傷橫道,吉過之不問,掾史獨怪之。吉前行,逢人逐牛,牛喘吐舌,吉止駐,使騎吏問:「逐牛行幾里矣?」掾史獨謂丞相前後失問,或以譏吉,吉曰:「民斗相殺傷,長安令、京兆尹職所當禁備逐捕,歲竟丞相課其殿最,奏行賞罰而已。宰相不親小事,非所當於道路問也。方春少陽用事,未可大熱,恐牛近行,用暑故喘,此時氣失節,恐有所傷害也。三公典調和陰陽,職當憂,是以問之。」掾史乃服,以吉知大體。(병길이 일찌기 길에 나갔더니 청소하는 무리로서 싸우던 자가 상해서 길에 널부러져 있는데, 병길은 그냥 지나치고 묻지도 않았다. 연리가 혼자 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였다. 병길이 다시 앞에 가다가, 사람을 만났는데 소를 몰고 왔다. 그런데 그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내밀고 헐떡였다. 병길은 수레를 멈추고, 말 부리는 관리로 하여금 묻기를, "소를 끌고 몇 리를 왔느냐?"라고 하자, 연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승상이 물어보는 것이 앞뒤를 잃었다고 하며, 혹 병길을 나무라기도 했다. 이에 병길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싸우다가 서로 죽이거나 다치는 것은, 장안령이나 경조윤의 책무로서 마땅히 금하여 대비하고 쫓고 체포할 것이다. 승상의 책무는 그 해가 다 가면 관리들의 성적을 조사하고, 그 위에 아뢰어 상을 주고 벌을 줄 뿐이니, 재상은 사소한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인즉, 마땅히 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봄철이어서 소양의 기가 발동하는 계절이다. 아직 무덥지도 않고, 소는 그다지 먼 곳에서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더워서 헐떡이고 있으니, 그것은 시후가 계절을 벗어난 일로서, 사람이 상하고 해로운 것이 있을까 두려운 것이다. 삼공은 음양을 조화시키는 일을 맡았으니, 직책에 마땅히 근심해야 하느니라. 그런 까닭에 물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리들은 병길이 대체를 아는 것에 탄복하였다.)


임거정 농민군(農民軍)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 구월산을 근거지로 이 일대의 아전들과 내통하면서 기호, 해서 지방의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지방 관리들과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세력이 커진 이들은 조정에서 염탐을 위해서 보낸 선전관(宣傳官)을 잡아 죽이고, 임거정 체포를 위해 파견된 개성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 부대를 전멸시키기도 했다.  


1560년(명종 13) 1월 16일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세자 시절 인종의 스승이자 정철의 스승이기도 했던 하서 김인후가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東國十八賢) 중 한 사람이다. 정철은 스승을 잃은 슬픔에 '회하서(懷河西)'를 지어 읊었다. 


회하서(懷河西) - 하서를 그리며(정철)


東方無出處(동방무출처) 동방엔 그 출처가 없더니

獨有湛齋翁(독유담재옹) 오직 담재옹 한 분 있었네

 年年七月日(연년칠월일) 매년 7월 초하루 돌아오면

 痛哭萬山中(통곡만산중) 만산에 통곡소리 가득했네


스승의 뛰어난 인품과 학문을 기리면서, 인종을 그리워하는 김인후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출처(出處)'는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말한다. 김인후는 당대 선비들로부터 출처의 모범으로 일컬어졌다. '담재(湛齋)'는 김인후의 별호다. '칠월일(七月日)'은 7월 초하루, 인종의 기일(忌日)이다. 김인후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술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 취한 후에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같은 해 25세의 이이는 별시 초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을 했지만,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했다. 정철은 창평(昌平) 지곡리(芝谷里) 성산(星山, 별뫼)에 머물면서 스승 임억령을 위해 송순의 '면앙정가(免仰亭歌)' 형식을 차용하고, 도연명(陶淵明)의'도화원시(桃花源詩)'에서 착안하여 가사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성산(별뫼)은 지금의 전남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 지곡리에 있다. 성산은 무등산의 북산에서 증암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으로 뻗어올라간 능선에 솟아 있다.  


담양 증암천에서 바라본 성산


성산별곡(星山別曲) - 정철


엇던 디날 손이 星山(성산)의 머믈며셔 棲霞堂(서하당) 息影亭(식영정) 主人(주인)아 내 말 듯소. 人生(인생) 世間(세간)의 됴흔 일 하건마ᄂᆞᆫ 엇디ᄒᆞᆫ 江山(강산)을 가디록 나이 너겨 寂寞(적막) 山中(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ᄂᆞᆫ고. 松根(송근)을 다시 쓸고 竹床(죽상)의 자리 보아 져근덧 올라안자 덧던고 다시 보니 天邊(천변)의 ᄯᅵᆺᄂᆞᆫ 구름 瑞石(서석)을 집을 사마 나ᄂᆞᆫ ᄃᆞᆺ 드ᄂᆞᆫ 양이 主人(주인)과 엇더ᄒᆞᆫ고. 滄溪(창계) 흰 물결이 亭子(정자) 알ᄑᆡ 둘러시니 天孫雲錦(천손운금)을 뉘라셔 버혀 내여 닛ᄂᆞᆫ ᄃᆞᆺ 펴디ᄂᆞᆫ ᄃᆞᆺ 헌ᄉᆞ토 헌ᄉᆞ할샤. 山中(산중)의 冊曆(책력) 업서 四時(사시)를 모ᄅᆞ더니 ᄂᆞᆫ 아래 헤틴 景(경)이 쳘쳘이 절로 나니 듯거니 보거니 일마다 仙間(선간)이라.(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만은,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梅窓(매창) 아젹 벼ᄐᆡ 香氣(향기)예 잠을 ᄭᆡ니 山翁(산옹)의 ᄒᆡ욜 일이 곳 업도 아니ᄒᆞ다. 울 밋 陽地(양지) 편의 외씨ᄅᆞᆯ ᄲᅵ허 두고 ᄆᆡ거니 도도거니 빗김의 달화 내니 靑文故事(청문고사)ᄅᆞᆯ ᄇᆡ야 신고 竹杖(죽장)을 흣더디니 桃花(도화) 픤 시내 길히 芳草洲(방초주)의 니어셰라. 닷봇근 明鏡(명경) 中(중) 절로 그린 石屛風(석병풍) 그림재ᄅᆞᆯ 버들 사마 西河(서하)로 ᄒᆞᆷᄭᅴ 가니 桃源(도원)은 어드매오 武陵(무릉)이 여긔로다.(매창 아침볕의 향기에 잠을 깨니, 산늙은이의 할 일이 아주 없지도 아니하다. 울타리 밑 양지 편에 오이씨를 뿌려 두고,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면서 비 온 김에 가꾸어 내니, 짚신을 죄어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흩어 짚으니, 도화 핀 시냇길이 방초주에 이어졌구나. 잘 닦은 거울 속에 저절로 그린 돌병풍, 그림자를 벗삼아 서하로 함께 가니, 무릉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


南風(남풍)이 건듯 부러 綠陰(녹음)을 헤텨 내니 節(절) 아ᄂᆞᆫ 괴ᄭᅩ리ᄂᆞᆫ 어드러셔 오돗던고. 羲皇(희황) 벼개 우ᄒᆡ 풋ᄌᆞᆷ을 얼픗 ᄭᆡ니 空中(공중) 저즌 欄干(난간) 믈 우ᄒᆡ ᄯᅥ 잇고야. 麻衣(마의)ᄅᆞᆯ 니믜 ᄎᆞ고 葛巾(갈건)을 기우 쓰고 구브락 비기락 보ᄂᆞᆫ 거시 고기로다. ᄒᆞᄅᆞ밤 업시셔 萬山(만산)이 향긔로다. 廉溪(염계)ᄅᆞᆯ 마조보아 太極(태극)을 믓ᄌᆞᆸᄂᆞᆫ ᄃᆞᆺ 太乙眞人(태을진인)이 玉字(옥자)ᄅᆞᆯ 헤혓ᄂᆞᆫ ᄃᆞᆺ 노자암 건너보며 紫微灘(자미탄) 겨ᄐᆡ 두고 長松(상송)을 遮日(차일)사마 石逕(석경)의 안자ᄒᆞ니 人間(인간) 六月(유월)이 여긔ᄂᆞᆫ 三秋(삼추)로다. 淸江(청강) ᄯᅵᆺᄂᆞᆫ 올히 白沙(백사)의 올마 안자 白鷗(백구)ᄅᆞᆯ 벗을 삼고 ᄌᆞᆷ ᄭᅵᆯ 줄 모ᄅᆞ나니 無心(무심)코 閑暇(한가)ᄒᆞ미 主人(주인)과 엇더ᄒᆞ니.(남풍이 문득 불어 녹음을 헤쳐 내니, 철을 아는 꾀꼬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희황 베개 위에 선잠을 얼핏 깨니, 공중의 젖은 난간이 물 위에 떠 있구나. 삼베옷을 여며 입고 갈건을 비껴 쓰고, 허리를 구부리거나 기대면서 보는 것이 고기로다. 하룻밤 비 온 뒤에 붉은 연꽃과 흰 연꽃이 섞어 피니, 바람기가 없어서 모든 산이 향기로다. 염계를 마주하여 태극성을 묻는 듯, 노자암을 건너보며 자미탄을 곁에 두고, 큰 소나무를 차일삼아 돌길에 앉으니, 인간 세상의 유월이 여기는 가을이로구나. 청강에 떠 있는 오리가 흰 모래에 옮겨 앉아, 흰 갈매기를 벗삼고 잠깰 줄을 모르나니, 무심하고 한가함이 주인과 비교하여 어떤가.)


梧桐(오동) 서리ᄃᆞᆯ이 四更(사경)의 도다 오니 千巖萬壑(천암만학)이 나진ᄃᆞᆯ 그러ᄒᆞᆯ가. 湖洲(호주) 水晶宮(수정궁)을 뉘라셔 옴겨 온고. 銀河(은하)ᄅᆞᆯ ᄯᅴ여 건너 廣寒殿(광한전)의 올랏ᄂᆞᆫ ᄃᆞᆺ ᄶᅡᆨ 마ᄌᆞᆫ 늘근 솔란 釣臺(조대)예 셰여 두고 그 아래 ᄇᆞᄅᆞᆯ ᄯᅴ워 갈 대로 더뎌 두니 紅蓼花(홍료화) 白蘋洲(백빈주) 어ᄂᆞ ᄉᆞ이 디나관ᄃᆡ 環碧堂(환벽당) 용(龍)의 소히 뱃머리예 다하셰라.  청강(淸江) 녹초변(綠草邊)의 쇼 머기난 아해들이 석양의 어위 계워 단적(短笛)을 빗기 부니, 믈 아래 잠긴 龍(용)이 ᄌᆞᆷ ᄭᆡ야 니러날 ᄃᆞᆺ ᄂᆡᄭᅴ예 나온 鶴(학)이 제 기ᄉᆞᆯ 더뎌 두고 半空(반공)의 소소 ᄯᅳᆯ ᄃᆞᆺ 蘇仙(소선) 赤壁(적벽)은 秋七月(추칠월)이 됴타 호ᄃᆡ 八月(팔월) 十五夜(십오야)ᄅᆞᆯ 모다 엇디 과ᄒᆞᄂᆞᆫ고. 纖雲(섬운)이 四捲(사권)ᄒᆞ고 믈결이 채 잔 적의 하ᄂᆞᆯ의 도단 ᄃᆞᆯ이 솔 우ᄒᆡ 걸려거ᄃᆞᆫ 잡다가 ᄲᅡ딘 줄이 謫仙(적선)이 헌ᄉᆞᄉᆞᆯ샤.(오동나무 사이로 가을달이 사경에 돋아오니, 천암만학이 낮보다도 더 아름답구나. 호주의 수정궁을 누가 옮겨 왔는가. 은하수를 뛰어 건너 광한전에 올라 있는 듯. 한 쌍의 늙은 소나무를 조대에 세워 놓고, 그 아래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니, 홍료화 백빈주를 어느 사이에 지났길래. 환벽당 용의 못이 뱃머리에 닿았구나. 푸른 풀이 우거진 강변에서 소 먹이는 아이들이, 석양의 흥을 못 이겨 피리를 비껴 부니, 물 아래 잠긴 용이 잠을 깨어 일어날 듯, 연기 기운에 나온 학이 제 집을 버려 두고 반공에 솟아 뜰 듯. 소동파의 적벽부에는 가을 칠월이 좋다 하였으되, 팔월 보름밤을 모두 어찌 칭찬하는가. 잔구름이 흩어지고 물결도 잔잔한 때에, 하늘에 돋은 달이 소나무 위에 걸렸으니,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졌다는 이태백의 일이 야단스럽다.)


空山(공산)의 싸힌 닙흘 朔風(삭풍)이 거두 부러 ᄯᅦ구름 거ᄂᆞ리고 ᄂᆞᆫ조차 모라오니 天公(천공)이 호ᄉᆞ로와 玉(옥)으로 고ᄌᆞᆯ 지어 萬樹千林(만수천림)을 ᄭᅮ며곰 낼셰이고. 압 여흘 ᄀᆞ리 어러 獨木橋(독목교) 빗겻ᄂᆞᆫᄃᆡ 막대 멘 늘근 즁이 아ᄂᆞ 뎔로 간닷 말고. 山翁(산옹)의 이 富貴(부귀)ᄅᆞᆯ ᄂᆞᆷᄃᆞ려 헌ᄉᆞ 마오. 瓊瑤屈(경요굴) 隱世界(은세계)ᄅᆞᆯ ᄎᆞᄌᆞ리 이실셰라.(공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 오니,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물 가리워 얼고 외나무 다리 걸려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경요굴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山中(산중)의 벗이 업서 漢紀(한기)ᄅᆞᆯ ᄲᅡ하 두고 萬古(만고) 人物(인물)을 거ᄉᆞ리 헤여ᄒᆞ니 聖賢(성현)도 만커니와 豪傑(호걸)도 하도 할샤. 하ᄂᆞᆯ 삼기실 제 곳 無心(무심)ᄒᆞᆯ가마ᄂᆞᆫ 엇다ᄒᆞᆫ 時運(시운)이 일락배락 ᄒᆞ얏ᄂᆞᆫ고. 모ᄅᆞᆯ 일도 하거니와 애ᄃᆞᆯ옴도 그지업다. 箕山(기산)의 늘근 고불 귀ᄂᆞᆫ 엇디 싯돗던고. 박소ᄅᆡ 핀계ᄒᆞ고 조장이 ᄀᆞ장 놉다. 人心(인심)이 ᄂᆞᆺ ᄀᆞᆺᄐᆞ야 보도록 새롭거ᄂᆞᆯ 世事(세사)ᄂᆞᆫ 구롬이라 머흐도 머흘시고. 엇그제 비ᄌᆞᆫ 술이 어도록 니건ᄂᆞ니 잡거니 밀거니 슬ᄏᆞ장 거후로니 ᄆᆞᄋᆞᆷ의 ᄆᆞ친 시ᄅᆞᆷ 져그나 ᄒᆞ리ᄂᆞ다. 거믄고 시욹 언저 風入松(풍입송) 이야고야. 손인동 主人(주인)인동 다 니져 ᄇᆞ려셔라. 長空(장공)의 ᄯᅵᆺ는 鶴(학)이 이 골의 眞仙(진선)이라. 瑤臺(요대) 月下(월하)의 ᄒᆡᆼ혀 아니 만나신가. 손이셔 主人(주인)ᄃᆞ려 닐오ᄃᆡ 그ᄃᆡ 귄가 ᄒᆞ노라.(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술잔을 잡거니 권하거니 실컷 기울이니, 마음에 맺힌 시름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구나, 거문고 줄을 얹어 풍입송을 타자꾸나. 손님인지 주인인지 다 잊어버렸도다. 높고 먼 공중에 떠 있는 학이 이골의 진선이라. 이전에 달 아래서 혹시 만나지 아니하였는가? 손님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곧 진선인가 하노라.)


'성산별곡'은 정철이 11살 연상의 처외재당숙 김성원을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산늙은이', '신선', '진선' 등의 가사와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면 김성원보다는 스승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서하당은 임억령의 측실 양씨 부인을 위해서 지은 건물임이 최근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 임억령은 자신의 딸이 김성원에게 출가하자 서하당을 사위 부부에게 물려 주었다. 김성원은 증암천과 그 건너편 환벽당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성산의 장원봉 남쪽 기슭에 장인을 위해 식영정을 세웠다. 임억령은 풍류를 즐겨 식영정과 서하당에는 많은 시인, 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서하당과 식영정 주변의 풍취와 임억령의 풍류를 예찬하였다.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를 본받았지만 계절에 따른 새로운 경치 묘사와 자연에 대한 흥취의 표현에서는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산별곡'은 총 84절(행), 168구이며 3·4조의 음수율이 주조를 이룬다. 4·4조, 3·3조, 2·4조 혹은 2·3조, 4·3조 등도 더러 있다. 구성은 서사(詞), 춘사(春詞), 하사(夏詞), 추사(秋詞), 동사(冬詞), 결사(結詞)로 되어 있다. 서사는 식영정에 머물며 세상에 나가지 않는 임억령의 풍류와 서하당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읊었다. 춘사는 성산의 봄 풍경(春景)과 임억령의 삶의 모습, 하사는 성산의 시원하고 한가한 여름 풍경(夏景), 추사는 성산의 가을 달밤 풍경(秋景), 동사는 성산의 눈 내린 겨울 풍경(冬景)과 성산에 은거하는 노인의 부귀를 노래하고 있다. 결사는 전원 생활의 멋과 풍류를 읊고 있다. 특히 결사는 산중에 벗이 없어 독서를 통하여 고금의 성현과 호걸들을 생각하고 그 흥망과 지조를 느끼며, 뜬구름 같은 세상에 술 마시고 거문고나 타는 신선 같은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주제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성산의 경치와 임억령의 풍류 예찬이다.  


'성산별곡'은 본래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정철 등 식영정 4선이 같은 제목과 압운으로 지은 한시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20수를 부연, 설명하고 탈태(奪胎)시켜 만든 것이다. 탈태(奪胎)는 고시(古詩)의 뜻을 본떠서 원시(原詩)와 다소 다른 뜻을 가지게 짓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성산별곡'은 정철 자신의 순수한 창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자어구(漢字語句)와 전고(典故)가 많아 한시 분위기가 짙은 점도 특징이다. '성산별곡'은 '송강가사(松江歌辭)',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등에 수록되어 있다.


같은 해 8월 임거정 농민군은 한양에까지 출몰했다. 10월 금교역(金郊驛)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이 봉쇄당하자 임거정 농민군은 황해도 봉산(鳳山)을 근거지로 하여 평안도의 성천(成川), 양덕(陽德), 맹산(孟山)과 강원도 이천(伊川) 등지를 넘나들며 활동하였다. 12월 한양의 숭례문 밖에서 임거정의 아내와 형 가도치(加都致), 참모 서림(徐林) 등이 잡히면서 임거정 농민군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 평안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였다. 또, 군역을 피한 자들이 도둑 무리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색을 금했다.


1561년(명종 16) 26살의 정철은 진사시에서 일등 5위로 급제했다. 이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를 제정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시호는 신하의 공을 따져 임금이 내리는 이름이기 때문에 명종은 자신의 즉위에 공이 컸던 임백령에게 '충(忠)'자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박순은 훈구파의 편에 서서 사림파을 공격한 임백령의 잘못을 지적하여 이를 반대하고 시호를 '소이(昭夷)'로 폄하시켜 관철시켰다. 박순은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 송정리로 내려갔다. 


같은 해 성혼은 모친상을 당했다. 성혼의 외조부는 적손이 없었는데, 제사를 이어오던 서자마저 죽어 후손이 없게 되자 성혼은 별도로 묘를 만들고 제사를 받들었다.   


1562년(명종 17) 정월 농민군 사령관 임거정은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과 군관 곽순수(郭舜壽), 홍언성(洪彦誠)에 의해 황해도 서흥(瑞興)에서 체포되었다. 임거정 농민군은 집압될 때까지 3년 동안 5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관군을 괴롭혔다. 임거정은 체포된 지 15일만에 처형됐다. 


명종조 실록을 수찬하던 사관(史官)은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임거정 농민군에 가담한 백성들은 자신들을 도둑으로 내몬 왕정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해 정철은 27살의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명종은 소꿉동무의 급제를 축하하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겸 지제교(知製敎)에 임명한 뒤 곧 정5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벼슬길은 처음부터 순탄한 듯했다. 그때 명종의 4촌 형 경양군(景陽君)이 처가의 재산을 탈취할 목적으로 서얼 처남을 꾀어 죽인 뒤 강물에 던져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경양군은 명종의 종형이었다. 종실이 관련된 사건이기에 조용히 넘기고 싶었던 명종은 살인사건을 관대하게 처리해 달라고 정철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정철은 국법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경양군 부자를 탄핵하여 사형에 처했다. 이후 명종의 눈밖에 난 정철은 한동안 요직에서 소외되는 듯했다.  


박순은 1년 전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나갔다가 1563년 내직으로 옮겨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세자시강원 보덕(世子侍講院輔德),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정3품 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차례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