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구례군(求禮郡) 산동면(山東面) 좌사리(佐沙里) 상관(上官)마을에 있는 방호정(方壺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2호)을 찾았다. 방호정은 3월 18일부터 산수유마을에서 열리는 산수유축제를 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방호정 동산
'방호동천(方壺洞天)' 암각서
방호정
'방호정(方壺亭)' 편액
방호정은 좌사리 상관마을의 동산 정상부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다. 대지는 지리산(智異山) 만복대(萬福臺, 1,433m) 아래 반학봉의 낙맥인 백장석대의 거대한 암반 위에 축대를 쌓고 조성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방호정의 가운데에는 방을 들이고, 좌우와 전면에는 누마루를 깔았다. 뒷면은 심벽(心壁)과 판장벽(板牆壁)을 두었고, 전면과 좌우 측면은 모두 4분합 들어열개문으로하여 걸쇠로 서까래에 걸어 매달았다. 뒷면을 제외한 3면에는 정교하게 조각한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다. '方壺亭(방호정)' 편액 글씨는 서예가 금파(錦坡) 고병덕(高柄德)의 작품이다.
방호(方壺)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발해(渤海)의 동쪽 신선(神仙)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이다. 삼신산(三神山)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말한다. 방장산이 곧 방호산이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두류산(頭流山), 남악산(南岳山), 방호산(方壺山), 방장산, 삼신산 등으로 불려 왔다. 방호정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 하죽(下竹)마을에도 조선 영조 때 운조루(雲鳥樓, 중요민속자료 제8호)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1726~1797)의 후손 유형업(柳瑩業, 1886~1944)이 1935년에 세운 동명의 정자가 있다.
방호정 바로 아래 바위에는 '방호동천(方壺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천(洞天)은 도교에서 온 말이다. 산 좋고 물 좋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을 동천이라고 한다.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방호정으로 오르는 길 초입 언덕에는 방호정시사회연혁비(方壺亭詩社會沿革碑)와 방호정시사원건립비(方壺亭詩社員建立碑), 방호정시사원방명비(方壺亭詩社員芳名碑)가 세워져 있다.
방호시사원 명단을 새긴 암각서
방호시사원 명단을 새긴 암각서
방호시사원 명단을 새긴 암각서
방호정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인 1930년 이 지역 유림(儒林)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방호정 건립과 함께 결성된 방호정 시사원(詩社員)들은 식민지 백성의 울분을 시로 달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1936년에는 정자의 왼쪽 암벽에 시사원 54명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방호정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두 번의 시회(詩會)를 열어 옛 선비들이 자연을 벗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전통을 이어 왔다.
방호정 동산에서 바라본 대평리와 위안리
방호정 동산에서 바라본 좌사리 상관 마을
방호정 동산은 전망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북동쪽으로 대평리와 위안리, 남쪽으로 좌사리, 관산리 일대는 물론 지리산(智異山) 종석대(鐘石臺, 1,361m)에서 시암재(1,000m), 간미봉(艮美峰, 798m), 지초봉(芝草峰, 596m, 할미봉)을 지나 까치절산(295.3m, 까치산)에 이르는 간미능선과 종석대에서 성삼재, 당동고개, 작은고리봉(1,248m), 묘봉치(1,108m)를 지나 만복대에 이르는 백두대간(白頭大幹), 만복대에서 다름재, 염재봉(1,050m), 영제봉(1,048m), 견두산(犬頭山, 775m), 천마산(天馬山, 658.2m)을 지나 깃대봉(691m)에 이르는 견두지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봄 산수유꽃이 활짝 피었을 때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마치 노란색 물감을 온 천지에 부어 놓은 듯하다. 구례 산수유마을의 효시는 산동면 산악지대의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서 산수유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산수유나무가 이제는 봄의 전령사로서 해마다 전국의 많은 상춘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방 안에 걸려 있는 '방호정(方壺亭)' 편액
방호정 연등천장(緣背天障)
'방호정기' 편액
방호정의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연등천장(緣背天障)으로 되어 있다. 벽에는 '方壺亭(방호정)' 편액과 '방호정기(方壺亭記)' 편액이 걸려 있다. '방호정' 편액은 낙관이 떨어져 나가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다.
'방호정기'는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 1874~1957)이 쓴 것이다. 최병심은 전라북도 전주(全州)에서 태어났으며, 이병우(李炳宇)와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04년에 명릉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17년 일제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는 전주에 잠업소(蠶業所)를 설치하기 위해 토지를 매도하라고 최병심에게 요구했다. 일제에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수용령을 발동하여 최병심의 가옥을 모두 소각하였다. 최병심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단식투쟁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최병심은 또 조일전쟁 때 조선을 도와준 중국 명(明)나라 의종(毅宗)과 신종(神宗)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일제에 저항하다가 일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구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민족자존을 역설한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최병심은 일제 조선총독부 치하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한편 태극(太極), 심성(心性), 이기(理氣), 의리론(義理論)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성(性)을 높여 도(道)를 스승으로 삼고 성경(誠敬)으로 심(心)을 조절하면 성심이 일치되어 사람이 곧 천리(天理)에 부합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성존심비(性尊心卑)-성품을 높이고 마음을 낮춘다'는 것과 '성사심제(性師心弟)-성품이 스승이라면 마음은 제자다'라는 심성론(心性論)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최병심의 저서로는 '흠재문집(欽齋文集)' 30권 14책이 있다. 그의 사후 전주의 옥동사(玉洞祠)에 배향되었다.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
'제방호정' 편액과 '방호정건축출자방명록' 편액
정자의 외벽과 창방(昌枋)에는 36개의 '제방호정(題方壺亭)' 한시 편액과 '방호정건축출자방명록(方壺亭建築出資芳名錄)'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의 한시들은 특이하게도 제목이 천편일률적으로 '제방호정'이고, 7언율시 한 수로 되어 있다. '제방호정'은 방호정에 대한 제영(題詠)이다. 제영은 제목을 붙여 시를 읊는 시가를 말한다. 대개 그 지역의 풍광이나 정자, 재실, 사찰 등을 대상으로 읊은 시가를 제영이라고 한다.
편액에는 석정(石汀) 김기현(金沂炫), 국포(菊圃) 이응우(李應宇), 지재(智齋) 홍성욱(洪性沃), 정재(正齋) 유석영(柳錫永), 우산(友山) 윤영혁(尹榮赫), 청원(靑原) 유갑열(柳甲烈), 우초(友樵) 홍성길(洪性吉), 옥초(玉蕉) 이종필(李鍾弼), 탁산(卓山) 이선순(李善淳), 죽사(竹史) 이창수(李彰秀), 우계(愚溪) 윤영섭(尹榮燮), 송재(松齋) 유창영(柳暢永), 후송(後松) 정영찬(鄭永燦), 송암(松菴) 이장우(李璋雨), 삼회당(三懷堂) 문무열(文武烈), 옥천(玉泉) 홍성기(洪性琪), 방초(方樵)한복수(韓福洙), 일농(一農) 한길수(韓吉洙), 동강(東崗) 박해수(朴海壽), 우춘(又春) 노해경(盧海敬), 우당(愚堂) 오기영(吳騏永), 문강(文江) 문재준(文在準), 송정(松亭) 이상용(李相容), 추담(秋潭) 홍성진(洪性珍), 쌍전(雙田) 이하덕(李河德), 용은(用隱) 김봉문(金奉文), 죽하(竹下) 이익순(李益淳), 정와(靜窩) 김종진(金鐘鎭), 지산(只山) 이상섭(李相燮), 간산(艮山) 정관옥(鄭寬玉), 학산(鶴山) 문헌규(文獻奎) 등의 이름이 보인다. 한시 풀이는 생략한다.
'방호정건축출자방명록' 편액에는 방호정을 건축할 때 비용을 낸 명단과 액수가 기록되어 있다. 제일 많이 낸 사람은 한복수로 250원을 냈다. 일제시대 때 250원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쌀 한 가마니의 값은 1930년에 13원, 2016년에는 15만원 정도였다. 단순계산으로도 거의 1만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보면 일제시대 때 10원은 요즘 11~12만원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방호정시사원들은 당시 독립 운동 자금을 대는 심정으로 출연했을지도 모르겠다.
2017.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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