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강원도(江原道) 동해시(東海市) 추암동(錐岩洞) 추암해변에 있는 능파대(凌波臺)와 촛대바위, 해암정(海巖亭,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63호)을 찾았다. 문재곤 박사와 동해 할아버지한의원 김형산 원장, 이태준기념사업회 하태성 이사도 함께 동행했다.
추암해변에서 바라본 능파대와 촛대바위
추암해변은 삼척시 증산동 증산해변과의 경계 지점 바로 북쪽에 붙어 있는 아담한 해변이다. 추암해변에는 약 200m의 백사장을 비롯해서 해안절벽인 능파대와 동굴, 촛대바위와 코끼리바위, 칼바위, 형제바위, 비석바위, 모자바위 등의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동해의 해금강(海金剛)이라고 불린다. 조선 세조(世祖) 때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강원도체찰사(江原道體察使)로 있으면서 해안절벽의 경치에 취한 나머지 능파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능파대 바로 북쪽 해안에는 고려시대에 지었다는 해암정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드라마 '겨울연가'를 촬영했던 카페 겸 민박집이 있다.
촛대바위
촛대바위
능파대 바로 앞에는 뾰족하게 꽂아놓은 듯 높이 5~6m쯤 되는 촛대바위가 솟아 있다. 원래 이 바위의 이름은 송곳바위, 한자로 추암(錐岩)이었는데, 뒤에 촛대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촛대바위는 원래 바위가 두 개였는데, 1681년(숙종 7) 5월 11일 강원도에 지진이 났을 때 중간 부분 3m 정도가 부러졌다고 한다. 파손된 바위는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촛대바위는 아침 해돋이가 장관으로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 화면에도 등장한다. 능파대는 매년 정월 초하루 해돋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안내판에는 이곳이 경기도 성남과 광주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의 정동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김홍도의 실경산수화 '능파대'
능파대에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가 촛대바위 풍경을 그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능파대(凌波臺)'를 새긴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에 들어 있는 이 그림에는 촛대바위 바로 남쪽의 형제바위도 묘사되어 있다. 금강사군첩은 1788년 김홍도가 44세 때 정조(正祖)의 명을 받고 금강산과 관동팔경 지역 60여 곳을 그린 화첩이다.
능파대 일대의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고 할 때 마침 갈매기 한 마리가 촛대바위 끝에 앉아 포즈를 취해 주었다. 고혹적인 포즈를 취한 것을 보니 뭘 좀 아는 모델 갈매기 같았다. 이런 사진은 일부러 찍으려고 해도 못 찍는 경우가 많으니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능파대에서 바라본 추암해변
능파대에서 바라본 해금강
능파대 정면에는 촛대바위 앞으로 드넓은 동해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추암해변을 비롯해서 삼척시 증산동의 이사부사자공원, 대명쏠비치호텔&리조트삼척까지 바라다보인다. 북쪽에는 금강산의 해금강을 방불케 하는 기암괴석들이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해암정
능파대 바로 북쪽 해안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삼척심씨(三陟沈氏)의 시조 신재공(信齎公) 동노 심한(東老沈漢, 1310~ ?)이 지었다는 작고 아담한 정자가 있다.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이름을 능파대라고 했다. 심한은 어린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낸 고려 말의 문신이다. 그는 1352년(공민왕 1) 삼척의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낙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통천군수(通川郡)를 제수했다.
고려 말의 정치 혼란기를 맞아 회의를 느낀 나머지 심한은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을 떠나 삼척으로 낙향했다. 애정이 각별했던 공민왕은 낙향하는 그에게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동노(東老)'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심한은 삼척에 은거한 채 부모를 봉양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한편 죽서루(竹西樓)와 해암정을 오가며 시를 지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후 여러 차례 부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자 왕은 그를 진주군(眞珠君)에 봉하고,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
목은 이색(牧隱李穡, 1328~1396)은 심한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색은 학사승지(學士承旨)를 제수받았을 때 '심동노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학식도 높으며, 저보다 먼저 벼슬길에 올랐으니 저의 직책을 그에게 내려 주십시오.'라며 사양했다. 삼척부에 오는 수령이나 선비들은 반드시 심한을 찾아 국사를 논하고 시를 지으며 어울렸다. 안찰사(按察使)로 온 김구용(金九容1338~1384)은 심한의 집을 찾아 그의 호 '신재(信齎)'를 쓴 편액을 걸었다. 예빈시(禮賓寺) 이구(李球, ? ~ ?)는 심한을 두고 '관동의 군자는 심동노와 최복하(崔卜河) 두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심한이 지은 능파대는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의 정자는 1530년(조선 중종 25) 심한의 후손으로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정면 3칸, 측면 2칸에 초익공 양식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려서 다시 짓고 해암정이라고 했다. 사면의 문을 열면 북쪽과 동쪽, 남쪽으로 능파대와 해금강은 물론 푸르른 동해바다와 수평선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앉아서 감상할 수 있다.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 1,353m)의 웅장한 산세를 바라볼 수 있다.
건물 정면의 처마 밑에는 3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가운데 ‘해암정' 편액 글씨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작품이다.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해운정(海雲亭)의 편액도 송시열이 쓴 것이다. '해암정' 편액 남쪽에는 누가 쓴 글씨인지 알 수 없는 '석종람(石鐘檻)’, 북쪽에는 전서체(篆書體)로 쓴 ‘해암정’ 편액이 걸려 있다. '석종함'은 해암정 뒤편의 돌종처럼 생긴 바위들이 해암정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북쪽 ‘해암정’ 편액의 낙관(落款)에는 '癸未四月十九世孫之潢書’라고 되어 있다. 심한의 18대손 심지황(沈之潢, 1888~1964)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인 계미년(1943)에 쓴 편액임을 알 수 있다.
심지황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병익(金炳翊, 1837~1921)의 외손이기도 하다. 신라 하대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 김병익은 한일합방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을 받고 종4위(従四位)에 서위된 인물이다.
해암정 안에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 1722), 풍서(豊墅) 이민보(李敏輔, 1720∼1799)의 한시를 비롯해서 삼척부사를 지낸 이광도(李廣度)의 '능파대(凌波臺)' 등의 시판(詩板)과 '해암정중수기(海巖亭重修記)' 편액 등이 걸려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현종(顯宗) 때 송시열이 덕원(德原)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이곳에 들러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능파대에서 내려와 '겨울연가'를 촬영했다는 카페에서 추암해변을 바라보며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다. 능파대에 오거들랑 해암정에 걸린 한시를 한 수 음미해보는 것도 좋으리.
2017.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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