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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7

林 山 2017. 7. 13. 11:37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 남원 출신 동기(童妓) 자미(紫薇)의 머리를 올려주다. 정철의 스승 양응정과 송순이 세상을 떠나다. 정철 해남 현감으로 부임한 임제와 재회하다. 애주가 정철 조선 최고의 권주가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짓다. 정철의 지기 백광훈과 최경창, 정치적 동지 이이가 세상을 떠나다. 송익필 동인들로부터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되다. 정여립 정6품 사간원 정언에 이어 예조 좌랑이 되다.


1580년 12월 이이는 마침내 대사간을 제수받아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이듬해인 1581년(선조 14) 46살의 정철은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에서 돌아와 2월에 정3품 참지(參知), 4월에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6월 선조의 명으로 지은 정승 노수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답(批答)이 합당치 않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과 동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정철은 다시 창평으로 낙향했다. 그의 세 번째 낙향이었다. 


같은 해 12월 정철은 선조의 명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정철이 전라 감사가 되어 되어 내려오자 성질 더럽다고 소문난 그의 나쁜 평판 때문에 전라 도사(全羅都事) 조헌은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다. 업무처리 과정에서 과오가 발생하면 감사 대신 부감사격인 도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철의 만류에도 조헌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 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면서 조헌의 스승 이이를 통해 극구 만류했다. 성혼까지 중재에 나선 뒤에야 조헌을 간신히 주저앉혔다. 조헌도 정철처럼 성정이 과격한 인물이라 서로 마음이 통했던지 두 사람은 곧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담양 송강정의 노송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정철은 남원 출신 동기(童妓) 자미(紫薇)의 머리를 올려주었다. 정철은 자신의 호 '송강' 중에서 '강'자를 떼어 자미에게 강아(江娥)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자미가 남원 출신이어서였을까? 정철은 광한루(廣寒樓)를 크게 고쳐 지었다. 그는 광한루원에 연못을 파고, 영주산(瀛洲山),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등 삼신산(三神山)을 만든 다음 동쪽 방장산에 자미화(紫薇花, 백일홍, 배롱나무)를 심었다. 자미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사랑의 정표였을까? 광한루를 중수하고 나서 정철은 술잔을 들고 시 한 수를 읊었다.

恢拓銀河弄明月(회척은하롱명월) 은하수 지어내어 밝은 달 희롱하고

栽培苦竹挹淸風(재배고죽읍청풍) 대나무 심어서 맑은 바람 끌어왔네

一年南國巡宣化(일년남국순선화) 한해 동안 남녘 관찰사로 일할 적에

只在淸風明月中(지재청풍명월중) 맑은 바람 밝은 달 속에서 지냈다네


풍류객 정철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시다. 이 시에는 '廣寒樓前水細如帶, 浚而拓之, 旣又移竹小嶼, 遂把杯長吟(광한루 앞 물줄기가 가늘어 띠와 같으므로 파서 넓히고 또 대나무를 작은 섬에 옮기고 나서 잔을 들고 길게 읊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광한루는 하늘 세계를 상징적으로 지상에 재현한 건축물이다. 물은 은하수, 3개의 섬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상징한다. '회척(恢拓)'은 '넓게 확장하다'의 뜻이다. '고죽(苦竹)'은 '왕대(王竹), 참대'를 말한다. '순선(巡宣)'은 관찰사가 자기 관할 내의 각 고을 민정을 시찰하던 일을 말한다.

1582년(선조 15) 이이는 대사헌에 이어 호조 판서를 제수받았다. 조정에 있으면서 이이는 공안 개정 등 제도 개선을 주관할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할 것을 주청했다. 그리고, 1565년(명종 20)부터 1581년(선조 14)까지 이이가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을 기록한 '경연일기(經筵日記)' 3책를 완성했다. 정여립은 이이 등의 추천을 받아 정6품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같은 해 정월 성혼은 종5품 종묘서 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했다.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선조에게 학문과 정치, 민정에 관해 진달한 성혼은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3월에는 사헌부 장령에서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었다.


2월 1일 정철의 스승 면앙정 송순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순의 부음을 듣자마자 정철은 담양의 빈소로 달려와 제문을 지어 조문했다. 


면앙송순제문(俛仰宋純祭文)-정철


슬프도다. 세상살이 험난한 길을 겪고 겪은 자 많으나, 그 넘어지지 않은 이 역시 드문데, 조정에서 계신 60여 년을 대로로만 따르며, 마침내 크게 넘어지지 않은 이로 상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비통함이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아! 슬프고 서럽도다. 


송순이 살았던 시대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가 일어난 혼란한 때였다. 송순은 너그러운 인품과 넓은 아량을 갖춘 학자이자 정치가, 시인이었기에 5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단 한번 1년 정도의 귀양살이만 했을 뿐 별다른 화를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관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무렵 조선의 대풍류객 임제 해남 현감(海南縣監)이 되어 내려왔다. 정철은 이때 '증임자순제호백호(贈林子順悌號白湖)', '희증임자순제(戱贈林子順悌)'란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증임자순제호백호(贈林子順悌號白湖)-임자순 제 호 백호에게 드리다(정철)

 

客睡何曾着(객수하증착) 나그네 어찌 잠들 수 있으랴

樓前有急灘(루전유급탄) 누대 앞에 거친 여울 있으니

思君一片夢(사군일편몽) 그대를 그리는 한 조각 꿈은

應自海南還(응자해남환) 응당 해남으로부터 오셨것다


정철은 임제보다 13살 연상이었고, 벼슬도 높았지만 그를 대풍류객으로서 존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순(子順)'은 임제의 자, '백호(白湖)'는 임제의 호다. '客睡何曾着(객수하증착)'은 두보(杜甫)의 '객야(客夜)'라는 시의 첫 구절과 같다. 


희증임자순제(戱贈林子順悌)-임자순 제에게 희증하다(정철)


百年長劒倚孤城(백년장검의고성) 백여 년을 긴 칼 차고서 외로운 성에 기대어

酒倒南溟鱠斫鯨(주도남명회작경) 바닷물로 술 삼고 고래 잡아 회를 치자 했지

身世獨憐如倦翼(신세독련여권익) 가련한 이 내 신세가 날다 지친 새와 같아서

 謀生不過一枝營(모생불과일지영) 삶을 도모함이 기껏 한 가지에 지나지 않네 


그해 4월 성혼은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성혼은 봉사에서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강조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성혼의 주장은 채택되지도 않았고, 녹봉을 거부하면 미곡을 하사하면서까지 선조는 그의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봉사는 왕이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천하의 이목(耳目)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봉사는 국정을 위하여 건설적인 의견이 되지 못하고 훗날 당쟁(黨爭)이나 무고(誣告)로 이용된 측면이 있었다.


성혼은 정4품 풍저창 수(豊儲倉守)로 있으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선조는 그에게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했다. 성혼은 전설사 수(典設司守)에 이어 충무위 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지만 그는 신병을 이유로 선조에게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다. 하지만, 선조는 도리어 겨울용 땔감을 하사하고 , 그를 정3품 용양위 상호군(龍驤衛上護軍)으로 승진시켰다. 그해 연말 마침내 그는 선조의 허락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김계휘는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들어갔다. 고경명은 부사(副使) 최입지(崔立之), 한경홍(韓景洪)과 함께 서장관(書將官)으로 동행했다. 정철은 '송김참판중회조경명계휘(送金參判重晦朝京名繼輝)'란 시를 지어 김계휘를 송별했다. 


송김참판중회조경명계휘(送金參判重晦朝京名繼輝)

명나라에 사신가는 김참판 중회 명 계휘를 송별하다(정철)

   

世事蕭條不可言(세사소조불가언) 세상사 하 수상하여 말도 못하고

敦西風雨掩重門(돈서풍우엄중문) 성난 비바람에 겹문 꼭꼭 닫겼네

新霜已着經秋鬢(신상이착경추빈) 가을 귀밑털엔 새 서리 앉았는데

薊水燕雲又送君(계수연운우송군) 계수 연운으로 또 그대를 보내네


김계휘는 김장생의 아버지로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이다. '소조(蕭條)'는 '분위기가 매우 호젓하고 쓸쓸한 모양, 스산하다, 적막하다'의 뜻이다. '돈(敦)'은 '성내다'의 뜻이다. '서풍(西風)'은 '하늬바람, 가을바람'이다. '계수(薊水)'는 쌍간현(桑乾縣) 근처를 흐르는 물이름이다. 쌍간현은 유주(幽州) 대군(代郡)에 속하며, 그 성터는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양원(陽原)에 있다. '연운(燕雲)'은 중국의 유주와 운주(雲州) 지방, 곧 청(淸)나라를 가리킨다. 지금의 허베이성과 산시성(山西省)의 북부 지역이다. 


같은 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이항복(李恒福)은 이이의 천거를 받아 선조 앞에서 '강목(綱目)'을 강연했다. 그 공으로 그는 이덕형, 오억령(吳億齡) 등 다섯 명과 함께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이항복은 영의정(領議政) 권철(權轍)의 손녀사위이자 권율(權慄)의 사위였다. 


그해 선조대 8문장의 한 사람이자 정철의 스승 양응정이 세상을 떠났다. 대사성에서 물러난 양응정은 전라도 나주 박산(博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내려가 조양대(朝陽臺)와 임류정(臨流亭)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양응정은 고경명, 김천일(金千鎰)과 교유하면서 정철, 백광훈, 최경창, 최경회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같은 해 9월 47살의 정철은 선조의 특명으로 가선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상서원 정 예문관 직제학(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尙瑞院正禮文館直提學)을 제수받았다. 2년 정도 짧은 기간의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떠나기 전 정철은 자미에게 오언절구 한 수를 지어 주면서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영자미화(詠紫薇花)-자미화를 읊다(정철)


一園春色紫薇花(일원춘색자미화) 봄빛 가득한 광한루원에 자미화 곱게 피면

 纔看佳人勝玉釵(재간가인승옥채) 옥비녀보다 더 고운 미인을 겨우 보게 되네

莫向長安樓上望(막향장안누상망) 광한루에 올라서 한양을 향해 보지 말게나

 滿街爭是戀芳華(만가쟁시연방화) 거리마다 사람들 예쁜 그대 보고 다툰다네 


자미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정철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시다. 임과 이별을 슬퍼하는 자미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한 정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같은 달 명나라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 황홍헌(黃洪憲) 등이 황태자 탄생 조서(詔書)를 가지고 조선에 들어왔다. 이때 이이가 원접사(遠接使), 고경명과 허봉(許篈)은 종사관(從事官)이었다. 허봉의 동생이 허균과 허난설헌이다. 이때 정철도 왕경민을 만났던 모양이다. 왕경민이 돌아갈 때 정철은 '별왕천사경민(別王天使敬民)'이란 시를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별왕천사경민(別王天使敬民)-왕천사 경민을 이별하다(정철) 


家住江南萬里餘(가주강남만리여) 만 리나 먼 곳 강남 땅에 집이 있으니

秋風客路意何如(추풍객로의하여) 갈바람 나그네 길에 뜻이야 어떠한고

聞鶴馭來仙躅(재문학어래선촉) 학 몰고서 신선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忽見鸞簫過碧虛(홀견란소과벽허) 난새 타고 피리 불며 하늘을 지나가네

消息幾時逢驛使(소식기시봉역사) 어느 때나 사절 만나 소식을 받을까나

蓬萊無復迓雲車(봉래무부아운거) 봉래산 구름수레 마중할 길 다시 없네

相思賴有黃岡句(상사뢰유황강구) 서로 믿고 그리는 황강의 글귀 있으니

   別後爭傳水竹居(별후쟁전수죽거) 이별 후 물대의 삶을 다투어 전하리라


'벽허(碧虛)'는 푸른 하늘이다. '역사(驛使)'는 외교사절이다. '봉래(蓬萊)'는 영주산(瀛州山), 방장산(方丈山)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다. '아(迓)'는 '마중하다'의 뜻이다. '운거(雲車)'는 신선이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는 구름이다. '황강(黃岡)'은 후베이성 황강현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황니지판(黃泥之阪)이 있는 곳이다. '수죽거(水竹居)'는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말이다. 죽림칠현 같은 은사나 문인, 묵객들이 좋아하는 청류(淸流)와 죽림(竹林)이 있는 저택(邸宅)을 말한다. 


12월 정철은 종2품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이는 정2품 이조 판서, 형조 판서(刑曹判書),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종1품 우찬성(右贊成), 병조 판서 등을 차례로 지내면서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 '학교모범(學校模範)', '극기복례설(克己復禮說)' 등을 지었다. 또, 일명 '만언소(萬言疏)'라고도 하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렸다. '만언소'는 임금이 여러 선비들에게 직언을 구하는 심정과 취지를 약술한 뒤 본문에서는 정사의 문제점 7항과 그 대안 9항을 실제 상황을 열거하며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같은 해 성혼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옹원 정(司饔院正), 사재감 정(司宰監正) 등을 제수받았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사람으로 문명을 떨치던 백광훈이 세상을 떠났다. 정철은 양응정의 문하에서 백광훈, 최경창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정철은 '만옥봉백창경(挽玉峯白彰卿)'을 지어 백광훈의 죽음을 애도했다. 


만옥봉백창경(挽玉峯白彰卿)-옥봉 백창경을 위한 만시(정철) 


海內悠悠知己少(해내유유지기소)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지기는 적건만

惟君與我夙心親(유군여아숙심친) 그대와 난 일찌기 마음으로 친하였지

湖山未遂連墻約(호산미수련장약) 강호에서 이웃 살자던 약속 못 이루고

幽顯飜成隔路人(유현번성격로인) 유명이 바껴서 길 막힌 이가 되었도다

紫陌風埃歌激烈(자맥풍애가격렬) 한양 번화한 거리에선 노래 격렬했고

錦城烟雨淚酸辛(금성연우루산신) 나주선 안개비에 스산한 눈물 흘렸네

遺孤受托非無意(유고수탁비무의) 남겨진 아이들을 맡을 생각은 있지만 

奈乏劉家德義新(내핍유가덕의신) 내 어찌 유가의 덕의를 새롭게 하리요


'호산(湖山)'은 강호, 자연이다. '유현(幽顯)'은 저승과 이승이다. '자맥(紫陌)'은 붉은 먼지 이는 번화한 수도의 거리, 서울의 도로다. '풍애(風埃)'는 사람이 사는 이 세상, 속세(俗世)의 뜻이다. '금성(錦城)'은 촉한(蜀漢)의 도읍지다. 비단을 관장하는 관아를 두었던 까닭에 금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라남도 나주의 옛 이름도 금성이다. '연우(烟雨)'는 안개비다. '산신(酸辛)'은 삶의 괴로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유고(遺孤)'는 부모를 여읜 외로운 아이다. '내핍유가(奈乏劉家)'는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이 그 아버지만 못 했음에 비유한 말이다. 


이정구(李廷龜)는 백광훈을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다. 백광훈은 이산해(李山海), 최립(崔岦) 등과 더불어 선조대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영화체(永和體)에 뛰어났다. 


1583년(선조 16) 2월 48살의 정철은 예조 참판(禮曹參判), 3월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승진되었다. 4월 정철은 평소 술을 즐겨 위신을 잃는 일이 많고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계미기사(癸未記事)'에는 '8월 28일 정유길(鄭惟吉)을 우상(右相)으로, 정철을 예조 판서로, 심대(沈岱)를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이우직(李友直)을 대사헌으로 삼다.'로 기록되어 있다. 


선조가 정철에게 하사한 옥배와 은잔(담양 가사문학관)


정철은 당나라의 시선(詩仙) 이백(李白)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다. 그는 대낮에도 술에 만취하여 임금이 불러도 등청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선조는 정철에게 은잔을 하사하며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정철은 은잔을 두드려 펴서 사발만큼 크게 늘린 다음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에 비견될 정도로 멋진 권주가(勸酒歌)인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남겼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는 글이다.


장진주사(將進酒辭) - 권주가(정철)


한 盞(잔) 먹새 근여. 또 한 盞(잔) 먹새 근여. 곳 것거 算(산) 노코 無盡無盡(무진무진) 먹새 근여. 이 몸 주근 後(후)면 지게 우회 거적 덥허 주리혀 뫼여 가나 流蘇寶帳(유소보장)의 만인이 우레 네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모 白楊(뵉양) 속애 가기곳 가면 누론 회 흰 달 가난 비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쟈 할고. 하믈며 무덤 우회 잔나비 파람 불 제 뉘우친들 엇더리.(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 헤아리며 끊임없이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고 가든 아름답게 꾸민 상여 뒤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든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숲(무덤)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까? 하물며 원숭이가 무덤 위에서 휘파람 불 때, 뉘우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람이 죽으면 가난하게 살다가 가거나 부귀하게 살다가 가거나 무덤에 가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을 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실컷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애주가로서 호방한 성격과 함께 시인의 인생무상과 허무적 정서가 잘 드러난 사설시조다. '장진주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알려져 있다. 


정철이 술을 얼마나 좋아했는가 하면, 1562년(명종 17) 임술(壬戌) 별시(別試) 급제 동기인 군회(君會) 윤경희(尹景禧)가 술을 보내오자 기뻐하면서 '군회송주색미구가시이사지(君會送酒色味俱佳詩以謝之)'라는 사례시를 남길 정도였다. 


군회송주색미구가시이사지(君會送酒色味俱佳詩以謝之)

군회가 술을 보냈는데 맛과 색이 모두 좋아 시로써 사례하다(정철) 


一酌延豊酒(일작연풍주) 풍년 부르는 한 잔 술에

 令人萬慮空(영인만려공) 사람들 온갖 시름 잊나니

何須吸沆瀣(하수흡항해) 이슬 마셔서 무엇하리요

 直欲御凉風(직욕어량풍) 바로 산들바람 타고 싶네


명주는 애주가가 알아주는 법이다. 연풍주 한 잔 술에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연풍주의 맛과 향이 얼마나 좋았으면 이런 시를 남겼을까? 


'항해(沆瀣)'는 한밤중의 이슬 기운 혹은 바다 기운이라는 뜻이다. '어(御)'는 바람을 타고서 하늘을 오르고 싶다는 뜻이다. '량풍(凉風)'은 서남풍, 산들바람을 말한다. 


이항복(李恒福)은 애주가 정철에 대해 '반쯤 취해서 즐겁게 손뼉을 마주치며 이야기 나눌 때 바라보면 마치 하늘나라 사람인 듯하다.'라고 평했다. 그는 정철을 천하의 풍류객으로 천상세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유성룡(柳成龍)은 정철의 술버릇에 대해 '정송강은 술에 취해 있느라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서 '장진주사'가 '이백, 이하(李賀), 두보(杜甫)의 명시인 장진주(將進酒)와 시상(詩想)에 있어서는 동궤(同軌)'라고 하였다. 그는 '이백이 장길(長吉, 이하의 자)에게 술 권하는 것을 모방하고, 두보의 시를 취해서 지은 것'이라고 하면서 '뜻이 통달하고 글귀가 서글프게 되었으니 만일 옛날 맹상군(孟嘗君)이 이 가곡을 들었다면 옹문금(雍門琴)이 아니라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 시는 '송강가사'와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 '송강별집추록유사', '청구영언(靑丘永言)', '근화악부(槿花樂府)' 등에 실려 전한다. 김춘택(金春澤)이 '장진주사'를 한역한 시는 '북헌집(北軒集)'에 전한다.


정철도 이백처럼 시와 술을 좋아하고 즐겼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집 뜰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서 만든 거문고를 죽을 때까지 아꼈다고 한다. 바로 송강금(松江琴)이다. 정철이 거문고를 소재로 하여 지은 시조도 있다.


거문고 대현 올려-정철


거문고 대현(大絃) 올려 한 과(棵) 밖을 짚으시니

   얼음에 막힌 물여울에서 우니는 듯

   어디서 연잎에 지는 빗소리는 이를 좇아 맞추나니 


'거문고 대현 위에 올려 한과 밖을 짚고 연주를 하니, 그 소리가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지 마치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하다.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반주까지 맞추니 더없이 절묘하구나.'라고 읊었다. '대현(大絃)'은 거문고의 여섯 줄 중 가장 굵은 넷째 줄의 이름이다. '한 과(棵)'는 첫째 과, 즉 대과(大棵)다. '과(棵)'는 줄을 받치는 기러기발이다.


같은 달 정철은 정2품 돈령부 지돈령부사(敦寧府知敦寧府事), 6월에 성균관 동지성균관사(成均館同知成均館事)에 이어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8월 등대한 정철은 선조에게 동인의 주요 인물들을 죄로 다스릴 것을 주청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된 정철은 9월 동인 세력을 죄로 다스린 일로 계속 간원들의 탄핵을 받았지만, 선조의 비호로 관직을 유지했다. 이런 정철의 비타협적인 정치적 태도에 대해 이이는 화평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이이는 마침내 동인과 정치적인 결전을 벌였다. 4월 이이는 '진시사소(陳時事疏)'를 올려 동인들은 ‘오직 동인이냐 서인이냐’를 가리는 데에만 힘쓰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공론을 수립함으로써 동서간의 시비를 명확히 가릴 것을 주장했다. 이이는 이전의 양시양비론에서 벗어나 동인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동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그해 6월 이이는 병조 판서 시절 '왕의 사전 승인 없이 군마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려 권력을 멋대로 휘둘렀으며, 왕이 부르는데도 오지 않아 왕을 업신여겼다'는 이유로 동인이 주축이 된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았다. 삼사의 탄핵을 받자 이이는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7월 이이의 탄핵에 대해 성혼은 삼사의 잘못을 들어 상소하였고, 태학생 유공진(柳拱辰) 등 460여 명도 상소를 올려 이이를 변론하였다. 8월 선조는 정철 등의 주청으로 이이를 논핵(論劾)한 삼사의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박근원(朴謹元)을 귀양 보냈다. 


이에 동인의 사림 김우옹(金宇顒) 등은 3인의 귀양이 불가함을 간쟁하면서 정철을 탄핵했다. 그러나 선조는 '정철은 그 마음이 곧고 행실은 바르나 다만 그 말이 곧아 당대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노라. 그러나 그가 힘을 다해 직무에 충실했던 점과 맑고 충직한 절의 때문에 초목조차 그 이름을 다 기억한다. 정말 이른바 백관 중의 독수리요, 대궐의 맹호라 할 만하다. 이런 사람을 죄주면 주운(朱雲) 같은 충신을 목 베어야 한다는 말과 같으리라.'고 하교하였다. 


'주운'은 중국 한나라 성제(成帝) 때의 충신이다. '독수리'는 중국 후한 때 재상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천거하면서 '솔개 백 마리가 있다 해도 한 마리 독수리를 당하지 못한다.'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고, '대궐의 맹호'란 송나라 유안세(劉安世)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있으면서 오직 공도만을 지키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같은 해 여름 성혼은 이이의 권유를 받고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제수받고 이어 이조 참의로 전직했다. 선조는 그에게 은대(銀帶)를 하사하고, 이어 종2품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제수했다. 성혼은 수차례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선조는 허락치 않고 그에게 중추부 동지중추부사(中樞府同知中樞府事)에 임명했다. 정여립은 예조 좌랑이 되었다. 


그해 9월 이이는 정2품 이조 판서에 임명됨으로써 생애 마지막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 이때부터 정철과 이이, 성혼은 서인의 중심 인물이자 붕당의 주범으로 지목을 받으면서 동인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 무렵 선조는 시도 때도 없이 관원들을 교체하여 관직에 오른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관료들이 자주 바꼈다. 그 결과 조정의 공론이 제대로 정해지지 못했으며, 정책도 일관성을 잃고 자주 바꼈다. 이이는 정실인사를 금하라고 주청하면서 대간들을 믿고 정사를 맡기도록 건의했지만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문관 직제학에 이어 대사성, 대사간이 된 김우옹은 동인이면서도 서인인 이이를 지지했다. 


같은 해 북평사(北評事)의 참소로 종성 부사(種城府使)에서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좌천되어 한양으로 향하던 최경창(崔慶昌)이 경성객관(鏡城客館)에서 객사하였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이이와 송익필, 최립(崔岦) 등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으며, 정철, 서익(徐益) 등과도 교류하였다. 이이는 그의 시를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했고, 이산해(李山海)는 최선(崔仙)이라고 칭할 만큼 최경창은 신비스럽고 뛰어난 인물이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란(乙卯倭亂) 때 최경창이 퉁소 한 곡조를 구슬프게 불자 영암에 침입한 왜구들이 향수에 젖어 물러갔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무예에도 뛰어나 '활 솜씨는 이의 심장을 나누고, 새의 왼쪽 눈을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정철은 '만최가운경창(挽崔嘉運慶昌)'을 지어 최경창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만최가운경창(挽崔嘉運慶昌)-최가운 경창을 위한 만시(정철)

 

匹馬入雲山(필마입운산) 필마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東風何處嘶(동풍하처시) 동풍은 어느 곳에서 흐느끼나

將軍臥細柳(장군와세류) 가운 장군 진영에 누워 있으니

不復上雲梯(불부상운제) 다시는 구름사다리 못 오르리


이 시에는 '以下隨得隨書無序次(이 아래는 얻는 대로 써 내려서 차서가 없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세류(細柳)'는 세류영(細柳營)을 말한다. 중국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명장인 주아부(周亞夫)가 흉노(匈奴)를 방어하기 위하여 세류(細柳)에 친 진(陣)의 군율(軍律)이 매우 엄정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군의 진영, 또는 군기가 엄정한 군영을 일컫는다. '운제(雲梯)'는 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높은 사다리다. 높이가 구름에 닿을 만큼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선이 승천(昇天)할 때 타고 오르는 구름사다리라는 뜻도 있다.


1584년(선조 17) 1월 16일 49세의 이이는 격무와 과로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 둘도 없는 백년지기 이이가 죽자 정철은 친히 제문과 애도시 '만율곡(挽栗谷)' 3수를 짓고 영구를 호송하면서 애통해했다.


만율곡(挽栗谷)-율곡을 애도하다(정철) 


芙蕖出水看天然(부거출수간천연) 물 위로 솟은 연꽃 볼수록 천연하니

間氣難逢數百年(간기난봉수백년) 수 백 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수재라

天欲我東傳絶學(천욕아동전절학) 하늘은 조선에 끊긴 학문 전하고자

人生之子紹前賢(인생지자소전현) 이 사람을 낳아서 옛 성현 이으셨네

心中剩有環中妙(심중잉유환중묘) 마음 속엔 환중의 묘수 넉넉히 있고

目下都無刃下全(목하도무인하전) 눈 아랜 포정처럼 어려운 일 없었네

何處得來何處去(하처득래하처거) 어느 곳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此時相別幾時旋(차시상별기시선) 이제 서로 이별하니 언제 돌아올까


이이가 뛰어난 성현임을 칭송하고, 죽어서 이별함을 슬퍼하고 있다. '부거(芙蕖)'는 연꽃이다. 송(宋)나라의 주돈이(周敦頤)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花之君子)라며 극찬했다. 그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을 찬미하면서 출세지향적이고 이익만 앞세우는 인간들의 속된 욕망을 경계했다. 연꽃은 군자, 즉 이이를 상징한다. '간기(間氣)'는 여러 세대를 통하여 보기 힘든 뛰어난 기품이나 인물이다. 


'환중(環中)'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곳, 즉 시비(是非)를 초월한 절대적인 경지를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의 '피와 차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을 도추(道樞)라고 한다. 문의 지도리는 환중을 얻어야 무궁한 것에 응할 수 있으니 시란 하나의 무궁한 것이며 비 또한 하나의 무궁한 것이다.(彼是莫得基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而應無窮 是一無窮 非亦一窮)'에서 나온 말이다. 정철은 여기서 이이를 동인과 서인의 분쟁 조정자로 표현하고 있다. 


'目下都無刃下全(목하도무인하전)'을 이해하려면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목무전우(目無全牛)' 고사를 알아야 한다. 전국시대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 梁惠王)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손놀림과 칼질을 어찌나 잘하는지 상림의 춤(桑林之舞, 은나라 탕왕이 상림이라는 곳에서 기우제를 올릴 때 춘 춤)에도 맞고, 경수의 음악(經首之會, 요임금 때의 음악이라고 전해지는 함지곡의 한 악장)에도 맞았다. 소를 잡을 때 눈에 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솜씨나 기술의 묘를 가지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목무전우'를 포정이 소를 해체한다는 뜻의 '포정해우(庖丁解牛)'라고도 한다. '무인하전(無刃下全)'은 '칼날 아래 소가 없다(無刃下全牛)'는 뜻으로 '목무전우'와 같다. 이이가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마치 포정이 소를 잡듯이 도에 이르고, 신기에 가까움을 비유한 것이다.


小學書中悟性存(소학서중오성존) 소학을 읽는 중에 성리를 깨쳤으니

聖賢資質已三分(성현자질이삼분) 성현의 자질은 이미 충분히 있었네

科程豈是功名事(과정기시공명사) 과거 길이 어찌 공명만의 일이리오

翰墨無非道義源(한묵무비도의원) 글월은 도의의 근원 아님이 없었네

仙洞漫留龍麝跡(선동만유용사적) 신선골엔 용과 노루 흔적 가득하고

石潭空鎖水雲痕(석담공쇄수운흔) 석담에는 부질없이 물구름 흔적 뿐

泉臺想有無窮痛(천대상유무궁통) 황천을 생각하니 슬픔은 한이 없고

未報吾君不世恩(미보오군불세은) 임금의 큰 은혜 이승에선 못 갚겠네


'이이는 소학이란 책에서 성리를 깨칠 정도로 성현 자질이 충분했다. 그가 과거를 본 것은 공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도의를 깨우치려 함이었다. 신선이 사는 곳에는 용과 사향노루의 흔적이 가득하고 석담에는 빈 자물쇠, 물구름 자취 잠기었다. 죽어서도 슬픔이 가득한 것은 임금의 은혜를 아직 다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너무 일찍 죽어 임금에 대한 은혜를 다 갚지 못해 아쉽다.'고 노래하고 있다. 


'석담(石潭)'은 이이의 호다.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 석담구곡(石潭九曲)이 있다. 석담구곡을 수양산구곡(首陽山九曲), 옛날에는 고산면에 있었기 때문에 고산구곡(高山九曲),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비유하여 무이석담(武夷石潭)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다. 이를 소재로 한 이이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가 있다. 추사 김정희도 이곳을 즐겨 찾았다.


'공쇄(空鎖)'는 빈 자물쇠이니, 즉 부질없다의 뜻이다. '수운(水雲)'은 수운향(水雲鄕)의 준말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곳, 즉 은자(隱者)가 사는 청유(淸幽)한 지방을 뜻하는 말이다. '불(不)'은 '크다'의 뜻이다.


先我而來去亦先(선아이래거역선) 나보다 먼저 왔다 가는 것도 먼저 가니

 死生何不少周旋(사생하불소주선) 삶과 죽음을 조금도 주선하지 못하는가

 欲從眞歇臺邊月(욕종진헐대변월) 진헐대 주변의 달이라도 따르고 싶어라

 會作毗盧頂上仙(회작비로정상선) 비로봉 꼭대기의 신선을 만나고자 했네

千劫縱灰難得子(천겁종회난득자) 천겁이 비록 재 돼도 얻기 어려운 그대

九原如作更逢賢(구원여작갱봉현) 구원에 가면 그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無人解聽峨洋趣(무인해청아양취) 아양곡 듣고 그 뜻 알 사람 이제 없으니

  却爲鍾期一斷絃(각위종기일단현) 종자기 위해 거문고 줄 단번에 끊었다네 


'이이는 죽어서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천겁이 흘러도 이이 같은 사람을 얻기는 어렵다. 저승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백아(伯牙, 나)는 이양곡(峨洋曲)를 알아주는 종자기(鍾子期, 이이)가 죽자 거문고 줄을 단번에 끊었다네.'라고 읊고 있다. 이이에 대한 정철의 애절한 추모곡이다. 


'진헐대(眞歇臺)'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 부근에 있는 전망이 뛰어난 명승지다. '비로(毗盧)'는 금강산 최고봉 비로봉(1,638m)이다. '구원(九原)'은 무덤을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경대부(卿大夫)의 무덤이 모두 구원산(九原山)에 있었다. 이후 '구원'은 무덤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양(峨洋)'은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鐘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는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고 말했다. 또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정철도 종자기를 잃은 백아의 심정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이이 부부 합장묘 


이이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에 묻혔다. 이이는 미발(未發) 중심의 이황 철학을 비판하면서 이발(已發) 중심의 지각설(知覺說)에 근거하여 이일분수(理一分殊), 이선기후(理先氣後), 성즉리(性卽理), 심통성정(心統性情), 거경궁리(居敬窮理) 등 주자학의 핵심적인 명제들을 부정하고, 기발이승(氣發理乘), 이통기국(理通氣局), 심시기(心是氣), 심성정의일로(心性情意一路), 거경궁리역행(居敬窮理力行) 등의 이론을 축으로 한 신유학 체계를 수립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다.


이이의 신유학 체계를 근간으로 하여 율곡학파(栗谷學派)가 성립되었다. 율곡학파는 이후 300년 동안 지속되면서 17세기의 예송 논쟁(禮訟論爭), 18세기의 호락논변(湖洛論辨)을 통한 지각론(知覺論)과 미발론(未發論) 논쟁, 19세기 이항로(李恒老) 화서학파(華西學派)를 중심으로 한 명덕주리주기(明德主理主氣) 논쟁을 벌이면서 조선유학사의 지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이의 초상(파주 율곡기념관)


안당의 후손들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던 송익필에게도 절친한 친구이자 후원자로 자신을 변호해주던 이이의 죽음은 큰 타격을 주었다. 이이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그의 사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성혼과 조헌, 이이의 제자이자 송익필의 제자인 묵재 이귀(李貴) 등은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송익필은 자신의 상소 외에 이귀의 상소문 초안까지 작성해 주었다. 이로 인해 송익필은 동인들로부터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되었다.  


성혼과 이이를 원수로 여기던 동인들의 공격은 방향을 바꿔 송익필에게로 향했다. 동인의 강경파 이발, 이길(李佶), 백유양(白惟讓) 등은 송익필을 제거하기 위해 송사련에게 원한이 사무친 안당의 증손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尹氏)를 비롯한 안당의 후손들을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조헌은 상소와 함께 상복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궐문에 엎드려 '송익필을 벌 주려거든 나도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송익필은 이 소식을 듣고 '여식(汝式, 조헌의 자)과 만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소인들이 글 가운데에 나를 못난 사람이라 함으로써 함께 이같이 억울함을 받노라' 하며 한탄하였다.  


같은 해 2월 정철은 대사헌 겸 예문관 제학(藝文提學)에 이어 찬집청 당상(纂集廳堂上), 8월에는 의금부 지의금부사(義禁府知義禁府事)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선조가 총마(驄馬)를 특사하여 출입시에 타고 다니자 사람들이 그를 '총마어사(驄馬御史)'라고 부르기도 했다. 7월 성혼은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겸직만 면했다. 


같은 달 1579년부터 끌어온 '곽사원 제방 송사'가 판결이 났다. 송한필의 사돈인 곽사원과 황유경(黃有慶)의 노비 거인(居仁) 사이에 방죽을 막는 일로 일어난 송사가 곽사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난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해 정언지(鄭彦智)는 곽사원이 문서를 위조하였는데도 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난 것은 송한필이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곽사원과 거인 두 집안은 모두 변방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송한필도 송사에 가담한 죄로 벌을 받았고, 송사에 관여했던 정철 등 서인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서인당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송익필, 송한필 형제가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송익필은 서얼 출신임에도 제갈공명에 비견될 정도로 학식과 지략이 뛰어나 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정엽(鄭曄), 조헌 등 대사간을 지낸 문객들이 있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정철은 다시 특명으로 승진하여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事)에 제수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선조는 경기 감사를 통해 파산의 성혼에게 식물(食物)을 하사했다. 성혼은 파산의 향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지내는 즐거움을 시조로 읊었다. 


말 업슨 청산이오 - 성혼


말 없는 靑山(청산)이요 態() 없는 流水(유수)로다

값 없는 淸風(청풍)이요 임자 없는 明月(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시절이 태평토다 - 성혼 


時節(시절)이 太平(태평)토다 이 몸이 한가커니

竹林(죽림) 푸른 곳에 午鷄聲(오계성) 아니런들

깊이 든 一場華胥夢(일장화서몽)을 어느 벗이 깨우리


'말 업슨 청산이오'는 논어의 ‘知者樂水仁者樂山(슬기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의 경지를 읊었다. '시절이 태평토다'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화서몽(華胥夢)'은 도가(道家)의 경전 '열자(列子)'의 황제편(黃帝篇)에 나오는 고사다. 고대 중국 황제(皇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서 노닐었다. 화서씨의 나라는 무위자연의 도가 행해지고 있어서 스승이나 어른이 없어도 스스로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은 평화롭고 자유로이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이상향이었다. 황제는 잠에서 깨어난 뒤 깨달은 바가 있어 천하를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없이 화서씨의 나라처럼 잘 다스렸다고 한다.


성혼이 병약해서 조정에서 함께 일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정철의 '기시우계(寄示牛溪)'란 시가 있다. 서인의 영수 이이가 죽고 없는 지금 정철은 더욱 더 성혼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기시우계(寄示牛溪) - 우계에게 부치다(정철)


苦調難諧衆楚音(고조난해중초음) 슬픈 옲조림은 초땅 말과 어울리기 어렵나니

病夫於世已無心(병부어세이무심) 병약한 몸이라 이미 세상사엔 마음도 없어라

遙知湖外松林下(요지호외송림하) 멀리서도 알겠거니 그댄 호수 밖 송림 아래서

歲暮寒醪滿意斟(세모한료만의짐) 해저무는 섣달 그믐 찬 막걸리 마음껏 마시리


서인의 학문적, 정치적 영수 이이가 세상을 떠나고, 성혼은 신병으로 조정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읊은 시다. 그런 한편 정철은 병을 핑계로 자연에 묻혀 학문을 닦으며 안빈낙도하는 성혼을 부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계(牛溪)'는 성혼의 호다. '고조(苦調)'는 '괴로운 곡조, 슬픈 읊조림'이다. '초음(楚音)'은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굴원(屈原), 송옥(宋玉), 경차(景差) 등의 부(賦)를 모아 놓은 초사(楚辭)를 말한다. 


그해 우찬성 정철과 같은 서인당인 박점(朴漸)이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되어 해주로 떠나게 되었다. 정철은 박점의 집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때 쓴 시가 '박경진점가구호석별(朴景進漸家口號惜別)'이다. 


박경진점가구호석별(朴景進漸家口號惜別)-박경진 점의 집에서 석별을 읊다(정철)


 雪晴南陌馬蹄忙(설청남맥마제망) 눈 개인 남쪽 길에 말 발굽은 바쁜데 

城樹依微暝色蒼(성수의미명색창) 성나무는 희미해 푸른빛 뵐 듯 말 듯

怊悵故人西海別(초창고인서해별) 슬프도다 서해도로 떠나가는 벗이여

一燈傾盡五更觴(일등경진오경상) 등불 꺼지도록 새벽까지 술잔 드나니

 

정철과 박점이 밤이 새도록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박점이 정철보다 4년 연상이었지만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