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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정철의 송강정을 찾아서 12

林 山 2017. 7. 19. 12:25

위기에 처한 서인들의 구원투수 정철 선조가 불러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충신연주지사 '사미인곡'을 애타게 부르다. '사미인곡'이라 쓰고 '선조에 대한 불만과 동인들에 대한 울분을 품고 쓴 가사'라고 읽는다.  


1588년(선조 21) 53세의 정철은 남도 창평에서 실의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고 음주와 영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조헌은 재차 상소를 하여 정철을 복권시키려고 노력했다. 위기에 처한 서인당을 일으켜 세울 사람은 정철 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조의 마음을 사야만 했다. 정철은 선조에 대한 간절한 연모와 충성을 담은 가사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 이른바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을 지었다. 


담양 송강정의 송강정선생시비


사미인곡(思美人曲) - 정철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졈어 잇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졸 데 노여 업다. 평생애 원하요데 한데 녜쟈 하얏더니 늙거야 므스 일로 외오 두고 글이는고. 엊그제 님을 뫼셔 광한뎐(廣寒殿)의 올낫더니 그 더데 엇디하야 하계(下界)예 나려오니 올 저긔 비슨 머리 얼킈연디 삼년이라. 연지분 잇내마는 눌 위하야 고이할고. 마음의 맺친 실음 텹텹이 싸혀 이셔 짓나니 한숨이오 디나니 눈믈이라.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업다. 무심한 셰월은 믈 흐르듯 하는고야. 염냥(炎凉)이 때를 아라 가는 듯 고텨 오니 듯거니 보거니 늣길 일도 하도 할샤.(이 몸 태어날 때 임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의 연분임을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가 전혀 없다. 평생에 원하되 함께 지내자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고? 엊그제 님을 모시고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 동안에 어찌하여 인간세상에 내려왔느냐? 올 때에 빗은 머리 헝클어진 지 삼년이라 연지분이 있지마는 누구를 위하여 곱게 할꼬? 마음에 맺힌 시름이 첩첩이 쌓여 있어 짓는 것이 한숨이고 떨어지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끝이 있는데 시름은 끝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는 듯하는구나. 더위와 추위가 때를 알고 가자마자 다시 오니 듣고 보고 느낄 일도 많기도 많구나.)


동풍(東風)이 건듯 부러 젹셜(積雪)을 헤텨내니 창 밧긔 심근 매화 두세 가지 픠여셰라. 갓득 냉담(冷淡)한데 암향(暗香)은 므스 일고. 황혼의 달이 조차 벼 마테 빗최니 늣기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아니신가. 뎌 매화 것거 내여 님겨신 데 보내오져 님이 너를 보고 엇더타 너기실고.(동풍이 문득 불어 쌓인 눈을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쌀쌀하고 적막한데 그윽한 향기는 무슨 일인고? 황혼의 달이 좇아와 배갯머리에 비치니 흐느끼는 듯 반기는 듯 님이신가? 저 매화 꺾어 내어 님 계신데 보내고 싶구나. 님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까?)


꼿 디고 새 닙 나니 녹음이 깔렷는데 나위(羅暐) 적막하고, 슈막(繡幕)이 뷔여 잇다. 부용(芙蓉)을 거더 노코, 공쟉(孔雀)을 둘러두니 갓득 시름 한데 날은 엇디 기돗던고. 원앙금(鴛鴦錦) 버혀 노코, 오색션 플텨 내어 금자헤 견화이셔 님의 옷 지어내니 슈품(手品)은 카니와 제도(制度)도 가잘시고. 산호슈 지게 우헤 백옥함의 다마 두고 님의게 보내오려 님 겨신 데 바라보니 산인가 구롬인가 머흐도 머흘시고. 쳔리(千里) 만리(萬里) 길흘 뉘라셔 차자갈고 니거든 여러두고 날인가 반기실까.(꽃 지고 새 잎 나니 녹음이 깔렸는데 비단 포장이 적막하고 수놓은 장막이 비어 있다. 연꽃을 수놓은 비단 휘장을 걷어 놓고 공작을 수놓은 병풍을 둘러두니 가뜩이나 시름이 많은데 날은 어찌 길던가? 원앙 비단을 베어 놓고 오색실 풀어내어 금으로 만든 자로 재어서 님의 옷 지어내니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격식도 갖추었구나. 산호로 만든 지게 위에 백옥으로 만든 함에 담아두고 님에게 보내고자 님 계신데 바라보니 산인가 구름인가 험하기도 험하구나. 천 리 만 리 길을 누가 찾아갈까? 가거든 열어 두고 나를 본 듯이 반기실까?)


'부용(연꽃) 휘장'은 원나라 때 최영(崔英)과 그의 아내 왕씨(王氏)의 고사를 연상케 한다. 악한 뱃사공 고아수(顧阿秀)의 계략으로 헤어졌던 부부가 연꽃 병풍의 인연으로 다시 상봉하였다는 이야기다. 인연이라면 그 어떤 것도 피해 갈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는 고사다. 선조와 정철은 피해갈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공작병풍'에는 중국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과 두황후(竇皇后)의 고사가 전해 온다. 두황후의 아버지 두의(竇毅)는 북주(北周)의 황족으로 벼슬이 대사마(大司馬,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이르렀다. 수(隋)나라에 들어와서도 그는 관직이 상주국(上柱國) 정주총관(定州總官), 작위가 신무공(神武公)에 이르렀다. 두의는 두 마리의 공작새를 그린 병풍을 쳐 두고 누구든지 공작의 눈을 활로 쏘아 맞히면 자신의 비범한 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수십 명의 청혼자가 몰려와 활을 쏘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이연이 활을 쏘아 각각 눈 하나씩을 맞춤으로써 두황후는 당고조에게 시집을 오게 되었다. 선조가 활을 쏘아 공작의 눈을 맞춰서 비범한 자신을 어서 데려가라는 뜻이다.


비단과 오색실로 임의 옷을 짓는 것과 같은 시상은 굴원의 '이소'에도 나온다. 임의 옷을 지으면서 임을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가는 것이다.


이소 - 굴원


製芰荷以爲衣兮(제기하이위의혜) 마름과 연잎 다듬어 저고리를 만들고

 集芙蓉以爲裳(집부용이위상) 부용꽃잎을 따 모아서 치마를 만들려 하네 

不吾知其亦己兮(불오지기역기혜) 나의 마음 알아주지 않아도 그만일 뿐

 苟余情其信芳(구여정기신방) 오직 내 마음 진실하고 꽃답기만 하면 되네 


하루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 녤 제 위루(危樓)에 혼자 올나 슈정념(水晶簾) 거든 말이, 동산(東山)의 달이 나고 븍극(北極)의 별이 뵈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 난다. 청광(淸光)을 쥐여 내여 봉황누의 븟티고져. 누(樓) 우헤 거러 두고 팔황(八荒)의 다 비최여 심산궁곡(深山窮谷) 졈낫가티 맹그쇼셔.(하룻밤 서리 기운에 기러기 울며 갈 때에 높은 누각에 혼자 올라 수정발을 걷으니 동쪽 산의 달이 떠오르고 북극의 별이 보이니 임이신가 하여 반가워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맑은 달빛을 일으켜 내어 궁궐에 부치고 싶다. 누각 위에 걸어두고 온세상 다 비추어 깊은 산골짜기에도 대낮같이 만드소서.)


서리와 기러기는 가을의 상징이다. 가을이 오자 여인은 누각에 홀로 올라 달과 북극성을 바라본다. 동산에 떠오르는 달과 북극성이 마치 임이신 것 같아 눈물이 절로 난다. '달', '북극성'은 임금의 상징이다. 여인은 맑은 달빛을 일으켜 내어 임 계신 봉황루에 보내고 싶다. 그러면 임이 달빛을 누 위에 걸어두고 온 세상을 다 비추어 대낮같이 하실 것을 믿는다. 선조의 성은이 전국 방방곡곡을 환하게 비춰 만백성이 그 은총을 입기를 바란다.


건곤(乾坤)이 폐색(閉塞)하야 백셜(白雪)이 한 빗친 제 사람은 카니와 날새도 긋쳐 잇다. 쇼샹남반(瀟湘南畔)도 치오미 이러커든 옥누고쳐(玉樓高處)야 더옥 닐너 므슴하리. 양츈(陽春)을 부쳐 내여 님 겨신 데 쏘이고져. 모쳠(茅詹) 비쵠 해를 옥누의 올리고져. 홍샹(紅裳)을 늬믜차고 취수(翠袖)를 반만 거더 일모슈듁(日暮脩竹)의 혬가림도 하도 할샤. 댜란 해 수이 디여 긴 밤을 고초 안자 쳥등(靑燈)을 거른 겻테 뎐공후 노하 두고 꿈의나 님을 보려 택 밧고 비겨시니 앙금(鴦衾)도 차도 찰샤 이 밤은 언제 샐고.(천지가 겨울의 추위에 얼어붙어 생기가 막히고 흰 눈이 한가지 색으로 덮혀 있을 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날짐승도 끊어져 있다. 소상강 남쪽도 추위가 이와 같거늘 임 계신 곳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따뜻한 봄기운을 일으켜 내어 임 계신데 쏘이고 싶다. 초가집 처마에 비친 해를 대궐에 올리고 싶다. 붉은 치마를 여며 입고 푸른 소매를 반만 걷어 해 저물 무렵 긴 대나무에 헤아림도 많기도 많구나. 짧은 해가 쉬이 넘어가 긴 밤을 꼿꼿이 앉아 푸른 등 걸어놓은 곁에 전공후 놓아 두고 꿈에나 님을 보려 턱 받치고 기대어 있으니 원앙이불이 차기도 차구나. 이 밤은 언제 샐까?)


'건곤(乾坤)이 폐색(閉塞)하야 백셜(白雪)이 한 빗친 제 사람은 카니와 날새도 긋쳐 잇다.'는 구절은 당송(唐宋) 8대가 중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 시상과 동일하다.   


강설(江雪) - 눈 내리는 강(유종원)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첩첩 산중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萬逕人踪滅(만경인종멸) 길마다 사람의 자취마저 끊어졌는데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쪽배에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눈 내리는 찬 강에서 홀로 낚시하네


유종원은 개혁주의자로서 34세의 젊은 나이에 왕숙문(王叔文)이 주도한 영정혁신(永貞革新)에 참가하였으나 환관 구문진(俱文珍) 등 보수파의 반격으로 개혁이 실패한 뒤 후난성(湖南省)의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당했다. 그는 13년 동안 변경에서 절망적인 삶을 살다가 47세의 나이로 죽었다. '강설'은 이 무렵에 쓴 것이다. 


유종원의 '강설'을 읊고 있노라면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유종원은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 숨어 낚시로 세월을 낚는 늙은이의 절대고독에 자신의 처지를 관조적으로 투영하고 있다. 눈 내리고 찬바람 부는 강에서 낚시를 하는 늙은이의 모습에서 정치적 좌절과 절대고독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창평에서 귀양 아닌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정철도 유종원의 처지가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쇼상남반(蕭湘南畔)'은 중국 후난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있는 소수(瀟水)와 상수(湘水)의 남반인데, 여기서는 남도 땅 담양 창평을 비유한 말이다. 남도 땅 창평도 추운데, 하물며 임이 있는 북쪽의 한양은 얼마나 더 추울까! 그래서 따뜻한 봄기운을 일으켜 내어 임 계신데 쏘이고 싶은 것이다. 


'홍샹(紅裳)을 늬믜차고 취수(翠袖)를 반만 거더 일모슈듁(日暮脩竹)의 혬가림도 하도 할샤.'라는 구절은 이백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 '가인(佳人)'의 마지막 구절에도 나온다. 


가인(佳人) - 아름다운 사람(두보)


絶代有佳人(절대유가인) 세상에 드문 절세의 가인이 있어

 幽居在空谷(유거재공곡) 깊은 산골짜기에 혼자서 산다오 

 自云良家子(자운량가자) 스스로 말하기를 양가의 딸인데 

 零落依草木(령낙의초목) 집안이 망하여 초목에 의지하니 

  關中昔喪亂(관중석상난) 지난날 관중에서 큰 난리를 만나 

兄弟遭殺戮(형제조살륙) 형제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오

官高何足論(관고하족논) 벼슬이 높다고 한들 무엇하리오

不得收骨肉(부득수골육) 자기 골육도 거두지 못하는 것을


世情惡衰歇(세정오쇠헐) 세상 인정이란 몰락을 싫어하고 

萬事隨轉燭(만사수전촉) 깜빡이는 촛불처럼 변하는 세상 

夫婿輕薄兒(부서경박아) 남편 있으나 경박한 난봉꾼이고 

新人美如玉(신인미여옥) 새 여자는 옥같이 아름다웠지요 

合昏尙知時(합혼상지시) 합혼꽃도 때를 알고 짝을 짓는데 

鴛鴦不獨宿(원앙부독숙) 원앙새도 혼자서는 자지 않는데 

但見新人笑(단견신인소) 남편은 새 여자의 웃음에만 끌려

 那聞舊人哭(나문구인곡) 옛 아내의 울음은 어찌 듣겠어요 


在山泉水淸(재산천수청) 샘물도 산에 있을 때는 맑지만

出山泉水濁(출산천수탁) 산을 나와 흐르면 흐려진다오 

侍婢賣珠回(시비매주회) 여종이 구슬을 팔아 돌아오고 

牽蘿補茅屋(견라보모옥) 덩굴을 끌어다 헌 집을 고치네

摘花不揷髮(적화부삽발) 꽃을 꺽어도 머리에 꽂지 않고

 采柏動盈掬(채백동영국) 측백잎만 늘 두 손에 가득할 뿐

 天寒翠袖薄(천한취수박) 날 추워져 푸른 옷 더욱 얇은데

日暮倚修竹(일모의수죽) 저물녘 긴 대나무에 기대 섰네


난리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고 산골짜기에 숨어서 살아가는 절세미인의 곧고 굳은 절개를 노래한 시다. 궁벽한 산골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몰락한 양반집 규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읽을 수 있다.   


두보는 이 시를 당나라 숙종(肅宗) 건원 2년(759) 가을에 썼다. 두보는 가망도 없는 벼슬을 버리고 각지를 전전한 끝에 마침내 청두(成都)에 이르렀다. 이 무렵 두보는 전란과 가뭄의 고통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현실을 형상화한 작품을 많이 썼다. 두보의 시에서 여성을 시적 화자로 내세운 작품은 드물다.


'關中昔喪亂(관중석상난)'은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長安)을 함락시킨 사건을 말한다. '관중(關中)'은 섬서성(陝西省)의 함곡관(函谷關) 이서(以西) 지방으로 장안을 이른다. '合昏(합혼)'은 꽃 이름으로 合歡(합환)이라고도 한다. 꽃 색은 붉다. 새벽에 피었다가 저녁에 오므라든다. '在山泉水淸(재산천수청) 出山泉水濁(출산천수탁)'은 여자의 마음을 샘물에 비유한 것이다. 후대에 ‘在山水淸 出山水濁’이라는 성어가 되어 널리 쓰였다. 맑은 물처럼 굳은 마음을 가지고 산에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采柏動盈掬(채백동영국)'은 남편의 지조와 절개를 축원하는 뜻에서 측백나무의 잎을 딴 것이다.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한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늘 푸르러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날이 추운데도 푸른 옷 소매가 얇은 것은 난리가 나서 군자가 집을 떠나 떠돌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측백나무와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측백나무잎을 뜯고 긴 대나무에 의지했다면 뜻한 바가 원대한 것이다. 군주에게 쫓겨난 군자가 지조를 지키는 것이 충신이고, 그런 충신에게는 열녀가 있게 마련이다.


정철은 두보의 '가인'을 읽었을 것이다. '가인'의 '翠袖(취수)'와 '日暮脩竹(일모수죽)'을 '사미인곡'에도 쓴 것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모습에서 선조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靑燈(청등)'은 임이 오시라고 걸어둔 등이다. '鈿箜篌(전공후)'는 자개로 아름답게 꾸민 공후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불렀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鴦錦(앙금)'은 암컷 원앙만 수놓은 이불이다. 원앙(鴦)은 금슬이 좋기로 유명한 새다. 원(鴛)은 수컷, 앙(鴦)은 암컷 원앙이다. 그런데, 이불에는 암컷 원앙만 수놓아져 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독수공방(獨守空房)에서 오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앙금'이라는 시어 하나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셜흔 날 져근덧 생각 마라. 이 시름 닛쟈 하니 마음의 맺혀 이셔 골슈(骨髓)의 께텨시니 편쟉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 데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날애로 님의 오세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라셔도 내님 조차려 하노라.(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깐 동안 생각을 말고 이 시름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쳐 있으니 명의가 열 명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아 내 병은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아가려 하노라.)


광한전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한 많은 여인이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비단옷, 가을에는 달빛, 겨울에는 햇볕을 그리운 임에게 정성으로 바치고자 한다. 살아서는 임의 곁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여인은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라도 되어 꽃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기고 싶다. 임이 나인 줄 몰라도 나는 내 임을 좇으려 한다. 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한 노래다. 정철에게 있어서 '미인'은 곧 선조, '임'도 선조다. 


'사미인곡'은 경기도 고양에서 전라도 창평으로 내려와 귀양 아닌 귀양살이를 하게 된 정철이 동인들에 대한 울분과 선조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을 때 쓴 가사다. 초야에 묻혀 임금을 연모하는 간절한 고신연주(孤臣戀主)의 정한(情恨)을 생이별한 임을 연모하는 여인의 마음에 비유하여 자신의 충정을 우의적(寓意的)으로 고백한 일편단심 연군지사(一片丹心 戀君之詞)다.   


'사미인곡'은 2음보 1구 모두 126구로 되어 있다. 음수율은 3~4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4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성적인 어조로 임 생각의 간절함과 외로움을 노래한 사시가(四時歌)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구성은 서사(序詞)-임과의 인연과 이별 후의 그리움, 세월의 무상함춘원(春怨)-매화를 꺾어 임에게 보내드리고 싶음, 하원(夏怨)-임에 대한 알뜰한 정성, 추원(秋怨)-선정을 갈망함, 동원(冬怨)-임에 대한 염려, 결사(結詞)-임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 등 6단락으로 되어 있다. 춘원부터 동원까지가 본사(本詞)로 임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했다.


정철의 '사미인곡'은 선조를 사모하는 노래다.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에도 '西方美人(서방미인)'이 등장한다. '간혜'는 미관말직인 악공(樂工)의 자리에 있던 위(衛)나라의 한 현사(賢士)가 은근히 그 불만을 토로하면서 옛 서주(西周)의 성왕(聖王)을 사모하는 노래다. '서방미인'은 곧 성왕을 가리킨다. '사미인(思美人)'은 굴원의 초사(楚辭) '이소(離騷)' 제9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굴원의 '사미인'은 초나라 회왕(懷王)을 사모하는 노래다. 


사미인(思美人) - 미인을 사모하다(굴원)


思美人兮, 擥涕而竚眙. 媒絶路阻兮, 言不可結而詒. 蹇蹇之煩寃兮, 陷滯而不發. 申旦以舒中情兮, 志沈菀而莫達. 願寄言於浮雲兮, 遇風隆而不將. 因歸鳥而致謝兮, 羌迅高而難當. 高辛之靈盛兮, 遭玄鳥而致詒. 欲變節以從俗兮, 媿易初而屈志. 獨歷年而離愍兮, 羌馮心猶未化. 寧隱閔而壽考兮, 何變易之可爲.[임 그리워 눈물 훔치며 멍하니 서서 바라보지만 말 전해 줄 사람도 없고, 길도 험하여 끝내 전할 수 없네. 애태우며 고민하건만 수렁에 빠진 듯 헤어나지 못하고, 몇 날을 내 마음 전하려 해도 그 뜻이 가라앉고 맺혀 이르지 못하네. 뜬 구름에 내 말 전하고 싶어 바람신 풍륭씨(風隆氏)를 만나도 들어주지 않고, 철새에게 내 말 전하려 해도 너무 빠르고 높이 날아서 맡길 수 없네. 옛날 고신씨(高辛氏)의 신령스러움이여, 제비(玄鳥)를 만나 알을 받았지만, 변절해서 세속을 따르자 해도 초심을 버리고 뜻을 굽힘이 부끄럽지 아니하랴. 홀로 숱한 세월 번민 속에 지내지만 서글픈 마음 아직도 사라지지 않네. 차라리 근심 안고 한평생 늙어 갈지라도 어찌 이 마음 변할 수 있으랴?]  


知前轍之不遂兮, 未改此度. 車旣覆而馬顚兮, 蹇獨懷此異路. 勒騏驥而更駕兮, 造父爲我操之. 遷逡次而勿驅兮, 聊假日以須時. 指嶓冢之西隅兮, 與纁黃以爲期. 開春發歲兮, 白日出之悠悠. 吾將蕩志而愉樂兮, 遵江夏而娛憂. 擥大薄之芳茝兮, 搴長洲之宿莽. 惜吾不及古人兮, 吾誰與玩此芳草. 解萹薄與雜菜兮, 備以爲交佩. 解萹薄與雜采兮, 備以爲交佩. 佩繽紛以繚轉兮, 遂萎絶而離異,[옛 사람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런 태도를 고치지 못하네. 수레가 엎어지고 말이 쓰러져도, 발을 절뚝거리며 홀로 이 다른 길을 가려고 생각하노라. 천리마 굴레 지워 다시 수레에 매고, 나를 위해 조보(造父)에게 고삐를 쥐게 하니. 머뭇거리듯 나아가지만 달리지 않고, 시간 늦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자고, 파총산(嶓冢山) 서쪽 기슭 가리키며, 황혼녘에나 가 닿자고 기약하누나. 새해 새봄 벽두에 밝은 태양이 유유히 솟아오른다. 나는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고자, 강수(江水)와 하수(夏水)를 따라 노닐며 시름을 푸노라. 우거진 덤불 속에서 방초를 캐고, 길다란 모래톱에서 숙망(宿莽)를 캐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옛 성현을 만날 수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이 향초를 가지고 놀까. 강낭콩 박하 잡초를 뜯어 엮어서 허리에 두르니 눈부시게 아름답도록 광채가 휘돌더니 결국은 시들어 떨어지는구나.] 


吾且儃佪以娛憂兮, 觀南人之變態. 竊快在中心兮, 揚厥憑而不竢. 芳與澤其雜糅兮, 羌芳華自中出. 紛郁郁其遠蒸兮, 滿內而外揚. 情與質信可保兮, 羌居蔽而聞章. 令薜茘以爲理兮, 憚擧趾而緣木. 因芙蓉以爲媒兮, 憚蹇裳而濡足. 登高吾不說兮,入下吾不能. 固朕形之不服兮, 然容與而狐疑. 廣遂前畫兮, 未改此度也. 命則處幽吾將罷兮, 願及白日之未暮. 獨焭焭而南行兮, 思彭咸之故也.[나는 잠시 서성이며 시름을 달래면서, 남녘 사람들의 변덕스런 태도를 본다. 남몰래 내 심지 굳음을 기꺼워하며, 울분을 토하고 나면 더 바랄 것이 없노라. 향기와 악취 섞여 있더라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은 절로 피어나는 법! 그윽한 향기가 멀리 퍼지는 것은, 안이 가득 차서 밖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일세. 마음과 바탕을 진실되게 지키면, 가려져 있어도 그 명성이 드날리리라. 설령 벽여 덩굴 걷어내려 해도 발꿈치 들고 나무에 오르기 겁나고, 연꽃으로 중매 삼고 싶지만 치마 걷어 발 적시고 싶지는 않네. 나는 높은 데 오르는 것 좋아하지 않고, 낮은 데 내려가는 것도 할 수 없어라. 본래 나는 몸 굽히지 않으니, 그저 갈피를 못 잡고 머뭇거릴 뿐일세. 예전부터 품은 뜻 한결같이 이루려고, 아직도 이런 태도 고치지 못했네. 운명이거니 숨어 지내는 나는 고달파, 다만 해가 저물지 않기를 바랄 뿐일세. 홀로 외로이 남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충신 팽함(彭咸)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라네.]


굴원의 '사미인'은 초나라 회왕을 사모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다. 정철의 '사미인곡'도 선조를 사모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굴원의 '사미인'의 시상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고신(高辛)'은 중국 상고시대 오제(五帝)의 하나인 제곡(帝嚳)을 말한다. 제곡의 두 번째 아내 간적(简狄)은 아이가 없다가 제비가 떨어뜨리고 간 알을 먹고 상(商)나라 시조인 설(契)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조보(造父)'는 주나라 목왕(穆王) 때 말을 아주 잘 몰았던 사람이다. '파총(嶓冢)은 한수(漢水)의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파총에서 양수(漾水)가 일어나 흐르다가 동류(東流)하여 한수를 이룬다. 


'강하(江夏)'는 강수(江水)와 하수(夏水)를 가리킨다. 강수에서 면수(沔水)가 남군(南郡)으로 흘렀는데, 화용(華容)에서는 하수라고 하였다. 이 하수가 군을 지나 흘러들어갔기 때문에 이름을 강하군(江夏郡)이라고 하였다. 치소였던 서릉현(西陵縣)의 성터는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신주(新洲)에 있다. 후한(後漢) 말 형주(荊州)에 속한 강하군에는 총 14현이 설치되었다. 치소는 사선(沙羨), 지금의 후베이성 우창(武昌)에 있었다. 


강하군은 삼국이 정립되면서 위(魏)와 오(吳)로 나뉘게 되었다. 위는 강하군과 익양군, 오는 강하군과 기춘군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두 개의 강하군이 존재했다. 위가 점령한 지역은 맹, 경릉, 평춘, 남신시, 안륙, 서릉, 서양, 대현이고, 오가 점령한 지역은 운두, 사선, 악, 하이, 기춘현이다. 위의 강하군 치소는 상창(上昶), 지금의 후베이성 운몽(雲夢)이다. 오의 강하군 치소는 우창, 지금의 후베이성 악성(卾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