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억령은 만년에 식영정에 머물며 성산과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계산풍류(溪山風流)를 즐기면서 보냈다.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사화를 통해서 그는 경세제민의 실천의지가 강할수록 또 유가적 대의명분을 소리높여 외칠수록 큰 시련이 닥쳐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벼슬을 내던지고 담양의 성산에서 식영적 삶을 살았기에 사화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고,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자들에게 지조를 잃지 않으면서 대의와 명분을 지킬 수 있었다.
담양 식영정
임억령의 계산풍류는 그의 시가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을까? 그가 쓴 '청송당기(聽松堂記)'에 '자연의 자연스러움과 무기교는 큰 음악'이라고 했다. 이는 그가 천연(天然)의 자연스러움을 시와 음악의 최고 경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가식과 기교가 없는 천연한 성률(聲律)을 추구한 결과 그의 시들은 평담(平淡), 즉 평이(平易)하고 담박(淡泊)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평담시(平淡詩)들은 낭만적 정서가 깃들어 있으면서도 소박해서 시어(詩語)나 시상(詩想)을 이해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임억령의 평담 세계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결과였으며, 유가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도가적 세계관을 포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월(五月)
五月星山洞(오월성산동) 오월이라 별뫼 동천에는
松花滿地黃(송화만지황) 송화가 땅에 가득하도다
收來釀美酒(수래양미주) 거둬와서 미주를 빚으니
胸次自生香(흉차자생향) 가슴에서 절로 향기나네
성산의 봄에 송화로 술을 빚어 마시니 가슴 속에서 솔 향기가 난다고 읊은 시다. 너무나 평이한 시여서 더 이상의 풀이가 필요없다. '식영정제영'의 시들도 '오월'처럼 대부분 평이하다. 예를 들어 '수함관어(水檻觀魚)'는 난간에 기대 물고기를 바라보면서 느낀 그대로를 읊었고, '양파종과(陽坡種瓜)'에서도 어려운 비유법이나 기교가 보이지 않는다.
잡영(雜詠) - 이것저것 읊다
萬壑晴天雨(만학청천우) 하늘 맑은데 골짜기마다 빗소리
悠然午夢驚(유연오몽경) 그윽한 낮꿈을 놀라서 깨노매라
廻頭問童子(회두문동자) 고개를 돌려서 아이에게 물으니
答曰是松聲(답왈시송성) 소나무에 이는 바람소리라 하네
빗소리에 놀라 낮잠을 깼는데, 알고 보니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더라는 내용이다. 산옹이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는 모습을 수식이나 과장이 없이 싱거울 정도로 담박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런 그의 시세계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친화의 경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아일체 자연친화의 세계는 당시 계산풍류에 심취했던 시인들 모두가 이르고자 했던 경지였다.
임억령은 '화기촌(和企村)'이란 시도 지었다. 기촌(企村)은 면앙정의 주인 송순의 호다.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면앙정을 중심으로 면앙정가단을 창설함으로써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가 된 사람이다.
화기촌(和企村) - 기촌에게 화답하다
偶然冠帶稱都護(우연관대칭도호) 우연히 관과 띠가 도호라 칭하게 되었으나
土木形骸麋鹿身(토목형해미록신) 토목과 같은 얼굴 미록과도 같은 몸이라네
一片古心猶未試(일편고심유미시) 한 조각 옛마음 아직도 시험하지 못했으니
願從夫子問治民(원종부자문치민) 원컨대 선생을 좇아서 치민법을 묻고 싶소
어쩌다 보니 벼슬이 도호에 이르렀으나 사대부로서 경세제민을 제대로 하지 못 했으니 면앙정 송순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겸손하게 부탁하고 있다.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백성들의 삶에 대한 관심은 임억령으로 하여금 서사적 시세계를 지향하도록 만들었다. 임억령은 송순이 전주부윤, 나주목사, 한성부윤 등 지방수령을 지내고, 고위직인 정2품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겸 춘추관사(春秋館事)까지 올랐으니 '치민(治民)'의 대체를 알고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토목형해(土木形骸)'은 흙과 나무로 된 뼈대라는 뜻이다. 외형을 덧붙이거나 꾸미지 않음을 뜻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혜강(嵇康)의 몸이 마치 흙덩이와 나무등걸 같았다는 '토목신(土木身)'에서 유래한 말이다. '미록신(麋鹿身)'은 자신을 야인(野人)으로 자처하는 겸사로 쓰인 말이다.
식영정 주변 장원봉 기슭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음력 4월 늦은 봄에는 바람에 날아온 소나무 꽃가루가 식영정 주변을 온통 노랗게 물들였다. 임억령은 해마다 봄이 오면 소나무 꽃가루를 거둬 모아서 송화주(松花酒)를 담갔다. 그는 송화주를 담그는 뜻을 칠언절구 '송화(松花)'에 담아 읊었다.
송화(松花)
四月松花葉葉黃(사월송화엽엽황) 사월이라 송화 피어 잎마다 노란 색깔
山風吹散一庭香(산풍취산일정향) 산바람이 흩어 버려 뜰 가득 향기롭네
傍人莫怪和新釀(방인막괴화신양) 사람들아 송화로 술 담근다 웃지 마소
此是山翁却老方(차시산옹각로방) 이게 바로 산옹의 노쇠 막는 처방일세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소나무 꽃가루, 솔방울, 솔잎, 뿌리의 약성을 이용하기 위해 술을 담가서 마셨다. 시인도 노쇠를 막는 처방으로 송화주를 담근다고 했다. 그러니 무병장수를 위한 약술 담그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웃지 말라는 것이다.
1564년 임억령은 본가가 있는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는 4년 동안 성산에 머물면서 무등산과 자미탄을 중심으로 한 계산풍류의 시풍을 일으켜 호남 시가문학의 사종으로 일컬어졌다. 노론(老論)의 영수 김수항은 성산에서 머물 당시 임억령의 행적에 대해 '일찍이 창평 성산동 수석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았다. 당은 서하, 정자는 식영이라 이름하였는데 기문과 제명, 제시가 있다. 해남으로 돌아가서도 자주 왕래하며 서식하니 송강 정상공이 성산별곡의 노래를 지어 그(임억령)를 찬미한 것이 지금까지 불려 온다.'고 쓴 바 있다. 김수항의 글에서 성산별곡은 정철이 스승 임억령을 위해 지은 가사임을 알 수 있다.
임억령은 '고기가' 외에도 '귤본해산선과야이세인호이목노불역천호칭개명지왈목선작시이위지(橘本海山仙顆也而世人呼以木奴不亦賤乎請改名之曰木仙作詩以慰之)', '장편호운증양생원공섭(長篇呼韻贈梁生員公燮)' 등의 장편시도 썼다. 그가 장편시를 쓰게 된 것은 당시 심화되고 있던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과 개혁 의지를 짧은 서정시 형식에 담아내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편시를 통해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는 한편 자신이 처한 입장을 옹호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귤본해산선과.....' 시는 유자(柚子)의 불우한 처지에 빗대어 현실에 처한 임억령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시다. '고기가'는 양응정 같은 뛰어난 인물을 솥에 비유하여 그가 당세에 용납되지 못한 정치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는 시인이자 정치가로서의 임억령이 경세제민을 위한 현실의 문제점들을 관찰하면서 드러난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개혁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편호운증양생원공섭'도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것은 왕조정권과 탐관오리에 의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이었다. 임억령은 경세제민의 이상을 품은 유학자로서 피폐해진 농민들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의 '신재견화부차(新齋見和復次)' 같은 민중서사(民衆敍事) 지향의 한시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신재견화부차(新齋見和復次) - 신재의 화답시에 다시 차운하다
人家寂寂不聞鷄(인가적적불문계) 인가가 적적하니 닭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星散巖崖與瀼西(성산암애여양서) 별빛은 바위벼랑과 물가 서쪽에 흩어졌네
年穀小豊雖合上(년곡소풍수합상) 올 농사 조금 나아 세금 올림 합당하지만
民生久困不如低(민생구곤불여저) 민생이 고달픈지 오래니 낮춰줌만 못하리
조선 왕조정권과 지방수령들의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거나 야반도주하여 도적이 되었다. 텅 비다시피 한 마을에서는 닭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왕조정권은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 세금을 더 올려 받으려고 한다. 이런 처사에 대해 임억령은 '민생구곤(民生久困)'을 들어 세금을 오히려 낮춰서 받아야 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백성들이 처한 심각한 모순을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시한 것은 애민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작 태도는 그의 방외적 기질과 호탕시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재(新齋)'는 최산두의 호다. 최산두는 김종직과 김굉필을 사숙하고,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사인(舍人)으로 승진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순 동복의 나복산(蘿葍山) 아래에 유배되었다. 1533년 유배가 풀린 뒤에도 계속 동복에서 살면서 적벽(赤壁)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렸다. 문장이 뛰어나 유성춘, 윤구와 함께 '호남 삼걸'로 불렸다. 그의 제자로는 김인후와 유희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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