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4년 송순이 면앙정을 중건하자 임억령은 '면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을 지어 축하의 뜻을 나타냈다. '면앙정삼십영'은 추월취벽(秋月翠壁), 용구만운(龍龜晩雲), 몽선창송(夢仙蒼松) 등 면앙정 주변에 펼쳐진 30곳의 승경을 노래한 장편 연작시다. 김인후와 박순, 고경명도 '면앙정삼십영'을 지었다. 송순과 임억령, 김인후, 박순, 고경명의 우의가 매우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면앙정
추월취벽(秋月翠壁) - 추월산의 푸른 절벽
皎皎蓮初出(교교연초출) 갓 피어난 연꽃마냥 맑고도 밝으면서
蒼蒼墨未乾(창창묵미건) 마르지 않은 먹물처럼 짙푸르기도 해
淸光思遠贈(청광사원증) 맑은 달빛 멀리까지 보내주고 싶지만
飛鳥度應難(비조도응난) 새도 날아서 이곳 넘기는 어려울걸세
추월산(秋月山, 731m)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면서 푸르고 흰, 맑고 시원한 달빛을 멀리 보내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지만 절벽이 너무 높아 가로막고 있음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용구만운(龍龜晩雲) - 용구산의 저녁 구름
有欲曾遭醢(유욕증조해) 욕심 있어 일찌기 젓이 되기도 했었고
誇靈未免燒(과령미면소) 영험함 자랑하다 타는 것 면치 못했네
何如丘壑底(하여구학저) 어이 깊은 골짝에 숨어 사는 사람처럼
長以野雲韜(장이야운도) 오래도록 저 구름 속에 숨어만 있는고
'조해(遭醢)'는 용을 삶거나 젓담아 먹는다는 뜻으로 중국 하(夏)나라 때의 폭군 공갑(孔甲)과 그의 신하 유루(劉累)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유루는 두 마리의 용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로 젓을 담아 공갑에게 바쳤다. 공갑은 용젓갈이 맛이 있다며 더 달라고 하였다. 유루는 나머지 용으로 젓을 담가 바친다 하더라도 다시 또 달라고 할 것이 분명한데, 만약 그 명을 거역하면 포악한 공갑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 두려워 도망하였다. '미면소(未免燒)'는 아직도 거북이 점치는 도구를 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거북의 등딱지를 불에 구워 점을 쳐서 길흉을 판단했다.
신선들이 산다는 이상향인 삼신산, 그 이상향은 대도(大道)가 실현된 세상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시인은 속세와 이상향의 경계인 낙락장송에 기대 서서 이상향을 바라보는 황홀경을 노래하고 있다. '몽선(夢仙)'은 몽선산(夢仙山)으로 신선이 산다는 전설상의 산인 삼신산을 비유한 것이다.
불대낙조(佛臺落照) - 불대산의 낙조
古殿唯餘佛(고전유여불) 옛 불전에는 불상만 남았고
生臺未見僧(생대미견승) 생대엔 스님도 안 보이는데
年年啣落照(연년함낙조) 해마다 낙조 머금은 모습은
髣髴是傳燈(방불시전등) 법등을 전하려는 것 같구나
퇴락한 산사에 불상만 쓸쓸히 남아 있는데, 그 불상에 비친 낙조는 마치 법등을 전하는 신도들의 행렬 같다고 읊고 있다. 불대산의 저녁 노을을 회고조로 노래한 시다. 불대산은 지금의 불태산(佛台山, 710m)이다.
'생대(生臺)'는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에 생반을 올려놓고 짐승들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설치한 대를 말한다. '전등(傳燈)'은 불교에서 법등을 받아 전하는 의식, 또는 불법의 전수를 뜻한다.
어등모우(魚登暮雨) - 어등산의 저녁비
急雨橫林壑(급우횡림학) 소낙비가 숲 골짜기에 쏟아지니
溪流沒石稜(계류몰석릉) 시냇물에 바위 모서리 잠기지만
潛波誠可樂(잠파성가락) 물속에 있으면 정녕 즐거우리니
高處不須登(고처불수등) 높은 곳에는 올라가지 말지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어등산(魚登山, 339m)에 내리는 저녁비를 읊은 시다. 소나기로 불어난 급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시인의 호방한 시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하늘 끝까지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면 위험하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사화로 인해 많은 사림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아마도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경계하는 뜻을 담은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 황하(黃河)에 사는 황어(黃魚)가 해마다 3월이면 강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데, 용문(龍門)의 급류를 통과해야만 용이 된다는 고사와 연관지어 시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용진기봉(湧珍奇峰) - 용진산의 기이한 산봉우리
和氏抱奇璞(화씨포기박) 진기한 옥을 손에 넣은 화씨는
徒勞三獻君(도로삼헌군) 임금께 바치느라 고생만 세 번
不如深韞櫝(불여심온독) 귀한 것은 상자 깊이 감추라고
夫子有云云(부자유운운) 공자도 여러 번 말하지 않았나
광주시 광산구 용진산(湧珍山, 348m)의 기이한 산봉우리를 노래한 시다. 임억령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등으로 조광조, 유희춘 등 학식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함부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중용되지도 못한 채 고초를 겪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현명한 임금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양명(揚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은근히 담고 있다.
'화씨(和氏)'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의 변(卞) 땅에 살았던 화(和)를 말한다. 변화(卞和)는 형산(荊山)에서 진기한 옥돌을 구하여 임금에게 바친 '화씨지벽(和氏之壁)' 고사의 주인공이다. 화씨는 옥돌을 먼저 초나라 여왕(廬王)에게 바쳤는데 가짜라 하여 왼쪽 발을 잘렸고, 그 다음에 무왕(武王)에게 바쳤더니 또 옥이 아니라 하여 오른쪽 발마저 잘렸다. 마지막으로 문왕(文王)에게 바쳤더니 마침내 진기한 보옥으로 인정받았다는 고사가 있다. '용진산(湧珍山)'의 '진(珍)' 자에서 '화씨지벽' 고사를 떠올린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금성묘애(錦城杳靄) - 금성산의 저녁놀
野遠茫難辨(야원망난변) 아득한 들도 분간하기 어려운데
干雲散作霏(간운산작비) 자욱한 구름 안개비처럼 흩날려
落霞添五色(낙하첨오색) 저녁 노을 오색으로 물들어가니
欲補舜裳衣(욕보순상의) 성상의 옷을 기우기라도 하려나
나주 금성산(錦城山, 451m)의 저녁놀을 노래한 시다. '금성(錦城)'은 금성산과 중국 사천성(四川省)의 금성((錦城)을 가리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적 화자는 금성산을 바라보면서 비단으로 유명한 사천성의 금성을 떠올리고 있다. 중국의 금성은 사천성의 성도(成都) 곧 성도성(成都成)을 가리키는데, 비단으로 유명하여 금관성(錦官城)이라고도 부른다. 시인은 순임금 같은 어진 임금이 출현하는 날 오색 비단옷을 지어 바치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금성산은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리에 있는 산으로 면앙정에서는 직접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이 산의 모습이 한양의 삼각산(三角山)과 같다고 하여 나주를 소경(小京)이라고 불렀다.
서석청람(瑞石晴嵐) - 서석대의 아지랑이
廋骨蘬然橫(수골규연횡) 앙상한 뼈처럼 높이도 솟구쳐서
石之次玉者(석지차옥자) 옥에 버금가는 봉우리인 듯한데
日蒸精氣升(일증정기승) 햇살을 받아서 피어오르는 기운
非是晴嵐也(비시청람야) 맑게 어리는 아지랑이 아니던가
조선시대 선비들은 명산을 유람하고 시나 기행문을 남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임억령도 무등산(無等山, 1,187m)에 올라 봄날의 아지랑이와 저녁놀에 물든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무등산의 정기를 아지랑이로 표현한 구절이 새롭게 느껴진다.
'서석(瑞石)'은 광주와 담양, 화순에 걸쳐 있는 광주의 진산 무등산의 옛 이름이다. 무등산 제일봉인 천왕봉 남서쪽 기슭에 있는 서석대(瑞石臺)에 그 옛 이름이 남아 있다. 무등산은 천왕봉과 남동쪽의 규봉(圭峰), 서석대, 남서쪽의 입석대(立石臺)의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서석대는 석양이 비치면 수정처럼 빛난다 하여 일명 수정병풍(水晶屛風)이라고도 불린다. 둘쨋 구의 '옥'은 바로 '수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금성고적(金城古跡) - 금성산성의 옛 자취
埋沒古城堞(매몰고성첩) 옛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至今流水聲(지금유수성) 지금은 흐르는 물소리 뿐
聖朝無一事(성조무일사) 태평성대라 아무 일 없어
高下入新耕(고하입신경) 모두 다 밭갈이 시작했네
담양 금성산(金城山, 603m)에 있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허물어진 옛 성터에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시다. 금성산성의 이천골(二千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백성들이 어진 임금을 만나 태평성대를 누릴 것을 바라고 있다.
옹암고표(甕巖孤慓) - 옹성산 독바위의 우뚝한 모습
天今已出甕(천금이출옹) 하늘은 이미 독을 만들어 놓았는데
地奚不生泉(지해불생천) 땅에서 어찌 샘물이 나지 않겠는가
昭代多和氣(소대다화기) 태평한 세상에 온화한 기운 넘치니
思爲吏部眠(사위이부면) 관리들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지
화순 옹성산(甕城山, 572m) 독바위의 우뚝한 모습을 노래했다. 그 독바위에 샘물을 담아 목마른 백성들을 구원하고 싶다는 애민정신이 담겨 있는 시다. 동시에 임금과 관리들도 덕목을 갖추고 수신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소대(昭代)'는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한 세상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미화한 것이다.
죽오청풍(竹塢淸風) - 대나무 언덕의 시원한 바람
傳聞孤竹子(전문고죽자) 듣자하니 고죽국 임금 자식은
餓死西山谷(아사서산곡) 서산 골짝에서 굶어 죽었다지
眞箇聖之淸(진개성지청) 참으로 성인의 청렴이란 것은
使人膚起粟(사인부기속) 사람들을 전율케 할 정도일세
지조와 절의를 굳게 지킨 상(商)나라의 충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상기하면서 그러한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다짐을 노래한 시다. 임억령의 시에는 고대 중국의 역사적 사실들이 시적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그가 중국 고대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죽자(孤竹子)'는 중국 주(周)나라 때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와 숙제를 말한다. 주 무왕(武王)이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상나라를 칠 때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잡고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만류하였다. 무왕이 간청을 들어주지 않자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서산(西山)'은 곧 수양산을 가리킨다.
평교제설(平郊霽雪) - 들판에 개인 눈
天上玉龍鱗(천상옥룡린) 하늘에서 옥룡의 비늘같은 눈이
散落人間世(산락인간세) 인간 세상에 흩어져 떨어지는데
北闕賀班催(북궐하반최) 궁궐에선 하례하라 재촉 하지만
南山柴戶閉(남산시호폐) 남산의 사립문들은 닫혀 있구나
눈으로 하얗게 뒤덮힌 들판을 노래한 시다. 하얀 눈을 옥룡(玉龍)의 비늘에 비유한 것은 그 상서로움을 미화한 표현이다. 이어 '북궐(北闕)'로 상징되는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서설(瑞雪)이라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남산(南山)'으로 상징되는 가난한 백성들은 폭설로 고립무원의 막막한 처지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백성들의 고통은 곧 위정자들의 잘못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원수취연(遠樹炊煙) - 먼 숲에 이는 밥짓는 연기
漠漠蒼烟色(막막창연색) 짙게 낀 푸르스름한 연기가
依依遠樹間(의의원수간) 멀리 숲 새로 피어오르는데
田家不堪苦(전가불감고) 농가는 고통 참기 어려워도
人作畵圖看(인작화도간) 사람에겐 그림 속 풍경일세
바라보는 입장에서 멀리 숲 사이로 피어오르는 촌가의 밥짓는 연기는 전원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이다. 나그네들은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처럼 바라본다. 하지만 시인은 그 이면에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이 있음을 알고 있다. 나그네는 곧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방 수령이나 고달픈 농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인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탐관오리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임금이라는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광야황도(曠野黃稻) - 넓은 들판의 황금물결
昭代無湯旱(소대무탕한) 태평한 시대엔 큰 가뭄도 없으니
蒼生喜屢豊(창생희루풍) 거듭 풍년 들어 백성들도 기쁜데
前村酒價賤(전촌주가천) 앞마을 술집에는 술값도 싼 터라
擊壤和豳風(격양화빈풍) 격양가와 빈풍 노래 부르네 그려
넓은 들판의 황금물결을 바라보면서 가뭄도 들지 않고 풍년이 계속되어 저렴한 술값으로 상징되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백성들이 격양가(擊壤歌)와 빈풍(豳風) 노래를 부르는 그런 세상의 도래를 바라는 시다.
'격양(擊壤)'은 고대 중국 도당(陶唐)의 요(堯)와 우(虞)나라의 순(舜) 시절 농부들이 땅을 두들기면서 태평성대를 노래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빈풍(豳風)'은 '시경(詩經)' 가운데 국풍(國風)의 편명으로 빈(豳) 지방 농민들의 세시풍속과 농촌의 정경을 노래한 시다. 농사짓는 어려움을 노래한 농부가다.
임억령의 '면앙정삼십영' 편액
극포평사(極浦平沙) - 먼 포구의 모래사장
沙色細如篩(사색세여사) 체로 거른 듯이 고운 모래 빛깔
月明江上時(월명강상시) 달빛 환하게 강물 위를 비출 때
深思蒸作飯(심사증작반) 저 모래로 밥 지을 수만 있다면
一慰遠村飢(일위원촌기) 먼 시골 기근도 구할 수 있겠지
멀리 보이는 포구의 고운 모래밭과 강 위에 달이 뜬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 모래가 쌀이어서 그것으로 밥을 지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심정을 읊은 시다. 위정자들의 학정과 가렴주구 때문에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는 시다. 백성들에 대한 시인의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대추초가(大秋樵歌) - 대추리의 나뭇꾼 노랫소리
自是陳勞事(자시진로사) 일이 힘들다는 소리만 있으니
安知詠大平(안지영대평) 어이 태평한 노래를 읊조릴까
誰能和此曲(수능화차곡) 이런 곡에 누가 화답할까마는
林表有啼鸎(임표유제앵) 숲에는 꾀꼬리만 울고 있구나
대추리 마을 뒷산에서 들려오는 나뭇꾼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태평가(太平歌)를 아는 사람도 없고, 그 노래에 화답하는 사람도 없어 꾀꼬리만이 울음으로 화답할 뿐인 농촌의 현실을 노래한 시다. 시인은 태평가를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궁핍하고 비참한 농촌 현실을 안타까와하면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담양부사 시절 임억령은 위정자들의 가혹한 전정(田政, 토지세), 군정(軍政, 군역세), 환정(還政, 환곡이자세) 등 삼정(三政)의 문란과 온갖 명목의 부역 동원으로 아사 직전의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늘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고민했다. 그는 담양부에 가뭄이 들어도 그것을 자신의 부덕 탓으로 돌릴 만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한 목민관이었다.
목산어적(木山漁笛) - 목산 어부의 피리소리
無譜又無調(무보우무조) 악보도 없고 곡조도 없건만
聲如布穀鳥(성여포곡조) 소리는 뻐꾸기 울음만 같아
遊魚自驚猜(유어자경시) 놀던 물고기 이에 놀랐는지
深入波間藻(심입파간조) 물에 뜬 수초에 숨어버리네
목산 어부가 부는 소박한 피리소리가 뻐꾸기 울음처럼 들려온다. 그런데, 물고기는 어부의 피리소리를 듣고는 도리어 수초 사이로 숨어버린다. 왜일까? 물고기는 그 어부가 세상의 뜻을 버리고 자연에 동화되어 안빈낙도하면서 세월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강호에 숨어산다는 소문을 내서 고결함을 인정받아 이름을 낚으려는 어부, 즉 뻐꾸기 은사(隱士)로 보였던 것이다. 물고기 자신도 그런 뻐꾸기 은사로 여겨질까봐 물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물고기는 바로 시인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어적(漁笛)'은 어부의 피리소리이다. '포곡(布穀)'은 '뻐꾹'의 한자식 표현으로 '포곡조'는 '뻐꾹뻐꾹 우는 새' 곧 '뻐꾸기'를 말한다.
석불소종(石佛疎種) - 석불에서 울리는 외로운 종소리
十載爲朝士(십재위조사) 조정 벼슬살이만 십여 년
聞鐘夢每驚(문종몽매경) 늘 종소리에 놀라 깨는데
如今林下睡(여금임하수) 이제 초야에 머무는 터라
何似昔年聲(하사석년성) 어찌 이전 소리만 같을까
조정에서의 십 년 벼슬살이를 버리고 귀거래(歸去來)를 생각하고 있는 시적 화자는 산사의 범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현실적인 문제로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깜짝 놀란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침내 조정을 떠나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는 날이 오면 석불에서 울리는 종소리도 그윽하고 운치있게 들리리라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미래의 귀거래를 상상하면서 그때의 심회를 읊은 것이다.
임억령은 1557년 담양부사로 내려와 2년 동안 재직하다가 스스로 물러나 성산동(星山洞) 지금의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서하당과 식영정에 머물면서 수신(修身)과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는 그가 담양부사로 내려오기 4년 전에 지은 것이다. 담양부사로 내려오기 오래전부터 임억령은 이미 귀거래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불(石佛)'은 담양군 고서면 금현리 노채 마을에 있던 금현리사지(金峴里寺址) 불상으로 추정된다. 금현리사지에는 현재 영은사(靈隱寺)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영은사 대웅전에는 영은사석조여래좌상(靈隱寺石造如來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영산전에는 영은사석불좌상(靈隱寺石佛坐像,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5호)이 있다. '소종(疎鍾)'은 이따금 들려오는 아련한 종소리, '조사(朝士)'는 조정의 벼슬아치, '임하(林下)'는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있는 곳을 말한다.
칠수귀안(漆水歸雁) - 칠수로 돌아오는 기러기
遵著非謀稻(준저비모도) 물가 따르는 건 모이 때문 아니고
啣蘆爲避矰(함노위피증) 갈대 물어 화살 피하려 한 것이라
南歸不獨汝(남귀부독여) 너 혼자 남쪽에서 가는 건 아니나
莫道見何曾(막도견하증) 전에 본 이곳 일일랑 말하지 말게
기러기는 신의(信義)와 지혜(智慧), 전령사(傳令使)를 상징하는 새다. 시인은 기러기가 신의와 지혜가 있는 새일 뿐만 아니라 전령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곳에서 본 일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강호에 숨어 살면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소문내지 말라는 것이다. 임금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다.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 뻐꾸기 은사는 결코 되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드러나 있는 시다.
'함로(啣蘆)'는 갈대를 입에 무는 것이다. 기러기는 먹이가 풍부한 강남(江南)으로 날아왔다가 하북(河北)으로 돌아갈 때쯤 살이 너무 쪄서 높이 날 수 없는 까닭에 사람에게 잡힐까봐 두려워 입에 갈대를 물고 주살을 피한다고 한다.
'칠수(漆水)'는 칠천(漆川)으로 광산현(지금의 광산구)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과 창평의 물이 합쳐져 서쪽으로 흐른 물이 곧 칠천이다. 칠천은 벽진(碧津), 생압도(生鴨渡), 선암도(仙岩渡), 병화노진(幷火老津)을 거쳐 극락강(極樂江)으로 흘러들어 간다.
혈포효무(穴浦曉霧) - 혈포의 새벽 안개
蒼起川中霧(창기천중무) 푸른 안개 내 속에서 일어나는데
紅沈屋角暾(홍침옥각돈) 붉은 햇살 처마 끝에 물드는구나
輕風須掃去(경풍수소거) 산들바람이 저 안개 걷어 가기를
短景恐催昏(단경공최혼) 눈부신 아침 햇살 못볼까 두려워
짙은 물안개에 가려 아침 햇살은 간신히 처마 끝에만 물든다. 시인은 산들바람이 안개를 날려 버리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보지 못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안개'는 '혼돈의 세계', '미지의 세계', '간신배' 등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안개'는 강호에서 자연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시인의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는 순수 서정시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혈포(穴浦)'는 칠천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곳에 있는 포구 이름이다. '단경(短景)'은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뜻한다.
신통수죽(神通脩竹) - 신통사의 긴 대나무
曾是給孤園(증시급고원) 예전 부처님을 모셨던 이곳 절간이
今爲脩竹村(금위수죽촌) 대숲만 무성한 마을로 변해 버렸네
有心威鳳待(유심위봉대) 나를 알아줄 어진 이를 기다리건만
無緖暮鴉喧(무서모아훤) 괜히 저녁 무렵 까마귀만 시끄럽네
예전에 절이었던 곳에 신성한 대숲이 우거졌는데, 기다리는 봉황은 오지 않고 까마귀떼만 시끄럽게 우짖고 있음을 안타까와하는 시다. 대나무는 지조와 군자, 선비 등을 상징한다. 유교에서는 대나무가 성스러운 인물의 출현을 예고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에는 붉은색의 대나무가 자라는데, 그 대나무에는 큰 구슬 크기의 열매가 열리고, 봉황과 난새가 날아와 놀며, 신선들이 찾아와 즐긴다. 봉황은 오상(五常)을 두루 갖추었기에 덕치를 베풀어 태평성대를 가져올 성군(聖君)의 출현을 상징한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고,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절터에 대나무숲이 우거졌으니 이제 봉황이 출현할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시인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둔 선비로서 성군을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던 성군은 오지 않고, 소인배들만 시끄럽게 우글거린다는 것이다.
전제왕조정권 시대에 성군을 기다리는 것은 백년하청이다. 차라리 무능한 왕과 탐관오리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올바른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학사상에 철저하게 물든 선비들이 봉건적 모순의 근본적 원인인 왕조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 존재의 토대가 바로 봉건체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사상적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통(神通)'은 면앙정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신통사(神通寺)를 가리킨다. 신통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급고원(給孤園)'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사원(寺院)을 뜻하는 말이다.
산성조각(山城早角) - 산성마을의 이른 화각소리
嫋嫋風吹野(뇨뇨풍취야) 바람은 벌판에 산들산들 불고
嗚嗚角起樓(오오각기루) 성루에서는 화각을 부는 소리
海邊聲一槩(해변성일개) 변방의 해안에서 듣던 소리라
老耳不禁愁(노이불금수) 늙은이 귀엔 시름만 이는구나
산성에서 군사들 훈련하는 화각(畫角)소리가 벌판에 불어오는 바람결에 들린다. 그런데, 화각소리는 변방 바닷가에서 듣던 귀에 익은 그 소리다. 시인은 화각소리를 듣고는 문득 왜구(倭寇)들이 남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던 악몽이 떠올라서 시름이 인다. 고향 생각에 시름이 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난 시다.
1515년(중종 10)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대마도(對馬島)의 왜인들과 연합하여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일으켰다. 1555년(명종 10)에는 왜인들이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납치를 자행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임억령은 왜구들에 의해 국토의 남단이 유린되자 이를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으며, 언젠가는 왜구들을 한칼에 평정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산성(山城)'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면앙정과 관련해서는 먼저 담양군 용면 도림리와 금성면 금성리에 걸쳐 있는 금성산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담양군 무정면 오봉리 담주산성(潭州山城)일 수도 있고,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와 도곡면 내대곡에 걸쳐 있는 비봉산성(飛鳳山城)일 수도 있다. '각(角)'은 화각(畵角)을 말하며, 모양은 죽통(竹筒)과 비슷하다. 대나무 또는 가죽으로 만드는데, 표면에 채색 그림이 있으므로 화각이라 부른다. 소리가 애절하고 우렁차서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거나 대오를 정돈할 때 쓴다. 왕이나 관리가 행차할 때도 쓴디. '뇨뇨(嫋嫋)'는 바람이 솔솔 부는 모양, '오오(嗚嗚)'는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뜻한다.
이천추월(二川秋月) - 이천에 비친 가을 달
由來千里共(유래천리공) 원래 천리를 비추는 가을 달이기에
不獨二川圓(부독이천원) 유독 이천에서만 둥근 게 아니라네
皓首江湖客(호수강호객) 강호를 떠도는 백발 성성한 나그네
憑欄自未眠(빙란자미면) 난간에 기대서서 잠 못들어 하노라
소슬한 가을 밤 이천에 비친 둥근 달이 쓸쓸하다. 백발의 나그네는 강호를 유람하다가 이천에 비친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선 채 잠을 못 이루고 있다. 가을 달밤에 고독한 나그네의 심사를 읊은 시다.
칠곡춘화(七曲春花) - 칠곡의 봄꽃
不是春工巧(부시춘공교) 봄의 솜씨가 기묘하지 않은가
由來帝杼機(유래제저기) 상제의 베틀에서 나온 듯하니
織成雲錦幛(직성운금장) 아름다운 비단 장막 짜내어서
遙向小亭圍(요향소정위) 멀리 정자 주위까지 둘렀구나
만물이 생동하는 화창한 봄철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선녀가 짠 화려한 구름비단처럼 울긋불긋 산에 들에 피었다. 시적 화자는 작은 정자에서 주변에 펼쳐진 황홀한 봄경치를 만끽하고 있다. 우주에 가득한 봄의 생명 기운에 동화된 시인의 정취를 읊은 시다.
후림유조(後林幽鳥) - 뒷동산 숲에 사는 새
鸚以能言泄(앵이능언설) 앵무새는 말할 줄 알아서 갇히고
鷄緣啄粟烹(계연탁속팽) 닭은 곡식 먹어서 솥에 삶기지만
而今集於苑(이금집어원) 자네들은 지금 숲에 모여 있으니
嗟爾得全生(차이득전생) 오호 온전한 삶을 누리게 생겼네
앵무새는 말을 할 줄 알아서 새장에 갇히고, 닭은 귀한 곡식을 먹어 없애서 솥에 삶기는 신세다. 어설픈 재주나 능력 때문에 해를 당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봉록을 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목숨까지 잃는 지경에 이름을 풍자한 것이다. 뒷동산 숲속에 깃들어 사는 새들은 그럴 위험이 없기에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뒷동산 숲에 사는 새는 바로 시인 자신을 가리킨다. 시인은 잔재주도 버리고 벼슬의 녹을 먹는 것도 버려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청파도어(淸波跳魚) - 맑은 물에서 뛰는 물고기
跳躍非魚樂(도약비어락) 물고기는 즐거워 뛰는 게 아니라
人言避獺驅(인언피달구) 수달이 쫓는 걸 피하려 그런다지
何如隨雨電(하여수우전) 어떻게 하면 번개와 비를 좇아서
萬里泳江湖(만리영강호) 드넓은 강호에서 노닐 수 있을까
맑은 물에서 뛰는 물고기는 즐거워서 뛰는 것이 아니라 수달을 피하기 위해서 뛴다는 것이다. 여기서 '청파(淸波)'는 험난한 벼슬길을 뜻한다.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라는 말이 있다. 물이 너무 맑으면 숨을 곳이 없어 물고기가 살기 어렵다. 물고기는 시인 같은 선비, 수달은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權臣)을 상징한다. 물고기가 살려면 수달보다 빨라야 한다. 권신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번개 속의 비처럼 빨리 강호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인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강호로 돌아가겠다는 시인의 결심이 엿보이는 시다. 물고기가 뛰는 모습에서 벼슬살이의 험난함을 떠올린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사두면로(沙頭眠鷺) - 모래톱에서 조는 해오라기
烏向田中啄(오향전중탁) 까마귀는 밭에서 먹이 쪼고 있는데
渠又沙上蹺(거우사상교) 해오라기 모래 위에서 졸고 있다가
人驚遠飛去(인경원비거) 사람들에게 놀라서 저 멀리 날더니
直割碧山腰(직할벽산요) 곧장 푸른 산허리 가로질러 가누나
까마귀는 밭에서 부지런히 모이를 쪼고 있는데, 해오라기는 모래톱에서 한 발로 선 채 졸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놀라서 산허리를 가로질러 둥지로 날아간다. 해오라기가 있을 곳은 모래톱이 아니라 푸른 산속 즉 강호자연이라는 것이다.
까마귀로 상징되는 벼슬아치들은 벼슬살이하느라 분주한데, 해오라기로 상징되는 시인은 벼슬길에 들었지만 벼슬살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가 사화 같은 큰 풍파가 닥치자 시인은 놀라서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사대부들이 벼슬길에 나아가 경세제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결국 그것은 해오라기의 모래톱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 시이다.
간곡홍료(澗曲紅蓼) - 시냇가의 붉은 여뀌꽃
秋江傳石黛(추강전석대) 가을 강에 석대를 퍼뜨렸나
水蓼染成紅(수료염성홍) 물여뀌 물들어 온통 발가네
畫出無窮景(화출무궁경) 그림 같은 경치가 한없으니
方知帝筆工(방지제필공) 아 상제의 그림 솜씨로구나
가을 강에 석대(石黛)를 퍼뜨린 것처럼 물여뀌의 꽃이 발갛게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온 산에 들에 불이 붙은 듯 단풍이 화려한 그림 같은 경치는 신의 솜씨로 그린 듯 절경임을 노래하고 있다. 가을날의 황홀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찬탄한 시이다.
'간곡(澗曲)'은 어느 곳의 시냇가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홍료(紅蓼)'는 '붉은 여뀌꽃'이다. 옛날 중국, 조선 등 동양의 선비들은 여뀌 또는 여뀌꽃을 통해서 가을철의 계곡이나 물가의 풍경을 노래하곤 했다. '석대(石黛)'는 고대인들이 눈썹을 그리는 염료로 사용했던 청흑색 광석이다.
송림세경(松林細逕) - 송림의 오솔길
落葉何須掃(낙엽하수소) 어째서 꼭 낙엽을 쓸어야만 하는가
蒼苔不必除(창태불필제) 이끼도 반드시 없앨 필요는 없다네
高門萬馬散(고문만마산) 부귀한 집의 만리마도 놓아 두고서
幽逕一筇徐(유경일공서) 오솔길엔 지팡이 하나면 그 뿐이라
동양의 문학에서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 장수, 신선과 은둔을 상징한다. 송림 사이로 뻗은 오솔길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이상향이자 안식처에 이르는 길이다. 낙엽도 떨어져 있지 않고, 이끼도 끼어 있지 않는 길이라면 선경에 이르는 오솔길이 아니다. 다만 대궐 같은 집이나 만리마로 상징되는 화려한 벼슬살이는 다 필요없고,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시인은 지팡이 하나만 들고서 오솔길 입구에 서 있다. 오솔길은 바로 식영에 이르는 길이다.
'고문(高門)'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던 고문전(高門殿)을 말한다. 기원전 200년에 세워진 미앙궁은 산시성(陕西省) 시안시(西安市) 장안성(長安城) 서남쪽에 있다. 미앙궁은 장락궁(長樂宮)과 함께 한대의 2대 궁전 중 하나다. 부귀한 집을 상징하는 말이다. '만마(萬馬)'는 만리마, 곧 좋은 말이다.
전계소교(前溪小橋) - 앞 시내의 작은 다리
渺渺前溪上(묘묘전계상) 멀리 바라보이는 시냇물 위에
看如一字橫(간여일자횡) 한 일자 외나무다리 보이는데
村翁莫輕走(촌옹막경주) 노인네여 섣불리 달리지 마소
失足恐欹傾(실족공의경) 발을 헛디뎌 떨어질까 두렵소
앞 시내에 작은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섣불리 건너지 말라고 노인에게 당부하고 있다.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외나무다리는 강호자연의 세계와 험난한 벼슬길을 가르는 경계다. 시인은 강호자연의 세계에서 외나무다리 건너 풍파가 난무하는 험난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허명을 얻기 위해 강호에 은거하는 척하던 촌옹(村翁)이 조정의 부름을 받자 험난한 벼슬길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섣불리 벼슬길에 들어섰다가 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촌옹에게 조심하라는 것이다.
'전계(前溪)', '소교(小橋)'는 어디에 있는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묘묘(渺渺)'는 '수면이 한없이 넓은 모양, 작은 모양, 먼 모양'을 뜻한다. '의경(欹傾)'은 '기울어짐'의 뜻이다.
임억령은 '면앙정삼십영'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탐승경(探勝景), 자연관조(自然觀照), 탈속(脫俗), 무욕(無欲), 지조(志操), 태평성대(太平盛代) 등의 미의식을 구가하였다. 그는 뜻을 잃었을 때는 강호에 묻혀 학문을 닦고 성찰의 시간을 보내다가 뜻을 얻으면 벼슬길에 나아가 덕치(德治)로써 태평성대를 이루리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벼슬살이에서 환멸을 느끼자 강호에 묻혀 유유자적한 은일(隱逸)의 삶을 살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는 방외인(方外人)이었다.
광주광역시 충효동 무등산 원효계곡 풍암정
임억령은 무등산 원효계곡의 풍암정(楓岩亭,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도 들러 칠언율시 '원운(元韻)' 한 수를 남겼다. 이 시는 송파(松坡) 임식(林植, 1539∼1589)의 칠언율시 '차판상(次板上)', 만덕(晩德)의 오언절구 '사풍암(謝楓巖)'과 함께 판각되어 걸려 있다. 풍암정은 식영정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임억령의 '원운' 편액
원운(元韻)
投老逍遙水石間(투로소요수석간) 늘그막에 물러나 산수 좋은 곳 소요하니
南山映屋簇煙巒(남산영옥족연만) 남산이며 안개 낀 봉우리도 집에 비치네
傳聞楓樹千章列(전문풍수천장렬) 들으니 단풍나무도 천 그루나 벌려 있고
復道岩流五月寒(부도암류오월한) 또 바위 흐르는 물은 오월에도 차갑다지
靈境偶隨詩句落(영경우수시구락) 좋은 경치마다 우연히 싯구 이루고 보니
桃源何必畫圖看(도원하필화도간) 어찌 반드시 그림 속에서만 도원을 보랴
吾將此地棲松雪(오장차지서송설) 이곳 소나무에 눈 덮힐 때까지 머물다가
然後乘螭入海山(연후승리입해산) 그런 뒤 용을 타고 해산으로 들어가리라
단풍과 바위 경치가 뛰어난 풍암정의 승경을 묘사한 뒤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다가 신선세계로 떠나가리라 읊고 있다. '해산(海山)'은 해중산(海中山)으로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임억령의 고향 해남을 가리킨 듯하다. 그가 식영정에서 2년 정도 머물다가 돌아간 곳이 바로 해남이기 때문이다.
'승리(乘螭)'는 '초사(楚辭)' <섭강(涉江)>의 '청룡 타고 백룡 몰고서 나는 중화와 요포에서 놀리라(駕靑虯兮驂白螭 吾與重華遊兮瑤之圃).'에서 유래한 말이다. 중화(重華)는 우순(虞舜)을 부르는 호칭이다. 화(華)는 광화(光華)의 뜻이니, 우순이 거듭 광화(重華)한 바가 당요(唐堯)와 같다는 말이다. 요포(瑤圃)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신선이 사는 곳이다.
풍암정은 풍암(楓岩) 김덕보(金德譜, 1571~1627)가 김덕홍(金德弘)과 김덕령(金德齡) 두 형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정자다. 김덕보는 큰형 김덕홍이 1592년 조일전쟁 때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전사하고, 작은형 김덕령도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웠음에도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반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옥사하자 세상을 등진 채 향리에서 가까운 원효계곡에 풍암정을 짓고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풍암정은 1592~1596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봐야 한다.
'원운'은 문집 '석천집(石川集)' 6권에 '차풍계운(次楓溪韻)'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누정시는 대개 그 누정을 찾은 사람이 쓴 시를 판각해서 걸게 된다. 1568년에 세상을 떠난 임억령의 시는 어떻게 풍암정에 걸리게 되었을까? 1568년 이전에는 풍암정이 없었을 것이니 임억령이 생전에 쓴 '원운'을 그가 죽은 뒤에 후세인이 판각해서 걸었을까? 아니면 임억령 생전에 풍암정이 있었던 것일까? 풍암정 건립 연대에 대해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만덕은 김대기(金大器 1557∼1631)의 호로 추정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 임류정
임억령은 어등산 기슭 박산마을 양응정의 임류정(臨流亭,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도 들렀다. 임류정에는 임억령의 '송양평사(送梁評事)'란 제목의 오언고시가 정자 주인의 오언절구 '증승(贈僧)'과 함께 판각되어 걸려 있다. 한글 번역문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훨씬 후대에 판각한 것으로 보인다.
임억령의 '송양평사' 편액
송양평사(送梁評事) - 양 평사를 보내며
六駁食猛虎(육박식맹호) 육박이 사나운 범 잡아먹으니
眼空駑馬群(안공노마군) 노둔한 말떼는 보이지도 않네
一朝奮尾鬣(일조분미렵) 하루아침에 꼬리 갈기 떨치고
稜稜出九垠(능릉출구은) 까마득히 하늘 높이 솟았구나
有如梁公燮(유여양공섭) 양공섭 같은 인물이 있었으니
峻節凌長雲(준절능장운) 드높은 절개는 장공에 솟았네
豈若腐儒然(기약부유연) 어찌 완고하고 썩은 선비처럼
老死於典墳(노사어전분) 고서들 속에서 늙어 죽으리요
恥作濟南生(치작제남생) 제남의 복생은 수치로 여겼네
九十誦古文(구십송고문) 구십살에야 고문 암송한 것을
常恨邊無人(상한변무인) 변경에 인물 없음이 한스러워
狄犬公然狺(적견공연은) 오랑캐 개들 공연히 짖어대네
笑投太史筆(소투태사필) 웃으며 태사의 붓을 내던지고
遠投李將軍(원투이장군) 멀리 이장군을 찾아 의지했네
將軍今李牧(장군금이목) 장군은 지금 이목이란 분이니
聲名九重聞(성명구중문) 그 명성 구중궁궐까지 들렸네
采爾幕中畵(채이막중획) 그대의 막중 계책 채택됐으니
蜂屯不足焚(봉둔부족분) 벌떼무리들 태울 것도 없도다
高士報國耳(고사보국이) 고사는 나라에 보답할 뿐이라
齊珪何必分(제규하필분) 벼슬의 높고 낮음 가리려는가
歸來伴此老(귀래반차노) 돌아오면 이 늙은이와 벗하여
共耕滄江濆(공경창강분) 함께 창강변에서 농사나 짓세
'박(駁)'은 얼룩말, '노마(駑馬)'는 걸음이 느리고 둔한 말이다. '전분(典墳)'은 오제(五帝)의 서(書)인 '오전(五典)'과 삼황(三皇)의 서인 '삼분(三墳)'을 말한다. ‘고서’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제남생(濟南生)'은 제남(濟南) 출신의 명유(名儒) 복생(伏生)을 가리킨다. 한(漢) 문제(文帝) 때 '상서(尙書)'를 강의할 사람이 없자, 진(秦)나라 때 박사(博士)를 역임한 뒤 제(齊), 노(魯) 사이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복생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당시 나이 90여 세의 노인이라서 여행을 할 수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그에게 배우고 오도록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漢書 卷88 儒林傳 伏生). '이목(李牧)'은 전국시대 조(趙)나라 장수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안문(雁門), 대(代) 지방에서 흉노의 침입을 막았는데, 흉노가 많은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기이한 병진(兵陣)을 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기병 10여 만을 죽였다. 그 후로 흉노는 멀리 달아나 10여 년간 조나라 땅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명이인의 조선 장수일 수도 있다.
이 무렵 임억령은 '산정십오경(山亭十五景)'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생질 박백응이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왔다. 임억령도 동기 간의 애틋한 정을 담아 지은 시를 하나뿐인 누이와 조카 박백응, 박중응(朴仲凝)에게 부쳤다. 홀로 된 누이에게 동기 간의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심정으로 위안하고, 두 조카에게는 시서(詩書)에 힘쓸 것을 권장하는 시다.
누이에게
遠憶烏松裡(원억조송리) 멀리 검은 소나무 안동네를 생각하니
遙憐寡妹存(요련과매존) 홀로 살아가는 내 누이동생이 가엽네
寬心唯二子(관심유이자) 너그러운 마음은 두 아들에게만 쏟고
慰寂是諸孫(위적시제손) 고적함을 달래주는 건 손자들 뿐이지
조카들에게
歸心雖自切(귀심수자절) 돌아가고 싶은 마음 비록 간절하지만
樂事不堪論(낙사불감론) 즐거운 일 논함도 감당하지 못하여라
門戶須諸姪(문호수제질) 문호를 여러 조카들에게 다 맡겼으니
詩書仔細溫(시서자세온) 시와 글씨를 모두 자세히 익히시게나
박백응, 중응 형제는 일찍부터 외삼촌 임억령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바 있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뛰어났던 박백응은 진사시에 합격한 뒤 진안현감을 지냈으며, 박중응은 시를 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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