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5년(명종 19) 4월 6일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을 제거한 뒤 권력을 장악했던 주인공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났다. 9월 18일에는 외척인 정언홍, 언식 형제가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어 백광훈이 찾아와 시를 주고받았다. 그는 임억령의 종매(從妹) 손서(孫壻)이기도 했다
임억령은 박순의 부탁으로 그의 부친 박우를 추모하는 묘갈명(墓碣銘) '유명조선육봉선생묘갈명병서(有明朝鮮六峯先生墓碣銘幷序)'를 지었다. 박우는 임억령의 스승이기도 했다.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엽마을 박우 묘소
[나의 벗 박순 군이 편지로 부탁하기를, '몇 월 며칠에 선친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는데 비문을 지금까지 짓지 않은 것은 실로 기다린 바가 있어서다.'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육봉 선생의 문학과 덕행은 남쪽 사대부들이 북두칠성처럼 우러러보고 있으니만큼 옛 한유(韓愈)나 유종원(柳宗元) 같은 당대의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의 큰 글을 찾아서 받아야만 후세에 전해져 길이 빛날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감히 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또 생각해보니, 박군이 서울의 문인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내게 부탁한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육봉의 문하에서 매우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내가 작은 그릇으로 바다를 헤아리는 것과 같아서 선생의 폭과 깊이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비할 경우에는 또한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처럼 깊이 알고 굳게 믿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어찌 재주가 없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
선생은 본래 중원(中原, 충주) 사람이었다. 고조 휘(諱) 세량(世梁)은 고려 광정대부(匡靖大夫)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증조 휘 광리(光理)는 중산대부(中散大夫) 민부의랑(民部議郞)이었다. 조부 휘 소(蘇)는 조선조에 들어와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 벼슬이 은산군 사(殷山郡事)에 이르렀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추증(追贈)받았다. 부친 휘 지흥(智興)은 성균관 진사로 광주(光州) 봉황산(鳳凰山) 밑에 집을 짓고 순수하고 담담하게 살았는데, 일찍이 권남(權擥) 등과 같이 유학하였다. 권남이 광릉(光陵, 세조)을 보필하자 공의 그릇이 큰 것이 생각나 공을 추천하려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출사를 권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받았다.
처음에 나주 정씨(羅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죽었고, 뒤에 계성 서씨(桂城徐氏)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이 며느리를 대할 적에 엄하면서도 예절이 있었으므로 가정이 조정처럼 숙연하였다. 정부인(貞夫人)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3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박정(朴禎)은 성균관 생원(生員)인데,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했다. 선비들이 추앙하여 모두 백미(白眉, 촉나라의 馬良)처럼 훌륭하다고 칭송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도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로 와서 한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예우하며 나라의 그릇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박상(朴祥)은 과거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갔다. 도량이 높고 마음이 강직하여 대중 속에 우뚝 섰으며 학문이 넓고 사려가 뛰어났다. 그의 저서 <눌재집(訥齋集)>이 간행되었다.
선생은 그 중 막내이다. 선생의 휘(諱)는 우(祐), 자(字)는 창방(昌邦)인데,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에게 글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식견이 높고 늠름하게 빼어나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나날이 발전하여 탁월하게 일찍 성취되었다. 중종조(中宗朝) 때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이때부터 학문이 더욱더 풍부해지고 명성도 더욱 크게 났다. 그 뒤 4년에 또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교서관(校書館)에 배속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고,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모친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외직을 요청하여 흥덕현감(興德縣監,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으로 나갔다. 그때 공의 둘째 형이 이미 순천현감(順天縣監)으로 나가 있었으므로 모친이 따라갔었다. 그런데 몇 달 있다가 모친이 병들자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둘째 형과 같이 모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관대(冠帶)를 풀지 않고 곁에서 시중을 들며 약물을 맛보지 않으면 감히 드리지 않았다. 모친이 결국 돌아가시자, 슬퍼하고 사모하다가 야위는 등 상례(喪禮)를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랐다.
상복을 벗자 다시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관동(關東) 관찰사 막하의 보좌관으로 나갔다. 막하에서 일을 기획하면서 의리에 따라 하고 의리로 보아 불가하면 따르지 않자 감사(監司)가 꺼렸다. 조정으로 들어와 호조 정랑(戶曹正郞)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경연(經筵)에 들어가기 전에 분향(焚香) 재계(齋戒)하였고 나아가 학문을 강론하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진퇴소장(進退消長)하는 관계,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출입하고 위미(危微)해지는 기틀, 옛날 제왕(帝王)의 치란(治亂)과 흥망한 연유 등에 대해 반드시 반복해 미루어 밝혔다. 말뜻이 간절하고 의기가 간곡하여 주상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므로 주상이 공의 충성을 깊이 알았다.
그로부터 3년 뒤 병으로 사직하고 공조 정랑(工曹正郞),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전직되었다가 이윽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집의(執義)로 승진했을 때 간곡히 사양하자 다시 성균관 사예(司藝)를 제수받았다. 며칠 뒤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특별히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는데, 말을 잘하지 못한 것 같았으나 정의를 해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끝까지 논의하되, 안색은 화평하고 말씀은 강경하였다. 또 극력 사양하여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전직했다가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성균관 사성(司成)을 지내고,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이 되어 조용히 계도하여 보필한 바가 매우 많았다. 그 뒤 보덕(輔德)으로 옮기었다가 특별히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고, 전한(典翰)으로 전직되었다가 또 특별히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순서에 따라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또 특별히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여러 고을에서 음식을 성대하게 차리는 것을 앞다퉈 숭상하였는데, 선생이 몸소 검소로 이끌면서 통렬히 억제하니, 이내 한 방면이 교화되었다. 병환으로 인해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또 특별히 우승지(右承旨)에 임명하였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올바른 선비를 미워하여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였으므로 선생이 내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 외직을 요청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
임지에 도착하여 직책을 신중히 수행하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관리를 엄하게 다스리니, 온 경내가 부모처럼 추앙하였다. 그때 허확(許確)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었다. 그의 아들 허흡(許洽)과 허항(許沆)이 문안하러 찾아가자 온 도내가 뒤질세라 앞다퉈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만 찾아가지 않다가 허확 부자가 재삼 요청하자 부득이 한번 공관으로 찾아가 보고 인사가 끝나자 환담도 나누지 않고 곧바로 일어났다. 이에 허흡 형제가 앙심을 품었다.
1년이 지나 선생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주(羅州)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2년 뒤 특별히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그 명이 취소되었다. 그때 허항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무리들과 교묘하게 선생을 비방하다가 이내 탄핵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내보냈다. 주상이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불법을 저지른 수령을 살피도록 하였다. 허항 형제의 사주를 받은 어사가 갑자기 들이닥쳐 하자를 캐다가 거짓말로 '사신(使臣)의 접대를 소홀히 했다.'고 아뢰어 파직하였다.
또 2년 뒤 다시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는데, 허항 등이 또 탄핵하여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 해주는 관서(關西)의 큰 고을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다. 선생이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고을에 가르칠 만한 선비를 선발하여 문장만 가르치지 않고 예절과 효제(孝悌)의 방도도 가르쳤다. 이로 말미암아 인재의 배출이 영호남에 못지 않았다.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고 하자 백성들이 선생의 화평하고 청백하며 은혜로운 것에 대해 쓴 상소를 가지고 한양으로 달려가 사헌부에 고하였는데, 유임해 줄 것을 원하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사헌부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또 서로 이끌고 감사(監司)를 찾아가 아뢰어 감사가 보고하니, 주상이 특별히 옷감 한 벌을 하사하여 포상하고 유임은 허락하지 않았다. 해주를 나설 때 백성들이 모두 나와 성문을 닫고 사람마다 말을 에워싸고 떠나지 못하게 하자, 선생이 선정을 배풀지 못하였다고 사죄하면서 타일러 보냈다. 오후 서너 시 무렵에 비로소 성문을 나섰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대고 떠나는 행차를 바라보았다.
상경하는 도중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일찍이 총애받는 권신(權臣)의 노여움을 사 배척을 당하여 기용되지 않은 바람에 외직에 10년 가까이 있었다. 이 명이 하달되자 벼슬아치들이 너나없이 공의 상경을 기뻐하였고 유생(儒生)들은 본받을 바가 있게 되었다. 몇 달 있다가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가 어떤 일로 인해 파직된 뒤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 개성의 풍속이 부당한 귀신을 믿자 무당들이 괴이한 신을 빙자하여 거짓말로 현혹해 재물을 좀먹고 백성을 해친 지 오래 되었는데, 선생이 통렬히 금하고 다스려 요망한 무당을 용서하지 않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인조조(仁祖朝) 때 다시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하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을 감수(監修)하였다.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치사(致仕)할 나이가 되었는데 녹봉에 얽매여 있을 바에야 구차하게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외직을 요구하여 전주부 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 전주는 호남의 가장 큰 고을이었으나 선생이 여유롭게 복잡한 업무를 잘 처리하자 온 지역이 잘 다스려졌다.
부임한 지 7개월만에 병이 나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가정의 살림이 여유가 없어 집안이 쓸쓸하였으나 주위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놔두고 스스로 즐겼다. 감사가 선생이 청백한 절개를 지녔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주상이 특별히 명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고 청백리(淸白吏)로 기록하였다. 선생이 주상의 은혜에 대해 사례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아! 저 하늘이 봐주지 않은 바람에 병을 앓다가 정미년(丁未年, 1547년 명종 2) 윤9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대부들은 조정에서 조문하고 사림들은 집에서 곡하면서 입을 모아 말하기를, '선인(善人)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 이듬해 3월 9일 나주 남쪽 마산리(馬山里) 백봉산(白鳳山, 지금의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엽마을)에 장례를 치렀다. 정부인 김씨(貞夫人金氏)와 같은 자리에 따로 묻혔다.
부인은 당악 김씨(棠岳金氏, 당악은 해남의 별칭)로 부친은 성균관 생원 김효정(金孝禎), 조부는 강진현감(康津縣監) 김종(金琮)인데, 선생보다 20년 전(1528년 중종 23)에 세상을 떠났다. 2녀 2남을 낳았다. 큰딸은 유학(幼學) 허강(許剛), 둘째 딸은 단성현감(丹城縣監) 염주(廉宙)에게 시집갔다.
큰아들 박개(朴漑)는 전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인데, 위인이 골격이 청수하고 시에 능하여 과거 길로 진취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한적한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적막한 물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살았으니, 정말 옛날의 연파조도(烟波釣徒)라 하겠다. 둘째 아들 박순은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 대과(大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금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는데, 인물이 깨끗하여 얼음병이나 옥나무와 같고 문학과 행실이 또래들보다 특출하여 ‘선생의 자제답다.’고 일컬어졌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순은 골격과 모발이 보통 사람보다 다르니, 후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한가로이 지낼 때 행실이 더욱 높았고 덕이 더욱 컸으며, 밖으로는 화평하면서도 안으로는 지향하는 바가 있었고 사람과 사귈 적에 오래 될수록 더욱더 공경하였으며, 사람에게 한 가지 선행이 있으면 미치지 못할 것처럼 추앙하고 권장하였다. 옳지 않은 말이나 예절에 벗어난 빛을 한번 눈과 귀에 접했을 경우에는 병이 몸에 있는 것처럼 여겨 온종일 좋아하지 않았고, 세력의 길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보이기만 해도 피하여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염려하였다.
만년에는 시율(詩律)이 더욱 정교해져 깨끗하고 온화하며 그윽하고 절묘하였으며, 기타 찬(贊), 명(銘), 서(書), 부(賦), 잡저(雜著)도 모두 단아하고 굳건하며 기발하고 위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스스로 기뻐하지 않고 매양 ‘덕행이 근본이고 재예(才藝)는 지엽이다.’고 말하였다. 아! 선생이 간직한 바가 컸으나 주현(州縣)에만 시행하였으니, 비록 치적이 으뜸갔어도 조금만 베풀어 본 것이다. 선생이 72세까지 살았으니, 장수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 덕에 비교해 볼 때 나의 마음이 슬프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당(唐)나라 팔원(八元)과 한(漢)나라 팔룡(八龍), 명(明)나라 삼걸(三傑)은 모두 유림(儒林)의 사표(師表)였도다. 덕성(德星)이 한 곳으로 모이니, 우리 유도(儒道)가 동방으로 건너온 것이도다. 노(魯)나라의 한 잔 물이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지위가 겨우 귀(貴)에 통하고 말았으니 경(卿)도 아니고 공(公)도 아니었으며, 연세가 칠순에 이르렀으니 교(喬)도 아니고 송(松)도 아니었도다. 용이 진흙탕에 있으니, 뱀들이 득세하였도다. 앞길을 장창(臧倉)이 가로막은 것이 아니니, 하늘을 믿기 어렵도다. 오직 문장으로 남기니, 해와 별처럼 찬란하였도다. 대대로 청백하니, 후손이 성취되었도다. 탐욕한 자들은 모두 귀하였지만 공은 이와 반대로 영광스러웠도다.]
임억령은 묘갈명에 그의 스승 박우가 남원부사로 있을 때 전주부윤 허확, 그의 아들 흡, 항과의 갈등으로 미움을 받아 외직으로 오랫동안 밀려나 있게 된 사연을 자세히 적었다. 또 지방에서의 선정과 함께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음사(淫祀)를 배척한 것도 기록했다.
'백미(白眉)'는 삼국(三國) 촉한(蜀漢)의 마량(馬良)으로 자(字)는 계상(季常)이다. 그의 형제 5명이 모두 '상(常)' 자로 자를 지었고 재주가 있었다. 그중 마량은 눈썹이 하얗고 재주와 학문이 더욱더 출중하였으므로 향리에서 '마씨 오상(五常) 중에 백미가 가장 휼륭하다.'고 하였다. '연파조도(烟波釣徒)'는 안개 끼고 물결치는 곳의 낚시꾼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장지화(張志和)가 어버이가 죽은 뒤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江湖)에 은거하며 스스로 연파조도(烟波釣徒) 혹은 연파주도(烟波酒徒)라 칭하였다.
'당(唐)나라 팔원(八元)'은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고신씨(高辛氏)의 재자(才子)인 백분(伯奮), 중감(中堪), 숙헌(叔獻), 계중(季中), 백호(伯虎), 중웅(仲熊), 숙표(叔豹), 계리(季貍) 등 여덟 현인(賢人)을 말한다. '원(元)'은 선량하다(善)는 뜻이다. '한(漢)나라 팔룡(八龍)'은 순가팔룡(荀家八龍)을 이른다. 순가팔룡은 중국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의 문신인 순숙(荀淑)의 여덟 명의 아들 순검(荀儉), 순곤(荀緄), 순정(荀靖), 순도(荀燾), 순왕(荀汪), 순상(荀爽), 순숙(荀肅), 순전(荀專)이 모두 훌륭했기 때문에 함께 부르는 말이다. '덕성(德星)'은 후한 때 진식(陳寔)이 자질(子姪)들과 함께 순숙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덕성이 마침 그 분야에 닿았으므로, 태사(太史)가 '5백 리 이내의 현인이 한데 모였다.'라고 아뢴 고사이다.(續晉陽秋)
'교(喬), 송(松)'은 고대의 신선 왕자교(王子喬)와 적송자(赤松子)를 말한 것지만 신선처럼 오래 살지 못 했다는 뜻이다. '장창(臧倉)'은 노(魯)나라 평공(平公)이 총애하는 신하였다. 노 평공이 맹자(孟子)를 찾아가 보려고 하니, 장창이 맹자를 비방하면서 찾아가 보지 말라고 하였다. 악정자(樂正子)가 맹자에게 말하기를, '제가 노 평공에게 말하여 찾아뵙기로 하였는데, 장창이란 자가 저지하였습니다.'라고 하니,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시켜서 가기도 하고 사람이 저지하여 가지 않기도 하지만 행지(行止)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 평공을 만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장창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566년(명종 21) 71세의 임억령은 광주의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풍영정십영' 가운데 한 수인 '유시장림(柳市長林)'을 읊었다. 이때 정사룡, 정철, 백광훈, 양응정도 임억령과 더불어 시를 주고받았다. 광주 공북루는 절양루(折楊樓)로도 불렸다. 당시 공북루 근처에는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북루는 조정으로부터 임금의 조칙(詔勅)이나 사명(使命)이 있을 때 지방 수령이 한양을 향해서 그 명을 받았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주부 관원들과 함께 궁궐이 있는 북쪽을 향해서 예를 올린 곳이다. 따라서 전국의 주도(州道)에는 대부분 공북루가 있었다. 광주의 공북루는 광주읍성 북문 밖, 지금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자리에 있었다. 공북루가 폐허가 되자 그 자리에 희경루(喜慶樓)가 들어섰고, 지금은 희경루도 사라지고 없다.
1567년(명종 22) 2월 임억령의 손자 임극돈(林克敦)이 태어났다. 6월 28일 명종이 경복궁 양심당(養心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중종의 손자 이연(李昖)이 조선의 제14대 왕위에 올랐다. 이 왕이 곧 선조(宣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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