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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임억령의 식영정을 찾아서 17 -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다

林 山 2017. 12. 21. 14:50

임억령은 제자 정언홍, 언식 형제가 과거에 낙방하자 이들을 위로하는 시를 지었다. 정언식은 임억령의 증손녀사위이기도 했으니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쌍정낙제환향영정전벽도송원(雙鄭落第還鄕咏庭前碧桃送遠)

낙제하고 돌아온 정씨 형제를 뜰 앞 벽도나무 앞에서 보내며 읊다


吾將薦金盤(오장천금반) 내가 장차 금쟁반에 올려서

獻與鹽海伹(헌여염해저) 바치려 했지만 염해가 막네

但使本根在(단사본근재) 다만 뿌리만 그대로 있다면

暫棄安足吁(잠기안족우) 잠시 버려짐 어찌 탄식하리


'금반(金盤)'은 익선관(翼善冠) 뜻으로 임금을 비유한 말이다. '염해(鹽海)'는 과거에 낙방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근본이 충실하면 지금은 비록 과거에 실패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이다.


1567년(명종 22) 임억령의 제자 정언식과 임발영(任發英)은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떠났다. 임억령은 두 제자를 보내면서 합격을 기원하는 시를 지어 읊었다. 임발영은 임억령의 종 외손자이기도 했다. 


취중주필송정언식임발영부시(醉中走筆送鄭彦湜任發英赴試)

과거 시험을 보러 떠나는 정언식 임발영을 보내며 빨리 짓다


建筆似禿篇(건필사독편) 건강한 붓도 몽당 빗자루 같지만

興發隨風掃(흥발수풍소) 흥취가 남에 바람을 따라 휘젓네

無邊滄海環(무변창해환) 가없는 검푸른 바다가 둘러 있고

不盡靑山繞(부진청산요) 끝이 없는 푸르른 산도 둘러섰네

二妙赴秋圍(이묘부추위) 두 뛰어난 제자 시험장에 나가니

大鳴如雙鳥(대명여쌍조) 두 마리의 새처럼 크게 울지어다

長翤揷汝身(장시삽여신) 긴 날개를 그대들 몸에 달았으니

雲程不難到(운정불난도) 벼슬에 이르는 길 어렵지 않으리


정언식과 임발영의 재주로 볼 때 과거 시험에 꼭 합격하리라는 믿음을 읊은 시다. '추위(秋圍)'는 가을에 보는 과거 시험이다. '운정(雲程)'은 영광의 길이니 곧 벼슬길을 뜻한다.  


그해 12월 유희춘이 해남 마포로 임억령을 찾아왔다. 해남 해리 출신의 유희춘은 14세 때 담양 처녀와 결혼하여 처가에 정착했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으로 있던 유희춘은 을사사화 2년 뒤 사림파 제거를 위한 을사공신들의 정치공작 양제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기화로 터진 정미사화(丁未士禍)로 인해 권벌(權橃), 이언적(李彦迪), 정자(鄭滋, 정철의 형), 노수신(盧守愼), 백인걸(白仁傑) 등과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19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전라감사와 대사헌을 지냈다. 임억령과 유희춘은 관향이 같은 선산(善山)인데다가 고향도 같은 해남이어서 남다른 우의를 나누고 있었다. 


유희춘은 두 사람의 인연을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남겼다. '미암일기' 12월 5일자에는 '임담양(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에 대한 존칭)을 찾아뵈었는데 병중에 방안으로 인접을 하여 회포를 하나하나 털어 놓았고, 심지도 솔직했는데 돌아가시면 안타까운 일이다.', 5월 16일자에는 '전복 10개와 노루 뒷다리 하나를 임석천 영공에게 보냈더니 임석천이 사람을 시켜 사례의 편지를 보내왔다.', 5월 17일자에는 '임담양 영공을 찾았으나 병환이 심하고 사양을 하여 그대로 돌아왔다.'고 쓰고 있다.   


같은 해 말년의 임억령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제자 정언홍, 언식 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를 했던 것이다. 스승에게 제자의 입신양명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훗날 정언홍의 벼슬은 공조정랑(工曹正郞), 언식은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렀다. 임발영도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했다.   


해남의 초계 정씨 후손들은 대대로 이 지역의 호족으로 최부, 윤구, 임억령, 윤선도 등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어 이들을 해남 땅에 정착하게 했다. 최부는 부인, 윤구는 어머니, 임억령은 할머니가 초계 정씨였다. 윤구의 외할아버지와 임억령의 할머니는 친남매 간이었다.


임억령이 정언홍, 언식 두 형제를 위해 지어준 시가 있다. 임억령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정언홍, 언식 형제를 매우 아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증족질정언홍언식곤제(贈族姪鄭彥洪彥湜昆弟) - 조카뻘 정언홍 언식 형제에게 주다 


明珠生海底(명주생해저) 야광주가 바다 밑에서 나왔는데

高價越連城(고가월련성) 값이 커다란 성보다도 비싸다네

豈久深藏櫝(기구심장독) 어찌 오랫동안 깊히 감춰두리오

應令萬目驚(응령만목경) 마땅히 만인을 놀라게 해줘야지


우언홍(右彥洪) 위 시는 언홍에게


隣家英物出(린가영물출) 이웃집에 걸출한 인물 나왔는데

天上石麒麟(천상석기린) 총명이 뛰어나 천상 석기린일세

墮地心千里(타지심천리) 나면서부터 마음은 천리 헤아려

徐陵是後身(서릉시후신) 양나라 천재 서릉의 후신이로세


우언식(右彥湜) 위 시는 언식에게

'석천선생시집' 권4(石川先生詩集卷之四) 


'곤제(昆弟)'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를 말한다. '천상석기린(天上石麒麟)'은 양(梁)나라 문인(文人) 서릉(徐陵)이 처음 태어났을 때 보지(寶誌)라는 승려가 와서 보고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이 아이는 천상(天上)의 석기린(石麒麟)이다.'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임억령은 1568년(선조 1) 3월 9일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문암재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이 별세하자 제자인 고경명은 장편의 만시(輓詩)를 지어 스승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늘에 닿도록 드높은 두륜산 기운, 굼실굼실 내려와 동주에서 막혔네

지령에 따라서 뛰어난 인물도 태어나고, 진귀한 보배도 많이 나온다네

선생 같은 역량 어디에 비할까, 기린처럼 희귀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와

몇 길 되는 옥수가 빼난 듯하였고, 한해에 세 번 피는 지초와도 같았네

번쩍이는 보검이 하늘에 치솟는 듯, 깨끗한 얼음이 옥병 속에 있는 듯

깊은 생각은 천지도 겨룰 수 없었고, 넓은 가슴 운몽택도 삼킬 만했네

강호에서 노닌 풍류 당할 자 드물었고, 사부를 지을 때도 늘 선두였네

뛰어난 재주는 이태백과 다름없고, 세상 비웃는 마음 장주와 같았다네

객난 따라 금마문에서 피세하고, 황각길 어긋나자 시 짓기에만 힘썼네

소산의 계수나무 그 얼마나 읊었더냐, 중산의 거문고도 한없이 뜯었지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돌아 다녔으나, 깨끗한 옷 더럽힌 걸 후회한다오

풍운 한북의 쌍룡궐 떠나와서 대숲 우거진 강남의 수묘궁에서 살았네

무상한 세상사 구름처럼 변하건만, 굳은 절개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네

단청각 위에 남긴 초상 없지만, 연단하는 난로 속에 뭇 걱정 사라졌네

치솟는 불평을 가끔 울리기는 했어도 나라 위한 충성은 한결 같았다네

황도를 따라는 해 보고 싶어서, 형운이 벗어지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네

한 시대의 인물들 모두 밀려나자, 백발을 날리면서 미인을 생각했다오

뛰어난 중랑도 소용 없거늘 하물며 훌륭한 안석을 그 누가 알아주리요

가태부가 이를 좇아 들어오기 전에, 정호에 궁검이 갑자기 떨어졌구나

새 임금이 착하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모시려는 생각 갖기도 했었지

나이 너무 늙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들어만 준다면 해낼 수도 있었지

세상사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아 아름다운 산수 찾아 구경만 다녔다네

아양곡 읊으면서 어디로 갈까나, 꿈속에 학을 타고 관동으로 날아갔지

경포대 달 밝은 밤에 바람도 쐬고, 금강산 상상봉에서 휘파람도 불었네

창랑의 소자미도 만난 듯도 하고 구루에 갈선옹도 보이는 것 같았다네

아침 저녁으로 맑은 공기 마셔 가면서 오르락내리락 한 세월 보냈다네

어지러운 세상소리 듣기 싫어 청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았지

달리던 청우는 점점 보이지 않고, 날아가던 백학도 돌아오지를 않았네

저 하늘의 옥황상제님 명을 받고서는, 백옥루의 기문 쓰려 가버렸다오

시골의 뭇 선비들도 흐느껴 울었고, 서울의 친구들도 한숨만 쉬었다네

그토록 빛나던 봉황은 어디로 갔는지, 희미한 소미성조차 숨어 버렸네

신령스런 시채도 찾아볼 수가 없고 우뚝한 산두도 찾을 수가 없었다네

깨끗한 수감도 땅 속에 묻히고, 이름난 문장만이 상자 속에 남아 있네

그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발간할 수 있을지, 외로운 상제는 힘이 없도다

묘터만은 며칠 전에 잡아 놓았으나 장사를 지낼 준비가 한걱정이라네

쓸쓸한 옛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월악산 기슭에 소슬한 비가 내린다

용문에 의탁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랑 받았다네

못생긴 이 몸을 가르칠 만하다고,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이끌어 주셨지

재주가 너무나 둔하고 어리석은 탓에, 금옥 같은 그릇 못 만들었다네

그래도 발신하려고 한양에 왔을 때 가끔 모시고서 여쭤보았드랬지요

가을철 어느 날인가 달 밝은 밤에 필운봉 기슭에 앉아서 술을 마셨지

나그네 타향살이하면서 지난 세월이, 어언 십여 년이 훌쩍 지났는데

옛날의 꼿꼿한 성질을 버리지 못해, 이리저리 어울리기 아주 싫었네

옥윤 따라 함장에 나아가려고, 굳게 약조하고 가을 오기만 기다렸지

뜻밖에도 오늘 부고를 받고서 눈물 닦고 만사 쓸 줄 참으로 몰랐네요

술잔 올리고 제문 읽는다 해도 가슴속에 쌓인 한 다 말하기 어려운데

훗날 훌륭한 묘지를 짓게 되면, 부족한 문장으로 어떻게 써야 할지요

서리 내린 고개엔 낙엽만 날리고, 해 저무는 산양엔 피리소리 처량해

강한 같은 문장 다시 볼 수 없는데, 산하의 원기도 그만 다 사라졌네

나중에 양담 같은 울음 터질 때면 송추에 밤달이 환하게 떠오를 거요


고경명은 만시에서 스승의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함을 칭송하면서 그가 15세 되던 해 임억령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를 보려고 한양으로 올라가 스승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고 있다. 스승은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이끌었지만 자신은 그릇이 작아 기대에 못 미쳤다면서 스승의 죽음을 애도했다. 스승을 흠모했던 고경명은 어디서나 임억령의 시를 만나면 차운시를 지어 사제간의 곡진한 정을 노래했다. 


백광훈도 만시를 지어 스승 임억령의 죽음을 애도했다. 백광훈은 스승을 모시고 남도 유람을 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이제는 다시 그런 기회가 없음을 슬퍼했다.


참으로 슬기롭게 세상을 산 봉황 같은 분은, 세 임금 대를 나고 돌며 영화를 누리셨지요

군자의 몸 곱게 꾸미는 것도 스스로 알았고, 대인의 하시는 일 뜻대로 잘 됨도 보았지요

부지런히 힘 다해 애써 남긴 의론 이어받아, 철들지 않은 이 못난 몸 편안히 위탁했지요

영원히 돌아가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 선생님 모시고 다닐 기회 또 다시 있을지요


임억령은 해남 명봉산(鳴鳳山, 지금의 금강산) 중턱 기좌(己坐)에 묻혔다. 11월 24일 유희춘은 해남의 마포 명봉산 근처 임억령의 제청(祭廳)을 찾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제물을 올려 망자를 조상하였다. '미암일기' 11월 24일자에는 '조반을 든 뒤에 의용(儀容)과 호위를 갖추고 마포 명봉산 근처 임담양의 제청으로 가서 흑간령(黑團領)과 품대(品帶) 차림으로 들어가 절을 하고 술과 과일로 전을 갖춘 다음 축문을 올렸다. 이유수가 아차령에서 마중나와 따라와서 축문을 읽었다.'고 쓰고 있다.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금강산 서북능선 기슭에 자리잡은 임억령 묘소 


1570년(선조 3) 12월 8일 조선 유학의 거두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1571년 3월 21일 이황의 백일장(百日葬)을 치르는 날 기대승은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 규봉(圭峯)에 올라 극진한 예로 조문했다. 그는 문수암(文殊菴)에서 이황을 위한 만시(輓詩) '감흠(感欽)'과 '몽견퇴계선생(夢見退溪先生)'을 지었다. 


몽견퇴계선생(夢見退溪先生) - 꿈에 퇴계 선생을 뵙다(기대승)


前夜依俙杖屨陪 (전야의희장구배) 어제 밤에는 어렴풋이 선생님을 모셨는데

今宵款曲笑談開 (금소관곡소담개) 오늘 밤에도 정답게 웃으시며 말씀하시네

分明一念猶憂世 (분명일념유우세) 분명한 생각으로 아직도 세상 걱정하시니

可識先生不著梅 (가식선생불착매) 선생께서 매화에만 집착 않으심을 알겠네


이황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노래한 시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꿈에 나타났을까! 이황은 매화를 유난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구(杖屨)'는 '지팡이와 신'의 뜻인데, 전하여 이름난 사람이 머무른 자취를 이르는 말이다. '관곡(款曲)'은 매우 정답고 친절함을 뜻한다. 


感欽(감흠) -느낌이 있어(기대승) 


先生厭世白雲鄕(선생염세백운향) 선생은 세상 싫어 백운향 가셨는데

賤子含哀在一方(천자함애재일방) 제자는 슬픔을 머금고 이승에 있네

遙想佳城今日掩(요상가성금일엄) 멀리서 생각하니 오늘 장례 날인데

四山氛霧轉茫茫(사산분무전망망) 사방의 궂은 안개 차츰 아득해지네

  

一氣悠悠往又回(일기유유왕우회) 한 기운 유유하게 왔다가 돌아가니

可堪華屋落泉臺(가감화옥낙천대) 이승에서 황천 떨어짐 어찌 견디랴

山頭不覺中心痛(산두불각중심통) 산마루에서 나도 몰래 마음 아프네

衰白餘生踽踽來(쇠백여생우우래) 쇠약한 몸 백발 여생이 외로워졌네


多病年來效括囊(다병연래효괄랑) 병이 많아 근년에는 몸조심을 하니

偶隨春色到禪房(우수춘색도선방) 우연히 봄빛 따라 선방에 이르렀네

傷心吾道今墜地(상심오도금추지) 우리 도학 땅에 떨어짐을 상심하니

敬爲何人更畜香(경위하인갱휵향) 누구를 공경하며 다시 향기 기를꼬


기대승은 스승의 예로 이황을 모셨고, 이황도 기대승을 극존칭을 쓰면서까지 아꼈다. 두 대철학자의 인연은 이처럼 아름다왔다. '백운향(白雲鄕)'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 <천지(天地)>에 '저 백운(白雲)을 타고 제향(帝鄕)에서 놀리라(乘彼白雲 遊乎帝鄕).'라고 하였다. 이후 백운향은 신선들이 사는 곳을 뜻하게 되었다.


이튿날 기대승은 무둥산에서 내려와 식영정에 들렀다. 세상을 떠난 임억령 대신 사위 김성원이 기대승 일행을 맞았다. 이 자리에는 고경명도 있었다. 김성원은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이란 제목의 오언사운(五言四韻) 세 수를 지었다.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

식영정에서 술 취한 뒤 고제봉, 김상사 경생과 더불어 운자를 부르다


物外情難盡(물외정난진) 물외는 정 다하기 어려운데

人間事或乖(인간사혹괴) 인간사는 혹 일도 어긋나네

杯盤賓主共(배반빈주공) 주안상을 주객이 함께 받고

談笑古今偕(담소고금해) 고금의 이야기 함께 나눴네

酒味傾還喜(주미경환희) 술잔을 기울이면 더 기쁘고

歌聲聽卽佳(가성청즉가) 노래 소리 아름답게 들리네

星山此夜會(성산차야회) 별뫼의 오늘 밤 모임에서는

消遣百年懷(소견백년회) 백년의 회포를 풀어 보리라


瑞石纔探歷(서석재탐력) 서석을 겨우 탐승하고 나니

松間意不乖(송간의불괴) 소나무 간에 뜻이 어울리네

酒多情自放(주다정자방) 술 많으니 정도 호탕해지고

吟苦笑兼偕(음고소겸해) 괴롭게 읊으나 웃음 겸했네

長笛風前好(장저풍전호) 대피리소리 바람 앞에 좋고

華燈夜亦佳(화등야역가) 등잔불 밤 되니 아름다워라

棲霞成一宿(서하성일숙) 서하당에서 긴 밤을 보내니

明發有餘懷(명발유여회) 날이 밝아도 회포는 남았네

 

夜色深深好(야색심심호) 밤 빛일랑 깊을수록 좋은데

往言事事乖(왕언사사괴) 오가는 말 일마다 어긋났네

酒來曾不讓(주래증불양) 술이 오면 사양치 아니하고

醉去宿能偕(취거숙능해) 취해 가면서도 함께 하노라

爛爛情何極(란란정하극) 무르익은 정 다함이 있을까

追隨意更佳(추수의갱가) 서로 따르는 뜻 아름다워라

風煙迷洞壑(풍영미동학) 안개 바람 골짝에 가득하니

春酌遣幽懷(춘작견유회) 봄술로 그윽한 회포 보내리


기대승은 고경명과 김성원이 운자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함께 하지 않은 듯하다. 대신 그의 제자인 김경생(金景生, 1549~?)이 자리를 함께 했다. 기대승과 고경명은 이량의 당 사건 때의 악연 때문에 서로 불편한 사이였기 때문일까? '人間事或乖(인간사혹괴)', '往言事事乖(왕언사사괴)'에서 보듯이 김성원의 시에서도 이를 의식한 듯한 표현이 보인다. 운림(雲林)의 누정에 벗이 있고 시가 있는데 어찌 곡차가 빠질 수 있으랴! 이들은 밤이 새도록 시주를 나눴을 것이다.  


식영정을 다녀간 1년 뒤인 1572년(선조 5) 조선 유학의 거두 기대승은 대사간, 공조 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정월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도 세상을 떠나 무등산 기슭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