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에는 '息影亭(식영정)' 편액을 중심으로 임억령의 '식영정기'와 '식영정제영', 김성원의 '식영정십팔영', 고경명의 '식영정이십영', 정철의 '식영정잡영' 등이 걸려 있다. 용계(龍溪) 민덕봉(閔德鳳, 1519∼1573)의 한시 '차(次)', 정철의 4대손 정호)의 '식영정중수기', 정철의 5대손 정민하의 한시 '식영정(息影亭)'과 '원운시(原韻詩)', '가선조관동별곡(歌先朝關東別曲)',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의 한시 '식영정봉차주인정달부민하(息影亭奉次主人鄭達夫敏河)', 정민하의 5대손 정해승(鄭海承, 1821~1892)의 한시 '제식영정(題息影亭)', 정민하의 5대손 정해심(鄭海心, 1858~1907)의 한시 '식영정우후(息影亭雨後)', 정민하의 6대손 정조원(鄭祚源, 1815~1886)의 한시 '기사하중즙감음(己巳夏重葺感吟)' 편액도 걸려 있다.
민덕봉과 김진상의 한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철의 후손들이 쓴 한시, 중수기뿐이다. 식영정을 정철의 후손 정민하가 1721년에 인수했기 때문이다. 정민하가 식영정을 인수하기 전까지는 호남은 물론 조선의 기라성 같은 시인 문객들의 편액들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한시를 감상할 수 없음이 아쉽다. 여기까지 왔으니 식영정에 걸려 있는 한시 편액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다.
민덕봉의 '차(次)' 편액
차(次) - 차운하다(민덕봉)
新交傾蓋舊(신교경개구) 새로 사겼지만 오랜 친구같아
頻上習家亭(빈상습가정) 습가의 정자에 자주 올라갔네
溪壓親鷗鷺(계압친구로) 시내는 낮아서 물새와 친하고
松高近日星(송고근일성) 소나무는 높아 하늘에 가깝네
淸心風北壑(청심풍북학) 마음을 깨우는 북녘 골의 바람
醒酒月前庭(성주월전정) 술을 깨게 하는 뜰앞의 달이라
瑞石雲相接(서석운상접) 무등산과 구름 서로 접했는데
仙翁夜叩扃(산옹야고경) 선옹은 밤에 빗장을 두드리네
龍溪(용계) - 민덕봉의 호
嘉靖年間, 先祖出宰鳴陽, 有題斯亭. 逮至萬曆丁酉, 詩板爲兵燹所燬, 迄于今幾數百載, 而且經桑滄世界. 窃恐來孫之無徵, 復刻而懸之, 以寓感慕之誠.[가정 년간에 선조께서 명양(창평)에 수령으로 나가셨다가 이 정자에 시를 지으셨다. 그러다가 만력 정유년(1597)에 이르러 시판이 전란에 의해 소실 된 채 지금 거의 수백 년에 이르렀고 또한 상전벽해와 같은 세상을 지났다. 이에 오래되면 후손들이 알 길이 없을까 저어해서 다시 새기고 걸어두며 추모하는 정성을 부친다.]
崇禎戊辰紀元後 再周丙寅後孫閔師夏 拜識[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병인년(1746, 영조 22) 후손 민사하(閔師夏) 삼가 쓰다.]
'차(次)'는 민덕봉이 '식영정운'에서 '정(亭), 성(星), 정(庭), 경(扃)' 운을 차운해서 지은 오언절구다. 같은 운자를 차운하여 쓴 시가 이순인(李純仁) 등의 문집에도 실려 있다. 편액 끝에는 민덕봉의 후손인 민사하(閔師夏)가 선조의 편액이 훼손된 것을 슬퍼하여 후에 고쳐 판각하여 걸었다는 내용의 글이 붙어 있다.
'경개구(傾蓋舊)'는 '경개여구(傾蓋如舊)'와 같은 말이다. 수레를 타고 가다가 잠깐 차양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치 오랜 친구인 것처럼 정감이 간다는 뜻이다. 잠깐 사귀고도 마치 옛 친구처럼 느껴지는 벗을 말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껴지는 벗이 있다.
'습가정(習家亭)'은 진(晉)나라 때 형주(荊州)의 호족(豪族) 습욱(習郁)이 양양(襄陽)의 현산(峴山)에서 물고기를 기르던 연못인 습가지(習家池)에 있던 정자인 듯하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편에 '山公到習家筳(산공도습가정)'이란 구절이 있다. 산공은 진나라 때 하내(河內) 회현(懷縣) 사람인 산간(山簡)이다. 그가 영가(永嘉) 3년(309)에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어 양양을 수비하고 있을 당시 습씨들이 소유한 경관 좋은 못가에서 자주 술을 마시며 놀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식영정을 가리킨다.
민덕봉은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60년(명종 15)에 별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해 집의가 되어 관기를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다. 1573년(선조 6)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객사(客舍)에서 죽었다. 성품이 곧고 의로웠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민하의 '식영정' 판액
식영정 들보 한가운데에는 정민하의 오언절구 '식영정' 판액이 걸려 있다. 바탕이 밝은 색 계통이어서 그런지 여러 판액들 중에서 가장 눈에 확 들어온다.
식영정(息影亭) - 정민하
高臥竹林間(고와죽림간) 대숲 사이에 느긋하게 누우니
亭臨瑞石山(정림서석산) 정자 앞이 바로 무등산이로세
無心雲出峀(무심운출수) 무심한 구름 멧부리에 이는데
何以主人閒(하이주인한) 어찌 주인은 그리 한가로운가
歌隱老夫(가은노부) 정민하
'고와(高臥)'는 고와동산(高臥東山)에서 유래한 말이다. 동진(東晉)의 사안(謝安)은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20여 년 동안 유유자적했다. 그는 늘 가무(歌舞)에 능한 기녀(妓女)를 데리고 다니면서 시주를 즐겼다. 식영정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무등산 멧부리에 한가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와(高臥)'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정민하는 정철의 5대손이다. 자는 달부(達夫), 호는 소은 또는 가은(歌隱)이다. 일찍이 과거에 실패한 뒤 향리에 묻혀 학문에만 진력했다. 1717년(숙종 43)에는 소두(疏頭)로서 전라도 유생을 이끌고 상경해서 송시열, 송준길(宋浚吉)의 문묘배향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1746년(영조 22) 학행(學行)으로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를 받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80세에 노인직으로 오위장(五衛將),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특히 시에 능하여 김창흡(金昌翕)과의 화답이 유명하다. 그의 문집 '소은유고(簫隱遺稿)'에 230여 수의 시가 전한다. '소은유고' 필사본 1책이 규장각에 있다. 그가 죽은 뒤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의 지곡사(智谷祠)에 배향되었다.
김진상의 '식영정봉차주인정달부민하', 정민하의 '가선조관동별곡' 편액
부제학(副提學) 시절 김진상은 담양에 내려와 식영정에서 정민하와 시주를 나눴다. 정민하가 먼저 읊었다. 김진상은 정민하의 '원운시'에서 차운하여 칠언절구 '식영정봉차주인정달부민하'를 지어 읊었다.
원운시(原韻詩) - 정민하
幾年南北阻音聲(기년남북조음성) 남북으로 소식이 끊어진 지 몇 해던가
此日相逢雪月淸(차일상봉설월청) 오늘 달도 밝은 밤 눈속에서 만났어라
我弄玉簫君和唱(아롱옥소군화창) 나는 옥피리 불고 그대는 답가 부르니
風流今屬兩家情(풍류금촉양가정) 지금 우리 마음이 자아낸 풍류인 게야
식영정봉차주인정달부민하(息影亭奉次主人鄭達夫敏河)
식영정에서 주인 정달부 민하의 시를 차운하다 - 김진상
君簫何似我歌聲(군소하사아가성) 그대 퉁소 어이 내 노래소리 같은지
息影亭高山水淸(식영정고산수청) 산 좋고 물 맑은 곳 식영정 우뚝하니
恐有俗人來竊聽(공유속인래절청) 혹 속인들이 와서 몰래 들을까 하여
曲中流入世間情(곡중류입세간정) 곡 중간에 세간의 정도 흘렸네 그려
丙辰臘冬退魚金鎭商(병진랍동퇴어김진상)
병진년(1736, 영조 12) 섣달 겨울 퇴어 김진상
김진상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다. 1699년 진사가 되고 1712년(숙종 38) 문과에 급제한 뒤 설서(說書)와 수찬(修撰), 지평(持平)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무산(茂山)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이조 정랑(吏曹正郎)에 임명되었다. 이어 수찬, 필선(弼善), 부교리(副校理), 사간(司諫), 부제학 등을 차례로 지냈다. 1741년(영조 17) 대사헌(大司憲), 1753년(영조 29) 좌참찬(左參賛)에 올랐다. 글씨도 잘 써서 많은 비문(碑文)을 썼다.
정민하는 그의 선조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읊조린 소회를 노래한 칠언절구 '가선조관동별곡'을 지었다. 식영정에는 김진상의 차운시, 정민하의 원운시와 '가선조관동별곡'이 함께 판액되어 있다.
가선조관동별곡(歌先朝關東別曲) -선조의 관동별곡을 노래하다(정민하)
高臥雲林送百年(고와운림송백년) 운림에 한가히 누워 한평생 보냈지만
不知人世有眞仙(부지인세유진선) 세상에 정말 신선 있었는지 모르겠네
閒來詠罷關東曲(한래영파관동곡) 한가한 차에 관동별곡 읊조리고 나니
萬二千峰列眼前(만이천봉열안전) 눈앞에 수많은 봉우리 펼쳐지네 그려
운붕(雲鵬) 정진명(鄭振溟, 1567~1614)은 정철의 3남이고, 정진명의 증손자가 환벽당을 인수한 수환(守環) 정흡(鄭潝, 1648~1709)이다. 정진명의 부인은 조일전쟁 때 전라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던 나주 출신 의병장 문열공(文烈公) 건재(健齎)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의 딸이다. 정진명의 세계는 곡구(谷口) 정한(鄭漢, 1599∼1652)→용지(龍池) 정광연(鄭光演, 1624∼1677)→정흡→정민하로 이어진다. 정민하는 정광연의 5남1녀 중 차남 정즙(鄭濈, 1646~1697)의 2남으로 동리(東里)에서 자랐다. 1689년 정광연의 3남 정흡은 후사가 없어 19세의 정민하를 양자로 들였다.
정흡의 양자로 들어간 정민하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229번지 지실마을 계당(溪堂)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계당은 원래 정철이 즐겨 찾아 술잔을 기울이던 만수동 이웃집(萬壽洞隣家)을 4남 정홍명이 인수하여 지은 집이다. 정민하는 1721년에 퇴락한 식영정을 인수한 뒤 중수했다. 그는 가까운 계당에서 생활하면서 식영정에 자주 들렸다. 만년에는 식영정에 머물면서 술과 시, 피리로 세월을 보냈다.
정민하는 계당에 살면서 11형제를 낳았다. 그래서 계당을 일명 십일용동(十一龍洞)이라고 한다. 환벽당에서 기거하던 정민하는 정철에게 문청공(文淸公) 시호가 내려질 때 전북 진안으로 잠시 옮겨가서 살던 양부 정흡을 계당으로 모셔왔다. 1842년(헌종 8)에 중수한 계당은 1902년(고종 39)에 화재가 났으나 그 해 바로 옛 건물대로 복원했다. 1986년에는 지붕만 번와했다. 정민하로부터 장손으로만 이어져 온 계당의 주인은 지금 13대손 정문영(鄭文永)에 이르기까지 종가로 지켜오고 있다.
정해승의 '제식영정' 편액
식영정에는 정민하의 5대손 정해승이 지은 '제식영정' 칠언율시, 칠언절구 각각 한 수가 걸려 있다. 정해승은 쟁쟁했던 조상들의 유적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제식영정(題息影亭) - 식영정에서 짓다(정해승)
散步登臨雨霽天(산보등림우제천) 이리저리 거닐다 오르니 비 개고
紫薇花爛意欣然(자미화란의흔연) 자미화 활짝 피어 기분도 좋구나
樹陰裊裊蟬鳴後(수음뇨뇨선명후) 나무 그늘에는 맴맴맴 매미 울고
江色粼粼鷺住邊(강색린린로왕변) 반짝이는 강 가엔 백로들 오가네
座上故人無俗客(좌상고인무속객) 좌상의 옛벗 중에는 속객 없으니
世間何處有眞仙(세간하처유진선) 세상 어디인들 참 신선이 있을까
淸軒盡日簫歌咽(청헌진일소가인) 정자에서 종일 피리 노래 부르니
好事幸從勝地傳(호사행종승지전) 이런 흥취 여기 전해지면 좋겠네
縹緲江樓泛水聲(표묘강루범수성) 누정은 머언 강 가 물소리에 떠있는 듯하고
溪山依舊竹林淸(계산의구죽림청) 옛 시내 산 그대로인데 대숲은 시원도 하네
浮雲百載嘯歌斷(부운백재소가단) 뜬구름 같은 백 년 세월 휘파람도 끊겼는데
凄悵那禁感泣情(처창나금감읍정) 구슬퍼 울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라
歌隱公五世孫海承謹稿(가은공 5세손 해승 근고) 가은공 5세손 해승 삼가 쓰다.
정해승의 초명(初名)은 해성(海聲)이고, 자는 지교(墀敎), 호는 석우(石友)다. 정해승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정해심의 '식영정우후' 편액
정민하의 5대손 정해심이 쓴 칠언율시 '식영정우후'는 두 수가 판각되어 있다. 정해심은 비가 내린 뒤 식영정에 올랐던 모양이다.
식영정우후(息影亭雨後) - 비 온 뒤 식영정에서(정해심)
江天百態雨餘生(강천백태우여생) 비온 뒤라 천지에 온갖 자태 생기는데
老眼疲於左右迎(노안피어좌우영) 이리 저리 보느라 늙은이 눈만 피곤해
渚草野秧難辨色(저초야앙난변색) 수초와 들판 벼는 색깔 구분도 어렵고
幽魚恠鳥不知名(유어괴조부지명) 그윽한 물고기 낯선 새는 이름도 몰라
簫歌一斷雲無跡(소가일단운무적) 자취 없는 구름처럼 퉁소 소리 끊겨도
詩句長留永有聲(시구장류영유성) 싯구는 오래 남아 그 명성 영원하건만
鯨背千年人未返(경배천년인미반) 흘러간 물결처럼 옛 사람은 못 오는데
高樓誰復一椎鳴(고루수부일추명) 누가 다시 여기 고루에서 들보 울릴까
老我詩情不肯低(노아시정불긍저) 늙은 나 시 짓는 욕심 수그러들지 않는데
名亭又在郭之西(명정우재곽지서) 이름난 정자 성곽 서편에 또 있구만 그려
蟬吟斷續朱絃咽(선음단속주현인) 매미소리 끊길 듯 말 듯 거문고 소리같고
草氣薰濃翠毯迷(초기훈농취담미) 옅푸른 담요처럼 풀 기운 향내도 짙을 때
驟雨忽過灘響急(취우홀과탄향급) 돌연 소나기 내린 뒤 여울 소리 급해지고
輕風乍歇樹梢齊(경풍사헐수초제) 솔솔 불던 바람 언뜻 그쳐 나무도 잠잠해
三庚高臥淸凉界(삼경고와청량계) 삼복 더위에 선선한 이 곳 편히 누워보니
一屐兼將一枕携(일극겸장일침휴) 가진 것은 신발 한 짝에 베개 하나뿐일세
芝山(지산) 정해심
'경배(鯨背)'는 고래의 등처럼 출렁이며 흘러가는 수면을 가리킨다. 이 시에서는 '흘러간 물결'이라고 풀이했다. '추(椎)'는 앞뒤 문맥을 살펴서 필자가 넣은 것이다. 정자의 등뼈 같은 '들보(梁)'로 본다면 '이 고루에 누가 다시 올라 시가를 불러서 한 번 들보를 울리겠는가?'로 풀이할 수 있겠다. '삼경(三庚)'은 초복, 중복, 말복 등 삼복(三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고와(高臥)'는 강호에 은퇴하여 유유자적하며 은거 생활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이 시에서는 '편안히'라고 풀이했다.
정해심은 정철의 10대손, 정민하의 5대손이다. 정철의 막내아들 정홍명이 그의 9대 선조이다. 정해심의 자는 치덕(致德), 호는 지산(芝山)이다.
정조원의 '기사하즙감음' 편액
정조원의 칠언율시 '기사하중즙감음'은 1869년(고종 6) 여름에 식영정의 지붕을 이고 난 뒤 그 감회를 읊은 시다. 정조원은 정민하의 6대손이다.
기사하중즙감음(己巳夏重葺感吟) - 기사년 여름 중수한 감회를 읊다(정조원)
吾家別業有斯亭(오가별업유사정) 우리 집안 별장으로 이런 정자 있어서
少小登臨白髮生(소소등림백발생) 어릴 적 가끔 올랐는데 벌써 백발이니
月上霽梧今夜色(월상제오금야색) 오동나무에 뜬 달은 오늘 밤도 빛나고
洲傳芳草舊時名(주전방초구시명) 물가에 퍼진 방초주는 옛 그 이름일세
遙瞻瑞嶽流雲氣(요첨서악류운기) 무등산 저 멀리 떠가는 구름도 보이고
俯聽靈湫積雨聲(부청영추적우성) 영추에 듣는 장맛비 소릴 기울여 듣네
更喜風闌依古制(갱희풍란의고제) 옛날 같은 정자 모습에 더욱더 기쁘니
松濤不盡滿窓鳴(송도부진만창명) 솔바람도 쉼없이 창 가득 울리는구나
歌隱公六世孫祚源(가은공6세손조원) 가은공 6세손 조원
崇禎五丙申春揭(숭정5병신춘게) 숭정 5년 병신 봄에 걸다
'방초(芳草)'는 '식영정제영'에 나오는 '방초주'를 말한다. '영추(靈湫)'도 '식영정제영'의 '환벽영추'에 나온다. '송도(松濤)'는 소나무 숲에 부는 바람 소리가 마치 바다의 파도 소리 같다고 하여 일컫는 말이다.
정조원은 정철의 11대손, 정민하의 6대손이다. 자는 영지(永之), 호는 수산(壽山)이다. 정조원은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에서 살았으며 시문에 능했다. 그의 저서에는 '영일정씨세고습유(迎日鄭氏世稿拾遺)', '수산공유고(壽山公遺稿) 등이 있다.
담양 성산사
식영정과 서하당 뒤편 산기슭에는 대숲을 배경으로 성산사가 앉아 있다. 성산사는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어 사라진 건물을 2005년 담양군에서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솟을삼문을 갖춘 건물은 단청도 선명하다. 하지만 사당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빠진 이런 식의 문화재 복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재 한국가사문학관
한국가사문학관의 임억령관
백성에 대한 사랑을 예술로 승화한 시인 임억령은 김인후와 더불어 호남문단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고금의 다양한 한시체들을 두루 익혀 약 3천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임억령의 시는 그의 인품처럼 고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재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辭文學館) 임억령 전시관에는 '식영정이십영' 판액과 문집인 '석천집', 한시 '서석한운', 목판, 술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식영정에서 필자
담양의 정자들을 돌아보려면 백일홍이 한창 피어나는 7, 8월이 좋다. 특히 백일홍 꽃잎들이 떨어져 수면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명옥헌 연못은 그야말로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백일홍이 필 무렵 담양에 오면 증암천을 왜 자미탄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호남의 사종 석천 임억령을 생각하면서 식영정을 떠나다.
2017. 4. 9. ~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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