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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우천석 우팽 부자, 손순효 묘소를 찾아서

林 山 2018. 1. 30. 16:28

주말을 맞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행정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대 무신(武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지낸 우천석, 우팽 부자 묘소(禹千錫禹伻父子墓所, 충청북도 기념물 제140호)와 조선(朝鮮) 성종(成宗) 대의 문신(文臣)이자 호주가(好酒家)로 유명한 물재(勿齋) 손순효(孫舜孝, 1427~1497)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를 찾았다. 두 묘소는 내 고향 마을 바로 윗동네에서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잡고 있다. 


우천석의 묘소는 아들 우팽의 묘소 바로 앞에 있다. 묘지는 일반적으로 선대가 윗자리, 후대가 아랫자리에 쓰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우천석 부자 묘소는 그 반대로 묘를 썼다.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월현 우천석, 우팽 부자 묘소 전경


우천석 묘소


우팽 묘소


사실은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에 대한 글을 쓰다가 여기까지 왔다. 1556년(명종 11) 61세의 임억령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찬(李澯)을 추모하는 비명(碑銘) '유조선국가선대부한성부좌윤이공비명병서(有明朝鮮國嘉善大夫漢城府左尹李公碑銘幷序)'를 지었다. 손순효의 신도비 비문을 극암(克庵) 이창신(李昌臣)이 지었는데, 비문의 글씨를 쓴 사람이 바로 이찬이다. 


우천석, 우팽 부자 묘소는 증조부의 묘를 이장하기 전까지 명절 때마다 성묘길에 이곳을 지나쳐 가곤 했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묘소 입구 작은 연못에는 물이 말랐다. 한가운데는 작은 섬까지 있는 연못이다.


우천석은 1273년(원종 14)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제주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삼별초(三別抄) 저항군을 진압하였다. 1280년(충렬왕 6)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종1품)에 올랐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무총리급이다. 그가 죽은 뒤 충주에 장지를 정한 이래 후손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우천석의 묘표는 1919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팽은 우천석의 둘째 아들이다. 우팽의 묘소는 우천석 묘소 바로 뒤에 있다. 그의 묘소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묘표와 문관석은 조성 당시의 것이고, 묘비는 1980년에 세웠다. 우팽은 문장에 뛰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밀직부사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으로 퇴직하였다.


우천석의 조카가 바로 백운(白雲) 우탁(禹倬)이다. 그는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충청북도 단양군의 명승지로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그가 고려 말기에 사인 벼슬에 있을 때 그곳으로 휴양을 가서 붙여진 이름이다.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행정 손순효 묘소


손순효 신도비각


손순효 신도비


손순효는 1453년(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 1457년(세조 3)에는 감찰(監察)로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병조(兵曹)와 형조(刑曹) 좌랑(佐郞), 집의(執義), 전한(典翰)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시무책 17조를 상소하여 채택된 뒤 형조 참의(參議)로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를 저질렀다 하여 무관직인 상호군(上護軍)으로 전임되었다. 뒤에 다시 문관직인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복귀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도승지(都承旨)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호조(戶曹)와 형조 참판(參判) 등을 차례로 지냈다. 


손순효는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위하려 할 때 반대했다. 1480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병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변론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좌천당했다가 곧 우찬성(右贊成, 종1품)으로 복직되었으며, 이어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가 되었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주역(周易)'에 정통했으며, 묵화에도 능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식료찬요(食療撰要)'를 편찬했다. 저서로는 '물재집(勿齋集)'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손순효는 조선시대 유명한 호주가였다. 그는 종종 조정에도 술이 덜 깬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도 그는 맡은 바 직무를 유능하게 처리하였다. 성종은 술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손순효에게 은잔을 하사하며 이 잔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잔만 마시라고 명했다. 그런데 그 뒤에도 손순효는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많았다. 성종은 손순효가 자신의 명을 거역한 줄 알고 노했으나 알고 보니 그는 하사한 술잔을 얇게 펴서 사발 크기의 커다란 잔으로 만들어 술을 마셨던 것이었다. 성종은 그의 재치에 크게 웃으며 더 이상 나무라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宣祖) 대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호주가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도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손순효는 명실공히 정철의 호주가 선배였다. 


우천석과 손순효의 후손들 사이에 장군석(將軍石) 소유권을 놓고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재판까지 간 결과 장군석은 우씨 종중의 소유로 판결이 났다고 들었다. 필자도 장군석이 있었다면 무신이었던 우천석의 묘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천석 부자 묘소에서 장군석은 보지 못 했다. 어찌 된 일일까?


오래전 우천석, 우팽 부자 묘소와 손순효 묘소가 도굴당했다는 이야기를 도굴에 직접 참여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고려 청자 등 제법 값나가는 유물 몇 점이 나왔다고 한다. 출토 유물들은 일본인들에게 밀매되었던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라 기억의 한계가 있다. 도굴꾼들은 풍수지리 박사라는 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우천석 부자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손순효 신도비와 묘소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지 못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손순효 묘소와 신도비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관리청이나 충주시 나아가 충청북도 등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을 촉구한다. 


2018. 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