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 임억령의 외손녀사위 훈도(訓導) 정언식은 제주목사(濟州牧使) 소흡(蘇潝), 감목(監牧) 이천(李薦)과 함께 제주에서 '석천집(石川集)' 4책 7권을 목판(木板)으로 간행했다. 이 목판본은 전라감사 백담(栢潭) 구봉영(具鳳齡)이 가지고 있다가 이황의 제자인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에게 증정했고, 배삼익은 아들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에게 전했다. 목판본 '석천집'은 그 뒤 경북 안동 도목촌 집 뒤 산기슭의 산수정(山水亭)에 소장되어 있다가 임억령이 간행한 '눌재집'과 함께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晩松文庫)로 옮겨져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고전문학 자료는 번역하고 공개해서 세상 사람들이 널리 볼 수 있게 해야지 귀중본으로 소장만 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규장각 소장본(奎章閣所藏本) '석천집'은 서문(序文)과 발문(跋文)‚ 권차(卷次)‚ 간기(刊記)가 없는 필사본이다. 시문 중에는 별도의 제목으로 묶인 것도 있다. 제1책의 '승부록(乘桴錄)'은 전라도 지역의 말을 점고(點考)하기 위해 파견되었을 때, 제3책 '동행록(東行錄)'은 1553년~1555년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제4책 '행록(行錄)'은 1558년 7월 27일 사직하고 낙향할 때 지은 것이다. 1557년에 지은 '기우성황신문'을 전후한 시문들은 담양부사로 있을 때, 제5책의 전반부는 담양 성산에서 은거할 때 지은 것이다. 임억령의 시는 오언시(五言詩)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절구(絶句)와 율시(律詩)가 대부분이다. 내용은 은일시(隱逸詩)가 많고, 승려에게 주는 시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1573년 7월 11일자 '미암일기'에서 유희춘은 '소병사흡(蘇兵使潝)이 <석천시집> 3권을 부쳐 왔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맑은 물에 연꽃 같은 기상이 있다. 우리 고향(해남)에 문장이 번갈아 나니 윤귤정의 문이나 백씨(유성춘)의 부나 임석천공의 시는 모두 세상에 크레 알려진 것으로서 타읍에서는 드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41세의 고경명은 당시 74세였던 광주목사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 일행과 함께 1574년 음력 4월 20일 증심사(證心寺)에서 출발하여 24일까지 5일 동안 무등산을 유람한 뒤 마지막 날 식영정에 들렀다가 서하당에서 술을 마신다. 이때 부안(扶安)의 명기(名妓) 매창(梅窓)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도 임훈과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은 식영정에 올라 전 사람이 써 놓은 '성(星)'자를 차운한 싯구를 남겼다.
竹葉朝傾露(죽엽조경로)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松梢曉掛星(송초효괘성) 솔가지엔 새벽 별이 걸렸네
'성수시화'에서 허균은 '劉希慶者 本賤隷也. 爲人淸愼 事主忠事親孝 大夫士多愛之 能詩甚純熟. 小日 從林葛川薰 在光州登石川墅 押其樓題星字曰 <竹葉朝傾露, 松梢曉掛星> 梁松川見而亟稱之.[유희경이란 사람은 천한 계급 출신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매우 능수능란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 사람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라 하니, 양송천(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라고 썼다.
운자 '성(星)'으로 보아 유희경은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이란 시에서 차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차식영정운'의 운자가 '정(亭), 성(星), 정(庭), 경(扃)’이기 때문이다.
고경명은 무등산 기행문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서석은 무등산의 옛이름이다. '유서석록' 식영정 조에는 '해질 무렵에야 식영정에 당도하였다. 식영정은 일행인 강숙(剛叔, 金成遠)이 지은 별장이다. 임 선생(임훈)은 난간에 기대어 조용한 풍경을 뜻있게 감상하였다. 밤이 되자 주인 강숙이 촛불을 켜들고 나와 정성껏 환대해 주어서 흥겹게 놀다 파하니 이 또한 한때의 즐거움이었다. 식영(息影)과 서하(棲霞) 두 편액은 모두 박영(朴詠)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八分體), 서하는 전자체(篆字體 )로 쓰여져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詠)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은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 주고 있다. 서하당 북쪽 모퉁이에는 네모진 연못이 반 이랑쯤 되는데 여기에 백련(白蓮)이 너댓 그루 심어져 있고, 샘물은 대나무 홈통을 타고 층계 밑을 지나 못으로 흐르도록 해 놓았다. 못 남쪽에는 벽도(碧桃)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서쪽에는 석류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가지가 담장 위로 높이 뻗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액 글씨를 쓴 박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부호군(副護軍) 박훈(朴塤)의 아들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했고,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과 교유하였다. 그의 시 일부가 '임당유고(林塘遺稿)'에 실려 전한다.
1575년 서인의 핵심 인물로 동인과의 대립에 앞장서던 행동대장 정철은 당쟁으로 인한 신료들의 분열을 중재하려는 이이에게 불만을 품고 벼슬을 내던진 채 창평으로 낙향했다. 장빈자(長貧子) 윤기헌(尹耆獻, 1548~?)의 야사집 '장빈호찬(長貧胡撰)'에 '송강 정철의 중형인 정황(鄭滉)이 김제군수가 되었다. 송강이 태헌(苔軒) 고경명과 같이 죽정(竹亭)에 묵게 되었는데 송강이 태헌에게 말하기를, "선생이 운수를 점치는 술법은 제가 탄복을 하는 터인데, 어찌 저에게는 한 말씀도 없으십니까?" 하니, 고태헌은 대답하기를, "여러 말 말고, 사주만을 말하오." 하고, 새벽녘에 송강에게, "나는 공과 사귀기를 바라오. 공은 틀림없이 좌상이 될 터이나, 그러나 만년에 만약 송(松)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강(江)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 말하였다. 송강이 자세히 물었으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버렸다. 아마 고태헌의 말은 송강으로 은퇴하지 않으면 강계(江界)로 귀양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정송강이 만년에 강도(江都)에서 죽었으니, 강이라 한 것은 과연 어느 강을 지칭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 1576(선조 9) 2월 14일 조에 '김제군수 정황은 정철의 형이요, 정자(鄭滋)의 동생이다. 멀리서 혼수용 수기러기를 보내와 전에 온 암기러기의 가리 속에 넣었는데, 그것은 광산(光山)에서 보내온 것이다. 내가 암컷을 놔두고 수컷을 구하려 했으므로 멀리서 보내준 것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경명과 정철도 이 무렵 정황을 만나러 김제에 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연계정(漣溪亭)의 주인 유희춘이 세상을 떠났다.
1581년(선조 14) 대사성에서 물러난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경전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전념하던 양응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 아들을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시켰다. 1582년에는 강호가도의 선구자 송순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강호에서 은일한 삶을 살아가며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를 데리고 6천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금산전투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했다.
임억령은 자신의 후손들에게도 나라와 백성을 위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임극협(林克協) 등 그의 손자 3명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휘하 장수로 조일전쟁에 참전하여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정철은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낸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誣告)로 옥사한 뒤 동복현감(同福縣監)에서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던 김성원은 1597년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성모산(聖母山)에서 왜군을 만나자 부인과 함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살해되었다. 김성원을 마지막으로 식영정 4선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1619년(광해군 11) 정월 윤광계는 김성원의 아들이자 임억령의 외손자 김전의 부탁을 받고 '석천집' 서문을 지었다. 이 문집은 지금 남아 있지 않아 필사본인지 목판본인지 알 수가 없다. 다음은 윤광계의 서문 중 임억령의 시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근래에 시로써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시격이 걸림이 없이 자유분방하고 뛰어날 뿐만 아니라 넓고도 깊어 장강대하(長江大河)처럼 밤낮으로 도도히 흘러도 다하지 않은 분은 오직 석천 선생 한 분뿐이다. 그밖에 늠름하고 위엄있는 기개와 절조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너무도 빛나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시보다 더욱 뛰어나다 하겠다.
대강 설명한다면 우리나라가 바닷가 한 모퉁이에 붙어 있기는 하지만 대대로 시문이 전해 와서 시를 쓰는 사람이 매우 많다. 이것은 당대의 기풍을 본받았다 하겠으니 어찌 지역이 떨어져 있고, 시대가 뒤졌다고 우습게 볼 수 있으랴! 그중에서도 우리 고을은 동방에서도 외딴 곳이다. 선생은 당송을 지난 천백 년 뒤에 나셔서 수천 리 밖 궁벽한 땅에서 성장하였으나 그 시풍과 기질은 이백과 두보를 본받고, 소동파와 황산곡에 젖었으니 바로 걸출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동방의 궁벽한 곳이라고 가볍고 소홀하게 논할 것인가!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을사사화가 일어날 줄 미리 아시고, '외로운 배는 일찍 매는 것이 마땅하다(孤舟宜早泊).'고 하셨으니 기개와 절조가 남보다 높으셨음을 알 수 있다. 김안로가 한창 세도를 부릴 때 그를 매미에 비유해서 '산까치가 물어가려고 엿본다.'고 하였으니 세상물정을 보는 눈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권 정승(권철)에게 시를 보냈더니 권 정승은 종이에 기름을 먹여서 갈무리했다 하고, 송대(송 대장군)에게 노래를 지어 주었더니 송대는 꿈속에서도 사례하였다 하니 뛰어난 글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귀신을 울렸다 하겠다.
저 '용궁문답시(龍宮問答詩)'는 그 뜻이 아득하고 끝이 없으며, 황홀하기도 하여 신(神)인지 성(聖)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선생은 이미 신이나 성의 극치에 다다랐다고 하겠다.
나는 어려서 한양에서 성장하여 나이도 어렸고, 거리도 멀어서 봄바람 같은 선생 앞에 다만 한 달 동안만이라도 다정하신 고담준론 (高談峻論)을 얻어 모시지 못하고 이제 와서 그 잔물결을 더듬어 근원을 찾으려 하니 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끼치신 향기와 남기신 교훈은 오랜 세월을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사람을 통해서 전해오는 것을 얻어 배울 수 있었다.
오호라! 기개와 절조가 늠름하고 위엄있는 분은 매양 문장을 등한시하기 쉽고 문장이 호방한 분은 흔히 기개와 절조를 아울러 다 갖추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리요. 아! 선생의 시는 사람마다 외우고 찬미하지만 선생의 높으신 기개와 절조는 세상에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므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 밝혀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선생의 문집이 세상에 전해진 지 오래지만 정유병란(丁酉兵亂)을 겪은 후로 더욱 흩어져서 얼마 남지 않았다. 김 감목이 흩어진 유고를 수습하여 널리 전할 생각으로 발간을 서두르는 한편 나에게 서문을 청해 왔다. 그러나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요. 다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추상하며 또 사람들이 전하는 바를 말할 뿐이다.
오호라! 선생의 절의는 국사에 밝게 나타나 있고, 선생의 시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퍼져나가 있다. 새삼 칭송하고 기린다는 것이 잘못이 아니리요? 이것은 남의 웃음거리만 될 뿐만 아니라 나도 또한 비웃음을 살 것이며, 훗날 나를 비웃는 사람이 나보다 심하리라 하겠다.]
1652년(효종 3) 임억령은 해남읍 교동에 세운 석천사(石川祠)에 배향되었다. 석천사는 해남의 수원사(首院祠)로서 임억령만을 향사(享祠)했다. 수원사는 그 고을에서 으뜸가는 사당을 말한다.
1670년(현종 11) 동복현(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 도원서원(道源書院)을 세우고 임억령을 주벽(主壁)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최산두, 안방준을 병향(竝享)하였다. 1678년(숙종 4) 김수항은 임억령의 '행적기략'을 지었다. 이때 김수항은 영암의 구림에 유배를 와 있었다. 다음은 '행적기략'의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상략..... 선생은 고결하신 천품을 타고 나시어 세속을 따라 영합하기를 싫어하시니 자주 간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벼슬에 계시기는 하였으나 항상 낙오하여 불우하게 지내시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로는 다시는 당세에 뜻이 없어 은퇴하시려고만 힘쓰시고 간혹 외직과 방백을 임명받았으나 얼마 뒤에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강호에 은거하면서 서적을 탐구하다가 돌아가셨다. 쓰신 문장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준일하며 더우기 시에 뛰어나시어 붓을 잡으면 일필휘지로 써내시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전송하였다.
일찍부터 창평 성산동의 수석이 좋음을 사랑하여 살 만한 땅을 가려서 집을 짓고 사시게 되었다. 당은 서하당이라 이름하고 정자는 식영정이라 하여 기문과 제영, 제시가 있다. 해남으로 돌아오셔서도 자주 왕래하시며 서식하시니 송강 정상공이 성산별곡 노래를 지어서 선생을 찬미한 것이 지금까지도 전파되어 불리어 온다.
선생이 교유하시던 분들도 모두가 명인 석사라 더우기 청송(성수침) 선생 형제와는 막역한 사이로 지내셨고, 그 뒤로 율곡, 사암, 고봉 등 제현들도 모두 정중하게 상종하였다.
선생은 평생에 저술이 가장 많으셨는데 많이 흩어져 잃어버렸으며, 돌아가신 뒤로 후손들이 영락하고 여러 차례 병란을 겪다 보니 가문에 남아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선생의 관직 경력까지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선생의 외손 창평 김성인 집에서 유고한 질을 얻어서 재출간하기로 하고 선생의 이력을 간략히 쓴다. 한편 외사에 실려 있는 몇 가지와 제현들의 수창한 시문 몇 수를 부록하여 다음날 선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위하여 고신할 바를 준비해 두는 바이다. 하략.....]
김수항은 임억령의 문집 묵판본 7권 3책을 간행했다. 이 문집은 앞의 행적기략을 볼 때 김수항이 편집하고 간행을 주도한 것이다. 문집은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그때 새긴 목판 일부가 해남 교동의 선산 임씨 제각(祭閣)과 영암 영보의 전주 최씨 제각에 보관되어 있다.
도원서원은 1687년(숙종 13) 나주 진사 최운익(崔雲翼), 대사성 김창협(金昌協) 등의 상소로 이듬해 정월 15일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동부승지 김만길(金萬吉)이 차지(次知, 주무관)가 되었고, 그해 4월 송시열이 액자를 썼다. 4월 26일 예조 정랑 김상하(金尙夏)가 집례관으로 치제(致祭)하고, 창평현감 박세웅(朴世雄), 옥과현감 윤선독(尹善讀)이 독축(讀祝)하였다.
숙종이 내린 사액제문(賜額祭文)은 임억령과 정구, 최산두, 안방준의 업적을 기리면서 사액하는 뜻을 밝혔다.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 실려 있는 사액제문은 다음과 같다.
[국왕이 행 예조정랑 김상하를 보내어 전라도 동복현 고 명신 임억령, 정구, 최산두, 안방준 등의 영전에 제문을 삼가 읽습니다.
아, 중종 임금께서는 장수하시면서 인재를 등용하셨다. 이때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선비를 배출하였기에 서로서로 계승하여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도다. 남겨놓은 그들의 얼은 어엿하여 엊그제 같구나.
말하자면 임억령 승선은 뜻이 높고 행동이 결백하였기에 간사한 자들을 미워하다가 드디어 그들에게 배제당하였도다. 올바른 방향으로 아우를 꾸짖었으며 녹권을 불살라 자신을 격려했다네. 문장을 연구한 것은 그 밖의 일로 여겼으니 뛰어난 인물이었도다. 말마다 뜻이 담겨 있고 그의 모습 엄격하였으니 누구든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겁쟁이는 자립할 수 있고, 욕심쟁이는 청렴해질 것이다.
정구 문목은 순수하고 높은 기질을 가졌구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학문을 퇴계에게서 받았다네. 본체와 작용이 꼭 같았으니 의로움과 공경함이 일치되었구나. 군왕에게 상소하여 윤기를 붙들었고 기강을 세웠으며, 더구나 온당한 의론을 세워 저술을 펴냈으니 우리 도학을 도왔구나. 우매한 뭇사람의 식견을 열어 주었고 , 자신의 깊은 학문을 보여 주었도다.
최산두 중서는 당세에 삼걸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제현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학문을 갈고 닦았으니 그는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학문의 힘을 쏟았고, 군주를 바르게 돕는다는 지조를 가졌다. 그러나 뭇 간흉들이 정치공작을 일으킴으로써 사림파는 모두 참화를 입어야만 했다. 드디어 외딴 시골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남겨놓은 아름다운 얼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았다.
안방준 시랑은 선비의 기질을 갈고 닦았으며 책보 메고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자신의 의견을 써서 군왕에게 올렸으니 그의 언론이 정직하였고, 한결같은 나라 걱정은 늙어서 더욱 독실하였다. 시골에서 쉬면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니 선비들 학문하는 열기가 일어나 본보기로 삼았다.
이 네 명의 신하들은 세상에 드문 보배로운 선비로다. 그들이 세운 업적 높고도 높았으니 그 누구를 같다고 할꼬! 그들의 지조와 모습을 회상하니 슬퍼할 뿐 따라갈 수 없구나. 저 호남 땅 동복읍 바라보니 그들이 살았던 곳이다. 이것에 조두의 예를 갖추고 차례대로 나란히 모셔라. 이제 예관을 보내어 아름다운 편액을 내리고 멀리서 술잔을 올리노니 흠향하기 바라오.]
1689년(숙종 15) 석천사는 임억령을 독향해오다가 최부와 유희춘을 배향하고 삼현사(三賢祠)라 했다. 1692년(숙종 18) 소론(少論)의 영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해남현감(海南縣監) 유상재(柳尙載)의 건의를 받고 임억령의 묘표(墓表)를 썼다. 임억령의 묘소에는 박세채가 쓴 묘표를 새긴 비석은 보이지 않고, 선산 임씨 문중에서 새로 묘표를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선산 임씨 종중 관계자에 따르면 묘비를 새로 세우면서 전의 비석을 땅에 묻었다고 한다.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금강산 서북능선 기슭의 임억령 묘소
江原道觀察使林公墓表(강원도 관찰사 임공 묘표)
湖之南。蓋多名賢逸士。至我中明之際最盛。然其風節文章卓然爲一時諸賢所重者。惟古觀察使石川先生林公億齡最著云。公字大樹。善山府人。始祖良貯。事新羅爲中郞將。敬順之歸麗。力諫不聽。自後苗裔多散居諸邑。其徙海南縣者。公之先也。曾祖諱得茂。贈參議。祖諱秀。縣監贈參判。考諱遇亨。贈判書。妣陰城朴氏。公以弘治九年二月十六日生。蚤孤。以母夫人命從朴訥齋祥昆弟學。正德丙子登上庠。嘉靖乙酉擢大科。自是歷踐講院,弘館。累拜憲諫諸官及舍人。陞至承政院代言。間出守同福,錦山二邑。觀察江原道。最後爲潭陽府使。其出處可考者如此。卒於隆慶戊辰三月九日。壽七十有三。卜葬家北數里馬浦抱戌之原。公性俶儻不羈。有奇節偉氣。少以詞藝顯。出入華膴。顧其志操貞潔。未嘗隨俗俯仰。至見奸邪用事。輒發其不平。繇是晩更落拓遲回。乙巳之難。棄官還鄕。雖紆郡紱。旋皆謝歸。無復當世意。卜築于昌平星山洞。水石幽勝。常往來棲息。婆娑嘯詠以自適焉。其爲文章。雄肆豪逸。大抵原於南華,靑蓮。往往膾灸人口。至或有不可窺測者。所交游多一世名德。最與成聽松守琛,金河西麟厚二公善。其志義相符可知已。以至後來嚮往者愈甚。栗谷李先生嘗寄贈公有今日屈膝之語。蓋其歸趣不獨以詩然也。嗚呼盛哉。公娶知禮錢氏。生子曰澯無嗣。今只有側出後孫及外裔若干人。由此平生事行顚末。無一考信。墓又不豎片石。其亦可謂悲矣。今海南縣監柳君尙載。行省公墓。慨然圖所以表之者。貽書世采。願紀其梗槩。余惟公以高才異姿。仕當先後抗捏。卒之不遇以歿。其所蘊畜。固非世人可知矣。矧其有絶塵奇傑之辭而不以自多。有傷時憂蹙之志而不以自見。有謝事歸休之美而不以自異。後之人徒見其胸懷超然若離群出世。浮游八極之表者。而它又無得而稱焉。惟念同時諸賢或風韻迭倡。或德義相推。咸以爲湖南名賢逸士之巨擘。至今昭揭耳目。斯乃所以知公者歟。斯乃所以知公者歟。嗚呼盛哉。抑柳君爲攻。殆亦有聞於彰樹之義矣。是爲表。六月十九日.[호남에는 명현과 은일자가 많았는데, 특히 중종과 명종대에 가장 많았다. 풍격과 절개, 문장이 뛰어나 당대 제현들의 존경을 받은 분들 중 오직 저 옛날의 관찰사 석천 선생 임억령 공이 단연 으뜸이었다고 한다.
공의 자는 대수, 관향은 선산이다. 공의 시조 임양저는 신라에서 중랑장 벼슬을 하였다. 경순왕이 고려로 귀순할 때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이후 자손들은 여러 고을에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때, 해남현으로 이주한 사람이 공의 선조다. 증조 임득무는 참의에 추증되었고, 조부 임수는 현감으로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임우형은 판서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음성 박씨다.
공은 홍치 9년(1496, 연산군 2) 2월 16일에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의 명에 따라 눌재 박상과 그 아우에게 글을 배웠다.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에 태학에 들어갔고, 가정 을유년(1525, 중종 20)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시강원,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관직을 두루 거쳐 사인에 임명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승정원 승지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동복, 금산 두 고을의 수령과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고, 마지막으로 담양부사가 되었다. 공에 대해 상고할 만한 출처는 이상과 같다. 융경 무진년(1568, 선조 1) 3월 9일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집 북쪽 몇 리 떨어진 마포에 술향으로 묻혔다.
공은 성품이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였으며, 특이하고 위대한 기개가 있었다. 젊어서 문명을 날려 관직이 화려하였으나 공의 지조는 곧고 깨끗하여 시류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간사한 사람이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면 번번이 불평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이로 말미암아 만년에는 벼슬이 뒤쳐져 하위에 머물렀다. 을사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다시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지만 곧바로 사양하고 돌아가 다시는 세상에 뜻이 없었다. 창평 성산동에다 터를 잡아 지은 집에 기거하면서 그윽한 산수의 경관 사이를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고 한가롭게 읊조리며 마음이 가는 대로 유유히 생활하였다.
공의 문장은 웅장하고 호방하였다. 이는 남화(장자의 별칭)와 청련(당나라 시인 이백의 별칭)을 본받은 것으로서, 이따금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고, 심지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사귀는 사람은 대부분 당대의 유명한 분들이었다. 특히 청송 성수침, 하서 김인후 두 공과 사이가 좋았으니, 뜻이 서로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찾아간 사람이 갈수록 많았다. 율곡 이이 선생이 일찍이 공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 무릎을 꿇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대체로 그 귀추가 시를 잘 지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 매우 훌륭하도다.
공이 지례 전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임찬(林粲)을 낳았으나 사손이 없고, 다만 측실에게서 난 후손과 외손 몇 명만 있다. 이로 말미암아 공의 일대기를 하나도 고증할 수 없고, 묘소에도 비석 하나도 세우지 않았으니, 이 또한 슬픈 일이다. 지금 해남현감 유상재 군이 순행하다 공의 묘소를 살펴본 뒤 슬픈 마음이 들어 나 박세채에게 편지를 보내 개략적인 것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공은 높은 재주와 특이한 자질로 벼슬할 때 앞뒤로 저지를 당하였고, 결국 불우하게 세상을 떠났으므로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세상 사람들이 알 도리가 없다. 더구나 고상하고 호방한 문장을 지니고도 자만하지 않았고, 시대를 걱정하는 뜻을 품고서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일을 사절하고 돌아가 쉬는 미덕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공의 가슴에 품은 뜻이 초연하여 무리와 떨어져 세상 밖에서 노니는 것만 보았으므로 다른 것은 일컬을 수가 없었다.
당대의 선비들은 공의 시를 서로 읊기도 하고, 혹은 덕의로 서로 추앙하면서 모두 입을 모아 공을 호남의 유명한 현인과 은둔한 선비 중에 으뜸이라고 하였다. 이런 선비들이야말로 공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 매우 훌륭하도다. 유군의 정사는 그 또한 선행을 드러내어 풍속을 수립하는 아름다움을 들어보았다고 하겠으므로 이에 묘표를 쓴다. 6월 19일.]
박세채의 묘표에는 '공이 지례 전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임찬을 낳았으나 사손이 없고, 다만 측실에게서 난 후손과 외손 몇 명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선산 임씨 문중에서 새로 세운 묘표에는 '공은 지례 전씨를 아내로 맞아들여 1남1녀를 두었다. 딸은 직장(直長) 백행(白垳)에게 시집가고, 아들 찬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찬은 밀양 박씨(密陽朴氏) 관(寬)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1녀를 뒀으나 자손이 없었고,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박개(朴漑)의 딸을 후처로 맞아 3남을 뒀다.'고 기록되어 있다.
1721년(경종 1) 삼현사에 윤구와 윤선도를 추가 배향하고 오현사(五賢祠)라 했다. 1723년(경종 3) 3월 장암(丈巖) 정호(鄭澔)는 '식영정중수기(息影亭重修記)'를 썼다.
정호의 '식영정중수기' 편액
식영정중수기(息影亭重修記) - 정호
息影亭, 卽故林石川遺址也. 石川當明廟乙巳, 知士禍將作, 絶意遊宦, 退歸南中, 構一小亭於昌平星山之下, 扁以息影, 作記以見志. 亭之北, 有棲霞堂舊基, 又有芳草洲,紫薇灘,鸕鶿巖,琴軒,月戶等諸勝景. 與河西,霽峯及我松江先祖杖屨相從於一洞之中, 其遺蹟歷歷, 至今人能傳誦. 松江遺稿中, 亦載息影亭雜詠, 有‘身藏子眞曲 手理卲平瓜 及 萬古蒼苔石 山翁作臥床’等句, 其諷詠高風遠操之意, 可以想像矣. 今其子姓零替, 只有外裔若干人, 不能保守舊業, 轉輾爲他人物. 余族姪敏河, 惜其前賢遺址沒爲田父野老之居, 遂買取而重修之, 邀余作記. 余謂爾能慕前賢之遺躅, 占舊地而修葺之, 其志可尙. 然徒愛泉石園林之勝, 而不慕其諸賢文章德業之懿, 則不幾於取其末而遺其本乎? 地靈人傑, 古語可徵, 山川旣無古今之異, 則
人材豈有今昔之殊? 今爾亦能迎訪一時修行之士, 講服以友輔仁之訓, 居古人之所居, 行古人之所行, 使吾文章德業, 播詠於後人之口, 亦猶今之視昔, 則豈不休哉, 豈不偉哉?[식영정은 곧 임석천의 옛터이다. 석천이 명종 을사년(1545)에 장차 사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벼슬할 뜻을 버리고 호남으로 돌아와 창평현 성산 아래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이름을 식영정이라고 하고 기문을 지어 그 뜻을 밝혔다. 정자 북쪽에는 서하당의 옛터가 있고 또 방초주, 자미탄, 노자암, 금헌(琴軒), 월호(月戶) 등 여러 절경이 있다. 하서와 제봉 그리고 우리 송강 선조가 서로 함께 한 마을 가운데에서 종유하였으므로 그 유적이 역력하여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전하여 이야기한다. 송강의 유고 중 '식영정잡영'에 다음의 시가 실려 있다.
身藏子眞谷(신장자진곡) 자진처럼 깊은 골짝에 몸 숨기고
手理邵平瓜(수리소평과) 진나라 소평처럼 외 손수 가꾸네
陽坡種瓜(양파종과) 1, 2구
萬古蒼苔石(만고창태석) 오랫동안 푸르른 이끼 덮인 돌을
山翁作臥床(산옹작와상) 산옹이 평상 만들어 거기 누웠네
石亭納涼(석정납량) 1, 2구
이러한 시구에서 그의 고상한 풍치와 원대한 지조를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지금 그의 자손이 미약하고 단지 외손만이 약간 명 있어 구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전전하다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내 족질인 민하는 전현의 정자 터가 몰락되어 밭을 가는 시골 늙은이의 거처가 된 것을 애석하게 여겨 마침내 이를 사들여 중수하고는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네가 전현의 유적을 사모하여 옛터를 사들여 중수한 것은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러나 산수와 정원 숲의 아름다운 것만 사랑할 줄 알고, 제현의 문장과 덕업의 아름다움을 사모할 줄 모른다면 그 말단을 취하고 그 근본을 버린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인걸이 나온 것은 땅이 신령스러워서라는 옛말이 징험하듯이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니 인재가 어찌 금석의 다름이 있겠는가? 지금 네가 한때 수신하는 선비들을 잘 맞아들여 서로 격려하면서 덕을 닦는 벗의 교훈을 강론하고 옛 사람이 거처하던 곳에 거처하고 옛 사람의 행동을 따라 행하여 우리의 문장과 덕업을 후세 사람들이 입으로 외우게 한다면 또한 지금 옛날을 본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위대하지 않겠는가?']
崇禎後癸卯 季春 上浣 薪島病纍(숭정 후 계묘년 음력 3월 상순 신도 병루)
숭정 후 계묘년은 1723년이다. '식영정중수기'에는 식영정 주인 임억령이 남쪽으로 내려온 연유, 당시 교유했던 인물들과 식영정 근처 경관에 대한 설명, 그리고 정철의 5대손 소은(簫隱) 정민하(鄭敏河)의 주도로 퇴락한 식영정을 다시 중수하게 된 배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정호는 충북 충주 출신으로 정철의 4대손이다. 자는 중순(仲淳)이다. 노론의 수장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였던 그는 일생 동안 노론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영조 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정호는 이기홍(李箕洪)의 부탁으로 청풍 팔영루(八詠樓)의 중건기도 썼다. 그의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산 100번지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245번지에 있는 누암서원(樓巖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문집에는 '장암집(丈巖集)'과 편서 '문의통고(文義通攷)'가 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성산사
1795년(정조 19) 창평현 지곡리 성산에 성산사(星山祠, 담양군 남면 지곡리)를 세우고 임억령을 주벽으로 향사했다. 이때 장유, 조흡, 정철의 4남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김수항의 아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도 함께 배향했다. 2년 뒤에 정민하, 정민하의 장남 계당(溪堂) 정근(鄭根)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51년(철종 2) 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성산사가 훼손되자 사우를 증암천 건너편 석저촌(石底村, 환벽당 뒷마을)으로 옮기고 환벽사(還碧祠)라 하였다. 이때 춘향(春享)은 광주향교, 추향(秋享)은 창평향교에서 향사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성산사는 훼철되고, 위패는 그 자리에 묻었다.
1898년(고종 35) 11월 '석천집' 7권 3책을 인출하였다. 1678년에 김수항이 편집 간행한 목판본 중에서 8권부터 11권까지는 없어지고 영암 영보의 전주 최씨 문각에 남아 있던 1권~7권을 보수하고 여기에 박세채가 쓴 묘표와 습유시(拾遺詩) 수십 수를 보충하여 7권 3책으로 인출한 것이다.
해남군 해남읍 해리 금강골 해촌서원
1922년(대한민국 임시정부 4년) 오현사는 박백응을 더 배향하고 육현사(六賢祠)라 했다. 해남읍 구교리에 있던 부춘재(富春齋)를 해리 금강산 금강골로 이건하면서 해촌서원(海村書院)으로 개명하고, 해남 육현(海南六賢)을 이곳으로 옮겨서 배향했다. 그래서 해촌서원을 육현사라고도 한다. 매년 음력 8월 5일 해남의 유림들은 해촌서원에서 해남 육현을 향사하고 있다. 임억령은 또 김인후, 안방준과 더불어 호남 3고(湖南三高)로도 일컬어졌다.
1935년(임정 17년) 임억령의 문집 보유록(補遺錄) 1책을 만들었다. 임억령의 시 중에서 선별하여 목각하고 남겨둔 시를 임영한(林英漢)이 기록한 것이다. 이 보유록에 임억령의 연보가 들어 있다. 1984년 3월 임억령의 문집 필사본 5책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발견되었다. 규장각본에 등재된 시는 약 2,300여 수가 연대순으로 실려 있어 임억령의 시문학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된다.
식영정에서 임억령 16대손 임남형 옹과 함께
1987년 3월 산암(汕巖) 변시연(邊時淵)이 임억령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5월에는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이 임억령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2년 뒤에는 임억령의 문집 영인본이 간행되었다. 임억령의 16대손 임남형(林南炯)이 규장각본을 영인하고, 1678년 간행본 부록과 1898년 간행본 습유, 1935년 필사본 습유 및 연보를 보정 첨부하였다. 여기에 더해 서술(敍述), 제현수창(諸賢酬唱), 사액제문, 신도비명, 묘지명, 식영정중수기, 조선왕조실록요초(朝鮮王朝實錄要抄) 등을 국역하여 편집하고, 임용주(林容株)의 논문과 임형택(林滎澤)의 해제를 붙여서 여강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90년 임억령의 문집 영인본 속편을 간행하였다. 임남형이 영인본을 간행한 직후, 1572년 제주에서 간행한 '석천시집' 최초본(고려대학교 소장)을 발견하고 영인본에 없는 시 215수를 가려 속간(續刊)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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