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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과 부용당(芙蓉堂)을 찾아서 2

林 山 2018. 4. 11. 12:29

1560년(명종 15) 김성원은 침랑(寢郞)에 임명되었다. 침랑은 조선시대 종묘(宗廟) 왕릉(王陵), 원(院)의 영(令)이나 참봉(參奉)을 말한다. 그해 고향 해남을 떠나 창평 성산으로 온 임억령은 사위 김성원이 서하당 바로 서쪽 언덕 위에 새로 지어 준 식영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렇게 해서 임억령은 식영정의 주인, 김성원은 서하당의 주인이 되었다. 임억령은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조선 최고의 시인이었고, 김성원은 시에도 능했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의 대가였기에 식영정과 서하당에는 송순, 김윤제, 양산보, 김인후, 유희춘기대승, 고경명, 정철,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0),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등 조선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시인, 문사들이 모여들었다.


부용당


부용당 편액


김성원의 사후에 그의 유고를 모아 엮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행장(行狀)에 '庚申公三十六歲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爲終老計(경신년 공이 36살 때 창평의 성산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짓고 생애를 마칠 계획으로 삼았다.)'란 기록이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을 김성원이 36살 때인 1560년에 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성원의 호와 서하당의 당호가 같은 데서 비롯된 오류다. 당시 누정을 세우려면 선비로서 벼슬도 지내야 했고, 또 상당한 재력이 필요했다. 당시 관직 경력도 없던 김성원은 누정을 세울 만한 여건이나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62년(명종 18) 67세의 임억령은 성산을 떠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임억령은 해남읍 남천리(南川里) 남각산(南角山, 319m) 남쪽 기슭 남천(南川)이 바라다 보이는 남곽초당(南郭草堂)을 찾아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어 임억령은 해남에서 강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사위 김성원이 강진으로 찾아와 장인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이 무렵 김성원은 '식영정원운시(息影亭原韻詩)'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면앙정 주인 송순이 원운시에서 차운하여 '차김상사성원식영정운(次金上舍成遠息影亭韻, 김상사 성원의 식영정운에서 차운하다)'이란 제목의 오언사운(五言四韻) 2수를 지었기 때문이다. '차김상사성원식영정운'의 앞부분에는 '계해년(1563년) 가을 주인 김군이 임석천을 위하여 새로 이 정자를 지어주니 석천이 식영이라 이름 붙였다.', 뒷부분에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이 일동의 삼승(一洞之三勝)이라고 일컬었는데, 이때에 소쇄옹이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구에 그를 기리는 글을 적는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송순은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1563년에 식영정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임억령이 성산을 떠나 해남으로 돌아간 해가 1562년임을 고려하면 식영정을 1560년에 세웠다는 설이 타당성이 있다.


기대승도 김성원의 원운시에서 차운하여 '차식영정운(次息影亭韻)'을 지었다. 이 시에서 기대승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에 따라 자연에 동화되어 산림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임억령과 김성원의 은일한 삶을 예찬했다. 정철도 같은 운자를 써서 '차식영정운'을 지었다. 주역과 별자리 점을 잘 보는 은자(김성원)가 거문고를 잘 타서 서하당을 자주 찾게 된다는 내용의 시다.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도 차운시를 남겼다.      


정철은 김성원보다 11살 어렸으나 두 사람은 절친한 벗처럼 지냈다. 정철은 김성원의 서하당을 자주 드나들었다. 때로는 서하당에서 밤을 새며 '하당야좌(霞堂夜坐)'란 시를 남기기도 했다. 


하당야좌(霞堂夜坐)-밤에 서하당에 앉아서(정철)


移席對花樹(이석대화수) 자리를 옮겨 꽃나무와 마주하고

下階臨玉泉(하계임옥천) 뜰에 내려가 맑은 샘에 다다랐네

因之候明月(인지후명월) 이곳에서 밝은 달을 기다렸더니

終夜望雲天(종야망운천) 밤새 구름 낀 하늘만 바라보았네


정철과 김성원 두 사람 사이의 평생지기 우정은 '요기하당주인김공성원(遙寄霞堂主人金公成遠)'이란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정철이 창평을 떠나 있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  


 요기하당주인김공성원(遙寄霞堂主人金公成遠)

멀리 서하당 주인 김성원에게 부치다(정철)

   

骨肉爲行路(골육위행로) 골육간에도 가는 길이 다르고

 親朋惑越秦(친붕혹월진) 친한 벗도 혹은 앙숙이 되나니

 交情保白首(교정보백수) 사귀는 정 늙도록 지키는 이는

  海內獨斯人(해내독사인) 세상에 오직 그대 하나 뿐일세 


우정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사람은 오직 김성원 하나뿐이라고 노래한 시다. '행로(行路)'는 세상을 살아가는 길, 노선을 말한다. '월진(越秦)'은 월나라와 진나라처럼 서로 원수처럼 지내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뜻한다.


김성원은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임억령, 김인후를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기대승, 고경명, 정철, 백광훈 등 비슷한 연배의 문인들과도 활발한 교유를 하였다. 김성원이 기대승과 고경명에게 화답한 사시영(四時詠) 중 '봄’이란 시가 있다.


훈훈한 바람 솔솔 끝없이 불어오니

높다란 정자에 올라서 봄놀이 하네

봄날에 피어난 꽃에 번뇌가 일어서

성성한 백발도 모두 잊어 버렸다네

물빛은 저 멀리 골짝까지 이어지고

비취빛 감도는 텅빈 뜰을 적시누나

꽃길을 쓸 것까지야 뭐가 있으리요

환한 대낮에도 사립문 닫혀 있는데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유명한 백광훈은 '금릉기회증서하주인즉김성원(金陵記懷贈棲霞主人卽金成遠)'이란 칠언고시를 김성원에게 보내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했다. 이 시를 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릉기회증서하주인즉김성원(金陵記懷贈棲霞主人卽金成遠)

금릉(金陵)의 회상, 서하당 주인 김성원에게 드리다 - 백광훈


與子論交十載強(여자론교십재강) 그대와 사귐을 논하자면 족히 10년이 넘었는데

中間聚散何不常(중간취산하불상) 그간에 만남과 헤어짐은 무슨 이유로 잦았는지

干戈紛紛日月徂(간과분분일월조) 다툼으로 혼란한데 세월만 덧없이 흐르고 흘러

音影杳杳川關長(음영묘묘천관장) 멀고 아득한 관문인 양 가로막은 시냇물이었소

時將前事口獨語(시장전사구독어) 때때로 지나간 일들을 나홀로 중얼거려 보네요

夢尋陳跡心難詳(몽심진적심난상) 꿈꾸듯 옛일 돌아보면 심난함이 또렷이 보이고

思之不可令人愁(사지불가령인수) 생각컨대 그럴 필요 없었음에 더욱 슬퍼지네요

前年爲作光山遊(전년위작광산유) 몇 년쯤 전인가요 광산으로 여행을 떠났었지요

君家光山城正東(군가광산성정동) 그대의 집은 광산성의 정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瑞石峯帶蒼溪流(서석봉대창계류) 무등산 서석봉이 둘러있고 창계 물길 흘렀지요


백광훈이 오래전 김성원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는 시다. '금릉(金陵)'은 전라남도 강진의 옛 이름이자 옛 도강현(道康縣)의 별호였다. 조선 초 도강현과 탐진현(耽津縣)을 합해서 강진군(康津郡)으로 개편했다. '기회(記懷)'는 '회상(回想)을 기록하다'의 뜻이다. '음영(音影)'은 높고 낮음(音)과 짙고 옅음(影)이다. '시장(時將)'은 '때때로'의 뜻이다. '불가령(不可令)'은 '부질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광산(光山)'은 광주의 옛 이름이다. '서석봉(瑞石峯)'은 광주 무등산(無等産) 남동쪽 서석대가 있는 봉우리다. 무등산을 옛날에는 서석산이라고도 불렀다. 


蒼溪之上詢且樂(창계지상순차락) 창계천의 상류에서 서로 위문하고 또 놀았는데

白波靑嶂眞仙區(백파청장진선구) 흰 물결과 푸른 산봉우리는 진정 선경이었지요

瓊樓綺席不敢當(경루기석불감당) 멋진 누각과 화려한 연회자리는 감당 못하지만

玉琴瑤瑟陳壺觴(옥금요슬진호상) 아름다운 옥구슬 거문고에 술자리 베풀 적에는

千松影處月如晝(천송영처월여주) 수많은 소나무 그림자는 달빛 속에서 대낮같아

一水聲時風入酒(일수성시풍입주) 물소리가 들려올 때는 술잔에 바람도 일었지요

環碧堂前竝吟騎(환벽당전병음기) 환벽당 앞에서 나란히 말타고 노래도 부르면서

瀟灑園中聯舞袖(소쇄원중련무수) 소쇄원에 이르러 중련 맞춰 소매춤도 추었는데

此時歡賞心未極(차시환상심미극) 그때의 기쁨은 마음에 흡족할 정도는 아닌지라

勝事重結江南約(승사중결강남약) 더 좋았던 것은 강남에서 놀자는 약속이었네요


백광훈과 김성원 두 사람이 담양 창계천과 환벽당, 소쇄원을 오가며 노닐던 때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옥금요슬(玉琴瑤瑟)'은 옥으로 만든 작은 거문고(玉琴)와 큰 거문고(瑤瑟)이다. '중련(中聯)'은 율시(律詩)의 팔구(八句) 가운데 함련(頷聯)인 제3, 4구와 경련(頸聯)인 제5, 6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중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추던 무용곡으로 보인다. 식영정에서 환벽당까지는 약 500~600m, 소쇄원까지는 약 1km의 거리다. '승사(勝事)'는 좋은 일, '중결(重結)'은 '거듭 맺다, 거듭 다짐하다'의 뜻이다. '강남(江南)'은 남도 담양을 가리킨다.   


江南詞宗吾石川(강남사종오석천) 전라도의 사종이자 내 스승이신 석천 선생님은

文彩風流今謫仙(문채풍류금적선) 그 문채와 풍류가 오늘날의 적선이 분명합니다

玉堂金馬謝時人(옥당금마사시인) 옥당에 머물던 훌륭한 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歸來獨與漁蓑親(귀래독여어사친) 홀로 돌아올 때엔 어부의 도롱이를 내주셨지요

君於門下情義俱(군어문하정의구) 그대는 대문까지 내려와 정분도 함께 주셨고요

來拜果趁梅花春(래배과진매화춘) 매화 피는 봄철에 와서 인사드리겠다 했었지요


백광훈이 임억령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임억령의 인간성이 매우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사종(詞宗)'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석천(石川)'은 임억령의 호다. 임억령은 호남(湖南)의 사종(詞宗)이라고 불렸다. '문채(文彩)'는 아름답게 꾸며 쓴 멋진 문장을 말한다. '적선(謫仙)'은 벌을 받고 인간 세계로 내려온 신선인데, 여기서는 당(唐)나라 때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말한다. 이백은 선계(仙界)에서 인간 세상으로 쫓겨난 선인(仙人)이라고 일컬어졌다.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부귀한 집이라는 뜻도 있다. '금마(金馬)'는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이다. 또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 대문의 별칭이기도 하다. 미앙궁 대문 앞에 구리로 만든 말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문학에 뛰어나 황제의 조칙(詔勅)을 작성하는 벼슬아치가 드나들던 문이다. '시인(時人)'은 '그 당시의 사람'이다. '래배(來拜)'는 '찾아와 인사를 드리다'의 뜻이다. 


竹屋同陪三夜雪(죽옥동배삼야설) 대나무집에 모셨을 땐 사흘째 눈이 내렸었는데

舊約正滿寒山月(구약정만한산월) 오랜 약조는 차고 겨울산에는 달이 떠올랐지요

柴門迎笑日未午(시문영소일미오) 사립에서 웃으며 맞이한 그 때가 한낮이었네요

情至敢恥窮閭陋(정지감치궁려루) 정성을 다하려고 해도 집이 궁핍하고 옹색하여

一尊徑酌春山邊(일존경작춘산변) 봄산 기슭에서 존경의 마음으로 술을 따랐는데

靑芻白飯聊隨緣(청추백반료수연) 나물에 쌀밥 대접뿐이었지만 뭐 인연인 거지요

明燈仍作終夜話(명등잉작종야화) 등잔불 켜놓고 밤이 다하도록 담소를 나누고는

爲道明朝路脩阻(위도명조로수조) 떠나는 이튿날 아침 길은 멀고도 험하였습니다

溪頭臨別兩相顧(계두임별양상고) 강나루에 이르러 서로 바라보고 이별을 하면서

且問後會知何處(차문후회지하처) 다음에 다시 만날 곳이 어디인지 물으셨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번에 백광훈이 김성원의 집을 찾아가서 만난 얼마 뒤에 이번에는 김성원이 해남으로 백광훈의 집을 찾아와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의 일을 쓴 것으로 보인다. 강나루에서 이별하며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우의가 매우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미오(未午)'는 오전 11시∼ 오후 3시 사이다. '정지감치(情至敢恥)'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모든 성의를 다하다'의 뜻이다. '궁려(窮閭)'는 '가난한 집'이다. '청추백반(靑芻白飯)'은 '나귀에게는 푸른 꼴을 먹이고(靑芻), 사람에게는 흰 쌀밥을 대접하다(白飯)'의 뜻이다. '료수(聊隨)'는 '~을 따르다, ~에 순응하다', '잉작(仍作)'은 '여전히, 여전히 작당(作黨)하다', '위도(爲道)'는 '길을 가야 하다', '로수조(路脩)'는 '길이 너무 멀고, 가로막히다', '계두(溪頭)'는 '강나루'의 뜻이다.


俄聞君舅崔使君(아문군구최사군) 나중에 그대의 외삼촌인 최 사군에게 들었는데

作宰金陵符已分(작재금릉부이분) 금릉 부사에 임명하는 부절을 받았다 하셨지요

金陵距我三十里(금릉거아삼십리) 금릉에서 제가 거처하는 곳은 삼십리의 거리라

相見有期心獨喜(상견유기심독희) 만나자고 기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지요


백광훈이 김성원의 외삼촌 최 사군이 금릉부사로 부임하는 날 금릉(강진)에서 김성원과 만날 약속을 하고 행복해하는 내용이다. 김성원의 어머니는 해주 최씨였다. 그의 외삼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사군(使君)'은 감사(監使), 부사(府使) 등 지방 수령에 대한 통칭이다. '작재(作宰)'는 '태수(太守)가 되다'의 뜻이다. '부이분(符已分)'은 '부절(符節)을 나누어 받았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지방 수령을 임명할 때 동(銅)으로 만든 부(符)를 주었는데, 두 쪽으로 쪼개서 오른쪽 부는 임금이 지니고, 왼쪽 부는 지방 수령에게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문무과의 전시(殿試) 급제자에게 성명, 갑을병 등 과의 구분을 기입하고, 연월일을 쓴 그 밑에 어보를 찍은 홍패(紅牌)를 주었다. 지방 수령에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받았다는 뜻이다. 또는 일괄 인사 이동에 따라 교지를 여러 관리들과 함께 나누어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삼십리(三十里)'는 백광훈의 고향 전라남도 해남과 금릉의 거리를 말한다.  


窮閻不慣輪蹄聲(궁염불관륜제성) 궁벽한 시골의 말발굽 수레바퀴 소리가 낯설고

白騎雕鞍兒輩驚(백기조안아배경) 흰 깃발에다 무늬 안장에 아이들도 놀라더군요

自言金陵太守使(자언금릉태수사) 금릉의 태수님을 뵈오러 왔다는 말을 전했는데

說君便到金陵城(설군편도금릉성) 그대를 말하자 곧 금릉성에 쉽게 도착하더군요

催鞭山路背斜暉(최편산로배사휘) 말을 모는 채찍조차 산길의 뒤에서 빛났습니다

一望孤城心欲飛(일망고성심욕비) 우뚝한 성을 바라보자 마음이 날아갈 듯했지요

中慶相拜敍暄冷(중경상배서훤냉) 경사 중에 상견례는 따뜻하고도 격식이 있었고

吾儕向來乃多幸(오제향래내다행) 또 우리를 향해 와주시니 얼마나 다행이던지요

重簾晩捲水雲上(중렴만권수운상) 저녁무렵 겹발을 걷어올리니 바다에 떠있는 듯

翠幕夜飮紅燈影(취막야음홍등영) 녹색 천막마다 술잔치라 붉은 등이 어른댔지요

疏狂特荷主人寬(소광특하주인관) 거칠고 또 난잡해도 주인께서는 그저 너그럽고

醉語寧嫌醒者聽(취어녕혐성자청) 취객의 말을 말짱한 사람이 어쩌랴 하셨습니다


금릉부사 부임(赴任) 행차와 고을 아전들과의 상견례, 부임 잔치 광경 등을 쓴 시다. 백광훈은 김성원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해남을 떠나 강진 입구에서 만나 금릉부사 부임 행차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궁염(窮閻)'은 '궁벽한 마을'이다. '불관(不慣)'은 '익숙하지 않다, 잘 하지 못하다, 낯설다', '훤냉(暄冷)'은 '따뜻하면서도 격식을 갖추다'의 뜻이다. '수운상(水雲上)'은 금릉성에서 강진만을 내려다보니 바다와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표현이다. '소광(疏狂)'은 '거칠고 난잡하다', '특하(特荷)'는 '특별한 은혜, 친분으로 인한 사사로움'의 뜻이다. 


城東時出龍湫曲(성동시출용추곡) 강진에서 담양의 용추 계곡으로 갈 때였는데요

水碧沙明村路永(수벽사명촌로영) 끝없는 시골길에 물은 푸르고 모래는 빛났지요

擧網細鱗狀松江(거망세린장송강)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송강의 농어처럼 맛있고

鑾刀落膾銀絲迸(란도락회은사병) 란도로 회를 뜨니 은실이 떨어져 날아갔습니다

有客示我石川詩(유객시아석천시) 손님이 나를 바라보며 석천 선생의 시를 읊으니

紙張三歎眞天奇(지장삼탄진천기) 뛰어난 재주로 세 번의 화답시가 뒤따랐습니다


강진에서 담양의 용추계곡으로 가서 맛있는 물고기를 잡아 회를 쳐서 먹고, 손님과 시를 주고받았다는 내용이다. '용추곡(龍湫曲)'은 담양 용추봉(龍湫峰, 584m) 남서쪽의 용추계곡을 말한다. '송강(松江)'은 중국 오(吳)나라의 송강(松江)이다. 오강(吳江) 또는 오송강(吳淞江), 송강(鬆江)이라고도 한다. 오나라 송강에서 난 농어(鱸魚)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오중노회(吳中鱸膾)'란 고사성어가 있을 정도다. 동진(東晉)의 장한(張翰)은 대사마동조연(大司馬東曹掾)이 되어 양(洛陽)에 있을 때 가을 바람이 불자 고향인 강동(江東)의 오강에서 나는 농어회와 순채국이 생각난 나머지 악부시(樂府詩) '사오강가(思吳江歌)'를 지은 뒤, '人生貴得適意爾何能羈宦數千里以要名爵(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뜻에 따르는 것인데 어찌하여 관직에 얽매여 수천리 밖에서 명예와 관직을 구하겠는가)'이란 말을 남기고 벼슬도 내던진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거망세린(擧網細鱗)'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란 뜻이다. '란도(鑾刀)'는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쓸 짐승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칼이다. 칼끝과 손잡이 부분의 고리에 다섯 개의 작은 방울이 달려 있다. '낙회(落膾)'는 '회를 뜨다', '지장(紙張)'은 '닥나무로 만든 노랗고 두툼한 종이', '삼탄(三歎)'은 '세 번을 화답하다', '천기(天奇)'는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다'의 뜻이다. 


先生今臥蒼溪雲(선생금와창계운) 선생님께선 이제 창계의 구름 속에 누워계시니

海風江月閑多時(해풍강월한다시) 해풍과 강달을 벗삼아 한가한 시간이 많겠지요

我復爲君高聲吟(아부위군고성음) 선생님 위하여 다시 소리 높여서 노래하렵니다

潭底神龍應自知(담저신룡응자지) 연못 속의 신령한 용께서는 당연히 아시겠지요

南山舊遊白蓮寺(남산구유백련사) 강진의 남산 백련사를 유람할 때도 있었습니다

綠陰晴日宜初夏(녹음청일의초하) 숲도 푸르른 초여름의 화창한 한낮에 말입니다

平明載酒度蒙密(평명재주도몽밀)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술을 마셨지요

山鳥溪雲曾識我(산조계운증식아) 산새들도 계곡의 구름도 일찌기 나를 알아봤고

金宮碧殿鬱岧嶢(금궁벽전울초요) 절의 전각은 빽빽하게 우거진 숲속에 있었는데

撞鐘擊鼓聞層霄(당종격고문층소) 범종과 법고 소리는 하늘 높이 울려퍼지더군요

山英如勞遠遊跡(산영여로원유적) 산마루까진 피로 탓인지 걷기에 멀어 보였지요

夜半月出東峯白(야반월출동봉백) 한밤중에 동쪽 봉우리에서 환한 달이 떠오르자

攬衣推戶蹴君起(람의추호축군기) 옷을 입고 문을 열려는 선생님 따라 일어났지요

上下湖山渾一色(상하호산혼일색) 호수와 산이 일체가 되어 뒤섞인 느낌이었는데

南樓呼酒看更好(남루호주간갱호) 남루로 가셔서 술을 부르시곤 좋구나 하셨지요

桂影入盞淸生骨(계영입잔청생골) 달그림자 띄워 마시니 청기가 뼈에 새롭더군요

老僧勸我就房眠(로승권아취방면) 노스님은 이제 방에 들어가 자라고 권하셨지요

明日舟行當早發(명일주행당조발) 이튿날 배로 가려면 일찍 출발해야만 했는데요

曈曈初日亂巖同(동동초일란암동) 솟아오르는 해를 보자 바위인 줄 착각했습니다

激激幽泉遠相送(격격유천원상송) 멀리 일렁이는 샘이 전송하는 것처럼 보였네요


백광훈이 백련사에 머물고 있던 임억령을 찾아가서 만났을 때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임억령은 1549년(명종 4) 10월 거처를 해남에서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 부근 덕영촌,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신평 마을로 옮겨 은거했다. 이때 완도 유람을 하고 돌아왔다. 1559년 백광훈은 스승 임억령을 모시고 땅끝으로 여행을 떠나 바닷가 절에서 하루 묵은 적도 있다.


'평명(平明)'은 '해가 밝아올 무렵', '몽밀(蒙密)'은 '어둑어둑해지다', '금궁(金宮)은 '절', '벽전(碧殿)'은 '사찰의 전각(殿閣)', '울초요(鬱岧嶢)'는 '울창하고 산세가 가파르고 높다', '여로(如勞)'는 '피로 때문에'의 뜻이다. '동동(曈曈)'은 '아침 해가 빛나는 모양', '격격(激激)'은 물이 급하게 흐르는 모양'이다.


篙師艤船待已久(고사의선대이구) 나이든 뱃사공이 배를 댄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水面灔灔輕風弄(수면염염경풍롱) 물결은 일렁이고 또 바람은 솔솔 스쳐지나가고

靑山白鳥去不窮(청산백조거부궁) 푸르른 산에는 하얀 새들이 끝없이 날아가는데

天陰海氣相溟濛(천음해기상명몽) 구름 끼어 바다가 어두워지자 부슬비 내렸지요

船舷遙戛雲際寺(선현요알운제사) 저멀리 뱃머리 구름들 사이로 절간이 보이는데

樓觀依微畫圖裏(루관의미화도리) 자세히 보니 누각의 그림이 어렴풋 보였습니다

始信夜來非人間(시신야래비인간) 밤이 되어서야 속세를 떠나 있었음을 믿었고요

指點翻疑夢中事(지점번의몽중사) 사람이 알려주어서 꿈이 아님도 알게 되었지요


배를 타고 바다를 유람하는데, 바다 풍경이 마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같았다는 내용이다. '고사(篙師)'는 '오랜 경험을 쌓아 배를 부리는 일에 숙련된 나이든 뱃사공', '염염(灔灔)'은 '일렁거리다', '천음(天陰)'은 '하늘이 흐리다, 하늘이 어두워지다, 날씨가 나빠지다', '명몽()'은 '어슴푸레하다, 부슬비', '알운(戛雲)'은 '중간중간 끊어진 구름', '의미(依微)'는 '아리송하고 어렴풋하다', '지점(指點)'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다, 가리켜 알려 주다', '번의(翻疑)'는 '도리어, 의심을 거두다'의 뜻이다. 


舟人共道牛島好(주인공도우도호) 어떤 사람이 쇠섬이 아름답다고 말해서 가는데

一點漠漠波中小(일점막막파중소) 바다 위에 막막한 하나의 점으로 여겨졌습니다

巖邊繫纜石無路(암변계람석무로) 바위에다 배를 묶고서 내렸는데 길조차도 없고

苦竹叢深鳴怪鳥(고죽총심명괴조) 울창한 참대숲에선 이름 모를 새들이 울더군요

時逢沙戶蘆葦間(시봉사호로위간) 해변을 만났는데 갈대 사이로 집이 보였습니다

顔貌殊常語難曉(안모수상어난효) 얼굴이 참 특이하고 말도 알아듣기 어려웠지요

淸泉暫憩燃竹炊(청천잠게연죽취) 맑은 샘물에서 쉴 때에 대나무로 밥을 지으면서

步下西林將落照(보하서림장락조) 발 아래 서산의 노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지요

槳聲戛戛風漸起(장성알알풍점기) 바람이 점점 세지더니 상앗대 소리 들리더군요

煙浪蒼蒼信一葦(연랑창창신일위) 저녁 안개가 퍼지자 모조리 갈대밭 같았습니다


우도(牛島)에 상륙했을 때의 일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우도는 전남 고흥군 남양면과 대서면, 과역면, 두원면에 둘러싸인 득량만의 한가운데에 있는 섬이다. 소섬 또는 쇠섬이라고도 한다. '고죽(苦竹)'은 왕대 또는 참대를 말한다. '장(槳)'은 상앗대다. 상앗대는 물가에서 배를 떼거나 댈 때, 물이 얕은 곳에서 배를 밀어 갈 때에 쓰는 긴 막대다. '알알(戛戛)'은 의성어다. 물결에 상앗대가 흔들리거나 부딪칠 때 나는 소리다. 


重催玉斝簫鼓鳴(중최옥가소고명) 옥술잔을 재촉하면서 피리 불고 북을 두드리니

馮夷來舞江妃聽(풍이래무강비청) 풍이가 나와서 춤추고 강비는 듣는 듯했습니다

將軍祠下已暝陰(장군사하이명음) 장군사 아래에는 어둠이 이미 짙게 드리웠는데

落帆撑趁汀洲深(락범탱진정주심) 정박한 배까지 썰물이 빠져 뻘이 드러났습니다

歸鞍野逕雲竹遠(귀안야경운죽원) 돌아갈 들길엔 안개가 깔려 대숲이 멀어보였고

燈火家家籬落淺(등화가가리락천) 불 밝힌 집집마다 담장은 허물어져 야트막한데

官堂深掩相枕股(관당심엄상침고) 관사는 깊은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倒床不復聞更鼓(도상불복문경고) 침상에 눕자 북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더군요


쇠섬에서 벌인 술잔치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풍이(馮夷)'는 황하(黃河)의 신이다. 풍이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외조부인 하백(河伯)을 가리키기도 하고, 수신(水神)을 아울러 이르기도 한다. 풍이는 가무(歌舞)가 훌륭하면 흥이 나서 춤을 춘다는 설이 있다. '강비(江妃)'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신녀(神女)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 <강비이녀(江妃二女)>에 '강비 두 여인은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인지 모른다.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가에 나와 놀다가 정교보(鄭交甫)를 만났다. 정교보는 그들을 보고 기뻐하여 그들이 신인(神人)인지도 몰랐다.'라 하였다. '문선(文選)'에 실려 있는 곽박(郭璞, 276~324)의 '강부(江賦)'에는 '주(周)나라 정교보가 남쪽 초(楚)나라의 소상강(瀟湘江) 가를 거닐다가 신녀인 강비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 신녀가 차고 있던 패옥(環佩)를 풀어 정교보에게 신표(信標)로 주고 떠나갔다.'고 하였다. '장군사(將軍祠)'는 장군신(將軍神)을 모신 서낭당이다. 우리나라 민속신앙(民俗信仰)의 신당(神堂) 중에는 최영(崔瑩, 1316∼1388), 남이(南怡, 1441~1468), 임경업(林慶業, 1594~1646) 등 장군을 신장으로 모시는 곳이 있다. 중국의 관운장(關雲長)을 모신 곳도 있다. '경고(更鼓)'는 조선시대에 초경에서 오경까지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던 북이다.


樓頭不覺一回首(루두불각일회수) 누각 입구에서 머리를 돌려도 깨닫지 못했는데

但見天水相呑吐(단견천수상탄토) 하늘과 물을 바라보면서 숨만 고르고 있더군요

玆遊浩蕩信奇遇(자유호탕신기우) 그 여행에서 기이한 것을 만났음이 분명합니다

亦幸從前天不阻(역행종전천부조) 다행히도 제 천운이 다하지 않았던 탓이겠지요

淸風明月本無價(청풍명월본무가) 청풍명월이란 본디 값어치를 매길 수도 없고요

好水佳山竟誰主(호수가산경수주) 멋드러진 물과 아름다운 산도 주인이 없다지만

人生適意行樂耳(인생적의행락이) 인생살이가 뜻에 맞으면 행해도 즐거울 뿐이니

百年開口定能幾(백년개구정능기) 오래도록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는지요

世間萬事豈不見(세간만사기불견) 세상만사 어찌하여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富貴功名安乞恃(부귀공명안걸시) 부귀와 공명은 왜 믿음을 구걸해야만 하는가요

今年邊鄙稍寧息(금년변비초영식) 올해서야 궁벽한 시골에서 평정을 좀 찾았네요


쇠섬으로 떠난 바다 여행에서 돌아와 금릉의 백련사에 있을 때의 일을 쓴 것으로 보인다. '상(相)'은 '고르다', '탄토(呑吐)'는 '삼키고 뱉다, 받아들이고 내보내다', '신(信)'은 '확실하다, 분명하다'의 뜻이다. '정능기(定能幾)'는 '정해진 가능한 기회(機會)', '변비(邊鄙)'는 '궁벽한 시골', '초(稍)'는 '조금, 끝, 말단(末端), 도성(都城)에서 300리 되는 지역', '영식(寧息)'은 '편안히 쉬다, 평정을 찾다'의 뜻이다. 


菽粟猶可望豐熟(숙속유가망풍숙) 콩일랑 수숙일랑은 오히려 풍년일 것 같은데요

秋來海山應更佳(추래해산응갱가) 가을이면 해남의 산들도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先生當亦南歸來(선생당역남귀래) 선생님께서  언제 다시 남녘땅으로 오신다면

月白風高會相待(월백풍고회상대) 가을날 환한 달밤에 다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便向滄洲理蘭枻(편향창주리란예) 창주에다 목란선과 계수나무 노를 만들어 놓고

却追舊事說今夕(각추구사설금석) 지난 일 물리쳤노라 그날 저녁에 말하겠습니다

看走先生五老筆(간주선생오로필) 선생님을 뵈러 갔던 오로봉 백련사에서 씁니다

因之採藥支提山(인지채약지제산) 그래서 여러 산들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캔다면

一室同老浮雲壑(일실동노부운학) 구름 골짜기 떠다니며 한곳에서 함께 늙겠지요


임억령이 가을쯤 다시 남녘땅으로 온다면 달 밝은 날 밤에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함께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나 캐면서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백광훈은 이 칠언고시를 강진의 백련사에서 썼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해산(海山)'은 해남(海南)의 산을 말한다. '창주(滄洲)'는 원래 해변가 은자(隱者)의 거처를 말한다. 남조(南朝) 제(齊)나라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宣城)에 부임하여 창주의 풍류를 즐겼다는 고사가 있다. 이후 '창주'는 당시(唐詩)에서 강남(江南)의 유벽(幽僻)한 주군(州郡)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 되었다. 또, '창주'는 삼국시대 위(魏)나라 완적(阮籍)의 '臨滄洲而謝支伯登箕山以揖許由(창주를 굽어보며 지백에게 사례하고, 기산에 올라 허유에게 절을 한다.)'라는 글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창주'는 산수 좋은 은사(隱士)의 거처라는 뜻이다. '란예(蘭枻)'는 은자(隱者)의 상징인 목란(木蘭)으로 만든 배와 계수나무 노(枻)를 말한다. '오로(五老)'는 중국 정토종(淨土宗)의 초조(初祖) 동진(東晉)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동양 최초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맺은 동림사(東林寺)가 있던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峯)을 가리킨다. 혜원법사는 동림사에서 승려와 속인 18명을 모아 염불하는 결사를 맺고 백련결사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萬德山, 408.6m)의 백련사(白蓮寺)에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백련결사를 맺었다. 백련사(白蓮)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의 송광사(松廣寺)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다. 오로봉은 여기서 만덕산을 비유한 말이다.


백광훈은 사암(思菴)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 때인 1549년(명종 4)에 상경하여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에게 수학하였다. 백광훈은 양응정 문하에서 정철,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1539∼1583)과 동문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시와 서(書)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1572년(선조 5)에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이란 칭호를 얻었다. 


백광훈은 또 '몽견김강숙명성원(夢見金剛叔名成遠)'이란 제목의 오언율시도 지었다. 그의 꿈에 김성원이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몽견김강숙명성원(夢見金剛叔名成遠)

강숙 김성원을 꿈속에서 보다(백광훈)


子有棲霞想(자유서하상) 그대는 노을인 양 살아가고

吾無媚世顔(오무미세안) 나는 세상에 아부하지 않지

憶尋松下逕(억심송하경) 그대 찾아가던 솔길 생각나

遙愛水南山(요애수남산) 멀리 남산의 계곡도 보이고

草草夢魂裏(초초몽혼리) 분주하고 거친 꿈 속에서도

悠悠雲海間(유유운해간) 유유히 구름과 바다 오가니

百年無箇日(백년무개일) 백년 세월 기나긴 날들인데

事故謾相關(사고만상관) 갑작스런 일이 늘 문제일세


세상에 아부하지 않았던 백광훈이 무등산 기슭에 은거한 채 신선처럼 살아가는 김성원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노래한 시다. '서하(棲霞)'는 '노을이 깃드는 곳', 서하당(棲霞堂)'은 '노을이 깃드는 집'이다. 노을인 양 살아간다는 것은 신선처럼 살아간다는 말이다. '미세(媚世)'는 '세상 사람에게 영합하다', '초초(草草)'는 '간략(簡略)한 모양(模樣), 바빠서 거친 모양(模樣), 허둥지둥'의 뜻이다. '운해(雲海)'의 '운(雲)'은 김성원, '해(海)'는 백광훈을 가리킨다. '무개(無箇)'는 '셀 수 없는', '만(謾)'은 '공연히, 만연히, 어쩐지'의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