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과 부용당(芙蓉堂)을 찾아서 3

林 山 2018. 4. 12. 09:53

임억령과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식영정 4선은 식영정을 중심으로 왕성한 시 창작 활동을 하였다. 임억령이 '식영정제영(息影亭題詠)'을 짓자 김성원과 고경명, 정철은 스승의 시에서 차운한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으며, 임억령이 또 '서하당잡영(棲霞堂雜詠)'을 짓자 김성원과 정철은 스승의 시에서 차운한 제영시(題詠詩)를 지었다. 


식영정에 걸려 있는 김성원의 '식영정십팔영' 편액


식영정에는 임억령의 '식영정제영' 20수와 김성원의 식영정십팔영(息影亭十八詠)', 고경명의 '식영정이십영', 정철의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10수가 판액되어 있다. 김성원의 시가 원래 '십팔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원의 '식영정십팔영'을 감상해 보자. 


서석한운(瑞石閑雲) -무등산의 한가로운 구름


偶從山上飛(우종산상비) 짝지어 산위를 따라 날다가

還向山中斂(환향산중렴) 도로 산속을 향해 사라지네

倦跡自無心(권적자무심) 나른한 자취 절로 무심하니

悠悠看不厭(유유간불염) 유유한 모습 볼만도 하구나


무등산 위를 한가로이 흘러가는 구름을 읊은 시다. 임억령의 '식영정제영' 편액에는 '창계백파(濸溪白波)'가 들어 있는데, 김성원의 편액에는 '창계백파' 시가 없다. 


수함관어(水檻觀魚) - 물가 난간에서 물고기를 감상하다


潛伏於幽穴(잠복어유혈) 어두운 굴에 가만히 숨어있다가

遊揚于淺灘(유양우천탄) 얕은 여울에 올라와 노니는구나

已知魚自樂(이지어자락) 물고기 스스로 즐김을 알았으니

重覺我之閒(중각아지한) 나도 한가로움 거듭 깨닫네그려


물고기들이 여울에서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적 화자도 한가로움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시다. 임억령의 '식영정제영' 편액에는 '양파종과(陽坡種瓜)'란 시가 들어 있는데, 김성원의 편액에는 '양파종과'란 시가 보이지 않는다. 

 

벽오량월(碧梧涼月) - 벽오동에 걸린 서늘한 달


寒宵萬籟寂(한소만뢰적) 차가운 밤 온갖 소리도 고요해지니

不語據枯梧(불어거고오) 말없이 마른 오동나무에 기대 서네

靜對空山月(정대공산월) 고요히 빈 산의 달을 바라보노라니

方知我亦夫(방지아역부) 방금 나 또한 범부임을 깨달았다네


벽오동나무에 뜬 서늘한 달을 노래한 시다. 고요한 밤 마당의 벽오동나무에 기대서서 빈 산의 달을 바라보며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행복감을 읊었다. 


창송청설(蒼松晴雪) - 푸른 솔에 빛나는 눈


粘多松鬣亞(점다송렵아) 물기 먹은 솔가지 못지않게

凍合鶴巢傾(동합학소경) 얼어붙은 학 둥지 기울었네

萬玉相輝映(만옥상휘영) 온갖 옥들이 환하게 비추니

寒光宿客驚(한광숙객경) 자던 나그네 찬빛에 놀라네


조대쌍송(釣臺雙松) - 낚시터의 두 그루 소나무


澗壑雙龍起(간학쌍룡기) 물 흐르는 골짝에 쌍룡 일어나

長身蹙巨鱗(장신축거린) 긴 몸이 큰 비늘처럼 주름졌네

何須支大廈(하수지대하) 어찌 반드시 큰 집만 떠받치리

下有把竿人(하유파간인) 그 아래 낚시하는 사람 있는데

 

'창송청설(蒼松晴雪)'은 눈 개인 날의 푸른 소나무를 노래한 시다. '조대쌍송(釣臺雙松)'은 도연명처럼 은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나타나 있. 큰 소나무가 반드시 큰 집의 대들보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낚시하는 사람의 그늘이 되어 주기만 해도 족하다. 소나무는 김성원을 비유한 것으로 벼슬에 큰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환벽영추(環碧靈湫) -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영추


閣下寒潭碧(각하한담벽) 정자 아래 차가운 연못 푸르니

常惺泛酒船(상성범주선) 항상 깨면 술실은 배를 띄우네

誰知幽窟裏(수지유굴리) 그 누가 알리요 깊숙한 굴속에

龍子抱珠眠(용자포주면) 용이 여의주 안고 잔다는 것을


김성원은 용이 영추의 바위굴 속에서 여의주를 안고 잔다고 생각한다. 항상 깰 때마다 술 실은 배를 띄웠다는 것으로 보아 그도 정철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송담범주(松潭泛舟) - 솔담에 배 띄우고


古澗澄無滓(고간징무재) 옛 시냇물은 티 없이 맑아

浮舟月滿磯(부주월만기) 달 밝은 물가에 배 띄우네

夜深橫玉篴(야심횡옥적) 깊어 가는 밤 옥피리 부니

松鶴掠人飛(송학략인비) 솔 학이 사람 스치듯 나네


노송들이 빙 둘러싼 연못에서 뱃놀이하는 정경을 노래한 시다. 시 속에 선경 같은 그림이 들어 있다. 산과 물, 달과 소나무, 학, 바위를 벗삼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석정납량(石亭納涼) - 석정의 피서


濃陰密如幄(농음밀여악) 짙은 그늘은 휘장을 쳐놓은 듯하고

盤石穩於床(반석온어상) 널찍한 바위는 평상보다 더 편안해

不用煩揮扇(불용번휘선) 번거롭게 부채 휘두를 필요도 없이

蕭蕭滿袖凉(소소만수량) 서늘한 바람 소매에 가득 시원하네


계곡의 그늘진 널찍한 바위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더위를 피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에 이보다 더 좋은 신선놀음도 없을 것이다.  


학동모연(鶴洞暮煙) - 학마을의 저녁 연기


白日隱天末(백일은천말) 밝은 해는 하늘가에 숨어 버렸고

靑烟橫樹腰(청연횡수요) 푸른 안개는 숲 허리에 걸려 있네

此間迷去路(차간미거로) 이 사이에서 갈 길 잃어버렸으니

何處有幽巢(하처유유소) 그윽한 둥지는 어느 곳에 있는고?


학골에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평화로운 정경을 읊은 시다. 생활 환경의 변화로 인해 요즘은 시골에도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거의 사라지고 볼 수 없다.    


평교목적(平郊牧笛) - 들판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


罷牛跨雨中(파우과우중) 비내리는 가운데 지친 소를 타고

短篴橫蓑裏(단적횡사리) 도롱이 속에는 단소도 비껴 찼네

村遠暮烟沈(촌원모연침) 먼 마을 저녁연기 속에 가라앉아

不知其所指(부지기소지) 가리키는 곳 그 어딘지 모르겠네


단교귀승(短橋歸僧) - 다리를 건너 돌아가는 스님


對影山僧去(대영산승거) 그림자 마주하고 산승 가는데

溪橋日欲曛(계교일욕훈) 시냇가 다리에는 해 넘어가

閒情厭塵土(한정염진토) 한가로운 마음은 속세가 싫어

飛錫趁歸雲(비석진귀운) 지팡이로 고향가는 구름 좇네


'평교목적(平郊牧笛)'은 들판에서 피리 부는 목동들의 목가적인 풍경을 노래한 시다. '단교귀승(短橋歸僧)'은 해질녘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 절로 돌아가는 스님의 모습을 읊은 시다.  

 

백사수압(白沙睡鴨) - 백사장에서 조는 오리 


浴水水同潔(욕수수동결) 물에서 멱감으니 물 같이 깨끗하고

立沙沙共娟(립사사공연) 모래톱에 서 있으니 모래처럼 곱네

隔花拳一足(격화권일족) 꽃들 사이에 다리 하나 구부리고서

盡日自閒眠(진일자한면) 하루종일 절로 한가로이 졸고 있네


노자암(鸕鶿巖) -가마우지 바위


有鳥立蒼巖(유조립창암) 새는 푸른 바위에 앉아있고

長湫風靜處(장추풍정처) 긴 웅덩이엔 바람 잔잔하네

生涯卽此多(생애즉차다) 사람 삶이 이처럼 다양하니

湖海何須去(호해하수거) 강호를 떠나갈 수야 있으리


    자미탄(紫微灘) -배롱꽃 핀 여울


灘響已堪聽(탄향이감청) 여울물 소리는 들을 만한데

名花誰復栽(명화수부재) 이름난 꽃은 누가 심었을까

山家新濯錦(산가신탁금) 산가에서 새 비단 빨았으니

賈客莫相猜(고객막상시) 장사치 길손 시기하지 말게


'백사수압(白沙睡鴨)'은 모래톱에서 한가롭게 졸고 있는 오리, '노자암(鸕鶿巖)'은 가마우지바위의 정취를 노래한 시다. '자미탄(紫微灘)'은 자미화(紫薇花, 백일홍)가 흐드러지게 핀 자미탄의 아름다운 정경을 읊은 시다. 발그레 물든 자미화를 장사치와 손님이 시샘할 정도로 조선시대 담양의 백일홍이 아름다왔던가 보다. 자미탄은 지금의 증암천이다.  


도화경(桃花逕) -복사꽃 피어 있는 길


竹逕綠溪出(죽경록계출) 대숲길은 푸른 골짝에서 나오고

桃花夾岸齊(도화협안제) 복사꽃은 양 언덕마다 만발했네

武陵橋已斷(무릉교이단) 무릉의 다리는 끊어져 버렸으니

那有世人迷(나유세인미) 세상사람들 길 잃음이 있으리요


산 오솔길에 복사꽃이 만발한 풍경을 노래한 시다. 봄에 발그레하게 핀 복사꽃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춘정의 불을 지른다. 강 언덕이나 산기슭에 복사꽃이 연분홍으로 물들면 별유천지(別有天地)가 따로 없다.  


방초주(芳草洲) - 향기로운 풀로 덮인 개울가


春洲可步屧(춘주가보섭) 봄 물가 나막신 신고 걸으니

芳草碧芊綿(방초벽천면) 꽃다운 풀 푸르고 무성도 해

誰識余心樂(수식여심락) 누가 내 마음의 즐거움 알리

花紅柳欲眠(화홍류욕면) 꽃 붉고 버들은 조는 듯한데


향기로운 풀이 우거진 모래톱의 정경을 노래한 시다. 요즘 사람들은 나막신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나막신은 나무를 파서 만든 신인데, 주로 비가 온 진땅에서 신었다.  


부용당(芙蓉塘) - 연꽃 연못

 

菡萏高於丈(함담고어장) 연꽃봉오리는 한 길도 넘고

池塘深沒臍(지당심몰제) 연못은 깊어 배꼽까지 오네

微微香入袖(미미향입수) 은은한 향 소매에 스며들고

皎皎月分溪(교교월분계) 교교한 달빛 시내를 가르네


달 밝은 밤 부용당 연못에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경을 노래한 시다. 달빛이 교교한 밤에 바람에 실려오는 은은한 연꽃 향기가 콧가에 맴도는 듯하다.  


선유동(仙遊洞) - 신선이 노니는 동천


千年五鬣松(천년오렵송) 천 년이나 묵은 아름드리 오렵송

偃盖蒼烟裏(언개창연리) 푸른 연기 속에 비스듬히 누웠네

月下浪吟翁(월하랑음옹) 달아래 낭랑하게 시 읊는 늙은이

誰知廻道士(수지회도사) 돌아오는 도사임을 그 누가 알리


선유동천(仙遊洞天)의 깊고 그윽한 정취를 읊은 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나 노닐 듯한,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을 말한다. 김성원 시의 '도사(道士)'는 임억령을 비유한 것이다. 


정철의 '식영정잡영' 10수는 '식영정이십영' 중 일부이다. 정철의 '송강집(松江集)'에도 '식영정잡영'이라는 제목으로 10수만 실려 있다. 식영정 판액의 시들은 시인 각각의 문집에 실려 있다. 특히 김성원의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이들 네 명의 시 전문이 모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