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과 부용당(芙蓉堂)을 찾아서 5

林 山 2018. 4. 14. 10:53

1581년(선조 14) 진사시에는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고 노모를 모시며 학문에만 힘쓰던 김성원은 효행으로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을 제수받았으며, 1592년 제1차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원은 동복(同福)의 가관(假官)에 이어 동복현감(同福縣監)을 맡아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를 데리고 6천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했다. 


왜적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낸 다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정철은 동인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1593년에 세상을 떠났다. 


1596년 김성원은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誣告)로 옥사하자 동복현감에서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 살았다. 1597년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 72세의 김성원은 아흔의 노모를 모시고 동복의 모후산(母后山, 919m)으로 피신하던 중 왜병을 만나 부인과 함께 온몸으로 막아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모후산은 화순군과 순천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원래는 나복산(蘿蔔山)이라고 불렀다. 제2차 조일전쟁 때 김성원의 순효를 기려 모호산(母護山)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며, 마을 이름도 모호촌(母護村)으로 고쳤다고 한다. 김성원을 마지막으로 식영정 4선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1619년(광해군 11) 정월 김전의 부탁을 받고 귤옥(橘屋) 윤광계(尹光啓, 1559~?)는 '석천집(石川集)'의 서문을 지었다. 김전은 바로 김성원의 아들이자 임억령의 외손자이다. 윤광계의 시는 시격이 정련(精鍊)되고, 율조(律調)가 청아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김성원은 '성리서(性理書)', '주역' 등을 깊이 연구하였으나 시인으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의 저서에는 '서하당유고'가 있다. '서하당유고'에는 233제 446수 중 김성원이 지은 한시 146제 230수가 실려 있다. 서문에는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 부록에는 한시 '식영정십이영',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과 그 한역가(漢譯歌), 단가(短歌)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성산사


1795년(정조 19) 창평현 지곡리 성산에 성산사(星山祠)를 세우고 임억령과 김성원을 주벽(主壁)으로 향사했다. 이때 정철의 4남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82~1650),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자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 창평현령을 지낸 서창(曙窓) 조흡(趙潝, ?~1661),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자 김수항(金壽恒)의 아들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도 함께 배향했다. 2년 뒤에는 정철의 5대손 달부(達夫) 정민하(鄭敏河, 1671∼1754)와 정민하의 장남 계당(溪堂) 정근(鄭根, 1691~1756)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51년(철종 2) 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폐허가 된 성산사를 증암천 건너편 환벽당 뒷마을 석저촌(石底村)으로 옮기고 환벽사(還碧祠)라 하였다. 이때 춘향(春享)은 광주향교, 추향(秋享)은 창평향교에서 향사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성산사는 훼철되고, 위패는 그 자리에 묻었다.   


1979년 김성원의 후손 김정식(金禎植)과 김희조(金熙祚)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복교리에 김성원 순효비(棲霞堂金先生母護山殉孝碑)를 세웠다. 비문은 담양의 전원식(田元植)이 짓고, 글씨는 김성원의 11세손 김희진(金熙鎭)이 썼다.  


1992년 주암댐의 건설로 순효비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복교리 광산 김씨 선산 곁 영롱대(玲瓏臺) 부근으로 옮겼다. 1990년대에 들어서 순효비를 다시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충장사(忠壯祠) 인근 배재(이치)에 세워진 김감(金瑊) 신도비(神道碑) 근처로 옮겨 세웠다.


김감은 광산 김씨 낭장공파(郎將公派) 입향조(入鄕祖) 김문손(金文孫)의 아들이다. 김문손은 김후(金詡)와 김감 두 아들을 두었다. 김후의 장녀 윤덕은 양산보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아들이 김윤제다. 양산보의 서자 양자호가 김윤제의 3남 김윤충의 사위가 됨으로써 김, 양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김감의 차녀는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金百鈞, 1525~1584)에게 출가했고, 그의 손자가 바로 김성원다. 김윤제는 양산보의 처남, 송순의 고모는 양산보의 어머니, 양산보의 4종매는 임억령의 부인, 임억령의 둘째 딸은 김성원의 부인,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 양산보의 2남 양자징(梁子澂)은 김인후의 사위,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從甥姪女) 사위였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의병장은 김문손의 4대손이다. 이처럼 면앙정과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서하당, 송강정의 주인들은 서로 혈맥(血脈)과 혼맥(婚脈)으로 맺어져 있었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한국가사문학관


한국가사문학관의 김성원 전시관


2,000년에 개관한 담양군 남면 지곡리 소재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辭文學館) 김성원 전시관에는 '서하당유고'를 비롯해서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 판액,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獻酌北堂時月微明雨亦作作歌)'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가사문학관에는 김성원 전시관 외에 정조(正祖)가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던 호남 사림의 원조이자 송순과 임억령의 스승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 면앙정가단의 창설자이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송순, 호남의 사종(詞宗) 임억령, 스승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살아간 양산보, 문묘(文廟)에 종사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인 김인후, 조일전쟁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 정치공작 기축사화(己丑士禍) 때 서인(西人)의 행동대장으로 1,000여 명 이상의 반대파 동인(東人) 선비들을 처형해서 동인백정(東人白丁)이란 비난을 받는 한편 가사문학의 대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정철의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성산사는 2005년 당양군에 의해 지금의 서하당 뒤편에 복원되었다. 2017년 성산사에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사당 안에는 그 누구의 위패도 모셔져 있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