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사종(詞宗)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식영정(息影亭)과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환벽당(環碧堂)에 이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호)을 찾았다. 소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만덕산(萬德山, 575m)을 지나 내려오던 호남정맥(湖南正脈)은 수양산(首陽山, 593.9m)에 이르기 직전 서쪽의 국수봉(453m)으로 꺾인 다음 남서쪽의 까치봉(424m)을 지나 남쪽의 무등산(無等山, 1,187m)으로 이어진다. 까치봉에 이르기 전 옹정봉(瓮井峰, 493m)에서 서쪽의 성산호(星山湖, 광주호)를 향해 뻗어간 산줄기에는 장원봉(壯元峰, 342m)이 솟아 있고, 장원봉 바로 남쪽에는 성산(星山, 별뫼, 240m)이 솟아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棲霞堂)은 이 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소쇄원은 옹정봉에서 남서쪽 바리봉(187m)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옹정봉에서 까치봉을 지나 전라남도 교육연수원으로 뻗어내린 능선 사이의 고암동(鼓巖洞, 북바위골) 계곡 들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소쇄원은 식영정에서 남동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다. 지석(支石) 마을 앞으로는 무등산의 북산에서 발원한 증암천이 북서쪽으로 흘러 성산호로 들어간다.
소쇄원 입구에는 대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대숲 한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비로소 고색창연한 소쇄원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대숲은 속계(俗界)와 선계(仙界)를 가르는 일종의 경계인 셈이다. 울창한 대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댓잎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소쇄, 소쇄' 하고 들려올 것만 같다.
담양이 누정문화(樓亭文化)의 중심지가 된 것은 16세기 조선의 당쟁(黨爭), 사화(士禍)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선 초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世祖)의 유혈 쿠데타를 도운 공으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인 훈구파(勳舊派)와 성리학(性理學)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와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등장한 사림파(士林派)의 권력 투쟁은 필연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불러왔고, 그 결과 사림파의 처절한 참패로 귀결되었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사림은 선비로서의 대의와 명분을 지키고, 학문과 심신을 도야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산림에 누정을 세우게 된다. 경국제민 (經國濟民)의 큰 포부를 안고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보수적인 정치 현실에 절망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좌절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선비들은 강호(江湖)의 누정을 근거지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사대부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누정은 뜻을 함께 하는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광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경국제민이라는 유가적 실천이 좌절했을 때 조선조 선비들은 강호의 누정으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면서 자연에 순응하며 도가적 삶을 살았다. 당쟁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하거나 사화에 희생되어 유배된 선비들은 담양을 중심으로 남도 곳곳에 정자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시를 지으면서 조선조 사림문화의 꽃을 피웠다.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3)의 면앙정(俛仰亭)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가단, 임억령의 식영정과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의 서하당(棲霞堂)을 중심으로 한 식영정가단, 양산보의 소쇄원을 중심으로 한 소쇄원가단은 호남 나아가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식영정가단과 소쇄원가단은 성산가단(星山歌壇)을 형성하면서 호남가단(湖南歌壇)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도 여기서 가사문학을 꽃피웠다. 임억령과 김성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정철은 식영정 4선으로 일컬어졌고, 호남 유학(儒學)의 사종(師宗)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 당대 최고의 유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호남학파(湖南學派)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양산보의 조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제주 양씨(濟州梁氏) 양윤신(梁允信)이다. 전설에는 단군(檀君) 시대에 세 명의 신인(神人)이 한라산(漢拏山)에 내려왔는데, 그중 장자(長者)가 처음으로 성(姓)을 양씨(良氏)로 하였다가 양(梁)으로 고쳤는데, 이 사람이 곧 제주 양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1502년(연산군 8) 양윤신은 평안도 영변으로 떠나는 바람에 창암(蒼巖) 양사원(梁泗源)은 전라도 나주 복룡동(伏龍洞)에서 외가로 추정되는 광주 동각면(東角面) 창교촌(滄橋村)으로 이사했다. 양윤신은 영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관도 없이 장례를 치뤄야만 했다. 1503년(연산군 9) 양산보는 광주 동각면 창교촌에서 양사원과 어머니 신평 송씨(新平宋氏, 송순의 고모)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양사원은 스승이자 매부(妹夫)인 조억(曹億)을 따라 광주에서 처가와 가까운 창평현(昌平縣) 내남면(內南面) 창암촌(蒼巖村)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아들 양산보가 어려서부터 열심히 글공부에 힘쓰는 것을 본 양사원은 크게 기뻐했다.
소쇄원 입구 대숲길
창암촌은 이후 제주 양씨(濟州梁氏) 씨족 마을이 되었다. 양사원은 은덕(隱德)으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양사원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재종형(再從兄, 6촌형)이고,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은 양팽손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양산보는 양응정의 삼종형(三從兄, 8촌형)이 된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 원년) 임사홍(任士洪), 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조선 제10대왕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을 왕으로 옹립했다. 중종반정으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반정 3대신을 비롯한 훈구파들이 권력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훈구파는 세조대 후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가 어린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1476년(성종 7) 성종이 세조비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친정체제를 구축하자 훈구파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성종 대 왕권의 강화는 훈구파의 퇴조를 초래하는 한편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관료집단인 사림파는 관권(官權)을 매개로 부상들과 결탁해 부를 축적한 훈구파를 공격하면서 이후 격렬한 정치 투쟁이 벌어졌다. 향촌 통치의 방법을 둘러싸고 사장(詞章)을 중시한 훈구파는 관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려 한 반면에 경술(經術)을 중시한 사림파는 사족(士族) 중심의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515년(중종 10) 문과에 급제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 판서 안당(安瑭, 1460~1521)의 추천으로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된 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조 좌랑(禮曹佐郞),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부제학(副提學) 등을 차례로 거치면서 중종(中宗)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표방하면서 새롭게 부상한 조광조는 권력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반정공신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한 정치 모리배로 인식했다. 그는 성리학이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임을 강조하면서 중종에게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한편 훈구파의 비리와 부패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반정 3대신이 모두 죽고 없는 상황에서 중종도 세력이 막강해진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조광조가 필요했다.
1517년(중종12) 양사원은 15세의 양산보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당대 사림의 우상 조광조에게 아들의 장래를 맡겼다. 양사원은 한양에 가본 적도 없고 더구나 조광조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양사원이 권력의 실세 조광조에게 아들을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6촌동생 양팽손과 처조카 송순의 역할이 컸다. 양팽손은 1510년(중종 5)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이후 그와 절친한 사이였고, 송순은 1516년(중종 11)부터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있었다. 양사원은 송순의 추천을 받고 양팽손을 통해서 아들을 조광조에게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광조는 양산보의 성균관 입학을 주선했다. 하지만 양산보의 성균관 입학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성수종(成守琮, 1495∼1533) 형제도 양산보와 함께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했다. 양산보는 조광조 문하에서 사림파의 이념적 지향점인 도학사상(道學思想)과 절의사상(節義思想)을 배웠다. 기대승의 숙부인 기준(奇遵),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고조인 박소(朴紹), 정황(丁煌)과 정환(丁煥) 형제, 이충건(李忠楗)과 이문건(李文楗) 형제 등 모두 29명이 조광조의 제자였다. 이들은 조광조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소쇄원가(瀟灑園家)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양산보는 이때 해남이 고향인 이조정랑(吏曹正郞) 나옹(懶翁) 유성춘(柳成春, 1495~1522)과도 만나게 되었다. 유성춘은 호남 삼걸 중 한 사람으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형이었다.
조광조는 제자들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것을 따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쳤다. 양산보는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소학'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스승의 칭찬을 받았다. '소학'은 중국 송(宋)나라 주희(朱熹)의 제자 유청지(劉淸之)가 어린이들을 교화시킬 목적에서 예의범절과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이나 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가족관계나 행동규범의 실천적인 면을 중시했다. 고려 말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소학'은 조선조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충효(忠孝)라는 성리학적 이념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결국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양산보가 상경한 그해부터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급진적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펼쳐 나갔다. 그는 도교(道敎)의 제사를 주관해 온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는 등 이단 타파에 힘쓰는 한편 백성들의 교화와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실시했다.
1518년(중종 13) 조광조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승진했다. 1519년(중종 14) 4월 조광조는 거센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신진사류(新進士類)를 등용하기 위해 일종의 특별과거인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했다. 현량과를 통해서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 등 신진사류 28명이 관직에 진출했다. 조광조는 또 김정(金淨),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 이자(李耔), 김구(金絿),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 한충(韓忠) 등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했다. 신진 사림파는 조광조와 함께 훈구파의 타도와 구제(舊制) 개혁, 나아가 도학정치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질서 수립에 나섰다. 현량과의 실시는 곧 훈구파의 기반이 붕괴됨을 의미했다.
양산보의 행장(行狀), 제주 양씨 족보, '소쇄원사실(瀟灑園事實)'에 수록된 <실기(實記)>에 의하면 중종 14년 17세의 양산보도 중종의 친시(親試)에서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대간(臺諫)들이 지나친 은혜라고 삭제를 주청하여 등용되지 못했으며, 이를 애석하게 여긴 중종은 그를 불러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실록(實錄)이나 동료들의 문집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종합하면 양산보가 현량과에 합격했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고, 다만 현량과에 추천되어 합격의 문턱까지는 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7세의 나이에 개혁세력의 일원으로 떠올라 현량과에 천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양산보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10월 25일 조광조는 성희안, 유자광(柳子光) 등 중종반정에 공이 없거나 정국공신(靖國功臣) 가운데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왔다. 중종이 이를 거부하자 조광조를 추종하는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승정원 관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위훈삭제를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훈구파도 본격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반정공신들은 훈적(勳籍)에 등재되어 대대로 귀족의 지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특권을 누렸다. 조광조와 개혁파들이 위훈삭제라는 초강수를 밀어붙여 반정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이 삭탈되었다. 훈구파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훈적의 삭제로 온갖 특권이 박탈된 훈구파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위훈을 삭제하라, 경연을 활성화하라'는 등 바른말만 하는 조광조를 마땅치 않게 여기던 중종도 그의 급진적 개혁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반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훈구파는 이 낌새를 포착했다.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는 대궐 안의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꿀물로 쓰고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중종에게 보이도록 했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趙'자가 되었다. 즉,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참언(讒言)이었다.
11월 15일 한밤중에 홍경주와 공조 판서 김전(金詮), 예조 판서 남곤, 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은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들 몰래 경복궁(景福宮)의 북문(北門)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서 들어가 비밀리에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지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벌을 주라'고 주청했다. 나뭇잎 글씨가 훈구파의 계략임을 알면서도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탄핵을 승인했다. 이른바 훈구파들의 정치공작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진 것이다.
훈구파가 치밀하게 준비한 정치공작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 김구, 김식, 박훈, 윤자임(尹自任), 박세희(朴世憙) 등 사림파는 모조리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성균관 유생 천여 명은 광화문에 모여 이들의 석방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광조는 김정, 김식, 김구와 함께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靜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전라도 능주(綾州, 화순)에 유배되었다. 양팽손도 조광조와 같은 일당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능주에 내려와 있었다. 조광조가 유배되자 양산보는 전라도 남평(南平) 출신 이두(李杜)와 함께 유배지 능주까지 따라가 스승을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양팽손의 문집인 '학포유집(學圃遺集)' 연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으며, 이두라는 사람이 남평 출신인지 조광조의 제자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김정, 기준, 한충, 김식, 김구, 박세희, 윤자임 등 관련자들은 국문을 받은 뒤 유배형을 받았다. 조광조의 편에 섰던 관리들과 현량과 출신 관리들은 파직되어 쫓겨났다. 조광조를 변호하던 안당, 좌찬성 최숙생(崔淑生)도 파직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개혁파에 속했던 임억령의 형 임천령(林千齡)과 임만령(林萬齡)는 삭직되어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조광조, 김정,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등 개혁파들과 교유하며, 낙중군자(洛中君子)라 일컬어졌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는 전라도 화순의 동복으로 유배되었다. 조광조를 따르던 소장학자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전, 남곤, 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후환을 없애려는 훈구파의 주청에 의해 조광조는 그해 12월 능주에서 사사되었다. 사실 중종이 조광조를 죽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중종이 조광조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다. 중종이 보기에 조광조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되면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실력행사에 나서는 조광조와 중종은 결코 정치적 동지가 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중종과 조광조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군신관계가 아니었다.
감히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던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생원시 동기이자 친구인 양팽손이었다.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거두어 화순군 이양면 증리(梨陽面 甑里)에 가매장했다. 이듬해 봄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그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으로 운구하였다. 여름에는 문인, 자제와 함께 조광조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조광조의 시신을 실은 소달구지가 멀어져가는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호남 사림의 원조 박상은 만시(挽詩) '逢孝直喪(봉효직상)'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逢孝直喪(봉효직상) - 효직의 상을 당하여(박상)
無等山前曾把手(무등산전증파수) 무등산 앞에서 일찌기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牛車草草故鄕歸(우거초초고향귀) 관 실은 소달구지만 고향으로 바삐 가는구나
他年地下相逢處(타년지하상봉처) 먼 훗날 저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더라도
莫說人間謾是非(막설인간만시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는 더이상 논하지 마세
'효직(孝直)'은 조광조의 자다. 박상과 조광조의 인연은 1515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과 함께 중종반정 때 폐위됐던 중종비(中宗妃) 신씨(愼氏)를 복위(復位)시켜야 한다고 상소했다.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중종을 움직여 박상 등에게 중벌을 내리도록 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강력한 상소로 박상은 사사를 면하고 전라도 남평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조광조는 박상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박상은 조광조를 구하지 못했으니 마음의 빚이 상당히 컸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박상은 기묘사화에서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인들을 거둬줌으로써 사림운동의 맥을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소쇄원 전경
스승 조광조가 사사되고 동지들이 희생되면서 사림파의 개혁이 좌절되자, 현량과에 추천되어 합격의 문턱에까지 갔던 양산보는 원통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묘사화와 조광조의 죽음으로 인해 관직에 진출해서 사림운동에 동참하려던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 날아갔기 때문이다.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달은 양산보는 관직에 대한 꿈을 미련없이 버렸다. 1520년(중종 15) 18세의 양산보는 공명현달(功名顯達)의 꿈을 접고 고향인 창평의 지석동(支石洞) 창암촌(蒼岩村), 지금의 담양군 남면 지곡리 지석 마을로 낙향하였다.
조광조 사후 그의 수제자 양산보는 김인후와 함께 사림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처사(處士)로 지내면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그리고 '주역(周易)'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처럼 사장를 멀리하고 경학을 중시한 것은 그의 스승 조광조의 영향 때문이었다. 기묘사화와 그 주인공 조광조는 호남 사림 나아가 호남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양산보는 정랑(正郞)을 지낸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후(金珝)의 장녀이자 김윤제의 여동생인 김윤덕과 결혼했다. 소쇄원 바로 아래 석저촌(石底村) 출신인 김후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호조 좌랑과 현감 등을 지냈고, 11남매나 되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후에 김후의 3남 김윤충(金允忠)은 양산보의 서자 양자호를 사위로 삼으면서 양가는 겹사돈을 맺게 된다. 제1차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은 김윤제의 증손자다.
1521년(중종 16) 양산보의 맏아들 양자홍(梁子洪, 1521~?)이 태어났다. 같은 해 송사련(宋祀連)과 정상(鄭鏛) 등이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安處謙)의 무리가 변란을 일으키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여 신사무옥(辛巳誣獄)이 벌어졌다. 신사무옥이라는 정치공작을 통해서 훈구파는 조광조의 지지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고자 했다. 기묘사화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신사무옥으로 안당은 교사형(絞死刑)을 당했고, 김정은 사사되었으며, 기준은 교살되었다. 한충은 남곤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으며, 김식은 자결했다. 박세희, 윤자임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김구, 박훈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기준이 교살당하자 그의 셋째 형 기원(奇遠)은 전라도 장성, 넷째 형이자 기대승의 아버지 물재(勿齋) 기진(奇進, 1487~1555)은 광주 소고룡리(지금의 광산구 신룡동)에 정착했다. 박상은 모친상으로 기묘사화를 피했지만 권신 심정의 원한을 사 결국 외직으로 쫓겨났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정계생(丁戒生)은 기묘사화의 부당함을 상소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남원을 떠나 여수시 웅천동 송현 마을에 은신하여 창원 정씨 입향조가 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을 기묘명현(己卯名賢) 또는 기묘사림(己卯士林)이라고 한다. 기묘사림은 기호사림의 대표적인 인물 김정국(金正國)이 편찬한 '기묘당적(己卯黨籍)'에 94명, 안로(安璐)가 '기묘당적'을 보충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129명, 기묘사림 김정의 후손 김육(金堉)이 '기묘당적'과 '기묘록보유'를 보충한 '기묘제현전(己卯諸賢傳)'에 가장 많은 218명이 수록되어 있다. '학포유집' 부록1 <기묘당적(己卯黨籍)>에는 125명, 같은 책 권9 <기묘당금록(己卯黨禁錄)>에는 131명, 강효석(姜斅錫)의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160명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기묘사림은 95명 정도에 이른다. 양산보가 수록되어 있는 책은 <기묘당금록>과 '전고대방'뿐이다. 이는 양산보가 당시 나이도 어린데다가 기묘사화 직후 낙향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기묘사림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기묘사림은 대체로 중종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한 조광조, 김안국, 김정국 등 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들이었다. 기묘사화와 신사무옥에서 살아남은 기묘사림은 낙향하여 별서(別墅)를 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김안국은 경기도 이천시 주동(注洞)에 은일재(恩逸齋), 김정국은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에 은휴정(恩休亭)을 건립했다. 이자는 유배지인 충북 음성군 음애동(陰崖洞)에 초은정(招隱亭), 음성읍 평곡리 토계울에 몽암정사(夢庵精舍)를 지었다. 양팽손은 향리인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세웠다. 이들은 별서를 근거지로 삼아 강학(講學)하는 한편 사림파 동지들과 교유하면서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
1523년(중종 18) 양산보의 둘째 아들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 1523~1594)이 태어났다. 이어 딸 앵두도 태어났다. 1526년(중종 21) 박상은 문과 중시(重試) 갑과(甲科)에 장원했지만 훈구권신들의 눈밖에 나 승진하지 못하고 이듬해 나주목사로 좌천됐다가 병이 들어 전라도 광산으로 낙향했다. 고경명의 조부 고운(高雲)도 기묘사화를 당해 의령현감을 마지막으로 광산(지금의 광주시 남구 압촌동)으로 낙향했다. 임억령은 벼슬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성균관을 떠나 고향인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왔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조부 윤구(尹衢)는 전라도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고향 해남에 정착했고, 유성춘도 파직되어 해남으로 낙향했다. 호남 사림은 경상도나 경기도에 비해 그 수가 적었지만, 신진사류들을 중심으로 사림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타격도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사림파가 몰락하자 김안로(金安老)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발탁되었다. 김안로는 자신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장녀이자 인종(仁宗)의 누나인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자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좌의정에 오른 그는 동궁(東宮,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권력을 장악해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켜 반대파들을 제거하였다. 김안로 일파에 의해 정광필, 이언적(李彦迪), 나세찬(羅世纘), 이행(李荇), 최명창(崔命昌), 박소(朴紹) 등 많은 인물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경빈(景嬪) 박씨(朴氏)와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 등 종친도 죽음을 당했으며,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오빠 윤원로(尹元老)와 동생 윤원형(尹元衡)도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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