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하게 우거진 대숲은 소쇄원의 안과 밖, 상징적인 의미에서 속계와 선계를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한다.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야만 비로소 은일자의 영역인 선계 소쇄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소쇄원 입구 대숲길은 좁은 오솔길이었다. 대숲 사이 계곡을 따라 광풍각에 이르는 길도 있었다. '소쇄원 48영'을 따라서 김인후의 마음과 눈, 귀로 소쇄원을 돌아보자.
제29영 夾路脩篁(협로수황) - 대숲의 오솔길
雪幹摐摐直(설간창창직) 눈에 덮인 줄기는 창창하게 곧고
雲梢嫋嫋輕(운초뇨뇨경) 구름 서린 끝은 하늘하늘 가볍네
扶藜落晩籜(부려락만탁) 지팡이 짚고 묵은 대껍질 벗기고
解帶繞新莖(해대요신경) 허리띠 풀어 새 줄기 동여맨다네
제29영은 소쇄원 입구 오솔길 양쪽의 쭉쭉 벋은 왕대숲을 읊은 시다. 새로 나온 대나무 새 줄기들이 오솔길로 뻗어나와 있다. 주인은 오솔길을 넓히려고 허리띠를 풀어 새 줄기를 동여맨다. 길손들의 왕래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대밭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한 시다.
소쇄원 하지와 대봉대, 애양단
대숲을 벗어나면 맨 먼저 만나는 구역이 전원 구역이다. 원림의 입구인 전원 구역은 계원과 내원 구역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봉대 바로 아래에는 자그마한 연못 상지(上池)가 있고, 약 18m 아래에 더 큰 방지(方池)인 하지(下池)가 있다. 오곡문 바로 옆 수문을 통해서 계곡물이 홈대를 타고 내려와 상지를 채우고 나서 넘치는 물이 도랑을 타고 내려와 하지를 채우게 되어 있다. 하지에서 넘쳐난 물은 돌로 만든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떨어진다. 상지는 주희(朱熹, 1130~1200)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첫 구 '半畝方塘一鑑開(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의 '일감(一鑑)'처럼 자신을 비추면서 성찰하는 거울의 의미가 있고, 하지는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에 따라 연꽃을 심어 군자의 도를 본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제월당의 '소쇄원 48영' 편액
소쇄원도에는 상하지에 물고기가 놀고 못가에 물풀이 자란 모습이 그려져 있고, 상지와 하지를 연결하는 도랑 중간에는 물레방아가 있다. 여름철 광풍각에서는 계곡으로 물방울을 날리며 돌아가는 물레방아의 시원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물레방아는 지금 없어졌다. 김인후는 제9영, 제30영, 제39영, 제41영에서 소쇄원 입구의 대숲과 전원 구역의 다리와 버드나무, 연못 등을 노래했다. 당시 개울가 버드나무 근처에 위교(危橋)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교
제9영 透竹危橋(투죽위교) - 대숲으로 통하는 아슬아슬한 다리
架壑穿脩竹(가학천수죽) 골짝에 걸쳐 대 숲으로 뚫렸는데
臨危似欲浮(임위사욕부) 둥둥 떠 있는 듯 아슬아슬하여라
林塘元自勝(임당원자승) 숲속의 못은 본래 절로 아름다워
得此更淸幽(득차갱청유) 이를 얻으니 더욱 맑고 그윽하네
제30영 迸石竹根(병석죽근) 바위틈으로 뻗어내린 대뿌리
霜根耻染塵(상근치염진) 흰 뿌리 속세에 물들까 하면서도
石上時時露(석상시시로) 때때로 바위 위로 뻗어 나오누나
幾歲長兒孫(기세장아손) 어린 대뿌리 몇 해나 자라났는가
貞心老更苦(정심노갱고) 곧은 마음 늙으니 더욱 간절하네
바위는 십장생(十長生) 가운데 하나이고, 대는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조와 절개를 영원히 굳게 지키겠다는 다짐을 노래하는 한편 소쇄원 주인의 인간적인 원숙함을 기리는 시다.
제39영 柳汀迎客(류정영객) - 버드나무 물가에서 손님맞이
有客來敲竹(유객래고죽) 한 손님이 와서 대사립 두드리니
數聲驚晝眠(수성경주면) 여러 차례 소리에 낮잠에서 깼네
扶冠謝不及(부관사불급) 관 쓰느라 미처 인사를 못했는데
繫馬立汀邊(계마입정변) 말을 매 놓고 물가에서 서성이네
소쇄원도에는 '류정(柳汀)'이 위교 서쪽 개울가에 표현되어 있다. 가지가 휘휘 늘어진 것으로 보아 능수버들임에 틀림없다. 소쇄원 주인들은 물가 능수버들 밑에서 손님을 맞이했던 것 같다. 벼슬을 내던졌으니 체면을 차리려고 관을 쓸 일도 없다. 하지만 모처럼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을 맞이하느라 어둥지둥 관을 꺼내 쓰는 주인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제41영 散池蓴芽(산지순아) - 연못에 흩어진 순채싹
張翰江東後(장한강동후) 동진 시대 강동의 장한 이후로
風流識者誰(풍류식자유) 풍류를 아는 사람 그 누구리요
不須和玉膾(불수화옥회) 맛 좋은 농어회는 없어도 되니
要看長氷絲(요간장빙사) 저 기다란 순채싹 보려고 하네
'장한(張翰)'은 동진(東晉) 때의 오군(吳郡) 사람이다. 자는 계응(季鷹)이고, 문장에 뛰어났다. 세상의 이목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서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완적(阮籍)과 비교하여 장한을 강동보병(江東步兵)이라고 불렀다. 그가 낙양(洛陽)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때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고채(菰菜)와 순채국(蒓羹), 농어회(鱸魚膾)가 생각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뜻대로 하는 것이 귀한데 어찌 벼슬살이로 수천 리 떨어져 살면서 명예나 작위를 노리겠는가.(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千里以要名爵)'라는 말을 남기고, 그날로 벼슬도 내던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로 장한의 순갱노회(蓴羹鱸膾) 고사다. 순채국과 농어회는 고향의 맛, 고향의 정을 상징한다. '빙사(氷絲)'는 순채(蓴菜)를 말한다. 농어회는 없지만 순채만으로도 충분히 풍류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대봉대
'봉황(鳳凰)을 기다리는 누대'라는 뜻을 가진 대봉대(待鳳臺)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조그마한 축대 위에 지은 삿갓지붕의 아담한 모정(茅亭)이다. 대봉대는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봉황이 출현하면 성군(聖君)이 나타나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성군 또는 위대한 인물이 이곳에서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뜻이겠다. 대봉대에서는 광풍각과 제월당, 연못과 계류, 대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봉대 곁에는 봉황이 날아와 머문다는 벽오동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고목이 되어 없어졌다. 제1영, 제6영~제8영, 제11영, 제23영, 제32영, 제35영, 제37영, 제40영, 제42영, 제47영은 전원 구역의 풍취를 노래한 시다.
제1영 小亭憑欄(소정빙란) - 소정의 난간에 기대어
瀟灑園中景(소쇄원중경) 소쇄원 안에 있는 모든 경치가
渾成瀟灑亭(혼성소쇄정) 서로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擡眸輪颯爽(대모륜삽상) 눈 드니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側耳聽瓏玲(측이청농령) 귀 기울이니 맑은 소리 들리네
제6영 小塘魚泳(소당어영) - 물고기 노니는 작은 연못
方塘未一畝(방당미일무) 한 이랑쯤도 안되는 네모난 연못은
聊足貯淸漪(료족저청의) 그런대로 맑은 물결 담아둘 만하네
魚戱主人影(어희주인영) 주인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
無心垂釣絲(무심수조사) 낚싯대 드리울 마음 조금도 없어라
제7영 刳木通流(고목통류) - 나무홈통을 타고 흐르는 물
委曲通泉脉(위곡통천맥) 구불구불 샘물 줄기 통하게 하니
高低竹下池(고저죽하지) 대숲에 높고 낮은 연못이 생겼네
飛流分水碓(비류분수대) 쏟아져 내려 수차로 나눠 흐르니
鱗甲細參差(인갑세참치) 자잘한 물고기 가재 구물거리네
제8영 舂雲水碓(용운수대) - 물레방아의 물보라
永日潺湲力(영일잔원력) 온종일 쉬지 않고 흐르는 힘으로
舂來自見功(용래자견공) 방아 찧으니 절로 공이 드러나네
天孫機上錦(천손기상금) 직녀성의 베틀에 걸린 비단인 양
舒卷擣聲中(서권도성중) 수차 소리에 걷혔다 펴졌다 하네
제1영의 '소정(小亭)'은 소쇄정이다. 제6영은 마치 한 폭의 관어도(觀魚圖)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다. '소당(小塘)'은 상지와 하지다. '인갑(鱗甲)'은 물고기와 갑각류를 말한다. 연못에는 물고기를 길렀는데, 손님이 오면 잡아서 회 안주로 내놨다고 한다. 제8영의 '천손(天孫)'은 직녀성(織女星)을 가리킨다. '사기(史記)'에 직녀는 하늘의 여손(女孫)이라고 하였다. 하고(河鼓)는 견우성(牽牛星)의 별칭이다.
제11영 池臺納凉(지대납량) - 못가 둔덕에서 더위를 식히며
南州炎熱苦(남주염열고) 남녘은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인데
獨此占凉秋(독차점량추) 유달리 여긴 홀로 서늘한 가을일세
風動臺邊竹(풍동대변죽) 바람은 둔덕 가의 대숲에 불어오고
池分石上流(지분석상류) 못물은 바위 위에서 나뉘어 흐르네
제23영 脩階散步(수계산보) - 긴 섬돌을 거닐며
澹蕩出塵想(담탕출진상) 속세를 벗어난 듯 맑은 마음으로
逍遙階上行(소요계상행) 섬돌 위를 한가히 거닐어 오르네
吟成閑箇意(음성한개의) 읊을 적엔 온갖 생각 한가해지고
吟了亦忘情(음료역망정) 읊고 나면 온갖 정을 잊어버리네
제32영 叢筠暮鳥(총균모조) - 저물녘 대밭에 날아든 새
石上數叢竹(석상수총죽) 바위 위 몇 무더기 대나무숲엔
湘妃餘淚班(상비여루반) 상비의 눈물 자욱 남아 있는데
山禽不識恨(산금불식한) 산새들은 그 한을 알지 못하고
薄暮自知還(박모자지환) 땅거미 지면 돌아올 줄만 아네
'총균(叢筠)'은 대봉대 옆의 언덕에 있던 작은 규모의 대숲이다. 소쇄원도에서 총균은 조릿대(山竹)처럼 묘사되어 있다. 고암정사(鼓巖精舍) 부근의 대나무도 조릿대처럼 보인다. '상비(湘妃)'는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의 두 딸이자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의 두 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순이 죽자 아황과 여영은 상수(湘水, 瀟湘江)에 몸을 던져 수신(水神)이 되었다고 한다. '반(斑)'은 무늬가 있는 반죽(斑竹)이다. 황하(黃河)의 치수에 성공한 우(禹)는 부친 곤(鯤)에 대한 앙심을 품고 소상강변(瀟湘江邊)에 사냥을 나온 제순을 죽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황과 여영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다가 소상강에 몸을 던져서 죽었다. 아황과 여영이 피눈물을 흘린 자리에서 무늬가 있는 대나무가 돋아났다. 이후 이 대나무는 소상반죽(瀟湘斑竹), 또는 상비죽(湘妃竹)으로 불렸다.
제35영 斜簷四季(사첨사계) - 처마에 비스듬히 핀 사계화
定自花中聖(정자화중성) 사계화는 정녕 꽃 중의 성인이라
淸和備四時(청화비사시) 사계절 내내 맑고 온화함 갖췄지
茅簷斜更好(모첨사갱호) 초가지붕 처마 비껴 더욱 좋으니
梅竹是相知(매죽시상지) 매화 대도 서로 이를 알아준다네
'모첨(茅簷)'은 초가지붕의 처마를 말한다. 따라서 제35영은 대봉대 처마 밑에 비스듬히 핀 사계화(四季花)를 예찬한 시다. 장미의 일종인 사계화는 3, 6, 9, 12월 4번에 걸쳐 붉은 꽃이 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꽃잎이 분홍색이며, 잎사귀가 둥글고 큰 것을 월계화(月季花)라고 부른다. 강희안(姜希顔)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화목구품(花木九品)에 의하면 사계화는 1품(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2품(모란, 작약, 왜홍, 해류, 파초)에 이어 3품으로 분류되어 있다.
제37영 桐臺夏陰(동대하음) - 벽오동나무 언덕의 시원한 그늘
巖崖承老幹(암애승로간) 묵은 둥치는 바위 벼랑까지 뻗었고
雨露長淸陰(우로장청음) 비와 이슬에 서늘한 그늘 자라나네
舜日明千古(순일명천고) 순임금 태평 시절 오래오래 밝으니
南風吹至今(남풍취지금) 훈훈한 남쪽 바람 지금도 불어오네
한자로 '동(桐)'은 참오동 또는 오동, '오동(梧桐)'은 벽오동이다. 여기서 '동(桐)'은 대봉대 옆에 있는 것으로, 봉황과의 의미 관련으로 볼 때 벽오동이라고 봐야 한다. 대봉대 옆에 다시 심었다는 수종도 벽오동이다. '우로(雨露)'는 임금의 은혜를 뜻한다. '순일(舜日)'은 제순이 다스리던 태평한 시절을 말한다. '남풍(南風)'은 제순이 지어 오현금(五絃琴)을 타며 불렀다는 남풍시(南風詩)의 악곡(樂曲)인 '남훈가(南薰歌)'를 가리킨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악편(辨樂篇)>에 제순이 오현금을 타며 남풍시를 노래하였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들의 쌓인 고통을 밝게 풀어 주네. 남풍의 때여 우리 백성의 재산을 부유하게 하네.'(帝舜彈五鉉之琴以歌南風, 其詩曰 '南風之薰兮, 可以解吾心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하였다.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태평성대가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제40영 隔澗芙蕖(격간부거) - 골짜기 건너 핀 연꽃
淨植非凡卉(정식비범훼) 정갈하게 솟은 꽃 범상치 않으니
閑姿可遠觀(한자가원관) 우아한 자태 멀리서도 볼 만하네
香風橫度壑(향풍횡도학) 향그런 바람 골짜기 가로질러 와
入室勝芝蘭(입실승지란) 방에 들이니 지초 난보다 좋아라
'부거(芙蕖)'는 부용(芙蓉), 즉 연꽃의 별칭이다. 부(芙)는 흰꽃이 피어나는 연꽃을 말한다. 하지를 연지라고도 했다. 따라서 연꽃은 하지에 심었음에 틀림없다. 광풍각에서 바라본 연지의 연꽃을 노래한 시다. 연꽃은 선비를 상징한다. 여기서는 양산보를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제42영 櫬澗紫薇(츤간자미) - 오동나무 골짜기의 자미화
世上閒花卉(세상한화훼) 세상에 많고도 많은 저 꽃들은
都無十日香(도무십일향) 모두 향기가 열흘도 못 가는데
何如臨澗樹(하여임간수) 어이해 골짜기 물가 저 나무는
百夕對紅芳(백석대홍방) 백날이나 붉은 꽃 대하게 할꼬
'츤(櫬)'은 오동나무를 말한다. 자미화(紫薇花)는 부처꽃과에 속한 낙엽 소교목이다. 배롱나무,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도 한다. 제42영과 소쇄원도를 참조하면 자미화는 상하지와 물레방아 사이의 오동나무 개울가에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미화는 7월부터 9월까지 거의 100일 동안 오래도록 피고 지면서 즐거움을 준다.
애양단
대봉대 오른쪽으로는 긴 담장이 이어진다. 담장에는 '愛陽壇(애양단)'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 있다. 이 글씨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이다. 제27영, 제47영, 제48영은 애양단 부근의 경물을 노래한 시들이다.
제27영 散崖松菊(산애송국) - 벼랑에 흩어진 소나무와 국화
北嶺層層碧(북령층층벽) 북쪽 산봉우리는 층층이 푸르고
東籬點點黃(동리점점황) 동쪽 울타린 점점이 황금빛이네
緣崖雜亂植(연애잡난식) 기슭에 잡다하게 심겨진 것들은
歲晩倚風霜(세만의풍상) 세밑 바람 서리에도 의연하구나
제27영은 애양단 앞 축대 근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소나무와 국화를 노래한 시다. '동리(東籬)'는 동쪽 울타리, 즉 애양단을 가리킨다. 소쇄원도에 보면 애양단 앞과 대봉대 부근, 상지 옆에 소나무가 묘사되어 있다. 중국 동진(東晋)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음주(吟酒)'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유유자적 남산을 바라보네.)'을 연상케 하는 시다. 중국의 증단백(曾端白)은 국화를 화십우(花十友) 중 가우(佳友), 즉 아름다운 벗이라고 했다. 예로부터 은일거사(隱逸居士)들은 국화가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해서 많이 심었다. 은일거사들은 자신과 오상고절 국화를 동일시했던 것이다.
제47영 陽壇冬午(양단동오) - 애양단의 겨울 낮
壇前溪尙凍(단전계상동) 단 앞의 시냇물은 얼어 있는데
壇上雪全消(단상설전소) 단 위의 눈은 녹아서 없어졌네
枕臂延陽景(침비연양경) 팔을 베고 따스한 볕 맞이하니
鷄聲到午橋(계성도오교) 닭 우는 소리 오교까지 들리네
애양단이란 이름은 김인후의 제47영 '양단동오(陽壇冬午)' 시제를 따서 송시열이 붙인 것이다. 애양단은 햇볕을 즐기는 단, 해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단이라는 뜻이다. 애양(愛陽) 또는 애일(愛日)은 얼마 안 남은 어버이의 여생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애양단은 효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애일(愛日)'은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시 ‘송교집중수재귀고우(送喬執中秀才歸高郵)’의 '古人一日養, 不以三公換(옛사람은 부모를 하루 봉양하는 것을 삼공의 벼슬과 바꾸지 않았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부모 봉양을 위해서는 '날짜를 아껴야 한다(愛日)'는 것이다.
'오교(午橋)'는 중국 당나라 때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배도(裵度)가 별장 녹야당(綠野堂)을 지은 곳이다. 배도는 벼슬에서 물러나 낙양(洛陽) 남쪽의 오교에 꽃나무 만 그루를 심은 뒤, 그 가운데에 녹야당을 짓고서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 문인들과 어울려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여기서는 소쇄원을 가리킨다.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소쇄원이 지네 형국이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서 지네의 강한 기(氣)를 눌렀다는 설도 있다. 소쇄원 반대편에 ‘닭뫼’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것도 지네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제48영 長垣題詠(장원제영) - 긴 담에 걸려 있는 노래
長垣橫百尺(장원횡백척) 긴 담은 가로로 백척이나 되어
一一寫新詩(일일사신시) 하나하나 베껴 놓은 새로운 시
有似列屛障(유사열병장) 마치 병풍을 벌려 놓은 듯하니
勿爲風雨欺(물위풍우기) 비 바람아 장난일랑 치지 말게
제48영은 애양단 담벽에 걸려 있던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을 손으로 베낀 편액을 노래한 것이다. 애양단 긴 담장에 걸려 있는 시 편액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바람아 멈추어 다오' 하고 부탁하는 시다.
소나무 고사목
애양단을 지나 ㄱ자로 꺾어지는 담장에는 '五曲門'이라는 글자를 새긴 판이 박혀 있다. '五曲門' 글씨도 송시열의 작품이다. 수문 앞 계류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름드리 죽은 소나무 등걸에는 오랜 세월의 풍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17영은 높은 산등성이에서 굴러온 바위에 뿌리를 박은 소나무, 제26영은 다릿가의 두 소나무를 노래한 시다.
제17영 松石天成(송석천성) - 하늘이 이룬 솔과 돌
片石來崇岡(편석래숭강) 높은 산에서 굴러온 바위 덩어리에
結根松數尺(결근송수척) 여러 자짜리 소나무 뿌리가 얽혔네
萬年花滿身(만년화만신) 만년화 이끼꽃 온몸에 가득 피었고
勢縮參天碧(세축참천벽) 기세 곧아서 하늘로 솟구쳐 푸르네
소나무는 국화와 함께 선비의 오상고절 (傲霜孤節)을 상징하는 나무다. 사시사철 푸르고 곧은 것은 선비의 기상과 같다고 해서 예로부터 소나무를 학자수라고 불러왔다.
제26영 斷橋雙松(단교쌍송) - 끊어진 다리의 두 소나무
㶁㶁循除水(괵괵순제수) 물은 섬돌을 감돌며 콸콸 흐르고
橋邊樹二松(교변수이송) 다릿가엔 소나무 두 그루 서있네
藍田猶有事(남전유유사) 남전에는 오히려 바쁜 일도 많아
爭急此從容(쟁급차종용) 이곳과 조용함을 다툴 수 있으리
'단교(斷橋)'는 위교가 끊어진 것을 말한다. 소쇄원도에는 위교 양쪽에 각각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남전(藍田)'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의 동남방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옥의 산지로 유명하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聽壁記)'의 ‘庭有老槐四行, 南墻鉅竹千梃, 儼立若相持, 水㶁㶁循除鳴. 斯立痛掃漑, 對樹二松, 日哦其間, 有問者, 輒對曰, 余方有公事, 子姑去.(뜰에는 늙은 회화나무 네 그루가 있었고, 남쪽 담에는 굵은 대 천 줄기가 서로 지탱하듯 엄연히 서 있으며, 물은 콸콸 섬돌을 돌아 흘르고 있었다. 사립(斯立)은 열심히 물 뿌리고 쓸며, 소나무 두 그루를 마주 심어 놓고 매일 그 사이에서 시를 읊다가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공사(公事)가 있으니 그대는 그냥 가시게.")'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남전생옥(藍田生玉) 고사도 있다. 남전에서 옥이 나듯이 명문 집안에서 인재가 나온다는 뜻으로, 뛰어난 부자(父子)를 함께 칭송할 때 쓰는 말이다.
오곡문과 오암, 오암정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곡문 앞이다. 오곡문에는 원래 일각문(一角門)이 있었으나 지금은 트여 있다. '오곡(五曲)'은 계류가 다섯 번 굽이쳐 돌아서 흘러 내려간다 뜻이다. 오곡문 바로 위에는 자라바위 오암(鼇巖)과 오암정(鼇巖井)이 있다. 오암정을 정천(頂泉)이라고도 한다. 제4영은 오암을 노래하고 있다.
제4영 負山鼇巖(부산오암) - 산을 지고 앉은 자라바위
背負靑山重(배부청산중) 등 뒤에는 겹겹이 푸르른 산이요
頭回碧玉流(두회벽옥류) 머리 돌리면 벽옥 같은 시내라네
長年安不抃(장년안불변) 긴긴 세월 편안히 꼼짝도 않으니
臺閣勝瀛州(대각승영주) 정자의 풍취 신산 영주보다 낫네
'영주(瀛州)'는 봉래(蓬萊), 방장(方丈)과 함께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다.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은 보하이 만(渤海灣) 동쪽에 있다고 믿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이 한반도에 있다고 믿는 신앙이 일찍부터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금강산이 봉래산, 지리산이 방장산, 한라산이 영주산이라고 믿었다.
한편, 오곡문이라는 이름에서 양산보는 남송(南宋) 대 주자학(朱子學)의 완성자 주희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정치적 숙청을 당하자 1183년 중국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절경인 무이구곡(武夷九曲) 중 제오곡(第五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현실에서 도피하여 은둔한 채 제자들을 길렀다. 조선조 사림파 성리학자들은 모두 주희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광조와 그의 제자 양산보도 마찬가지였다. 양산보는 주희가 정진했던 무이구곡에 비정(比定)한 고암동(鼓巖洞, 북바위골)에 무이정사를 상징하는 소쇄원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양산보는 고암구곡(鼓巖九曲)을 설정하고, 그 제5곡에 소쇄원을 조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곡문 위에 제일곡~제사곡, 오곡문 아래에 제육곡~제9곡이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처럼 무이구곡은 조선조 선비들의 도가적 이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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