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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5 - 김인후 소쇄원 48경을 노래하다

林 山 2018. 7. 3. 11:20

내원의 제월당 구역은 광풍각 구역 바로 위에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한 칸에는 방을 들이고, 나머지 두 칸은 마루를 깔았다. 마루 뒷벽에는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 있다. 제월당 마루에서는 광풍각 지붕 너머로 앞산까지 바라다보인다. 제월당 앞에는 좁고 긴 마당이 있다. 소쇄원도에는 제월당 앞마당의 서쪽 모퉁이에 파초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석류나무가 있다.


소쇄원 전경


제월당


제월당은 정자라기보다는 서재를 겸한 정사(精舍)의 성격을 띤 건물이다. 주인이 거처하면서 독서를 하거나 사색을 하는 등 주인을 위한 사적(私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제월(齊月)은 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다. '齊月堂' 편액 글씨는 송시열의 작품이다. 제월당 구역의 정취를 읊은 시는 제10영과 제43영이다.  


제10영 千竿風響(천간풍향) - 대숲에 부는 바람소리


已向空邊滅(이향공변멸) 이미 저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가

還從靜處呼(환종정처호) 다시 고요한 곳으로 바람 부누나

無情風與竹(무정풍여죽) 바람과 대는 본래 정이 없다지만

日夕奏笙篁(일석주생황) 밤낮 안 가리고 대피리 불어대네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천간(千竿)'이 제월당 바로 뒤에 있다. 이상하게도 '소쇄원 48영'에서는 제월당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제월당이 소쇄원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임에도 말이다. 김인후가 '소쇄원 48영'을 지을 당시에는 제월당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제43영 滴雨芭蕉(적우파초) - 파초에 떨어지는 빗방울


錯落投銀箭(착란투은전) 은화살 쏘듯 마구 날려 떨어지니

低昻舞翠綃(저앙무취초) 푸른 비단 춤추는 듯 너울거리네

不比思鄕聽(불비사향청) 향수에 젖어 듣는 것만 못하지만

還憐破寂寥(환련파적료) 적막함을 깨니 오히려 더 좋구나


파초는 소쇄원도에 의하면 애양단 담장 입구에 한 그루, 제월당 앞마당 서쪽 구석에 한 그루 등 두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김동명 시인의 '파초'란 시에서 파초는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상으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파초는 향수를 상징한다.


파초는 난대성 다년생 관엽식물이어서 제주도 등 남쪽 지방에서나 월동이 가능하다. 담양은 남부 지방임에도 겨울에 춥고 많은 눈이 내리는 지역이기에 소쇄원에서 파초를 키우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쇄원 주인들이 원림을 가꾸는 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광풍각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는 얕은 담과 작은 문이 있다. 그 문을 지나 내려오면 소쇄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광풍각 구역이다. 광풍각은 손님을 위한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광풍각은 1614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중수하여 가운데에 온돌방을 들이고, 사방에 마루를 빙 둘러 깔았다. 방의 3면에는 여름에 활짝 열어제칠 수 있도록 분합문(分閤門, 들어열개문)을 달았다. 뒤편 마루 밑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가 있다. '光風閣' 편액 글씨도 송시열의 작품이다. 광풍각 방 뒷벽에는 소쇄원도 목판을 복사한 그림이 걸려 있다.  


소쇄원 주인은 광풍각 마루에 앉아서 계류와 십장폭포, 상하지의 물풀, 맞은편 물레방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등 수경(水景)을 즐겼으리라.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는 덤이었다. 제2영 '침계문방(枕溪文房)'은 광풍각을 노래한 시다.   


제2영 枕溪文房(침계문방) - 골물을 베고 누운 글방


牕明籤軸淨(창명첨축정) 창이 밝으니 서첨과 서축 정갈하고

水石映圖書(수석영도서) 물 속 바위에 그림글씨 어리비치네

精思隨偃仰(정사수언앙) 편안히 기거함에 밝은 생각 따르니

竗契入鳶魚(묘계입연어) 절묘한 조화 성현의 덕화 덕분일세


'침계문방(枕溪文房)' 또는 계당(溪堂)은 광풍각의 별칭이다. 광풍각은 또 침계방(枕溪房), 침계헌(枕溪軒), 수함(水檻), 소함(小檻)으로도 불렸다. '첨(籤)'은 서첨(書籤)이다. 책 겉장에 제목으로 쓴 글씨를 말한다. '축(軸)'은 서축(書軸)으로 글씨를 적은 족자, 또는 두루마리로 된 서화나 서권을 이른다. '도서(圖書)'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준말이다. 하도(河圖)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8척이 넘는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55개의 점으로 된 그림이다. 복희씨는 이 그림을 보고 '주역'의 8괘(八卦)를 그렸다고 한다. 낙서(洛書)는 하우씨(夏禹氏) 9년 치수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써 있었다는 45개의 점으로 된 9개의 무늬글이다. 하우씨는 이 낙서를 보고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었다고 한다. '정사(精思)'는 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다. 

'언앙(偃仰)'은 누웠다 일어났다 한다는 뜻이다. '일상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하다, 부침(浮沈)하다, 안거(安居)하다, 진퇴(進退)하다'의 뜻도 있다. 양산보의 출사(出仕)와 은거를 언급한 것이다. '묘계(竗契)'는 '잘 어울림, 부합(符合)'의 뜻이다. '연어(鳶魚)'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준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鳶飛天, 魚躍于淵(솔개는 날아 하늘에 다다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도다)'이라는 구절이 있다. 천지 만물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주 삼라만상이 조화를 이룬 상태, 곧 도(道)가 천지에 가득차 있는 상태이며, 나아가 성현군자(聖賢君子)의 덕화가 널리 미치고 있음을 뜻한다. 당시 광풍각은 강학의 공간이었으며, 선비들이 모여서 주역을 탐구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광풍(光風)은 비온 뒤에 해가 뜨면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이다. '광풍'과 '제월'은 중국 북송(北宋)의 시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이 성리학자 주돈이에 대해 '胸懷灑落如光風霽月(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깨끗함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시원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이라고 평한 데서 유래했다. 주돈이는 조광조가 매우 흠모했던 성리학자였으며, 양산보도 스승을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다. 정자의 당호를 제월당, 광풍각이라고 지은 뜻도 주돈이를 본받고자 한 것이다. 그는 주돈이의 우주생성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글방 좌우에 걸어두고, 연꽃을 군자에 비유해서 지은 글인 '애련설'을 가까이 했다.

도오  


광풍각 뒤에는 도오(桃塢)를 만들어 도연명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재현하고자 했다. 광풍각 앞에는 도연명을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심었다. 도연명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했다. 제36영은 봄날 복사꽃이 화사하게 핀 언덕의 새벽 정취, 제45영은 뜰에 하얗게 내린 눈 경치를 읊고 있다.  


제36영 桃塢春曉(도오춘효) - 복사꽃 언덕의 봄 새벽


春入桃花塢(춘입도화오) 복사꽃 핀 언덕에 봄이 찾아오니

繁紅曉霧低(번홍효무저) 붉은 송이 새벽 안개에 나직하네

依微巖洞裡(의미암동리) 아득히 희미한 바위 골짜기 속에

如涉武陵溪(여섭무릉계) 무릉의 시내를 건너가는 것 같네


무릉도원이 별것이던가! 봄날 새벽 안개가 살며시 내려앉은 복사꽃 화사한 언덕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도오(桃塢)'는 광풍각 뒤에 있는 후원 성격의 복사꽃 언덕이다. 복사나무는 봄 또는 이상향을 상징한다. 도오에는 지금 어린 복사나무 세 그루가 있다. 안개는 도의 경지에 이르기가 매우 아득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무릉계(武陵)'는 무릉도원을 가리킨다.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했던 최고의 은일자 도연명은 양산보의 롤 모델이었다. 대봉대, 오암과 오암정, 도오 등 도가적인 색채를 띤 이름들에서 그가 도연명을 본받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자이면서도 노장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양산보는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떠나면서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독산해경(讀山海經)', 그의 전기인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즐겨 읽었다. 이처럼 소쇄원은 유가(儒家),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이 투영된 공간이었다.


소쇄원 설경


제45영 平園鋪雪(평원포설) - 넓은 뜰에 깔린 눈


不覺山雲暗(불각산운암) 어둑한 산 구름 미처 몰랐는데

開牕雪滿園(개창설만원) 창을 여니 뜰에 눈이 가득하네

階平鋪遠白(계평포원백) 섬돌에도 두루 하얀 눈 쌓이니

富貴到閑門(부귀도한문) 부귀가 이 한산한 문에 왔구나


제45영은 겨울을 배경으로 한 시다. 구름이 끼어 있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갑자기 거짓말처럼 눈이 내렸다. 김인후는 눈이 하얗게 쌓인 것을 서설(瑞雪)로 보고 소쇄원에 부귀가 이르렀다고 예찬하고 있다.  


양산보가 자연과 인공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선계와도 같은 소쇄원을 조성하자 외사촌형인 송순과 4종매부 임억령, 사돈 간인 김인후를 비롯해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기진, 유성춘 ,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1499~1547), 김윤제, 유희춘,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정철,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 등 당대 최고의 시인 문사들이 드나들면서 시주를 나누며 교유했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성수침은 양산보에 대해 '공은 참으로 두려운 친구이다.'라고 하였으며, 김인후는 항상 형의 예로 섬기면서 양산보의 정밀한 사색과 현묘한 학문에 감탄했다. 기대승은 '소쇄옹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안으로는 엄격하여 바라보면 무릎이 꿇어짐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고경명은 '공의 사람 됨됨이는 위대하고 성품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바른 선비라고 칭송한다.'고 하였다. 또, 정철은 '소쇄옹과 서로 마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을 후련하게 하여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양산보는 당시의 선비들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제월당과 광풍각에는 당시 소쇄원을 드나들었던 문인들의 시 편액들이 걸려 있다. 제월당에 걸려 있는 양산보의 '소쇄옹제영(瀟灑翁題詠)'은 면앙정에 걸려 있는 그의 시 '차면앙정운'의 두 번째 수와 내용이 똑같다. 이 글의 앞부분에 양산보의 '차면앙정운' 전문이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김인후는 양산보의 제영시에 화답하는 시 '방언진형임정(訪彦鎭兄林亭)'을 지었다.


제월당에 걸려 있는 양산보의 '소쇄옹제영'과 김인후의 '김후지하서화제' 편액 


訪彦鎭兄林亭(방언진형임정) - 언진 형의 임정을 찾다(김인후)


淸境由來卜得難(청경유래복득난) 맑은 경치 그 옛날부터 구하기 어려운데

吾兄所宅罕人間(오형소택한인간) 우리 형님 사시는 곳은 세상에서 드무네

凌霜粉馥梅三樹(능상분복매삼수) 서리 깔보듯이 세 그루 매화향기 날리고

度雪蒨蔥竹數竿(도설천총죽수간) 대나무숲은 눈 맞고도 그 잎이 무성하네

羣鴨有情還泛泛(군압유정환범범) 저 오리떼는 다정스럽게 두둥실 떠 있고

長溪無任自潺潺(장계무임자잔잔) 긴 시내는 제멋대로 졸졸졸 흘러서 가니

逍遙亭上堪乘興(소요정상감승흥) 정자 위를 거닐다 왠지 흥겹다 싶었는데

嫌却當時俗士看(혐각당시속사간) 문득 속세 사람 보지 않을까 꺼림직하네


金厚之河西和題(김후지하서화제) 후지 김하서 화답하다


양산보의 '소쇄옹제영'의 운자는 만(巒), 만(漫), 건(乾), 간(干)인데, 김인후의 '방언진형임정'의 운자는 간(間), 간(竿), 잔(潺), 간(看)이다. 후지(厚之)는 김인후의 자다.


양산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석(孤石) 목장흠(睦長欽, 1572 ~1641),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82∼1650)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1595∼1645), 동리(東里) 이은상(李殷相, 1617~1678)용구(龍邱) 서봉령(徐鳳翎, 1622~1687),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소은(簫隱) 정민하(鄭敏河, 1671∼1754), 자이(子以) 조상건(趙尙健, 1672~1721),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 등의 시인 묵객들이 소쇄원을 찾아와 시를 남겼다. 이들이 남긴 시문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정철 가문은 아들 정홍명에 이어 5대손 정민하에 이르기까지 소쇄원과 인연을 맺었으며, 기대승은 아버지 기진에 이어 2대에 걸쳐 양산보와 인연을 맺었다. 김윤제는 나주목사로 있을 때 기대승이 지은 '주자문록(朱子文錄)'을 발간한 바 있다. 이 일로 기대승은 김윤제의 매제 양산보와도 자연스레 친해졌을 것이다.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송시열도 소쇄원을 찾았다. 송시열은 방암(方菴) 양경지(梁敬之, 1662~1734)의 스승이기도 했다. 소쇄원의 경영에는 송순과 김인후도 함께 했다. 소쇄원은 이곳을 찾은 선비들에게 사유와 학문, 시국토론의 공간이었다. 이들은 또한 소쇄원에서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시로 노래하며 풍류를 즐김으로써 소쇄원가단 나아가 성산가단을 형성했다.   


특히 양산보와 가장 절친했던 사람은 7살 연하의 김인후였다. 기묘사림인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趙元紀)기준, 박상 등은 어렸을 때부터 시문을 잘하여 그 명성이 자자했던 김인후를 아꼈다. 김인후는 송순에게서 배운 뒤 성리학의 대가이자 기묘사림인 김안국(金安國)과 최산두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김인후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 기준과 함께 김굉필의 제자였다. 그리고, 김안국과 조광조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받은 직계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김안국의 제자 김인후와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는 학맥으로 볼 때 형제나 다름없었다.  


장성에 살던 김인후는 평소에도 소쇄원을 자주 방문했으며, 화순 동복에서 유배 중이던 최산두에게 공부하러 오갈 때는 소쇄원에 들러서 묵거나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다. 김인후가 소쇄원 원림을 읊은 시는 무려 80여 수에 이른다. 김인후가 소쇄원에서 묵었을 때 읊은 '숙소쇄원문방(宿瀟灑園文房)'이란 시가 있다.  


숙소쇄원문방(宿瀟灑園文房) - 소쇄원 문방에서 묵다(김인후)


徑尺苺苔地(경척매태지) 한자쯤 될까 대지엔 이끼 끼었고

寒叢雪後新(한총설후신) 대숲은 눈 쏟아지면 더 새롭다네

蕭疎燈影下(소소등영하) 적막한 등 그림자 아래 쓸쓸한데

襟韻更相親(금운갱상친) 가슴 속의 운치는 더욱 친밀하네

窓外雨蕭蕭(창외우소소) 창 밖엔 비가 소슬하게 흩날리고

小風驚醉面(소풍경취면) 바람은 술 취한 얼굴에 선뜩하네

盆中竹數竿(분중죽수간) 화분 가운데 대나무 몇몇 가지는

翠葉微微顫(취엽미미전) 푸른 잎 소리도 없이 하늘거리고

怡然一室中(이연일실중) 온 집안에 즐거운 일들 가득한데

生事何須問(생사하수문) 모름지기 사는 일 물어 무엇하리

壁裏有陶詩(벽리유도시) 벽에는 도연명의 시 걸려 있지만

無人知遠韻(무인지원운) 깊은 운치를 아는 사람이 없구나

惜別仍山雨(석별잉산우) 이별 아쉬운데 산엔 비마저 오니

吾行不自由(오행부자유) 나의 가는 길 생각대로 못하겠고

狂吟棄卯酒(광음기묘주) 새벽술에 미친 듯이 읊은 노래를

却愧壁間收(각괴벽간수) 벽 사이 가둬두니 되려 부끄럽네


'문방(文房)'은 침계문방의 준말로 광풍각을 가리킨다. 이 시를 통해서 광풍각은 손님들이 머물거나 묵어가는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인후는 소쇄원에서 자주 묵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소쇄원에 얼마나 자주 들렀던지 연못의 물고기들이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양산보의 차남 양자징은 김인후의 제자가 되었고, 이황의 문하에서도 공부했다. 김인후는 수제자 양자징에게 벼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양자징은 그 벼루를 가보로 소장했다. 양자징은 후에 김인후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았다. 김인후에게는 딸이 넷 있었는데, 막내딸은 일찍 죽었다. 그의 첫째 딸은 사성(司成) 조임(趙琳)의 아들 조희문(趙希文), 둘째 딸은 양자징, 셋째 딸은 유희춘의 아들 유경렴(柳景濂)에게 출가하였다. 이로써 양산보는 송순, 김윤제, 김인후 등 당대 최고의 명문가들과 혈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김인후의 문집인 '하서전집(河西全集)'에는 양산보와 관련된 시가 80수, 양자징과 관련된 시가 50수에 이른다. 그만큼 김인후가 소쇄원과 그 주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이야기다. 양산보의 3남 양자정도 김인후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양자징, 자정 형제는 소쇄원의 2대 주인이 되어 원림을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양자징은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조헌(趙憲)과 함께 학문을 익히고 닦았다. 양자징, 자정 두 형제는 김성원, 고경명과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자징은 학문과 효행으로 추천되어 현감(縣監)을 지냈고, 양자정은 훈도(訓導)를 하였다. 양산보의 고명딸 앵두는 노수란(盧秀蘭)에게 출가하였다. 


양산보의 장남 양자홍은 양과동(良瓜洞) 출신 최대윤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두 명을 두었다. 하지만 양자홍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양자홍의 장남 양천리(1544~?)는 양과동 출신 박인의 딸에 이어 고경명의 숙부 고계영의 딸이자 양팽손의 외증손녀와도 결혼하였다. 차남 양천심(1548~1623)은 광주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충달의 딸과 결혼했다. 


양자정은 정언방(鄭彦邦)의 딸, 현응수의 딸과 결혼하여 2남3녀를 두었다. 정언방은 지석동에서 소쇄원가와 함께 살았던 정지유(鄭之游, 1456~1526)의 막내동생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정언방과 양자징은 상사(上舍) 김송명(金松命)의 위 아래 사위였다. 정언방과 양자징은 동서지간이고, 양자정은 정언방의 사위가 된 것이다. 양자정의 장남 양천건은 후사도 없이 일찍 죽었다. 고경명의 2남과 5남도 어려서 죽었다. 고경명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적은 편지를 양자정에게 보내기도 했다. 


김송명의 손자 만덕(晩德) 김대기(金大器, 1557∼1631)는 양자징과 양자정의 문인이다. 김송명은 양자징의 장인이다. 그러니까 양자징은 김대기에게 고모부가 된다. 김대기는 평생 야인으로 살다 간 사람이다. 그의 딸은 양자정의 아들 양천주에게 출가하여 딸만 두 명 두었다. 양자정과 김대기는 사제 간이자 사돈이다. 양자정의 차녀는 고경명가의 고부영에게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