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4년(선조 7) 4월 20일부터 나흘 동안 고경명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무등산(無等山)과 소쇄원을 유람한 뒤에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썼다. '유서석록'에는 소쇄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이 실려 있다. 소쇄원에 대해 고경명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오후 3시 경 소쇄원에 들르니, 여기가 바로 양산보가 오래전부터 일구어 온 자리다. 계류가 집의 동쪽으로부터 담장을 통하여 흘러 들어와(闕墻通流) 물소리도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내린다. 그 위에는 자그마한 외나무다리(略彴)가 있다. 다리 아래쪽에 있는 돌 위에는 저절로 패인 절구처럼 생긴 웅덩이가 있는데, 이것을 조담(槽潭)이라고 부른다. 고였던 물은 아래로 쏟아지면서 작은 폭포(瀑布)를 이루고 있는데, 물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처럼 영롱하다. 노송(老松)이 조담 위에 너부죽이 가로질러 누워 있다. 작은 폭포 서쪽에는 작은 집 한 채(小齋)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그림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배(畵舫) 같다. 남쪽에는 소정(小亭)이 돌을 높이 쌓아놓은 위에 있는데 우산을 펼쳐놓은 것 같다. 처마 바로 옆에는 오래된 벽오동(碧梧)이 서 있는데, 늙어서 반은 썩어 있다. 정자 아래에 판 작은 연못에는 홈을 판 통나무(刳木)를 통해서 시냇물을 끌어들여 여기에 대고 있다. 연못 서쪽에는 왕대(鉅竹)가 100여 그루 있는데, 마치 옥기둥을 즐비하게 세운 것 같아 즐겨볼 만하다. 대숲 서쪽에는 연지(蓮池)가 있는데, 돌로 물길을 내어 소지(小池)의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연지 북쪽에는 작은 물레방아(小碓)가 돌아간다. 보이는 것이 모두 소쇄하지 않은 사물이 없고, 하서의 40영이 그것을 다했다.]
'유서석록'은 양산보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이 지나서 나왔고, 이때는 2대 주인 양자징, 자정 형제가 소쇄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궐장통류(闕墻通流), 약작(略彴), 조담(槽潭), 폭포(瀑布), 노송(老松), 소재(小齋), 소정(小亭), 벽오(碧梧), 소지(小池), 고목(刳木), 거죽(鉅竹), 연지(蓮池), 소대(小碓) 등 주로 계류 주변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글에는 소재(小齋, 광풍각)와 소정(小亭, 소쇄정)은 등장하지만 제월당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볼 때 1574년 4월까지는 제월당이 건립되지 않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 김인후는 '소쇄원 48영' 중 ‘단교쌍송(斷橋雙松)’에서 끊어진 다리를 읊었는데, '유서석록'에는 '약작(略彴)이 등장한다. 고경명이 '유서석록'을 쓸 당시에는 오곡문 바로 앞에 외나무다리를 새로 놓았음을 알 수 있다.
고경명은 또 '瀟灑棲霞環碧, 一洞之三勝, 戱吟一絶, 示鄭員外季涵, 名澈, 號松江, 時爲吏曺佐郞(소쇄원과 서하당, 환벽당은 한 동네 안의 세 명승지인데, 재미로 읊어서 정철에게 보이다. 이름은 철, 호는 송강, 이때 이조좌랑이 되었다.)'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소쇄원을 노래했다.
瀟灑名園處士家(소쇄면원처사가) 이름난 소쇄원 처사공 집안인데
棲霞環碧兩堪誇(서하환벽양감과) 서하당 환벽당도 자랑할 만하네
願將吏部銓衡手(원장이부전형수) 원하건대 이조 정랑의 솜씨로써
題品溪山定等差(제품계산정등차) 계산의 등급을 정하여 보시게나
송순은 소쇄원과 환벽당, 식영정을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고 했지만, 고경명은 식영정 대신 서하당을 넣었다. '일동지삼승'에 서하당과 식영정이 번갈아 등장하는 것은 두 누정이 한 구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억령이 식영정을 중심으로 가단을 형성한 뒤부터는 식영정이 서하당을 대표하게 되었다.
고암정사와 부훤당 터
이 무렵 양자정은 고암정사 서쪽 바로 곁에 부훤당(負暄堂)을 지었다. 소쇄원의 2대 주인 양자징과 자정의 사랑채 겸 서재였던 두 건물은 지금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1577년(선조 10) 양자정은 수남학구당의 당장을 맡은데 이어 3년 뒤인 1580년에도 당장을 맡았다. 그는 훈도로서 수남학구당의 교육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훈도는 선조 때 교육을 장려하고 감독하기 위해 조선 팔도에 한 명씩 두었던 벼슬이다.
1581년(선조 14) 양자징은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승진되어 나갔다. 선조가 양자징을 만나보고서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그는 '학교를 일으켜 교화를 힘쓰도록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수남학구당 설립에 앞장섰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거창현감 재임시 그는 배우는 무리를 권면하여 '소학'을 익히게 하고, 삼강의 행실을 권면하며, 양로(養老)와 향사(鄕射)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에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해 고경명도 광주로 낙향한 지 19년만에 다시 영암군수로 나갔다.
1582년(선조 15) 2월 1일 양산보의 외사촌형 송순이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산 200-16번지에 묻혔다. 정철은 '면앙송순제문(俛仰宋純祭文)'을 지어 스승의 죽음을 애도했다. 송순이 살았던 시대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사화가 일어난 혼란한 때였다. 하지만 송순은 인품이 너그럽고 아량이 넓은 학자이자 정치가, 시인이었기에 5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단 한 번 1년 정도의 귀양살이만 했을 뿐 별다른 화를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관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1584년(선조 17) 기묘명현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자 안영(安瑛)은 양자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양자징의 차녀는 안영에게 출가하였다. 그해 양자징은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나갔다. 1585년(선조 18) 정철은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 1번지에 송강정(松江亭)을 세웠다. 1589년(선조 22) 10월 혁명적 사상가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 고변(告變)에서 촉발된 정치공작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자 정철은 수사를 지휘하는 위관(委官)을 맡았다. 기축옥사에서 1,000여명 이상의 동인(東人) 선비들이 학살당했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는 전라도 장성에 건립된 필암서원(筆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양자징의 3남 양천운은 성혼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는 제2차 조청전쟁(병자호란) 때의 척화대신(斥和大臣)으로 유명한 김상헌(金尙憲)과 사마시 동기였다. 조헌도 양천운을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인물로 평가했다.
1591년(선조 24) 9월 27일 기축옥사 2년 뒤에 일어난 신묘옥사(辛卯獄事)에 연루되어 양자징의 장남 양천경과 차남 양천회가 장형(杖刑)을 받고 장독(杖毒)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양천경과 양천회는 정철의 사주를 받아 최영경(崔永慶)을 무고(誣告)한 죄로 잡혀가서 국문을 받았다. 양자징의 셋째 사위도 옥사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다.
선조실록 25권에 '최영경을 무고한 양천경, 양천회, 강견(姜涀), 김극관(金克寬), 김극인(金克寅) 등을 국문하다. 무고한 사람들을 아뢴 대로 잡아왔는데, 양천경, 양천회, 강견, 김극관, 김극인과 전 찰방 조응기(趙應麒) 등이었다. 삼성교좌(三省交坐)로 국문하였다. 천경, 천희, 강견 등은 2차의 형신을 받고서 "정철의 풍지를 받아 최영경을 길삼봉(吉三峯)이란 사실 무근한 말을 지어내어 서로 수창(酬唱)했다."고 승복하였는데, 무고죄로 조율(照律)하여 정철을 수범으로 삼고 천경 등은 차율(次律)로 논하여 북도(北道)에 장배(杖配)하였다. 극관, 극인은 천경 등의 말을 듣고 응기에게 말했고 응기는 극관의 말을 듣고서 감사에게 신고했으니, 애당초 터무니없는 말을 지어낸 자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형신하지 않고 북도에 유배만 하였는데 천경, 천희, 강견 등은 모두 장독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철은 무고를 사주했다는 죄목으로 함경북도 명천군에 유배되었다.
양자징은 두 아들이 장형을 받고 참혹하게 죽자 석성현감에서 물러나 소쇄원으로 낙향하였다. 양자징은 두문불출하고 사람들과의 왕래도 끊어버렸다. 정여립의 부하와 양천경, 천회 형제의 대질 심문을 지켜본 김여물(金汝沕)이 그 내용을 적어 보내준 문서를 보고서야 양자징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 문서를 가보로 간직했다. 이 문서에 '정철 사주설'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제주 양씨는 영일 정씨(迎日鄭氏)와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천회의 부인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
양천경, 천회 형제가 사화로 희생되자 양자징의 손윗동서 조희문이 위로편지를 보내왔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서인(西人)의 편에 서고, 후에는 다시 서인의 한 분파인 노론(老論)의 편에 섬으로써 중앙의 정치적 실세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파당의 역학 관계에 따라 소쇄원가에도 정쟁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양천운은 신묘옥사로 죽은 두 형의 정치적 동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 김극관, 김극인 형제의 누이와 결혼했다. 그의 장인은 무주현감을 지낸 김춘(金春)의 아들 김고언(金顧言),장모는 장흥부사를 지낸 류충정(柳忠貞)의 딸이다. 양천운은 또 충주 출신의 홍이상(洪履祥)과 동서지간이 된다. 양천운의 처남 김극관은 금구(金溝)의 유생으로 정여립의 처족이었다. 이런 관계로 정여립이 양천운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자칫했으면 이 일로 인해 양천운도 기축옥사에 연루될 뻔했다. 양천운의 부인 안동 김씨는 장남 양몽우(梁夢禹)만 낳고 27세의 나이에 일찍 죽었다. 어머니가 죽자 양몽우는 소쇄원을 떠나 태인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천운은 창원 정씨(昌原 丁氏) 진사 정창운의 딸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 창원 정씨는 양몽의(梁夢義), 양몽염(梁夢炎), 양몽요(梁夢堯) 등 3남3녀를 낳았다. 양천운은 또 측실(側室)에게서 양몽리(梁夢鯉)를 얻었다. 창원 정씨의 소생들은 소쇄원가를 중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양몽요는 정철의 4남 정홍명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92년(선조 25) 제1차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 양자징의 명에 따라 양천운은 의병장 고경명을 따르려 하였다. 하지만 고경명은 양천경, 천회 형제가 신묘옥사로 죽어서 양천운이 소쇄원가의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부모의 봉양이 먼저임을 들어 그의 참전을 만류하였다. 양천운이 참전할 수 없게 되자 양자징은 양곡 등 전쟁 물자를 보내 고경명을 지원하였다.
같은 해 7월 10일 고경명은 조헌과 함께 충청도 금산성에서 6,000여 명의 의병군을 이끌고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때 고경명의 2남 고인후(高仁厚), 유팽로(柳彭老), 양자징의 사위 안영 등도 전사했다.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高從厚)와 동생 고경흥은 김시민 장군을 도와 진주성에서 싸웠으나 왜적에게 패배하자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고경명의 동생 고경신은 제주도에서 전쟁에 쓸 말을 구해오다 풍랑을 만나 익사하였다. 양자징의 차녀는 남편 안영이 순절하자 친정으로 돌아왔다. 양천운은 친정으로 돌아온 둘째 누이를 극진히 잘 보살폈다.
1593년(선조 26) 12월 18일 정철은 강화도 송정촌 우거지에서 5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정철은 문학적으로는 대문호라는 평가를 받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에서 위관을 맡아 1,000여 명 이상의 동인을 학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철에 대한 평가는 '가사문학의 대가', '서인의 행동대장', '동인 백정' 등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해 양천운의 첫 번째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1594년(선조 27) 소쇄원의 2대 주인 양자징이 72세를 일기로 창평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후에 장인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전라도 장성에 세운 필암서원(筆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죽음(竹陰)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은 양자징의 묘갈명을 지었다. 조희일은 시문과 서화에 뛰어나 진사시에서 장원을 했으며,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활약했다. 그의 아버지 조원(趙瑗), 아들 조석형(趙錫馨)도 진사시에서 장원을 했다. 다음은 양자징의 묘갈명 전문이다.
[양씨의 선조에 특이한 분이 있어 제주로부터 북쪽으로 올라가며 하늘의 형상을 움직이고 별을 주장하였다는 칭호를 얻어 대대로 호남의 명망이 있는 집안이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석재(碩材)는 전직(殿直), 사서(司書)였으며, 그 뒤에 휘 산보는 재능과 행실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고 나이 17세에 정시(廷試)에 선발되었으나 유사(有司)의 실고(失考)로 마침내 낙방하였다. 그러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원서(園瑞)의 석록(石麓)에다 돌을 깎아내고 정자를 짓고는 덕을 숨긴 채 세상을 떠났으며, 자호를 소쇄처사(瀟洒處士)라 하였다.
1523년(중종 18)에 공이 태어났다. 공의 휘는 자징이고, 자는 중명이며, 고암은 그의 도호(道號)이다. 공은 효성이 하늘에서부터 타고나서 나이 6, 7세 때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상사를 봉행하기를 성인처럼 하였다. 그로 인해 슬픔으로 몸이 야위고 병에 걸리자 소쇄공이 새고기를 구워 약으로 먹이려 하였으나 좋아하지 않으므로 막대기를 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꾸짖으며 달래고 권면하였지만 끝내 먹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수저를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며 다른 사람의 수저와 섞이지 않게 하였는데, 그의 어버이도 그의 지극한 정성을 알고 그 뒤로는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상제(喪制)를 마치고 또 조모의 상을 당하자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소식(蔬食)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하니,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상을 당하였는데 자식이 무슨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겠습니까?" 하며, 거처와 음식을 상제와 다름없이 하였다.
무릇 글을 읽을 적이면 지도하여 가르치기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많았다. 장성함에 이르러 하서 김 선생(김인후)이 스스로 그의 아버지와 친구라 하여 사위로 골라서 그의 딸을 출가시켰으니, 그가 가정에서 일찍 알려진 것과 스승을 의뢰하여 크게 드러나 깊고 오묘한 경지를 탐색하고 헤쳐 나감에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함에 겸손하여 부족한 듯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소쇄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우 양자정과 함께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보살피며 통곡하기를 바람이 부나 눈이 내려도 폐하지 않았으며, 제전(祭奠)은 반드시 친히 손수 조리하였다. 조정에 그의 효성이 알려져 처음에 사관(祠官)에 임명되었다가 거창현감으로 승진 전보되었다. 임금이 만나 보고서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학교를 일으켜 교화를 힘쓰도록 바랍니다.” 하였는데, 부임함에 이르러 배우는 무리를 권면하여 '소학'의 글을 익히게 하고 삼강의 행실을 경계하게 하며 양로와 향사의 예를 거행하니, 백성들이 흡족하게 여기며 따라 주어 칭송이 지금까지 자자하다. 뒤에 석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공의 두 아들은 양천경과 양천회인데 기상과 지조를 부담하여 즉석에서 승낙하는 신의가 있었으며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다. 평소 우계 성 선생(성혼)과 송강 정 상공(정철)이 장려하고 추켜세우는 바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에 전 수찬(修撰) 정여립이 반역을 꾀하면서 관직에 있는 사대부(縉紳)들이 연루되었으며 양천경 등이 임금에게 소(疏)를 올려 역적을 성토하는데, 글의 내용이 분격하고 엄정하였다. 당시 송강 정 상공이 그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한 떼거리의 사람들이 몹시 미워하며 밀치거나 함정에 빠뜨리려고 도모하다가 감히 화를 양천경의 형제에게 옮겨 사실을 꾸며 이루어지게 하였다. 조사하는 관리는 독충이 독을 쏘듯 지나친 형신으로 그가 혼절(昏絶)한 틈을 타서 공초에 억지로 서명하게 하여 진술에 자복한 것처럼 해서 마침내 그로 하여금 원통함을 품고서 죽게 하였으니, 아! 슬프기도 하고 또한 참혹하기도 하도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피구자(披裘子) 김공(김여물)은 의기가 있는 남자이다. 그 역시 어떤 일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양씨의 집안에서 원통하게 죽은 상황을 상세히 알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증거를 대며 변론하기를 매우 밝게 하였지만 아직까지 한마디도 원통함을 씻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저승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1592년(선조 25) 왜란으로 임금이 탄 수레가 피난을 가게 되자 제봉 고경명과 수원(水原) 김천일(金千鎰) 두 의병장이 군사를 일으킴에 공이 이미 힘쓰도록 하였고 또 수계(手啓)를 써서 보냈는데, 부자가 같은 심정으로 저승과 이승에서 힘을 모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으니, 아! 그것은 충성과 효도 두 가지가 온전하며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차이가 없다고 말할 만한 분이다. 공은 향년(享年) 72세로 창평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막내아들 양천운이 공을 중산(中山)의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양천운은 자질이 순박하고 행실이 돈독한 훌륭한 사람이다. 경학(經學)에 밝다고 알려졌고 벼슬은 주부이니, 아! 덕을 베풀고 보응을 받는 그 이치가 분명한데, 그것을 속일 수 있겠는가? 그것을 끝까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은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였네. 스승과 친구의 보탬으로 벼슬길(龍門)에 올랐도다. 자신이 타고난 천성을 스스로 다하기란 다른 것이 아니네. 기용은 남에게 달려 있으니, 운명을 어떻게 하겠는가? 효도를 정사에 시행함은 이를 들어다 보탤 따름이니, 한가하고 여유가 있음이여. 고양(皐壤, 하천과 늪지대)인가 산림(山林)인가 자제가 드러내려고 생각하여 묘소에다 비를 세웠는데, 내용이 넘치지 않으니, 나는 그 꼿꼿함을 생각하도다.]
1596년(선조 29) 김윤제의 증손자 김덕령이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군)의 무량사(無量寺)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무자비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그해 양천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아내, 아버지 양자징에 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1597년(선조 30)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의 병화로 인해 소쇄원의 건물과 서책들이 불에 타는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 창암촌과 소쇄원 일대가 불바다가 되자 양천운은 조상의 신주만을 받들고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왜군의 분탕질로 소쇄원 주변의 누정과 사찰도 큰 피해를 입었다. 환벽당, 식영정, 죽림재, 관수정도 병화를 입었다. 이때 양천경의 부인 함풍 이씨, 3남1녀 가운데 14세의 차남 양몽린(1583~1613), 9세의 3남 양몽인(1588~?, 일본에서 귀한한 뒤 양몽기로 개명), 장녀 부부, 둘째 사위는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양천경의 장남 양몽웅만 포로 신세를 모면했으며, 그는 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양자홍의 차남 양천심은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남원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하였다.
같은 해 조카 김덕령이 옥사한 뒤 동복현감에서 물러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살던 72세의 김성원은 아흔의 노모를 모시고 동복의 모후산(母后山, 919m)으로 피신하던 중 왜병을 만나 부인과 함께 온몸으로 막아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김성원을 마지막으로 식영정 4선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모후산은 원래 나복산(蘿蔔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나복산은 김성원의 순효를 기려 모호산(母護山)으로 그 이름이 바꼈다고 하며, 마을 이름도 모호촌(母護村)으로 고쳤다고 한다. 김성원의 부인은 서산 유씨(瑞山柳氏) 유사의 딸이다.
양산보의 증손녀는 김성원의 손자 김평에게 출가하였고, 양자징의 장녀이자 양천운의 첫째 누이는 오급에게 출가하였다. 왜군이 오급을 죽여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지는 광경을 본 양자징의 장녀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기대승의 차남 기효민(奇孝閔) 부부, 3남 기효맹(奇孝孟) 부부, 사위 김남중(金南重)의 딸 등 5명도 왜군을 만나 죽임을 당하거나 겁박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병장 김덕령의 부인은 왜군을 피해 추월산으로 피신하였는데, 추격대가 쫓아오자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
제2차 조일전쟁의 와중에서 양산보의 3남 양자정이 죽었다. 양자정은 피란을 가지 않고 소쇄원을 지키다가 왜적에게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경명의 둘째딸은 왜군들의 겁박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안고 순절하였고, 고종후의 장남 고부립(高傅立)은 훗날 제1차 조청전쟁(朝淸戰爭, 정묘호란) 때 의병장이 되었다. 양자징의 자녀 중 양천운만 살아남아 소쇄원을 재건할 수 있었다. 양천운은 고경명의 증손 고용후(高用厚, 1577~?)와 절친한 친구였다. 양자정의 손녀는 고부영에게 출가하였다. 이처럼 소쇄원가와 고경명가도 혈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창평은 특히 제2차 조일전쟁 때 피해가 컸다. 왜군은 공훈을 세우기 위해 조선인들의 목과 코, 귀를 앞다퉈 잘라갔다. 왜군은 사로잡은 조선인들을 쇠줄로 묶어 포로로 끌고 가면서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기록에 의하면 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도 많았는데, 이들은 조선 왕조의 학정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들이었다.
1601년(선조 34) 조일전쟁이 끝나고 정국이 다소 안정되자 호남의 유생들은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포충사(褒忠祠)를 세우고 고경명과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위를 배향했다. 포충사는 2년 뒤 사액서원이 되었다. 포충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도 훼철되지 않은 호남의 3대 서원 중 하나다.
양천운의 장남 양몽우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이었다. 1609년(광해군 원년) 양몽우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일전쟁 때의 의병장 남원 양씨 양사형(楊士衡)의 조카 양시익(楊時益)의 딸과 결혼했다. 부인 남원 양씨가 일찍 죽자 양몽우는 동복현감을 지낸 송처중(宋處中)의 딸과 결혼하여 양진망, 양진섭 두 아들을 얻었다. 1612년(광해군 4) 양몽우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를 비롯해서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 계축옥사(癸丑獄事)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을 일으켰다.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심전(沈銓)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洋甲),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의(朴致毅),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박유량(朴有良)의 서자 박치인(朴致仁), 서얼 허홍인(許弘仁) 등은 서얼차별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서자도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광해군(光海君)에게 연명상소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들은 신세를 한탄하면서 소양강변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시주를 나누며 함께 지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하여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렀다.
상소가 거부당하자 칠서(七庶)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도질 등을 일삼았다. 박응서, 심우영, 서양갑 등 칠서는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銀) 수백 냥을 강탈했다가 포도청에 잡혔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북파는 영창대군과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소북파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칠서가 잡히자 대북파의 영수이자 광해군의 비선실세(秘線實勢) 이이첨(李爾瞻)은 칠서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를 받고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저지른 것처럼 음모를 꾸몄다. 대북파는 칠서 중 박응서를 회유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해서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허위자백을 시켰고, 결국 그들로부터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칠서는 또 김제남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고 자백했다.
결국 김제남은 사사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이이첨의 밀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암살당했다. '광해군일기'에는 정항이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 온돌을 뜨겁게 달궈서 쪄 죽이는 증살(蒸殺)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독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치공작 '칠서지옥'으로 신흠(申欽),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 대부분이 숙청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칠서도 역모죄로 몰려 박응서만 제외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서양갑의 동생 서호갑은 바로 양자징의 셋째 딸 남편이었다. 서호갑도 유배지에서 죽었다. 서양갑, 호갑 형제의 아버지 서익은 서인 이이와 정철의 지우(志友)였다. 서호갑이 죽자 양천운은 셋째 누이를 소쇄원으로 데려와 극진히 잘 보살폈다.
광풍각
1614년(광해군 6) 양천운은 제2차 조일전쟁 당시 불에 탔던 소쇄원 건물 가운데 광풍각을 먼저 중수했다. 이때 지역에서 알고 지내던 관리들의 도움을 많이 빋았다. 광풍각을 재건하면서 양천운은 '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瀟灑園溪堂重修上梁文)'을 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양현(鳴陽縣, 지금의 담양군 대덕면)의 남쪽 서석산(瑞石山, 무등산) 북쪽에 층층히 돌로 얽어맨 듯한 산봉우리가 둘려 있는데, 그 지세가 마치 소반 같은 골짜기라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은 맑고 차며, 그 경치는 무이승경(武夷勝景)과도 같다. 나의 조부 처사공께서 흙과 돌을 쌓아 담장을 두른 다음 달을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지으시고, 마루에 앉아 난간에 기대어 술을 마시며, 시원한 바람을 쐬고 동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름없이 즐기셨다.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의 바위에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을 지닌 대봉대를 세우셨고, 그 옆의 언덕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사랑채를 지으셨으며, 그 마루끝 층계 밑에는 매화, 단풍나무 등을 심으셨다. 다시 위험한 낭떠러지에는 축대를 쌓아 곁채를 지으시고, 대청과 방을 마련하셨다.
한벽산(寒碧山, 184m)은 검푸른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계류에 걸쳐 있는 다리에는 작약을 기대었고, 누운 듯한 곳에는 애양단을 쌓으셨다. 그 앞으로 졸졸 흐르는 물은 사람들의 귀를 깨끗이 씻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곳을 창암동이라 이름하셨으니 증조부이신 사원의 아호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마다 사람들의 시정을 흔들었으며, 그와 어우러진 개울이나 우물을 보고도 감탄하여 글과 시들을 지었다. 대숲을 통해 오솔길을 거닐고, 개울물이 흘러 내리다 잠시 멈춘 곳에는 연못이 있으며, 가마솥에서 나는 연기는 산봉우리에 병풍을 둘러친 듯 길게 뻗어 있으니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오솔길을 지나 등넝쿨이 뻗어 있는 곳에는 간혹 사람이 지나다닌 발자취가 종종 눈에 띄지만 다른 곳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가끔 다람쥐가 손님의 가슴을 놀라게 할 뿐이다. 구름이 사라진 고암을 등뒤에 엎고 서 있노라면 봉래산이 어디이며 무릉도원은 또 어디란 말인가! 말라죽은 오동나무 아래서 놀고 있던 여우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도망친다. 맑은 못에서 한줌의 물을 떠 얼굴을 씻으니 마음조차 깨끗해진다. 여름날의 오동잎은 푸른 일산을 펴놓은 듯 바람에 흔들리고, 대나무 그림자는 가을 저녁노을을 더욱더 아름답게 수놓는다. 백 척도 넘는 긴 울타리는 세상의 시끄러움 막아주기에 한없이 고요하고, 신맛나는 막걸리 두어 잔이면 항아리에 잠긴 세월의 찌꺼기들까지 깨끗해진다. 아! 여기 이 곳을 두고 별유천지란 말이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주인이 김공(김인후)과는 절친한 사이여서 이따금 찾아오면 왜 이리 더디었느냐며 반갑게 맞아주었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책상 앞에 마주 앉아서 글과 시를 주고받으셨다. 뜰에서 딴 복숭아를 안주삼아 쟁반에 놓인 술잔을 기울이실 때면 걱정, 근심 다 잊으시고 오직 즐거움으로 담소하셨다. 아! 이제 영원히 가셔서 다시 못 오시니 여쭐 말이 없구나.
비록 허술한 울타리 안에 사셔도 항상 즐거움이 샘물 흐르듯 하셨고, 궁색한 밭도랑을 거니시다 넘어져도 오히려 즐거움으로 아셨다. 금이 가서 새는 항아리를 당겨 자작하셨고, 조용한 물가를 거닐 때면 물속의 고기들도 사람을 알아보고 반겼다고 하니 외로움을 모르셨다. 한편 틈만 나면 자식들을 무릎맡에 앉혀 놓고 의리의 중함과 오묘함을 가르치며 세상일에 티끌만한 미련도 두지 않던 어른이셨다.
어느 하나 시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손수 가꾸어 그 넓고 높은 뜻을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하며, 이 동산에 영원히 살아계시니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참된 삶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 아!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인가! 과연 하늘은 무슨 뜻이 있어 이리도 무정하단 말인가! 불에 타는 것은 모조리 불에 타서 가시덩굴로 뒤덮혀 있고, 흙담은 허물어져 쑥대밭이 되었으니 책 읽고 거문고 튕기시던 곳은 온데간데 없구나. 불초자 천운은 재주가 부족하여 집안을 다스릴 재간도 없다. 더구나 사람으로서 반드시 복구해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오늘에까지 이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 깎고 다듬어 일으켜 세울 만한 재목을 구할 길이 막막하여 이 날 저 날 미루다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제 다행히도 재목을 얻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허물어진 곳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 살고 죽는 이치와 무엇이 다르랴!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도 있고, 기울면 찰 때가 있으니 이 좋은 기회를 내 어찌 놓칠손가! 우리 모두 힘을 합해 기둥을 다시 세워 옛 어른이 지은 것만큼은 못할 망정 작은 물통부터 큰 기둥 하나까지 빠짐없이 이룩하세나. 이 모든 것은 친구들의 따뜻한 동정과 염려 덕분이니 고맙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회가 깊다.
이 큰 일을 과연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끝까지 일을 해낼 용기도 있어야 하겠지만 행여나 조상을 욕되게 할 사람이 나타날까 두렵다. 별로 재주는 없으나 내가 감당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스스로 일을 시작하니 책임이 무겁기만 하다. 어랑 어랑 어허야. 부상목(扶桑木)으로 대들보를 올렸으니 먼동이 트면 천심에 밝은 햇빛이 우릴 밝힐 것이며, 길경(吉慶)이 무궁할 것이다.
어랑 어랑 어허야! 대들보의 서쪽은 은하에서 흘러내린 물이 우리집 앞의 석계에 이르렀으니 어떠한 도인이라도 감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어랑 어랑 어허야! 대들보의 남쪽에서 보니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삼선산에서 상서로운 기운 받아오니 앞으로 뻗어나고 어진 인물들이 배출될 것이며 복록 또한 겸할 것이다. 어랑 어랑 어허야! 대들보의 북쪽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우리집을 내리 비추니 세상 사람들이 충효로 우리 선조를 이름하였던 만큼 세세토록 우리 후손들은 두 손 모아 엎드려 나라의 번영을 빌 것이다.
상량한 후 둘러앉은 손님들이 잔에 술을 가득 부어 가문의 영광과 시문, 예의의 유풍을 영세토록 떨어뜨리지 말 것을 신신당부 하였다. 또한 선조 대대로 전해오는 가풍과 명예 및 이 아름다운 동산을 잘 가꾸어 달라며 축배를 들었다.]
상량문에는 양천운의 조부 양산보가 집(제월당), 대봉대, 관덕정, 곁채(광풍각), 애양단을 지었으며, 매화와 단풍나무, 등을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쇄원 안에는 다른 여러 가지 조경수와 함께 작약과 등나무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량문에서 보듯이 양산보와 김인후의 사이는 매우 돈독했다. 양천운은 고암동을 무이구곡, 소쇄원을 무이정사에 비견함으로써 주희를 매우 흠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천운 뿐만 아니라 주희의 무이구곡과 무이정사를 이상향이라고 생각한 16~17세기 조선조 선비들 사이에는 명승지를 찾아 정자 원림을 세우는 풍조가 널리 퍼져나갔다.
양천운과 동시대인 백진남(白振南, 1564∼1618)은 어느 해 봄 소쇄원에 들러 '소쇄원우제(瀟灑園偶題)'를 지었다. 그의 눈을 통해서 소쇄원을 바라보자.
소쇄원우제(瀟灑園偶題) - 소쇄원에서 우연히 짓다(백진남)
平郊十里水雲中(평교십리수운중) 너른 들녘이 십리나 이어진 물구름 한가운데를
步入山橋小路窮(보입산교소로궁) 걸어서 산속 다리로 들어가니 오솔길도 끝나네
巖畔有臺人不見(암반유대인불견) 바윗가에 누대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碧桃花落自春風(벽도화락자춘풍) 벽도나무 꽃잎만 봄바람에 절로 떨어져 날리네
심산유곡으로 들어가니 누대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벽도꽃만 봄바람에 흩날린다. 그야말로 선경이다. 소쇄원을 무릉도원인 양 노래한 시다. 조선시대 빈번한 사화와 옥사,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등을 겪은 사림파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처사나 은일자로 자처하면서 도가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유가적 신선사상을 지닌 처사들은 청한(淸閑)한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이 거처하는 공간을 무릉도원에 비견하곤 했다.
나주 출신 시서거사(市西居士) 김선(金璇, 1568∼1642)은 양천운의 친구였다. 김선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 나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다가 소쇄원에 들러 시 한 수를 남겼다.
영예를 버리고 오랫동안 시골 늙은이가 되어
소쇄원의 정자를 열고 대나무 바람에 기대네
신선의 호리병에 담긴 하늘과 땅을 거두어서
이 정원의 안에다 분명하게 만들어 놓았구나
'신선전(神仙傳)' <호고편(壺公篇)>에 나오는 호리병 속 세상(壺中天)은 별천지, 신선의 세계를 뜻한다. 신선 호공(壺公)이 저자거리에서 약을 팔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비장방(費長房)은 천정에 걸어둔 병 속으로 호공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비범한 인물인 줄 알고 정성껏 그를 모셨다. 하루는 호공이 그를 데리고 병 속의 별천지로 들어갔다. 별천지에는 선궁(仙宮)이 있었고, 해와 달도 있었다고 한다. 소쇄원을 예찬하는 한편 부러워하는 시다. 김선은 또 석보촌(石保村)을 회상하면서 지은 시에서 양원(梁園, 양산보의 소쇄원)과 김정(金亭, 김성원의 식영정)은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였다.
1617년(광해군 8) 10월 18일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 정충신(鄭忠信)은 회답사 겸 쇄환사(回答使兼刷還使) 오윤겸(吳允謙)의 수행군관으로 일본에 가서 조일전쟁 때 끌려간 포로 321명을 데려왔다. 이때 양천경의 가족 4명도 함께 돌아왔다. 포로로 잡혀간 지 실로 20여 년만이었다. 이 사실은 종사관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 기록되어 있다. 양천경의 차남 양몽린은 일본에서 함께 귀환한 유명환의 누이와 결혼했다. 양몽린은 일본에서 와카사카의 다도 시중을 드는 다방주(茶坊主)로 생활했다. 와카사카는 양몽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의 노모와 누이동생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양몽린은 종사관 이경직에게 '만약 이번에 쇄환되지 못하면 자결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양천경의 3남 양몽인은 오사카로 가지 못하고 혼자 이요에 있었다. 양몽린은 귀환한 뒤 신묘옥사 때 후사가 없이 죽은 양천회에게 입양되었다. 양몽인은 귀국 후 양몽기로 개명했다.
1618년(광해군 9) 이이첨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들고 나오자 양천운은 그와 절교를 선언하였다. 양천운은 한때 이이첨과 친구였다. 양천운은 많은 선비들과 교유했는데, 특히 김상헌과의 교분이 두터웠다. 1620년(광해군 12) 전라도 유생들이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원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인조반정 후 계축옥사는 대북파가 전권(專權)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순 강도범 박응서를 이용해서 역모를 조작한 무옥(誣獄)으로 규정되었다.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좌천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고인후의 차남 고부천(高傅川, 1578~1636)은 의병을 이끌고 태인(泰仁)에 이르렀으나, 이괄이 이미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고부천은 북경(北京)에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으로 갔을 때 매화나무, 일명 대명매(大明梅)를 하사받아 와서 창평의 유천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볍씨, 일명 대명도(大明稻)도 함께 받아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1627년(인조 5) 광해군의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폐기한 서인 정권의 무모한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으로 제1차 조청전쟁이 일어났다. 1628년(인조 6) 양천운은 60세가 넘은 나이에 최초의 관직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동몽교관은 한양의 사부학당(四部學堂)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종9품 관직이다.
1629년(인조 7) 양천운의 2남 양몽의가 역병으로 죽었다. 장남 양몽우, 3남 양몽염, 5남 양몽리도 양천운보다 일찍 죽었다. 4남 양몽요만 양천운보다 오래 살아서 소쇄원을 지켰다. 1631년(인조 9) 양몽우의 스승 김장생이 세상을 떠났다. 김장생은 해동 18현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1634년(인조 12) 양천운은 감찰(監察), 사섬시 주부(司贍寺主簿) 등을 지낸 뒤, 체아록(遞兒祿)을 받았다. 체아록을 받은 것으로 보아 이 무렵 고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소쇄원 외원도(김영환 2013)
양천운은 옹정봉에서 소쇄원으로 이어지는 고암동 소택지 장자담(莊子潭) 바로 위 절터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거기서 기거했다. 한천정사는 한천사(寒泉舍), 한천초당(寒泉草堂)이라고도 한다. 양천운은 소쇄원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한천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지기들과도 교유하였다. 장성에 은거했던 변경윤(邊慶胤, 1574~1623)이 양천운에게 보낸 시에서 '화암 바위 위에 집을 짓고 몸을 숨겼다네. 출입문도 숨긴 채 소나무에 기대 멀리 목포를 바라본다네.'라고 읊었다. 변경윤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을 제거한 이산해, 이경전(李慶全) 부자와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를 통렬하게 비판하다가 파직된 뒤 전라도 장성에 은거하였다.
양천운이 당호를 한천정사, 호를 한천(寒泉)이라고 지은 것은 남송 대 철학자 주희의 학문과 철학을 계승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주희는 1169년 9월 모친 축씨(祝氏)가 세상을 떠나자 1170년 정월 복건성(福建省) 건녕부(建寧府) 건양(建陽) 숭태리(崇泰里) 한천오(寒泉塢)에 장사지냈다. 그는 여막을 짓고서 시묘살이를 하던 묘소 옆에 한천정사를 세우고 학자들과 강학하며 저술에 힘썼다. 한천정사에서 주희는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 명도(明道) 정호(程顥), 이천(伊川) 정이(程頤), 횡거(橫渠) 장재(張載) 등의 저서를 돌려보면서 읽은 뒤 이 네 철학자의 저서에서 발췌한 송학(宋學)의 입문서 '근사록(近思錄)'을 지었다. 근사(近思)란 '논어' <자장편(子張篇)>에 나오는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간절하게 묻되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간다면, 인은 그 안에 있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한천(寒泉)'은 '주역' 수풍정괘(水風井卦) 효사(爻辭)에 '九五井冽寒泉食(구오는 우물이 차다. 찬 샘물을 먹게 됨이로다)', '象曰寒泉之食中正也(상에 가로대 찬 샘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가운데 자리에서 바르기 때문이다.)'에도 나오는 말이다. 중정(中正)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곧고 바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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