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6 - 양산보 세상을 떠나다

林 山 2018. 7. 4. 09:51

1550년(명종 5) 양자징의 부인이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에게는 사랑스런 딸이었고, 양산보에게는 며느리였으니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이후 양자징은 두 번째 부인을 얻어 3남3녀를 두었다. 


1552년(명종 7) 양산보는 중종대에 이어 다시 유일로 천거되었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낙향한 기묘사림 중에는 조정에서 부르자 다시 관직에 나아간 선비도 있었다. 하지만, 양산보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은사(隱士)의 길을 선택했다. 아직도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외척의 권세가 판을 치고 있어 도의가 통하지 않은 세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551년(명종 6) 을사사화의 여파로 16세의 정철은 부친 정유침(鄭惟沈)을 따라 조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1555년(명종 10) 경 벼슬길에서 돌아온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산호 상류 창계천 가 언덕에 환벽당을 세웠다. 1557년(명종 12) 3월 8일 62세의 임억령은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제수받으면서 담양과 인연을 맺었다. 


이 무렵 소쇄원을 찾은 임억령은 오언율시 '소쇄정차운증양중명(瀟灑亭次韻贈梁仲明)' 두 수를 지었다. 제월당에 걸려 있는 이 시는 '소쇄정(瀟灑亭)'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시 판액은 임억령의 16대손인 임남형(林南炯)과 임대식(林大植)이 만들어 걸었다. 


제월당에 걸려 있는 임억령의 '소쇄정' 편액


소쇄정차운증양중명(瀟灑亭次韻贈梁仲明) - 소쇄정 차운시를 양중명에게 주다


梁子園亭好(양자원정호) 양군의 동산 정자가 좋기도 하거니

瀟然淨客心(소연정객심) 나그네 시름도 시원히 씻기는 델세

人賢忘巷陋(인현망항누) 사람 어질어서 시골 누추함도 잊고

地古易寒陰(지고역한음) 땅도 오래되어 시원한 그늘이 많네

世事生吳興(세사생오흥) 세상일 하다 보면 고향생각 나거니

鄕情奏越吟(향정주월음) 향수에 젖어 고향 노래도 부르노라

小童催我起(소동최아기) 어린애가 나를 재촉해 일어나 보니

簷際已喧禽(첨제이훤금) 저기 처마에 새들 벌써 시끄럽다야


昔年尋谷口(석년심곡구) 옛날에 이 골짜기를 찾아왔을 때는

落葉擁柴扉(낙엽옹시비) 낙엽이 사립문에 가득 쌓여 있었지

激激水舂急(격격수용급) 물레방아 급히 도는 소리 요란하고

蒼蒼山木圍(창창산목위) 나무들은 온 산을 푸르게 에둘렀네

慰人村釀(위인촌양엄)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은 막걸리라

逃難鬢毛稀(도난빈모희) 난리 피하느라 수염 털도 성글었네

若得閑田地(약득한전지) 만약 한가한 전지를 얻는다고 하면

吾將作少微(오장작소미) 내 장차 소미좌에 정자를 지으리라


양중명(梁仲明)은 양자징이다. '오흥(吳興)'은 '진서(晉書)' <문원전(文苑傳)>에 나오는 오근 사람 장한의 고사에서 생겨난 말인데, 벼슬살이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여기서는 양산보가 벼슬에 있다가 고향으로 내려온 것을 가리킨다. 오흥이라는 지명도 있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북부의 태호(太湖) 남안에 위치한 오흥현은 예로부터 호주(湖州)라 불렸다. 원지(園池)가 많고, 근교에는 변산(弁山)의 명승지로 유명하다. 조맹부(趙孟䫍)의 고향이 오흥이라서 조오흥(趙吳興)이라고도 한다.  


'월음(越吟)'은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 가서 벼슬하여 높이 올라갔는데 한번은 병이 나서 누워 있었다. 초왕(楚王)이 신하를 시켜 '장석이 자기의 고국을 생각하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신하가 가서 보니 장석은 고국을 잊지 못하여 병중에도 월나라의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랬다(史記 卷70 張儀列傳). '소미(少微)'는 태미(太微)의 서쪽에 있는 네 별의 이름이다. 임억령은 실제로 소쇄원(태미좌)의 서북쪽에 식영정(소미좌)을 지었다.


제월당에 내리는 비


제월당에는 고경명의 칠언율시 1수, 임억령의 시에서 운자를 취한 김성원과 정철의 오언율시 각각 2수를 새긴 편액도 걸려 있다. 운자는 심(心), 음(陰), 음(吟), 금(禽)과 비(扉), 위(圍), 희(稀), 미(微)다.


제월당에 걸려 있는 고경명, 김성원, 정철의 시 편액


고경명의 한시


瀟灑先生臥未央(소쇄선생와미앙) 소쇄선생 누운 지 얼마 안됐지만

中宵忽訝訃音忙(중소홀아부음망) 늦은 밤 다급한 부음 의심했는데

龍蛇已覺賢人厄(용사이각현인액) 현인 돌아가실 걸 이미 알고서도

鄕里爭嗟長者亡(향리쟁차장자망) 초상에 향리는 탄식만 할 뿐이라

書史凄凉玄晏架(서사처량현안가) 소쇄공 시렁엔 책만 쓸쓸히 있고

園林蕭瑟鄭公莊(원림소슬정공장) 정공의 원림처럼 참 쓸쓸도 하네

人情最有難堪處(인정최유난감처) 공의 마음에 가장 난감했던 것은

鶴髮慈親病在床(학발자친병재상) 병들어 누운 백발 모친이었을 터


'용사(龍蛇)'는 용사지세(龍蛇之歲), 즉 용의 해와 뱀의 해를 말한다.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정현전(鄭玄傳)>에 '5년 봄에 꿈에서 공자가 나타나 말했다. "일어나라, 일어나. 올해는 용의 해. 내년은 뱀의 해구나." 잠에서 깨어나 따져 보니 들어맞았으므로 자신의 명이 다한 줄을 알았고, 얼마 후 병석에 눕게 되었다. 당시 원소는 조조와 관도(官渡)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 원담(袁譚)을 보내 정현(鄭玄)에게 군대를 따르라고 독촉했다. 정현은 어쩔 수 없이 병든 몸으로 원성현(元城縣)까지 갔지만, 병이 위독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그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4세였다.(五年春, 夢孔子告之曰, 起. 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 旣寤, 以讖合之. 知當命終, 有頃寢疾. 時袁紹與曹操相拒於官渡, 令其子譚遣使逼玄隨軍. 不得已載病到元城縣, 疾篤不進, 其年六月卒, 年七十四歲.)'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에 대해 당나라 고종의 여섯째 아들 이현(李賢)은 '북제(北齊)의 유주(劉晝)는 <고재불우전(高才不遇傳)>에서 정현을 논해 말했다. "진은 용이요, 사는 뱀이다. 해가 용사에 이르러 현인이 탄식하였으니, 정현이 꿈에 본 예언에 들어맞은 것이다."(北齊劉晝高才不遇傳論玄曰, 辰爲龍, 巳爲蛇, 歲至龍蛇. 賢人嗟, 玄以讖合之, 蓋謂此也.)'라고 주를 달았다. 여기서 유래한 '용사지세'는 현인의 수명이 다해 죽은 해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용사지세'는 '세재용사(歲在龍蛇)'라고도 한다. 용사(龍蛇)는 비범한 사람, 현인(賢人)을 비유한 것이다. 이현은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학자들과 '후한서'의 주석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시기로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자살하고 말았다. 암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현안(玄晏)'은 진(晋) 나라 때의 은사인 황보밀(皇甫謐)의 호다. 황보밀은 조정의 소명(召命)이 수없이 내렸으나 한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풍비(風痺)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서음(書淫)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저술하는 삶으로 일관하였다.(晉書 卷51)


'정공(鄭公)'은 중국 후한 말기의 학자 정현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강성(康成)이고, 북해국 고밀현(高密縣)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금고문(今古文)의 경학 외에 천문역수(天文曆數)에 걸쳐 엄청난 지식욕을 갖고 낙양의 태학(太學)에 진학하였다. 그가 당대 최고의 학자 마융(馬融)을 사사(師事)한 뒤 귀향할 때 스승으로부터 '나의 학문은 정현과 함께 동으로 갔다'고 탄식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유학(遊學) 십여 년에 향리의 학생을 교수하였다. 이후 '당고의 화(黨錮之禍)'로 학문이 금고(禁錮)됨에 문을 닫고, 집에서 연구와 저작에 몰두하였다. 14년 후 해금되면서 하진(何進), 공융(孔融), 동탁(董卓), 원소(袁紹) 등으로부터 초청받았다. 만년에 초청에 응해 대사농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떠나 연구와 교육에 매진했다. 건안 5년(200년) 관도에서 조조와 대치하고 있던 원소는 정현을 군영으로 초빙했다. 정현은 원담과 함께 원소에게 가던 중 병으로 죽었다.


김성원의 한시


田園已成趣(전원이성취) 일찌기 전원에 취미를 두었으니

榮落肯關心(영락긍관심) 영고성쇠 어찌 관심이나 있을까

偃息琴書榻(언식금서탑) 걸상에서 금서를 편안히 즐기고

逍遙松竹陰(소요송죽음) 소나무와 대 그늘에서 노닐다가

迎風時獨嘯(영풍시독소) 바람을 맞으면서 휘파람도 불고

得句自長吟(득구자장음) 싯구를 얻으면 길게 흥얼거리니

盡日無機事(진일무기사) 하루종일 신경쓸 일이라곤 없어

憑欄散暮禽(빙란산모금) 저물녘 난간에서 새들만 쫒누나


咫尺藏眞境(지척장진경) 감춰진 진경이 가까이에 있으니

仙凡隔竹扉(선범격죽비) 선계와 속계가 대삽짝 너머로세

飛流寒碎玉(비류한쇄옥) 옥가루처럼 차갑게 날리는 물에

佳樹翠成圍(가수취성위) 아름답고 푸른 나무들 에워쌌네

少日游蹤數(소일유종수) 어렸을 때는 자주 놀러갔었는데

衰年見面稀(쇠년견면희) 늙어서는 만남도 드물었네 그려

相思不能去(상사불능거) 그대가 그리워 떠나지 못하다가

回首雨霏微(회수우비미) 고개 돌리니 안개비 날리더이다


정철의 한시


林壑隱雲表(임학은운표) 수풀 골짜기 구름 너머에 숨으면

生君道者心(생군도자심) 선생 도 닦을 마음도 들었겠구려

風松送冷籟(풍송송냉뢰) 솔바람은 서늘한 소리 전해 오고

月竹散淸陰(월죽산청음) 달빛에 서늘한 대 그늘 흩어지니

爰以深淺酒(원이심천주) 술잔 가득 채워지든 덜 채워지든

遂成長短吟(수성장단음) 마침내 길게 읊고 짧게도 읊는데

山人豈無友(산인기무우) 산에 산다고 어찌 친구 없을손가

時下兩三禽(시하양삼금) 때로 새 두세 마리도 내려앉는네


耿介高蹤客(경개고종객) 강직하고 행실도 고상한 저 선비

山中獨掩扉(산중독엄비) 홀로 산중에서 대문 닫고 살았지

水因靑嶂合(수인청장합) 물은 푸른 산봉우리 돌아 모이고

籬以紫藤圍(리이자등위) 울타리엔 보랏빛 등꽃 빙 둘렀네

非是隱淪志(비시은륜지) 숨어 살려고 한 뜻은 아니었지만

自然車馬稀(자연거마희) 저절로 만나러 오는 사람 드물어

此間有眞樂(차간유진락) 이 사이에 진실로 즐거움 있으니

幽事未全微(유사미전미) 산중 그윽한 일도 적지 않았으리


소쇄원에는 임억령을 비롯해서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 식영정 4선의 한시 편액이 모두 걸려 있다. 식영정과 소쇄원의 거리가 가까웠던 만큼 식영정 4선과 소쇄원의 주인이 매우 친밀하게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56년(명종 11) 음력 8월 가사 '관서별곡(關西別曲)'의 작자이자 백광훈의 형 백광홍(白光弘)이 세상을 떠났다. '관서별곡'은 그가 평안도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고, 관서지방을 향해 출발할 때부터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여정을 운치 있게 그려낸 기행가사(紀行歌辭)다.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가 된 '관서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보다 25년이나 앞선 것으로 국문학사상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1557년 3월 20일 양산보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경명이 양산보에 대해 '十年淹臥病悠然一夕去'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양산보는 10여 년 동안 거의 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 같다. 양산보는 임종시에 자제들에게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다. 유독 늙으신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너희는 나의 뜻을 잘 체득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양산보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김인후였다. 절친했던 지기이자 사돈을 잃은 김인후의 슬픔은 '소쇄원주인만(瀟灑園主人挽)'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그대는 며느리(김인후의 딸이자 양자징의 부인)도 만나볼 것이 아닌가? 만나거든 안부나 전해 주시게'라고 울먹이면서 말하자 장례식장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소쇄원주인만(瀟灑園主人挽) - 소쇄원 주인을 위한 만시(김인후)


幾歲相思苦(기세상사고) 그립고 애타는 마음 몇 해이런가

悠悠瀟灑園(유유소쇄원) 오랜 세월 소쇄원에서 정 나눴지

斯人今已矣(사인금이의) 그대는 지금 저승 사람 되었으니

病我復何言(병아부하언) 병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白髮明垂領(백발명수령) 백발은 온통 목까지 내려와 있고

靑山黯斷魂(청산암단혼) 청산은 가물거려 넋을 끊어 놓네

空餘五曲水(공여오곡수) 헛되이 오곡의 물만 남아 있으니

臥想泝眞源(와상소진원) 누워 진원 찾아 거슬러 오를까나


송순은 '외제소쇄처사만(外弟瀟灑處士挽)'을 지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양산보의 죽음을 애도했다. 양응정(楊應鼎)은 '만종형소쇄처사산보(輓宗兄瀟灑處士山甫)', 기대승은 '만모인(挽人)'을 지어 양산보의 죽음을 슬퍼했다. 기대승은 부친 기진의 시묘살이를 막 끝내고 돌아와 있던 차였다. 


 외제소쇄처사만(外弟瀟灑處士挽)-외제 소쇄처사를 애도하다(송순)


珍重林泉鎖舊雲(진중임천쇄구운) 귀하고 소중했던 곳 옛구름에 잠기고

路迷何處覓徵君(로미하처멱징군) 길도 잃었으니 어디서 자넬 찾을까나

謝家庭畔蘭方郁(사가정반란방욱) 사가의 뜨락에는 난초 한창 무성하고

曾氏堂前日欲曛(증씨당전일욕훈) 증씨의 집앞은 해 지려 어둑어둑하네

穿石巖溪空自咽(천석암계공자인) 바위구멍 물소리는 괜히 홀로 목메고

引墻花木爲誰芬(인장화목위수분) 담장곁 꽃나무 누굴 위해 향기로운가

故園永與新阡隔(고원영여신천격) 옛정원은 새길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老樹啼禽不忍聞(노수제금불인문) 고목에서 우는 새소리 차마 못듣겠네


고종사촌동생 양산보를 잃은 슬픔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다. 재주도 뛰어났고 효성도 지극했던 양산보가 죽고 없으니 얼마나 슬펐을까! 마음이 아파 두견새 우는 소리조차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에는 '丁巳冬(정사년 겨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사가(謝家)'는 남송의 시인 사영운(謝靈運), '증씨(曾氏)'는 효도를 지극히 중시한 현인 증자(曾子)를 가리킨다. 


제월당에 걸려 있는 송순, 양응정, 기대승의 만시 편액


만종형소쇄처사산보(輓宗兄瀟灑處士山甫)-종형 소쇄처사 산보를 애도하다(양응정)


天人湧出海中山(천인용출해중산) 바다 가운데 산에서 신선이 태어났으니

符彩雲孫尙被斑(부채운손상피반) 아롱진 옷에다 풍채도 좋은 후손들까지

誠篤白華傾慕悅(성독백화경모열) 돈독한 효심으로 사모의 정을 기울였고

識高前輩斷追攀(식고전배단추반) 높은 학식은 선배들도 따라잡지 못했네

遺賢藪澤民何福(유현수택민하복) 현자의 덕화 백성에겐 얼마나 복될까만

値歲龍蛇壽亦慳(치세용사수역간) 정사년을 만나서 수명 또한 짧았으리라

漠漠九原應結痛(막막구원응결통) 아득한 구천에서도 응당 통곡할 것이니

北風萱草日摧顔(북풍훤초일최안) 삭풍에 원추리풀도 나날이 고개 꺾이네


'운손(雲孫)'은 구름과 같이 멀어진 자손이라는 뜻으로, 잉손(仍孫, 7대손)의 아들인 팔대손(八代孫)을 이르는 말이다. '구원(九原)'은 저승이다. 


만모인(挽)-아무개를 애도하다(기대승)


 瀟灑園林僻(소쇄원림벽) 소쇄원 원림은 외지고 한적한데 

淸眞志槪悠(정진지개유) 순결한 의지와 기개는 오래였네

裁花開煖蘂(재화개난예) 화초를 심으니 따뜻하면 꽃피고

引水激淸流(인수격청류) 물 끌어오니 맑디맑게 솟구쳤네

靜與貪非厭(정여탐비염) 고요하게 즐김을 싫어 아니하고

閒仍老不憂(한잉노불우) 한가로이 늙음 걱정하지 않았네

那知遽觀化(나지거관화) 어찌 알았으랴 갑자기 떠났으니

怊悵白雲浮(초창백운부) 슬프도다 흰구름만 떠돌고 있네


自覺耽幽趣(자각탐유취) 스스로 그윽한 정취 즐김을 알아

參尋不待招(참심부대초)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찾곤 했네

安排藏異境(안배장이경) 운명에 맡긴 채 별경에 숨었으나

落拓偃淸標(낙척언청표) 실의에 빠져 맑은 품격 숙여졌네

一醉還成夢(일취환성몽) 한번 취했으나 외려 꿈 이뤘으니

重遊更作料(중유갱작료) 다시 노니리라 거듭 마음 먹었네

愁聞移夜壑(수문이야학) 야학에 옮긴 것을 시름겨이 듣고

衰涕灑寒宵(쇠체쇄한소) 차가운 밤에 슬픈 눈물 뿌리노라


蚤歲醇儒業(조세순유업) 초년에는 진정 학자의 업이더니

中年居士身(중년거사신) 나이 들어서는 거사의 몸이었네

功名虛竹帛(공명허죽백) 공명은 사기에 오르지 못했지만

德義滿鄕隣(덕의만향린) 덕성과 신의는 향리에 가득했네

一笑藏舟失(일소장주실) 한번 웃으매 은덕을 잃어버리고

千秋□樹新 (천추口수신) 천추에 口口口口 나무가 새롭네

傷心耆舊傳(상심기구전) 마음 아파라 원로들의 기구전에

那復有斯人(나부유사인) 또다시 이러한 사람이 있으리요


'야학(夜壑)', '장주(藏舟)'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산골짜기에 배를 간직하고, 연못 속에 산을 간직하고서 단단히 간직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밤중에 힘이 센 자가 그것을 등에 지고 도망치면 잠자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 負之而走 昧者不知也.)'에 나오는 말이다. '장주(藏舟)'는 덕을 감추고 겸손하게 처세함을 말한다. 곧 은덕(隱德)이다. '기구전(耆舊傳)'은 진(晉)나라 습착치(習鑿齒)가 지은 '양양기구전(襄陽耆舊傳)'을 말한다. 양양(襄陽)에 살았던 방덕공(龐德公)을 비롯한 여러 고사(高士)의 전기를 모은 책이다.  


海嶽鍾英氣(해악종영기) 바다와 산은 뛰어난 기상 모으고

乾坤相逸民(건곤상일민) 하늘 땅은 서로 은일자 도우셨네

三餘多積學(삼여다적학) 한가한 때는 학문을 많이 쌓았고

一壑又藏春(일학우장춘) 한 골짜기엔 또 봄을 간직했었네

意遠追先輩(의원추선배) 뜻은 크고도 멀어 선배를 따르고

言深啓後人(언심계후인) 말은 깊어 뒷사람 일깨워 주었네

凄凉留玉舃(처량류옥석) 슬프게도 옥으로 된 신 남겼으니

空復仰芳塵(공부앙방진) 그저 향그런 님 자취만 우러르네


'삼여(三餘)'는 책을 읽거나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세 가지 여가(餘暇), 즉 해의 나머지(歲之餘)인 겨울, 날의 나머지(日之餘)인 밤, 때의 나머지(時之餘)인 음우(陰雨)를 말한다.   


地下修文去(지하수문거) 저승으로 글 공부 하러 떠나가니

人間舞綵違(인간무채위) 인간 세상의 효와 도리 어겼구려

存亡情不極(존망정불극) 삶과 죽음의 정은 다함이 없는데

幽顯路猶依(유현로유의) 이승과 저승 길이 아득도 하구나

寥落林塘是(요락임당시) 쓸쓸한 임당은 아직 변함 없는데

凄凉杖屨非(처량장구비) 처량한 장구는 옛 모습이 아니네

炙鷄乖遠造(적계괴원조) 구운 닭으로는 멀리 조문 못하니

東望淚霑衣(동망루점의) 동쪽을 보매 눈물이 옷깃 적시네


'무채(舞綵)'는 춘추시대 초나라은 은사인 노래자(老萊子)가 7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재롱을 부린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장구(杖屨)'는 지팡이와 짚신이다. 이름난 사람이 머물러 있던 자취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적계(炙鷄)'는 구운 닭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일컬어졌다. 서치는 먼 곳으로 문상(問喪)하러 갈 때 솜을 술에 적셔 햇볕에 말린 다음 그것으로 구운 닭을 싸서 휴대하기 간편하도록 만들어 가지고 갔다. 빈소에서는 솜을 물에 적셔 술을 만들고, 구운 닭을 젯상에 올린 뒤 떠났다.(後漢書 卷35 徐穉列傳)


제월당의 편액에는 '만모인(挽某人)' 중 제4, 5수가 걸려 있다. 양산보라는 이름을 적지 않고, '모인(人)'이라고 쓴 것은 세상에 드러나기를 싫어했던 고인의 뜻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자연에 숨어 은자의 삶을 살다 간 양산보에게 이름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었을까? 기대승은 그런 양산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임억령, 유사(柳泗) 등도 만장(輓章)을 지어 양산보의 죽음을 애도했다. 김윤제와 김성원, 정철도 장례식에 참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산보는 무등산 원효봉(元曉峰) 아래 이현(梨峴) 선영에 묻혔다. 


양산보는 평생 성리학을 연구했다고 전해지지만 학문적인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도 유명해서 '효부(孝賦)'와 가사 '애일가(愛日歌)'를 남겼다. '효부'를 본 송순은 '이치를 깊이 알고 몸소 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효부(孝賦)


莫愛者身身是誰由(막애자신신시수유) 가장 소중한 몸은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千金面目成起何藉(천금면목성기하자) 천금 같은 얼굴과 눈은 어디서 이루어졌는가

於惟父母實誕生我(어유부모실탄생아) 아아 부모님께서 진실로 나를 낳아 주셨으니

勞罔極憐愛罔極(노망극련애망극) 수고로움도 끝이 없고 아낌과 사랑도 끝이 없어라


'애일가'는 '해 가운데 있는 까마귀야, 가지 말고 내 말을 들어라. 너는 곧 짐승이더라도 새 가운데 증삼(曾參)이니라. 부모님께서 북당에 계시니, 하늘 가운데 오래도록 있어다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양산보는 '애일가'를 집안의 경삿날에 자제들에게 부르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가사를 '효자곡(孝子曲)'이라고 불렀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효로써 이름이 높았는데, 이는 양산보가 '소학'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 연원은 '소학'을 중시한 양산보의 스승 조광조,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칭하면서 '소학'의 규범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 무렵 백광훈은 '소쇄원(瀟灑園)'이란 시를 지었다. 겉으로 보기엔 소쇄원 주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며, 또 소쇄원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쓴 시도 아니라고 보여진다. 


소쇄원(瀟灑園) - 백광훈 


新春一醉爲園翁(신춘일취위원옹) 새봄이 되어 소쇄옹 덕분에 한껏 취했네

散髮松林滿面風(산발송림만면풍) 솔바람 가득 불어와 머리카락 흩날릴 때

吟夢欲成僧已去(음몽욕성승이거) 고통은 치미는데 스님 이미 자리를 떴고

白雲明月水聲中(백운명월수성중) 흰구름도 밝은 달도 물소리 속에 있구나


이 시를 '새봄이라 한 껏 취했네. 이는 소쇄원 주인의 덕이라네. 머리는 숲의 소나무처럼 봉두난발이네. 소쇄원이 내게 비웃는 것인지 기뻐서 웃는 것인지 모르나 한껏 웃음을 날린다네. 고통이 치밀어 잠들 수가 없네. 무욕과 살인하지 말라 외치는 스님은 이미 소쇄원을 버렸다네. 밝은 달은 흰구름에 가렸네. 권력을 나눠갖겠다고 소쇄원이 물소리처럼 시끄럽네.'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백광훈은 조광조가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실시한 현량과, 조광조의 수제자 양산보의 현량과 낙방의 실상, 나아가 호남 사림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吟夢(음몽)'은 고통스러운 신음이다. 백광훈은 왜 고통 속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일까? 백광홍은 백광훈의 친형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런 백광홍이 1556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도중 전라북도 부안에서 3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기 때문이다. 그 7개월 뒤 봄에 양산보도 죽었다. 이 시는 양산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쓴 것이 틀림없다. 


백광훈은 14년 연상의 양자징과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절친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백광훈이 자신을 찾아온 방문한 양자징을 떠나보내며 쓴 '증양중명(贈梁仲明)'이란 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증양중명(贈梁仲明) - 양중명께(백광훈)

                    

一去憐君千里人(일거련군천리인) 이제는 멀리 가버린 그대가 참으로 애닯네요

雪中相送到湖濱(설중상송도호빈) 눈 맞으며 떠났으니 호숫가 집에 도착했겠죠

寒梅最是多情樹(한매최시다정수) 겨울에 피는 매화야말로 진정한 우정의 상징

莫遣歸時不及春(막견귀시불급춘) 봄이 아직 오지 않는다고 한탄하지는 마시길


중명(仲明)은 양자징의 자다. 백광훈은 해남, 양자징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月溪)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눈 내리는 날 백광훈이 해남에서 양자징을 송별하고 나서 지금쯤 월계의 호숫가 그의 집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쓴 시다. 


1560년(명종 15) 양자징의 장남 양천경(梁千頃, 1560~1591)이 태어났다. 그해 고향 장성에서 은거하던 양산보의 사돈이자 양자징의 장인 김인후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은 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했다. 1562년(명종 17)에는 전라도 관찰사 윤인서(尹仁恕)가 소쇄원을 찾아와 시를 남겼다. 1563년(명종 18) 김성원은 서하당 바로 곁 언덕 위에 장인 임억령을 위한 식영정을 지었다. 식영정이 세워지자 임억령은 서하당을 사위 김성원에게 물려주었다.  


송순은 오언사운시(五言四韻詩) '차김상사성원식영정운(次金上舍成遠息影亭韻)'의 말미에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천 안의 세 명승'이라고 극찬했다. '동(洞)'은 동천(洞天)인데,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를 상징한다. 선계 같은 증암천(甑巖川, 자미탄) 계곡 중에서도 산수가 빼어난 명승지 세 곳의 정자원림(亭子園林)을 가리켜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고 한 것이다. 


정지유는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에서 '소쇄원은 경치의 아름다움과 계곡과 바위의 기이함이 곧 남쪽 고을 제일 명승지라 한다.'고 썼다. 이 글에는 또 '막내동생의 둘째 아들인 언방과 소쇄 양처사의 아들인 고암 자징이 모두 상사 김송명의 위 아래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경명은 친구 양자정에게 준 시에서 소쇄원을 지석명원(支石名園)으로 표현하였다. 


1563년(명종 18) 이량(李樑)의 당(黨) 사건이 일어났다. 이량의 당은 정유길(鄭惟吉), 고맹영(高孟英), 이령(李翎), 김백균(金百鈞) 등이었다. 고맹영은 바로 고경명의 아버지, 김백균은 고경명의 장인이었다. 김성원의 고모와 결혼한 김백균은 김인후와 10촌 간이었다. 고경명의 조부 고운(高雲, 1495~?)은 조광조와의 친분 때문에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파직된 기묘사림이었다. 양산보와 고운은 정치적 동지였다.


이량은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숙으로, 권세를 믿고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沈通源)과 더불어 3흉(凶)이라 불렀다. 이량이 이조 판서가 되면서 더욱 세도를 부리자 기대승을 비롯한 사림은 그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이량의 당은 정치공작으로 기대승, 박소립(朴素立), 허엽(許曄),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산해(李山海) 등 사림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량의 정치공작은 조카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고,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으로 심복들과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이량은 결국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고, 고맹영도 유배를 당했다.


고경명도 이량의 당 사건으로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바로 파직되어 광주 양과동(良瓜洞)으로 낙향했다. 고경명은 양과동을 떠나 창평의 지석동 소쇄원과 가까운 곳에 별서 은행정(銀杏亭)을 짓고 거주지를 옮겼다. 그가 거주지를 옮긴 것은 이량의 당 사건으로 인해 양과동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은 창평에서 임억령, 양자징과 양자정 형제, 김성원, 정철 등과 교유하면서 지냈다. 양자정은 김성원, 고경명과 함께 담양군 남면 정곡리에 있던 서봉사(瑞峯寺)에 자주 들렀다. 16세기에는 선비들이 사찰에서 공부를 하거나 모임을 갖는 일이 잦았다. 식영정 4선이라는 칭호는 이 무렵에 생겼을 것이다.  


고경명과 양자징은 자주 소쇄원 걸상바위에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고경명은 10살 위인 양자징보다 5살 위인 양자정과 더 친했다. 고경명은 양자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로 사귄지 반평생이 되었는데, 그동안 많은 교유를 하면서 세상을 바꿔보려고도 하였고, 못할 말 없이 다 하면서 술잔 잡고 온갖 걱정도 있었다.'고 썼다. 양자정이 어린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자 고경명은 그를 극진히 위로하기도 했다. 양자징도 양산보처럼 지병으로 고생하였는데, 고경명은 늘 이를 걱정하였다.   


1565년(명종 20) 양자징의 2남 양천회(梁千會, 1565~1591)가 태어났다. 1568년(선조1) 양자징의 3남 영주(瀛洲) 양천운(梁千運, 1568∼1637)이 태어났다. 양천운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씩씩했고, 우애와 효성이 지극했으며, 말수와 웃음도 적었다. 그의 선친 양산보가 '소학'과 '삼강록(三綱錄)'을 가르친 결과였다. 성혼은 이황, 이이와 함께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과 양산보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다. 그런 인연으로 양천운은 천경, 천회 두 형에 이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해 3월 9일 양산보의 4종매부 임억령이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명봉산 문암재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이 별세하자 제자인 고경명은 장편의 만시(輓詩)를 지어 스승을 애도했다. 1569년(선조 2) 양자징이 향시에서 말석을 차지하자 고경명은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1570년(선조 3) 양자징은 전라도 관찰사 정종영(鄭宗榮)의 천거로 이성계의 계성 저택인 목천청을 관리하는 참봉이 되었다. 양자징은 고경명의 축시와 김성원의 축하를 받았다. 양자징이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양자정은 소쇄원을 맡아서 경영했다. 이 무렵 양자징은 제월당 담장 너머 서쪽 바로 옆에 고암정사를 지었다. 송순과 김인후는 소쇄원의 2대 주인 양자징과 양자정 형제의 효성과 우애를 극찬했고, 고경명은 두 형제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노래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양천경과 양자홍의 2남 양천심은 고경명의 제자가 되었다. 양천운의 매부 오급, 서호갑의 형 서용갑도 고경명의 제자였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수남학구당


같은 해 10월 10일 유교 기풍을 진작시키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양자징과 환학당(喚鶴堂) 조여심(曺汝諶, 1515~1582)을 중심으로 창평의 25개 성씨가 힘을 합쳐 향적사라는 옛 절터에 수남학구당(水南學求堂, 창평학구당)을 건립하였다. 양자징은 동생 자정과 함께 수남학구당 건립 초기부터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후 200년 동안 수남학구당은 당안(檔案)에 오른 사람 750명,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시) 합격자 54명, 대과(大科, 문과) 합격자 16명을 배출하였다.         


1572년(선조 5) 정월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가 세상을 떠나 무등산 기슭에 묻혔다. 정철은 '제벽간당(題碧澗堂)'이란 시를 지어 대스승이자 처외조부 김윤제를 추모했다. 김성원도 정철의 '제벽간당'에서 차운한 '차제벽간당운(次題碧澗堂韻)'을 지어 스승이자 당숙의 죽음을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