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8 - 박세채 양산보의 묘갈명을 쓰다

林 山 2018. 7. 6. 15:42

1636년(인조 14) 제2차 조청전쟁이 일어나자 양천운은 옥과현감 이흥발(李興浡), 대동찰방 이기발(李起浡), 순창현감 최온(崔薀), 전 한림 양만용(梁曼容), 전 찰방 유즙(柳楫)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러 나갔으나 강화가 이미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양천운은 제1, 2차 조일전쟁, 제1, 2차 조청전쟁을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1637년(인조 15) 소쇄원의 3대 주인 양천운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양천운은 짧은 한양 생활을 제외하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소쇄원을 지키면서 보냈다. 양천운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두 번째 부인 창원 정씨에게서 얻은 세째 아들 양몽요가 소쇄원의 4대 주인이 되었다. 양몽요는 노형진의 딸과 결혼하여 양진수(梁晋秀)를 얻었다. 1649년(인조 27)에는 양몽요의 차남 인재(忍齋) 양진태(梁晋泰, 1649~1714), 그 이듬해에는 3남 양진섭(1650~1711)이 태어났다. 양몽요가 죽은 다음에는 양진수가 소쇄원의 5대 주인이 되었다. 양진수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662년(현종 2)에는 양진수의 아들 양경지가 태어났다. 양진태의 아들은 양채지(梁采之), 양진섭의 아들은 양택지다. 양택지는 양진수에 이어 소쇄원의 6대 주인이 되었다. 양택지는 송시열,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 1633~1688),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못했다. 양경지는 아버지가 연로하고 집이 가난하여 멀리 한양까지 가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안되어 중부 양진태 밑에서 수학했고, 후에는 송시열의 문하에 출입했다.


소쇄원 48영도(김영환 2013) 


1672년(현종 13) 양진태는 선대 원림의 훌륭한 모습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소쇄원을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소쇄원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쇄원에서는 여러 차례 시회(詩會)가 열려 소쇄원가단이 활성화되었다. 양진태는 제명록(題名錄)을 만들어 원림에 비치하고 이름과 시문을 기록했다. 제명록은 1976년 이후 분실되고 말았다. 양진태는 고조부 양산보가 지은 '애일가'를 번역해서 집안 사람들이 읽도록 하기도 했다. 


1674년(현종 15, 숙종 즉위년)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서인당(西人黨)이 패해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쫓겨나자, 그의 동생 김수항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김수항은 허적(許積), 윤휴(尹鑴) 등을 배척하고, 추문에 연루된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 남인당(南人黨)의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되었다. 김수항의 3남 김창흡은 문안차 부친의 유배지 영암으로 가던 도중 능주목사 조정이(趙定而)와 함께 소쇄원에 들렀다. 그의 소쇄원 방문기가 '남유일기( 南遊日記)'에 남아 있다. 


[往訪瀟灑園 小澗琤琤 屈曲作數丈卧瀑 上有槽潭 夾以茂竹老梅 對瀑作草堂 主人梁君笑謂所以亟成此屋 將以奉公云 盖雖肯搆爲主 而亦可見愛客風流也 余約以數月之留 與環碧分日焉 溪上古墻 河西題留四十絶 年久未免壞汚 而依俙見筆蹟者爲多 夕還鄭友家


소쇄원을 찾아가서 보니 작은 계곡에는 물이 돌돌돌 흐르고, 여러 길의 와폭이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그 위에는 조담이 있었다. 조담을 끼고 대숲이 울창하고 오래 묵은 매화나무가 있으며, 폭포를 바라보는 곳에 초당을 지어 놓았다. 주인 양군이 웃으면서 '이 집을 급히 지은 것은 장차 공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했다. 주인의 말을 다 곧이듣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손님과 풍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여러 달 머물면서 환벽당에도 들를 것을 약속했다. 계류 위 옛 담장에 걸려 있는 하서 선생(김인후)의 제영시 40여 수는 오래되어 무너지고 더러워져서 필적이 희미한 것이 많았다. 저녁에 벗 정씨네 집으로 돌아왔다.]         


1677년(숙종 3) 무렵 양경지는 대봉대 남쪽 모퉁이에 진달래를 심었다. 이후 진달래는 해마다 꽃을 피웠다. 1678년(숙종 4) 이민서는 양진태의 부탁을 받고 양산보의 행장을 지었다. 1681년(숙종 7) 11월 4일 박세채는 양산보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다음은 박세채가 쓴 양산보의 묘갈명 전문이다.


[自靜菴趙文正公酷罹北門之禍。其門人高弟遠跡潛德。久而後大著者。惟處士梁公及河西金文靖公。遭時不祥。引退林泉。其同志並明。可以伯仲稱者。亦惟梁公。公諱山甫字彥鎭。耽羅人也。檀君時有三神人降于漢挐山。其長始姓良氏。改以梁。實公之先云。後有諱洵峻者。皆渡海來仕羅麗之際。爲一時名人。至諱思渭。入我朝殿直司書。大王父諱潑不仕。王父諱允信副司直。父諱泗源號蒼巖。有隱德。朝廷以薦授主簿不就。始居于昌平縣。妣新平宋氏。公幼性聰穎。器宇端重。自知讀書。曉於大義。蒼巖公奇愛之。旣長入漢師。聞文正公以正學訓後進。請于蒼巖公遂委己焉。文正公卽以小學書授之曰。苟志於學。宜從此始也。公服膺不少解。文正公亟稱之。及游太學。周旋得宜。諸生輒加歎異。正德己卯。中廟以夙興夜寐箴親試儒士。公年十有七歲。乃中第。會臺官以濫數請削。上惜之。召見慰諭。賜以物。未幾禍作。文正公爲之首。公痛憤。卽日南歸。所居雅有水石之勝。築室其間。名曰瀟洒園。自號瀟洒翁。遂隱居行義以終身焉。其學以洒掃爲修身之本。格致爲收心之資。存養玩索。交致其功。蓋所得於文正公者然也。平生用力。專在於大學中庸。潛心誦習。久而益好之。馴及諸經。尤邃於易。一以程朱傳義。參互折衷。左右圖書。超然獨詣。値有意會處。往往高詠。聲若出於金石間。與文靖公相從講劘。殆忘寢食焉。惟不事著述曰君子之學。自有本末。本旣不能務。何可他爲。篤於事親。色愉氣和。定省滫瀡。率禮無違。迨居蒼巖公憂。廬于墓側。哀慕踰節。杖而後起。會有樵火延及先山。公號天奔救。天忽降雨。人謂之孝感。幼被育寡姑。歿而服期。又爲心喪以報之。嘗作孝賦。備陳彝倫親愛之道。讀者感動。內兄宋公純見之曰。非深知此理而躬行者。不能也。平居接物。未嘗示異於人。然其自持不苟。恬靜簡約。高潔嚴整。服食言動。動合節度。充養旣久。望之儼然。可知爲有德君子也。其見諸行事者。敎諸子必以義方。處昆弟之間。友愛篤至。待宗黨尤加敦睦。以及朋游鄕黨。無不孚信和悅。見人貧不能昏葬者。輒傾財救恤。以此遠近歆服。聞風興起者亦多。中廟末歲。敎中外咸擧遺逸。縣監李公洙素敬公。欲遂以應命。公乃力辭不果焉。明宗壬子。復登薦目。然公終無起意。嘉靖丁巳三月二十日。疾終于正寢。壽五十有五。臨歿謂其子曰死生常理。獨以不克終養老母爲恨爾。其善體吾意也。因泣下嗚咽。訃聞。士林莫不傷之。從葬梨峴先兆某向之原。初公在文正公門。成聽松守琛昆弟適同學。一見如舊曰。公眞畏友也。文靖公常以兄禮事之。每稱公爲精思妙契之學。發諸詠歎贊美者甚多。至其及門之士。如奇存齋大升曰瀟洒翁外和而內嚴。望之不覺屈膝。高招討敬命曰公爲人奇偉。性且孝友。見者咸稱以正士也。鄭寅城澈曰與瀟洒翁相對。使人襟懷爽然若失矣。其爲後輩慕仰又如此。公娵光山金氏。正郞珝之女。甚有婦德。先公卒。有子男三人女一人。長曰子洪早夭。次曰子澂亦以學行薦。官至縣監。次曰子渟訓導。女適盧秀蘭。內外諸孫多不能記。銘曰。


天相吾道。以牖大東。孰爲其宗。曰惟靜翁。矧爾出處。君子所希。卓卓河西。克彰厥微。公際其盛。或尊或取。縱云美質。非斯焉有。始旣發軔。逢時之屯。終焉允藏。于彼東園。存心致知。寔爲家計。一室圖書。俯仰妙契。惟孝友于。秉彝是循。非直躬行。亦有敷陳。世變反復。超然無累。鄕閭歆德。章甫增思。譬諸山澤。珠明玉蘊。光不可掩。瑞不可隱。鬱鬱梨峴。有松有檟。肆顯詩之。永示來者。


處士瀟洒翁梁公墓碣銘 辛酉十一月四日


정암 조 문정공(조광조)이 혹독하게 북문(北門)의 화(禍, 기묘사화)를 당하면서부터 그의 문인과 제자들이 멀리 자취를 감추고 덕을 숨겼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크게 드러난 분으로는 처사 양공(양산보)과 하서 김 문정공(김인후)인데, 두 분이 상서롭지 못한 시대를 만나 은거지로 물러났으며, 그 동지들의 백중(伯仲)으로 일컬을 수 있다고 하는 분도 역시 양공이다. 


양공의 휘는 산보이고, 자는 언진이며, 본관은 제주이다. 단군 때에 세 명의 신인이 한라산에 내려왔는데, 그중 맏아들이 처음으로 성을 양씨(良氏)로 하였다가 양(梁)으로 고쳤으며 이 분이 실제로 공의 선조라고 한다. 뒤에 휘 순(洵)과 준(峻)이란 분이 있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와 신라 말기와 고려 때에 벼슬하여 한 시대의 명망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휘 사위(思渭)에 이르러서는 조선조에 들어와 추천으로 교도(敎導)가 되었다. 증조부 휘 발(潑)은 벼슬하지 않았고, 조부 휘 윤신은 부사직이며, 아버지 휘 사원은 호가 창암인데 숨겨진 덕이 있어 조정에서 추천으로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처음으로 창평현 창암촌에 살았다. 어머니는 신평 송씨이다.


공이 어려서 천성이 총명하고 기우(器宇)가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며, 스스로 책을 읽을 줄 알아 대의를 깨달았으므로, 창암공이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한양에 들어가 조 문정공이 올바른 학문으로 후진을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창암공에게 청원하여 마침내 자신을 맡기자 조 문정공이 곧바로 '소학'의 글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것을 따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공이 잘 지키며 잊지 않고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조 문정공이 매우 칭찬하였다. 그러다가 성균관에 유학하게 되자 주선(周旋)하기를 적합하게 하였으므로 유생들이 번번이 감탄하며 특이하다고 하였다.


정덕(正德)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중종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으로 친히 유사(儒士)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나이 17세로 합격하였으나 마침 대관(臺官)이 지나친 은혜라고 하여 삭제하도록 주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애석하게 여기고 불러다가 위로하며 물품을 하사하였다. 얼마 안되어 기묘 사화가 일어나 조 문정공이 주모자가 되었으므로 공이 통분해 하며 그날로 남쪽으로 돌아왔다. 살고 있는 곳이 우아하게 산수의 경치가 좋았으므로, 그 가운데다 집을 짓고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고 스스로 호를 소쇄옹이라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은둔 생활을 하며 의를 행하면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의 학문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몸을 수양하는 근본으로 삼았고, 사물에 이르러 지식을 지극히 하는 것으로 마음을 수습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본심을 보존하고 기르며, 글의 깊은 뜻을 완미하고 사색하며, 번갈아 그 공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조 문정공에게서 얻은 바가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고 평생에 힘을 기울인 것은 오로지 '대학'과 '중용'에 두어 마음을 가라앉혀 외우고 익혀서 오래됨에 좋은 훈계를 더하였고, 여러 경서에 이르러서는 더욱 주역에 깊은 연구를 하여 한결같이 정자(程子)와 주자의 전의(傳義)로써 하였고, 서로 참고하여 절충하였으며, 좌우의 도서에 초연하게 독자적인 조예가 있었다. 그리고 뜻이 합쳐지는 곳을 만나게 되면 가끔 목청을 높여 읊는 소리가 마치 쇠와 돌 사이에서 나오는 듯하였으며, 김 문정공과 서로 종유하고 강마(講劘)하면서 자못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술을 일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군자의 학문은 저절로 근본과 여줄가리(枝葉)가 있는데, 근본이 이미 뜻을 이룰 수 없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하겠는가?" 하였다. 또 어버이 섬기기를 독실히 하여 부드럽고 온화한 기색으로 아침저녁의 문안 인사와 이부자리를 펴드리며,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등 몸소 솔선하면서 어김이 없었다.


그러다가 창암공의 상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산소 곁에 여막을 짓고 슬퍼하며 사모하기를 예절에 지나치게 하여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다. 일찌기 나무꾼의 실화로 불길이 선산(先山)에 미치자 공이 하늘에 부르짖으며 달려가 불을 끄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하였다"고 말하였다. 어려서 과부가 된 고모에게서 양육을 받았는데, 그 고모가 세상을 떠나자 1년의 복(服)을 입었으며, 또 심상(心喪)을 입어 보답하였다. 일찍이 '효부'를 지어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인륜과 친애하는 도리를 갖추어 진술하였는데, 읽는 자가 감동하였다. 내종형(內從兄)인 송순 선생이 그 글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 이치를 깊이 알고 몸소 행하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하였다. 평소 사물을 접함에 일찍이 남에게 특이함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구차스럽지 아니하고 안정되어 조용하고 까다롭지 아니하며, 고상하고 깨끗하며 엄격하고 정돈이 되었으며, 의복과 음식, 말과 행동은 비교적 절도에 맞았고 채우고 기르기를 이미 오래 하여 바라보면 의젓하게 덕이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행동과 일을 함에 또 여러 자제를 가르치면서 반드시 의로운 방향으로 하며, 형제 사이에 우애를 독실하게 하고 종족을 대우하는 데 이르러서 더욱 도타운 화목을 더하며, 향당(鄕黨)에서 친구와 교유함에 신의와 화열(和悅)로써 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가난하여 혼인이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자를 보면 번번이 재산을 기울여 구휼(救恤)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원근에서 공경하고 탄복하여 소문을 듣고 흥기(興起)하는 자가 역시 많았다.


중종 말엽에 중앙과 지방에 전교를 내려 유일을 모두 추천하라고 하였는데 현령 이수 공이 평소 공을 공경하는 터라 마침내 명령에 응하려고 하자, 공이 곧바로 극력 사양하여 정말로 추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에 다시 추천자 명단에 올랐으나 공이 끝내 나아갈 뜻이 없었다. 가정(嘉靖) 정사년(丁巳年, 1557년, 명종 12) 3월 20일에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임종시에 그의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유독 늙으신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너희는 나의 뜻을 잘 체득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먹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사림이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현(梨峴) 선영의 아무 향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공이 조 문정공의 문하에 있을 적에 간혹 청송 성수침 형제와 마침 같이 배웠는데 공을 한번 보고서 그전에 교유하던 사람같이 여기며 말하기를, “공은 참으로 두려운 친구이다.”라고 하였다. 김 문정공은 항상 형의 예로 섬기며 매번 공의 정밀하게 사색하고 현묘하게 합쳐지는 학문을 칭송하면서 읊고 감탄하며 찬미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급문(及門)의 선비로 존재 기대승 같은 이는 말하기를, “소쇄옹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안으로는 엄격하여 바라보면 무릎이 꿇어짐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초토사(招討使) 고경명은 말하기를, “공의 사람 됨됨이는 위대하고 성품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바른 선비라고 칭송한다.”고 하였다.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은 말하기를, “소쇄옹과 서로 마주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속을 후련하게 하여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게 한다.”고 하였으니, 그 후배들의 사모하고 우러름이 또한 이와 같았다.


광산 김씨인 정랑 김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녀자가 지켜야 할 덕이 있었으나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양자홍으로 일찍 죽었으며, 다음은 양자징으로 역시 학문과 행검으로 추천되어 벼슬이 현감이었다. 다음 양자정은 훈도이다. 딸은 노수란에게 출가하였다. 안팎의 손자는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하늘이 우리 유교를 도와 우리 동방을 깨우치게 하였도다. 누가 그 마루인가? 조 정암 선생이다. 더구나 그의 진출과 은퇴는 군자가 바라는 바이다. 우뚝한 하서가 그 은미함을 잘 드러내었도다. 공이 그 융성한 무렵에 더러는 높이기도 하고 더러는 취(取)하기도 하였는데, 비록 바탕이 아름답기는 하여도 이런 분들 아니었으면 어디서 본을 받았겠는가? 이미 처음 시작할 때에 시기적으로 막힘을 만났으며 끝내 잘 간직하기로 저 동원(東園)에서 하였도다. 본심은 보존하고 지식이 지극하기를 바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았으며, 온 집안에 그림과 글씨를 써 붙여 굽어보나 올려다보나 오묘한 이치와 합하게 하였도다. 효도와 우애를 행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따랐으며 몸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펴서 진술함이 있었도다. 세상이 되풀이하여 변하였으나 초연하게 누됨이 없었으니, 향당과 여리에서는 덕을 흠모하였고 선비들은 생각을 더하게 되었도다. 산과 못에다 비유하면 빛나는 구슬과 온화한 옥같이 광채를 덮을 수 없으며 상서로움을 숨길 수 없도다. 울창한 이현에는 소나무도 있고 가래나무도 있도다. 이에 시를 드러내어 영원토록 후세에 보이도다.


처사 소쇄옹 양공 묘갈명 1681년 11월 4일]


강진 만덕산 백련사


1681년(숙종 7) 양택지 등 팔도 유생들이 김장생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84년(숙종 10) 송시열은 제자 양진태의 부탁으로 양산보의 행장, 이듬해에는 양자징의 행장과 묘지명을 지었다. 양산보의 후손 가운데 양진태를 비롯해서 양진수, 양택지, 양경지, 양유룡 등이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송시열과 소쇄원가의 학연이 매우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은 왕세자(경종) 책봉을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28세의 양경지는 박광일(朴光一), 박중회(朴重繪) 등과 함께 유배길에 잠시 강진 만덕사(萬德寺, 지금의 백련사)에 머물던 송시열을 찾아가 시를 지를 주고받았다. 양경지는 시문에도 능하여 송시열에게 단후박아(端厚博雅)한 선비라고 칭찬을 받았다. 그는 나주목사 김진옥(金鎭玉)과도 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