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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9 - 양경지 '소쇄원 30영'을 노래하다

林 山 2018. 7. 7. 11:37

1690년(숙종 16) 기정익(奇挺翼, 1627~1690)은 양진태의 부탁으로 양천운의 행장을 지었다. 1696년(숙종 22) 35세의 양경지는 진사가 되었으나 부모 봉양과 가업을 잇기 위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소쇄원을 지켰다. 양경지는 지역 문인과 죽림칠현이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그해 7월 양경지는 '근차중부가산30영운(謹次仲父家山三十詠韻, 소쇄원 30영)'을 지었다'소쇄원 30영'은 양경지의 중부인 양진태의 소쇄원 제영시(題詠詩) 30수에서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소쇄원 30영'은 지금 양경지의 시만 남아 있다. '소쇄원 30영'은 양경지의 시문집인 '방암유고(芳菴遺稿)에 실려 있다. 


양경지는 강진에 있는 자신의 집과 소쇄원을 오가며 생활했다. 양경지의 처가도 강진이다. 양경지의 처 해남 윤씨는 일찍 죽어서 강진군 도암면 지석리에 묻혔다. 양경지에게는 양학수(梁學洙), 양학연(梁學淵), 양학해(梁學海)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양경지는 만년에 소쇄원 근처에 살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양진태는 당시 강진에 살고 있던 형 양진수를 대신해서 조카 양택지, 양경지, 아들 양채지와 함께 소쇄원을 중수하였다. 양진태가 소쇄원 제영시를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소쇄원을 중수하고 나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진태는 소쇄원 제영시 외에도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에 '동학빙포', '야침천향', '우후암창', '월하송음' 등 4가지를 더해 '소쇄원 4경(瀟灑園四景)'을 짓고 나서 '대통 홈에 매달린 고드름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소쇄원의 경물이다.'라고 하였다.   


양진태는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과정에서 불에 타고 남은 선조들의 행적, 양산보와 양자징의 시문, 당시 대학자들에게 부탁해서 쓴 행장과 묘지명 등을 모으고, 소쇄원가와 인연을 맺은 다른 사람들의 시문을 넣어 엮은 가집(家集)인 '소쇄원사실(瀟灑園事實)' 3권을 만들었다. '소쇄원사실'에는 소쇄원 초기부터 6대까지 송순, 오겸(吳謙), 김언거(金彦据), 김인후(150수), 고경명(64), 이수, 양천운(76수), 임억령, 이황, 김성원, 박광전(朴光前), 정철, 조헌, 백광훈 등 100여 명의 시 550여 수가 실려 있다. 이들이 소쇄원가단을 형성하게 된다. 소쇄원가단의 초기에는 송순, 양산보, 김인후, 임억령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양자징과 양자정 대에는 김성원, 고경명, 정철, 백광훈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고, 양천운 대에는 고용후, 정홍명, 김대기, 정홍립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소쇄원 중기에 원림을 오가며 시문을 남겨서 '소쇄원사실'에 올라 있는 사람은 모두 52명이다. 이들은 양진태와 양경지를 중심으로 교유했던 인물들이다. 소쇄원 중기에는 양진태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경지도 종제 양채지와 함께 많은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1715~1717년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낸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 1656~1739), 김창흡 등이 드나들면서 소쇄원은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이했다. 


조정만은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의 문인으로 진사시에서 장원을 했으며 시문과 서예 뿐만 아니라 경사백가(經史百家)에도 뛰어났다. 아버지는 합천군수를 지낸 조경망(趙景望)이다. 조정만은 양진태, 양경지와 우의가 두터웠다. 이들은 다같이 송시열의 문하에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우정은 조정만이 쓴 양진태와 양경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소쇄원사실'에는 조경망, 조경망의 아우 조경창(趙景昌), 조정만의 시도 실려 있다. 조정만의 조부가 조석형(趙錫馨), 증조부가 바로 양자징의 묘갈명을 지은 조희일이다. 조희일은 양천운과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인연으로 소쇄원을 드나들었다. '소쇄원사실'에는 조희일이 양천운에게 보낸 편지 2통이 실려 있다. 소쇄원가와 조정만가의 교분이 오래고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김창흡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좌의정을 지낸 김상헌(金尙憲)은 그의 증조부로 양천운과 사마시 동기였다. 김창흡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어머니는 해주목사를 지낸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김수항은 소쇄원 6대 주인 양택지의 스승이었다. 김창흡의 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과 예조판서와 지돈녕부사를 지낸 김창협(金昌協)이다. 하지만 깁창흡은 벼슬을 싫어하여 환로에는 나가지 않고,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문우들과 글을 읽으며 산수를 즐겼다. 그는 영암으로 유배된 아버지 김수항을 문안하러 오가는 길에 소쇄원에 들러서 갔다. 김창흡의 형 창집과 창협, 조카 김신겸(金信謙)도 소쇄원과 인연을 맺었다. 김창흡가와 소쇄원가의 교분도 대를 이어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 외원도(김영환 2013)


김인후의 '소쇄원 48영'과 양진태의 '소쇄원사실'을 통해서 소쇄원의 초기 모습을 살필 수 있다면, 소쇄원의 후기 모습은 양경지의 '소쇄원 30영'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소쇄원 48영'이 미시적으로 소쇄원의 내원과 가까운 주변 경관을 읊었다면, '소쇄원 30영'은 거시적으로 소쇄원을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 전체를 읊었다. '소쇄원 30영'을 토대로 지도와 대조하면서 소쇄원 경역과 외원(外)을 설명할 수 있다. 양경지의 시선을 따라 소쇄원 경역과 외원을 따라가 보자.  


제1영 지석리(支石里)

危石支還立(위석지환립) 위태로운 바위 버티고 서 있으니
都由造化機(도유조화기) 모두가 다 조화의 기틀 때문이네
擎天如有日(경천여유일) 해 우러르는 듯 하늘을 떠받치니
吾與爾同歸(오여이동귀) 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돌아가리


지석리는 소쇄원에서 옛날 지등(支嶝) 마을이 있던 전라남도 교육연수원까지를 말한다. 전남 교육연수원은 원래 경주 정씨(慶州鄭氏) 집성촌이었다. 소쇄원에서 정명호(鄭鳴濩)의 삼우당(三友堂)이 있던 경주 정씨 집성촌까지가 지석리였다. 정명호는 양자징의 문인이고, 양자정은 정명호의 매부가 된다.  


오곡문 바로 옆 수문 한가운데에는 다섯 개의 돌로 쌓은 지석(支石)이 담장을 떠받치고 있다. 소쇄원 조성 당시부터 있었다고 하는 이 지석은 지석리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수문의 지석은 직녀(織女)가 베를 짤 때 베틀이 움직이지 않도록 받쳤다고 하는 돌인 지기석(支機石)을 상징한다. 일 년에 단 한 번 음력 7월 7일 은하수를 건너 만난다는 연인 견우(牽牛)와 직녀는 함께 돌아갈 수 없기에 슬프고 애닯은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제2영 창암동(蒼巖洞)


矗立如擎日(촉립여경일) 우뚝 솟아서 태양을 받친 듯하고
回環似拱星(회환사공성) 빙 둘러 북극성에 읍하는 듯하네
山人孰云儉(산인숙운검) 산사람 그 누가 검소하다 했는가

翠色列成屛(취색열성병) 푸른 빛 퍼져나가 병풍을 이뤘네


창암은 양산보의 아버지 양사원의 호다. 창암동은 소쇄원 바로 아래 본가(本家)가 있었던 곳으로 소쇄원도에는 창암촌(蒼巖村)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星)'은 북극성을 가리킨다. '回環似拱星'은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제1장에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拱)之(정사를 다스리는 데에 덕을 쓰는 것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여러 별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과 같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소쇄원 내원도(김영환 2013)


제3영 소쇄원


超然遐遯日(초연하둔일) 초연히 멀리 달아나 숨어들던 날
亭沼此經營(정소차경영) 정자와 연못 터를 잡아 세웠는데
水石偏瀟灑(수석편소쇄) 물과 바위 몹시 맑고도 깨끗하여
方知不爽名(방지불상명) 이름 더럽히지 않을 줄 알았노라

제4영 제월당

欲觀虛白界(욕관허백계) 텅 비고 청정한 세계를 보려거든
滇坐澗邊堂(전좌간변당) 시냇가 이 집에 앉아야만 한다네
一樣靑天月(일양청천월) 푸른 하늘에 걸려있는 저 달님도
偏憐霽後光(편련제후광) 비온 뒤의 달빛은 더욱 어여쁘네

'제월(霽月)'은 비가 갠 하늘의 밝은 달이다. '허백(虛白)'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의 '虛室生白, 吉祥止止(방이 텅 비면 저절로 환해지니 좋은 징조가 끝없이 머무네)'에서 인용한 말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청정무욕(淸淨無慾)의 경지를 말한다. 

5영 광풍각

習習常吹壑(습습상취학) 봄바람은 솔솔 늘 골짜기에 불고
冷冷更滿樓(냉랭갱만루) 찬 갈바람은 더욱 누각에 그득해
披襟當水檻(피금당수함) 가슴을 열고 물가 난간에 기대니
身世却疑浮(신세각의부) 내 몸이 물위에 떠있는 듯하구나

'광풍(光風)'은 봄볕이 다사로운 맑은 날에 불어오는 바람이다. '습습(習習)'은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모양, '냉랭(冷冷)'은 쓸쓸하고 차디찬 모양이다.

6영 애양단

濯髮巖頭水(탁발암두수) 바위 모서리 냇물에서 머리 감고
晞之壇上暄(희지단상훤) 단 위에서 따뜻한 햇살에 말리네
瑞光無不燭(서광무불촉) 상서로운 빛이 두루 내리 비치고
亦自到山門(역자도산문) 또한 저 산문까지 저절로 이르네

애양단 앞에는 효를 상징하는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양천운은 소쇄원을 재건할 때 이곳에 담긴 사상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동백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애양(愛陽)'은 주희가 숭안현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조성하고 그 경내에 한서관(寒棲館)을 세운 뒤, 이곳에서 지은 시 '반초은조(反招隱操)'의 '我愛陽林春葩晝紅(나는야 양지바른 숲을 사랑하니 낮에는 봄꽃 붉고)'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산림에서 유유자적했던 주희를 따르고 싶다는 것이다.

7영 대봉대

臺前多竹實(대전다죽실) 대봉대 앞에는 대나무 열매 많고
臺上散梧陰(대상산오음) 대봉대 위엔 오동 그늘 드리웠네
千載臺猶在(천재대유재) 천 년 세월 대봉대는 그대로건만
何時下彩禽(하시하채금) 봉황새는 그 어느 때 날아들런지

대봉대는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짝을 이룬 뒤에 생겨난 이름이다. 상지 바로 근처에는 왕대 100여 그루가 마치 옥대처럼 서 있었다고 한다. '죽실(竹實)'은 대나무 열매다. '장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鵷鶵.....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봉황은 벽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으며, 예천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죽실이 있고, 오동나무가 있으니 봉황이 날아올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봉황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은 과거에 급제해서 높은 벼슬에 오르는 양씨 가문의 후손들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오곡문 주변도(김영환 2013)


제8영 오곡문


鷺渚加三水(로저가삼수) 물가 백로는 서너 번 헤엄치는데

龍門少幾灘(용문소기탄) 용문은 그 몇 번이나 여울졌던가

東風花滿浪(동풍화만랑) 동풍 불면 물결엔 꽃잎 가득하니

不遺鎖仙壇(불유쇄선단)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지 말게나


'용문(龍門)'은 중국 황하 상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이다. 용문은 물살이 빨라서 물고기들이 거슬러 오르기 힘들다. 하지만 용문의 빠른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는 용이 된다고 하는 전설이있다. 여기서는 오곡문을 가리킨다. '선단(仙壇)'은 당나라 원결(元結)의 시 '九疑第二峰, 其上有仙壇(구의산의 두 번째 봉우리, 그 위에 신선 사는 곳이 있다네.)'에서 인용한 것이다.


제9영 할미봉(鶺鴒崖, 척령애)


久離鴻雁序(구리홍안서) 오랜 세월 기러기 무리에서 떠나

偏愛鶺鴒原(편애척령원) 할미새 그 언덕을 매우 사랑했네

莫遣崖巢破(막견애소파) 벼랑 위의 새집을 부수지 말게나

啣環當報恩(함환당보은) 구슬 물어다 응당 은혜 갚으리니


할미봉(鶺鴒崖, 196m)은 호남정맥의 까치봉(424m)에서 남서쪽으로 소쇄원과 전라남도 교육연수원 사이로 뻗어내린 능선의 중간쯤, 죽림동(竹林洞) 바로 뒤에 솟아 있는 봉우리다. '홍안서(鴻雁序)'는 기러기는 날아갈 때도 순서가 있다는 뜻이다. 형제 간의 차례를 뜻하기도 한다. '척령(鶺鴒)'은 형제 간에 우애가 있다고 알려진 할미새다. 할미새는 걸어다닐 때 항상 꽁지를 위아래로 흔들어 화급한 일을 고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할미새는 종종 형세가 급난한 때를 당해서 서로 돕는 비유로 쓰인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위급한 때에는 형제가 서로 돕는 법이라오. 언제나 좋은 벗 있다고 해도, 탄식만 길게 늘어놓을 뿐이니)'이라고 했다. 민구령(閔九齡) 오형제가 지었다는 '척령가(鶺鴒歌)'에서는 '題彼鶺鴒, 載飛載鳴. 夙興夜寐, 無忝爾所生.(저기 저 할미새, 날기도 하고 울기도 하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여, 그 몸을 낳아주신 부모에게 욕됨이 없게 하네.)'에서 보듯이 할미새가 부지런하고 효성이 지극한 새로 그려지고 있다. '啣環當報恩(함환당보은)'은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에 나오는 <황작함환(黃雀銜環)>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반드시 보답한다는 뜻이다.  


제10영 독목교(獨木橋) - 외나무다리


怳入天台路(황입천태로) 어슴푸레 천태 도량 길 들어서니

如臨銀浦干(여림은포간) 마치 은빛 갯물에 임한 듯하구나

斜陽僧欲度(사양승욕도) 해 저물녘 스님이 건너려 하는데

柱杖更跚跚(주장갱산산) 나무 지팡이 다시 또 비틀거리네


독목교(獨木橋)는 오곡문 바로 옆 수문 앞에 놓여 있는 외나무다리다. '천태로(天台路)'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톈타이현(天台縣)에 있는 명산 천태산(天台山) 길이다. 수(隋)나라 때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義)는 38세 때 천태산에 숨어들어 사색과 수행으로 용맹정진한 뒤 천태종(天台宗)을 개설했다. 천태산 남쪽 기슭에는 천태종의 발원지인 국청사(國淸寺)가 있다. 천태종은 중국 불교 4대 종파 중 하나다. 


진(晉)나라 손작(孫綽)도 천태산 자락인 적성산(赤城山)에 푯말을 세우고 은거하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다. '수초부'는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그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후대에 '수초부'를 읊는다는 것은 곧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서 '赤城霞起而建標, 瀑布飛流以界道.(적성산에는 붉은 놀이 일어 표지를 세우고, 폭포는 날아 흘러서 길을 나누었도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建標霞(노을이 표지를 세운다.)'는 은거 생활을 비유한다. 손작은 뒤에 벼슬하다가 환온(桓溫)의 뜻을 거슬려 반대 상소를 올리자, 환온이 불쾌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何不尋君遂初賦 知人家國事邪(그대는 어찌하여 수초부대로 살려 하지 않고 남의 국가에 대한 일을 간섭하는가.)'라고 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은포(銀浦)'는 달빛이 비쳐서 은빛으로 빛나는 갯물을 말하는데, 곧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뜻한다. 


제11영 자죽총(紫竹叢)


紫玉蟠孤石(자옥반고석) 자옥빛 대 외로운 돌에 서려있어

携來侈野翁(휴래치야옹) 옮겨 심으니 촌로 몹시 호사롭네

只愁有神怪(지수유신괴) 다만 괴이한 것이 있어 근심하니

騰躍葛陂中(등약갈피중) 칡 언덕에서 펄떡 뛰지나 않을까


자죽총(紫竹叢)은 소쇄원 입구 오솔길 양쪽에 우거진 대숲이다. '갈피(葛陂)'는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호수 이름이다.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평여(平輿) 현성 동쪽에 있었던 갈피는 둘레가 30리인데, 회하(淮河)로 흘러 들어갔다. 지금은 매몰되어 없어졌다. '후한서(後漢書)'에는 후한의 비장방이 신선 호공을 따라 신선술(神仙術)을 배운 뒤 호공이 준 죽장(竹杖)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지팡이를 갈피란 언덕에 버렸더니 곧 용으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 당나라 호증(胡曾)의 '葛陂(갈피)'라는 영사시(詠史詩)도 있다. '長房回到葛陂中, 人已登眞竹化龍. 莫道神仙難頓學, 嵇生自是不遭逢.(비장방이 갈피로 돌아왔을 때, 사람은 이미 신선이 되고 대나무는 용으로 변했네. 신선술을 한순간에 배우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게, 혜강은 스스로를 옳다고 여겨 만나지 않았으니.)'에서 보듯이 비장방의 전설을 소재로 한 시다. 양경지도 비장방의 전설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제12영 부훤당


支巖高祖行(지암고조행) 지암 고조 할아버지뻘 되신 분이

結屋碧山傍(결옥벽산방) 푸른 산 곁에다 집을 엮으셨다네

忠孝元家學(충효원가학) 충성과 효도는 본디 가정의 학문

常懷愛太陽(상회애태양) 하늘의 해처럼 늘 품고 사랑하리


부훤당은 양자정의 서재로 제월당 서쪽 담장 너머 공터에 양자징의 고암정사와 나란히 앉아 있던 건물이다. '지암(支巖)'은 양자정의 호다. 그의 호를 부훤당이라고도 부른다. '소쇄원 30영'에 고암정사가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는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결옥(結屋)'은 '양서결옥(瀼西結屋)'에서 인용한 것이다. 양서(瀼西)는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인데, 당나라 두보(杜甫)가 일찌기 이곳으로 옮겨와 집을 짓고(結屋) 살았다. '부훤(負暄)'은 햇볕을 쬐는 일이라는 뜻이다.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송나라의 한 가난한 농부가 봄볕에 등을 쬐면서 세상에 이보다 더 따스한 것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다는 '헌폭(獻曝)'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원래 햇볕의 따스함을 바친다는 뜻의 '헌폭'은 이후 보잘것 없는 의견을 바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김해(金楷)는 '부훤당기(負暄堂記)'에서 송나라 야인(野人)들의 어리석은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 이를 어리석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본받아야 할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간신들이 득세하는 정치적 현실을 걱정하면서 자신도 송나라 야인들처럼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국정에 도움이 되는 말이 있다면 거리낌없이 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소쇄원 외원도(김영환 2013)


제13영 한천사(寒泉舍)


名區開小築(명구개소축) 멋진 명승지에 아담한 집을 지어

勝躅繼閩翁(승촉계민옹) 송나라 민옹의 발자취 이어 가네

經訓深長味(경훈심장미) 경전의 뜻은 깊은 맛을 자아내니

都輸涵泳中(도수함영중) 깊이 탐구하면 다 드러날 뿐일세


'민옹(翁)'은 민(閩, 복건성) 땅에 살았던 주희를 가리킨다. '함영(涵泳)'은 무자맥질이다. 물속에 들어가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 잠겼다 함을 뜻한다. 여기서 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 생겼다.


제14영 죽림사(竹林寺)


書堂中廢壞(서당중폐괴) 글 읽던 서당 도중에 허물어지고

獨有竹陰淸(독유죽음청) 시원한 대나무 그늘만 남아 있어

風動千竿玉(풍동천간옥) 바람이 천 갈래 대숲을 움직이니

如聞絃誦聲(여문현송성) 마치 가야금 소리를 듣는 듯하네


죽림사는 고암동의 동쪽, 할미봉의 남쪽 죽림동((竹林洞)에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소쇄원 뒷산 동북 방향 500m 지점에 건물터가 있었는데, 이를 죽림재(竹林齋) 터라고 한다. 소쇄원에서 동쪽으로 소쇄원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 길 끝에 자리잡은 민가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산보의 후손들은 죽림재가 있던 골짜기를 지금도 서당골이라고 부른다. 임회(林檜)가 쓴 고암공(鼓巖公) 묘지(墓誌)에는 죽림사를 죽림서당(竹林書堂)이라고 했다. 죽림사를 림재, 죽림서당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절 사(寺)'자를 쓴 것을 보면 죽림재는 원래 죽림사라는 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송(絃誦)'은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옛날 '시경'을 배울 때 거문고나 비파 등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로 불렀는데 이를 현가(絃歌), 악기의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고 한다. 이 둘을 합하여 현송이라고 한다. 곧 수업하고 송독하는 것을 말한다.


15영 후간장(帿竿場)


觀德必於射(관덕필어사) 덕은 반드시 활쏘기에서 보는 법

享賓元用侯(향빈원용후) 손님 맞아서는 원래 후를 거는데

平無貫革專(평무관혁전) 평소에는 과녁 뚫을 마음 없어서

時是尙文柔(시시상문유) 이때껏 화평한 글만 높이 여기네


후간장은 활을 쏘는 사장터로 관덕사(觀德榭)라고도 한다. '소쇄원사실'에 의하면 후간장은 대봉대 부근이나 소쇄원 담장 바로 바깥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후(帿)'는 활의 과녁, '간(竿)'은 화살대다. '관덕(觀德)'은 '예기(禮記)'의 '射者所以觀盛德也(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따온 말이다.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기르기 위해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다. '후(侯)'는 사방 10자의 과녁을 뜻한다. 과녁 한가운데 그려진 지름 넉자의 원을 곡(鵠)이라고 한다. 그래서 활의 과녁을 후곡(侯鵠)이라고도 한다. '관혁(貫革)'은 과녁의 본디말이다.


16영 산리동(酸梨洞)


認是交梨核(인시교리핵) 이것이 교리의 씨인 줄 알았더니

初從瑤海湍(초종요해단) 처음 옥 같은 바다에서 건너왔네

申來塵土薄(신래진토박) 먼지 투성이 척박한 땅에서 나와

仙味偏成酸(선미편성산) 신선의 맛 시큼하게 변해 버렸네


산리동과 통사곡(通仕谷)은 호남정맥 까치봉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호남정맥 옹정봉에서 발원하는 고암동과 합류한 뒤 장자담(莊子潭)을 이룬다. 그러니까 산리동은 고암동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다. '교리(交梨)'는 도교에서 신선이 먹는다는 배인데, 금단(金丹)보다도 좋다는 일종의 선과(仙果)다. '요해(瑤海)'는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사는 북두계(北斗界)에 있는 바다다. 요지(瑤池)라고도 한다. 요지는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西王母)와 만났다는 선경(仙境)으로 곤륜산(崑崙山)에 있다고 한다. 

 

제17영 석구천(石臼泉)


石坎纔容斗(석감재용두) 겨우 바가지 크기의 바위 구덩이

微泉滴滿泓(미천적만홍) 작은 샘에는 물이 가득히 차있어

欲將淸瀅水(욕장청형수) 그 맑고도 깨끗한 물을 길어다가

一爲洗簪纓(일위세잠영) 한번 비녀와 갓끈을 씻고자 하네


석구천은 고암동의 동쪽에 있는데, 약수와 장수마을로 유명하다. '잠영(簪纓)'의 '잠(簪)'은 귀족이나 관리의 관모(冠帽)와 두발을 연결하는 데 사용하는 장식용 비녀, '영(纓)'은 턱 아래에서 묶어 관을 고정시키는 모자 양옆에 달린 끈이다. 높은 벼슬아치를 뜻하기도 한다. 당나라 낙빈왕(駱賓王)의 '제경편(帝京篇)'에 '劍履南宮入, 簪纓北闕來(칼 차고 신발 신은 채 남궁에 들고, 고관대작은 황제가 머무는 곳에서 나온다.)'라는 구절이 있다. 남궁은 상서성(尙書省)을 말한다.


제18영 장목등(長木嶝)


長松含晩翠(장송함만취) 큰 소나무 한겨울 푸른빛 머금고

高峀逼霄寒(고수핍소한) 높은 산은 차가운 하늘에 닿겠네

洞暝常巢鶴(동명상소학) 동구가 어둑하면 늘 학이 깃들고

風蟠剩聽灡(풍반잉청란) 바람 서리면 물결 소리를 듣는다


장목등은 소쇄원과 동쪽의 전라남도 교육연수원 사이에 있는 언덕이다. '만취(晩翠)'는 늦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소나무, 대나무 따위의 푸름를 가리킨다. '洞暝常巢鶴(동명상소학)'은 도연명의 '수신후기(搜神後記)'에 나오는 한나라 태소관(太霄觀)의 도사(道士) 정영위(丁令威) 고사와 연관이 있다.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는 신선술을 배워 죽은 뒤에 학이 되어 고향 성문의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古人民非, 何不學仙塚累累(새야 새야 정령위 새야. 집 떠난지 천 년만에 이제사 돌아왔네. 성은 예전 그대로지만 사람들은 다르구나. 어찌 신선술을 배우지 않아 무덤만 첩첩할꼬?)'라고 말했다. 정영위가 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알아 볼 사람도 없어서 도로 하늘로 돌아갔다는 고사다. 


제19영 옹정봉


尤老曾揮筆(우로증휘필) 일찌기 우암 선생이 붓 휘둘러서

幽山始定名(유산시정명) 이 산의 이름 비로소 정해졌다네

厚深宜澤物(후심의택물) 깊고 두터움은 사물 윤택케 하니

磅礴更鍾英(방박갱종영) 산세 드높고 다시 빼어남 갖췄네


옹정봉은 소쇄원의 오곡문에서 북동쪽으로 보이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다. 담양군 고서면 고읍리의 진압산(450.7m) 동쪽에 있다. 옹정봉에서 발원하여 남서쪽 소쇄원으로 흐르는 계곡이 고암동이다. 옹정봉은 송시열이 붙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우로(尤老)'는 송시열의 호다. 송시열의 호에는 우로 외에도 우암(尤庵), 우옹(尤翁), 우암(尤菴), 우재(尤齋) 등이 있다. '택물(澤物)'은 이민택물(利民澤物)에서 온 말이다. 백성을 이롭게 하고 사물을 윤택하게 한다는 뜻이다. '방박(磅礴)'은 '(기세가) 드높다, 충만하다, 광대하다, 넘치다' 등의 뜻이 있다. '종(鍾)'은 '모이다'의 뜻이다. 


제20영 통사곡(通仕谷)


李渤曾辭爵(이발증사작) 당 이발은 일찌기 벼슬 사양하고

嚴陵不事君(엄릉불사군) 후한 엄릉은 임금 섬기지 않았네

身雖巖穴隱(신수암혈은) 몸은 비록 바위굴에 숨어 있지만

猶自動乾文(유자동건문) 오히려 하늘 움직이는 글 남겼네


통사곡은 고암동의 동쪽에 있다. 고암동과 그 동쪽의 산리동, 통사곡이 장자담 바로 위에서 합류한 뒤 소쇄원 오곡문으로 흘러내린다. 


'이발(李渤, 773~831)'은 이균(李鈞)의 아들로, 당나라 낙양 사람이다. 자는 준지(濬之), 호는 소실산인(少室山人)이다. 정원 연간(貞元年間)에 형 이섭(李涉)과 함께 여산(廬山)의 남쪽 10km 지점의 후병산(后屏山) 남쪽 오로봉(五老峰) 아래 백록동(白鹿洞)을 열었다. 이곳에서 이발은 흰 사슴 한 마리를 키웠는데, 하루종일 그를 따라다녔다고 하여 백록선생(白鹿先生)이란 별칭을 얻었다. 나중에는 은거지를 소실산(少室山)으로 옮겼다. 원화(元和) 초에 한유의 권유를 받아 관직에 나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된 뒤 태자빈객(太子賓客) 등 여러 직책을 거쳤다. 보력(寶曆) 연간에 강주(江州, 江西 九江) 자사(刺史)에 올랐다. 이때 백록동을 확장 중건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발은 서현사(棲賢寺) 주지 귀종 지상(歸宗智常)에게 자주 불법(佛法)에 대해 물었다. 일찌기 수미입개자(須彌入芥子)에 대해 묻자 지상은 일진법계(一塵法界)와 만물상관(萬物相關)의 일치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이발회의(李渤懷疑)' 공안(公案)이라 한다. 그의 주청으로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 대각선사(大覺禪師)란 시호가 내려졌다. 오대(五代) 남당(南唐) 때 백록동에 학관(學館)을 지었고, 송나라 때 학관을 수리 확장하여 서원을 건립하면서 정식으로 백록동서원이 되었다. 남송 대에 주희가 이 서원을 부흥시키면서 명성을 떨쳤다. 백록동서원은 악록(岳麓), 휴양(睢阳), 석고(石鼓) 등과 함께 천하사대서원(天下四大書院)으로 불린다. 한국 서원의 효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은 바로 이 백록동서원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엄릉(嚴陵, 기원전 37~서기 43)'은 본명이 장광(莊) 또는 장준(莊)이다. 후한 회계군(會稽郡) 여요현(餘姚縣) 사람으로, 자는 자릉(子陵)이다. 일찍부터 현자(賢者)로 알려진 그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했다. 광무제가 즉위하자 장광은 자신의 성을 엄(嚴) 씨로 바꾸고 은거하였다. 광무제는 엄자릉을 등용하기 위해 나라 전역을 수소문하여 찾았다. 제국(齊國)의 연못에서 양가죽 옷을 걸친 채 낚시질하고 있는 엄자릉을 찾은 광무제는 수레와 예물을 보내 황궁으로 초대하였다. 엄자릉은 세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응하였다. 엄자릉이 도성에 도착하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사도(司徒) 후패(侯覇, ?~서기 37)가 만나 얘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광무제가 수레를 타고 엄자릉의 처소로 이르자 그는 자는 체하며 누워 있었다. 광무제는 누워 있는 엄자릉에게 나라를 함께 다스리자고 했지만 그는 소부(巢父)의 예를 들면서 거절했다. 광무제는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음을 탄식하며 돌아갔다. 며칠 뒤 광무제는 엄자릉을 불러들여 며칠 동안 옛날 일을 이야기하면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함께 누워 자기도 하였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를 제수하려 하자 사양하고 절강성에 있는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엄릉뢰(嚴陵瀨) 또는 엄릉조대(嚴陵釣臺)라는 물가에서 낚시를 하며 지냈다. 건무(建武) 17년(서기 41)에 다시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서기 43년 80세에 집에서 생을 마쳤다. 


제21영 진사록(進仕麓)


偃蹇靑山色(언건청산색) 푸른 산 경치에 누워서 지내느라

常時不八官(상시불팔관) 늘 관직에 나아갈 생각도 안했네

如何簪組累(여하잠조루) 어찌 또 벼슬아치에 누 끼치겠나

還復在雲巒(환부재운만) 돌아가 자연에 묻혀서 살 뿐일세


진사록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언건(偃蹇)'은 '거만하다, 교만하다, 높다, 고달프다' 등의 뜻이 있다. 초나라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望瑤臺之偃蹇兮, 見有娀之佚女(높이 솟은 요대 바라보다가 유융씨의 미녀를 보았네.)'란 구절이 있다. '팔관(八官)'은 관록(官祿)을 뜻한다. '조(組)'는 갓이나 인장(印章)을 묶는 끈을 말한다. '잠조(簪組)'는 곧 높은 벼슬아치를 뜻하는 말이다.    


제22영 봉황암(鳳凰巖)


龕成白玉窟(감성백옥굴) 백옥 같은 굴에다 감실을 만들고

中瀉醴泉湍(중사예천단) 그 속에 예천 여울물 쏟아부으면

夜夜來西母(야야래서모) 매일 밤 곤륜산 서왕모 찾아와서

應驂紫鳳翰(응참자봉한) 자줏빛 봉황 소식을 전해 주겠지


봉황암도 위치가 불분명하다. '예천(醴泉)'은 태평성대에는 상서(祥瑞)로서 단술과 같은 물이 솟아난다고 한다. 봉황이 마신다고 하는 샘물이다.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 '天降甘露, 地出醴泉(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단 샘물이 솟는다.)'는 구절이 있다. '서모(西母)'는 중국의 서쪽 곤륜산에 살고 있다는 여신 서왕모를 가리킨다. 성은 양(楊) 또는 후(侯), 이름은 회(回)다. 도교에서는 최고의 여신으로서 모든 신선들을 지배하는 신이다. 서왕모의 궁전 왼쪽에는 요지라는 호수가 있고, 오른쪽에는 취천(翠川)이라는 강이 있으며, 곤륜산 밑에는 약수(弱水)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서왕모가 천계에 가지고 있는 반도원(蟠桃園)에는 불로장생한다는 신비의 선도(仙桃)가 열려 있다고 한다. 주나라의 목왕이 서정(西征)할 때 요지에서 만나 서왕모로 부터 선도 새 개를 얻었고, 신선술을 좋아한 한나라 무제(武帝)도 서왕모로부터 선도 네 개를 얻었다고 한다. '자봉(紫鳳)'은 바다에 산다고 하는 신조(神鳥)다.


제23영 가재등(加資嶝)


秩是公侯等(질시공후등) 품계는 삼공 제후와 견줄 만하고

尊堪太華(존감태화륜) 높고 귀함은 서악 화산과 비슷해

五松列(수종오송렬) 벌여선 솔 다섯 그루 부끄러워라

曾庇呂兒身(증비여아신) 일찌기 여씨 아이 몸 덮어주다니


가재등은 고암동 동쪽에 있는 언덕이다. '질(秩)'은 벼슬, 관직, 품계(品階), 녹봉(祿俸) 등의 뜻이 있다. '공후(公侯)'는 공경(公卿), 제후(諸侯) 등 고관대작을 말한다. 공작(公爵)과 후작(侯爵)을 아울러 이르기도 한다. '태화(太華)'는 중국 5악의 하나로 산시성(陝西省) 화인현(華陰縣)에 있는 명산 화산(華山)을 말한다. 친링산맥(秦嶺山脈)의 동쪽 끝부분에 솟아 있다옛날에는 태화산(太華山) 또는 서악(西嶽)이라고 불렸다. 위뉘봉(玉女峰)을 중심으로 동쪽의 차오양봉(朝陽峰), 서쪽의 롄화봉(蓮花峰), 남쪽의 뤄옌봉(落雁峰), 북쪽의 우윈봉(五雲峰) 등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연꽃과 같아 화산이라고 부른다. 


'오송(五松)'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나오는 오대부송(五大夫松)을 말한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고 내려올 때 폭풍우를 만나 근처에 있던 소나무 아래로 피신하였는데, 그 소나무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오대부에 봉해 주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여아(呂兒)'는 여불위(呂不韋)의 아이, 즉 진시황라는 뜻이다. 양책(陽翟, 하남성) 출신의 거상(巨商) 여불위가 조(趙)나라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할 때 진(秦)나라 왕자 이인(異人)이 볼모로 잡혀와 있었다. 이인을 자초(子楚)라고도 한다. 여불위는 자초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춤을 잘 추는 절세가인(絶世佳人) 조희(趙姬)를 취하여 동거하다가 그녀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았다. 어느 날, 자초는 여불위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조희를 보고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자초를 이용하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그에게 조희를 바쳤다. 달이 차서 조희가 아들 정(政)을 낳자 자초는 그녀를 자신의 정부인으로 삼았다. 여불위의 후원으로 자초는 진나라로 돌아와 장양왕(莊襄王)이 되었고, 그의 아들 정은 훗날 진시황이 되었다.  


고암동


제24영 고암동


禹斧搥隳後(우부추휴후) 하나라 우임금의 도끼 떨어진 뒤

周詩撰刻餘(주시찬각여) 주나라의 시 짓고 새겨지게 됐네

蜀桐撞卽應(촉동당즉응) 촉나라 오동나무 깎아 쳐 울리니

此語豈云虛(차어기운허) 이 이야기 어찌 헛되다고 하리요


고암동은 소쇄원 북동쪽에 있는 옹정봉에서 장자담에 이르는 계곡이다. 옹정봉 정상부 남서쪽 기슭에는 고암(鼓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동굴이 고암동굴이다. 양자징의 호 고암(鼓巖)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섬서성(陝西省) 기산(岐山)의 남쪽 기양(岐陽)에도 유명한 기산지고(岐山之鼓), 즉 고암(鼓巖)이 있다. 


'우부(禹斧)'는 우부유흔(禹斧留痕)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우씨(夏禹氏)가 9년의 홍수를 다스릴 때 신부(神斧)를 사용하여 용문(龍門)을 파헤쳐서 물길을 텄다고 한다. '주시(周詩)'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숭고(崧高)'를 말한다. 주나라 선왕(宣王)이 외숙인 신백(申伯)을 사(謝) 땅에 봉하자 이에 윤길보(尹吉甫)가 이 시를 지어 전송(餞送)했다. 신백은 여왕(厲王)의 비 신후(申后)의 오빠로 선왕에게는 외숙이 된다. 신백이 선왕을 조현(朝見)하기 위해 경사(京師)에 들어와 오래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선왕이 신백을 특별히 생각하여 그의 봉지를 넓혀주고, 다시 소호(召虎)를 파견하여 사 땅에 성과 종묘를 세워 주었으며, 전답의 구획과 경계를 정해 양식을 비축하게 만들었다. 또 측근에게 명하여 신백의 사인들을 사 땅으로 옮겨가 살게 했다. 신백이 봉국에 부임할 때 선왕은 거마와 개규(介圭)를 하사하고 미(郿) 땅까지 나가 전송했다. 이에 선왕의 대신 윤길보가 이 시를 지어 신백에게 바친 것이다. '촉동(蜀桐)'은 촉나라에서 생산되는 오동나무를 말한다. 촉 땅의 오동나무는 최고, 최적의 악기 재료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제25영 영지동(靈芝洞)


芝草藏深谷(지초장심곡) 지초는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고

漁舟不識源(어주불식원) 고기잡이 배는 그 근원을 모르네

從來別天地(종래별천지) 옛부터 이곳은 신선 사는 별천지

高臥漢黃園(고와한황원) 한나라 황원에서 숨어 살고 싶네


영지동은 고암동의 동쪽 골짜기이며,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무등산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지초(芝草)'는 도교의 신선술에서 유래한 불로초다. 영지(靈芝) 또는 구광지(九光芝)라고도 한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방사(方士) 서불(徐巿)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을 딸려 삼신산으로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가의 고전 '포박자(抱朴子)'에 '구광지는 석지(石芝)의 일종으로, 임수(臨水)의 높은 산 절벽 틈에서 나는데, 모양이 마치 주발처럼 생겼고 크기는 한 자를 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별천지(別天地)'는 당나라 대시인 이백(李白)의 '山中答俗人(산사람이 속인에게 답하다)'이란 제목의 시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청산에 왜 사느냐 내게 묻지만, 웃음으로 대답 대신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복사꽃 시냇물에 떨어져 아득히 떠내려가니,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라네.)'에서 유래한 말이다. 인간 세상이 아닌 것처럼 경치가 매우 뛰어난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고와(高臥)'는 벼슬을 하지 않고 속세를 벗어나 숨어 지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제26영 장자담


奇巖平可坐(기암평가좌) 기이한 바위 평평해 앉을 만한데

終夕俯深潭(종석부심담) 밤이 다하도록 깊은 못 굽어보네

濠上當年意(호상당년의) 호 위에서 물고기 보던 그때의 뜻

安知我未諳(안지아미암) 기억하지 못할 줄 어찌 알았으랴


장자담은 소쇄원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지점에 있다. 옹정봉 남서쪽 골짜기인 고암동과 그 동쪽의 산리동, 통사곡이 합류하여 바로 그 아래에서 장자담을 이룬다.   


'濠上當年意(호상당년의)'는 '장자' <추수편(秋水篇)> '호중관어(湖中觀魚)'에서 인용한 것이다. '호중관어'에 '莊子與惠子 遊於濠梁之上. 莊子曰 鯈魚出遊從容, 是魚之樂也. 惠子曰 子非魚, 安知魚之樂. 莊子曰 子非我,安知我不知魚之樂. 惠子曰 我非子, 固不知子矣.子固非魚也, 子之不知魚之樂, 全矣.莊子曰 請循其本. 子曰 汝安知魚樂 云者, 旣已知吾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장자가 혜자와 더불어 호숫가 돌다리에서 노닐고 있었다. 그때 장자가 "피라미가 나와서 조용히 헤엄처 노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로구나" 하니, 혜자가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했다. 이에 장자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음을 모르는 줄 어떻게 아는가" 하자 혜자는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네."라고 응수했다. 장자는 "얘기를 그 근본으로 되돌려 보세. 자네가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고 물었던 것은,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네. 그래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인데, 나는 호숫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던 것이네."라고 말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27영 한벽산


碧聳雲間出(벽용운간출) 푸른 산은 구름 사이로 솟구치고

寒臨海上通(한림해상통) 차가운 물은 바다 위로 흐른다네

時時一登眺(시시일등조) 때때로 산 위에 올라서 바라보니

勢欲壓崆峒(세욕압공동) 그 산세 공동산을 압도하려 하네


김영환의 소쇄원 외원도(外苑圖, 2013)에 의하면 한벽산(184m)은 광주시 북구 충효동 대포리들과 동림 사이에 있는 야산이다. 무등산의 원효봉에서 북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의 끝에 있다. 소쇄원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정남쪽으로 증암천 건너편에 야트막하게 솟아 있다. 한벽산을 외원으로 삼았다는 것은 소쇄원 주인들이 별서정원을 바라보는 심안(心眼)이 그만큼 넓고 깊었음을 말해 준다.  


'공동(崆峒)'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평량시(平凉市)에서 서남쪽으로 11km 떨어진 육반산(六盤山) 동쪽에 있는 공동산(崆峒山, 2,123m)을 말한다. 공동산은 도교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도교의 12선산(十二仙山) 중 제일산으로 알려져 있다. 산정에는 도교의 도관(道觀)을 비롯해서 불교 사찰, 유교 사당, 정자 등 30여 곳이 동서남북중 오대(五台)를 형성한다. 공동산은 또 중국 5대 무술파의 하나인 공동파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공동산의 신선인 광성자(廣成子)를 찾아가 도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진, 한의 황제들도 헌원씨를 본받아 공동산에 올라 선인들에게 치국의 도를 물었다고 한다. 당나라 말기 운방(雲房) 종리권(鍾離權)은 여러 가지 진결(眞訣)과 도법(道法)을 얻고 마지막에는 공동산에서 옥갑비결(玉匣秘訣)을 얻어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종리권은 종남산(終南山) 광법사(廣法寺)에서 신라의 유학승 자혜(慈惠)와 최승우(崔承祐), 김가기(金可記)에게 많은 도서(道書)와 비결을 주고 내단수련을 위한 도법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는 종리권을 정양제군(正陽帝君)으로 받들어 모신다.종리권의 계도를 받은 동빈(洞賓) 여암(呂嵒)은 여러 가지 도법과 비결을 얻어 초능력을 행하였는데, 후에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正警化孚佑帝君)으로 추앙되었다. 이들은 전진교(全眞敎) 등 후대에 생겨난 도교 유파의 북오조(北五祖)로 추앙받으면서 조사(祖師)로 받들어졌다. 

   

제28영 오암정(鰲巖井)


鰲頭吐瓊液(오두토경액) 거북 머리가 신비한 약물 토해내

再掬欲成仙(재국욕성선) 다시 움켜쥐어 신선 되고자 하네

疑是武陵近(의시무릉근) 이곳이 무릉 근처 아닌가 하노니

霞光井底天(하광정저천) 노을빛이 샘 저 바닥까지 비치네


오암과 오암정은 오곡문 밖에 있는 큰 바위와 바로 그 앞에 있는 우물이다. '경액(瓊液)'은 신비로운 약물, 또는 술의 미칭(美稱)이다. '무릉(武陵)'은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타오위안현(桃源縣)이다. 여기서는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 무릉도원을 말한다. 소쇄원은 무릉계에 많이 비견되고 있다. 


제29영 바리봉(鉢裏峰)


無畏今何往(무외금하왕) 지금 어디를 가든지 두렵지 않고

惟應住此峰(유응주차봉) 오로지 이 봉우리에 머물 뿐일세

有時揮鉢水(유시휘발수) 때로는 바리때에 든 물 휘뿌려서

喚起老湫龍(환기노추룡) 연못의 늙은 용을 일깨우고 싶네


김영환의 소쇄원 외원도에 의하면 바리봉(187m)은 소쇄원 북서쪽 바로 뒤에 있는 야산이다. 그 모습이 바리때를 엎어놓은 듯한 모습이어서 바리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제30영 황금정(黃金亭)


古有丹砂井(고유단사정) 옛부터 단사 솟는 우물 있었는데

今看綠野中(금간녹야중) 이제야 푸른 들판 가운데서 보네

一餐亭上臥(일찬정상와) 새참 먹고 정자에 누워 있으려니

恍躡大瀛東(황섭대영동) 큰바다 동쪽을 밟은 듯 황홀하네 


황금정은 소쇄원 주차장 부근 우물터에 있던 정자 이름이다. '단사정(丹砂井)'은 중국 고대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샘 이름이다. 사정(砂井)이라고도 한다. '포박자' <선약편(仙藥篇)>에 이 샘 밑에는 단사(丹砂)가 묻혀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장수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84년 문화재청은 이 우물터를 발굴하기 위해 조사까지 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나온 예산으로 우물터에 주차장을 조성하는 바람에 우물터는 지금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 문화 유적 보존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