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에는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어지는 두타산(頭陀山, 1,353m), 중봉계곡(中峰溪谷), 응봉산(應峰山, 998.5m), 덕풍계곡(悳豊溪谷) 용소골(龍沼谷), 동활계곡(東活溪谷) 등의 명산과 계곡도 많고, 환선굴(幻仙窟)을 비롯한 대금굴(大金窟), 관음굴(觀音窟, 葛梅窟), 활기굴(活耆窟), 국내 최대 규모의 석회동굴인 대이동굴(大耳洞窟)
등 이름난 동굴도 많다. 후진(後津), 맹방(孟芳), 덕산(德山), 부남(府南), 원평(院坪), 초곡(草谷), 문암(文岩), 용화(龍化), 장호(藏湖), 갈남(葛南) 등 멋진 해변도 많다. 새천년해안도로, 한티재 등 낭만가도는 바다 전망이 환상적이다. 삼척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척에는 또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로 일컬어지는 죽서루(竹西樓, 보물 제213호)와 이승휴 유허(李承休遺墟, 사적 421호)를 비롯해서 준경묘와 영경묘(濬慶墓, 永慶墓, 사적 제524호), 공양왕릉(恭讓王陵, 사적 제191호),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陟州東海碑, 平水土贊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삼척향교(三陟鄕校,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실직군왕릉과 실직군왕비릉(悉直郡王陵, 悉直君王妃陵, 강원도 기념물 15호 ), 소공대비(召公臺,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7호), 삼척교수당(三陟敎授堂,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1호), 역둔리 철비(易屯里鐵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등 보물과 사적, 문화재도 다수 분포하고 있다.
오십천에서 바라본 죽서루
삼한시대에 삼척은 실직국(悉直國) 또는 실직곡국(悉直谷國)이었다. 102년(파사왕 2) 신라에 합병된 실직국은 468년(장수왕 56)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일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505년(지증왕 6) 신라가 다시 회복해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파견했다. 757년(경덕왕 16) 실직주는 삼척군으로 개칭되고, 태수가 파견되어 죽령(竹嶺)과 만경(滿卿), 우계(羽溪), 해리(海利) 등 4개 현을 관할하였다.
995년(성종 14) 고려시대 지방행정 구역이 10도 체제로 개편되면서 삼척군은 척주(陟州)로 승격되어 삭방도(朔方道)에 소속되었으며, 단련사(團練使)가 파견되었다. 현종(顯宗) 때 5도양계 체제가 확립되면서 동계 소속의 삼척현이 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이때 속현인 우계현(羽溪縣)은 강릉부에 이속되었다. 1373년(공민왕 22)에는 현령 대신 안집중랑장(安集中郞將), 1377년(우왕 3)에는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 삼척 지역은 거란과 몽골의 침입뿐만 아니라 왜구의 침입도 빈번하였다. 삼척 지역에는 한때 외적을 불법(佛法)으로 물리치기 위해 미륵신앙(彌勒信仰)이 널리 퍼져 나가기도 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전주에서 살다가 170호를 이끌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당시 칭기즈칸(成吉思汗)의 막내동생 옷치킨이 지배하던 만주 연길(延吉) 부근에 정착했다. 이안사는 여기서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達魯花赤, 총독)로 임명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옷치킨 왕국에서 고려계 몽골의 군벌 가문으로 성장해갔다. 이안사-이행리(李行里)-이춘(李椿)-이자춘(李子春)-이성계로 이어지는 이씨 가문은 다루가치의 지위를 승계하면서 함주(咸州, 함경남도 함주군), 등주(登州, 함경남도 안변군), 화주(和州, 함경남도 영흥군)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1393년(태조 2) 삼척은 이안사의 외향이라고 하여 부(府)로 승격되어 부사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 8도제가 확립되면서 삼척부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당시 영동지방 최대 규모의 행정조직을 갖춘 도시였던 삼척도호부는 정3품의 부사(府使)가 행정을 총괄하고, 향교의 교수(종6품), 삼척 포진의 영장(營將, 정3품 무관) 등 많은 행정기관과 관원들이 배속되었다. 강릉에서 경북 평해까지 15개 역참을 관장했던 찰방(察訪, 정6품)도 삼척에 있었다.
삼척이 유서깊은 도시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적은 바로 죽서루가 아닌가 한다. 삼척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려면 죽서루에 대해 알아야 한다. 죽서루는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과 함께 관동팔경(關東八景) 가운데 하나다. 죽서루는 오십천(五十川)이 감돌아가는 물돌이의 바위벼랑 위에 날아갈 듯 아름답게 세워져 있다.
죽서루 평삼문
죽서루 안으로 들어가려면 정문격인 평삼문(平三門)을 지나가야 한다. 평삼문은 지붕마루를 수평으로 꾸민 3칸으로 된 문이다. 중앙칸의 지붕을 협칸보다 높게 한 문을 솟을삼문이라고 한다. 죽서루 평삼문의 지붕 형태는 맞배지붕이다.
죽서루 평삼문에 걸려 있는 '竹西樓' 편액
평삼문 처마에는 '竹西樓 甲戌 仲夏 一中居士'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일중거사(一中居士)라면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다. 김충현 생존시 갑술(甲戌)년은 1934년과 1994년이 해당된다. 김충현은 14살 무렵까지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공부를 했고, 1941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1941년 이후의 갑술년은 1994년이 되겠다. 중하(仲夏)는 한여름, 음력 5월을 가리킨다. 이 현판은 1994년 음력 5월에 쓴 것이다.
죽서루
죽서루
평삼문을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관동팔경 제6경(第六景) 죽서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내판에는 죽서루에 대해 '강원도 삼척시(三陟市) 성내동(城內洞)에 위치한 보물 제213호 누각. 죽루(竹樓) 또는 서루(西樓)라 부르기도 하나, 일설에는 동편에 죽죽선(竹竹仙)이란 명기(名技)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동쪽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누각 주변에 대나무 오죽이 무성한 것을 보아 대밭 서편의 누각이란 뜻이 아닌가 싶다.'고 설명하고 있다. 절이 대밭 속에 감춰진 듯 자리잡았기에 죽장사, 대밭 서쪽에 누각이 있었기에 죽서루란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죽서루 대나무숲
죽서루 대나무숲에 세워진 삼척읍성지 표지석
죽서루는 지방 관아에서 지은 공루(公樓)로 창건 연대와 처음으로 지은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금까지는 고려시대인 1266년(원종 7)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문집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안집사(安集使) 진자후(陣子厚)와 함께 서루(西樓, 지금의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죽서루가 1266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승휴가 기녀 죽죽선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죽서루를 세웠다는 전설도 있다. 이승휴는 두타산 구동(龜洞, 지금의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천은사)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다. 삼척에는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청순한 죽죽선이라는 기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의 곧은 정조는 대나무와 같았고, 아름다운 자태는 선녀와도 같았다. 어느 날 이승휴는 삼척읍내로 나와 오십천의 깎아지른 절벽에서 낚시터를 찾다가 그만 다리를 헛짚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마침 물가에서 나물을 뜯고 있던 죽죽선이 그를 구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휴의 어머니는 죽죽선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그를 송도로 떠나보냈다. 이승휴가 송도에서 과거에 급제하자 죽죽선은 날마다 오십천 절벽에 올라가 송도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랑하는 임은 오지 않았다. 임과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체념한 죽죽선은 오십천 푸른 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는 이승휴는 1275년(충렬왕 원년) 간관(諫官)이 되어 삼척에 내려와 옛 사랑 죽죽선을 찾았다. 하지만 죽죽선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이승휴는 지난 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죽죽선을 위해 죽서루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 명종(明宗, 1131∼1202, 재위 1170∼1197) 때의 문신인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 1148~1209)가 지은 '죽서루(竹西樓)'란 제목의 한시가 발견되면서 이 누각을 적어도 1209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극기가 고려 명종 대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죽서루 건립연대는 1190년대 이전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김극기의 시로 인해 이승휴의 죽서루 건립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아름답고 애틋한 전설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실려 있는 삼척읍성(출처 오피니언 뉴스)
1750년대 초 전국의 군현을 회화식으로 그린 지도첩인 해동지도(海東地圖)에는 죽서루가 삼척읍성(三陟邑城) 남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죽서루 안마당 동쪽의 대나무숲에는 '삼척읍성지(三陟邑城址)'라고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삼척읍성에 대한 기록은 1438년(세종 20)에 편찬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947년(고려 정종 2)에 삼척에 성을 쌓았다.'고 언급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편찬 연대 미상의 삼척부읍지(三陟府邑誌) 등 읍지류에는 1386년(고려 우왕 12)에 둘레 445m, 높이 1.2m 규모로 토성(土城)이 축조되었으며, 서쪽은 절벽으로 131m였다고 한다. 1454년(조선 단종 2) 3월에 완성된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삼척도호부 조에는 '삼척읍성은 토성이고, 둘레가 540보이며, 죽서루가 읍성 가운데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삼척읍성은 삼면이 석성(石城)이고, 둘레가 622m, 높이가 1.2m이며, 서편 성벽 131m는 절벽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척읍성은 1454년까지는 토성이었다가 1530년에는 토성을 허물고 보다 견고한 석성으로 개축했음을 알수 있다. 북서쪽과 북동쪽, 남동쪽에는 석성을 쌓고, 남서쪽 성벽은 자연절벽을 활용했다. 절벽 위 높은 곳에 자리잡은 죽서루는 전망이 탁 트여서 외적의 침입시 망루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척읍성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통치 때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죽서루와 성내동(城內洞)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은 삼척읍성 서쪽 절벽 위에 있던 죽서루를 중창했다. 1425년(세종 7) 부사 조관(趙貫, 1383~?)은 죽서루를 단청했다. 1471년(성종 2) 부사 양찬(梁瓚, 1443~1496)은 죽서루를 중수하였고, 1530년(중종 25) 부사 허확(許確, 1466~1537)은 죽서루의 남쪽 처마를 덧대어 지었다. 1591년(선조 24) 부사 정유청(鄭惟淸, 1534~1598)은 죽서루를 중수하였다. 죽서루는 조선 태종 대 김효손의 중창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지방 수령들이 죽서루를 중수 또는 중창한 것은 이 누각이 삼척부 객사의 부속건물로서 접대와 향연,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죽서루 마루밑
죽서루 우물마루
죽서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장방형 건물이다. 기단(基壇)과 초석(礎石)이 없이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17개의 기둥은 모두 길이가 제각기 다르다. 9개의 기둥은 자연석, 8개의 기둥은 석초(石礎)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자연석에 세운 기둥은 바위의 크기와 생김새에 따라 길이를 조절한 뒤 두리기둥(圓柱) 밑면을 그렝이질해서 세웠다. 상층에는 20개의 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올렸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을 중심으로 우물천장을 올렸다. 누각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마루바닥 밖으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기둥 사이는 벽체나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하였다. 지형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한 건축법에서 아름다운 자연미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죽서루 연등천장(緣背天障)
죽서루 우물천장
죽서루를 자세히 살펴보면 좌우 각 1칸에 놓인 공포(栱包)의 형태가 다르고, 또 내부 천장에 애초 측면 밖으로 나와 있던 도리의 뺄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볼 때 본래의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포는 기둥 윗몸에서 소첨차(小檐遮)를 보의 방향으로 놓고, 그 위에 대접받침(柱頭)을 놓아 초제공(初提栱)에 놓은 첨차를 받쳤으며, 이 첨차는 외이출목도리(外二出目道里)의 장여(長欐)를 받치고 있는 주심포식(柱心包式) 건축이다. 하지만, 각 부재들은 오히려 다포식의 모습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죽서루
가구(架構)는 7량(七樑)으로 앞뒤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大樑)를 걸고, 그 위에 첨차와 소로(小累)로 싸여진 포작식(包作式)의 동자기둥(童子柱)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고, 이 종량 위에 초각(峭刻)된 판형(板形)과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宗道里)를 받치고 있다.
죽서루 북서쪽의 갈야산과 오십천
죽서루에 올라서면 오십천과 그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낙동정맥(洛東正脈) 백병산(白屛山, 1,259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북서쪽으로 흐르는 오십천은 심포리에서 미인폭포를 이루었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계읍내를 통과한 뒤 신기면과 미로면을 지난다. 삼척시내로 들어온 오십천은 마평동, 성북동을 지난 다음 죽서루와 봉황산(鳳凰山, 146.7m)을 지나 동쪽으로 흐르다가 오분동 고성산(古城山, 99.6m) 북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오십천이란 이름은 발원지에서부터 동해까지 50여 번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죽서루 북서쪽 오십천변 우지동에는 삼척의 진산(鎭山) 갈야산(葛夜山, 178.3m), 남서쪽 건너편 미로면 하거노리에는 근산(近山, 505.4m)이 솟아 있다. 갈야산은 백두대간(白頭大刊) 두타산(頭陀山, 1,353m)에서 쉰음산(688m)을 지나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오십천을 만난 곳에 솟아 있다. 근산은 백병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북동쪽으로 육백산(六白山, 1,244m)과 핏대봉(879.4m), 안개산(安開山, 707m), 선구산(457m)을 지나 서쪽과 북쪽으로 오십천에 가로막힌 곳에 솟아 있다.
갈야산 고분군(古墳群)에는 삼척 김씨(三陟金氏) 시조의 무덤인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 강원도기념물 제15호)이 있다. 실직군왕릉을 일명 갈야릉(葛夜陵)이라고도 한다. 삼척 김씨 종중에 의하면 실직군왕릉의 주인공은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8남인 일선군(一善郡)의 아들 김위옹(金渭翁)이라고 한다. 일선군 추(錐)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번째 아들이다. 낙랑공주는 왕건과 그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 사이에서 난 딸로 고려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의 누이이기도 하다. 외조부는 태사내사령(太師內史令)을 지낸 충주의 호족 유긍달(劉兢達)이다. 실직군왕은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인 왕건이 인정을 베푸는 정책적 차원에서 책봉한 것으로 보인다.
죽서루 서쪽의 오십천과 엑스포공원
삼척시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오십천변에서 ‘삼척기줄다리기’라는 행사를 하고 있다. ‘기줄’이란 게줄을 뜻하는 말로 기둥이 되는 큰 줄에 작은 줄을 매달아 마치 줄의 모습이 게의 발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게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삼척부사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오십천에 제방을 쌓을 때 가래질에 필요한 새끼줄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보다 쉽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다는 놀이다.
지금의 죽서루에서는 그 옛날의 풍취를 찾을 수가 없다. 오십천변에 들어선 시립박물관과 문화예술회관, 세계동굴엑스포타운, 청소년수련관, 동굴신비관, 대규모 아파트 단지 등이 죽서루의 풍광을 망치고 있다. 옛 선인들의 풍류도 연기처럼 사라지고 고풍스런 죽서루만 외로이 오십천을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다.
죽서루 용문바위
죽서루 남쪽 바로 곁 옛 연근당 자리 근처에는 용문바위가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626~681)의 전설이 서려 있는 바위다. 전설에 문무왕은 죽어서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어 해안선을 따라 순행했다. 동해바다를 지키던 용은 어느 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바위벼량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 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거대한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이것이 바로 용문바위다. 용은 이 용문을 드나들다가 승천했다. 이후 용문바위는 장수와 다복 등 수복강녕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절벽 밑으로 뚫린 용굴이 삼척 땅 지하로 퍼져 있다는 설도 있다. 이중환(李重煥, 1691~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이 용굴 전설을 근거로 '삼척에 무너지는 터인 공망혈(空亡穴)이 자리잡고 있어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풍수지리설은 어디까지나 설일 뿐, 믿고 안 믿고는 본인의 선택 사항이 되겠다.
죽서루 암각서
용문바위에는 행초서체(行草書體)로 '龍門(용문)'을 새긴 암각서(巖刻書)가 있다. 글씨는 음각(陰刻)으로 새겼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
죽서루 용문바위의 성혈
용문바위 정상에는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 10개가 새겨진 선사 암각화(巖刻畵)가 있다. 10개의 구멍 중 선명한 것은 7개다. 지름 3~4cm, 깊이 3~5cm의 이 구멍들은 이른바 성혈(性穴)로 불린다. 성혈은 선사시대 원시신앙에서 다산, 풍요를 가져다주는 상징이었다. 음력 7월 7일 칠석(七夕)에 난임이나 불임 여성들이 죽서루 용문바위 일곱 성혈에 좁쌀을 넣고 간절하게 소원을 빈 뒤 다시 거둬 치마에 담아가면 아이를 얻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죽서루 회화나무 보호수
죽서루에는 높이 19m, 둘레 2.1m, 수령이 약 350년 된 회화나무(槐木, 槐花樹) 보호수가 있다. 회화나무 괴(槐)자를 파자하면 '나무 목(木)'자와 '귀신 귀(鬼)'자가 된다. 회화나무는 소위 귀신을 쫓는다는 나무다. 예로부터 궁궐이나 관아에서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잡귀를 쫓는다는 의미가 있다. 또 학문에 대성하고 벼슬길에서도 승승장구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
죽서루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세운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는 8각형의 기단 위에 팔각형의 장대 표석을 세웠다. 8각의 기단에는 각 면마다 정철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 등이 새겨져 있다. 이와 함께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이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나서 기행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다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죽서루가 정철의 유적인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정철을 기리는 의도는 좋지만 굳이 유서깊은 죽서루 경내에 기념비를 꼭 세워야만 했을까? 죽서루와 바위절벽, 대숲과 함께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아름드리 숲속에 우뚝 솟은 정철의 기념비는 매우 이질적이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관동별곡'에 죽서루와 오십천을 읊은 내용이 조금 들어 있다고 해서 정철의 기념비를 세울 만한 명분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죽서루가 마치 정철의 유적처럼 기념비를 세운 것은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다. 문화관광부의 역사 인식 수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남도 담양 임억령(林億齡)의 식영정(息影亭)과 김성원(金成遠)의 서하당(棲霞堂)에 세워져 있는 정철의 기념비와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도 그렇다. 식영정과 서하당은 임억령과 김성원의 유적이 아니라 마치 정철의 유적처럼 왜곡되어 있다. 정철이 식영정과 서하당, 죽서루에 세워진 자신의 기념비나 시비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정철 가사의 터 기념비
'관동별곡'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기행가사는 1555년(명종 10)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1522∼1556)이 지은 '관서별곡(關西別曲)'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관서별곡'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이기 때문이다. '관서별곡'은 백광홍이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었을 때 그곳의 자연 풍물을 두루 돌아다녀 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가사 작품이다. 정철도 '관서별곡'의 영향을 받아 25년이 지난 뒤에 이를 모방해서 '관동별곡'을 지었다. 문학사적으로도 '관서별곡'이 훨씬 더 중요한 작품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정철의 '관동별곡'만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란 말이 실감난다.
죽서루는 사실 이승휴의 유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죽서루에 전해오는 전설의 주인공도 이승휴가 아니던가! 이승휴는 죽서루에 걸려 있는 한시 판액에서 차운한 '陪安集使兵部陳侍郞(諱子俟)登眞珠府西樓次板上韻[배안집사병부진시랑(휘자사)등진주부서루차판상운]'도 지은 사람이다. 여몽전쟁 때 이승휴는 삼척주민들과 함께 고성산 요전산성에서 대몽항쟁도 했다. 두타산 천은사에는 이승휴의 유허가 있다. 따라서 죽서루 경내에 기어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면 그 주인공은 정철이 아니라 이승휴가 되어야 한다.
2017.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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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8 - 박세채 양산보의 묘갈명을 쓰다 (0) | 2018.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