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3년(숙종 29) 양택지는 김장생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4차례나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택지는 양진태, 양학연과 함께 소쇄원가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이다. 그해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명나라 신종(神宗)을 위한 사당 만동묘(萬東廟)가 건립되었다. 유림들은 만동묘를 황묘(皇廟)라고 불렀다. 양제신(梁濟身)은 소쇄원에서 재배한 대명도를 만동묘에 보내 제수로 바쳤다. 당시 조선에는 사대주의 사상이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제신은 양응수(楊應秀), 송명흠(宋明欽)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관찰사로부터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다. 그는 또 송시열의 5대손 송환기(宋煥箕)와도 교유하였다.
1710년(숙종 36) 양택지의 2남 양운룡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창흡은 양운룡의 죽음을 애도하는 편지를 양택지에게 보냈다. 1711년(숙종 37) 당숙, 종형제들과 원림의 중흥을 위해 힘쓰던 소쇄원 6대 주인 양택지가 세상을 떠났다. 양택지는 전도유망했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문집 '당산유고'는 미간행 상태로 소쇄원에 전해오다가 1984년 경 분실되었다. 양택지는 원래 양천운-양몽우-양진혁 계보였는데, 양자홍의 장남이자 소쇄원가의 장손 양천리의 증손으로 입계하였다. 양택지가 입계한 뒤부터 소쇄원은 장자 상속으로 굳어졌다.
1717년(숙종 43) 양택지가 팔도 유생 대표로 상소한 김장생의 문묘 배향이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김장생은 문묘의 서무(西廡)에 배향되었다. 그해 김창흡은 남도를 유람할 때 소쇄원에 들러 몇 달을 묵었다. 김창흡은 양경지, 능주목사 조정만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대문장가 김창흡이 소쇄원에 머물자 근동의 시인 묵객들이 몰려들면서 창평의 문예부흥이 이루어졌다. 1722년(경종 2) 경 60세의 양경지는 자신이 쓴 시에서 '15살 무렵 대봉대 남쪽 모퉁이에 진달래를 심어 놓았는데,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네.'라고 읊으면서 후세에도 함부로 꺾지 말고 잘 기르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시에서 '광풍각 국화는 내가 심었는데, 가을에 꽃이 활짝 필 때 이웃 아이들이 모두 꺾어가버려서 매우 안타깝네.'라고 읊었다. 그가 소쇄원을 얼마나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727년(영조 3) 경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은 양채지의 부탁으로 그의 증조부 양천운의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이의현은 보학(譜學)에 밝아 당시 조선의 298개 성씨를 모아 정리하였다. 다음은 양천운의 묘지명 전문이다.
[司憲府監察梁公墓誌銘 幷序
湖南之昌平縣。有所謂瀟洒園者。泉石花竹之勝。宜於碩人之薖軸。梁公諱山甫。隱居行義於其中。仍以瀟洒爲號。鄕人咸服其高致。有子曰鼓巖公諱子澂。亦棄縣監。終老於斯。鼓巖之子諱千運。字士亨。始登國子上庠。歷官童蒙敎官,司憲府監察,司贍寺主簿。意不樂棄歸。守故林以沒。俱無愧於皇甫之傳。盖瀟洒公少挾筴於靜菴先生。最與河西金公麟厚爲道義交。鼓巖公又爲河西之子壻。仍師事之。監察公與其兄千頃,千會。出入牛溪先生之門。少見賞於重峰趙文烈公。淸陰金文正公亦與交厚。用能成就其行業氣節。祖子孫三世蔚然爲南土之望。盖有師友浸灌之功。不獨以資稟之美也。魯無君子。斯焉取斯。不其然乎。監察公沒已九十年而墓無識。今其曾孫采之千里來扣。謁余文不已。余非於辭者。其何能闡發潛德。以垂來世。顧余高王考雙谷公與公有同榜好。義不可終辭。遂取其狀而略叙之。公性篤於孝友。鼓巖公病革。嘗糞禱天。一如古人。前後喪。俱廬墓終三年。諱日在隆冬。至老不廢澡浴。雖於避寇蒼黃中。亦備儀設奠。哀動傍人。推以及於庶叔。亦盡其誠意。二兄抗危言及刑辟。公旣深傷之。姊妹或死於烈。或其夫殉國難罹家禍。痛衋尤至。撫孤恤嫠。多人所難及。自先無析箸。公仍戒子姪曰。吾家以孝相傳。本無文券。爾等各自祗飭。無忝所生。以小學三綱行實等書。訓誨子女。家法甚正。至後子孫。多以行誼見稱。瀟灑公嘗作孝賦。詞旨婉篤。河西步其韻而稱道之。公之諸行。皆本於此云。壬辰之亂。鼓巖公方老病。將奔問官守。公泣止之。鼓巖公遂命公從高苔軒敬命軍。高公閔其無兄弟。强使歸養。公不得不勉從而心常歉然也。始與賊臣爾瞻有舊。及其主兇論。卽絶之。所善多名勝士。宦游數年。一不跡權貴門。其介潔又如此。公嘗自號瀛洲。亦可見志尙出埃壒之表矣。梁氏出耽羅。爲羅麗著姓。入我朝。累世不振。至諱泗源。中廟朝。薦賢良。官主簿。號蒼巖。卽瀟灑公考也。公生於隆慶戊辰。卒於崇禎丁丑。享年七十。葬于本縣之中山先兆下。初配安東金氏。生一男夢禹。後配昌原丁氏。生三男三女。男夢羲,夢炎,夢堯。女皆嫁士人。側出男夢鯉。內外孫曾甚繁。不盡錄。系之以銘。銘曰。
允矣梁公。克著世德。本乎家庭。資於麗澤。如彼漢水。紀于南國。以涵以蓄。永流無極。
사헌부 감찰 양공 묘지명 병서
호남의 창평현에 소쇄원이 있으니 샘과 돌, 꽃과 대나무의 경치가 뛰어나 덕이 높은 은사가 한가로이 머물기에 좋았다. 양공 휘 산보가 은둔하여 살면서 그 가운데서 의를 행하고 인해서 소쇄로 호를 삼았는데,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높은 운치에 감복하였다. 아들 고암공이 있었으니, 휘는 자징으로 역시 현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서 만년을 마쳤다. 고암의 아들은 휘가 천운이고, 자는 사형(士亨)이다. 처음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동몽교관, 사헌부 감찰, 사섬시 주부 벼슬을 지냈으나 내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다가 버리고 돌아와 옛날의 은둔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으니, 모두 황보밀의 전기(傳記)에 비해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대체로 소쇄공이 젊어서 정암 선생(조광조)에게 책을 끼고 배웠고, 하서 김인후 선생과는 가장 가까이 도의로 교유하였다. 고암공은 또 하서 선생의 사위가 되고, 그로 인해서 하서 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리고 감찰공이 그의 형 양천경, 양천회와 같이 우계 선생(성혼)의 문하에 드나들었으며, 젊어서는 중봉(重峯) 조 문열공(조헌)에게 칭찬을 받았고, 청음(淸陰) 김 문정공(김상헌)과는 역시 서로 교분이 두터워서 그 품행과 기절(氣節)을 성취할 수 있었다.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 3대가 융성하게 남쪽 지방의 명망 있는 인물이 되었으니, 대개 스승과 친구 간에 점차로 주입시킨 공이 있어서이고 유독 타고난 성품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했을 것이냐?’라고 한 것이 그러하지 않은가? 감찰공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90년이 되었는데, 산소에 기록이 없었다.
그의 증손 양채지는 천리 길을 찾아와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다. 나는 문장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감춰진 덕행을 드러내어 후세에 전하겠는가? 돌이켜 보건대 나의 고조부 쌍곡공(雙谷公, 이사경)이 공과는 과거에 함께 급제한 정의가 있어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 가장(家狀)을 가져다 대략 서술한다.
공은 타고난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는 데 독실하여, 고암공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변을 맛보며 하늘에 빌기를 한결같이 옛날 사람처럼 하였으며 전후하여 상(喪)을 당해서는 여묘(廬墓)살이하면서 3년의 상기를 마쳤다. 그리고 휘일(諱日)이 한겨울이었지만 늙도록 깨끗이 목욕하기를 폐하지 않았다. 또 아무리 도둑을 만나 창황(蒼黃) 중이라도 갓을 쓰고 의식을 갖추고 전(奠)을 마련하여 곁엣 사람도 애통하게 하였으며, 미루어 서숙(庶叔)에게 미쳐서도 역시 그 성의를 다하였다.
두 분 형이 위태로운 말에 항거하다가 형벌을 받고 죽는 데 미쳐 공이 이미 매우 가슴 아파하였으며, 자매가 더러는 굳게 지조를 지키다가 죽기도 하고, 더러는 그 남편이 국가의 환란에 목숨을 바치기도 하였으니 집안의 재화를 만남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였다. 더욱 외로운 아이를 어루만져 주고, 홀어미를 불쌍히 여기는 데 이르러서는 남들이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솔선하여 세간을 나누어 가지지 않았다. 공이 자질(子姪)에게 경계하기를, '우리 집안은 효도로 서로 전하였고 본래 문권(文券)이 없었으니, 너희들은 각기 스스로 공경하고 경계하여 너희를 낳아준 이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소학', '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글로 자녀를 가르치니, 집안의 법도가 매우 올바르게 되어 뒷날 자손이 행의(行誼)로 칭찬을 받는 자가 많은 데 이르렀다. 소쇄공이 일찍이 '효부사(孝婦詞)'를 지었는데 그 뜻이 유순하고 독실하므로 하서공이 그 운을 따라서 일컬었으니, 공의 모든 행실은 모두 여기에서 근본하였다고 한다.
조일전쟁 때 고암공이 바야흐로 늙고 병이 들었음에도 장차 관수(官守)에게 달려가 물으려고 하자 공이 울먹이며 만류하니, 고암공이 마침내 공에게 태헌(苔軒) 고경명의 의병군에 종군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고공이 그의 형제가 없음을 민망히 여겨 강제로 되돌아가서 어버이를 봉양케 하였으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따랐지만 마음에는 항상 겸연쩍게 여겼다.
처음에 적신(賊臣) 이이첨과 친분이 있었으나, 그가 흉측한 논의를 주장함에 이르러서는 바로 그와 절교하였다. 그리고 친하게 지낸 바 명망 있는 인사가 많았고 벼슬하는 몇 해 동안 한번도 권귀(權貴)의 집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니, 그의 깨끗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이 일찍이 스스로 호를 영주라 하였는데, 뜻하는 바가 속세 밖에 뛰어났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양씨는 제주에서 나와 신라, 고려에서 드러난 성씨가 되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여러 대 떨치지 못하다가 휘 사원에 이르러 중종조에 현량으로 추천되어 벼슬은 주부, 호는 창암이었으니 바로 소쇄공의 아버지이다. 공이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태어나 숭정(崇禎)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0세이다. 창평현의 중산(中山) 선영 아래 장사지냈다. 처음에 맞은 배위(配位)는 안동 김씨로, 1남을 낳았는데 양몽우이다. 나중에 맞은 배위는 창원 정씨인데 3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양몽의, 양몽염, 양몽요이고, 딸은 모두 사인(士人)에게 출가하였으며, 측실에게서 낳은 아들은 양몽리이다. 안팎의 손자와 증손자는 매우 번성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진실하도다 양공이여, 선대의 덕행을 잘 드러내었도다. 가정을 근본으로 하여 친구와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으며 의뢰하였도다. 저 한강의 물처럼 남방의 기강이 되었도다. 젖기도 하고 쌓기도 하여 한없이 길이 전하리로다.]
1728년(영조 4) 양경지는 남인 가문 출신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일어나자 정민하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도 했다. 노론의 지지로 영조(英祖)가 왕위에 오르자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少論) 과격파들은 남인과 공모하여 소형세자(昭顯世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왕으로 추대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 이인좌의 반란은 안성에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패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양경지는 또 막내동생을 한양에 보내 권상하(權尙夏)의 종계변무(宗系辨誣) 운동에 가담케 했다. 그해 진사시에 합격한 양경지의 2남 양학연은 성균관에 들어가 장의(掌議)가 되었다.
1731년(영조 7) 양경지의 아들 양학연과 양채지의 아들 양학겸(梁學謙)이 중심이 되어 '소쇄원사실'이 간행되었다. 양학연은 시에 능했으나 문집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소쇄원을 현양하는 한편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유림으로 활동하였다. 양학겸은 '소쇄원사실'의 발문을 썼다. 양채지의 또 다른 아들 양학점은 소쇄원에서 가까운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정우당, 양채지의 증손자 양석규는 담양군 남면 인암리에 춘추정(春秋亭)을 지어 경영했다. 양석규는 송환기의 문인이다. 양학헌의 손자이자 양제화의 아들 양회즙, 양산보의 5대손 양응지의 현손 양팔관도 송환기의 문인이다. 양학점의 증손자 양필홍은 송시열의 8대손 송달수(宋達洙)와 송래희의 문인이다. 소쇄원가의 후손들은 송시열-송환기-송달수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양학연, 양학겸 이후로는 소쇄원가에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소쇄원사실'에 실려 있는 '처사공실기(處士公實記)'를 보면 양산보가 소쇄원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당나라 이덕유(李德裕, 787~849)가 평천장(平泉莊)을 조성하고 그 자손들에게 장원의 나무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양도하지 못하도록 한 고사를 따라 양산보도 자신이 지은 소쇄원 역시 남에게 팔지 말되 원래 그대로의 원형을 보존하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중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는 후손들로 하여금 맑고 깨끗한 선비정신을 더럽히지 말고 절의를 지키면서 살아가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소쇄원사실'에 의하면 소쇄원은 양산보와 아들 양자징, 손자 양천운 등이 3대에 걸쳐 경영하면서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1734년(영조 10) 2월 양경지가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 양학연은 아버지 양경지의 시문을 모아 편집, 필사하여 '방암유고' 2권 2책을 만들었다. 1737년(영조 13) 전라도 유생들이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배향할 것을 재차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44년(영조 20) 양학연 등의 주도로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묘 배향을 통해 송시열의 학문적, 정치적 권위가 비로소 나라의 공인을 받게 되었으며, 특히 영조, 정조 이후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는 조선의 사상적 지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소쇄원도 1
1755년(영조 31) 양진태와 양학연, 양학겸은 제주 양씨 족보를 만들어 양씨 가문의 계보를 밝혔다. 그해 4월 하순 양진태가 제작한 소쇄원 그림을 토대로 소쇄원의 구조물과 조경시설을 상세하게 묘사한 소쇄원도 목판본(가로 35㎝, 세로 25㎝)이 간행되었다. 소쇄원 그림은 송시열이 그렸다는 설도 있다. 소쇄원도는 양학연과 양학겸이 중심이 되어 절등재(絶等齋), 즉 죽림재에서 판각했고, 양씨 족보도 여기서 인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산림으로 낙향한 선비들은 자신의 은거지나 강학지를 기념하는 산거도(山居圖)를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도 별장과 원림을 그린 별서도(別墅圖), 살림집과 정자를 그린 제택도(第宅圖)가 꽤 많이 남아 있다.
소쇄원도는 계류를 중심으로 건물과 연못, 담장, 석축, 수목 등의 입면을 사방으로 눕혀서 새기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소쇄원도에는 건물의 이름, 식물의 이름,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목판본에 따르면 입구 담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 수제(手題) 편액이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도 상단에는 김인후의 '소쇄원제영' 48수의 시제(詩題), 왼쪽에는 '崇禎紀元後三乙亥年淸和下浣刊'(숭정기원후삼을해년청화하완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숭정년(崇禎年)은 1628년부터 시작되는데, 그로부터 세 번째 을해년(乙亥年)은 1755년에 해당한다. '淸和'(청화)는 4월, '下浣'(하완)은 하순(下旬)이다.
소쇄원도는 양각을 주로 하고 부분적으로 음각을 가미해서 소쇄원의 실제 모습을 담은 기록화이다. 소쇄원도는 현재 두 종류가 남아 있지만 목판의 원본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두 목판화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글자의 유무다. 소쇄원도 1에는 '在昌平南十里'(창평 남쪽 10리에 있다), '瓮井'(독을 묻어서 판 우물)이라는 글자가 있지만, 소쇄원도 2에는 글자가 없다.
소쇄원도 2
소쇄원도 1이 제작될 당시에는 창평현 소재지가 성산호 부근에 있어서 치소(治所)에서 소쇄원의 거리가 약 십리(4km)였다. 하지만, 소쇄원도 2가 제작될 당시에는 약 6㎞ 정도 떨어진 곳으로 창평현의 치소가 옮겨갔다. 그래서 나중에 제작된 소쇄원도 2에서는 글자를 모두 지운 것으로 보인다. 또 소쇄원도 1과 2는 제월당과 연못 쪽에 있는 나무, 담장 구멍의 표현에서도 조금 차이가 난다.
소쇄원도에는 애양단 담장 구석에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김인후가 1548년에 쓴 '소쇄원 48영'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동백나무는 그 이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 매대에 묘사된 큰 나무는 말라죽은 측백나무로 보인다.
소쇄원도를 제작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소쇄원도 오른쪽에는 '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尤庵先生手筆'(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우암선생수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를 근거로 소쇄원도를 우암(송시열)이 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송시열의 생존 연대(1607~1689)와 소쇄원도의 제작 시기(1755)가 맞지 않는다. 이 문구는 소쇄원에 송시열이 쓴 글씨가 있다는 뜻이다.
1756년(영조 32) 양택지 등 팔도 유생들의 노력으로 송준길은 마침내 문묘에 제향되었다. 1771년(영조 47) 양천운의 증손자이자 양경지의 아들 양학연은 지역 유림의 대표로 김인후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다. 소쇄원가 사람들은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김창흡 등 서인 특히 노론 계열과 가까웠으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74~1775년(영조 50~51) 양학연은 창평학구당(수남학구당)의 유사를 맡았다. 양필홍도 창평학구당의 유사를 맡은 적이 있다.
18세기 영조 대에 소쇄원은 이미 당시 창평 고지도에 명기되어 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영조 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해동지도(海東地圖)'에 수록된 창평 지도에 소쇄원은 식영정, 삼우헌(三友軒)과 함께 그 이름과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고종 대의 창평 지도에도 소쇄원은 식영정, 학구당과 함께 표기되어 있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
1786년(정조 10) 양자징은 전라도 유생 430여 명의 서명으로 마침내 필암서원에 추배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양학연 등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김인후는 호남 유림으로서는 최초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다. 1825년(순조 25) 창평 사람들에 의해 명옥헌(鳴玉軒) 뒤에 양산보를 배향하는 도장사(道藏祠)가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양산보 외에 이 지역 출신 오희도(吳希道), 고부천(高傅川), 정한(鄭漢), 오이규(吳以奎), 고두강(高斗綱), 오이정(吳以井), 오대경(吳大經) 등이 배향되었다. 그러나 도장사는 1868년(고종 5) 대원군(大院君)의 서원훼철령(書院毁撤令)에 의해 훼철되었다. 지금은 유허비(遺墟碑)만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소쇄원 12대 주인 양현묵은 족보의 발문을 쓰는 등 족보 만드는 일에 힘쓰다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양현묵이 죽자 양주환이 족보 제작을 주도했다. 양주환은 김덕령의 후손 김만식(金晩植), 정철의 12대손이자 계당의 주인 정운오(鄭雲五)와 교유하였다. 정운오는 대표적인 지역 문인으로 양주환의 회갑연 축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운오는 지실(芝室) 마을 계당에 머물면서 손님이 오면 소쇄원을 구경시켜 주고,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소쇄원 13대 주인이 20대의 나이에 요절하자 13대 종부 해주 최씨가 소쇄원을 지켰다. 최씨는 남편이 일찍 죽은데다가 하나뿐인 아들도 서형(庶兄)을 찾아 일본으로 떠나자 소쇄원을 홀로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서형은 형편도 변변치 못한데다가 각기병까지 걸려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다가, 지실 최고 부자집에서 시집 온 부인인 연일 정씨 정후덕 종부가 돈을 보내주어 일본에서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정후덕 종부는 원림을 보수할 여력이 없어서 화순의 고사정(高士亭)에서 치마폭에 기와를 담아와 소쇄원을 보수하기도 했다. 고사정은 최후헌(崔後憲)이 부친 최홍우(崔弘宇)를 기리기 위해 1678년(숙종 4)에 건립한 누정이다. 최홍우는 조일전쟁 때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은 최경장(崔慶長)의 아들이다.
소쇄원 14대 주인 양동호도 양씨 족보를 만드는 일에 힘썼다. 그는 양자징의 후손으로 '석초문집(石樵文集)'을 남겼으며, 소쇄원을 읊은 경관시도 많이 지었다. 그의 시에 의하면 소쇄원 15대 종부는 갓 시집왔을 때 계곡의 물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1887년(고종 24) 소쇄원은 한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이후 소쇄원 주변에 많은 누정이 세워졌다. 1890년(고종 27) 김만식 등 후손들은 권필(權鞸)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선조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산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취가정(醉歌亭)을 세웠다. 1900년에는 문병일(文炳日)이 부친 문유식(文愉植)의 뜻을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삼괴정(三愧亭)을 세웠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인 1915년 소쇄원은 조선총독부에 빼앗겼다. 제월당은 한때 면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924년(대한민국 임시정부 6년) 광풍각을 다시 중수할 때 오준선(吳駿善)은 '광풍각중수기(光風閣重修記)'를 지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한 광풍각을 양산보의 후손 양인묵(梁仁黙)과 양재익(梁在益)이 힘을 모아 다시 중수했다는 내용이다. 오준선은 양인묵의 아들 양재윤(梁在潤)의 부탁을 받고 이 기문을 썼다. '광풍각중수기' 편액은 광풍각에 걸려 있다.
'광풍각중수기' 편액
[光風閣重修記
貴富易歇, 名德未沫, 吾於瀟灑園梁先生別業見之矣. 盖先生以豪傑之姿, 師靜菴而友湛齋, 師友之盛, 淵源之正, 非後世之所能企及, 卽其園中, 光風閣霽月堂, 先生之懷寶遯世藏修焉遊息焉之所也. 壁有湛老遺墨, 楣揚尤翁眞筆, 芬馥尙留, 分外淸奇, 其幽邃爽朗, 直與邵窩之淸閒水竹, 濂溪之灑落胸襟, 足相上下, 此後生小子之想像景仰, 歷三百年而不衰也. 不然, 湖以南依山傍水, 好亭榭好樓臺, 何限而少焉, 飄忽盡歸, 烏有其與存者, 盖無幾焉, 豈非遺澤易斬, 子孫不勤保守而然歟? 又爲之曠然一唏也. 雖以先生之所築, 歲久傾圮, 先生後孫仁默, 慨然興感, 詢議于門親在益, 傾家貲而修茅, 礎砌仍舊, 棟宇重新, 於是山嶽增秀, 澗溪騰頌, 先生之風, 與之俱長, 嗣守之美, 亦足多尙, 噫! 苟非賢子孫之紹述, 雖有先祖之名園, 不可恃爲久長矣. 如李贊皇之平泉, 非不壯麗, 而未及三世平泉無主, 裴晋公之午橋, 何等爽塏, 而未聞後孫保守午橋. 是知亭榭之足恃者, 不在一時繁華而已, 其先生之守道遺安爲何如哉? 向所謂貴富易歇而名德未沫者此也. 嗣後而勿替, 引之守之, 固而
不忍荒廢, 則將見貫滄桑而超劫灰矣. 仁默之胤在潤屬余記之. 余於先生, 有曠世之感, 遂畧者重修始末, 以爲托名之榮云爾.
閼逢困敦仲春日 後學 錦城 吳駿善謹書.]
광풍각에는 '광풍각중수기'와 함께 조병호(曺秉皓)가 한글로 번역한 '광풍각중수기문' 편액도 걸려 있다. 조병호에 대해서는 '후학(後學)'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광풍각중수기문' 편액
[광풍각중수기문
부와 귀함은 쉽게 없어져도 이름과 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소쇄원 양선생의 별업에서 보았다. 대개 선생은 호걸의 인품으로 정암(조광조)을 스승삼고 담재(湛齋, 김인후)를 벗 삼았으니 사우의 성대함과 연원의 바름은 후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쇄원 가운데 광풍각과 제월당은 선생이 보배를 품고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몸을 수양하고 휴식을 취하던 장소이다. 벽에는 담재의 글씨가 있고, 처마에는 우옹(尤翁, 송시열)의 친필이 걸려 있어 짙은 향기가 아직 남아 내외가 더없이 아름다우며 깊숙하고 상쾌함이 바로 옛날 소강절(邵康節, 소옹)의 청한한 물과 대나무, 주렴계(周濂溪, 주돈이)의 깨끗한 풍치와 더불어 서로 비등하니 이것은 후생들의 상상과 경모가 삼백 년이 지나도 쇠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남에서 산수를 배경으로 한 좋은 정자, 좋은 누각이라도 조금 있다가 홀연히 퇴락할 것이니 어찌 보존할 수가 있겠는가? 대개 얼마 있지 않아 남긴 윤택이 쉬이 없어지는 것이 어찌 자손이 부지런히 보수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한번 그것 때문에 서러워하노라. 비록 선생이 건축한 것이 해가 오래되어 퇴락했다고는 하지만 선생의 후손 인묵(仁默)이 개연히 감흥을 일으켜 종친 재익(在益)과 의논하여 자기의 집안 재산을 덜어서 수리함에 주춧돌과 섬돌은 그대로 두고 동우(棟宇)는 새롭게 하니 이에 산악이 빛을 더하고 계곡이 윤택하니 선생의 기풍이 더불어 영구해지고 후손이 이어서 지키는 아름다움이 또한 숭상하기에 족하도다. 아 아, 참으로 어진 자손들이 선대의 일을 이어받아 행하지 않았다면 비록 선조의 명원이 있다 하더라도 영구히 보존한다고 믿을 수 없으리라. 예컨대 이찬황(李贊皇, 이덕유)의 평천장은 장려(壯麗)하지 않음이 없지만 삼대를 못 가서 그 주인이 없어졌고, 배진공(裴晋公, 배도)의 오교장(午橋莊)은 더없이 상쾌하고 좋았지만 후손이 오교장을 보수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정자의 믿을 만함이 한때의 영화로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알 수 있으니 선생이 도를 지키고 편안함을 물려준 것이 어떠했겠는가? 앞에서 말한 ‘부귀는 쉽게 없어져도 이름과 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함이 바로 이 말이다. 대를 이어 막힘이 없이 보수하여 황폐의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장차 상전벽해의 변화를 뚫고 겁회(劫灰)를 뛰어 넘을 수 있으리라. 인묵의 맏아들 재윤(在潤)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선생과는 세상에서 드문 감흥이 있어 마침내 중수의 시말을 대략 기록하여 이름을 기탁하는 영광으로 삼는다.
갑자년(1924) 봄날 후학 금성 오준선(吳駿善) 삼가 쓰다.]
오준선(吳駿善, 1851∼1931)은 구한말의 성리학자다. 호는 후석(後石)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전남 광산(光山)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임헌회(任憲晦), 송근수(宋近洙),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 등 기호학파의 쟁쟁한 인물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1925년(임시정부 7년) 30세 무렵의 양종호는 소쇄원 곁에 석초정사(石樵精舍)를 세웠다. 1927년(임시정부 9년) 창녕 조씨(昌寧曺氏) 조여심이 고경명 등과 더불어 소요하던 유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 조은환(曺殷煥)은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용담대(龍潭臺) 위에 소산정(篠山亭)을 건립했다. 1928년(임시정부 10년) 조유환 曺宥煥)은 고서면 금현리 광산 마을에 만옹정(晩翁亭)을 지었다.
1929년(임시정부 11년)부터 1931년(임시정부 13년)까지 양종호는 창평학구당의 유사를 맡았다. 그는 창평 향교의 장의를 맡기도 했다. 1939년(임시정부 21년) 제주 양씨 문중 차원에서 소쇄원 되찾기 운동을 벌인 끝에 마침내 일제의 조선총독부로부터 원림을 돌려받았다. 1949년 조희빈과 조치선은 농사일을 살피기 위해 고서면 분향리 잣정 마을 수남벌판 한가운데에 관가정(觀稼亭)을 지었다.
1979년 소쇄원 내원에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쓰러졌다. 1981년 소쇄원은 국가 사적 304호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1986년 양산보의 12대손 양승종(梁昇鍾)은 '소쇄원기(瀟灑園記)'를 썼다. 이 기문에는 광풍제월(光風霽月), 토홍폭포(吐虹瀑布), 침계기반(枕溪棊盤), 구천전류(臼川轉流) 등 소쇄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는 한편, 양산보가 소쇄원을 축조한 배경, 당시 김인후와 기대승, 고경명, 정철 등이 소쇄원을 칭송했던 말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쇄원기'에는 또 김수항이 쓴 기문이 병화로 타버려 후손인 자신이 기문을 쓰게 된 경위도 담겨 있다.
'소쇄원기' 편액
[瀟灑園記
鳴陽之東瑞石之北에 有洞曰支石이라. 臺中之別界요 海東之名勝이라. 光風霽月은 浩然之襟懷요 吐紅瀑布는 吼壑之淸雷라. 枕溪碁盤은 桃源之日月이요 臼川轉流는 太極之銀環이라. 玉湫橫琴은 百缺之淸絃이요 質川洛水는 洗浴之警鍾이라. 板木駕壑은 煙海之危橋요 四十八絶景은 詠賞之浩畵라. 疊石垣墻은 陰陽之神工이요 待鳳迎客은 人衆之鳳凰이라, 全景佳愛를 靜觀聚胸에 心遊鳶魚飛躍之界라. 可適於道高德重之君子留占處而惟我先祖考蒼巖公이 自光山之泥場으로 奠居于此하사 仍以子孫世居가 今四百餘星霜而古里之桑梓가 無恙하며 先人之詩禮가 相傳일새 公의 長子瀟灑先生은 靜菴趙先生門人으로 甫齡十七才에 登謁聖第하사 令聞이 掀朝러니 未幾에 先生의 乙巳士禍로 被謫綾州할새 陪從還鄕하사 易策泉石하시고 築園亭于瀑布上而名之瀟灑하며 因以自號하사 與東方諸賢으로 講明道義하시며 作愛日歌而唱之하시고 著孝賦而誦之하시니 其道學忠孝之可槩也라. 明廟壬子에 以重階로 累徵不起하셨다. 河西金先生曰 以兄禮事之하며 精思隨偃仰에 妙契入鳶魚라하고 高峰奇先生曰 公은 外和而內嚴하니 望之不覺屈藤이라 하며 松江鄭先生曰 與公相對에 使人襟懷爽然이라하고 霽峰高先生曰 先生은 爲人이 奇偉하고 性且孝友而見者가 咸稱有德君子라 하며 玄石朴先生曰 先生은 靜菴之門에 一巨星이라 하고 西河李先生曰 先生之學언 篤信小學하야 傍及四書五經而尤用力於易之强柔變化消長往來之象에 有契焉이라 하셨다. 諸賢多慕는 不可勝載라 次子鼓巖先生은 金文正公河西先生의 高弟로 多蹟功路하시고 退述親業하시며 配享于長城筆岩書院하시다. 吾之先園이 果如是世復又世繼述之所也 則築園之雅意가 但不以自私而良有遠圖在耳라 亭之有記은 古之例然也에 曾有文谷金先生之述而未懸而傳焉이러니 累洗兵豨에 遽作一泡라. 今玆宗論으로 族叔在三氏가 叩門命記할새 不肖가 豈不以知其不敢爲而爲之는 於促에不得己也라. 園內에 往在鼓岩精舍 待鳳臺 五曲門 中門 及支石公之負暄堂等而只餘墟痕하고 傳不過止於光風霽月之名而己也에 子姓之齏恨이 果何如哉아. 際蒙國家文化財第三百四號之保而完復舊容則吾先園之過去年者가 果如是幾百則未來年者도 又是幾百千也乎리라.
大韓民國 六十八年 丙寅 立秋節 十三世 昇鐘 敬紀
同世孫 燕川里 太鎬 擔刻懸]
[소쇄원기
명양현(창평의 옛 이름)의 동쪽, 서석산의 북쪽에 고을이 있으니 ‘지석(支石)’이라. 대(臺) 가운데 별천지요, 우리나라의 명승지이로다. 광풍제월은 호연의 회포요, 무지개를 토해내는 폭포는 후학의 맑은 우레로다. 계곡을 베고 누운 바둑판은 도원의 세월이요, 구천(臼川)에 휘도는 물줄기는 태극의 은고리로다. 맑은 물가에 비낀 거문고는 백결의 맑은 곡조요, 대 홈통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세속을 씻는 경종이라. 골짜기를 가로지른 널빤지는 연해의 위태로운 다리요, 사십팔 절경은 읊고 감상하는 호탕한 그림이로다. 돌로 쌓은 담장은 음양을 아는 신공의 작품이요, 대봉대에서 맞는 손님은 사람 중에 봉황이라. 아낄 만한 전경을 고요히 바라보고 가슴에 품으니 연비어약의 경지에서 노는 듯하여라. 도가 높고 덕이 중한 군자가 머물며 유유자적할 만한 곳이었는데 우리 선조 창암공(양사원)이 광산(光山)의 이장(泥場)으로부터 여기에 터를 잡고 살 곳을 정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자손이 대대로 거처한 것이 지금 400여 년이라.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이 탈이 없으며 선인의 가정교육이 서로 전할새 공의 맏아들 소쇄 양산보 선생은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문인으로 겨우 17세에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여 명성이 조정에 진동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정암 선생이 을사사화로 능주에 귀양을 올 적에 배종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전원에 묻혀 지내기로 작정하고 폭포 가에 정원과 누정을 축조하였다. 이름을 소쇄원이라고 하고 인하여 자신의 호로 삼았다. 동방제현과 도의를 강론하여 밝히며 '애일가'를 지어서 부르고 '효부'를 저술하여 외우니 도학충효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명종조 임자년(1552)에 중한 품계로 누차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다. 하서 김인후 선생은 '형의 예로 섬기며 눕거나 서서도 정밀하게 생각하고 천지조화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네.'라고 하였고, 고봉 기대승 선생은 '공은 밖은 온화하지만 안은 엄격하니 그를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진다.'고 하였으며, 송강 정철 선생은 '공과 상대함에 사람으로 하여금 상쾌한 회포를 갖게 한다.'라고 하였으며, 제봉 고경명 선생은 '선생은 사람됨이 위대하고 성품 또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하여 보는 자가 모두 덕이 있는 군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하였으며, 현석 박세채 선생은 '선생은 정암의 문하에 하나의 큰 별이다.'라고 하였으며, 서하 이민서 선생은 '선생의 학문은 소학을 근본으로 삼고 사서오경에 두루 통달하였지만 역학의 강유변화(强柔變化), 소장왕래(消長往來)의 상(象)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하였다. 선생을 사모한 제현들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둘째 아들 고암 선생(양자징)은 문정공 김하서 선생의 고제(高弟)로 공적이 많으시고 물러나 어버이의 유업을 계승하였으며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우리 선대의 원림이 과연 이와 같이 대대로 복원되고, 또 대대로 이어온 것은 축원의 고상한 뜻이 다만 사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먼 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자에 기문이 있는 것은 예로부터 관례인데 일찍이 문곡 김 선생(김수항)이 지었지만 편액하지 않고 전해졌는데 누차 전란을 거치면서 대뜸 없어져 버렸다. 지금 종중의 의론으로 족숙 재삼(在三)씨가 나에게 기문을 써줄 것을 부탁하니 불초한 내가 어찌 감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몰라서 했겠는가? 재촉에 부득이해서였다. 원림 안에 예전에는 고암정사, 대봉대, 오곡문, 중문(中門)과 지석공(支石公, 양자정)의 부훤당 등이 있었는데 다만 터만 남아 있고 전하는 것은 단지 광풍각, 제월당에 불과할 뿐이니 후손의 한탄이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지금 국가문화재 제304호의 지정에 힘입어 완벽하게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였으니 우리 선조 원림의 지나온 햇수가 과연 이와 같이 수백 년이니 앞으로 햇수도 또한 거의 몇 만 년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68년(1986) 병인 입추절에 13세손 승종(昇鐘)이 기문을 짓고, 동세손 연천리 태호(太鎬)가 현판에 새겨 걸다.]
1987년 전라남도는 출간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가승되어 오던 장성의 변시연가(邊時淵家) 소장본 '방암유고'를 향토문화연구자료 제11집으로 영인, 간행했다. '방암유고'의 권두에는 정당(鄭棠)이 쓴 서문(序文), 권말에는 양경지의 8세손 양승종(梁昇鍾)이 쓴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이 책에는 900여 수의 시와 시서, 시발 10여 편, 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900여 수의 시 중에는 1689년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될 때 지은 시, 송시열의 증손인 무원(婺源)의 삼인계(三仁溪) 유배생활을 읊은 시, 정호(鄭澔) 등의 고난스런 삶을 위로하는 시가 있다. 또, 존명사상(尊明思想)이 표출된 '호운이근백년미복기망감격서차(胡運已近百年未卜其亡感激書此)', '문강희조지희(聞康熙殂之喜)' 같은 시도 실려 있다. 이상열(李相說)과 정홍주(鄭弘周), 김창흡 등의 만시도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황년탄(荒年歎)', '남한산성', '독사(讀史)', '우후상매(雨後賞梅)' 등의 시들도 있다. 시서 및 시발 등은 호남지방의 정자와 사찰의 유래를 고증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부록에는 종질 양학겸(梁學謙)이 찬한 행장의 초문(草文)과 그밖에 변시연이 찬한 저자의 묘표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가사문학관의 양산보관
1991년 양씨 종중은 소쇄원 관리비 마련을 위해 입장권 유료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담양군은 이를 불법 징수라며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2000년 10월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辭文學館)이 완공되었다. 가사문학관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담양권 가사 18편, 가사 관련 도서 4,500여권과 유물 200여점, 목판 535점 등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또 박상, 송순, 양산보, 김인후,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의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양산보 전시관에는 소쇄원도 판액, 제월당과 오곡문 현판, 양씨 집안의 문집인 '소쇄원사실' 등이 전시되어 있다.
2005년부터 소쇄원은 입장료(어른 기준 1천원)를 받기 시작했다. 양씨 종중은 문화재청을 상대로 '명승 지정 및 관리단체 지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2008년에는 소쇄원이 국가 사적 제304호에서 해제되는 동시에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 담양군은 양씨 종중에 현지 관리인 추천권을 주고 종중 총회에서 의결한 종중사업에 대해 수익금 일부(입장료의 40%)를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타협안을 제시해서 합의를 보았다.
소쇄원은 양산보의 15대 차종손 양재형이 관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2018년 14대 종손이 사망한 이후 15대 종손인 양재혁이 소쇄원을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
광풍각에서 양산보 13대 후손 양진호씨와 필자
소쇄원이 오늘날 대표적인 원림으로 자리잡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봉대와 광풍각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류가 원림에 사시사철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호남정맥과 무등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소쇄원은 우거진 대나무숲 사이로 난 오솔길, 철따라 피는 꽃과 나무들, 각종 새와 동물들, 물소리, 바람소리 등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선계가 펼쳐져 있는 듯하다. 광풍각이나 제월당 마루에서 잠시 앉아 있노라면 저절로 자연과 동화되면서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소쇄원은 조선조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 조광조의 수제자 양산보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욱 두드러진다. 소쇄원의 1대 주인 양산보는 조광조의 수제자였기에 당시 사림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또, 소쇄원을 드나들었던 송순과 임억령,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정철, 백광훈 등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 시인, 문필가들이었다. 이들은 소쇄원에서 단순히 음풍농월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사상과 정치를 논하면서 시대를 고민했다. 소쇄원은 당대 최고의 문학적, 정치적, 사상적 공간이었다. 자연적인 요소들만 가지고는 소쇄원이 조선 최고의 원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인문학적인 요소들이 결합됨으로써 소쇄원은 비로소 조선 최고의 원림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2018.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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