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2

林 山 2018. 9. 20. 13:52

고려 중기의 시인이자 철학자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送全右軍奉使關東序(송전우군봉사관동서)'에서 '山水之奇秀關東爲最(산수가 기절하고 수려한 것은 관동이 제일)'라고 하였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죽서루라 일컬어졌다. 그래서 죽서루에는 고려시대부터 강원도 관찰사, 삼척부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글, 그림을 남겼다.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 정철은 관동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지은 기행가사 '관동별곡'에서 죽서루와 오십천의 절경을 노래했다.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죽서루기(竹西樓記)'에서 죽서루의 비경을 '조선의 동쪽 경계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여덟 곳(관동팔경)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그밖에도 죽서루와 오십천 응벽담(凝碧潭)의 아름다운 경치를 예찬한 시문은 수없이 많다. 


삼척 죽서루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오십천 응벽담의 풍광도 아름답지만, 응벽담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절벽과 죽서루의 모습도 가히 한폭의 진경산수화처럼 절경이다. 절벽에 부딪친 오십천의 물길이 검푸르게 멍이 들어서 응벽담이라고 했을까? 


조선 후기에는 실제 자연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진경산수화가 유행했다. 당시 화원들은 관동팔경을 비롯해서 금강산, 단양팔경 등 아름다운 경승지를 찾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광지(光之)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등 진경산수를 대표하는 화원들이 죽서루와 오십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그림들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죽서루에는 누각의 명칭과 의미를 나타내는 현판, 죽서루의 역사를 기록한 편액, 죽서루와 오십천의 풍광을 읊은 경관시를 새긴 편액 등이 많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1959년 9월 삼척 지방을 강타한 사하라 태풍으로 대부분의 현판이 유실되고 지금은 27개의 현판만 걸려 있다. 27개의 현판 중 죽서루 및 그 별호(別號)를 새긴 현판이 5개, 시를 쓴 현판이 16개, 기문(記文)을 쓴 현판이 6개다. 시를 쓴 현판은 16개지만 그 안에는 27수의 시가 들어 있다. 그외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 기부금방명기(寄附金芳名記)를 쓴 현판도 각각 1개씩 있다.


죽서루에 대해 읊은 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명종(明宗, 1131∼1202, 재위 1170∼1197) 대 문신 김극기의 시 '죽서루(竹西樓)'다. 이 시가 발견됨으로써 죽서루의 건립 연대가 최소한 60년 이상 앞당겨졌다. 


죽서루(竹西樓) - 김극기


道氣全偸靖長官(도기전투정장관) 도덕 기운 모두 각춘 원님은 편안하니

官餘興味最幽閒(관여흥미최유한) 공무 외 여가 흥취는 유한함이 최고네

庾樓夕月侵床下(유루석월침상하) 누각의 저녁 달빛은 침상 밑으로 들고

藤閣朝雲起棟間(등각조운기동간) 등왕각 아침 구름은 기둥 사이에 이네

鶴勢盤廻投遠島(학세반회투원도) 학은 빙글빙글 돌다가 먼 섬으로 가고

鰲頭屭贔抃層巒(오두희비변층만) 자라머리 같은 산들 겹겹이 둘러 있네

新詩莫怪淸人骨(신시막괴청인골) 새로운 시도 뼛속까지 맑게 하지 못해

俯聽驚溪仰看山(부청경계앙간산) 수그려 물소리 듣다가 먼 산 바라보네


'庾樓夕月(유루석월)'은 '유루명월(庾樓明月)'에서 유래한 구절이다. '庾樓(유루)'는 유공루(庾公樓)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유량(庾亮)이 중국 후베이 성(湖北省) 우창(武昌)의 총독으로 있으면서 관료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남루(南樓)에 올라 달을 구경하고 날이 새도록 시를 읊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후 문인들이 모여서 음영(吟咏)하는 것을 의미하였다.(世說新語 卷 容止) '屭贔(희비)'는 구름이나 연기 같은 것이 두껍게 덮여 있는 모양이다.


김극기의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노봉(老峰)이다. 일찌기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못하고 있다가 1170년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에 의한 무인정변(武人政變) 이후 무인들이 권력투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명종 대에 용만(龍灣,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의 좌장(佐將)을 거쳐 한림(翰林)이 되었다. 김극기는 개경에 나타나지 않으려 하고, 세력가들에게 빌붙지 않으며, 무리와 함께 산림에 숨어 시를 지었기 때문에 문명은 높아갔지만 벼슬길은 더욱 막혔다. 


김극기는 무인 독재정권의 전횡으로 농민봉기가 자주 일어나던 시대에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어려운 모습을 생생하게 노래한 농민시의 개척자였다. 또, 농촌문제를 자신의 일로 고민했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그의 시는 마치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 쓴 것 같은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얼마 뒤에 죽었다.


이인로(李仁老)는 김극기의 문집 '김거사집(金居士集)'의 서문에서 '참으로 난새나 봉황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그의 고고함을 찬양했다. 당시 문인들도 김극기의 시에 대해 '문장의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말이 많을수록 내용이 풍부하다.'고 평했다. 고려 말에 간행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의하면 김극기의 문집은 135~15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다 사라지고, 지금은 '김거사집'만 전한다. 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여러 편 남아 있다. 


'동안거사집'에 이승휴는 1266년 경 안집사 진자후와 함께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자후와 진자사(陣子)가 같은 사람이라면 이때 지은 시가 '陪安集使兵部陳侍郞(諱子俟)登眞珠府西樓次板上韻[배안집사병부진시랑(휘자사)등진주부서루차판상운]'일 가능성이 크다.  


이승휴의 '배안집사병부진시랑(휘자사)등진주부서루차판상운' 편액


陪安集使兵部陳侍郞(諱子俟)登眞珠府西樓次板上韻 - 이승휴

배안집사병부진시랑(휘자사)등진주부서루차판상운

안집사 병부시랑 진자사(陳子俟)를 모시고 진주부 서루에 올라 판상의 시를 차운하다 


半空金碧駕崢嶸(반공금벽가쟁영) 하늘 중간 울긋불긋한 절벽에 높이 얹혀서

掩映雲端舞棟楹(엄영운단무동영) 햇볕 가린 구름은 용마루 기둥에서 춤추네

斜倚翠岩看鵠擧(사의취암간곡거) 푸른 바위에 기대 날아가는 고니 바라보고

俯臨丹檻數魚行(부림단함수어행) 붉은 난간에서 노니는 물고기 헤아려 보네

山圍平野圓成界(산위평야원성계) 들판을 둘러싼 산은 둥근 경계 만들었는데

縣爲高樓別有名(현위고루별유명) 높은 누각으로 인해 이 고을 유명해졌구나

便欲投簪聊送老(편욕투잠료송로) 문득 은퇴하여 편안한 노년 보내고 싶지만

庶將螢燭助君明(서장형촉조군명) 미력하나마 임금의 밝은 정사 돕고 싶구나


바람 잘 날 없는 정계가 싫어 벼슬살이에서 물러나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지만 작은 힘이나마 임금이 바른 정사를 펴는 것을 돕고 싶다는 심정을 읊은 시다. 죽서루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이름난 명승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승휴는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지금의 경북 성주) 출신으로 가리 이씨(加利李氏)의 시조이다.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다. 이승휴는 12세에 희종(熙宗)의 3남인 원정국사(圓靜國師) 경지(鏡智)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명유(名儒) 신서(申諝)에게 '좌전(左傳)'과 '주역(周易)' 등을 배웠다. 1252년(고종 39) 봄 최자(崔滋)의 문하에서 문과에 급제한 이승휴는 이듬해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三陟縣)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제5차 여몽전쟁(麗蒙戰爭)으로 길이 막히자 두타산 구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이승휴는 삼척주민들과 함께 고성산(古城山, 98m)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항전하였다.  


10여 년 동안 두타산에서 은거하던 이승휴는 1263년(원종 4) 안집사(安集使)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관직을 청원하는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바치고, 이장용(李藏用)과 유경(柳璥)의 추천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경흥도호부 판관(慶興都護府判官) 겸 장서기(掌書記)을 지낸 뒤 식목녹사(式目錄事)가 되었다. 1273년(원종 14)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이승휴는 그 공으로 잡직령 겸 도병마녹사(雜職令兼都兵馬錄事)에 제수되었다.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308)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감찰어사(監察御史), 우정언(右正言),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충청도 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자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을 탄핵하고 가산을 적몰했다가 원한을 사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동안거사라 하였다. 전중시사(殿中侍史)에 다시 임명된 이승휴는 1280년(충렬왕 6) 감찰사 관원들의 부정과 국왕의 실정, 권신들의 전횡을 간언하다가 파직당했다. 


이승휴는 삼척현 구동으로 돌아가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용안당이라는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을 인용해 지은 것이다. 그는 1289년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보광정(葆光亭)을 짓고, 지락당(知樂塘)과 표음정(瓢飮渟)을 팠다. 그리고 삼화사(三和寺)에서 1,000상자의 불경을 빌려 읽으면서 역사시(歷史詩)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불교 관련 저서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1294년(충렬왕 20) 불교에 심취한 이승휴는 용안당을 간장사(看藏寺, 지금의 천은사)로 고치고 토지를 희사하였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 원년)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추진할 때 이승휴는 특별히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史館修撰官知制誥)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試祕書監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判祕書寺事崇文館學士)가 되었다. 70세가 넘어 사직을 요청하여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 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로 치사(致仕)하였다. 1360년 죽성군(竹城君) 안극인(安克仁, ?∼1383)은 이승휴의 아들 이연종(李衍宗, ?~?)이 부친의 유고를 편집한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과 '제왕운기'를 함께 간행했다. 안극인은 이승휴의 조카사위이자 공민왕비(恭愍王妃)인 정비(定妃)의 아버지다. 


충혜왕(忠惠王, 1315 ~1344, 재위 1330~1332) 때인 1330년 왕명으로 강원도 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어 태백산에 오른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은 그 감동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담은 '登太白山(등태백산)'을 지어 읊었다. 


登太白山(등태백산) - 안축


直過長空入紫烟(직과장공입자연) 허공을 곧장 뚫고 자주빛 안개속 들어가니

始知登了最高巓(시지등료최고전) 비로소 제일 꼭대기에 오른 것을 알겠노라

一丸白日低頭上(일환백일저두상) 눈부시게 둥그런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사면군산낙안전) 사방의 뭇 산들 눈앞에 얕게 내려앉았노라

身逐飛雲疑駕鶴(신축비운의가학) 몸은 구름을 좇아서 학등에 올라탄 듯하고

路懸危磴似梯天(로현위등사제천) 길은 하늘 사다리처럼 가파르게 걸려 있네


태백산에서 내려온 안축은 삼척으로 내려와 죽서루에 올랐다. 죽서루와 오십천의 풍경에 매료된 그는 '三陟西樓八詠(삼척서루팔영)'을 지어 읊었다. '삼척서루팔영'은 안축이 부임지를 돌아보며 관동지방의 경관과 풍속을 읊은 기행시집 '관동와주(關東瓦注)'에 들어 있다. 


三陟西樓八詠(삼척서루팔영) - 삼척 서루 팔영(안축)


죽장고사(竹藏古寺) - 죽장사 옛절


脩篁歲久盡成圍(수황세구진성위) 세월이 지난 대숲 울타리 되어 둘러쌌고 

手種居僧今已非(수종거승금이비) 농사를 지으며 사는 스님은 보이지 않네 

禪榻茶軒深不見(선탑다헌심불견) 선방 다실은 깊숙이 있는지 보이지 않고 

穿林翠羽獨知歸(천림취우독지귀) 숲에서 날아온 파랑새만 돌아갈 곳 아네 


'脩篁(수황)'은 가늘고 길쭉한 대를 말한다. '禪榻(선탑)'은 참선할 때 앉는 선상(禪床)을 가리킨다. '知歸(지귀)'는 본래 자리로 돌아감을 안다는 뜻이다. '翠羽(취우)'는 물총새의 날개, 또는 파랑새다. 


암공청담(巖控淸潭) - 바위절벽 밑 맑은 못 


流川爲陸陸爲川(유천위륙육위천) 냇물이 육지가 되고 육지가 냇물이 되어도 

有底淸潭獨不然(유저청담독불연) 바닥이 있는 맑은 못은 그러하지 않는구나 

看取奔灘停滀處(간취분탄정축처) 힘차게 흘러내리던 여울 모인 곳 바라보니 

奇巖削立重難遷(기암삭립중난천) 기암이 깎은 듯 서있어 돌아가기 어려우리 


의산촌사(依山村舍) - 산발치 시골집


傍山煙火占孤村(방산연화점고촌) 옆산에 피어오르는 연기는 외딴 마을 안고 

竹下紅桃臥守門(죽하홍도와수문) 대나무 아래 홍도는 문을 지키려 누웠는가 

力穡田夫皆惜日(역색전부개석일) 애써 농사짓는 농부들 모두 촌음을 아끼고 

戴星服役返乘昏(대성복역반승혼) 별빛 아래 일 마치고 어두워지면 돌아오네


'紅桃(홍도)'는 복사나무의 일종이다. 겹꽃잎이 짙은 붉은색이고, 열매가 없으며,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煙火(연화)'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불을 때어 나는 연기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는 기척 또는 인가를 이르는 말이다. 


와수목교(臥水木橋) - 물에 누운 외나무다리

  

一木搖搖跨石灘(일목요요과석탄) 돌여울에 놓인 흔들릴 듯 외나무다리 하나 

望來惟恐蹈波瀾(망래유공도파란) 바라보며 오자니 까딱 물에 빠질까 두렵네 

居民足與心曾熟(거민족여심증숙)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익숙한 길인 양 

如過平途不細看(여과평도불세간) 평도를 지나듯 걸어가니 차마 못 보겠구나 


'搖搖(요요)'는 '건들건들하다, 흔들흔들하다'의 뜻이다. '惟恐(유공)'은 '다만 ~가 두렵다'의 뜻이다. '波瀾(파란)'은 물결, 생활 또는 일 따위가 순조롭지 못하고 기복이 심하거나 상황이 곤란함이다.  


우배목동(牛背牧童) - 소를 타고 가는 목동


仰空吹笛快軒眉 (앙공취적쾌헌미) 허공에 대피리 불자 마음은 즐겁고 느긋한데

牛背身無掩脛衣(우배신무엄경의) 소에 올라타니 정강이 가릴 옷조차도 없구나

家在山前陂隴隔(가재산전피롱격) 집일랑은 앞산의 언덕 너머에 떨어져 있으니

雨天行趁暮鴉歸(우천행진모아귀) 걸음 재촉하는 비에 저녁 까마귀도 돌아오네


'無掩脛衣(무엄경의)'에서 목동의 가난함이 드러나 있다. '軒眉(헌미)'는 양미(揚眉)와 같은 말이다. 득의하여 미간을 활짝 편다는 뜻이다. 중국어에서는 '눈썹을 올리다, 느긋하다, 눈살을 펴다, 마음이 편안하다'의 뜻도 있다.


농두엽부(壟頭饁婦) - 밭머리로 들밥 내가는 여인


婦具農飧自廢飧(부구농손자폐손) 농부의 새참 준비에 여인들 끼니도 거르고 

曉來心在夏畦間(효래심재하휴간) 새벽부터 마음일랑 벌써 여름 밭에 가있네 

壟頭日午催行邁(농두일오최행매) 한낮에 들녘으로 들밥 나르는 길 재촉하여 

餉了田夫信步還(향료전부신보환) 농부들 배불리 먹이고 기분 좋아 돌아가네 


농사철 농부들과 새참을 나르는 여인네들의 바쁜 일상이 잘 나타나 있는 시다. '信步(신보)'는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가다, 산책하다.'의 뜻이 있다. '발걸음도 가볍게' 정도로 풀이하면 되겠다.  


임류수어(臨流數魚) - 물가에서 물고기를 헤아리다


樓下淸潭窟穴空(누하청담굴혈공) 죽서루 아래 맑은 연못에는 굴이 뚫렸는데 

游魚育卵粟排紅(유어육란속배홍) 물고기들 좁쌀처럼 붉은 알 낳아서 기르네 

莘莘衆尾知多少(신신중미지다소) 숱하게 많은 길쭉한 꼬리들은 얼마나 될까 

前數無窮後亦同(전수무궁후역동) 전에도 무수히 많았을 거고 뒤에도 같으리 


격장호승(隔墻呼僧) - 담 너머 스님을 부르다 


聳壑郡樓臨水府(용학군루임수부) 절벽 높이 솟은 군루에서 관아를 바라보니

隔墻禪舍倚巖叢(격장선사의암총) 담장 건너 바위너덜에 의지한 절이 있구나

愛僧眞趣無人會(애승진취무인회) 스님의 진리 사랑하지만 깨달은 이는 없고

十里茶煙颺竹風(십리다연양죽풍) 차 달이는 연기는 대숲바람에 십리를 가네


'水府(수부)'는 바닷속에 있다는, 물을 맡아 다스리는 용왕의 궁전이다. 바닷가에 있는 삼척의 관아(官衙)를 비유한 것이다. '巖叢(암총)'은 바위너덜이다. '眞趣(진취)'는 참된 멋, 또는 진리를 뜻허기도 한다.  


안축은 또 '三陟西樓夜坐(삼척서루야좌)'란 시도 지었다. 안축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에는 이 시를 지은 날짜가 6월 17일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三陟西樓夜坐(삼척서루야좌) - 밤에 삼척 서루에 앉아서(안축)


夜色虛明水氣淸(야색허명수기청) 밤빛은 허허로이 밝고 물 기운도 맑은데

登樓俯檻聽江聲(등루부함청강성) 누각에 올라 난간 굽어보며 물소리 듣네

兀然忘我無人見(올연망아무인견) 단정히 앉아 나를 잊으니 보이는 이 없고

風露滿空山月生(풍로만공산월생) 바람 이슬 허공에 가득한데 산달이 뜨네


밤중에 죽서루에 올라 단정하게 앉아서 산 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안축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하다. 고요한 밤에 물소리만 들려오는데, 응벽담에 달이 비치면 그야말로 환상적인 야경이 펼쳐졌으리라. 


안축은 또 오십천에서 뱃놀이를 한 뒤 발을 씻으면서 '濯我足(탁아족)'이란 시도 지었다. 첫 수의 운자는 綠(록), 曲(곡), 足(족), 玉(옥)이고, 둘쨋 수의 운자는 谷(곡), 復(복), 宿(숙), 竹(죽)이다.  


濯我足(탁아족) - 내 발을 씻다(안축) 


小艇泛橫江(소정범횡강) 작은 배 비껴 흐르는 강물에 띄웠더니

雨餘波淨綠(우여파정록) 비가 온 뒤라 물결이 깨끗하고 푸르네

投篙泝東流(투고소동류) 삿대 짚어 오십천 물 거슬러 올라가니

陰崖邃且曲(음애수차곡) 그늘진 벼랑 깊고 또 구비구비 굽었네

剻纜繫蒼藤(부람계창등) 뱃줄을 푸른 등나무 덩굴에 매어 두고

坐席濯我足(좌석탁아족) 자리에 앉아 흐르는 강물에 발 씻누나

石鎼寒泉生(석하한천생) 바위 갈라진 틈으로 찬 샘물 솟아나와

冷冷瀉氷玉(냉냉사빙옥) 차디 찬 얼음 같은 옥구슬 쏟아내누나


有客靜彈琴(유객정탄금) 한 나그네 고요히 거문고 타고 있으니

松風滿山谷(송풍만산곡) 소나무 숲에 이는 바람 산골에 가득해

晩來棹中流(만래도중래) 저녁때 되어 강 한가운데서 노 젓는데

歌笑往而復(가소왕이복) 노래하는 소리 웃는 소리 오고 또 가네

此樂人間無(차락인간무) 이러한 즐거움 인간 세상에 또 없으리

眠來伴鷗宿(면래반구숙) 졸음 오면 갈매기 벗하여 잠을 이루네

乘舟下南灘(승주하남탄) 다시 배에 올라 남쪽 여울로 내려오니

淸露裛疎竹(청로읍소죽) 맑은 이슬이 성긴 대숲 촉촉히 적시네


안축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다. 할아버지는 안희서(安希諝), 아버지는 안석(安碩)이며 어머니는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죽계(竹溪, 지금의 풍기)의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사대부의 한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 단양부 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에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했다. 원나라에서 요양로개주 판관(遼陽路蓋州判官)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악정(成均樂正),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강원도 존무사가 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됐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됐다. 그러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다시 파직됐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전법판서(典法判書), 감찰대부(監察大夫)에 등용됐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1344년(충목왕 1)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다음해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다. 1347년(충목왕 3)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돼 세입을 위해 토지를 측량하는 일(量田)에 참여했다. 그해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안축은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명성이 높았다. 그는 강원도 존무사로 있을 때 기행시집 '관동와주'를 남겼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있을 때에는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역옹(櫟翁) 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 등과 함께 수정 보완했다. 충렬(忠烈), 충선(忠善), 충숙(忠肅)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전한다.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됐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