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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4

林 山 2018. 9. 22. 10:51

고려시대 예빈시승(禮賓寺丞)을 지낸 이구(李, ? ~ ?)는 신재(信齋) 심동로(沈東老, 1310~1380)와 최복하(崔卜河, ?~?)에 대한 시를 읊었다. 이구는 '관동의 군자는 두 사람 심동로와 최복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심동로는 삼척 심씨(三陟沈氏)의 시조이며 죽서루의 가객으로 이름 높았던 사람이고, 최복하는 심동로와 함께 관동이군(關東二君)으로 일컬어지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 '趙副令出按關東記關東隱君子(조부령출안관동기관동은군자)'란 제목의 칠언절구도 한 수 남겼다. 한시 편액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편액에는 '조부령출안관동기관동은군자'와 '崔司諫卜河(최사간 복하)'만 판각되어 있다.   

 

이구의 '죽서루' 편액  


趙副令出按關東記關東隱君子(조부령출안관동기관동은군자)

조부령이 관동에 출안하였으므로 관동에 숨어사는 군자를 기억하며


沈中書東老(심중서 동로) - 이구


三陟官樓是竹西(삼척관루시죽서) 삼척의 관루는 바로 죽서루인데

樓中嘉客沈中書(루중가객침중서) 누중 반가운 손님은 심중서로다

而今白首能詩酒(이금백수능시주) 백발이면서도 시와 술을 잘하니

暇日相遊爲說予(가일상유위설여) 여가에 모여 놀면서 이야기하네


沈東老(억심동로) 심동로를 생각하며


심동로를 예찬하는 시다. 심동로는 시에도 능했고, 술도 잘 마셨던 모양이다. 이 시의 원제는 '조부령출안관동기관동은군자'인데 판액에는 '竹西樓(죽서루)'로 되어 있다.


심동로의 본래 이름은 한(漢)이다. 문림랑군기주부(文林郞軍器主簿) 심적충(迪沖)의 현손(玄孫)이고, 검교(檢校) 심수문(秀文)의 아들이다. 


심동로는 1342년(충혜왕 3) 생원 진사시에 차석으로 합격한 뒤 직한림원사(直翰林院事), 성균관 학록(成均館學錄)에 이어 1351년에는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연로한 부모를 모시기 위해 지방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해서 통천군수에 임명되었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봉선대부 중서사인 지제고(奉善大夫中書舍人知制誥)에 올랐다. 


심동로는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해달라고 공민왕에게 간청했다. 여러 차례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으나 의지가 워낙 굳어서 어쩔 수 없이 귀향을 허락한 왕은 그의 뜻을 높이 사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심한이란 이름 대신 심동로라는 이름을 썼다. 


이색이 학사승지(學士承旨)가 되었을 때 왕에게 '심동로는 신보다 학식이 높고, 나이도 신보다 많으며, 벼슬길도 먼저 올랐으니 신의 직책을 그에게 내려주십시오.'라고 청할 정도로 심동로는 조야의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김구용이 안사(按使)가 되어 삼척에 왔을 때 심동로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호를 직접 쓴 편액을 걸어주기도 했다. 삼척으로 부임하는 관원들은 심동로를 찾아와 국사를 함께 논하거나 시주(詩酒)를 나누곤 했다. 


심동로는 죽서루와 해암정(海巖亭)을 오가며 시를 썼다. 동해시 추암(湫岩) 촛대바위 부근에 지은 해암정은 삼척의 해금강이라 할 만큼 경치가 좋다. 해암정 서쪽 심동로가 은거했던 터를 심대감터라고 부른다. 1461년(조선 세조 7) 체찰사(體察使) 압구정(狎鷗亭)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이곳에 들러 촛대바위 일대를 능파대(凌波臺)라 명명했다. 1530년(중종 25) 안찰사(按察使)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은 해암정을 중건했으며, 1675년(숙종 원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해암정 현판을 썼다. 동해시 추암동 휴산(休山) 또는 퇴평(退坪)은 심동로가 은거하던 곳이다. 1931년 후손들은 휴산에 심동로 유허비를 세웠다.


심동로는 만년에 삼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또, 왕이 삼척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고, 진주군(眞珠君)에 봉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산수와 시를 벗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심씨가 삼척을 본관으로 한 것은 심동로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그의 덕행과 문장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수록되어 있다.  


崔司諫卜河(최사간 복하) - 이구


鳳池司諫臥仙槎(봉지사간와선사) 봉지의 사간을 지내고 선사에 누워서

早和滄浪漁父歌(조화창랑어부가) 일찌기 창랑수의 어부가 뜻을 알았네

爲說鹽梅時所急(위설염매시소급) 염매를 맛있게 만드는 것이 시급하니

天廚鼎味待君和(천주정미대군화) 수라간에서 그대 조리 솜씨 기다리네


崔卜河(억최복하) 최복하를 생각하며


상국(相國) 이구가 최복하에게 보낸 시다. 임금을 잘 보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최복하를 예찬하면서 새로이 개창한 조선왕조에 참여할 것을 은근히 권유하는 권기시(權起詩)다. 


'봉지(鳳池)'는 당(唐)나라 중서성(中書省)이 있는 못 이름인데, 전하여 중서성을 일컫는다. 흔히 대궐 안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선사(仙槎)'는 '신선의 배, 신선이 뱃놀이 한다.'는 뜻으로 울진의 옛 애칭(愛稱)이다. 예로부터 풍광이 수려한 울진에 옛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신선이 뱃놀이 하는 듯한 절승(絶勝)이라 찬미하여 고려 때부터 붙여진 별칭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군명선사(郡名仙槎)'라고 했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옛 군지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창랑(滄浪)'은 동해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즉 창랑주(滄浪洲)의 준말이다. 중국의 강물 이름이기도 하다.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창랑의 물이 맑을 때는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릴 때는 내 발을 씻으리.'에서 나온 것으로, 은자가 사는 강변을 뜻한다. '어부가(漁父歌)'는 전국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가리킨다. '어부사'를 '창랑가(滄浪歌)'라 부르기도 한다. 어부의 생활을 읊은 동명의 고려 가요도 있다.


'염매(鹽梅)'는 음식의 양념이 되는 소금과 매실(梅實)을 말한다. '서경(書經)' <열명(說命)>에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임명하면서 '너는 짐의 뜻을 가르쳐서 만약 술과 단술을 만들면 네가 누룩과 엿기름이 되고, 만약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라(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꼭 필요한 인재가 임금을 잘 보좌하여 좋은 정사를 베풀게 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소금과 매실의 비율이 맞아야 국맛이 좋듯이 신하가 임금을 잘 보좌해야 훌륭한 치적을 올리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천주(天廚)'는 수라간 별자리이다. 수라(水剌)는 원래 '임금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 부르는 말인데, 수라를 짓는 부엌을 수라간이라고 했다. 수라간 별자리는 풍성한 음식을 관장하며, 임금 외에 문무백관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일도 주관한다. 자미궁(紫微宮)에는 부엌이 두 군데 위치한다. 하나는 수라간 별자리 천주, 다른 하나는 하늘부엌 별자리 내주(內廚)가 있다.


최복하는 고려 말 한성부 윤(漢城府尹),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한 후 사직하여 경북 울진군 북면 고목2리 무령현(武靈峴)에 은거하였다. 이성계는 이구를 통해서 최복하에게 '염매를 맛있게 만드는 것이 시급하니, 수라간에서 그대 조리 솜씨 기다리네.'라면서 최복하에게 조선왕조에 참여할 것을 은근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최복하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을 뜻을 나타냈다. 그는 망국의 슬픔을 안고 양양(襄陽) 연하정(蓮荷亭)에 이르러 자위시(自慰詩)를 지어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다. 공양왕(恭讓王, 1345∼1394, 재위 1389∼1392)이 이성계에 의해 삼척시 근덕면 고돌치(高突峙)에 유폐(幽閉)되자 최복하는 여조(麗朝)의 장군 장천영(張天永)과 임제(林悌), 태학생(太學生) 전생(田生) 등과 함께 울진과 삼척에서 수천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고려왕조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 태종, 1367~1422)의 손에 죽고 말았다. 1998년 5월 10일 무령현 옛터에 최복하의 후손과 울진군민들에 의해 '고려조 보문각 직제학 대사간 강릉 최선생 복하 유허비(高麗朝寶文閣直提學大司諫江陵崔先生卜河遺墟碑)'가 세워졌다.


이구는 생몰년 미상의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1282년(충렬왕 8) 이구는 원(元)나라에서 진사에 급제한 뒤 고려로 돌아왔다. 1350년(충정왕 2)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진사에 이어 목사를 역임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이구는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한 뒤 유구(柳玽), 임박(林樸)과 함께 왕이 남쪽으로 피난가면서 매장하였던 춘추사적(春秋史籍), 전교제향(典校祭享)의 의범(儀範) 등 12권의 사적을 발굴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충혜왕의 아들 왕석기(王釋器) 등의 역모를 고하지 않은 죄로 하옥되기도 했다. 1370년(공민왕 19) 원나라가 망한 뒤 동녕부(東寧府)에 웅거한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김백안(金伯顔) 등이 북방을 침입하자 이구는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성계, 서북면상원수(西北面上元帥) 지용수(池龍壽)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1387년(우왕 13)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지밀직(知密直) 이종덕(李鍾德)과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갔으나 명나라의 거부로 랴오둥에서 되돌아왔다.


공민왕 때 강원도 안사(按使) 내려온 원재(圓齋) 정추(鄭樞, 1333~1382)는 순시차 삼척에 들렀다가 죽서루에 올라 '차삼척죽서루운(次三陟竹西樓韻)'을 지었다. 안사는 안찰사 또는 안렴사(按廉使)라고도 한다. 안사는 정3품 벼슬이니 상당히 고관이었다.  


次三陟竹西樓韻(차삼척죽서루운) - 삼척 죽서루에서 차운하다(정추)


竹西簷影漾淸流(죽서첨영양청류) 죽서루 처마 그림자 맑은 내에 일렁이는데

潭上山光可小樓(담상산광가소루) 연못 위의 산빛은 작은 다락에 어울리누나

佳節遠遊多感慨(가절원유다감개) 좋은 계절에 멀리와 노니 감개가 무량하고

斜陽欲去更遲留(사양욕거갱지류) 저녁 무렵 떠나려다 말고 다시 머뭇거리네

曾聞有客騎黃鶴(증문유객기황학) 일찌기 어떤 길손 황학을 탔다고 들었는데

今恨無人狎白鷗(금한무인압백구) 지금은 갈매기 벗하는 이 없음을 한탄하네

挾岸桃花春又老(협안도화춘우로) 언덕을 끼고 복사꽃 봄날 또한 저물었는데

角聲吹徹古眞州(각성취철고진주) 옛 진주땅에 나발 부는 소리 울려퍼지누나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떠나지 못하고 다시 머무르고 싶은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누구의 시에서 운자를 따왔는지는 알 수 없다. 운자는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둘쨋 구 '可'가 '滿', 다섯쨋 구 '騎'가 '搥', 마지막 구 '徹古'가 '欲裂'로 되어 있는 시도 있다. 글자를 바꾼 시가 더 나은 듯하다. 


竹西簷影漾淸流(죽서첨영양청류) 죽서루 처마 그림자 맑은 내에 일렁이는데

潭上山光滿小樓(담상산광만소루) 연못 위의 산빛은 작은 다락에 가득하구나

佳節遠遊多感慨(가절원유다감개) 좋은 계절에 멀리와 노니 감개가 무량하고

斜陽欲去更遲留(사양욕거갱지류) 저녁 무렵 떠나려다 말고 다시 머뭇거리네

曾聞有客黃鶴(증문유객추황학) 일찌기 황학루 부순 객이 있다고 들었는데

今恨無人狎白鷗(금한무인압백구) 지금은 갈매기 벗하는 이 없음을 한탄하네

挾岸桃花春又老(협안도화춘우로) 언덕을 끼고 복사꽃 봄날 또한 저물었는데

角聲吹欲裂眞州(각성취욕열진주) 뿔피리 부는 소리 진주땅을 찢을 듯하여라


정추의 '三陟竹西樓(삼척죽서루)'란 시도 있다. 이 시에는 '贈紫玉山沈內舍(자옥산 심내사에게 드리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심내사(沈內舍)는 심동로를 가리킨다. 이 시는 '원재집'에 실려 있다. 첫 수의 운자는 木(목), 獨(독), 曲(곡), 鬱(울), 沒(몰)이고, 둘쨋 수의 운자는 臨(림), 心(심), 吟(음), 田(전), 然(연)이다. 


三陟竹西樓(삼척죽서루) -삼척 죽서루(정추)


何人起樓俯喬木(하인기루부교목) 누가 큰 나무를 구부려 누각을 세웠나

黃昏一笑立於獨(황혼일소입어독) 저녁 무렵 나홀로 서서 한바탕 웃노라

簷前修竹數千竿(첨전수죽수천간) 처마 앞에는 쭉쭉 벋은 수많은 대나무

檻外澄江五十曲(함외징강오십곡) 난간 밖에는 구비구비 흐르는 맑은 강

頭陁山高倚恍忽(두타산고의황홀) 두타산 높고 높은 곳에 황홀하게 기대

觀音寺古多蓊鬱(관음사고다옹울) 옛 관음사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았네

長空淡淡鳥往來(장공담담조왕래) 먼 하늘엔 새들이 무심하게 오고 가고

微波粼粼魚出沒(미파린린어출몰) 맑고 잔잔한 물엔 물고기들 왔다 갔다


幾人前我此登臨(기인전아차등림) 나보다 먼저 이곳에 오른 이 몇이던가

我來懷古仍傷心(아래회고잉상심) 와서 옛일을 돌아보니 내 마음 슬프네

珠璣闌干滿紅壁(주기난간만홍벽) 주옥 같은 난간 붉은 벼랑에 가득하여

欲和不能空苦吟(욕화불능공고음) 화답하고 싶지만 괴로워 읊을 수 없네

江中之水淸且漣(강중지수청차련) 강 한가운데 물은 맑고도 또 잔잔한데

江上之岸多良田(강상지안다양전) 강 위의 언덕에는 좋은 밭뙈기 많구나

紫玉首陁言可賞(자옥수타언가상) 자옥산 농부의 말 칭찬할 만도 하지만

堤防失計必騷然(제방실계필소연) 제방 처리 잘못하면 꼭 소동 일어나리


정추와 심동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시다. 이 시에는 '江上之岸多良田一作口若灌漑爲良田。口君自口口王首陁。首陁。梵言農夫'라는 글이 부기되어 있다. '紫玉首陁(자옥수타)'는 심동로를 가리킨다. 


삼척부를 떠난 정추는 남쪽으로 내려가 교가역(交柯驛, 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교가리)과 용화역(龍化驛, 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용화리)을 차례로 들러 제영시 한 수씩을 남겼다. 교가역은 삼척부에서 남쪽으로 25리, 용화역은 60리 떨어져 있었다. '交柯驛(교가역)'의 운자는 頭(두), 流(류), 秋(추), 休(휴), 鷗(구)다. 


交柯驛(교가역) - 정추


紗帽壓蓬頭(사모압봉두) 쑥대 같은 머리 사모 눌러쓰고

亭前照碧流(정전조벽류) 정자 앞의 푸른 물에 비춰보네

水光山欲雨(수광산욕우) 물빛 반짝여 산에 비오려 하고

野色麥先秋(야색맥선추) 들빛은 보리에 가을 먼저 왔네

駑馬年猶壯(노마연유장) 둔한 말은 나이 오히려 젊은데

征鴻暮不休(정홍모불류) 가는 기러기 밤에도 쉬지 않네

自由波浩蕩(자유파호탕) 넓고 큰 파도 넘실넘실 이는데

誰得擾沙鷗(수득요사구) 모래 갈매기 그 누가 길들이나


龍化驛(용화역) - 정추


滿帽黃塵滿袖風(만모황진만수풍) 모자엔 누런 먼지 소매엔 바람 가득한데

征鞍暫解樹陰中(정안잠해수음중) 가는 길 그늘에서 말안장 잠깐 풀어놓네

郵人催馬喚人急(우인최마환인급) 우인은 말 재촉하여 사람을 급히 부르고

一抹暮霞山沒紅(일말모하산몰홍) 한줄기 저녁노을에 온 산이 붉게 물드네


정추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써서 정공권(鄭公權)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판선공(辦繕公) 정책(鄭㥽), 아버지는 설곡(雪谷) 정포(鄭誧)다. 아들은 정총(鄭揔), 정승(鄭拯), 정탁(鄭擢), 정지(鄭持)를 두었다.


정추는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左諫議大夫, 좌간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공민왕 15)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뻔했으나, 이색의 도움으로 동래현령(東萊縣令)에 좌천되는 것으로 끝났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숙청되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재임명되었다.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우왕(禑王, 1365~1389, 재위 1374∼1388) 즉위 후 좌대언, 첨서밀직사사(詹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다.


정추는 당대의 병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문풍을 진작하려 한 좌주(座主) 이제현, 이색과 뜻을 함께 한 전형적인 고려 말의 사대부였다. 정추의 치열한 정치의식은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아버지 정포와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 정포는 이곡과도 깊은 교유 관계를 맺었으며, 이색과도 정치적 사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정추는 이존오(李存吾, 1341∼1371), 한수(韓修, 1333∼1384) 등과도 친밀하게 교류했다. 이처럼 정추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신흥 사대부였다. 정추가 남긴 시와 글은 그의 아들에 의해 수집 정리되어 '원재집(圓齋集)'으로 간행되었다. '고려사(高麗史)'는 정추에 대해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 안사가 되어 삼척에 내왔을 때 '醉題三陟客舍東上房壁(취제삼척객사동상방벽)'이란 시를 지었다. 이때 그는 삼척 객사에서 묵었던 모양이다. 


醉題三陟客舍東上房壁(취제삼척객사동상방벽) - 삼척 객사 동쪽 상방 벽에 취하여 짓다(김구용)

                  

瀟灑山川共我淸(소쇄산천공아청) 깨끗한 금수강산 나와 함께 맑은데

樓臺到處管絃聲(누대도처관현성) 누대 곳곳에서 관현악 연주 들리네

若非細馬馱紅紛(약비세마타홍분) 좋은 말에 미인을 태우지 않는다면

誰謂三韓更太平(수위삼한갱태평) 누가 삼한이 다시 태평타 하겠는가


고려시대 각 도(道)에 파견되어 도내의 주(州), 현(縣)을 순찰하면서 수령을 규찰하는 임무를 맡은 안사가 내려왔으니 관동제일루 죽서루에서 어찌 주연이 빠질 수 있을손가! 


'上房(상방)'은 예전에 관아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細馬(세마)'는 좋은 말, 뛰어난 말이다.좋은 말은 정력이 강한 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시는 다소 성적인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다.  


김구용의 본관은 안동, 자는 경지다. 첨의중찬(僉議中贊,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며,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김방경은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했고,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김구용은 16세에 진사가 되고, 18세에 덕령부 주부(德寧府主簿)에 제수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成均館)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을 때는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성리학(性理學)을 일으키고 척불숭유(斥佛崇儒)에 앞장섰다. 


척약재(惕若齋)라는 호는 고려 말의 학자이자 문장가 백문보(白文寶, 1303~1374)가 지은 김구용의 서재에 부치는 글 '척약재기(惕若齋記)'에서 딴 것이다. '주역(周易)'에서 두 글자를 따온 '척약(惕若)'은 학문을 닦지 못하고 덕성을 기르려고 노력하지 않음을 항상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이다. 백문보는 어린 나이에 급제한 김구용이 자만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라며 경계의 글을 써준 것이다. 백문보에 이어 이색은 '범의 꼬리를 밟은 듯 살얼음을 건너듯이 정밀하게 살피시게.'라고 하였고, 정도전(鄭道傳)은 '마음 혹여 놓으면 살타래처럼 엉키리니 반드시 일삼아서 종일토록 애쓰오.'라고 당부하였다. 정몽주는 '저 물도 밤낮을 쉬지 않고 넘실넘실 흐르는데 그대 마음 흔들리면 핼맥은 막히리.'라고 매사 조심하라는 뜻을 전했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는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여 죽주(竹州, 경기도 안성)로 귀양갔다. 1381년(우왕 7) 유배에서 풀려나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듬해 대사성(大司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우왕 대에 북원과 수교를 재개하면서 대명관계가 악화되자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랴오둥을 차단하여 고려 사신을 구금하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1384년(우왕 10) 김구용은 행례사(行禮使)로 랴오둥을 통과하려다가 체포되어 난징(南京)으로 압송되었다. 명 태조의 명으로 다리웨이(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루저우(瀘州) 융닝현(永寧縣)에서 병사했다. 김구용은 시와 문장에 뛰어났다. 이색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했다.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 8편이 실려 있는데, 특히 그의 시 '무창(武昌)'이 유명하다. 


무창(武昌) - 김구용


黃鶴樓前水湧波(황학루전수용파) 황학루 앞 강물은 용솟음쳐 오르고

沿江簾幕幾千家(연강렴막기천가) 강변엔 주렴과 장막 많기도 하구나

醵錢沽酒開懷抱(갹전고주개회포) 엽전 거둬 술잔치로 회포를 푸는데

大別山靑日已斜(대별산청일이사) 대별산은 푸르고 해는 벌써 지누나


'黃鶴樓(황학루)'는 중국 후베이 성(湖北省) 우한 시(武漢市) 양쯔 강변(揚子江邊)에 있는 누각이다. 후난 성(湖南省) 웨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 장시 성(江西省) 난창(南昌)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名樓)로 천하절경이라 일컬어진다. 각 층마다 보이는 풍광이 다르며, 황학루의 꼭대기에서는 양쯔 강의 전망이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학을 타고 내려온 왕자안(王子安)이라는 선인을 기념해서 황학루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고, 비문의(費文禕)가 선인이 된 이후 황학을 타고 이곳에 내려와 종종 머물렀다는 전설도 있다. 중국 역대 최고의 시인들인 최호(崔顥),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가도(賈島), 육유(陸遊), 양신(楊慎), 장거정(張居正) 등이 황학루의 절경을 노래했다. '大別山(대별산)'은 후베이 성과 허난 성(河南省) 북쪽, 안후이 성(安徽省) 동쪽의 경계선이자 화이허(淮河) 상류와 양쯔 강을 가르는 분수령을 이루는 산이다. 산이라기보다는 산맥이다. 먼 옛날 일망무제하던 바다의 해저가 융기하면서 솟아올라 하늘과 땅을 분간한다고 하여 대별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이 시에 대해 청섬(淸贍)하다고 평했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이색과 허균의 평을 인용하면서 김구용의 시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찬했으며, 문집 '척약재집(惕若齋集)'이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의 용장서원(龍章書院)에 배향되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는 김구용의 소요처라고 알려진 금수정(金水亭)이 있다. 금수정 뒤편에는 안동 김씨 고가터가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천곡(泉谷) 안성(安省, 1344∼1421)은 1410년과 1414년에 강원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어 삼척을 순시할 때 죽서루에 올라 '登竹西樓(등죽서루)'란 시를 지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안성의 '등죽서루'


登竹西樓(등죽서루) - 죽서루에 올라(안성)


峍屼蒼崖百尺樓(률올창애백척루) 푸른 벼랑에 솟은 백척 누각 우뚝한데

花開花落幾春秋(화개화락기춘추) 꽃은 피고 지고 세월 얼마나 흘렀던가

三千徒與風雲散(삼천도여풍운산) 삼천 무리는 저 풍운과 함께 흩어졌고

五十川同歲月流(오십천동세월류) 오십천 물은 세월과 함께 흘러서 가네

畵角一聲朝暮恨(화각일성조모한) 뿔나팔 한 소리는 아침 저녁의 한이고

煙波萬里古今愁(연파만리고금수) 안개 낀 만리 물결은 고금의 시름일세

何當報了君恩重(하당보료군은중) 어찌하면 그 중한 임금의 은혜를 갚고

高掛塵冠伴鷺鷗(고괘진관반로구) 낡은 갓 벗어던진 채 갈매기와 짝하리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 인생무상을 느끼면서 벼슬살이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고 싶은 심정을 노래한 시다. 광주 안씨(廣州安氏) 문중의 요청으로 2008년 5월 22일 죽서루에 걸린 이 편액은 벽계(碧溪) 조규용(曺奎鏞)이 글씨를 썼다.


안성의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습지(習之) 또는 일삼(日三), 호는 천곡 또는 설천(雪泉)이다. 아버지는 안기(安器)이다. 고려 우왕 초 생원에 합격하고, 1380년(우왕 6) 식년문과에서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목 판관(尙州牧判官)이 되었을 때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개국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안성이 청백리에 뽑혀 개성유후(開城留後)에 임명되었지만,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松京, 개성)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면서 궁전 기둥에 머리를 찧으며 통곡하자 좌우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면서 신하들을 제지하고 그를 급히 보호했다고 한다. 1396년(태조 5) 태조는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야박하게 지었다고 노엽게 여겨 안성을 축산(丑山, 지금의 경북 영덕군)에 유배시켰다.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고, 1410년(태종 10) 강원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내고 이듬해 다시 강원도 도관찰출척사로 나갔다. 1419년(세종 1)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유후에 제수되었으며, 참찬(參贊)을 거쳐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1421년(세종 3) 안성이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종이 70권을 부의로 내려주었다. 안성은 뒤에 장수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사(思)는 그전 과실을 뉘우침, 간(簡)은 평이(平易)하여 남을 헐뜯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안축의 외손자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 1350∼1418)는 삼척을 유람하다가 죽서루에 올라 오십천을 바라보면서 제영(題詠) 두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외조부 안축의 시 '濯我足(탁아족)'에서 따왔다. 첫 수의 운자는 綠(록), 曲(곡), 足(족), 玉(옥)이고, 둘쨋 수의 운자는 谷(곡), 復(복), 宿(숙), 竹(죽)이다.


五十川(오십천) - 정구


重崖控層樓(중애공층루) 겹겹 절벽 층층 누각 받치고

朱甍俯澄綠(주맹부징록) 붉은 기와 맑은 물 굽어보네

衆壑從西來(중학종서래) 뭇 골짝 서쪽에서 흘려 내려

縈回流百曲(영회류백곡) 물 감아 돌아 수없이 휘도네

白石素沙淸(백석소사청) 하얀 돌과 모래 한없이 맑아

欲洗紅塵足(욕세홍진족) 속세의 때묻은 발 씻고 싶네

飛湍灑石矼(비단쇄석강) 나는 듯한 강물 돌다리 씻고

急瀨翻珠玉(급뢰번주옥) 물살 세찬 여울 주옥 굴리네


泉甘土又肥(천감토우비) 샘물은 달고 또 땅도 비옥해

尙訝遊盤谷(상아유반석) 외려 평평한 골에서 노는 듯

山圍草樹深(산위초수심) 산 빙 둘러서 초목 우거지고

路轉去還復(노전거환복) 길 돌아가도 다시 그곳인 듯

到此世情微(도차세정미) 이곳에 오니 세상 뜻 적어져

欲去復信宿(욕거부신숙) 가려고 하다 다시 이틀 묵고

發興且高吟(발흥차고음) 흥 솟아 소리 높이 흥얼대며

淸樽對脩竹(청준대수죽) 맑은 술통 긴 대숲 마주했네


죽서루 앞을 흐르는 오십천의 풍경을 노래한 시다. 죽서루 오십천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이틀이나 더 묵어서 갔을까? '信宿(신숙)'은 이틀 밤(을 계속 머무르다)의 뜻이다. '脩竹(수죽)'은 가늘고 길쭉한 대나무다. 


정구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중상(仲常)이다. 아버지는 감찰대부(監察大夫)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양생(鄭良生)이다. 어머니는 안축의 딸 순흥 안씨이다. 첫째 부인은 참의 이인(李嶙)의 딸 고성 이씨, 둘째 부인은 좌윤 윤승경(尹承慶)의 딸 파평 윤씨. 아들은 정효경(鄭孝卿), 정선경(鄭善卿)이며, 손자는 정종(鄭種), 정비(鄭秠)이다.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내고, 1382년 김극공(金克恭)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1394년(태조 3) 왕명으로 고려 왕씨(王氏)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 한리(韓理), 봉상경(奉常卿) 조서(曺庶), 헌납(獻納) 권홍(權弘), 사복시 주부 변혼(卞渾) 등과 함께 '법화경(法華經)' 4부를 금니(金泥)로 썼다. 1397년 좌간의대부, 이듬해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막료로서 판교서 감사(判校書監事) 겸 상서원 소윤(尙瑞院少尹)에 이어 승지 겸 상서원 윤을 지냈다. 정종(定宗) 때 도승지, 대사헌에 이어 태종(太宗) 때 예문관 학사를 거쳐 중군 총제(中軍摠制),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공조 판서, 호조 판서, 판한성부사, 계림부 윤, 개성부의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 등을 지냈다. 1417년(태종 17) 의정부 참찬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 홍무연간(洪武年間, 명태조 朱元璋, 1368~1398)에 건강(建康, 난징)에서 만든 각궁(角弓)을 구입해 왔다. 그 뒤 의정부 찬성이 되었으나 풍병으로 사직하고 1418년(태종 18) 세상을 떠났다. 


예서와 초서, 전서를 잘 써 이름이 높았다. 1409년(태종 9)에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건원릉 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을 썼다. 건원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능이다. 그의 시 '松山幽居(송산유거)'와 '五十川(오십천)'이 전한다. 1418년(태종 18) 정절(靖節) 시호를 받았다. 태종은 시호를 내리면서 ‘松山一髮 首陽同屹 道德文章 百世師表(아득한 송산은 수양산처럼 우뚝하게 솟아 있구나. 만고의 충절이 어찌 백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맑고 밝은 자연 풍경은 정공의 품은 뜻이요, 그의 도덕심과 문장은 백세도록 스승이니라.)’라고 쓴 치제문(致祭文)을 하사하였다. 후에 사림(士林)에서 정구의 절의를 받들어 양주, 안의, 성주, 거창에 사당을 세웠다.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 있는 반암서원(盤岩書堂)에는 정구와 아들 정선경, 손자 정종, 정비를 배향하고 있다. 본래 정구는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와 함께 1777년(정조 1) 정충사(靖忠祠)에 모셔졌으나 1794년(정조 18) 다른 사람을 추향하게 되어 그해 9월 위패를 옮기고, 이름도 반암서원으로 바꿨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다시 지어 반암서당이라고 하였다. 1994년에 증축한 현재의 건물은 앞쪽에 강당인 반암서당이 있고, 뒤쪽에 사당인 세덕사(世德詞)가 있다.


정구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어룡동(魚龍洞)에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8세손 정기(鄭耆)가 꿈을 꾸고 나서 묘를 찾았는데, 1977년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산단로 68번길 32)으로 옮겼고, 2002년 재실인 송산재(松山齋)와 숭정사(崇靖祠)를 지어 정구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 정선경과 정효경을 배향하였다.


고려 말 양주(지금의 의정부시 민락동 삼귀마을)에 정구를 비롯하여 송산(松山) 조견(趙狷, 1351~1425), 원선(元宣) 등 세 사람이 들어와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 절개를 기리기 위해 1789(정조 13) 사당을 짓고 삼귀서사(三歸書祠)라 하였다. 이후 1804년(순조 4) 사당 이름을 송산사(松山祠)로 고쳤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양원마을에 있는 동래 정씨 마을 어귀에는 '정구가 고려 말 이후 이주한 이래 동래 정씨 동성이 모여서 이루어진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 초 세종(世宗) 대부터 성종(成宗) 대까지 활동한 문신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죽서루와 오십천의 가을 풍경을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묘사한 시 '三陟竹西樓(삼척죽서루)'를 지었다. 첫 수의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이고, 둘쨋 수의 운자는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竹西樓(삼척죽서루) - 이석형


壁立層巒匝一樓(벽립층만잡일루) 절벽처럼 층층 솟은 산들 누각을 에워싸고

炎歸大地自先秋(염귀대지자선추) 더위가 물러간 대지에는 가을이 먼저 왔네

月潭涵影琉璃靜(월담함영유리정) 달 그림자 머금은 연못은 유리처럼 맑은데

秋岸凌波錦繡流(추안능파금수류) 가을 언덕 아래로는 아름다운 물결 흐르네

香落梅花飛遠恨(향락매화비원한) 지는 매화향에 멀리 떠나온 슬픔을 날리고

靑浮竹葉送窮愁(청부죽엽송궁수) 물결에 뜬 푸른 댓잎에 근심을 실어보내네

此身已許靑雲老(차신이허청운로) 나는 이제 속세를 벗어나 자연에서 늙고파

空把閒情付白鷗(공파한정부백구) 한가한 마음 공연히 흰 갈매기에 부치노라


自識儒林最下流(자식유림최하류) 선비들 중에 최하류임을 내 스스로 알거늘

尋雲雨上靑樓(지심운우상청루) 다만 운우를 찾아서 청루에 오를 뿐이로세

鳴珂千里窮遐邇(명가천리궁하이) 명가의 소리는 천리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仗節三秋任去留(장절삼추임거류) 부절 삼년 지녔으니 떠남과 머뭄 맡겼노라

行路孰看隨一鶴(행로숙간수일학) 인생행로를 잘 살펴서 한마리 학을 따르고

緣江唯喜押雙鷗(연강유희압쌍구) 강가의 갈매기 한쌍과 노닌다면 기쁠 따름

老來疏放今猶甚(노래소방금유심) 늘그막에 거리낌 없음이 오히려 더 심해져

豪氣還堪隘九州(호기원감애구주) 호방한 기상 구주에 가득차고도 되려 남네


첫 수에서는 죽서루와 오십천의 가을 풍경을 그림처럼 묘사했고, 둘쨋 수에서는 호방한 기상으로 자연에 묻혀 살고 싶다는 포부를 노래하였다. '鳴珂(명가)'는 말굴레 장식품, 또는 악기다. '遐邇(하이)'는 '멀고 가까움, 사방'이다. '仗節(장절)'은 '손에 부절(符節)을 지님, 절개를 지키는 모양'이다.


이석형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이다. 사복시정 이장(李庄)의 증손, 임천부사 이종무(李宗茂)의 손자, 대호군 이회림(李懷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김반(金泮)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뒤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간원 정언에 이어 집현전 부교리, 응교, 직전(直殿), 직제학을 지냈다.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갔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를 지낸 뒤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456년 6월 이른바 사육신 사건(死六臣事件)이 전해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겼다. 세조는 중벌에 처하자는 대간의 여론을 무시하고 오히려 예조 참의에 임명했다. 1457년 판공주목사, 이듬해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세조의 총애로 한성부 윤이 되었다. 1460년 세조의 특명으로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왕의 서쪽 지방 순행을 수행해서 세조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불렸다. 이듬해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1462년 호조 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를 겸해 호패법(號牌法)을 철저히 밝혀 정리하였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70년(성종 1)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해 주문(主文)을 맡았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석형은 필법이 신묘하고, 집현전 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論語)'의 구결을 주관하였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시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치평요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