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소재(少齋) 강징(姜澂, 1466∼1536)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죽서루를 찾아 '次(차)'를 지었다. 강징의 '차' 다음에는 그의 6대손 설죽당(雪竹堂) 강재숙(姜再淑, 1677~1758)과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발문(跋文), 17대손 강신소(姜信昭)의 발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글씨는 정항교(鄭亢敎)가 썼다.
강징의 '차', 강재항과 강재숙의 발문, 강신소의 발문 편액(아래)
次(차) - 차운하다(강징)
仙閣岧嶢揷高城(선각초요삽고성) 신선 사는 누각 높다란 성에 세웠는데
客來登眺動愁情(객래등조동수정) 나그네 올라 보니 서글픈 마음 치미네
十分歸思雲邊盡(십분귀사운변진) 고향 돌아갈 생각 구름 같이 사라지고
萬丈虹光醉裏成(만장홍광취리성) 높이 뜬 무지개 취한 김에 아른거리네
大野雄風吹海立(대야웅풍취해립) 너른 벌판에 부는 바람은 바다로 불고
千重巨浪殷雷行(천중거랑은뢰행) 거센 물결 우뢰 같이 세차게 몰려오네
夜深歌吹喧喧地(야심가취훤훤지) 깊은 밤 떠들썩 들려오는 노래와 연주
人在瑤臺倚月明(인재요대의월명) 사람들 달빛에 기대 요대에 앉아 있네
東來物色入新年(동래물색입신년) 동에서 온 물색 새로운 해로 접어드니
鄕思悠悠寄海天(향사유유기해천) 고향 생각은 유유히 바다 멀리 보내네
兩部笙歌供夜醉(양부생가공야취) 생황 불고 노래하며 밤 늦도록 취하자
雙淸雪月到梅邊(쌍청설월도매변) 눈과 달의 밝은 빛이 매화나무 비치네
窓中几席迎紅旭(창중궤석영홍욱) 창안의 궤석은 아침의 붉은 해를 맞고
樓上簾旌拂紫煙(누상렴정불자연) 누각의 발과 깃발 안개 속에 나부끼네
物外眞遊如可得(물외진유여가득) 세상밖에서 참 즐거움 얻을 수 있을까
欲審蓬島覓神仙(욕심봉도멱신선) 봉래산 찾아가 신선을 찾아 불까 하네
觀察使姜澂(관찰사강징) - 관찰사 강징
강징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삼척부 순시를 나왔던 모양이다. 관찰사가 순시를 나왔으니 삼척부사는 관동제일루 죽서루에서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풍악을 울리면서 노래하며 흥겹게 놀다가 아침을 맞이하는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
'岧嶢(초요)'는 산이 높이 솟은 모양이다. '雄風(웅풍)'은 힘차게 부는 상쾌한 바람이다. '殷雷(은뢰)'는 천둥소리, 우뢰소리다. '喧喧(훤훤)'은 커다란 소리로 떠들썩한 모양이다. '瑤臺(요대)'는 신선이 사는 곳이다. '物色(물색)'은 원래 짐승의 털 빛깔을 뜻했다. 사물의 빛깔이나 사람 또는 물건의 생김새를 말한다. '兩部(양부)'는 합창을 가리킨다. 고대의 악대(樂隊)가 앉아서 연주하는 사람과 서서 연주하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을 부르는 말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이 두 가지 악기들을 구비한 성대한 음악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笙歌(생가)'는 '피리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악기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의 뜻이다. '雙淸(쌍청)'은 '동양화에서 매화에 수선을 배합하여 그린 그림, 마음가짐과 하는 일이 다 깨끗함, 광풍(光風)과 제월(霽月)' 등의 뜻이 있다. '雪月(설월)'은 '눈 위에 내리 비치는 달빛, 눈 내린 밤의 달'이다. '紅旭(홍욱)'은 떠오르는 붉은 해다. '紫煙(자연)'은 '담배 연기, 안개'의 뜻이다. '物外(물외)'는 세상 물정의 바깥, 속세(俗世)의 밖이다. '蓬島(봉도)'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해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
강징의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소재 또는 심재(心齋)다. 강회중(姜淮仲)의 증손, 할아버지는 강안복(姜安福), 아버지는 강이행(姜利行), 어머니는 허손(許蓀)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외삼촌인 우의정 허종(許琮)의 가르침을 받았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를 거쳐 예문관 검열이 된 이후 수많은 관직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하였다가 노여움을 사서 전라도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강원도 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형조 참판이 되었다. 1508년(중종 3)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전주부 윤으로 나아갔다가 돌아와 예조 참판을 지냈다.
중종이 향산구로(香山九老)와 낙중선현(洛中先賢)을 그린 병풍을 만들게 하여 대제학 신용개(申用漑)로 하여금 발문을 짓게 하고, 강징에게 여러 노신(老臣)들의 이름, 관작, 시문을 쓰도록 하는 한편, 홍문관에서 올린 '명도잠(明道箴)'도 써서 올리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강징을 당대의 명필이라 하였다. 1520년(중종 15)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1521년(중종 16)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뛰어난 글씨 솜씨에 감탄하여 황제가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강징은 당대 최고의 명필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작품에는 정익혜공난종신도비(鄭翼惠公蘭宗神道碑)와 예조참의최한정비(禮曹參議崔漢禎碑) 등이 있다. 강징의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31번지에 있다. 1536년(중종 31) 신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대제학 정사용(鄭士龍)이 짓고, 글씨는 이조 참판 조상우(趙相禹)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이조 참의 윤덕준(尹德駿)이 썼다
右七言近體二章十六句卽我先祖參判公所作. 公善爲讀書法擅一代. 中宗大王老摘香山九老及洛中耆英繪爲屛帳. 申公用漑跋之而命公寫諸老名爵詩文及跋語.弘文館上明道箴上又命公寫及進, 上嘉賞不已. 公嘗朝京師時, 皇明世宗皇帝新卽位初(?)視學公報章禮部請盛禮, 禮部郞官見公詞理書跡歎其美, 令別寫一本以供私翫, 尙書亦加歎服特奏勅許隨文官四品之列, 前所未有也.(以上見鄭00所撰神道碑銘)先祖文章筆法爲聖祖所譽嘗如是,爲相國所推服如是, 而今所傳者無多, 可勝嘆哉, 而此二詩者公按關東時登陟州竹西樓作者也. 伯氏嘗於利川宗人姜益九氏處得之云. 其祖宗悅與松江鄭相國善, 相國按關東時卽一本且爲四韻詩一章寄來, 余少時摸以刻之,卽以其版歸之. 今之去先祖已數三周矣, 本州所懸板本今不可見矣 而獨此尙無恙, 豈非幸歟 奉翫以來,自不禁感愴之思, 卽印以藏之家塾且記顚末如右云.[위 칠언율시 2장 16구는 선조 참판공께서 강원도 관찰사 때 죽서루에 올라서 지은 것이다. 공은 독서를 좋아하시고 서법은 한 시대에 뛰어나셨다. 일찌기 중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공용개(申公用漑)를 시켜 지은 향산구로(香山九老)와 낙중기영(洛中耆英)을 그린 병풍의 발문을 썼으며, 또 명을 받아 제노명작(諸老名爵)의 시문 및 발어(跋語)와 홍문관 명도잠(明道箴)을 써 올리니 왕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이 일찌기 명나라 서울에 도착하여 새로 즉위한 세종(世宗)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예부(禮部)에서 예의를 갖추고 공의 글과 필적을 보고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일부를 별도로 쓰게 하여 사물(私物)로 두고 즐겨 보았으며, 상서(尙書)도 탄복하고 특별히 황제에게 주청하여 문관 4품열(文官四品列)에 있도록 허락하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선조의 문장과 필법에서 성왕(聖王)의 감상이 이러하고 상국(上國)의 추복(推服) 역시 이러함이 지금까지 알려지고 있는 즉 이에 겨룰 만한 것이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공께서 강원도 관찰사 재임시 척주(陟州) 죽서루에 올라 지은 이 두 시는 백씨(伯氏, 강재숙)께서 이천(利川)에 사는 종인 강익구(姜益九)씨로부터 받았는데, 그의 조부 종열공(참판공의 제4자 교관공 강엄의 자)께서 송강 정상국(정철)을 좋아하고 따랐는 바 상국이 강원도 관찰사 때 관동 순행시 구하여 얻은 것이다. 4운시(四韻時) 인본(印本) 일장(一章)을 지어 보냈기에 곧바로 베껴 쓰고 판에 새겨 돌려보냈다. 선조로부터 이미 수삼 주(數三周)가 지난 지금 본주(本州)에 걸려 있어야 할 현판이 없어 불 수 없으나 이것만은 아무 탈 없었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받들어 감상한 이래로 감창하는 마음을 누룰 수 없어 즉시 인본하여 가숙(家塾)에 보장하기로 하고 그 전말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上之四十五年己未春三月己丑六代孫再恒謹跋, 後七年乙巳春三月丁巳六代孫再淑謹書[숙종 45년(1719) 음력 삼월 기축(己丑)일에 6대손 재항(再恒)이 삼가 발문을 쓰다. 그 뒤 7년(영조 원년, 1725) 음력 삼월 정사(丁巳)일에 6대손 재숙(再淑) 삼가 쓰다.]
강재숙과 강재항은 형제 간으로 우애가 각별했다. 강재숙은 평생 은둔처사로 살면서 그의 동생 강재항과 함께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강재숙은 신임옥사(辛壬獄事)를 통해서 득세한 소론 과격파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창의(倡義)하기도 했다. 강재숙은 후사가 없어 동생의 하나뿐인 아들 택일(宅一)을 후계자로 삼았다. 사후에 그는 가선대부에 추증되었으며,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산재차록(山齋箚錄)'을 저술(著述)하였으며, 문집에 '설죽당집(雪竹堂集)'이 있다. 강재숙은 문장과 필법이 당대에 뛰어났다. 글씨는 백하(白下) 윤순(尹淳)에 비견된다는 평을 들었다.
봉화 뇌풍정(雷風亭)의 주인 강재항은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문인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을 이어받았다. 1735년(영조 11)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은 강재항을 영조에게 천거하였다. 조현명은 온건파를 중심으로 한 완론탕평(緩論蕩平)을 주도했던 소론 계열의 문신이었다. 강재항은 장작감 감역(將作監監役)에 임명된 이후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경조부 주부(京兆府主簿), 회인현감(懷仁縣監) 등을 지냈다. 회인현감 시절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윤증의 '획일도(畫一圖)'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강론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강재항의 문집에는 '입재유고(立齋遺稿)' 20권이 있다. 문집 중 <산거부(山居賦)>는 산림에 거처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청량산(淸凉山) 일대의 산세를 찬탄하면서 선비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산림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노래하였다. <장작감변통사의(將作監變通事宜)>는 1737년(영조 13) 장작감 감역으로 있으면서 현지의 네 가지 폐단을 논한 글이다. <회인현보민청간상절목(懷仁縣補民廳看詳節目)>은 회인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보민청의 운영, 관리 절목을 여덟 가지로 정한 것이다. <동사평증(東史評証)>은 1748년(영조 24) 조선 역사에 관해 숙신(肅愼)으로부터 고려까지 선유들의 논을 평한 것이다. 묘소는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성잠(星岑)마을 그가 살던 집 뒤 한천(寒泉)의 언덕에 있다.
余嘗我先祖參判公所遺板跋爲拜覽登是樓, 過尋壁未竟未見是板焉不勝慙愧乃惶惕而謁其故於晉州宗門宋老不禁嘆駭曰顚末之告官而請願追刻揭板. 遂三陟市長金日東欣然而周旋以爲景物之勝前人之述備矣若無立齋公九世孫素巖汝元大父之珍藏豈足以此按之名言補也非無晩時之歎, 豈非幸歟.[내가 일찌기 선조 참판공께서 남기신 판발(板跋)을 배람(拜覽)하려고 이 누각에 올라 벽을 살펴보았으나 이 판을 보지 못하였다. 부끄러움을 이길 수 없어 당황하여 그 까닭을 진주 종가의 집안 송 노인에게 아뢰니 놀람을 억누르지 못하며 말하기를, '전말을 관에 알려 게판을 추각(追刻)하도록 청하자!'고 하셨다. 마침내 삼척시장 김일동(金日東)이 흔쾌히 주선하고 말하길 '경물이 뛰어남은 이전 사람들의 기술이 갖추었다. 만약 입재공(立齋公)의 9세손인 소암(素巖) 여원(汝元) 큰아버지가 소중하게 소장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것으로 살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는데, 명언이다. 때늦은 안타까움이 없을 수 없으나 어찌 다행스럽지 않은가?]
成參判公竹西樓題詠後四百九十七年詩板遺失, 後三百餘年癸未小滿後三日十七世孫信昭謹跋, 文學博士鄭亢敎謹書[참판공아 죽서루를 읊은 뒤 497년 뒤, 시판이 유실된 이후 300여 년 뒤 계미(癸未) 소만 3일 뒤에 17세손 신소(信昭)가 삼가 발문하고, 문학박사 정항교(鄭亢敎)가 삼가 글씨를 쓴다.]
'계미(癸未)'는 2003년이다. '소만(小滿)'은 음력 4월, 양력 5월 20~21일께가 된다. 강신소의 발문은 2003년 5월 23~24일 경에 쓴 것이다. 강신소에 대해서는 강징의 17대손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정항교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강릉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오죽헌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1507년(중종 1)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 1454~1527년)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정수강은 순시차 삼척에 들렀을 때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지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정수강
十二欄干客倚樓(십이난간객의루) 죽서루 열두 난간 누대에 객이 기대니
入簾天氣近新秋(입렴천기근신추) 발 사이로 드는 천기 초가을에 가깝네
但看爛石山川老(단간란석산천로) 돌이 썩고 산천이 늙어가는 것만 보다
不覺跳丸歲月流(불각도환세월류) 탄환 같이 빠른 세월의 흐름은 몰랐네
一枕偶然成旅夢(일침우연성려몽) 한밤 베개에 우연히 객의 꿈 이루었고
三盃聊復罷覊愁(삼배료부파기수) 석잔 술에 오로지 나그네 시름 녹이네
誰知盡日安閑意(수지진일안한의) 그 누가 하루종일 한가한 뜻을 알리오
都付滄波泛泛鷗(도부창파범범구) 창파에 떠도는 물새에게 다 부친 것을
세월이 탄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마음은 언제나 강호에 두고 있음을 노래한 시다.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벼슬아치들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쯤 지어 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정수강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불붕(不崩)이다. 정안경(丁安景)의 증손, 정연(丁衍)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소격서령(昭格署令) 정급(丁伋)이며, 어머니는 황처성(黃處盛)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정언과 병조 좌랑, 병조 정랑을 지냈다. 1482년에는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9년(연산군 5) 장령 때 성준(成俊)의 불법을 탄핵하였으나, 논사(論事)를 피하려고 휴가를 얻어 충청도에 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1503년 직제학으로 영등포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불법행위를 조사한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다. 그가 홍문관 부제학(정삼품 당상관)으로 있을 때 전임 관찰사 강징은 직제학(정삼품 당하관)이었다.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판결사, 대사간을 거쳐 1512년 병조 참지에 이르렀다. 1516년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선발되었다. 1518년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 병조 참판, 동지중추부사, 전의제조(典醫提調), 빙고제조(氷庫提調)를 지냈다. 저서에는 '월헌집(月軒集)'이 있다.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급진개혁파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어 내려왔다. 신광한은 삼척부사 재임 중 죽서루를 찾아 아름다운 경치와 자신의 감회를 담은 '竹西樓八詠韻(죽서루팔영운)'과 '竹西樓(죽서루)', '竹西樓夜吟(죽서루야음)' 등의 시를 지었다. '죽서루팔영운'은 안축의 '삼척서루팔영'에서 차운해서 지은 시다.
竹西樓(西軒四時 春) - 죽서루(서헌 사계절 중 봄)
勝日登臨霽景鮮(승일등림제경선) 맑은 날 누각에 오르니 경치는 산뜻하고
江山明眉艶陽天(강산명미염양천) 봄날의 하늘 아래 강산은 몹시 아름답네
傍籬紅濕桃含雨(방리홍습도함우) 울타리에 진 복사꽃은 빗물 머금어 붉고
繞渚靑深柳帶烟(요저청심류대연) 물가에 늘어선 푸른 버들엔 안개 끼었네
造化着功還有像(조화착공환유상) 신은 공들여 아름다운 모양 빚어 놓았고
物生隨分自無偏(물생수분자무편) 만물은 분수 따라 각자 제자리 차지했네
已將白苧裁春衣(이장백저재춘의) 하얀 모시로 고운 봄옷 만들어 보았는데
欲試東風更喟然(욕시동풍갱위연) 동풍 시험삼아 입어 보려다 탄식만 하네
죽서루의 봄경치를 읊은 시다. '勝日(승일)'은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좋은 날, 맑은 날이다. '霽景(제경)'은 비 개인 날의 풍경이다. '明眉(명미)'는 '아름답다, 수려하다'의 뜻이다. '陽天(양천)'은 구천(九天)의 하나다.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을 아홉 개로 나눴는데, 그중 남동방(南東方)을 이르는 말이다. '艶陽(염양)'은 따스한 봄 날씨, 화려한 만춘의 계절이다. '艶陽天(염양천)'은 따스한 봄날의 맑은 하늘이다. '造化(조화)'는 조물주, 신이다. '物生(물생)'은 만물이다. '無偏(무편)'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음이다. '喟然(위연)'은 탄식하는 모양이다.
竹西樓(西軒四時 冬) - 죽서루(서헌 사계절 중 겨울)
山外孤村少往還(산외고촌소왕환) 산밖 외로운 마을은 사람의 왕래도 없고
雪晴江路細漫漫(설청강로세만만) 눈은 그쳤으나 강으로 난 길은 아득하네
田間鳥啄空林樂(전간조탁공림락) 밭도랑 새 쪼아대는 소리 빈숲에 울리고
樓上人憑短檻看(누상인빙단함간) 누각의 사람 짧은 난간에 기대 바라보네
銀界遠連滄海闊(은계원련창해활) 은계는 먼 푸른 바다까지 이어져 트였고
玉峯高拱暮天寒(옥봉고공모천한) 옥같은 봉우린 저녁 찬 하늘에 솟아있네
前溪一夜層氷閤(전계일야층빙합) 앞개울은 하룻밤 새 얼음 대궐을 이뤘고
閑却漁家舊釣竿(한각어가구조간) 고기잡이 옛 낚싯대는 무심히 놀고 있네
죽서루의 겨울경치를 읊은 시다. '漫漫(만만)'은 '(시간·벌판 따위가) 끝없다, 가없다, 가득하다'의 뜻이다. '空林(공림)'은 낙엽이 떨어져 텅 빈 숲이다. '銀界(은계)'는 은백색 눈으로 뒤덮인 신선 세계다. '高拱(고공)'은 '팔짱을 높이 끼다, 팔을 높이 들어 읍하다'의 뜻이다. 어떤 일에 관계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天寒(천한)'은 날씨가 추움이다. '閑却(한각)'은 무심하게 내버려둠이다. '釣竿(조간)'은 낚싯대다.
竹西樓夜吟(죽서루야음) - 죽서루에서 밤에 읊다(신광한)
夜寂灘聲近(야적탄성근) 밤 고요하니 여울 소리 가깝게 들려오고
蟲喧秋氣深(충훤추기심) 벌레들 울어대니 가을 기운 깊어 가누나
高樓燈火耿(고루등화경) 높은 누대 등불이 환하게 비치는 가운데
四座各言心(사좌각언심) 자리에 있는 손님들 각각 마음 토로하네
신광한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다. 호는 기재 외에 낙봉(駱峰), 석선재(石仙齋), 청성동주(靑城洞主)가 있다. 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증손,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손자, 내자시정(內資寺正) 신형(申泂)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13년(중종 8)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에 이어 홍문관 부수찬, 교리, 정언, 공조 정랑을 차례로 지내고 ,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조광조 등과 함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다시 여주로 추방되어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중종 33) 기묘명현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된 뒤 대사간, 경기도 관찰사·한성부 우윤, 병조 참판을 지내고, 1540년(중종 35) 대사헌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자 우참찬 신광한은 소윤(小尹)에 가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뒤에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으로 추봉되었고, 이어 좌참찬, 예조 판서를 역임하고, 1548년 (명종 3)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신광한은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다. 또한, 그는 청렴하여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孟子)와 한유(韓愈)를 모범으로 삼았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 '기재집(企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곡, 이달충, 서거정, 신광한 외에도 안축의 '삼척서루팔영'에서 차운한 제영시에는 간재(艮齋) 최연(崔演, 1503~1549)의 '차안근재삼척팔영운(次安謹齋三陟八詠韻)', 괴은(乖隱) 정구(鄭球, 1471~?)의 '차삼척동헌팔영운(次三陟東軒八詠韻)'이 있다.
1531년(중종 26)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1487년 ~ 1540년)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순시차 삼척에 들렀을 때 심언광은 죽서루에 올라 칠언율시 한 수를 읊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심언광
煙雨濛濛濕翠樓(연우몽몽습취루) 안개비 촉촉이 내려 푸른 누각 적시고
九霄凉籟一衿秋(구소량뢰일금추) 한밤중 맑은 소리 옷깃 가득 가을일세
江山有約人將老(강산유약인장노) 강산과 맺은 약속에 사람만 늙어 가고
天地無情水自流(천지무정수자류) 천지 무정하여 물 쉬지 않고 흘러가네
萬里此身同泛梗(만리차신동범경) 멀리 떠도는 신세 물위의 조각배 같아
百年何處着窮愁(백년하처착궁수) 평생 어느 곳에 끝없는 근심을 맡길까
黃埃乾沒傷眞性(황애건몰상진성) 세파에 빠지다 보니 참 본성마저 잃어
羞向滄波見白鷗(수향창파견백구) 푸른 물결 향해 갈매기 보기 부끄럽네
때는 가을이다. 죽서루에 오르니 강호 자연에 살고자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감을 한탄하는 시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참 본성마저 잃어버려 갈매기를 보기조차 부끄럽다는 내용이다. '泛梗(범경)'은 물에 뜬 나무 장승(木梗). 즉,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을 말한다.
심언광의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사형(士炯)이다. 사정(司正) 심충보(沈忠甫)의 증손, 증 병조 판서 심문계(沈文桂)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심준(沈濬)이다. 어머니는 사직 김보연(金普淵)의 딸이다. 중종 때 이조 판서와 좌찬성을 지낸 심언경(沈彦慶)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춘추관 기사관(사관), 예문관 검열(한림),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이어 함경도 경성(鏡城) 판관,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옥당), 경연관 시독관, 세자시강원 보덕(輔德), 사헌부 집의, 홍문관 전한(典翰), 경연관 시강관, 홍문관 부응교, 경기도 암행어사, 사간원 사간, 홍문관 직제학,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다.
1530년(중종 25) 심언광은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해운정(海雲亭, 보물 제183호)을 짓고 문장과 풍류를 즐겼다. 이듬해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532년(중종 27) 홍문관 부제학 겸 경연관 참찬관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 동지경연관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 우윤, 공조 참판, 이조 참판, 특진관, 병조 참판을 지내고, 1535년 공조 판서 겸 경변사(警邊使)로서 평안도 지역에 출몰한 야인들을 토벌하였다. 1536년 이조 판서 겸 지경연관사를 거쳐, 1537년(중종 32) 다시 공조 판서를 제수받았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자신의 외손녀를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시키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김안로의 실각 이후 다시 공조 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을 지내고, 형 심언경과 함께 정승의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앞서 김안로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등용시킨 일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심언경과 함께 파직되었다.
1684년(숙종 10) 심언광은 신원 복관작되어 직첩이 환급되었고, 1761년(영조 37) 문공(文恭)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시와 문장에 매우 뛰어나 문신 제술과에서 여러 번 수석을 차지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인 '어촌집(漁村集)'이 있다. 그의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다.
1549년(명종 4)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인재(認齋) 박세후(朴世煦, 1494∼1550)는 순시차 삼척에 들렀을 때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지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박세후
一區形勝聚西樓(일구형승취서루) 이곳 멋진 경치는 죽서루에 몰려 있는데
仗月登臨正値秋(장월등림정치추) 수령이 되어 오르니 때는 바로 가을일세
風引烟嵐依嶺去(풍인연람의령거) 바람은 산기운 당겨 산마루에 걸려 있고
江涵澄碧繞城流(강함징벽요성류) 맑고도 푸르른 강은 성을 둘러서 흐르네
少年嘗愛東平樂(소년상애동평락) 젊어서 일찍 동평의 선한 낙 사랑했는데
老境翻懷宋玉愁(노경번회송옥수) 늙어지니 생각 바꿔 송옥의 근심 품었네
萬事已知皆夢裏(만사이지개몽리) 세상사 모두 한바탕 꿈이라는 것 알기에
浮生端合伴沙鷗(부생단합반사구) 부평초 같은 인생 모래톱 물새와 벗하리
삼척부사가 되어 명승지 죽서루에 올라 젊어서는 '동평락(東平樂)'을 사랑했는데, 늙어서는 '宋玉愁(송옥수)'를 품게 되었다면서 세상사 모두 한바탕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강호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살리라는 내용의 시다.
'東平(동평)'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여덟째 아들로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진 유창(劉蒼)을 가리킨다. 광무제가 그에게 '집에 있으면서 무슨 일이 가장 즐거우냐?(處家何等最樂)'라고 묻자, 동평왕은 '선행을 하는 것이 가장 즐겁습니다.(爲善最樂)'라고 대답했다.(後漢書 卷42 光武十王列傳 東平憲王蒼傳) '宋玉(송옥)'은 초(楚)나라 시인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였다. 그의 초사(楚辭) 가운데 '구변(九辯)'은 스승 굴원이 초나라 조정으로부터 추방되자 근심과 슬픔을 담아 지은 것이다. 이 시에서 '宋玉秋(송옥추)'라는 말이 나왔는데, 처량한 가을빛을 보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박세후의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중온(仲溫), 호는 인재 또는 눌재(訥齋)다. 박안의(朴安義)의 증손, 박미창(朴美昌)의 손자다. 아버지는 군자감 부정 박사화(朴士華),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조광조의 문인이다.
박세후는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훈구파(勳舊派)의 정치공작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숙청되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성균관 전적에 등용되고, 1522년 박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527년 다시 박사로 복직되어 전적을 지내고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광양현감이 되어 공자의 묘가 허술한 것을 보고 묘우를 옮겨 지었다. 1533년 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郎)이 되고 곧 이조 좌랑으로 옮겼으나, 김안로의 청혼을 거절한 뒤부터 미운털이 박혔다. 1535년에 공조 좌랑, 이듬해 장악원 첨정이 되었으나, 간관의 탄핵으로 문외출송을 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홍문관 교리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종부시(宗簿寺)와 봉상시(奉常寺) 첨정을 지냈다. 1540년 밀양부사로 특선되었고, 1544년 좌필선(左弼善)에 이어 곧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 참의를 지내고, 1549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기(李芑)의 연척인 양구현감 신난수(愼蘭秀)의 비행을 적발하여 보고하였다가 도리어 잡혀가 고문을 받았지만 왕의 특명으로 풀려났다.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의 신재서원(新齋書院, 鳳陽祠)에 기묘명현 최산두(崔山斗, 1482~1536)와 함께 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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