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7년(선조 40년) 3월 23일 불우한 이들의 벗, 시대의 이단아이자 혁명가 교산(蛟山) 허균 (許筠, 1569∼1618)이 삼척부사로 부임했다. 어느 날 그는 죽서루에 올라 '竹樓賦(죽루부)'를 지어 읊었다. '죽루부'는 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죽서루부(竹西樓賦)’라고도 한다.
竹樓賦(죽루부) - 허균
歲在丁未, 余宰眞珠, 公餘覽勝, 竹西之樓. 矚頭陀之萬丈, 兮臨五十之瓊流. 遡長風而永嘯兮, 聊以舒夫離憂. 日睕晩以向夕兮, 羌欲去而少留. 于時春物尙餘, 夏景初麗, 雜花映欄, 濃陰覆砌, 回廊闃以無人兮, 鳥語媚其新霽, 山翠滴兮霏霏, 竹煙生兮細細. 余乃披雪氅岸華陽, 手玉塵, 偃匡床, 俯庭除之喬林, 凝畵戟之淸香, 盖三子之同調兮, 亦相隨而徜徉. 於是命膳夫促華饌, 旨醴登嘉魴, 薦匏箏梓瑟, 雜奏徵變. 揚子夜之新聲, 引結風之初轉 子夜歌, 聊窮驩而自虞兮, 忘此身之異縣. 少焉娥暉未舒, 桂燭高燒, 夜色澄凉, 波光泬漻, 銀河耿兮瑤甍, 玉繩低兮琳霄. 捲珠箔而容與兮, 指蓬島之非遙, 超逸興之遄飛兮, 覺浮丘之可招. 爾其衆賓旣醉, 樂事方極, 諧唱未弭, 我懷以惻, 悲流光易失兮, 若逝川之頹波光陰. 世故紏而催人兮, 嗟少壯之幾何. 念代謝之必至兮, 知來日之無多. 奚臨觴而不御, 願抒情而高歌. 歌曰紫簫咽兮, 露氣團, 金壺滿兮, 芳夜闌. 浮生兮若寄, 胡不樂兮永嘆. 歌竟以吁四座寂然, 憑欄悵望 月在高天.[1607년에 삼척부사로 부임했네. 공무의 여가에 명승 보려 죽서루에 오르네. 두타산은 만 길이나 솟아 있고, 오십천 맑은 물이 발밑으로 흐르네. 세찬 바람 맞으며 휘파람 길게 불면서 집 떠나온 시름을 달래보네. 해가 서산에 지면 떠날까 하다가도 조금 더 머물고 싶어라. 아직 봄 물색 남아 있는데 초여름 경치 곱구나. 온갖 꽃 난간에 흐드러지게 피고, 녹음은 섬돌을 덮었네. 마루에는 인적이 끊겼고, 새들은 고운 소리로 비갠 하늘을 노래하네. 우거진 녹음은 푸른 물이 듣는 듯하고, 대숲에 안개 하늘하늘 피어오르네. 학창의 입고 화양건 쓰고, 손에 옥주 들고, 평상에 누워 뜨락의 숲을 굽어보며, 화극의 맑은 향기를 응시하네. 노자와 장자, 열자가 한자리에 모인 듯 어우러져 서로 따라 노니는구나. 요리사에게 명하여 성찬을 재촉하니 맛 좋은 감주, 방어를 올리네. 생황과 비파 온갖 풍류악기를 울리니 치조와 변조 뒤섞여 한바탕 어우러지는구나. 한밤중에 신곡이 울려 퍼지자 바람마저 따르는 듯하고, 신명나게 즐기니 향수마저 잊겠구나. 달이 아직 뜨지 않아 등촉 높이 밝히니 야경은 청량하고 물빛은 공허하네. 은하수는 용마루에서 반짝이고, 옥승은 맑은 하늘에 나직하여라. 주렴 걷고 그윽하게 바라보니 봉래섬이 멀지 않고, 초연히 흥이 절로 나니 부구 신선이나 불러볼까. 좌중은 이미 취하였고, 술자리는 무르익어 떼창소리 그치지 않는데 나홀로 서글픈 회포에 젖누나. 슬퍼라 빛처럼 물처럼 흘러서 잃어버리기 쉬운 세월! 세상사는 꼬이고 인생을 재촉하네. 아, 젊은 시절 그 얼마나 되는가! 후생이 곧 이을 것이니 앞날이 많지 않음을 알겠노라. 어찌 술잔을 반기지 않으리! 큰소리로 노래하며 회포를 풀어 보리라. 퉁소 소리 흐느끼자 이슬방울 맺히고, 동이에 술 가득하고 향기로운 밤 깊어가네. 인생은 부평초처럼 잠시 떠돌다 가는 것, 어찌 즐기지 않고 장탄식만 하고 있을 손가! 노래를 마치고 탄식하니 좌중에 침묵만 감도는구나. 난간에 기대어 쓸쓸히 바라보니 하늘 높이 달만 떠 있구나.]
늦은 봄 죽서루의 경관과 이를 보고 느낀 감흥을 읊은 부(賦)다. 두타산의 수많은 봉우리가 보이고, 맑은 시내를 끼고 있는 죽서루는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온갖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선경이다.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된 허균은 술자리를 벌인다. 술에 취하고 봄밤의 낭만적인 정취에 취한 허균은 밝은 달이 떠오르자 '적벽부(赤壁賦)'에서 소식(蘇軾)이 느꼈던 것처럼 도가적 경지에 빠져든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인생은 짧고 덧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인생은 짧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즐기자는 것이다. 허균의 달관한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허균은 낭만가객이었다. 허균은 삼척부사에 임명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1607년 5월 6일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丁未(정미)'는 1607년이다. '眞珠(진주)'는 삼척의 옛이름이다. '睕晩(완만)'은 해질녘이다. '霏霏(비비)'는 '(비나 눈이) 흩날리다. (연기·구름 등이) 매우 성하다. 자욱하다. 무성하다.' 등의 뜻이 있다. '雪氅衣(설창의)'는 신선이 입는다는 새하얀 학창의(鶴氅衣)이다. '華陽(화양)'은 화양건(華陽巾)을 말한다. 도가(道家)나 세상을 피해 숨어서 살던 사람이 쓰던 쓰개의 하나다. '玉麈(옥주)'는 진(晋)나라 시대에 청담(淸淡)하는 사람들이 주미(麈尾)를 들고 휘저으며 말하였는데, 왕연(王衍)은 주미의 자루를 백옥으로 하였다. '麈尾(주미)'는 오늘날의 깃털 부채와 닮았으며, 큰 사슴의 꼬리로 만들었다. 주(麈)는 큰 사슴의 일종이다. '畫戟(화극)'은 당(唐)나라 때 3품 이상 고위 관원의 저택 문 앞에 세워 두었던 채색(彩色)한 목창(木槍)이다. '三子(삼자)'는 중국의 도가를 대표하는 노자, 장자, 열자를 이르는 말이다. '雜奏徵變(잡주치변)'은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등 오음(五音) 가운데 치와 변치(變徵)를 말한다. 치조(徵調)는 동양음악에서 치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음계, 변치(變徵)는 중국계 아악에서 칠성 음계 중 넷째 음을 이르는 말이다. '娥暉(아휘)'는 항아의 빛이니 곧 달을 말한다. '夜色(야색)'은 밤경치, 야경이다. '波光(파광)'은 물결이 번쩍이는 빛, 물결이 반사하는 빛이다. '泬㵳(혈료)'는 공허한 모양이다. '玉繩(옥승)'은 별의 이름 옥형(玉衡)이다. 북두(北斗) 제5성의 북쪽에 있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의 두 소성(小星)을 일컬는다. '浮丘(부구)'는 신선의 땅, 또는 부구신선(浮丘神仙)이라는 신선을 말한다. '世故(세고)'는 세상 일이다. '代謝(대사)'는 새것과 헌 것이 바뀌는 것이다. '金壺(금호)'는 '옛날의 물시계, 금이나 은으로 만든 술병, 또는 술단지'를 말한다.
허균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다. 아버지는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허엽(許曄),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 예조 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그의 누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 중 한 사람이자 둘째 형의 친구로 원주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던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에게 배웠다. 이달은 하균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관,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스승을 기렸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허균의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다. 허균과 기준격(奇俊格)을 대질 심문한 결과 모반을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했다. 허균은 하층민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시대의 선각자, 혁명적 사상가였다.
허균의 대표적인 저서는 뭐니뭐니해도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이다. '홍길동전'에는 적서 차별제도와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비판하면서 부패한 사회를 뒤집어엎어서 힘없는 백성이 주인인 세상 율도국을 만든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 담겨 있다. 허균에게 노벨문학상을 주어도 손색이 없는 소설이다. 그의 저서에는 또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 등이 있다.
조선 왕조 체제의 이단아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은 절친한 벗 허균이 삼척부사에 제수되어 떠나가자 '送友人赴三陟任(송우인부삼척임)'을 지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권필이 삼척과 관련해서 지은 칠언율시 제영도 한 수 있다.
送友人赴三陟任(송우인부삼척임) - 삼척에 부임하는 친구를 전송하며(권필)
聞君遠作名區宰(문군원작명구재) 그대 멀리 명승지 수령으로 간다고 하데
未到吾能說此州(미도오능설차주) 부임하기 전 그 고을에 대해 말해주리라
關嶺極天滄海濶(관령극천창해활) 대관령은 하늘 닿고 푸른 바다는 넓다네
月明歌吹在西樓(월명가취재서루) 달 밝으면 서루에 노랫소리 울려 퍼지리
이 시 뒤에는 '三陟有竹西樓 杜牧詩云 誰知竹西路 歌吹是楊州(삼척에는 죽서루가 있다. 두목의 시에 '뉘 알랴 대숲 서쪽 길에 노래와 풍악 울리는 곳이 양주인 줄)'라는 주가 붙어 있다. 두목(杜牧)의 시 제목은 '선지사(禪智寺)'이다. 이 시로 인해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양주(揚州) 서남쪽에 해당하는 강도군(江都郡) 대의향(大儀鄕)에 죽서정(竹西亭)이란 정자가 생겼다.
竹西樓(죽서루) - 권필
西樓春水鴨頭流(서루춘수압두류) 봄철 서루에 흐르는 물 압두처럼 푸른데
盡日烟波自在舟(진일연파자재주) 하루종일 자욱한 안개 배를 휩싸고 있네
縱在江湖歸不得(종재강호귀부득) 강호에 묻혀 지내다 돌아갈 수도 없으니
白鷗那復解人憂(백구나복해인우) 백구가 어찌 사람의 근심을 풀어 주리오
鏡裏山光翠欲深(경리산광취욕심) 거울 속 푸른 산빛은 더욱 짙어지려는데
月明人上木蘭舟(월명인상목란주) 달이 밝아오자 사람들 작은 배에 오르네
停榣却恐風波險(정요각공풍파험) 노를 멈추면 바람과 물결 험할까 두려워
吾亦江湖進退憂(오역강호진퇴우) 나 또한 강호 자연에서 진퇴를 근심하네
자유인 권필도 강호 자연에 나아갈까 물러날까를 고민하는 시다. 권필이 삼척에 왔다면 허균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였을 것이다. '鴨頭(압두)'는 압두초(鴨頭草)를 가리킨다. 압두초는 닭의장풀이다. 압두초의 꽃잎은 의복과 천을 남색으로 물들이는 염료의 원료로 사용한다. 압두록(鴨頭綠)은 당대(唐代)의 염색 이름이다.
권필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이다.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으로 한시에 능했던 권벽(權擘)의 다섯째 아들이다. 정철의 문인이다.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보낸 그는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권필은 정철만큼이나 호주가였다. 그의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은 시절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 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일전쟁 때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 주전론파였다. 광해군 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임숙영(任叔英)이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책문(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소식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하였다. 이에 대노한 광해군은 시의 출처를 찾으라고 명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된 권필은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났던 권필은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시를 많이 썼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다. 묘갈은 송시열이 찬하였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전한다.
허균이 삼척부사에 임명된 그해에 선조 말의 대표적인 문인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이 강릉부사가 되어 내려왔다. 최립은 떠나가는 삼척부사를 송별하는 '別申三陟(별신삼척)'이란 제목의 시와 죽서루 제영을 지었다.
別申三陟(별신삼척) - 삼척에서 거듭 작별하며(최립)
多聞嶺東勝(다문영동승) 많이들 영동의 명승지를 말하지만
最說竹西樓(최설죽서루) 그중에도 죽서루가 단연 으뜸이네
日月遞光射(일월체광사) 해와 달이 번갈아가면서 비춰주고
禽魚分影遊(금어분영유) 새와 물고기들은 사이좋게 노니네
神仙無住着(신선무주착) 신선은 한군데서만 머물지 않으니
太守足風流(태수족풍류) 태수님의 풍류도 족하다 하리이다
焉識政成後(언식정성후) 정세가 안정된다면 혹시나 알리요
代居非白頭(대거비백두) 이 늙은이가 후임자로 부임할지도
최립은 영동지방의 명승지 중 죽서루를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그런데, 시에 등장하는 태수는 누구일까? 최립이 강릉부사로 내려오던 같은 해 허균도 삼척부사를 제수받았으니 시 중의 태수는 허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竹西樓(죽서루) - 최립
滯客愁相守(체객수상수) 홀로 객사 지키고 있는 것도 시름겨워
褰衣直潰圍(건의직궤위) 옷 걷어붙이고 곧장 주위를 뚫고 왔네
樓光龍抱睡(루광용포수) 용은 누대의 환한 빛을 안고서 조는데
洞翠鶴拏飛(동취학나비) 푸른 놀 동천에 학이 줄지어 날아가네
一水橫臨斷(일수횡림단) 흐르다 누각에 막혀 끊긴 한줄기 강물
諸峯徙倚非(제봉사의비) 망설임 없이 곧장 다가선 뭇 봉우리들
分留物色少(분류물색소) 읊조릴 소재 삼을 경치도 많지 않으니
摠爲後荷衣(총위후하의) 모든 게 하의에 뒤졌기 때문이 아닐까
삼척부를 방문했을 때 최립은 객사인 진주관에서 머물렀던 모양이다. 객사에 혼자 있자니 심심해서 죽서루에 올라 밤경치를 읊으며 시의 소재가 많지 않음을 아쉬워하는 시다.
'分留物色(분류물색)'은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22 <嶽麓山道林二寺行(악록산도림이사행)>의 '宋公放逐曾題壁, 物色分留待老夫(송공이 쫓겨난 뒤 이곳에 시 지어 걸었는데, 아직도 남은 경치 노부의 손을 기다리리.)'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물색분류(物色分留)는 시인 묵객들이 그곳의 경치를 많이 읊었으므로 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두소릉(杜少陵) 또는 두릉(杜陵)은 두보(杜甫)의 이명이다. 송공(宋公)은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을 가리킨다. '荷衣(하의)'는 연(蓮)잎으로 엮어 만든 은사(隱士)의 옷을 말한다. 초사 '이소경(離騷經)'에 '製芰荷而爲衣兮, 集芙蓉而爲裳(연잎을 재단하여 옷을 만듦이여, 연꽃으로는 치마를 짓도다.)'라고 하였다.
최립의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다. 호는 간이 또는 동고은이다. 아버지는 진사 최자양(崔自陽)이다. 최립은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송시열의 아버지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 1574∼1628)는 최립의 문인이었다. 당시 그의 글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시,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허균은 최립의 시가 문장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한 바 있다. 최립은 이이 등과 함께 선조 대 8대 명문장가로 꼽히며, 외교문서의 대가로서 그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최립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 한호와 절친한 사이였다.
허준과 허균은 만난 적이 있을까? KBS 2TV에서 '천둥소리'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드라마에서는 허준과 허균이 만나 약을 주고받는 장면이 대사로 나온다. 두 사람은 다 양천 허씨 후손이고, 허준이 허균보다 30년 연상이지만 최립과 허준, 최립과 허균의 관계를 고려하면 충분히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으로 죽서루에는 허균의 '죽루부'가 걸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최립과 권필의 일화 하나가 전해 온다. 권필은 고양 신원동에 살았던 정철의 제자로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권필은 스스로 자신의 솜씨를 자만하면서 '이 세상에는 시(詩)로써 나를 상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최립을 찾아가 '지금 세상에서 문(文)이라면 마땅히 선생을 으뜸으로 모셔야 하겠지만, 시는 누구를 으뜸으로 추대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최립은 으레 자신을 으뜸으로 꼽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립은 뜻밖에도 '늙은 내가 죽으면 당신이 계승할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아무도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는 최립의 자부심이 담긴 말이었다. 이에 권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죽서(竹西) 심종직(沈宗直, 1557~1614)이 죽서루에 올라 김시습의 운자로 읊은 시에서 차운하여 '次沈使君士敬竹西詠梅月堂韻(차심사군사경죽서영매월당운)'이란 시를 지었다.
次沈使君士敬竹西詠梅月堂韻(차심사군사경죽서영매월당운) - 신흠
심 사군 사경이 죽서루에서 매월당의 운을 읊은 것에 차하다
湘潭迢遞夢魂遙(상담초체몽혼요) 머나먼 상수 가에 꿈속의 넋은 희미한데
散盡朋遊落葉飄(산진붕유낙엽표) 바람에 날린 잎처럼 벗들 뿔뿔이 흩어져
湖外忽傳仙吏什(호외홀전선리십) 호수 너머 선리가 뜻밖에 시편 전해오니
山中如對玉人標(산중여대옥인표) 산 속에서 옥인의 징표를 대한 듯하여라
生憎華髮新添歲(생증화발신첨세) 새로 한해를 보태는 흰 머리털 한스럽고
可耐離愁坐到宵(가내이수좌도소) 이별의 슬픔을 못견뎌 앉아서 밤을 새네
想得詠成梅老躅(상득영성매로촉) 생각컨대 매월당 선생 남긴 자취 읊으며
幾回蕭寺瓣香燒(기회소사판향소) 그 얼마나 절간에서 꽃잎 향불 태웠을까
'迢遞(초체)'는 '초요(迢遙)와 뜻이 같다. 높은 모양, 멀고도 멀음이다. '什(십)'은 시편(詩篇)이다. '仙吏(선리)'는 신선 같은 관리, 명승지로 이름난 지방의 수령에 대한 별칭이다. '玉人(옥인)'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梅老(매로)'는 매월당 김시습을 가리킨다. '瓣香(판향)'은 '모양이 꽃잎 비슷한 향(香), 향을 피우다, 남을 우러러 사모하다'의 뜻이다.
사경(士敬)은 심종직의 자다. 심종직이 죽서루에 올라 매월당 김시습의 운을 읊은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흠은 1616년(광해군 8)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를 와 있었다. 이 시는 신흠이 귀양지 춘천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심종직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안성군수 심빈(沈濱)의 증손, 좌참찬 심광언(沈光彦)의 손자이고, 감찰 심금(沈錦)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민희열(閔希說)의 딸이다. 청백리 심종민(沈宗敏)의 동생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시문에 능했다. 벼슬은 음직으로 1592년(선조 25)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냈는데, 경리부정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뒤 1601년 호조 좌랑으로 승진되고, 광해군 때에는 공조 참의를 지냈다.
신흠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이다. 호는 상촌,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이다. 증판서 신세경(申世卿)의 증손, 우참찬 신영(申瑛)의 손자,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조부 송기수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經書)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공부했다. 개방적인 학문 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녔던 신흠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렸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陽明學)의 실천적인 면을 높이 평가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 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 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조일전쟁 때에는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을 지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 외교문서와 각종 의례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예조 판서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정치공작인 계축옥사(癸丑獄事, 七庶之獄) 때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 신흠은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晴窓軟談)', '구정록(求正錄)', '야언(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에 이어 우의정에 등용되었다. 1627년 제1차 조청전쟁(朝淸戰爭,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象村集)'을 남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심종직과 신흠의 인연은 조선 후기의 학자 송익필의 시문집인 '구봉집(龜峰集)' 간행에서 엿볼 수 있다. 1622년 송익필의 문인 심종직은 홍산군수(鴻山郡守)로 있으면서 정엽(鄭曄), 신흠의 서문과 김장생(金長生)의 발문을 실어 '구봉집' 중 시집 1권을 간행했다. 신흠은 송익필에 대해 '천품(天稟)이 매우 높고 문장 또한 절묘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은 죽서루를 찾아 '五十川韻(오십천운)'과 '次(차)', '又(우)', '和韻呈府伯(화운정부백)'을 지어 읊었다. '차'는 김극기의 시 '죽서루'에서 운자 官(관), 閑(한), 間(간), 巒(만), 山(산)을 따왔다. '우'는 정추의 시 '삼척죽서루'에서 운자 木(목), 獨(독), 曲(곡), 鬱(울), 沒(몰)을 빌어왔다.
서성의 '오십천운', '차', '우', '화운정부백', '우증단율' 편액
五十川韻(오십천운) - 오십천을 노래하다(서성)
川自牛山來(천자우산래) 우보산에서 흘러내린 오십천의 물
沙明苔蘚綠(사명태선록) 모래는 깨끗하고 이끼는 푸르구나
縈紆何盤盤(영우하반반) 구불구불 휘돌아가니 몇 구비던가
四十七回曲(사십칠회곡) 마흔일곱 번이나 휘돌아서 흐르네
深厲淺則揭(심려천즉게) 깊이는 허리나 또는 무릎까지인데
石齒嚙我足(석치교아족) 돌부리들이 나의 발을 찌르는구나
時見浣紗女(시견완사녀) 때맞추어 나타난 빨래하는 여인은
白晳顔如玉(백석안여옥) 얼굴이 백옥과도 같이 새하얗구나
家住水東西(가주수동서) 오십천 동서쪽에 자리잡은 집들은
柴扉掩幽谷(시비엄유곡) 사립문이 깊숙한 골짜기를 가리네
我欲從之遊(아욕종지유) 마음만 같아서는 쫓아가 노닐면서
微辭屢往復(미사루왕복) 은근하게 정담을 주고받고 싶지만
佳期在桃月(가기재도월) 춘삼월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기에
一諾終不宿(일낙종불숙) 한번 승낙했으니 머물지는 못하네
沿流惆愴歸(연류추창귀) 물길을 따라서 쓸쓸히 돌아오려니
疎風響修竹(소풍향수죽) 바람이 간간이 대나무숲을 울리네
오십천을 건너는데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빨래를 하러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서 정담을 나누고 싶지만 복사꽃 피는 춘삼월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돌아서는 발길이 쓸쓸하다. 오십천에 나와 빨래하는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牛山(우산)'은 우보산(牛甫山)이라고도 한다. 태백의 백두대간 피재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지는데, 피재에서 구봉산-유령산-느릅재(楡峴)-우보산-갈마봉을 거쳐 통리재로 이어진다. 우보산과 유령산 사이의 느릅재는 황지에서 도계로 넘어가는 큰 고개다. 옛날 삼척에서 경상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라고 한다. 삼척 사람들이 태백산에 천제를 올리러 갈 때 소를 몰고 이 산을 넘었다 해서 우산(牛山) 또는 우보산(牛甫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縈紆(영우)'는 영회(萦回)와 같은 말인데, '감돌다, 맴돌다'의 뜻이다. '盤盤(반반)'은 '꾸불꾸불하다, 꼬불꼬불하다'는 의태어다. '深厲淺則揭(심려천즉게)'는 '深厲淺揭(심려천게)'에서 인용한 것이다. '얕은 물을 건널 때는 옷을 걷어붙이고, 깊은 물을 건널 때는 입은 채로 건너다, 일의 성격이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다'의 뜻이다. '浣紗(완사)'는 '빨래나 마전을 함', '白晳(백석)'은 '얼굴이나 피부가 희다'의 뜻이다. '微辭(미사)'는 뜻을 속에 숨기고 조용하고 은근하게 하는 말이다. '佳期(가기)'는 아름답고 좋은 계절 또는 아름다운 약속, 즐거운 언약을 말한다. '桃月(도월)'은 복숭아꽃이 피는 달이라는 뜻으로, 음력 삼월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惆愴(추창)'은 실망하여 슬퍼함이다.
次(차) - 차운하다(서성)
大嶺之東八九官(대령지동팔구관) 대관령 동쪽에 여덟 아홉 고을이 있지만
竹西風景最淸閑(죽서풍경최청한) 죽서루 풍경이 그중 가장 맑고 조용하네
川回斷岸縈紆處(천회단안영우처) 냇물은 가파른 절벽 휘감고 돌아 흐르고
棟壓層巖縹緲間(동압층암표묘간) 용마루는 절벽 위에 높게 솟아 아득하네
半夜灘聲琴奏曲(반야탄성금주곡) 한밤중 여울물 소리는 거문고 소리 같고
三冬雪色玉爲巒(삼동설색옥위만) 한겨울 눈경치는 옥이 산을 이룬 듯하네
佳人不識詩人意(가인불식시인의) 아름다운 사람은 시인의 마음 몰라 주니
笑殺吟肩似聳山(소살음견사용산) 시 읊느라 어깨만 산처럼 치솟아 오르네
죽서루 오십천의 경치는 관동에서 으뜸이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시인의 마음을 몰라준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절실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시를 읊는다. 아름다운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오십천을 건너다 만난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을까?
'大嶺(대령)'은 대관령이다. '官(관)'은 마을, 고을이다. '棟(동)'은 '용마루, 마룻대, 건물' 등의 뜻이 있다. '縹緲(표묘)'는 '멀고 어렴풋하다, 소리가 연하고 길게 이끌리는 모양, 가물가물하고 희미하다'는 뜻이다. '佳人(가인)'은 '아름다운 사람, 훌륭한 사람, 낭군, 사랑하는 사람'이다. '笑殺(소살)'은 어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김이다. '吟肩(음견)'은 시를 읊을 때 어깨를 으쓱거리며 위로 치켜올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그대는 또 못 보았는가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을, 시 읊느라 찌푸린 눈썹 산처럼 솟은 두 어깨를)'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又(우) - 또 차운하다(서성)
江面危橋橫一木(강면위교횡일목) 강 위에 위태로이 놓여 있는 외나무다리
人去人來行也獨(인거인래행야독) 사람이 오갈 때는 혼자서 건너야만 하네
山連北塞勢巍巍(산연북새세외외) 북쪽에 늘어선 산들의 기세 높고도 큰데
水注東溟流曲曲(수주동명류곡곡) 동쪽 바다를 향해 물 구비구비 흘러가니
神仙風馭遊怳惚(신선풍어유황홀) 신선 바람 타고 황홀하게 노니는 듯하고
猿鶴幽栖在岑鬱(원학유서재잠울) 원숭이 학은 울창한 숲속에 깃든 듯하네
蓬壺遙望海漫漫(봉호요망해만만) 저 멀리 봉래 바라보니 바다는 아득한데
巨鰲頭高長不沒(거오두고장불몰) 큰 자라머리 높아 오래 사라지지 않누나
죽서루와 오십천의 뛰어난 경치를 읊은 뒤 전설을 인용하여 동해바다를 노래하고 있다. '巍巍(외외)'는 높고 큰 모양이다. '東溟(동명)'은 동쪽에 있는 바다다. '曲曲(곡곡)'은 굴곡이 많은 산이나 하천, 길 따위의 굽이굽이를 말한다. '風馭(풍어)'는 전설 속에 나오는 수레로, 바람을 타고 몰아가는 신선의 수레를 말한다. '猿鶴(원학)'은 원숭이와 학인데, 은일지사를 뜻하기도 한다. 원학사충(猿鶴沙虫)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의 남정(南征) 때 군대가 전멸하였는데, 군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소인은 벌레와 모래가 되었다는 원학사충(猿鶴沙蟲)의 설화가 전한다.(藝文類聚 권90) '幽栖(유서)'는 '유거(幽居)하다, 세상을 피하여 외딴곳에 살다'의 뜻이다. '蓬壺(봉호)'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이다. 그 모양이 마치 호리병을 닮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巨鰲(거오)'는 동해 가운데 있는 신산(神山)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자라를 이른 말이다. 발해(渤海)의 동쪽에 대여산(岱輿山), 원교산(員嶠山), 방호산(方壺山), 영주산(瀛洲山), 봉래산이 있는데, 여기에는 보물이 많고 과일이 있다. 이것을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여기에 사는 사람은 모두 신선의 자손이다. 이 산은 원래 매인 데가 없어서 언제나 조수를 따라 왔다갔다하여 일정한 곳이 없었다. 이에 옥황상제가 큰 자라 15마리로 산을 떠받들어 가만히 있게 하였다 한다.(列子 湯問)
和韻呈府伯(화운정부백) - 화답시를 부사에게 주다(서성)
使君豪氣足風流(사군호기족풍류) 부사의 호방한 기상 풍류 즐기기 족하더니
出守猶分第一樓(출수유분제일루) 관동 제일루 있는 곳에 수령으로 나갔구려
密席戱令紅袖狎(밀석희령홍수압) 은밀한 자리 마련하고 미인과 즐겁게 노니
高歌還挽綵雲留(고가환만채운류) 큰 노래 소리는 비단구름도 머물게 하누나
眞心好箇罇中蟻(진심호개준중의) 진실된 마음에 술잔 속 찌꺼기도 좋았는데
浪說何須海上鷗(낭설하수해상구) 낭설에 어찌 물새 내려와 놀아주기 바랄까
老子狂吟應伯仲(노자광음응백중) 노자의 취기 어린 노래도 이와 같았으리니
千場大笑播東州(천장대소파동주) 한바탕 큰 웃음소리 동쪽 고을로 퍼져가네
호탕한 부사와 함께 조용하고 은밀한 술자리에서 미인을 데리고 노래하고 춤추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서성은 대단한 풍류객이었던 것 같다. 관동제일루 죽서루 술자리에 친구가 있고, 미인이 있고, 술이 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이 시의 운자는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和韻(화운)'은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지은 답시다. '紅袖(홍수)'는 붉은 옷소매를 입는 궁녀(나인)의 별칭이다. 벽사홍수(碧紗紅袖)에서 유래한 말이다. 송(宋) 나라 때 위야(魏野)가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절에 가 놀면서 똑같이 시를 써붙여 놓았다가, 뒤에 다시 함께 그 절을 찾아가 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잘 싸서 보관하고 있고, 자신의 시는 먼지가 잔뜩 낀 채 그대로 있으므로, 그들을 따라갔던 관기(官妓)가 붉은 소매로 그 먼지를 털어 냈다는 고사가 있다. '蟻(의)'는 '개미, 검다, 술구더기, 동동주 위에 뜨는 술찌꺼기' 등의 뜻이다. '狂吟(광음)'은 미친 듯이 노래하는 것이다.
又贈短律(우증단율) - 또 짧은 율시를 지어 주다(서성)
玉堂金學士(옥당김학사) 옥당에서 벼슬하는 김 학사가
江外謝宣城(강외사선성) 영남의 선성을 향해 떠나는데
過客同文擧(과객동문거) 나그네도 글 모임에 참석해서
論兵慕孔明(논병모공명) 병법 논하며 제갈량 사모했네
重來靑眼豁(중래청안활) 다시 오니 모두들 반겨주지만
話別白髭生(화별백자생) 이별하자니 흰 수염만 생기네
此後明思處(차후명사처) 그 이후 그리움만 더해가는데
孤燈夢不成(고등몽불성) 외로운 등불 꿈조차 못이루네
藥峯徐渻稿(약봉서성고) 약봉 서성이 쓰다
'玉堂(옥당)'은 조선시대 삼사(三司)의 하나로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이다.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교리(校理), 부교리, 수찬(修撰), 부수찬을 통틀어 이르거나 홍문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宣城(선성)'은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에 속해 있던 예안(禮安)의 옛 지명이다. '靑眼(청안)'은 좋은 마음으로 남을 보는 눈이다. '孤燈(고등)'은 어둠 속에 홀로 켜져 있는 등불이다.
서성의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 예조 참의 서고(徐固)의 손자다. 아버지는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무남독녀 고성 이씨(固城李氏, 1539~1615)다. 서거광은 서거정의 형이다. 서성은 이이, 송익필의 문인으로 스승의 당파를 따라 서인당에 속했다.
5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은 고성 이씨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도 약식과 약과, 약주, 약포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여성 사업가였으며,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 사후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서해는 이황의 문인으로 류성룡,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1586년(선조 19) 서성은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 교수(仁川府敎授), 예문관의 검열, 대교(待敎), 봉교(奉敎),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과 예조 좌랑을 지냈다. 병조 좌랑을 거쳐 1592년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다. 하지만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和君), 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끌려가다가 탈출하였다. 왕명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병조 정랑,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올렸다. 이로 인해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 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 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했다. 이어 동부승지, 병조 참의, 비변사 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 참의, 도승지, 황해감사, 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지내고 형조 판서, 병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 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다. 이어 형조 판서, 대사헌, 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제1차 조청전쟁(朝淸戰爭,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그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서성은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만들어 역학(易學)을 토론했다. 그는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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