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부사 이상성(李相成, 1663~1723)은 1721년(경종 1) 5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이순(李焞, 1661∼1720)의 어제시(御製詩)를 판각하여 죽서루에 걸었다. 하단에는 어제시를 판각하게 된 사연을 적었다.
이상성의 숙종 '어제' 편액
御製(어제) - 숙종
硉兀層崖百尺樓(율올층애백척루) 위태로운 벼랑에 드높이 솟은 백척 누각
朝雲夕月影淸流(조운석월영청류) 아침 구름 저녁 달그림자 청류에 비치고
粼粼波裡魚浮沒(린린파리어부몰) 맑고 깨끗한 물결 속에 물고기 뛰노는데
無事凭欄狎白鷗(무사빙란압백구) 한가히 누각 난간에 기대 물새 희롱하네
마치 죽서루를 그린 한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다. 숙종이 죽서루를 다녀갔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숙종은 화원이 그린 산수화를 보고 이 시를 지었을 것이다.
先大王御集中 有關東八景詩 竹西樓卽其一也 今於刊布之日 以臣相成曾經侍從 亦與宣賜之恩 臣適守玆土 奉讀遺韻 益不勝摧項之忱 玆敢鋟梓懸揚 與子平陵察訪臣光遠 續題其後 以寓哀慕之誠焉. 崇禎紀元後九十四年辛丑五月日.[선대왕(숙종)의 문집 중에 관동팔경을 노래한 시가 있는데 '죽서루'도 곧 그 중 하나다. 지금 선대왕의 문집을 간행하여 배포하는 날을 맞이하여 나 상성(相成)이 일찌기 시종(侍從)을 지냈다고 하여 또한 문집을 하사해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내가 마침 삼척부사여서 선대왕이 남긴 그 시를 받들어 읽으니 더욱더 목이 메이는 심정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판목에다 새겨 높이 걸고는 내 아들 평릉(平陵) 찰방(察訪) 광원(光遠)과 더불어 그 뒤에다 몇 자 적어 슬퍼하며 사모하는 정성을 나타냈다. 숭정 기원 후 94년(1721년) 5월에 쓰다.]
'硉矹(율올)'은 '沙石隨水貌. 又與兀通.'이라고 했다. 우뚝한 모양이다. 두보(杜甫)의 '녹두산(鹿頭山)' '悠然想揚馬 繼起名硉兀 有文令人傷 何處埋爾骨(아득히 양웅과 사마상여, 뒤이어 태어난 이름 높은 분들을 회상하니, 그 문장이 우리를 상심토록 하는데, 대체 어디에 여러분들의 뼈가 묻혔단 말이오.)'에도 나온다. '粼粼(린린)'은 '(물, 돌 등이) 맑고 깨끗하다.'의 뜻이다.
1697년(숙종 23) 정시 문과에 급제한 이상성은 35세 때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이 되었다. 그뒤 전적, 예조와 병조의 좌랑과 정랑, 서산현감, 전라도와 강원도의 도사, 울진현감, 정언, 헌납, 지평, 장령, 장악원 정을 지내고, 1716년(숙종 42)에는 강계부사로 나갔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와 호조 참의를 지내고, 성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상성은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재직 중에 죽었다. 지극한 효자로 유명했던 이상성은 아버지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지극 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면서 애통해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또 다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고, 스스로의 몸과 어머니의 병을 대신하여 줄 것을 신에게 빌었다. 여러 번 손가락을 자른 것이 병이 되어 죽었다.
1724년(경종 4)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벽당(松蘗堂) 이정신(李正臣, 1660~1727)은 순시차 삼척부에 들렀다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竹西樓(죽서루) - 이정신
矗矗奇岩澹澹流(촉촉기암담담류) 기암 우뚝 솟고 일렁이는 물줄기는 맑은데
祖孫前後此登樓(조손전후차등루) 할아버지와 손자 앞뒤로 이 누대에 올랐네
百年遺澤甘棠老(백년유택감당노) 오래 전에 남기신 은덕 감당나무 늙어지고
三榜高名寶藻留(삼방고명보조류) 삼방의 높은 명성과 보배로운 문장 남았네
竹外依然曾照月(죽외의연증조월) 대나무숲 밖엔 일찌기 비치던 달 여전한데
沙頭宛爾舊眠鷗(사두완이구면구) 모래 위엔 옛날 잠들었던 갈매기 그대로네
乍過珠觀猶感興(사과주관유감흥) 잠시 진주관 지나는데도 오히려 감흥 이니
可耐行徑十六州(가내행경십육주) 열여섯 고을을 참으면서 지날 수가 있을까
'甘棠(감당)'은 감당나무다. 선정(善政) 또는 선정을 펼친 벼슬아치를 상징한다. '遺澤甘棠(유택감당)'은 '시경(詩經)' 소남(召南)편의 <감당(甘棠)> 시에서 유래한 감당유애(甘棠遺愛)와 비슷한 뜻이다. 은(殷)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周)를 창업한 무왕(武王)은 죽으면서 동생인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게 어린 아들 성왕(成王)을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주공과 소공의 보필로 성왕은 정사를 잘 보살폈다. 소공은 남쪽 지방 한수(漢水) 상류 일대의 마을을 순시할 때 팥배나무 아래에서 백성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어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소공이 죽자 백성들은 그가 머물렀던 팥배나무를 소중하게 키웠다. 후에 유왕(幽王)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백성들은 팥배나무를 찾아 옛 소공을 그리워했다. 백성들은 소공을 그리워하며 '사랑스런 팥배나무 꺾지를 마오. 소공이 여기서 머무셨다오. 사랑스런 팥배나무 상하게 하지 마오. 소공이 여기서 쉬어 갔다오. 사랑스런 팥배나무 꺾지를 마오. 소공이 여기서 묵고 갔다오'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민요가 바로 '감당'이다. '감당'은 소당(召棠)이라고도 한다. 소공의 팥배나무라는 뜻이다. '三榜(삼방)'은 과거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
'祖(조)'는 1639년(인조 17) 10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정신의 증조부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을 가리킨다. 이명한은 1640년(인조 18) 8월 금강산과 관동의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울진까지 돌아보았다. 울진 가는 길에 삼척 죽서루도 들렀을 것이다. 이명한이 관동 지방을 유람할 때 지은 시가 있다. 이 시는 아마 이명한이 강릉을 지날 때 지은 시가 아닌가 한다. 운자는 증손자 이정신의 시와 같은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人間不廢大江流(인간불폐대강류) 인간 세상에는 큰 강이 끝없이 흐르는데
天上眞遊白玉樓(천상진유백옥루) 하늘 나라 신선은 백옥 누각에서 노니네
召樹春陰寒未落(소수춘음한미락) 흐린 봄날 소공의 나무엔 한기 서렸는데
巴陵物色久仍留(파릉물색구잉류) 파릉의 물색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 있네
殘粧寶瑟圍紅燭(잔장보슬위홍촉) 엷게 화장한 얼굴로 촛불에 거문고 타니
別浦輕檣起暗鷗(별포경장기암구) 이별 나루 조각배 어둠속 갈매기 깨우네
前度繡衣今接節(전도수의금접절) 전엔 사또로 왔는데 지금은 부절을 차고
壁間攀詠又溟州(벽간반영우명주) 벽짬에 올라 읊다가 다시 명주 바라보네
'白玉樓(백옥루)'는 문인이나 묵객이 죽은 뒤에 간다는 하늘의 누각이라는 뜻이다. 문인이나 묵객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召樹(소수)'는 주나라 소공의 나무, 즉 감당나무를 말한다. '巴陵(파릉)'은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악양(岳陽) 일대다. 동정호(洞定湖)의 물이 양자강(揚子江)으로 흘러나가는 출구에 있다. '繡衣(수의)'는 수의를 입은 사또라는 뜻이다. 어사또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溟州(명주)'는 강릉의 옛 이름이다.
이정신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방언(邦彦)이다. 이만상(李萬相)의 손자, 군수 이봉조(李鳳朝)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전라감사 홍주삼(洪柱三)의 딸이다. 당파는 소론당이다.
강릉 참봉(江陵參奉)으로 1699년(숙종 25)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뒤 정언, 수찬, 응교, 장령, 헌납 등 삼사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711년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1716년 병조 참의에 올랐고, 1721년 이윤(李昀, 1688~1724)이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으로 즉위하자 호조 참판에 배수된 뒤,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도승지에 임명되자 소론으로서 조태구(趙泰耉) 등과 함께 노론당을 탄핵,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병조 참판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1722년에 경기도 관찰사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24년(경종 4, 영조 즉위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금(李昑, 1694∼1776)이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로 즉위하자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이정신은 서예에 뛰어났으며, 해주에 있는 이관명(李觀命)이 찬한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의 뒷면에 쓴 음기(陰記)의 글씨가 남아 있다.
1728년(영조 4) 여름 삼척부사 양정호(梁廷虎, 1683~?)는 이이의 시 '죽서루차운'에서 차운하여 '竹西樓敬次栗谷先生韻(죽서루경차율곡선생운)'이란 시를 지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양정호의 '죽서루경차율곡선생운' 편액
竹西樓敬次栗谷先生韻(죽서루경차율곡선생운) - 삼가 율곡 선생의 죽서루 시에서 차운하다
蒼崖陡起架飛樓(창애두기가비루) 높다란 절벽에 날아갈 듯이 솟은 누각은
三伏炎蒸爽似秋(삼복염증상사추) 삼복 찌는 더위에도 가을 같이 시원하네
遠峀浮嵐濃淡態(원수부람농담태) 먼 산봉우리 아지랑이 끼어 은은한 자태
晴川芳草淺深流(청천방초천심류) 시냇물은 방초 사이로 깊고 얕게 흐르네
雕欄物色添詩料(조란물색첨시료) 아름다운 난간과 온갖 물색은 시의 소재
錦席絃歌散客愁(금석현가산객수) 술자리 울려 퍼지는 노래에 수심 사라져
吏隱名區翻自愧(이은명구번자괴) 명승에서 숨어 사는 관리 절로 부끄럽고
江湖一約負沙鷗(강호일약부사구) 강호와 맺은 굳은 약속 물새에게도 졌네
戊申流金日知府梁廷虎稿(무신류금일지부양정호고) 1728년 몹시 더운 날 부사 양정호 쓰다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예찬한 뒤 벼슬살이를 하느라 자연에 묻혀 살리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다. '知府(지부)'는 부(府)의 최고 행정수장을 뜻하는 말이다. 곧 부사를 가리킨다.
'蒼崖(창애)'는 아주 높은 절벽이다. '飛樓(비루)'는 나는 것처럼 높이 세운 누각이다. '三伏(삼복)'은 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을 말한다. '浮嵐(부람)'은 떠 있는 아지랑이다. '晴川(청천)'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날의 시냇물이다. 당나라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에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비 갠 강엔 선명한 나무들 울창한데, 방초 금새 무성해진 장강의 앵무섬이로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雕欄(조란)'은 아름답게 아로새긴 난간이다. '絃歌(현가)'는 현악기를 타면서 노래하는 것이다. '吏隱(이은)'은 낮은 지위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초야에 숨는다는 야은(野隱)의 대칭이다. 옛날 사대부들은 항상 미관말직(微官末職)을 스스로 이은이라고 일컬었다. 이익과 녹봉에 마음을 두지 않아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초야의 은자(隱者)와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院中晩晴懷西郭茅舍(원중만청회서곽모사)'에 '浣花溪裏花饒笑, 肯信吾兼吏隱名(완화계 속에 꽃이 사뭇 웃으니, 이은 이름 겸한 나를 믿어 주려는지.)'라고 하였다.(全唐詩 卷228 院中晩晴懷西郭茅舍) '沙鷗(사구)'는 물가의 모래 위에 있는 갈매기다. 문학 작품에서 해안가 모래톱에 사는 갈매기 따위의 물새를 가리켜 일컫는 말이다. '戊申(무신)'은 무신년이다. 양정호 생존시 무신년은 1728년이었다. '流金日(류금일)'은 쇠가 녹아 흐를 정도로 뜨거운 날, 혹서(酷暑)를 말한다.
양정호의 자는 직부(直夫),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에 합격하고, 1712년(숙종 38) 왕비의 종기가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한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지평(持平), 집의(執義), 사간(司諫), 양주목사,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양정호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사은진주(謝恩陳奏) 겸 동지정사(兼冬至正使)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일으켰을 때 그는 옥사를 다스리는 직분을 맡았다. 1724년(영조 즉위년) 양주목사 시절 양주의 주민을 위해 군액(軍額)과 군포(軍布)의 탕감을 주청하였다. 1725년(영조 1) 임인옥사를 다스리는 직분에 있었던 죄로 삭탈관직을 당해 문외송출 되었다가 1727년(영조 3)에 석방되어 다시 임용되었다. 1746년(영조 22) 풍기군수 시절 병이 들자 지평 남혜로(南惠老)가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려 파직되었다.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 1684~1755)도 죽서루를 찾아 제영시 두 수를 남겼다. 그가 언제 삼척에 다녀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29년~1735년 사이가 아닌가 추정된다. 운자는 樓(루), 流(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김진상
天回雲漢掛西樓(천회운한괘서루) 먼 하늘 은하수 죽서루에 걸려 있는데
檻外長川萬古流(함외장천만고류) 난간 밖에는 긴 냇물이 끝없이 흐르네
莫道海濱王化逖(막도해빈왕화적) 바닷가라 왕의 교화 멀다 말하지 말게
恩波千里乃魚鷗(은파천리내어구) 왕의 은혜 멀리 고기 물새에도 이르네
鏡浦宸章又竹樓(경포신장우죽루) 경포에 걸린 어제 또 죽루에도 있으니
樓前湖水淚添流(누전호수루첨류) 누대 앞을 흐르는 호수에 눈물 보태네
洪恩未報頭先白(홍은미보두선백) 성은을 갚지 못하고 머리털 희어진 채
天地東南伴海鷗(천지동남반해구) 세상 외진 곳에서 바다 갈매기 벗하네
'신장(宸章)’은 임금의 친필을 가리킨다. 김진상은 강릉 경포대에서 숙종의 어제시를 보고, 죽서루에서도 또 숙종의 어제시를 보고 나서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숙종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이었을까? 영조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었을까?
김진상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이다. 김반(金槃)의 증손, 노론의 영수였던 참판 김익훈(金益勳)의 손자다. 김만채(金萬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헌부 집의 이항(李杭, 1612~1656)의 딸이다. 그는 뼛속까지 노론의 피가 흐르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 진사, 1712년 정시 문과에 급제한 김진상은 설서(說書), 지평(持平)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716년 병신처분(丙申處分, 노론) 또는 병신사화(丙申士禍, 소론) 뒤 소론의 영수 윤증의 부친 윤선거의 서원과 문집목판을 훼철할 것을 주청했다. 1719년에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묘를 이장할 때 동궁이 망곡(望哭)하려는 것을 막는 등 노론의 과격한 노선을 고수하였다. 1720년(숙종 46, 경종 즉위년) 홍문록에 올라 수찬(修撰)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의 정치 투쟁으로 일어난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무산(茂山)에 유배당하였으나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이조 정랑으로 등용된 뒤 수찬, 필선(弼善),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냈다. 1729년(영조 5) 경종 연간에 발생한 신임옥사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주장을 절충하여 내린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실시된 탕평책에 반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관동팔경을 유람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벼슬길에 진출한 김진상은 1735년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736년(영조 12) 섣달 겨울에는 전라도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에 들러 '息影亭奉次主人鄭達夫敏河(식영정에서 주인 정달부 민하의 시를 차운하다)'란 시를 지었다. 1738년 대사성, 1740년 대사헌을 거쳐 1753년 좌참찬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여주(驪州)에 은거하면서 산수를 유람했다. 김진상은 글씨에 능하여 많은 비문을 썼다. 외조부 이항의 묘갈명 글씨도 그가 썼다. 문집으로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가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730년(영조 6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하서(荷西) 이진순(李眞淳, 1679∼1738)은 삼척을 순시할 때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남겼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이진순
半生神往竹西樓(반생신왕죽서루) 반평생 동안 마음만 죽서루에 가 있다가
持節東來又素秋(지절동래우소추) 벼슬 받아 동쪽으로 오니 또 가을철일세
題品幾人留物色(제품기인류물색) 몇 사람 지은 시만 물색으로 남았다더니
登臨前輩㧾風流(등림전배총풍류) 올라보니 앞선 사람들 풍류 묶어 놓았네
仙區愜願方酬債(선구협원방수채) 선경 마음에 들어 바야흐로 빚 갚았지만
民事關心未散愁(민사관심미산수) 백성일 매달리다 보니 근심 씻지 못했네
奔走十年恩莫報(분주십년은막보) 십년 바쁘게 보내도 성은을 갚지 못하고
白頭空愧負沙鷗(백두공괴부사구) 머리 희도록 물새 등지니 괜히 부끄럽네
그토록 보고 싶던 죽서루에 왔지만 근심을 없애지 못하고, 임금의 은혜도 갚지 못한 심경을 노래한 시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이진순이 삼척부사로 부임했을 때 계절은 가을철이었던 것 같다.
이진순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후(子厚)다. 이경직(李景稷)의 증손, 이기영(李起英)의 손자다. 아버지는 이덕성(李德成)이며, 어머니는 홍유구(洪有龜)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사마시에 합격한 이진순은 1722년(경종 2) 신천군수로 있을 때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 헌납, 사간 등을 지냈다. 그는 소론으로서 노론을 제거하는 신임사화(辛壬士禍)에 가담하였고, 이어 보덕, 집의 등을 역임했다. 1724년(경종 4) 영조가 즉위할 때 승지로 있었으나, 노론당이 집권하면서 삭직을 당하고 유배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풀려난 뒤 형조 참판, 대사성, 한성부 좌윤, 대사간, 경기도 관찰사, 한성부 우윤,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730년(영조 6년) 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1738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서예에 뛰어나 중화의 '삼진충의비(三陣忠義碑)', '사간박동현표(司諫朴東賢表)', '금백이덕성갈(錦伯李德成碣)'과 공주의 '목사박병갈(牧使朴炳碣)' 등의 작품을 남겼다.
1732년(영조 8) 삼척부사로 부임한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도 죽서루에 올라 제영 오언율시 한 수를 지었다. 당시 문명(文名)이 명나라에까지 떨쳤던 이병연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과 절친한 친구였다.
竹西樓(죽서루) - 이병연
惻惻竹西路(측측죽서루) 죽서루 가는 길 마음을 슬프게 하는데
春深多碧苔(춘심다벽태) 봄이 깊어가니 푸른 이끼 많이 끼었네
落花皆在水(낙화개재수) 떨어진 꽃잎들은 모두 물에 떠 있는데
缺月獨依臺(결원독의대) 이지러진 달 홀로 누대에 기대고 있네
洞氣晴猶濕(동기청유습) 골짝 기운 맑은데 오히려 젖은 듯하고
灘聲去若廻(탄성거약회) 물소리 들으니 빙 돌아 흐르는 듯싶네
頭陀雲夕起(두타운석기) 두타산 위에 뜬 구름 저녁에 피어올라
時自宿簷來(시자숙첨래) 때때로 죽서루 처마에 와서 묵어 가네
죽서루 가는 길이 왜 서글펐을까? 봄이 떠나고 있었기 때문일까? 꽃잎은 떨어져 물 위에 떠다니고, 달도 이지러져 있다. 다소 감상적인 느낌이 드는 시다.
이병연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일원(一源), 호는 사천 또는 백악하(白嶽下)다. 부모를 비롯한 그의 출신 배경은 알 수 없다.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에 살았던 이병연은 음보(蔭補)로 부사를 지냈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며, 정선과 친분이 있었다. 그는 시에 뛰어나 영조 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문인 김익겸(金益謙)이 그의 시초(詩抄) 한 권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江南)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는 이 시에 비교가 안 된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서정성이 짙고 깊은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산수, 영물시(詠物詩)가 많다. 그는 특히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의경을 흠모하여 매화를 소재로 55수나 되는 시를 지었다. 현재의 청와대 뒤편 기슭에 이병연의 집인 취록헌(翠麓軒)이 있었다. 이병연이 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정선이 취록헌을 방문하여 저 유명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린 바 있다. 그의 저서 '사천시초(槎川詩抄)' 2책이 전한다.
정선은 63세 때인 1738년(영조 14) 죽서루를 찾아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죽서루도(竹西樓圖)를 남겼다. 이 그림은 정선이 동해안 일대의 명승지를 그린 화첩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 간송미술관이 소장)에 '천불암(千佛岩)', '청간정(淸澗亭)', '망양정(望洋亭)', '월송정(越松亭)', '수태사동구(水泰寺洞口)', '시중대(侍中臺)', '정자연(亭子淵)', '해산정(海山亭)'과 함께 실려 있다.
정선의 '죽서루'(회견에 먹 담채 23 x 27.5cm,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을 보자. 응벽담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 위에 팔작지붕의 누각이 서 있다.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가 죽서루 좌우에서 보좌하듯 서 있고, 그 양쪽에 관아로 보이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우측 하단의 버드나무가 보일 듯 말 듯한 동적인 느낌을 준다. 버드나무숲 뒤로 간략하게 묘사된 초가집은 민가로 보인다. 응벽헌 서쪽에는 응벽담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가 그려져 있다. 사다리 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상상된다. 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응벽담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응벽담에는 갓을 쓴 양반 유람객을 태운 거룻배가 한가로이 떠 있다. 세 명의 유람객들은 죽서루를 바라보면서 그 경치에 취해 있는 듯하다. 죽서루 위에는 기녀 셋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뱃놀이가 끝나면 유람객들은 저 사다리를 통해서 죽서루로 올라가 기녀들과 함께 한바탕 시연(詩筵)이나 주연(酒宴)이라도 벌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삼척읍지'에는 죽서루와 오십천에 대해 '오십천 물이 읍성 서쪽 석벽 아래 이르러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물웅덩이를 이루었다. 그 위는 절벽으로 된 높은 언덕인데, 흰 자갈밭의 넓은 평지이다. 그 암벽 위에 누정이 셋 있다. 가장 수려한 응벽헌이 진주관의 서쪽 건물이 된다. 그 남쪽의 죽서루는 높고 시원하며 사람이 많다. 남쪽이 연근당(燕謹堂)인데, 물이 돌에 부딪혀 철철 소리를 낸다. 못가에서 가장 멀며 그 남쪽은 남산 바위 벼랑이고 물이 이곳에 이르러 동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그림에서 죽서루는 암벽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북서쪽의 응벽헌은 바위 사이에 살짝 숨어 있고, 물소리가 철철 들린다는 남동쪽의 연근당은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고 있다. 연근당에 담장을 두른 것은 위태함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연근당 벼랑 아래는 물목이 좁고 강바닥이 높은 듯 물결을 여울지게 표현했다.
정선의 '죽서루'
정선의 또 다른 죽서루도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정선의 죽서루도가 강 건너편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그렸다면, 이 그림은 강 위쪽의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점에서 그렸다. 절벽 위에는 진주관과 응벽헌, 죽서루가 보이고, 강 위에는 유람객을 태운 거룻배가 떠 있다. 절벽과 건물,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숲 등이 간송미술관 소장 죽서루도보다 한층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은 백악산(白岳山) 아래에 살면서 정선, 이병연과 교유하면서 시화(詩畵)를 논했던 화가였다. 그는 정선에 대해 '겸재의 화첩은 먹을 씀에 먹이 번지는 자취가 있고, 번지기에도 법도가 있으며, 아주 깊은 맛이 나고 빼어남이 있다. 거의 송나라 미불(米芾)이나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같은 경지에 있다고 할 만하다. 조선 3백년 역사에서 이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면서 '겸재는 일찌기 북악산 아래에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있으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 산의 주름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보며, 먹을 씀에 저절로 그 깨침이 있었다. 그리고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의 명승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 유람하고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고 강조하면서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는가 하면 그가 쓰다 남은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 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떨쳐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정선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 또는 난곡(蘭谷)이다. 그는 한성 북부 순화방(順化坊)에서 호조 참판에 추증된 아버지 정시익(鄭時翊)과 어머니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그의 선대는 전라남도 광산과 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이었다.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겼고, 고조부 정연(鄭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았다.
정선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는 이웃에 살던 대신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도화서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衛率)를 비롯하여 한성부 주부, 하양현감, 청하현감, 훈련도감 낭청, 양천현령 등을 지냈다. 만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정선은 높은 화명(畵名)을 통해 당대의 명류 이병연, 조영석, 유척기(兪拓基) 등 노론계 인사들과 백악산 밑에 이웃해 살면서 평생지기로 절친하게 지냈다. 그는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진경산수화에서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적 회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친자연적(親自然的) 초속의식(超俗意識)과 풍류의식에 기초한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정형산수와 산수인물 및 진경산수화가 대종을 이룬다.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강희언(姜熙彦), 김윤겸(金允謙), 정황(鄭榥), 장시흥(張始興), 정충엽(鄭忠燁), 김응환(金應煥), 김석신(金錫臣) 등 당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화가들을 정선파라 부른다. 정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 金剛全圖', '인왕제색도', '청풍계도(淸風溪圖)',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경교명승첩(京橋名勝帖)',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정양사도(正陽寺圖)', '만폭동도(萬瀑洞圖)', '육상묘도(毓祥廟圖)',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등이 있다.
만모(晩慕) 정기안(鄭基安, 1695∼1767)은 강원도 도사로 재직 중이던 1742년 강원도의 명승지를 유람한 뒤 '유풍악록(遊楓岳錄)'을 남겼다. 이 글에는 월정사 금강연에 이르러 바위에 '금강연(金剛淵)'이라는 글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정기안은 이때 죽서루에도 들러 제영시 한 수를 남겼다.
竹西樓(죽서루) - 정기안
危石層層碧水環(위석층층벽수환) 우뚝한 바위 겹겹이 푸르른 물 둘렀는데
爛銀擎出赤闌干(난은경출적난간) 아름다운 은빛 물결에 붉은 난간 솟았네
此間奇勝須要識(차간기승수요식) 이 사이에 기이한 승경들 알아야 하나니
澗太潺潺海太寬(간태잔잔해대관) 계곡물 매우 잔잔하고 바다도 너무 크네
정기안의 본관은 온양(溫陽), 초명은 사안(思安), 자는 안세(安世)다. 좌의정을 지낸 정순붕(鄭順朋)의 후손이며, 정휘(鄭暉)의 증손자, 정하경(鄭夏卿)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정유신(鄭維新), 어머니는 변석징(邊錫徵)의 딸이다. 아들은 정만석(鄭晩錫)이다. 정순붕은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과 함께 조선의 4대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을 숙청한 주동자다.
정기안은 1728년(영조 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738년(영조 14) 사헌부 지평, 1741년(영조 17) 사간원 정언이 된 뒤 두 직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1750년 헌납이 되었고, 이듬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1752년 동지사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보덕(補德)을 제수받았다가 다시 집의가 되었다. 1755년 승정원 승지가 되었으며, 1766년(영조 42) 한성부 우윤,·지중추부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정기안은 유불선 삼교는 물론 천문과 의술, 음률, 문장과 산수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저서로 1834년(순조 34) 아들 정만석이 편집·간행한 6권 3책의 '만모유고(晩慕遺稿)'가 있다. 권두에 남공철(南公轍)의 서문, 권말에 정만석의 발문이 있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리에 있으며, 포천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831년(순조 31)에 세워진 묘갈은 김재찬(金裁瓚)이 명(銘)을 짓고, 글씨는 이익회(李翊會)가 썼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1747년(영조 23) 삼척부사로 부임한 국보(國寶) 서종벽(徐宗璧, 1696∼1751)도 죽서루에 올라 제영 칠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운자는 遊(유), 樓(루), 鷗(구), 秋(추), 州(주)다.
竹西樓(죽서루) - 서종벽
憶昔先君再此遊(억석선군재차유) 옛 아버님 생각하며 다시 이곳 찾았는데
尙留佳句記西樓(상류가구기서루) 아직도 아름다운 구절 서루에 남아 있네
天涯影逐新歸雁(천애영축신귀안) 하늘 끝 돌아가는 기러기 그림자 쫓으며
海上盟深狎舊鷗(해상맹심압구구) 바다 위 갈매기와 더불어 살자 맹세했네
滾滾川華常作霧(곤곤천화상작무) 반짝이며 흐르는 냇물 늘 안개 피어나고
蕭蕭竹韻易生秋(소소죽운이생추) 쏴쏴 부딪는 대나무 소리에 가을이 오네
摩挲題軸便多感(마사제축편다감) 시판을 닦고 읽으니 온갖 생각 밀려들고
甲子重逈按陟州(갑자중형안척주) 육갑 지나 다시 돌아와 삼척을 다스리네
해상맹(海上盟)은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함께 살자고 맹약한다.’는 말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갈매기를 잡으려는 마음’을 ‘기심(機心)’으로 칭하고, 기심이 없이 바닷가에 은거하는 사람에게 갈매기들이 경계심을 보이지 않고 함께 어울렸다는 고사를 원용하였다.
이 시는 1747년(영조 23) 삼척부사로 부임한 국보(國寶) 서종벽(徐宗璧, 1696∼1751)이 죽서루에 올라서 지은 제영 칠언율시다. 운자는 遊(유), 樓(루), 鷗(구), 秋(추), 州(주)다. 영조 23년 삼척에 다시 돌아와 옛 선조 약봉 서성을 생각하며 죽서루에 오르니 '五十川韻(오십천운)' 등의 시가 남아 있더라는 내용의 시다. '甲子重(갑자중)'은 갑중회(甲重回)를 말한다. 육십갑자(六十甲子), 즉 60년이 지났다는 말이다. 서종벽은 서성의 시에 직접 차운한 것이 아니다. 서종벽의 선친 정간(貞簡) 서문유(徐文裕)는 1687년(정묘년)에 강원도 암행어사로 나갔을 때 죽서루에 들러 차운시를 남겼다. 그후 공교롭게도 1747년(정묘년)에 삼척부사로 부임한 서종벽이 선친의 시에 차운하면서 6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서종벽의 본관은 대구(大丘), 호는 사오재(謝五齋) 자는 국보(國寶)다. 약봉 서성의 현손,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증손, 서정리(徐貞履)의 손자다.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 판서 서문유(徐文裕), 어머니는 이상연(李尙淵)의 딸이다.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의 동생이고, 황주목사 서명민(徐命敏)의 아버지이다.
서종벽은 1721년(경종 1) 25세에 사마시 진사과에 급제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된 뒤, 1735년(영조 11) 9월 청도군수에 부임하였다. 청도군수 당시 선정을 베풀어 후일 백성들이 애민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1738년(영조 14) 5월 서종벽은 호조 정랑으로 자리를 옮긴 뒤 1741년(영조17) 3월 이천부사, 1743년(영조19)년 7월 황주목사, 1747년(영조 23) 9월 삼척부사에 이어, 1750년(영조26) 8월 사옹원 첨정(司饔院僉正)을 지냈다. 1750년(영조26) 10월 어가(御駕)를 따라 온양의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다가 온양군수에 임명된 뒤. 이듬해 56세 되던 해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771년(영조 47) 종계(宗系)에 관한 일처리 문제로 생전의 관작을 삭탈당했지만, 두 달 후에 처벌이 보류되었다. 순조 대에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증직되었고 철종 대에 이조참판(吏曹參判) 으로 추증 되었다 경북 청도의 도주관(道州館)에 그의 애민선정비가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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