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萬里) 차운로(車雲路, 1559~1637)는 벼슬에서 물러나 삼척으로 내려와 머물 때 '竹西樓次韻贈主守(죽서루차운증주수)'란 시를 지었다. 제목으로 보아 시를 지어 삼척부사에게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운자는 連(련), 川(천), 天(천), 前(전), 仙(선)이다.
竹西樓次韻贈主守(죽서루차운증주수) - 죽서루에서 차운하여 삼척부사에게 주다(차운로)
頭陀雲樹碧相連(두타운수벽상련) 두타산 구름 같은 숲은 푸르게 이어졌고
屈曲西來五十川(굴곡서래오십천) 오십천은 구비 돌아 저 서쪽에서 오누나
鐵壁俯臨空外鳥(철벽부림공외조) 철벽 아래로 내려다보니 허공 밖의 새들
瓊樓飛出鏡中天(경루비출경중천) 궁전 누각 솟아올라 거울 속의 하늘일세
江山獨領官居畔(강산독령관거반)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 자연 홀로 즐기니
風月長留几案前(풍월장류궤안전) 청풍명월이 오래 의궤 안석 앞에 머무네
始覺眞珠賢學士(시각진주현학사) 비로소 삼척에 어진 선비가 있음을 아니
三分刺史七分仙(삼푼자사칠푼선) 십에 삼할은 부사 또 칠할은 신선이라네
죽서루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면서 주변의 풍경과 감회를 읊은 시다.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원경과 근경을 읊은 뒤 자신의 한가로운 처지에 자족하면서 삼척부사에 대한 헌사로 마무리했다. 풍광이 뛰어난 진주(삼척)에서 벼슬살이하는 삼척부사가 신선 같다면서 부러움 섞인 찬양을 하고 있다.
차운로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만리(萬里)다. 차계생(車繼生)의 증손, 차광운(車廣運)의 손자다. 호조 좌랑 차식(車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가 그의 형이다. '중경지(中京誌)'에 차식과 차천로, 차운로 삼부자는 세상 사람들이 소식(蘇軾) 삼부자에 비견할 만큼 시문(詩文)으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차운로는 1580년(선조 13) 생원과 진사 양시(兩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583년(선조 16)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89년 전의현감을 지냈다. 1602년 봉상시 판관을 지내고, 1617년(광해9) 봉상시 첨정이 되었다. 1620년 황간현감으로 원접사 제술관이 되었다.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도 역임하였다. 내자시 정, 사옹원 정, 공조 정랑 등의 내직과 개성부 교수, 어천도 찰방, 풍기군수, 금성군수, 황간현감, 금성부사 등 외직도 지냈다.
개성부 교수 당시에는 개성유수 홍이상(洪履祥), 경력 이시정(李時禎), 윤영실(尹英實) 등과 장원 급제자들의 모임인 사장원계(四壯元契)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형 차천로와 함께 문장이 뛰어났고,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문집인 '창주집(滄洲集)'을 남겼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에 있다.
1635년(인조 13)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관찰사 재임 중 이민구는 삼척부 순시 중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를 남겼다. 운자는 紛(분), 群(군), 雲(운), 分(분), 聞(문)이다.
竹西樓(죽서루) - 이민구
高城落葉政紛紛(고성낙엽정분분) 높다란 성에 지는 낙엽 어지러이 날리는데
獨上危樓數雁群(독상위루수안군)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기러기들 헤아리네
雙眼每瞻山外日(쌍안매첨산외일) 눈으로는 매번 산 바깥의 해를 바라보면서
一身猶臥海中雲(일신유와해중운) 몸은 바다 한가운데 구름에 누워서 지내네
河流帶郭寒仍在(하류대곽한잉재) 성곽을 끼고 흐르는 강물은 한기 여전하고
嶺路橫天杳不分(영로횡천묘불분) 하늘에 비낀 험준한 산길 짐작도 못하겠네
遲暮自傷千里客(지모자상천리객) 저물녘 멀리 떠나온 나그네 향수에 젖는데
哀笳蕭瑟此時聞(애가소슬차시문) 이때 어디선가 구슬픈 호가 소리 들려오네
죽서루의 소슬한 가을 풍경과 함께 멀리 떠나온 나그네의 향수를 노래하고 있다. '笳(가)'는 일명 호가(胡笳)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주로 쓰인 악기다. 목부(木部) 또는 공명악기(空鳴樂器, aerophone)에 속하는 호가는 가는 세 개의 지공(指孔)과 한 개의 취공(吹孔)을 가졌던 관악기였다. 몸통은 산유자(山楢子)나무로 만들었다. 몸통의 길이는 3척5촌, 둘레는 4촌 가량이었다.
竹西樓(죽서루) - 이민구
錦石逶迤轉碧流(금석위이전벽류) 비단 바위 구불구불 푸른 강물 흐르는데
高秋落葉倚西樓(고추낙엽의서루) 낙엽 지는 상쾌한 가을 서루에 기대섰네
渾如傑閣千年在(혼여걸각천년재) 높고 훌륭한 누각 천년이나 남아 있는데
肯爲佳人一笑留(긍위가인일소류) 아름다운 사람 위해 웃음거리 남겨 놨네
雲海路長堪跨鶴(운해로장감과학) 구름바닷길이 아득하여 학을 타야 할 듯
烟波舫小不驚鷗(연파방소불경구) 안개 바다 조각배 갈매기도 놀라지 않네
若將溪水論湖水(약장계수논호수) 계수와 호수는 어느 곳이 더 아름다울까
未必杭州勝奧州(미필항주승오주) 아마 항주의 서호도 이 오십천만 못하리
웃음거리를 남긴다는 것은 시를 짓는 것에 대한 겸양의 표현이다. 죽서루 오십천이 항주의 서호(西湖)보다 더 아름답다고 강조하고 있다. 서호는 중국 4대 절세 미녀 서시(西施)의 미모에 비견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시는 정추의 '차삼척죽서루운'에서 차운했다. 운자는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이민구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다. 호는 동주 또는 관해(觀海)다. 신당부수(神堂副守) 이정(李禎)의 증손, 이희검(李希儉)의 손자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 이수광(李晬光)이며, 어머니는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이수광은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이민구는 1612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해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어서 예조와 병조 좌랑을 거쳐 1622년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627년 제1차 조청전쟁이 일어나자 병조 참의가 되어 세자를 호위하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1631년(인조 9) 휴가를 얻어 허유선(許惟善)과 함께 금강산, 설악산 일대를 유람했다. 1636년 제2차 조청전쟁(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江都檢察副使)가 되어 인조를 강화로 피신시키기 위해 배편을 준비했으나, 청군의 진격이 나무 빨라서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청전쟁이 끝난 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이민구는 문장에 뛰어나고 사부(詞賦)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저술을 좋아해서 평생 쓴 책이 4,000권이나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다 타버렸다. 저서에는 '동주집(東州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 '당률광선(唐律廣選)' 등이 남아 있다.
'第一溪亭(제일계정)' 편액은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죽서루가 '시냇가에 있는 정자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날아갈 듯 경쾌하고 날씬한 행초체(行草體) 운필(運筆)에서 오십천의 계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 죽서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죽서루 '제일계정' 편액
허목의 자는 문보(文父), 화보(和甫), 호는 미수, 태령노인(台嶺老人)이다.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 별제 허강(許橿)의 손자다.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 어머니는 천재적 풍류가객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다. 이황의 적통제자이자 남인 예학의 선구자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정구는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룬 학자다.
허목은 60세가 넘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장령(掌令)으로 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1660년(현종 1) 10월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1662년(현종 3) 허목은 삼척부사 재임 중 이 지방 최초의 사찬읍지인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했다. 그는 또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그의 독특한 서체인 고전체(古篆體)로 새겨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우는 한편 향약과 이사제(里社制)를 실시하였다. 그해 8월 그는 진상(進上)을 궐봉(闕封)하여 파직되었다.
東海頌(동해송, 陟州東海碑) - 허목
瀛海漭瀁(영해망양) 큰 바다는 넓고도 넓어서
百川朝宗(백천조종) 온갖 냇물 이리로 모이니
其大無窮(기대무궁) 그 크기가 다함이 없도다
東北沙海(동북사해) 동북쪽에 있는 모래 바다
無潮無汐(무조무석) 밀물도 없고 썰물도 없어
號爲大澤(호위대택) 대택 큰 못이라 이름했네
積水稽天(적수계천) 모인 물이 하늘까지 닿아
浡潏汪濊(발율왕회) 출렁이는 물 넓고 깊으니
海動有噎(해동유열) 바다 움직임 음산함 있네
明明暘谷(명명양곡) 눈부시게 해가 돋는 곳은
太陽之門(태양지문) 태양이 솟아 떠오르는 문
羲伯司賓(희백사빈) 희백 공손히 해 맞이하네
析木之次(석목지차) 동쪽 석목궁 있는 자리요
牝牛之宮(빈우지궁) 북두 암소자리 거기 있어
日本無東(일본무동)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之珍(교인지진) 비단을 짜는 인어의 보배
涵海百産(함해백산) 바다에서 나는 온갖 산물
汗汗漫漫(한한만만) 한없이 많기도 아주 많네
奇物譎詭(기물휼궤) 기이한 물건 조화를 부려
宛宛之祥(완완지상) 굽이져 너울대는 그 상서
興德而章(흥덕이장) 덕을 일으켜 잘 나타내네
蚌之胎珠(방지태주) 조개의 탯속에 든 진주는
與月盛衰(여월성쇠) 달과 함께 성하고 쇠하며
旁氣昇霏(방기승비) 대기를 따라 김을 올리네
天吳九首(천오구수) 머리 아홉인 괴물 천오와
怪虁一股(괴기일고) 외다리 소같은 짐승 기가
颱回且雨(태회차우) 태풍 일으키고 비 내리네
出日朝暾(출일조돈) 아침 햇살 동녘에 떠올라
轇軋炫惶(교알현황) 넓디 넓고 환하게 퍼지니
紫赤滄滄(자적창창) 보라 붉은빛 무척 으스스
三五月盈(삼오월영) 보름날 두둥실 떠오른 달
水鏡圓靈(수경원령) 물 거울 신령스레 비치니
列宿韜光(열숙도광) 뭇 별들도 광채를 감추네
榑桑砂華(부상사화) 중국 동쪽 부상나라 구슬
黑齒麻羅(흑치마라) 중국 남쪽 흑치국과 마라
撮髻莆家(촬계보가) 남동쪽 상투를 튼 보가족
蜒蠻之蠔(연만지호) 남쪽 연만족의 굴과 조개
爪蛙之猴(조왜지후) 서쪽 옛 조와국의 원숭이
佛齊之牛(불제지우) 남만 별종 불제국 소들은
海外雜種(해외잡종) 바다 밖의 다른 종족으로
絶黨殊俗(절당수속) 무리도 풍속도 다 다른데
同囿咸育(동유함육) 같은 곳에서 함께 자라네
古聖遠德(고성원덕) 성인의 덕화 멀리 미치고
百蠻重譯(백만중역) 모든 민족에 거듭 알려져
無遠不服(무원불복) 먼 나라까지 다 복종했네
皇哉熙哉(황재희재) 아아 크고도 또 빛나도다
大治廣博(대치광박) 큰 다스림 넓고도 크나니
遺風邈哉(유풍막재) 그 유풍 영원히 빛나리라
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 撰篆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澈沈 先生聞而改書 今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時 上之 三五年 乙丑春三月也(현종 2년-1661년 선생이 여기 태수로 와서 동해비를 짓고 써서 정라도에 세웠으나 풍랑에 물 속으로 잠기니 선생이 이를 듣고 다시 써주었다. 이제 신구 두 가지를 참고하여 '척주동해비'라는 큰 글자는 구본-옛 비석의 탁본을 사용하고, 작은 글자인 비문은 신본을 써서 새겨 죽관도에 세운다. 때는 숙종 35년 을축년-1709년 봄 3월이다.)
'羲伯(희백)'은 요(堯)임금 때 천문(天文), 역상(曆象)을 맡은 관리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이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시어, 넓은 하늘을 받들어 따르게 하다.'라는 글의 주에 '희씨는 곧 희백이다.'라고 하였다. '析木(석목)'은 별자리 이름이다. 이십팔수 중 기(箕), 두(斗)에 해당하고,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중 인마궁(人馬宮)에 해당하며, 십이지(十二支)의 인(寅)에 해당한다 '牝牛之宮(빈우지궁)'은 소자리의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鮫人(교인)'은 '인어, 중국 남해에 산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항상 베를 짜고 있으며 자주 우는데 그 눈물이 떨어져 진주가 된다고 한다. '譎詭(휼궤)'는 '거짓으로 속임, 바뀐 것, 문필(文筆)의 변화를 헤아릴 수 없음' 등의 뜻이 있다. '天吳(천오)'는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篇)>에 '조양(朝陽)의 골짜기에 천오라는 신이 있는데 바로 수백(水伯)이다. 그 생김새는 호랑이 몸에 사람의 낯으로 머리는 아홉이고 발과 꼬리는 여덟이다.'라 하였다. '虁(기)'는 동해 바다 유파산이라는 섬에 사는 외발 달린 짐승이다. 생김새는 소같이 생겼고,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낸다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전쟁 때 황제가 치우 군의 기세를 꺽기 위해 기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었다고 한다. '黑齒(흑치)'는 중국 최남단 광시(廣西)자치구 지역에 있던 흑치국, '麻羅(마라)'는 남방 지방에 거주하던 종족, '莆家(보가)'는 중국 동남해에 있던 종족의 이름이다. '蜒蠻(연만)'은 중국 남방의 숲속 동굴에 살던 소수민족의 이름이다. '爪蛙(조와)'는 조선 말에 출판된 '문헌비고(文獻備考)'에 파사국(波斯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파사국은 파키스탄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이다. 조와국은 파사국, 파사국은 곧 페르시아다. '佛齊(불제)'는 허훈(許薰)의 문집 '방산집(舫山集)' <동해비주(東海碑注)>에 '남만의 별종으로 진랍(眞臘)과 파사(婆娑)의 사이에 있는데, 그 나라 사람은 생우(生牛)의 피를 마시며 소를 잡는 사람은 사람을 죽인 것과 죄가 같다.'고 하였다.
허목은 후에 대사헌, 이조 참판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놓고 남인(南人)이 온건파인 탁남(濁南)과 강경파인 청남(淸南)으로 갈렸을 때 허목은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는 학문이 높았고, 글씨나 그림, 문장에도 능했다.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저서에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이 있다. 1825년(순조 25) 삼척읍민들은 그를 경행사(景行祠)에 추배(追配)하였다.
최근 '제일계정' 편액 글씨는 허목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이 굳어져 가고 있다. 허목은 삼척부사로 있던 1662년에 '죽서루기(竹西樓記)'와 '서별당기(西別堂記)'를 짓고, 객사인 진주관(眞珠館)과 응벽헌(凝壁軒)의 대액(大額)을 고전체(古篆體)의 큰 글씨로 썼다. 그러나 그의 필적이 죽서루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집권세력인 서인들에 의해 훼철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원도 관찰사가 삼척을 순시할 때 고의로 허목이 쓴 편액 '응벽헌' 글씨를 깎아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또 노론 송창(宋昌)은 허목이 쓴 현판을 떼어버렸다. 정치적 논리가 소중한 문화 유산을 파괴한 것이다. 2천 년이 넘은 팔미라 사자상을 폭파하는 등 귀중한 인류 문화재를 무차별 파괴하여 전세계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이슬람 국가(IS)를 기억하라!
‘제일계정’은 허목의 작품이 아니라도 매우 뛰어난 필체의 글씨다. 한 획 한 획이 오십천 강물이 절벽을 휘감아 돌면서 굽이쳐 흐르는 듯한 힘을 느끼게 한다. 마치 부여 부소산(106m) 사자루(泗泚樓, 문화재자료 제99호)의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이 쓴 '白馬長江(백마장강)' 편액을 다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휘갈긴 유장하면서도 힘찬 필체다.
허목은 1662년(현종 3)에 '죽서루기(竹西樓記)'를 지었다. '죽서루기'는 관동팔경을 소개하면서 죽서루가 왜 관동제일루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또, 죽서루의 연혁도 밝히고 있다.
허목의 '죽서루기' 편액
竹西樓記(죽서루기) - 허목
東界多名區 其絶勝八 如通川叢石亭 高城三日浦海山亭 䢘城永郞湖 襄陽洛山寺 溟州鏡浦臺 陟州竹西樓 平海越松浦 遊觀者 獨稱西樓爲第一 何也 盖濱海州郡 關嶺以外 東盡大海 其外無窮 日月迭出 怪氣萬變 海岸皆沙 或匯爲大澤 或矗爲奇岩 或鬱爲深松 自習溪以北 至箕城南境 七百里 大體皆然 獨西樓之勝 隔海有高峯峭壁 西有頭陀太白 嵬峨巃嵷 浮嵐積翠 岩峀杳冥 大川東流 屈折爲五十瀨 間有茂林墟烟 至樓下 層岩蒼壁千尋 淸潭修瀨 灣回其下 西日綠波 粼粼澹灩 岩壁別區 勝槪與大海之觀絶殊 遊觀者 其樂此而云云耶 考官府故事 樓不知作於何代 而至永樂元年 府使金孝宗 修廢墟起此樓 洪熙元年 府使趙貫 施丹雘 其後四十六年 成化七年 府使梁瓚 重修之 嘉靖九年 府使許確 增作南檐 又其後六十一年 萬曆十九年 府使鄭惟淸 復重修之 自太宗永樂元年癸未 至康熙元年壬寅 爲二百六十年 樓下古有竹藏古寺 有竹西之名 盖以此云 仍誌之以爲竹西樓記. 今上顯宗三年壬寅 月 日. 行都護府使許穆記.[동계(東界, 함경도 이남 강원도 삼척 이북)에는 명승지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이 있으니 곧 통천(通川, 북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䢘城, 속초)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溟州, 강릉)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平海, 울진)의 월송포 등이다. 그런데 이 곳들을 유람해 본 사람들은 단연코 죽서루가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개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닷물이 큰 못처럼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며,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 통천) 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 평해) 남쪽 경계 지역까지 700리다.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 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 김효손의 오자)이 폐허화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 원년(1425, 세종 7)에 부사 조관이 단청을 하였다. 그 46년 뒤인 성화(成化) 7년(1471, 성종 2)에 부사 양찬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 중종 25)에 부사 허확이 남쪽 처마를 덧대어 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 19년(1591, 선조 24)에 부사 정유청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癸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 현종 3) 임인년(壬寅年)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옛날에 죽장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한다. 현종 3년(1662) 임인년(壬寅年) 월 일. 행도호부사 허목 기문을 쓰다.]
허목은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가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고, 큰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해서 죽서루을 관동제일루로 꼽았다.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 남인의 저격수였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은 이이의 '죽서루차운'에서 차운한 시 '次竹西樓板上韻(차죽서루판상운)'을 지어 남인의 영수 허목을 비판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이 시는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실려 있다.
次竹西樓板上韻(차죽서루판상운) - 죽서루 판상시에서 차운하다(윤증)
逢迎千里陟州樓(봉영천리척주루) 천 리 멀리 죽서루에 올라 접대받으니
爽氣冷冷五月秋(상기냉랭오월추) 시원한 공기 서늘해 오월도 가을 같네
脩竹晴川眞絶境(수죽청천진절경) 긴 대나무 맑은 시내 참으로 절경인데
秀眉華髮自名流(수미화발자명류) 백발에 눈썹 긴 자가 스스로 명류라네
雲山世外看來樂(운산세외간래락) 세상 밖 구름 산은 바라보면 즐겁지만
川洛人間說着愁(천락인간설착수) 당파 싸움 인간사 말하려면 걱정 앞서
作底風波滿平地(작저풍파만평지) 평지에다 그 숱한 풍파 일으켜 놓고서
却歸閑處伴沙鷗(각귀한처반사구) 이 한가로운 곳에 와 갈매기 벗하다니
'秀眉華髮(수미화발)'은 허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 뒤에는 '엉뚱한 말이 한번 나오자 참소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일어나서 사류(士類)가 와열(瓦裂)되고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는데, 이 고을의 군수 허공(許公) 허목(許穆)이 바로 그때 앞장서서 일을 만든 사람이다. 그런데 도리어 초연하게 이 좋은 곳에 와서 청복(淸福)을 누리고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돌이켜 한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라는 주가 달려 있다. 시의 내용을 볼 때 윤증은 삼척에 와서 죽서루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作底風波滿平地(작저풍파만평지)'는 1660년(현종 1) 허목이 효종에 대한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면서 조정이 복제 논쟁에 휘말리자 현종(顯宗)이 허목을 삼척부사로 내보냈던 일을 가리킨다. '川洛(천락)'은 송나라 때의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한 천당(川黨) 일명 촉당(蜀黨)과 정이(程頣)를 중심으로 한 낙당(洛黨)인데, 여기서는 기해복제(己亥服制)로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일을 말한다.
윤증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 또는·유봉(酉峰)이다.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다.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 윤증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하던 부친과 유계(兪棨) 밑에서 공부할 때 성리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를 공부했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에게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준길의 문하에서도 공부했다.
윤증은 효종 말년 학행(學行)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 공조랑,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 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연보에는 윤증이 학행으로 천거받아 대사헌, 우참찬, 우의정 등 요직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윤증의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윤선거는 같은 서인인 송시열과 달리 남인에게 관대하였고, 윤증 역시 남인의 영수이자 송시열의 라이벌 윤휴(尹鑴) 등의 조문을 받았다. 그런데, 윤휴의 제문에는 윤선거를 조롱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 일로 윤증은 윤휴와 허목을 기피하고 멀리하게 되었다. 윤증은 허목이 윤선도와 윤휴를 뒤에서 움직여 서인을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한편 송시열은 윤증이 남인의 조문을 받은 것에 대해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 이는 결국 1673년 회니논쟁(懷泥論爭)을 불러일으켰다. 회니(懷泥)는 송시열이 살던 회덕(懷德)과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을 말하는 것이다. 윤증은 아버지의 묘갈명을 윤선거의 생전 친구였던 송시열에게 부탁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윤선거가 생전에 남인의 영수 윤휴를 두둔한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송시열은 조문에 조청전쟁 때 강화도에서 자결한 처를 두고 도망쳐 나온 일을 가지고 야유하는 뜻을 적었다. 윤증은 이를 고치거나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감정이 상한 윤증은 결국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사제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후 소론의 영수 윤증과 노론의 영수 송시열, 남인의 영수 허목 사이에 묘한 갈등과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다.
윤증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으나 다행히 벼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예송논쟁(禮訟論爭)과 각종 환국(換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특히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남인의 처리를 두고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서인 강경파에 대응하여 박세채(朴世采), 남구만(南九萬), 박세당(朴世堂) 등과 함께 서인 온건파를 이끌면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송시열 등의 노론당은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데 최우선의 목표를 둔 반면, 윤증 등 소론당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려 했다. 윤증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화무쌍한 정국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했기 때문에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게 된다. 노론에게 패하자 윤증은 은둔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1714년 정월 윤증은 학질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소론이 거세되면서 관직이 추탈되었다가 후에 복권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 '명재유서(明齋遺書)' 등이 있다. 1722년(경종 2)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 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죽서루' 편액
해서체(楷書體)로 쓴 이 '竹西樓(죽서루)' 편액은 누구의 작품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매우 단정하면서도 중후한 느낌을 주는 정자체 글씨다. 곧게 벋은 대나무처럼 세상의 어떤 풍상이나 역경이 닥쳐도 자신을 지켜나갈 것만 같은 필체다.
1663년(현종 4) 9월 춘천부사로 부임한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 1608~1670)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를 지었다. 이 제영시는 1663년 9월에서 그가 춘천부사에서 이임한 1665년 3월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竹西樓(죽서루) - 조한영
沙白江淸漾夕暉(사백강청양석휘) 하얀 백사장 맑은 강 일렁이는 저녁노을
竹西樓上獨移時(죽서루상독이시) 죽서루 위를 홀로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
秋光如畵簾旌晩(추광여화렴정만) 가을빛 그림 같고 주렴엔 어둠이 드는데
臥看紗籠駱老詩(와간사롱낙노시) 누워서 등불에 낙노의 시를 비춰 보노라
'駱老(낙노)'는 과연 누구일까? 낙촌(駱村)이란 호를 가진 사람으로 추정된다. 낙촌을 호로 삼은 사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박충원(朴忠元, 1507~1581)과 절파화풍(浙派畫風)의 정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경윤(李慶胤, 1545~1611) 등 두 명이 있다. 이 중 영월군수를 지낸 바 있는 박충원이 아닐까 한다.
조한영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수이(守而)다. 조대건(曺大乾)의 증손,주부 조경인(曺景仁)의 손자, 공조 참판 조문수(曺文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직언(李直彦)의 딸이다. 서인 이식(李植), 노론의 조종(祖宗)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 5) 조한영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37년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1639년 지평이 되었다.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수군과 육군의 지원병 출병과 원손을 볼모로 심양(瀋陽)에 보내라고 요구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金尙憲), 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1641년 심양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굽히지 않았다. 청나라 감옥에서 김상헌의 시문집인 '설교집(雪窖集)'의 편찬을 도왔다. 1642년 심양에서 의주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1645년 지제교, 헌납을 역임하고 지평이 되었을 때 강빈사건(姜嬪事件)에 반대하다가 인조의 뜻에 거슬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1650년(효종 1) 효종이 즉위하자 부수찬이 되고, 이어 헌납이 되어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교리로 있을 때 조귀인(趙貴人)의 소생 숭선군 징(崇善君 澂), 낙선군 축(樂善君 潚) 등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집의로 있을 때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1654년 승지, 1656년 대사간에 이어 대사성, 이조 참의, 승지를 차례로 지냈다. 1657년 다시 대사성이 된 조한영은 '감고신성잠(鑑古愼成箴)' 180구를 지어 효종으로부터 표피(豹皮)를 하사받았다. 이후 대사간이 되고 여러 차례 이조 참의를 지내면서 남인인 윤휴(尹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면직되기도 했다. 1659년(현종 1)에는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호조 참의에 이어 예조 참의를 역임하고, 다시 호조 참의가 되었을 때 김징(金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63년(현종 4) 9월 춘천부사로 부임하여 1665년 3월에 이임하였다. 1668년(현종 9) 예조 참판에 이어 한성부 좌윤, 형조 참판으로 있다가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예조 참판을 지내고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면서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졌으나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상녀취첩(喪女娶妾)했다는 이유로 이옥(李沃) 등의 탄핵을 받았다.
문장이 뛰어나 문집으로 '회곡집(晦谷集)'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한다.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72년(현종13)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계촌(桂村) 이지익(李之翼, 1625∼1694)은 순시차 삼척에 들렀을 때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남겼다. 운자는 流(류), 優(우), 頭(두), 舟(주), 遊(유)다.
竹西樓(죽서루) - 이지익
第一奇形五十流(제일기형오십류)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형승 오십천의 물
竹西名勝孰爭優(죽서명승숙쟁우) 그 누가 죽서루 명승과 아름다움 다툴까
城仍削壁危樓勢(성잉삭벽위루세) 성은 수직 절벽에 잇닿아 누대 위태롭고
山作重門鎭海頭(산작중문진해두) 산은 겹문이 되어 바다 머리를 지키누나
兩岸霜林成錦帳(양안상림성금장) 양 언덕의 가을숲은 비단 물결 이뤘는데
千群粧黛載蘭舟(천군장대재란주) 수많은 미인 무리 아름다운 배에 태웠네
偶然關外三人會(우연관외삼인회) 우연히도 관문 밖에서 세 사람을 만나니
天意分明餉此遊(천의분명향차유) 이 놀이를 만끽하는 것은 하늘의 뜻일세
조선 최고의 명승지 죽서루 앞 오십천의 응벽담에 미인들을 태우고 뱃놀이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난주에 태운 수많은 미인들은 대부분 관기였을 것이다. 관문 밖에서 이지익이 만난 세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지익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여휘(汝輝)다. 감사 이춘원(李春元)의 손자, 이초로(李楚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변제원(卞悌元)의 딸이다. 이지익은 남인 중 탁남(濁南)에 속하는 사람이다. 남인당 중 갑인환국(甲寅換局)과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주장한 사람들을 탁남이라고 한다. 탁남의 영수는 허적(許積)이었다.
1652년(효종 3) 진사로서 증광 문과에 급제한 이지익은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한 대신의 뇌물 수수를 탄핵하다가 호남의 막좌(幕佐)로 쫓겨났다. 소론의 영수 남구만(南九萬)의 도움으로 다시 대직(臺職)에 돌아온 뒤 서해도 감사에 이어 1672년(현종13)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674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예론이 일어나 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 대사헌 이지익은 송시열의 예론을 반대하였으나 처벌까지는 바라지 않아 사임했는데, 이듬해 다시 대사간에 복직되어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6년(숙종 2)에는 예조 판서로 승진하고, 이어 대사헌, 참찬, 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냈다. 1678년(숙종 4) 다시 형조 판서가 된 뒤, 개성유수, 한성판윤, 함경감사, 전라감사, 비변사 당상, 평안감사 등을 역임했다. 원접사(遠接使)로 네 차례나 의주를 왕래하였으며, 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지익에 대해 '서인으로서 남인에게 붙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1695년(숙종 21)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1645~1703)은 순시차 삼척에 들렀다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지었다. 그는 1683년(숙종 9) 울진현령으로 내려왔는데, 그 2년 뒤 죽서루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운자는 酬(수), 遊(유), 樓(루), 浮(부), 舟(주)다.
竹西樓(죽서루) - 오도일
靈區宿債未全酬(영구숙채미전수) 이름난 고을의 묵은 빚을 갚지 못했기에
恩許觀風辦此遊(은허관풍판차유) 성은으로 풍속 살피러 이번 일 주선했네
千里再爲關外客(천리재위관외객) 머나먼 길 또다시 관동의 나그네가 되어
十年重上竹西樓(십년중상죽서루) 십여년 만에 다시 와 죽서루에 올랐어라
崖擎高棟懸疑墜(애경고동현의추) 낭떠러지 받친 들보 떨어질 듯 걸려있고
水抱層欄漾似浮(수포층란양사부) 물은 누각 끌어안고 물결 따라 일렁이네
仙路不迷他日到(선로불미타일도) 신선길 알거니 언젠가 다시 찾아올 때는
桃花輕薄引漁舟(도화경박인어주) 복사꽃 가벼이 고깃배 당겨서 끌고 가리
오도일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다. 선공감역(繕工監役) 오희문(吳希文)의 증손,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손자, 아버지는 오달천(吳達天)이다.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 도사(都事) 조간(趙幹)의 딸이다. 송곡(松谷) 조복양(趙復陽)의 딸 풍양 조씨(豐壤趙氏)와 혼인하였다. 아들은 오수채(吳遂采)이다. 오도일은 소론당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오도일은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자랐다. 성강(星江) 조견소(趙見素)에게 글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어 스승을 출세시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1673년(현종 14) 오도일은 춘당대 문과에 급제했다. 문장으로 유명하여 1680년(숙종 6) 숙종이 내린 글제에 뽑혔다. 애주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숙종이 과음하지 말라는 충고를 할 정도였다. 그해 지평, 부수찬에 이어 1683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683년 울진현령으로 나갔다.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89년 청풍부사가 되어 다음해 청풍의 읍지인 '청풍지(淸風誌)'를 편찬하였다. 또 청풍부(淸風府)의 동헌(東軒) 명월정(明月亭)을 건립하였다.
1694년 개성부 유수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 부제학이 되었다. 1695년(숙종 21)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 부제학, 대사헌을 지냈다. 1697년(숙종 23) 숙종의 특명으로 4년 동안 술을 끊었다. 1698년 예문관 제학, 사직, 이조 참판에 이어 1698년 이조 참판, 공조 참판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충청도 임천에 유배되었다가 장성에 이배되었다. 다음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불렸다. 1729년(영조 5) 아들 오수채의 녹훈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위패를 고산서원에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해주 오씨 종중으로 옮겼다. 울산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파집(西坡集)'이 있다.
1714년(숙종 40)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나온 묵소(墨沼) 조석명(趙錫命, 1674∼1753)은 삼척을 암행하다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樓(루), 州(주), 浮(부), 愁(수), 遊(유)다.
竹西樓(죽서루) - 조석명
眞州館外竹西樓(진주관외죽서루) 객사 진주관 밖에 바로 죽서루 있는데
形勝關東第一州(형승관동제일주) 뛰어난 경치 관동 지방에서 가장 으뜸
欄上人疑天上坐(난상인의천상좌) 난간 위의 사람은 하늘에 앉은 듯하고
水中船似鏡中浮(수중선사경중부) 물위의 조각배 거울에 떠 있는 듯하네
溪山窈窕堪揩眼(계산요조감개안) 계곡과 산악 아름다워 눈 비빌 만하고
歌舞留連合滌愁(가무유련합척수) 노래와 춤에 마음 뺏겨 근심도 씻었네
於我仙緣元不薄(어아선연원불박) 나에게 신선 인연 원래 박하지 않아서
名區又得此奇遊(명구우득차기유) 우연히 명승지 만나 이런 놀이 즐기네
강원감사나 삼척부사 등 지방관들의 죽서루 관련 시들을 보면 죽서루에서는 노래와 춤, 풍악이 그칠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권세와 풍류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으니 조선시대 유생들이 과거에 목숨을 걸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석명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백승(伯承)이다. 조형(趙珩)의 증손, 조상정(趙相鼎)의 손자, 조대수(趙大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의 딸이다. 1707년(숙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을 포함하여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낸 뒤, 1713년(숙종 39)부터 암행어사로 여러 도에 파견되었다. 1728년(영조 4) 대사간에 임용되자 바로 수령들의 지난 잘못을 일일이 밝혀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형조 판서를 지냈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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