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7

林 山 2018. 9. 28. 11:10

1553년(명종 8) 8월 사옹원 정(司甕院正)을 지낸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 1507∼1560)이 삼척부사로 부임했다.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김희삼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김희삼


萬仞丹崖百尺樓(만인단애백척루) 깎아지른 듯한 붉은 벼랑에 백척의 누대

白頭吟嘯六春秋(백두음소육춘추) 허연 머리로 읊조린 세월이 여섯 해일세

山盤仙洞千重翠(산반선동천중취) 산은 신선마을을 천겹 감싸 둘러 푸르고

江抱孤城一帶流(강포고성일대류) 강은 외로운 성을 안고 한줄기로 흐르네

風定漁舟閒得意(풍정어주한득의) 바람도 자고 작은 배는 한가하기만 한데

日舒遊客逈添愁(일서유객형첨수) 햇볕 온화하니 길손 멀리 근심을 보태네

古今幾動憑欄興(고금기동빙란흥) 예부터 산수에 노니는 흥 얼마나 일었나

寄跡紅塵愧海鷗(기적홍진괴해구) 홍진에 잠시 머문 자취 물새에 부끄럽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벼슬살이하는 감회를 읊은 시다. '六春秋(육춘추)'는 김희삼이 삼척부사로 있던 6년을 가리킨다. '愁(수)'는 고향에 계신 늙은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심이다.  


김희삼은 성주(星州)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로(師魯)다. 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김치정(金致精),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 이계공(李季恭)의 딸이다. 김취성(金就成), 이광(李光), 송희규(宋希奎)의 문인이다. 영남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호남의 유종(儒宗)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등 조선 성리학의 큰 별들과 교유하였다.


김희삼은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진복창(陳復昌)의 비위를 거슬렸다가 외직으로 쫓겨났다. 이어 사간원, 사헌부, 이조와 병조 좌랑, 홍문관, 사옹원 정 등을 지냈다. 1553년 8월 삼척부사로 나가 1558년 7월까지 재임했다. 삼척부사 재임 중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백치(白雉, 흰 꿩)와 기맥(歧麥, 한 줄기에 2개 이상의 보리이삭이 나오는 상서로운 징조)의 상서가 있었는데, 어사(御使)의 상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김희삼은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몸가짐을 신중히 했으며, 특히 경(敬)에 대해 독실하게 공부했다. 그는 항상 밤중에 일어나 성현의 훈사(訓辭)를 외웠는데 늙도록 그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또 효성이 지극했다. 그의 아버지 김치정, 아들 김우홍(金宇弘)과 김우굉(金宇宏), 김우용(金宇容), 김우옹(金宇顒) 4형제도 효우(孝友)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사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천곡(川谷)의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에 '칠봉일집(七峰逸集)'이 있다. 


1554년(명종 9) 강원도 관찰사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은 금강산 등 관동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그해 정월에는 수종사(水鐘寺), 오정(梧亭) 등지에 다녀온 뒤 시를 지었고, 2월에는 강릉의 청허루(淸虛樓), 종각루(鐘閣樓), 사새진(沙塞津),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해학정(海鶴亭), 삼척의 죽서루 등지에 오른 뒤 누정시를 남겼다. 죽서루에서는 '등죽서루(登竹西樓)'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 수 지었다. 임억령은 특히 오언시에 능했다. 


등죽서루(登竹西樓) -죽서루에 올라(임억령)


1


朱鳳不司晨(주봉불사신) 붉은 봉황새는 새벽을 주관하지 않는데

神龍寧掛網(신룡녕괘망) 신령스러운 용이 어찌 그물에 걸리리요

揮手謝塵間(휘수사진간) 어지러운 세상 손사래를 치며 사절하고

挾風遊海上(협풍유해상) 바람을 끼고 바닷가에 살면서 노닐리라

身與白鷗雙(신여백구쌍) 내가 갈매기들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면

樓爲黃鶴兩(누위황학냥) 죽서루는 황학과 더불어 짝을 이루리라

一川遠橫通(일천원횡통) 오십천은 멀리 구비구비 비껴 흐르는데

群峯鬱相向(군붕울상상) 빽빽하게 솟은 봉우리들 서로 마주보네


笑傾張翰杯(소경장한배) 비웃어도 강동 장한처럼 술잔 기울이고

寒擁王恭氅(한옹왕공창) 추워도 왕공처럼 학창의로 몸을 감싸네

笛奏野梅飄(적주야매표) 피리를 연주하자 들매화 꽃잎 흩날리고

雨微庭放(우미정행방) 보술비 내리자 마당의 살구 떨어지누나

高歌雲與飛(고가윤여비) 큰소리로 노래 부르니 구름도 일어나고

百慮灘俱漲(백려탄구창) 갖가지 시름에 여울도 함께 물결치누나

沙邊有小舟(사변유소주) 오십천변에는 일엽편주 한 척이 있으니

載月蓬萊訪(재월봉래방) 달빛을 가득 싣고서 봉래섬 찾아갈까나


2


江觸春樓走(강촉춘루주) 강물은 봄 누각을 부딪히면서 달려가고

天和雪嶺圍(천화설령위) 하늘은 눈덮힌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네

雲從詩筆湧(운종시필용) 구름은 시쓰는 붓을 따라서 솟아오르고

鳥拂酒筵飛(조불주연비) 새는 술자리를 스치듯 아슬히 날아가네

浮雲如今是(부운여금시) 기분이 구름처럼 떠오르는 지금은 옳고

趨名悟昨非(추명오작비) 명리 뒤쫓던 지난날의 그릇됨 깨달았네

松風當夕起(송풍당석기) 저녁때가 되어 소나무에 바람 일어나니

蕭颯動荷衣(소삽동하의) 서늘하게 은자의 옷자락을 날려 올리네


3


樓高受細雨(누고수세우) 높다란 누각 가랑비에 부슬부슬 젖는데

峽坼噴長川(협척분장천) 산골짜기 터뜨려 긴긴 강물 뿜어대누나

海客把春酒(해객파춘주) 바닷가 나그네 맛좋은 술잔을 잡았는데

山村生暝烟(산촌생명연) 산촌에는 저물녘 어스름 안개 피어나네

山中一夜雨(산중일야우) 산속에서는 밤이 새도록 비가 쏟아지고

海外二毛人(해외이모인) 바닷가에는 머리털 반백의 늙은이 사네

落盡寒梅樹(낙진한매수) 눈속에 핀 매화꽃은 모조리 떨어졌으니

西湖幾度春(서호기도춘) 서호는 얼마나 많은 봄이 지나갔을까나


犬吠踈籬店(견폐소리점) 울타리 엉성한 주점에는 개만 짖어대고

舟搖細雨江(주요세우강) 가랑비 내리는 강에 일엽편주 흔들리네

鄕心關雪嶺(향심관설령) 고향생각은 눈 쏟아지는 고개에 묶였고

客慮集春窓(객려집춘창) 나그네 근심은 봄날의 창가에 모이누나

天暝雲無定(천명운무정) 하늘은 어두운데 구름은 무심히 흐르고

風輕帳有波(풍경장유파) 실바람에 휘장은 마치 물결처럼 휘날려

桃源淸絶地(도원청절지) 더없이 청정한 땅 무릉도원과도 같아라

衰白遠來過(쇠백원래과) 흰머리 늙은이 멀리서 왔다 지나가노라


죽서루에 올라 주변의 산들과 오십천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구름이 일어나듯 마구 솟아오르는 흥취를 읊은 시다. 이 시에서도 벼슬살이보다는 시인으로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임억령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다. 임득무(林得茂)의 증손, 임수(林秀)의 손자, 임우형(林遇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호남 사림의 원조(士林)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임억령은 진사가 되었고, 1525년(중종 20) 식년 문과에 급제한 뒤 부교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사간, 전한,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 등을 지냈다. 금산군수로 있을 때 그는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윤원형의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죽이는 것을 보자 이를 자책하고 벼슬을 사직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격노하여 이를 불태우고 고향인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명종 7) 동부승지, 병조 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57년(명종 12) 담양부사가 되었다.


임억령은 시문에 능하고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일컬어졌다. 그는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에 살면서 김성원(金成遠), 고경명(高敬命), 정철과 함께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으로 불렸으며, 안방준(安邦俊), 김인후(金麟厚)와 더불어 호남3고(湖南三高)로 불리기도 했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이이도 죽서루를 찾아 '竹西樓次韻(죽서루차운)'이란 시를 남겼다. 그가 언제 죽서루에 들러 이 시를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1558년(명종 13) 이이는 처가인 경북 성주(星州)에서 안동(安東)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에 들러 이황을 만나 이틀 동안 학문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은 뒤 강릉의 외가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이는 이때 삼척을 지나는 길에 죽서루에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이의 한시 판액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이이의 '죽서루차운' 편액


竹西樓次韻(죽서루차운) - 죽서루에서 차운하다(이이)


誰將天奧敞華樓(수장천오창화루) 누가 하늘 받들어 화려한 누각을 세웠나

石老星移不記秋(석로성이불기추) 하염없이 지나온 세월 기억할 수도 없네

野外千鬟浮遠岫(야외천환부원수) 멀리 들판 밖에는 수많은 산들 떠있는데

沙邊一帶湛寒流(사변일대담한류) 모래사장 가까이엔 맑은 물 차게 흐르네

騷人自是多幽恨(소인자시다유한) 시인은 절로 그윽한 한이 많다고 하지만

淸境何須惹客愁(청경하수야객수) 맑은 경지에 어찌 나그네 수심 일으키리

會撥萬緣携籊籊(회발만연휴적적) 온갖 인연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는

碧崖西畔弄眠鷗(벽애서반롱면구)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조는 물새와 놀까나


죽서루의 절경을 노래한 다음 아름다운 자연과 동화되어 살고 싶다는 심정을 담은 시다. '天奧(천오)'는 자연계의 비밀스럽고 깊은 뜻을 가리킨다. 하늘을 뜻하기도 한다. '石老(석로)'는 바위에 이끼가 끼어 고색이 짙음을 이른다. '星移(성이)'는 별의 위치가 옮겨진다는 뜻인데,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騷人(소인)'은 시인과 문사를 뜻하는 말이다. '騷(소)'는 초나라 굴원이 임금에게 쫓겨나 상강(湘江)을 떠돌면서 지은 '이소(離騷)'에서 나온 말로 '시름'이란 뜻이다. 즉 '소'는 근심에 걸린 것을 뜻하는데, 후대로 오면서 시인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선비나 사대부 등 지조 있는 지식인을 말하기도 한다.  


이이는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덕수(德水),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이다. 호는 율곡 외에도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이 있다. 아버지는 증 좌찬성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다. 


1558년(명종 3) 이이는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23세 되던 해에 도산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을 방문했다. 1568년(선조 1)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됐다. 이듬해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이이는 서인의 영수로 추대되어 정철과 함깨 당파를 이끌었다.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의 으뜸가는 학자로 추앙받은 성리학자다. 이이의 학맥은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졌다. 이이학파는 이후 조선의 정치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이의 저서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집주개본(小學集注改本)', '중용토석(中庸吐釋)', '경연일기(經筵日記)' 등이 있다. 그는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와 종묘에 배향된 6현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사후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은 순변사(巡邊使), 종사관(從事官)으로 있다가 1558년(명종 13) 윤 7월 18일 영월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559년(명종 14) 이준민은 죽서루를 찾아 임억령의 '등죽서루' 세 번째 시의 첫 수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에서 차운하여 '敬次石川(경차석천)'을 지었다. 이준민의 시 아래에는 그의 증손 수암(壽菴) 이지무(李枝茂, 1604~1678)와 5대손 정묵재(鄭默齋) 이성조(李聖肇, 1662∼1739)의 차운시, 8대손 이윤국(李潤國)이 사라진 시판을 새로 만들어 걸었다는 글, 12대손 이석호(李晳鎬)가 낡은 시판을 중수했다는 글 등이 새겨져 있다. 


이준민의 '경차석천'


敬次石川(경차석천) - 삼가 석천의 시를 차운하다(이준민)


天地無心客(천지무심객) 세상일에는 전혀 무심한 나그네가

江湖有約人(강호유약인) 강호에 살겠다 사람들과 약속했지

斜陽樓百尺(사양루백척) 까마득한 죽서루에 저녁노을 지니

虛送故園春(허송고원춘) 헛되이 옛동산에서 봄을 보내노라


己未仲夏旬(기미중하순삼) 1559년 음력 5월 13일

全義李俊民(전의이준민) 전의 이씨 이준민


자연에 묻혀 살기로 사람들과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시다. 이준민은 1561년(명종 16) 강릉부사로 부임했다. 조식이 바로 그의 외삼촌이다. 이준민은 특히 이이를 존경하였다. 이준민은 임억령의 '등죽서루' 세 번째 시에서 人(인), 春(춘)을 차운했다.


이준민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다. 이건(李楗)의 증손, 이정윤(李貞胤)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참봉 이공량(李公亮)이며, 어머니는 조언형(曺彦亨)의 딸이다.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고, 1554년 사간원 정언 때 당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을 경계하고, 경학을 장려해 덕행을 권장할 것을 상소하였다. 1556년 황해도 도사로서 중시에 급제,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이듬해 사헌부 지평이 되어 김진(金鎭), 이명(李銘) 등과 함께 권신 이량(李樑)에 의부해 윤원형 일파를 축출하자, 사림에서는 그를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여겼다. 반대파의 탄핵으로 영월군수로 좌천되었고, 이어 1561년 강릉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관할구역인 대창역(大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그 뒤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등용된 그는 세자 교육에 힘쓰다가 강계부사를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 좌승지를 지내고, 1570년(선조 3)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나갔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 공조 참판을 거쳐 1575년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 판서, 지의금부사,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동서당쟁이 격화되자 당론 조정에 힘쓰던 이이를 존경하였다. 이준민은 성품이 강직해 사리에 닿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았고, 항상 검소했으며, 자녀 교육에도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당쟁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90년 뒤인 1657년 3월 강릉부사 이지무는 죽서루에서 증조부 이준민의 시 '경차석천' 편액을 발견하고 차운시 오언절구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人(인), 春(춘)이다. 죽서루에 걸려 있는 증조부의 시판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敬次先祖詩(경차선조시) - 이지무


依舊山川勝(의구산천승) 강산의 승경은 옛날과 같은데

存亡古今人(존망고금인) 생사도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堪嗟遊賞日(감차유상일) 슬프도다 즐겁게 노는 이날은

又是竹樓春(우시죽서루) 또한 바로 죽서루의 봄날인데


先祖參贊公次石川詩 壁上有題 今已九十餘歲 不勝感愴 謹書以記云 丁酉季春 曾孫 江陵府使 枝茂[선조 참찬공(이준민)이 석천(임억령)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가 벽 위에 쓰여져 있으니 지금 벌써 90여 년이 되었다. 사모하는 마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몇 자 적어 이렇게 기록하노라. 1657년 3월 증손 강릉부사 지무]


이지무의 자는 무백(茂伯)이다. 좌참찬 이준민의 증손, 이종훈(李從訓)의 손자다. 아버지는 이직경(李直卿), 어머니는 이우(李佑)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고, 1644년에 정언(正言)과 사서(司書)를 지냈다. 1649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으로 볼모로 갈 때 노모 봉양을 이유로 호송을 거부했다가 인조의 미움을 받아 관직 생활이 순탄치 못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장령(掌令)과 필선(弼善)을 역임하다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귀국한 뒤 청나라에 체류할 때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딸의 소환을 청나라 조정에 주청한 일이 조정에 알려져 관직을 박탈당하고 사대문 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다시 장령과 정언, 헌납(獻納)을 거쳐 1665년(현종 6) 8월 인천으로 부임하여 1666년 10월까지 인천부사를 지내다가 강계부사로 옮겨갔다. 1670년 형조 참의, 이듬해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673년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


1711년(숙종 37) 삼척부사 이성조는 죽서루에 걸려 있는 5대조 이준민, 조부 이지무 등 두 선조의 시판을 보고 감격해서 오언절구와 칠언율시 각 한 수를 지었다. 운자는 人(인), 춘(春)이다. 이성조는 또 칠언율시 죽서루 제영 한 수도 남겼다. 


敬次先祖詩(경차선조시) - 이성조


兩祖登臨地(양조등림지) 두 분의 할아버님이 오르셨던 곳

今來感慕人(금래감모인) 이 후손 이제서야 찾아 감모하네

賡題前後詠(갱제전후영) 두 할아버님 시 앞뒤로 걸렸으니

百五十三春(백오십삼춘) 세월은 흘러 벌써 153년 지났네


先祖參贊公題竹樓 後九十九年 祖父承旨公次題 又其後五十四年 不肖孫守玆邑 謹續次以寓感慕面 恐各板見失 模本集刻云 辛卯季春 五代孫府使聖肇.[선조 참찬공(이준민)이 죽서루 시를 지었는데, 그 99년 후에 조부 승지공(이지무)이 차운하여 시를 지었고, 또 그 54년 후에 불초 후손 내가 이 고을에 부사로 와서 계속 차운하여 시를 지어 감동하여 사모하는 체면을 나타냈다. 그런데 각 목판을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원판의 시를 본떠 모아서 이렇게 새겼다. 1711년 3월 5대손 부사 성조]


竹西樓(죽서루) - 이성조


領略東州景物優(영략동주경물우) 동쪽 고을의 경물 뛰어난 줄은 알았는데

淸閒蕭灑最西樓(청한소소최서루) 맑고 차고 깨끗한 건 죽서루가 제일일세

重重列峀當窓立(중중열수당창립) 겹쳐서 벌려선 산봉우리 눈앞에 서 있고

曲曲長川繞檻流(곡곡장천요함류) 긴 개울은 구불구불 난간을 휘감고 도네

地連扶桑先得月(지련부상선득월) 땅은 부상과 맞닿아 달을 먼저 맞이하고

風多踈竹陽生秋(풍다소죽양생추) 바람이 성긴 대나무에 불어 가을 생기네

襜帷暫擧臨仙界(첨유잠거임선계) 휘장을 잠시 걷고는 신선 세계에 앉아서

詩酒相酬對勝遊(시주상수대승유) 술과 시 주고받으며 멋진 경치 바라보네


이성조는 1년 전인 1710년(숙종 36) 누각 정면에 걸린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 대액(大額)의 글씨도 썼다. '관동에서 제일가는 누각'에 어울리는 아주 힘차고 멋드러진 행서체(行書體) 운필이다. 


'죽서루', '관동제일루' 편액


'竹西樓' 현판 글씨는 대나무가 큰바람에 쓰러질 듯이 휘어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강원도(江原道)는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에서 각각 앞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고, 관동(關東)은 강원도에서도 대관령(大關嶺) 동쪽을 말한다. 


이성조의 자는 시중(時中)이다. 이진경(李眞卿)의 증손, 이지형(李枝馨)의 손자다. 아버지는 이세연(李世延), 어머니는 홍수관(洪受寬)의 딸이다. 이세운(李世運)에게 입양되었다. 이지형은 이지무의 친동생이고, 이세운은 이지무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지무는 이성조의 조부가 되겠다.  


1692년(숙종 18)에 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는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필선, 장령(掌令) 등을 거쳐 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냈다. 1700년(숙종 26)에 정언으로 경상감사 유집일(兪集一)에 대해 공적도 없이 책망만을 초래하였다고 탄핵하였다. 또 1701년 동궁(東宮, 세자)을 모해한 일로 윤순명(尹順命)을 추국하는 신사옥(辛巳獄)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참가하였는데, 당시의 추국 내용에 의혹이 제기됨으로써 당시 문사낭청들이었던 윤헌주(尹憲柱), 심택현(沈宅賢), 여필중(呂必重), 유언명(兪彦明) 등과 함께 오히려 형신(刑訊)을 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1710년 경 삼척부사로 부임했다가 1712년(숙종 38) 10월 사헌부 장령으로 옮겨갔다. 1717년(숙종 43) 승지가 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된 김장생(金長生)의 사당에 유고(諭告)하였고, 1725년(영조 1)에 사직(司直)이 되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사령(辭令)을 삼가며, 징토(懲討)를 엄격히 하고, 붕당(朋黨)을 타파하기 위해서 당론(黨論)을 의심하기보다는 현사(賢邪)를 잘 구별해야 한다는 5조목의 계(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뒤 병조 참의, 광주부 윤(廣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惟我八代祖五代祖曾祖考 三世五言節句 同一板揭竹西樓久矣 不肖孫潤國 來守鎭營 見樓上無所存 此必歲遠朽落 不勝悲歎 乃取家中所藏印本 改刻還揭 嗚呼 曾王考以肅宗辛卯作府伯 不肖孫潤國莅鎭 亦在此年 一甲纔回 改懸詩板事 若有不偶然者 謹書于下端 以識追感焉. 辛卯冬日不肖孫營將潤國謹書.[나의 8대조(이준민)와 5대조(이지무), 그리고 증조(이성조) 이 3대가 쓴 오언절구의 시가 같은 목판에 새겨져 죽서루에 걸려 있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불초 후손 윤국(潤國)이 삼척진(三陟鎭)의 영장(營將)으로 부임한 후 죽서루에 이 시판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반드시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썩어서 떨어진 것이겠지만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인쇄본을 가져다가 고쳐 새겨 다시 걸었다. 아! 슬프다. 증조부가 숙종 대 신묘년(辛卯年)에 삼척부사가 되었는데 불초 후손 윤국이 삼척진 영장으로 부임한 것도 역시 신묘년이니, 막 60년이 지나 시판을 고쳐 걸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에 아래쪽 끝에다 삼가 몇 자 적어 추모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1771년 겨울 어느 날 불초 후손 영장 윤국이 삼가 쓰다.]


이 글은 1771년(영조 47) 삼척진의 영장 이윤국이 쓴 것이다. 죽서루에 걸려 있던 이준민과 이지무, 이성조 등 선조들의 시판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집안에서 보관하던 인쇄본을 가져다가 다시 새겨서 걸었다는 내용이다. 영장은 조선 후기 속오군(束伍軍)의 최상부 단위인 영의 책임자다. 1627년(인조 5)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한 진영(鎭營)의 정3품 당상직 장관(將官)이다. 진장(鎭將)이라고도 한다. 강원도에는 3명의 영장이 있었다. 이윤국은 후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이성조의 세계는 이의협(李義浹)-이방수(李邦綏)-이윤국으로 이어진다. 


先祖孝翼公板韻之刑 弊許久矣 後孫來守本鎭 感慕而重修焉. 甲午七月日十二代孫營將晳鎬.[선조 효익공(이준민)의 시를 새겨놓은 목판의 형상이 낡은지 매우 오래되었다. 후손이 삼척진의 영장으로 부임한 후 감동하여 사모하는 마음에 중수하였다. 1834년 7월 어느 날 12대손 영장 석호(晳鎬)]


1834년(순조 34, 헌종 즉위년) 7월 삼척진의 영장 이석호가 죽서루에 걸린 12대 선조 이준민의 낡은 시판을 보고 감동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중수하였다는 글이다. 이준민 가문과 삼척의 인연이 매우 깊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