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안축의 '삼척서루팔영'에서 차운하여 '三陟竹西樓八詠稼亭韻(삼척죽서루팔영가정운)'을 지었다.
三陟竹西樓八詠稼亭韻(삼척죽서루팔영가정운) - 서거정
가정의 삼척 죽서루 팔영시에서 운을 따다
竹藏古寺(죽장고사) - 죽장사 옛 절(서거정)
摐摐萬竹翠成圍(창창만죽취성위) 얼기설기 뒤얽힌 대나무 푸른 울타리 이뤘는데
古寺荒凉歲月非(고사황량세월비) 죽장고사가 황량한 것은 세월 때문만은 아니리
日暮雲深不知處(일모운심)부지처) 해는 넘어가고 구름도 깊어 어디인지 모르지만
居僧何處化糧歸(거승하처화량귀) 주지 스님은 어디서 시주를 받아 돌아오시는고
죽장사는 서거정이 살았던 1400년대에도 이미 고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날은 저물고 구름도 깊어서 어디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데, 죽장사 주지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시주를 받아서 돌아오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암공청담(巖控淸潭) - 바위절벽 밑 맑은 못
潭如有量欲呑川(담여유량욕탄천) 제법 커다란 연못은 냇물을 삼킬 듯하여라
下視蒼茫上渺然(하시창망상묘연) 위에서 보면 퍼렇고 쳐다보면 또 묘연하네
知有蛟龍泓處隱(지유교룡홍처은) 알듯이 교룡은 깊숙한 곳에 숨었을 터인데
何曾一逐雨雲遷(하증일축우운천) 언제나 한 번 비구름을 좇아서 올라가려나
오십천 깊은 연못의 교룡 전설을 노래한 시다. '有量(유량)'은 '술을 잘 마시다, 한계가 있다, 주량(酒量)이 대단하다' 등의 뜻이 있다. '渺然(묘연)'은 '아득하다, 끝이 없다, 묘연하다' 등의 뜻이다. '蛟龍(교룡)'은 모양이 뱀과 같고 몸의 길이가 한 길이 넘으며 넓적한 네발이 있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의산촌사(依山村舍) - 산발치 시골집
豐年禾黍足村村(풍년화서족촌촌) 풍년 들어 쌀과 기장 마을마다 넘쳐나고
里閈相從不閉門(리한상종불폐문) 온 마을이 서로 친해 문도 닫지를 않누나
白酒黃鷄饒笑語(백주황계요소어) 닭 잡아 막걸리 마시며 담소를 즐기다가
歸來扶醉月黃昏(귀래부취월황혼) 취하여 황혼 달 아래 부축해서 돌아오네
와수목교(臥水木橋) - 물에 누운 외나무다리
過盡一灘又一灘(과진일탄우일탄) 한 여울을 건너가면 또 여울이 나오는데
誰敎獨木跨驚瀾(수교독목과경란) 누가 큰 강물에 외나무다리를 놓게 했나
此間容足無多地(차간용족무다지) 다리에는 간신히 발만 디딜 틈이 있거니
莫作尋常坦道看(막작심상탄도간) 평범한 탄탄대로로 여기면 큰 코 다치네
'獨木(독목)'은 독목교(獨木橋), 외나무다리다. '驚瀾(경란)'은 무섭게 밀려오는 큰 물결이다. '坦道(탄도)'는 '평탄한 길, 탄탄대로'를 말한다. '尋常(심상)'은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이다.
우배목동(牛背牧童) - 소를 타고 가는 목동
遠岫浮空翠似眉(원수부공취사미) 먼 봉우린 파란 눈썹처럼 공중에 떴는데
斜風細雨一蓑衣(사풍세우일사의) 비낀 바람 가랑비에 도롱이 하나 걸치고
平生榮辱都無管(평생영욕도무관) 평생에 영욕일랑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牛背如船穩跨歸(우배여선온과귀) 소 등을 배처럼 타고 평온하게 돌아오네
농두엽부(壟頭饁婦) - 밭머리로 들밥 내가는 여인
纔饁晨飧又午飧(재엽신손우오손) 이른 아침 내가자마자 또 낮밥 내가는데
野蔬山蕨雜中間(야소산궐잡중간) 들 나물과 산 고사리가 사이사이 섞였네
布衫半綻荊釵曲(포삼반탄형채곡) 반쯤 터진 베적삼에 행색 또한 초라한데
日日田頭解往還(일일전두해왕환) 날마다 밭머리에 오고 갈 줄만 아는구나
가난하여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농촌의 여인을 노래하고 있다. '荊釵(형채)'는 가시나무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인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은 가시나무 비녀에 베치마(布裙)만 입었다. 전하여 부인(婦人)의 검소한 복장을 의미한다.
임류수어(臨流數魚) - 물가에서 물고기를 헤아리다
一水澄澄鏡面空(일수징징경면공) 냇물이 맑고도 맑아 깨끗한 거울 같은데
游魚潑剌錦鬐紅(유어발랄금기홍) 지느러미 빨간 고기들 활기 있게 노니네
分明可數還無數(분명가수환무수) 분명 셀 만했는데 다시 세지는 못하겠고
前隊洋洋後隊同(전대양양후대동) 앞 떼도 많지만 뒤따르는 떼도 똑같구나
격장호승(隔墻呼僧) - 담 너머 스님을 부르다
山僧不出水雲窟(산승불출수운굴) 산승은 물구름 너머 토굴 나오지 않는데
俗客長昏簿領叢(속객장혼부령총) 속객은 번잡한 문서 더미에 푹 파묻혔네
喚得歸來坐相對(환득귀래좌상대) 산승 불러 서로 마주하여 앉아 있노라니
茶煙細細颺淸風(다연세세양청풍) 차 연기가 맑은 바람에 솔솔 날아오르네
서거정은 강릉 출신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다. 호는 사가정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그의 외조부가 이성계의 조선 왕조 창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다. 서익진(徐益進)의 증손, 호조전서(戶曹典書) 서의(徐義)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그의 자형(姉兄)이 최충(崔忠)의 증손 최항(崔恒)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동향인 서거정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하지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유혈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서거정이 명리(名利)를 좇자 대의명분과 절의(節義)를 중시한 김시습은 평생 그를 경멸했다고 한다. 삼척 관련 서거정의 시에는 '삼척죽서루팔영가정운' 말고도 삼척부사 전별시(餞別詩)가 있다. 이 시로 볼 때 그가 삼척의 죽서루와 죽장사에 다녀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서거정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뛰어난 문학 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료 문학의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일익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그의 저서에는 '역대연표(歷代年表)', 객관적 비평 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東人詩話)', 간추린 역사와 제도, 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筆苑雜記)', 설화와 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료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四佳集)' 등이 있다. 그는 또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 '동문선'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언해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선보인 '황화집(皇華集)'의 편찬으로 그 필명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서거정의 글씨가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죽서루
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 1436~1473)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次三陟竹西樓臥水木嬌(차삼척죽서루와수목교)'를 지었다. 운자는 灘(탄), 瀾(란), 看(간)으로 '삼척서루팔영' 중 '와수목교'에서 취했다.
次三陟竹西樓臥水木嬌(차삼척죽서루와수목교) - 삼척 죽서루 와수목교에서 차운하다(김수녕)
槎牙古木截前灘(차아고목절전탄) 늙은 나무 베어 앞 여울에 걸쳐놓았는데
步步寒心幾駭瀾(보보한심기해란) 걸을 때마다 몇 번이나 파도에 놀랐던가
平地風波人不識(평지풍파인불식) 사람들은 평지에 풍파 있는 줄도 모르고
到橋猶作畏途看(도교유작외도간) 이 다리에 이르러 두려운 길이라고 하네
사람들이 오십천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는 놀라면서도 인생살이 평지풍파가 더 무섭고 두려운 줄 모른다고 노래하고 있다. '槎牙(차아)'는 '모가 난 모양, 나뭇가지가 엇벤 듯이 모가 지게 얽힌 모양'이다. '寒心(한심)'은 '몹시 두려워 몸이 떨림, 기가 막힘'이다. '平地風波(평지풍파)'는 '바닥이 평평한 땅에 세찬 바람과 거센 물결이 인다.'는 뜻으로, 평온한 자리에서 뜻밖의 다툼이 일어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김수녕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수(頤叟)다. 그는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뛰어났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집현전 수찬에 이어 병조 좌랑, 헌납, 예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등 5도 체찰사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으로 세조의 변방정책을 수행했다. 1463년 집의에 이어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에 올랐다. 1468년 호조 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 참의에 이어 형조, 호조 참의를 거쳐 1470년(성종 원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겼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 참판과 호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1458년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 서거정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다.
1483년(성종 14)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은 안축의 '삼척서루팔영'과 표제는 같지만 운자는 전혀 다른 '三陟竹西樓八詠(삼척죽서루팔영)'을 지었다. 성현은 또 '竹西樓下潭捕松魚(죽서루하담포송어)'란 시도 지었다.
三陟竹西樓八詠(삼척죽서루팔영) - 성현
죽장고사(竹藏古寺) - 죽장사 옛절
玉立千竿雨洗靑(옥립천간우세청) 옥대처럼 선 대숲은 비에 씻겨 푸르른데
疏林缺處露朱櫺(소림결처로주령) 숲이 뚫린 곳으로 붉은 처마 바라보이네
冷冷金磬隨風遠(냉랭금경수풍원) 맑은 금경소리는 바람 타고 멀리 울리고
知是闍梨飯後經(지시사리반후경) 알건대 고승도 밥 먹은 뒤에 금강경일세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말이 있듯이 '금강경(金剛經)도 반후경(飯後經)'이라는 것을 노래한 시일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역시 먹고 사는 문제다.
'千竿(천간)'은 대나무 숲이다. '櫺(령)'은 '격자창(格字窓), 처마, 추녀, 난간(欄干, 欄杆)' 등의 뜻이 있다. '金磬(금경)'은 절의 종소리와 경판(磬板)의 소리다. '闍梨(사리)'는 모범이 되어 제자의 행위를 바로잡는 고승을 말한다.
암공청담(巖控淸潭) - 바위절벽 밑 맑은 못
畫屛低列抱山南(화병저열포산남) 낮게 펼친 그림병풍 산의 남쪽 품었는데
龍虎騰挐揷翠嵐(용호등나삽취람) 용과 호랑이 올라탄 듯 이내 피어오르네
巖罅雜花開爛漫(암하잡화개난만) 바위 갈라진 틈마다 온갖 꽃들 만발하고
滿空紅影落毿毿(만공홍영낙삼삼) 하늘 가득 붉은 그림자 삼삼히 떨어지네
죽서루와 오십천 주변의 봄풍경을 환상적으로 묘사한 시다. '翠嵐(취람)'은 멀리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이내다. '巖罅(암하)'는 바위가 갈라진 틈이다. '爛漫(난만)'은 '주고받는 의견이 충분히 많음, 만발함'의 뜻이다. '毿毿(삼삼)'은 털이 긴 모양 , 버들가지 같은 것이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모양이다.
의산촌사(依山村舍) - 산발치 시골집
修蟒緣山細徑分(수망연산세경분) 이무기 구불구불 산 오르듯 길은 갈라지고
松巓歸雀晚紛紛(송전귀작만분분) 해 지자 참새들 소나무 꼭대기로 돌아오네
竹籬茅宮炊煙起(죽리모궁취연기) 대 울타리 띠집엔 밥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散作溪頭一片雲(산작계두이편운) 시냇가엔 여기저기 한 조각 구름이 떠있네
'細徑(세경)'은 소로(小路)다. '修蟒(수망)'은 수사(修蛇)다. 옛날 제요(帝堯) 시대에 동정호(洞庭湖)에 살았던 큰 뱀으로 파사(巴蛇)라고도 한다. 검은 몸에 푸른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길이가 무려 1,800m였다. 코끼리를 통째로 삼킬 만큼 거대한 몸으로 파도를 일으켜서 어민들을 괴롭혔다. 영웅 예(羿)가 사람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수사를 죽였는데, 그 뼈가 산을 이뤘다. 그 산을 파능(巴陵)이라고 한다. '竹籬(죽리)'는 굵은 대를 결어서 만들거나 대를 심어서 이룬 울타리다. '茅宮(모궁)'은 임금의 검소한 생활을 이른다. 옛날 요순(堯舜)은 천자(天子)가 되어서도 흙섬돌은 세 등급만 쌓고(土階三等), 띠로 인 지붕은 끝을 베지 않았다(茅茨不翦)는 데서 온 말이다. '炊煙취연)'은 밥 지을 때 나는 연기다.
와수목교(臥水木橋) - 물에 누운 외나무다리
灘流淸淺臥長橋(탄류청천와장교) 얕고 맑은 여울 긴 외나무다리 누웠는데
穩似晴虹映絳霄(온사청홍영강소) 무지개 빛처럼 평온히 붉은 하늘 비치네
南去北來何日了(남거북래하일료) 남과 북으로 오가며 어느 날에나 끝날까
春風行客馬蹄驕(춘풍행객마제교) 봄바람 탄 나그네 말굽 소리 요란하구나
우배목동(牛背牧童) - 소를 타고 가는 목동
牧罷阿童牛倒騎(목파아동우도기) 소치기를 마친 목동은 소 거꾸로 탔는데
平林迢遞路逶迤(평림초체로위이) 평지 숲은 까마득하고 길은 아득히 머네
一聲長笛歸來晚(일성장적귀래만) 긴 피리 한바탕 불며 저물녘 돌아오는데
箬笠䉴衣帶雨披(약립양의대우피) 약립 쓰고 도롱이 입고 비막이도 둘렀네
'阿(아)'는 남을 부를 때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이나 이름 위에 붙이는 말이다. '迢遞(초체)'는 까마득한 모양이다. '逶迤(위이)'는 구불구불 멀리 이어진 모양, 멀고 긴 모양이다. '箬笠(약립)'은 대나무 껍질을 엮어서 만든 삿갓, 대삿갓이다. '䉴衣(양의)'는 도롱이다. '雨披(우피)'는 창문 위에 덧붙이는 비막이 차양, 비막이 망토, 판초다.
농두엽부(壟頭饁婦) - 밭머리로 들밥 내가는 여인
雨歇芳郊春事遲(우헐방교춘사지) 비 그친 봄 들판에 밭갈이는 늦어지는데
烹藜炊黍餉東菑(팽려취서향동치) 국을 끓이고 밥지어 동녘 밭으로 보내네
忽逢田畯來相迓(홀봉전준래상아) 우연히 농사 담당 관리 만나 돌아와서는
一笑欣然擧酒巵(일소흔연거주치) 흔쾌히 한바탕 웃으며 술잔 들어 마시네
이 시의 둘쨋 구는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積雨輞川莊作(장마철에 輞川의 별장에서 짓다)'의 둘쨋 구 '蒸藜炊黍餉東菑(국 끓이고 밥지어 동녘 밭에 보낸다)'를 인용한 것이다. '芳郊(방교)'는 향기로운 꽃이 만발한 봄의 들판이다. '春事(춘사)'는 봄 농사, 봄갈이다. '東菑(동치)'는 동쪽에 있는 묵정밭을 가리킨다. '餉東菑(향동치)'는 동쪽에 있는 논밭에 먹을 것을 보낸다는 뜻이다. '田畯(전준)'은 중국 주(周)나라 때에 농업을 장려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다.
임류수어(臨流數魚) - 물가에서 물고기를 헤아리다
隱隱鼇頭枕水濱(은은오두침수빈) 큰자라 머리 숨은 듯이 물가에 기댔는데
群魚無數漾金鱗(군어무수양금린) 수많은 물고기 떼 황금빛 비늘 출렁이네
日光下徹千尋鏡(일광하철천심경) 쏟아지는 햇빛이 천 길 거울까지 비쳐도
自在悠揚不怕人(자재유양불파인) 느긋하고 또 여유로와 사람 두렵지 않네
환하게 비치는 물 속에서도 여유롭고 편안하며, 태연자약하여 사람도 겁내지 않는 물고기들을 노래한 시다. '千尋(천심)'은 천 길이라는 뜻으로, 매우 높거나 깊음을 이르는 말이다. '自在(자재)'는 '마음대로 무엇이나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고 장애될 것이 없음, 편안하다, 안락하다'의 뜻이다. '悠揚(유양)'은 '태도(態度) 등이 듬직하여 급하지 않음, 태연자약한 모양'이다.
격장호승(隔墻呼僧) - 담 너머 스님을 부르다
蒼松無數鎖峯巒(창송무수쇄봉만) 수많은 푸른 솔 봉우리마다 이어져 있고
隔屋相呼衲子還(격옥상호납자환) 집 건너편 서로 부르니 스님이 돌아오네
坐對茶鐺終日話(좌대다당종일화) 차솥 대하고 앉아 하루 종일 대화하는데
却將身世付淸間(각장신세부청간) 당장이라도 내 신세 청간에 맡기고 싶네
자연에 묻혀 도를 닦으며 조용하고 한가로이 살아가는 납자를 부러워하는 시다. '峯巒(봉만)'은 산 꼭대기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이다. '衲子(납자)'는 납의를 입은 승려다. '茶鐺(다당)'은 찻물을 끓이는 솥, 청동이나 놋으로 만든 주전자다. '身世(신세)'는 일신상에 관련된 처지나 형편이다. '却將(각장)'은 '막 ~하려 하다, 당장 ~하다'의 뜻이다. '淸間(청간)'은 가슴이 맑고 여유로운 것이다. 청한(淸閑)과 뜻이 통한다.
竹西樓下潭捕松魚(죽서루하담포송어) - 죽서루 아래 소에서 송어를 잡다(성현)
大嶺以東多淸流(대령이동다청류) 대관령 동쪽 지방엔 맑은 냇물도 많은데
游魚潑潑乘秋稠(유어발발승추조) 팔딱팔딱 뛰는 고기들 가을이라 더 많네
遡流直上林壑幽(소류직상림학유) 물길 따라 곧장 깊은 계곡까지 올라가서
知進不退如蝸牛(지진부퇴여와우) 달팽이처럼 전진만 하고 후퇴할 줄 몰라
有時屛跡潛深湫(유시병적잠심추) 때때로 종적 감추고는 깊은 소에 숨어서
含唼苔藻依蛟虯(함삽태조의교규) 이끼 마름 콬콕 쪼며 교룡에게 의지하네
漁人雜踏回蘭舟(어인잡답회란주) 어부들 어수선하게 배 끌고 소에 들어가
凌波布網發棹歌(능파포망발도가) 물결 헤치고 그물 치며 뱃노래 불러대네
頳尾撥剌落沙洲(정미발랄락사주) 붉은 꼬리 펄떡 뛰며 모래톱에 떨어지자
赤手就拾穿其喉(적수취습천기후) 맨손으로 주워 모두 다 아가미를 꿰어서
長繩倒曳升瓊樓(장승도예승경루) 긴 노끈 거꾸로 끌고 누각으로 올라오니
銀鱗閃閃空中浮(은린섬섬공중부) 은빛 비늘 반짝반짝 공중에 떠돌고 있네
鹽虀十載恒飢調(염제십재항기조) 소금에 절인 채소로 십년 동안 굶주리다
暮年齒豁飫珍羞(모년치활어진수) 이빨 빠진 늙으막에 진수 실컷 먹는구려
爛烹腹膄膏且柔(란팽복수고차유) 푹 삶으니 살진 뱃살 기름지고 부드러워
含杯捫腹百無憂(함배문복백무우) 배 만지며 술마시니 온갖 근심 사라지고
江山勝地挽我留(강산승지만아류) 강과 산의 뛰어난 경치 나를 만류하누나
樂哉此樂誰能儔(낙재차락수능주) 즐거워라 이 낙을 그 무엇이 대신하리요
出門一笑天地秋(출문일소천지추.) 문을 나와 한번 웃으니 천지는 가을일세
죽서루 앞 오십천에서 송어를 잡아 끓인 매운탕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蛟虯(교규)는 교룡과 규룡(虯龍)이다. 규룡은 뿔이 양쪽에 나 있고 몸빛이 붉은 새끼 용이다. '鹽虀(염제)'는 소금에 절인 채소다. '捫腹(문복)'은 심신이 만족스러워 배를 쓰다듬는다는 뜻이다.
성현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허백당 외에도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국오(菊塢) 등이 있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이다. 명문가 출신 성현은 글씨를 잘 썼고 음률에도 밝았다.
성현은 서거정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의 관료 문학을 계승하면서 민간의 풍속을 읊거나 농민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노래하였다. 그는 62세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을 때 이 시기의 문풍을 주도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다양하다.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관리나 승려 등의 부패나 횡포를 꼬집는가 하면 그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실상을 묘사했다. 한편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에서의 즐거움과 유유자적한 심경을 그린 도가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성현은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라고 하여 고쳐 썼다. 유교적인 잣대를 들이대어 검열을 자행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고려가사의 원형을 잃게 된 것은 우리 문학사의 큰 손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현은 1504년에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문화, 제도, 풍속을 다룬 '용재총화(慵齋叢話)'를 남겼다. 그는 또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조선시대의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했다. 성현의 저서에는 '허백당집(虛白堂集)',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등도 있다. 성현은 죽은 뒤 수 개월만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하지만 그 뒤에 신원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문대(文戴)다.
1484년(성종 15) 10월 성현의 친구 이조 참판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가 지은 작품 가운데 '在三陟(재삼척)'이란 시가 있다. 운자가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인 것으로 보아 정추의 '차삼척죽서루운'에서 차운한 것으로 보인다.
在三陟(재삼척) - 삼척에서(홍귀달)
竹西西面碧江流(죽서서면벽강류) 죽서루 서쪽으로 푸른 강 오십천이 흘러
六月寒生古石樓(유월한생고석루) 유월에도 오래된 석루엔 찬 기운이 도네
當日未應黃鶴去(당일미응황학거) 바로 그날 응당 황학은 떠나지 않았던가
至今長有白雲留(지금장유백운류) 지금까지 흰 구름이 오래도 머물러 있네
江山但汎樽中蟻(강산단범준중의) 강산에서는 다만 술이나 마시며 지낼 뿐
身世還同海上鷗(신세환동해상구) 신세는 도리어 바다 위 갈매기와 같다네
更待月明天似水(갱대월명천사수) 달도 밝고 하늘도 물빛같은 때를 기다려
一聲長笛奏凉州(일성장적주양주) 긴 피리 한 소리로 양주곡을 연주하리라
달밤에 죽서루에서 양주곡(凉州曲)을 연주하고 싶다는 심정이 헤아려지는 시다. 양주곡은 당대(唐代)의 교방곡명(敎坊曲名)의 하나로 주로 기생들이 부르던 풍류곡이다. 교방의 풍류를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이 시는 홍귀달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중 삼척에 왔을 때 죽서루에 올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강원도 관찰사를 사직한 이듬해 8월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와 사선정(四仙亭)을 유람하고 시를 지었는데, 이때 죽서루에 올라 이 시를 지었을 수도 있다.
홍귀달의 본관은 부림(缶林), 자는 겸선(兼善), 호는 함허정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다. 1460년(세조 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공조 정랑에 승진하면서 예문관 응교를 겸하고, 이어 1469년(예종 1) 교리, 장령이 되니 조정의 글이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사예가 되었을 때 외직인 영천군수로 전출하게 되자, 그의 글재주를 아낀 대제학 서거정의 반대로 홍문관과 예문관 전한이 되었다. 이어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도승지로 있을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 폐비 모의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3년에는'국조오례의주(國朝五禮儀註)'를 개정하고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형조 참판에 이어 이조 참판으로 있던 1484년 가을에 가정대부(嘉靖大夫) 품계로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다. 1485년 가을에 강원도 관찰사에서 사직하고 돌아와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그 뒤 경주부 윤, 대사성, 지중추부사, 대제학, 대사헌, 우참찬, 이조 판서, 호조 판서 겸 동지경연춘추관사, 좌참찬 등을 두루 역임했다. 1498년(연산군 4) 열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하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따라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名鑑)'을 편찬하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손녀인 홍언국(洪彦國)의 딸을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해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홍귀달은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며, 성격이 강직해 부당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모두들 몸을 사릴 때 그는 태연히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홍귀달은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되었다.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과 의흥의 양산서원(陽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허백정문집(虛白亭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1488년(성종 19) 10월 24일 성현의 절친한 친구 청파(靑坡) 이육(李陸, 1438~1498)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순시차 삼척에 들른 이육은 죽서루에 올라 '竹西樓(죽서루)'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竹西樓(죽서루) - 이육
簾捲西山獨倚樓(렴권서산독의루) 발 걷고 누대에 기대 서산을 바라보는데
一江風雨爽如秋(일강풍우상여추) 강에는 비바람 부니 가을 같이 서늘하네
雄藩萬里濱東海(웅번만리빈동해) 웅대한 고을은 만리 동해 바닷가에 있고
勝地千年居上流(승지천년거상류) 승지는 천 년이나 오래 상류에 있었다네
富貴自知身外事(부귀자지신외사) 부귀는 스스로 몸 밖의 일이라고 아노니
安閑聊罷客中愁(안한료파객중수) 한가하게 먼 객지의 시름이나 달래 보네
詩人更似韓丞相(시인갱사한승상) 시인으로 한 승상 같은 사람이 있으리요
名立功成押白鷗(명립공성압백구) 공명을 이룬 다음 물새와 친하게 노니리
산 좋고 물 좋은 죽서루에 올라 한명회를 칭송하면서 자신도 공명을 이룬 다음 한명회처럼 갈매기와 동무가 되어 유유자적하리라 노래하고 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오른팔로 단종(端宗)과 안평대군(安平大君), 사육신(死六臣) 등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일등공신이다.
이육의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방옹(放翁), 호는 청파 또는 부휴자(浮休子)다. 증조부는 고려조에 밀직부사를 지낸 이강(李岡), 조부는 좌의정 이원(李原), 아버지는 돈녕부정 이지(李墀)다. 어머니는 포은 정몽주의 손자 감찰 정보(鄭保)의 딸이다. 부인은 교하현감 고령 박씨 수림(秀林)의 딸이다.
1459년(세조 5) 이육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3년간 지리산에 들어가 있었다. 1464년 세조의 온양행차(溫陽行次) 별시에서 장원하여 성균관 직강을 제수받았다. 1566년에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1568년에 문과중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예종 즉위 후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어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언사가 강직하여 여승 담정(湛淨)의 무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장예원 판결사, 성균관 대사성, 공조 참의를 지낸 뒤 1477년(성종 8)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어 경기도 관찰사,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공조 참의, 예조 참의, 형조 참판, 병조 참판을 지냈다. 1476년 명나라 사신의 접대도사로 파견되었으며, 1491년에는 정조사(正朝使), 1494년(성종 25) 12월에는 부고사(訃告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연산군 즉위 후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이육은 '성종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저서에는 '청파집(靑坡集)', '청파극담(靑坡劇談)',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등이 있다. 묘소는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에 있다.
'청파극담'에 한명회와 수양대군의 왼팔 소한당(所閑堂) 권람(權擥, 1416~1465)의 일화가 나온다. 한명회는 권람의 소개로 수양대군의 책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매우 친하게 지냈다.
권람은 절색(絶色)인 여종 종이(鍾伊)가 탐이 났으나 부인이 두려워 건드리지 못하고 한명회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명회는 괴화탕(槐花湯)을 몰래 다려 권람의 몸에 발라주었다. 전신이 누렇게 변하자 황달병(黃疸病)으로 죽게 되었다고 권람의 부인을 속였다. 그때 종이의 어미가 왔는데, 그녀는 바로 부인의 유모였다. 한명회는 권람의 병이 종이를 못 봐서 생긴 것이니, 부인 몰래 종이를 보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허락하라고 졸랐다. 동침하는 것도 아니고, 보기만 하면 된다고 어미를 속였다. 종이가 안심하고 방에 들어가 옷을 벗자 권람은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이육이 한명회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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