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은 안축의 '삼척서루팔영'에서 차운하여 '次三陟西樓八詠詩韻(차삼척서루팔영시운)'을 지었다. 이곡은 바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아버지다.
次三陟西樓八詠詩韻(차삼척서루팔영시운) - 삼척 서루 팔영시에서 차운하다(이곡)
竹藏古寺(죽장고사) - 죽장사 옛절
愛竹何須問徑圍(애죽하수문경위) 대를 사랑한다면 경위를 물을 필요 있으랴
此君稱謂未應非(차군칭위미응비) 차군이라 일컬은 말도 잘못됐다 못 하리라
招提翠密不知處(초제취밀부지처) 대숲이 우거져 절간은 있는 곳도 모르겠고
唯見斜陽僧獨歸(유견사양승독귀) 석양에 홀로 돌아가는 스님 모습만 보이네
'此君(차군)'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招提(초제)'는 관부(官府)에서 사액(賜額)한 절, 사원(寺院)의 다른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 catur-diśa의 음사로 사방(四方)이라 번역히며, 모든 수행승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방승(四方僧)을 초제승(招提僧), 사방승이 머무는 곳을 초제승방(招提僧房), 사방승의 시물(施物)을 초제승물(招提僧物)이라고 한다.
암공청담(巖控淸潭) - 바위절벽 밑 맑은 못
巖底成潭是大川(암저성담시대천) 절벽 밑 연못 이루니 예서부터 대천이라
巖頭直下視茫然(암두직하시망연) 바위 머리 바로 아래 보기에도 아슬아슬
州人欲取潭心月(주인욕취담심월) 고을사람들 연못에 비친 달 잡으려 하니
知有淳風不變遷(지유순풍불변천) 변치 않는 순박한 풍속 있음을 알겠노라
'潭心(담심)'은 '깊은 못의 중심(中心), 깊은 못의 바닥'을 말한다. '淳風(순풍)'은 순후(醇厚)한 풍속(風俗), 인정이 두터운 풍속이다.
의산촌사(依山村舍) - 산발치 시골집
江上靑山山下村(강상청산산하촌) 강 위에는 청산이요 청산 아래 마을이라
太平煙火不關門(태평연화불관문) 태평한 세월이라 문 빗장도 열려 있구나
居民豈識江山好(거민기식강산호) 백성들 이곳 강산이 좋은지 어찌 알리요
早起營生直到昏(조기영생직도혼) 일찍 들에 나가면 저물어야 돌아오는 걸
농사를 짓느라 죽서루의 절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는 농민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다. '太平煙火(태평연화)'는 태평연월(太平煙月)과 같은 말이다.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없이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가리킨다.
와수목교(臥水木橋) - 물에 누운 외나무다리
十里人家挾一灘(십리인가협일탄) 십리의 집들이 여울 하나를 끼고 있어서
往來橫木渡狂瀾(왕래횡목도광란) 독목교 오가며 세차게 이는 물결 건너네
宦途失脚危於此(환도실각위어차) 헛디디면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벼슬길
有足何曾却立看(유족하증각립간) 발이 있어 물러서서 바라볼 수나 있던가
오십천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바라보면서 벼슬길의 험난함을 노래하고 있다. 옛날에는 역적으로 몰리면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橫木(횡목)'은 '외나무다리, 독목교(獨木橋)'다. '狂瀾(광란)'은 세차고 어지럽게 일어나는 물결이다. '宦途(환도)'는 '벼슬길, 출세, 환로(宦路)'를 말한다. '失脚(실각)'은 '처지(處地)나 지위(地位)를 잃음, 발을 헛디딤, 실족(失足)' 등의 뜻이 있다. '却立(각립)'은 뒤로 물러섬이다.
우배목동(牛背牧童) - 소를 타고 가는 목동
渠家姊妹有娥眉(거가자매유아미) 저 집 자매는 눈썹이 아리따운 미인인데
夜績辛勤作嫁衣(야적신근작가의) 밤새 고되게 길쌈하여 시집갈 옷을 짓네
愛汝生來無念慮(애여생래무염려) 부러워라 그대 본디 아무런 근심도 없이
披蓑橫笛任牛歸(피사횡적임우귀) 도롱이 쓰고 피리 불며 소몰고 돌아오니
자매는 밤새 혼례복을 짓는데, 목동은 아무런 근심도 없이 천하태평이다. 자매와 목동은 무슨 관계일까? 자매는 목동에게 시집가는 것일까? '渠(거)'는 지시대명사 '저, 그'다. '嫁衣(가의)'는 여자의 혼례복이다. '辛勤(신근)'은 '고된 일을 맡아 부지런히 일함, 또는 고된 근무(勤務)'를 뜻한다.
농두엽부(壟頭饁婦) - 밭머리로 들밥 내가는 여인
相思寧復勉加飧(상사영부면가손)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찌 더 먹으라 권하리
婦餉夫耕了世間(부향부경료세간) 아내는 먹이고 남편 밭가는 건 세상일일세
以色事人多見棄(이색사인다견기) 미색으로 섬기다 보면 대부분 버림 받나니
顔華一去不曾還(안화일거불증환) 예쁜 얼굴도 시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얼굴이 예쁘고 아름답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시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도 한번 시들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얼굴만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는 버림받기 쉽다는 것이다.
임류수어(臨流數魚) - 물가에서 물고기를 헤아리다
長江如練寫秋空(장강여련사추공) 흰 비단 같은 장강에 내려앉은 가을하늘
俯瞰吟詩日已紅(부감음시일이홍) 굽어보며 시 읊으니 날은 어느새 저물녘
但道游魚淸可數(단도유어청가수) 물고기 셀 만큼 맑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區區屈指與癡同(구구굴지여치동) 구구히 하나 둘 센다면 바보나 마찬가지
'練(련)'은 흰 비단이다. '秋空(추공)'은 높고 맑게 갠 가을하늘이다. ' 俯瞰(부감)'은 '높은 곳에서 굽어보다. 내려다보다'의 뜻이다. '區區(구구)'는 '제각기 다름, 떳떳하지 못하고 구차(苟且)스러움, 잘고 용렬(庸劣)함'의 뜻이 있다.
격장호승(隔墻呼僧) - 담 너머 스님을 부르다
官舍僧房纔隔壁(관사승방재격벽) 관사와 승방은 겨우 바람벽 하나 사이인데
砌花窓竹共成叢(체화창죽공성총) 섬돌의 꽃과 창가의 대 모두 더부룩하구나
上樓無偶聊相喚(상루무우료상환) 누대에 오를 친구가 없어서 불렀을 뿐이지
非爲顚師有道風(비위전사유도풍) 태전 스님 같은 도풍이 있어서가 아니라오
'顚師(전사)'는 당나라 한유(韓愈)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을 말한다. 한유가 그와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 이야기가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실려 있다.
이곡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초명은 운백(芸白)이다. 한산 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다. 이곡은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곡은 일찌기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된 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고려 조정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명을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 고려에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가 편찬한 '편년강목'을 증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 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곡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 ~ 1374)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 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쇠망의 길을 걷던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假傳體文學)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가정집(稼亭集)'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다.
죽서루와 오십천 응벽담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의 유학자이자 문신인 제정(霽亭) 이달충(李達衷, ?~1385)도 안축의 '삼척서루팔영'에서 차운하여 '三陟八景(삼척팔경)'을 지었다.
三陟八景(삼척팔경) - 삼척의 팔경(이달충)
竹藏古寺(죽장고사) - 죽장사 옛절
森巖翠密幾重園(삼암취밀기중원) 숲속 바위 빽빽하니 동산을 얼마나 둘렀나
遠訝蒼雲近却非(원아창운근각비) 멀리선 푸른 구름 같은데 다가서니 아닐세
忽聽鳴鍾知寺在(홀청명종지사재) 문득 들리는 종소리에 절 있음을 알겠으니
不妨散策訪僧歸(부방산책방승귀) 편안한 걸음으로 스님 찾는 것도 무방하네
암공청담(巖控淸潭) - 바위절벽 밑 맑은 못
巖巖崖石禦奔川(암암애석어분천) 험한 벼랑의 바위들 내닫는 냇물 막으니
川却爲潭轉淼然(천각위담전묘연) 오십천은 오히려 연못 되어 넓어만 가네
魚得風雷潛變化(어득풍뢰잠변화) 물고기는 바람 우뢰 얻어 조금씩 변하나
人隨歲月幾推遷(인수세월기추천) 사람은 세월 따라 몇 번이나 옮겨갔을까
의산촌사(依山村舍) - 산발치 시골집
邨舍依山山繞邨(촌사의산산요촌) 촌집들은 산에 붙고 산은 마을 에워싸고
山前小徑接衡門(산전소경접형문) 산 앞 좁다란 오솔길 사립문에 닿아있네
波鳴石齒江流白(파명석치강류백) 돌틈에서 파도 울고 강 물결 반짝이는데
風過桑顚雨氣昏(풍과상전우기혼) 뽕나무가지에 바람 부니 비 기운 어둡네
'邨'은 '村(마을 촌)'과 같은 글자다. '衡門(형문)'은 두 기둥에다 한 개의 횡목을 질러 만든 허술한 대문을 말한다. '石齒(석치)'는 돌니, 삐죽삐죽 나온 모서리를 가리킨다.
와수목교(臥水木橋) - 물에 누운 외나무다리
此水眞爲惶恐灘(차수진위황공탄) 이 오십천은 참으로 두려운 여울이 되어서
緣橋步步輒生瀾(연교보보첩생란) 다리에 붙어 건너는 걸음마다 물결이 이네
從敎取次無心過(종교취차무심과) 가르침 따라 차례차례 무심히 지나게 해도
不用凌兢有意看(부용릉긍유의간) 두렵지만 않다면 유심히 살필 필요 없다네
'取次(취차)'는 '순차적으로, 창졸간, 경솔하게, 순서대로' 등의 뜻이 있다. '凌兢(능긍)'은 몹시 무섭거나 두려워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이다.
우배목동(牛背牧童) - 소를 타고 가는 목동
騎驢九陌每嚬眉(기려구맥매빈미) 두렁길 노새 탈 때마다 눈살 찌푸려지고
常恨緇塵化素衣(상한치진화소의) 세속 먼지에 흰 옷 더러워지니 한스럽네
爭似江睪牛背穩(쟁사강택오배온) 어찌 강가의 풀밭처럼 소 등짝이 편할까
漫尋邨徑水邊歸(만심촌경수변귀) 마을길 찾아서 물 가를 따라 돌아오누나
'陌(맥)'은 두둑, 길이다. '九陌(구맥)'은 한(漢)나라 서울 장안(長安)의 성 안에 있던 동서남북에 통하는 아홉 큰 거리다. '緇塵(치진)'은 지저분한 티끌이다. '嚬眉(빈미)'는 눈살을 찌푸림이다. '爭(쟁)'은 여기서 '어찌'의 뜻이다. '睪(택)'은 '못(澤), 물가, 향초(香草)의 이름' 등의 뜻이 있다.
농두엽부(壟頭饁婦) - 밭머리로 들밥 내가는 여인
夫婦辛勤不素飧(부부신근부소손) 부지런한 부부 끼니도 거른 채 일하다가
餉耕圍坐草萊間(향경위좌초래간) 새참 오자 무성한 풀숲에 빙 둘러앉았네
有心秋獲聊相語(유심추획료상어) 진심 바라는 추수 이야기 서로 나누는데
欠額年租庶可還(흠액년조서가환) 한 해 세금은 줄었지만 간신히 갚겠다네
한 해 농사를 지어도 세금으로 바치면 남는 것도 별로 없는 농민들의 참상이 나타나 있는 시다. '辛勤(신근)'은 '부지런하다, 근면하다'의 뜻이다. '草萊(초래)'는 '풀이 무성한 숲, 풀이 우거진 땅, 또는 황폐한 토지' 등의 뜻이 있다. '秋獲(추획)'은 추수(秋收)와 같은 말이다. '欠(흠)'은 '빚, 부채, 부족하다, 모자라다' 등의 뜻이 있다. '年租(연조)'는 한 해 동안에 내는 조세(租稅)다.
임류수어(臨流數魚) - 물가에서 물고기를 헤아리다
樓下澄潭浸碧空(루하징담침벽공) 죽서루 맑은 연못에 내려앉은 푸른 하늘
觀魚不覺夕陽紅(관어부각석양홍) 물고기 보느라 노을이 지는 것도 몰랐네
乍先乍後數難定(사선사후수난정) 잠깐 앞서고 또 뒤서니 헤아리기 어렵고
爲二爲三言未同(위이위삼언미동) 둘이다 셋이다 서로들 말도 맞지 않누나
격장호승(隔墻呼僧) - 담 너머 스님을 부르다
面壁禪僧參柏樹(면벽선승참백수) 면벽 스님은 좌선한 채 잣나무를 참하고
登樓客子對花叢(등루객자대화총) 누각에 오른 나그네는 꽃밭을 마주 보네
相呼共醉西江月(상호공취서강월) 서로 불러 서강의 달빛에 다함께 취하면
未要徒揮一塵風(미요도휘일진풍) 한바탕 세속 바람에 휘둘릴 필요 없노라
'參柏樹(참백수)'는 '뜰 앞의 잣나무를 참험(參驗)하다'의 뜻이다. 중국 당나라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저 유명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란 화두(話頭)를 제시했다. 한 승려가 '어떤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선사가 이르기를 '뜰 앞의 잣나무니라.'고 하였다. 승려가 다시 '화상께서는 경계로써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시옵소서.'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나는 경계로써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하였다. 승려가 다시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옵니까?' 하니 선사는 또 '뜰 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僧云 和尙 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僧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이 뭐꼬? 是什么?
이달충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지중(止中), 호는 이다. 증조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이핵(李翮), 할아버지는 밀직부사 이세기(李世基), 아버지는 첨의참리(僉議參理) 이천(李蒨), 어머니는 연창군 부인 박씨(延昌郡夫人朴氏)이다.
충숙왕(忠肅王, 1294~1339,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 때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를 역임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그 이듬해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 파면되었으나 1366년(공민왕 15)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석에서 신돈(辛旽)에게 주색을 일삼는다고 직언한 것이 화가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신돈이 죽은 뒤 계림부 윤(鷄林府尹)이 되었을 때 이달충은 시 '신돈' 2수를 지었다. 1385년(우왕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의 시문 수십 편이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에 '제정집(霽亭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5 (0) | 2018.09.26 |
---|---|
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4 (0) | 2018.09.22 |
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2 (1) | 2018.09.20 |
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1 (0) | 2018.09.19 |
[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10 - 양자징 필암서원에 배향되다 (0) | 2018.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