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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12

林 山 2018. 10. 3. 12:18

조선 영조 때 강원도 관찰사 도계(陶溪)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은 1748년(영조 24) 삼척부사 체천(棣泉) 오수채(吳遂采, 1692~1759)와 화원들을 대동하고 관동 지역을 돌아본 뒤 '관동십경도첩(關東十景圖帖)'을 제작했다. 죽서루도는 '관동십경도첩' 제8폭에 들어 있다. 이 화첩은 체재와 화풍 등 모든 면에서 1723년(경종 3)에 나온 '용만승유첩(龍湾勝遊帖)'을 연상시킨다. '관동십경도첩'에 실린 그림들은 대부분 풍수적인 구성을 토대로 표현되어 고식(古式)의 안견화풍(安堅畵風)을 보여 주며, 준법(峻法)과 수지법(樹枝法)도 17세기에 가까운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관동십경첩(關東十景帖)'의 죽서루도

 

이 죽서루도에 대해서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아주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1662년(현종 3)에 쓴 '죽서루기'에 '죽서루 경치는 동해와의 사이에 높은 산봉우리와 깍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우뚝 솟아 험준한데, 이내(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가 짙게 깔려 산봉우리가 아스라이 보인다. 큰 내가 동으로 흐르면서 구불구불 오십천이 된다.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아래에는 층층바위의 벼랑이 천길이나 되고 맑은 못과 긴 여울이 그 밑을 휘감아 돈다. 석양이면 푸른 물결이 반짝이며 바위에 부딪쳐 부서진다. 이곳의 빼어난 경치는 큰 바다의 볼거리와는 매우 다르다. 유람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제일가는 명승지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그림에는 허목이 '죽서루기'에서 묘사한 풍경이 그대로 담겼다. 죽서루를 둘러싸고 있는 험준한 백두대간과 구비구비 돌아 흐르는 오십천은 그대로 시원하고 장쾌한 파노라마다. 백두대간에는 구름이 걸려 있고, 석양은 온 천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다. 석양에 물든 오십천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절벽 위 세 구역에 관아와 누각이 있다. 가운데 죽서루를 중심으로 왼쪽의 ㄱ자 건물이 객사(客舍)인 진주관, 오른쪽의 작은 건물은 별채인 연근당이다. 연근당 근처에 용문이 있다. 바위절벽을 크게 감돌아 죽서루 아래에서 S자형으로 휘돌아가는 오십천은 지금 직강으로 바뀐 상태다. 

 

'관동십경도첩'은 1746년 조하망(曺夏望, 1682~1747)에게 청한 '와유첩(臥遊帖)'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동십경도첩'에 시를 쓴 문인은 김상성과 오수채, 조하망을 비롯해서 太白(생몰연대 미상), 조명교(曺命敎, 1687~1753), 김상익(金尙翼, 1699~1771), 조유명(曺迪命, 1685~1757), 이철보(李喆輔, 1691~1775) 등 모두 여덟 명이다. 

 

竹西樓(죽서루) - 김상성

 

第一名州勝十連(제일명주승십련) 조선의 첫째 가는 고을 승경도 많을씨고

銀章綰得好山川(은장관득호산천) 아름다운 글 좋은 산천경개 모두 읊었네

月明樓閣壺中地(월명누각호중지) 달 밝은 누각은 항아리 속의 별천지이고

花發帆檣鏡裏天(호발범장경리천) 꽃처럼 피어오른 돛대 거울 속 하늘일세

把酒白雲生席外(파주백운생석외) 술잔을 잡으니 흰구름 자리 밖에서 일고

題詩紅雨落簷前(제시홍우낙첨전) 옲조리니 붉은 꽃잎 처마 앞에 떨어지네

玉堂金馬渾餘事(옥당금마혼여사) 높은 벼슬에 올라도 모두 하찮은 일이니

無日如君不是仙(무일여군부시선) 곧 그대를 좇는다면 또한 신선이 아니랴

 

이 시는 '관동십경도첩' 가운데 죽서루도의 제시(題詩)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죽서루와 오십천의 아름다운 경치를 선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시다. 운자는 連(련), 川(천), 天(천), 前(전), 仙(선)이다.

 

김상성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사정(士精), 호는 도계 또는 손곡(損谷)이다. 김득원(金得元)의 증손, 김홍주(金弘柱)의 손자, 판서 김시환(金始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유정기(兪鼎基)의 딸이다. 당파는 소론당이었다.

 

김상성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어 13세 때 영평(永平)의 '금수정기(金水亭記)'를 지어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1723년(경종 3)에 진사가 되고, 그해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사서(司書)가 되었으며, 1727년(영조 3)에 병조 좌랑이 되었다. 이후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헌납(獻納), 응교(應敎)를 거쳐, 1734년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고, 이어 승지, 대사성을 거쳐 1744년 경상도 관찰사, 1745년 4월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46년 12월 24일에는 조정으로 올라가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형조 참판, 대사헌, 병조와 이조, 공조 참판을 차례로 지내하고, 1752년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예조 판서, 좌빈객(左賓客), 판의금부사를 거쳐, 1755년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소장(疏章)을 잘 지어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오수채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수(士受)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증손, 오달천(吳達天)의 손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소론 계열의 병조 판서 오도일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엄(鄭淹)의 딸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의 문인인지라 오수채도 소론당이었다. 

 

오수채는 음보로 주부(主簿)가 되고, 1735년(영조 1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 교리(校理), 이조 좌랑, 수찬, 검토관(檢討官), 부응교를 거쳐 1741년 승지에 이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748년 부제학, 1753년 대사성에 이어 예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754년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 동지경연사를 차례로 지냈으며, 이후 개성유수를 거쳐 1758년 대사헌에서 관직을 떠났다. 일찌기 이돈(李燉), 엄집(嚴緝)이 증수한 '송도지(松都誌)'를 1757년에 속지(續志) 1권을 증보하여 펴냈다.

 

이 무렵 연객(烟客) 허필(許佖, 1703∼1755)도 죽서루도를 그렸다. 허필의 그림은 매우 간략한 필치로 바위절벽과 죽서루를 그린 다음 원경으로 갈야산을 배치했다. 그림의 제영시 '竹西樓(죽서루)'를 지은 사람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홍귀달(洪貴達)이다. 원제는 '在三陟(재삼척)'인데 그림에는 '竹西樓'라 되어 있다.   

 

 

허필의 죽서루도

 

오십천을 생략함으로써 바위절벽이 매우 높은 것처럼 느껴진다. 죽서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작은 정자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이상향 내지 선경을 그리려고 한 듯하다.

 

허필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여정(汝正), 호는 연객 또는 초선(草禪), 구도(舊濤)다. 지평 허열(許悅)의 증손이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詩), 서(書), 화(畵)에 전념하여 당시에 삼절(三絶)로 불리었다. 삼절은 문인화가로서 시서화 세 가지를 겸비한 경우를 말한다. 중국의 시서화 삼절은 소식(蘇軾), 미불(米芾), 문징명(文徵明), 동기창(董其昌) 등이고, 조선의 시서화 삼절은 허필을 비롯해서 강희안(姜希顔), 윤두서(尹斗緖), 신잠(申潛), 김제(金禔), 이정(李霆),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 전기(田琦)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용휴(李用休)가 쓴 허필의 지명(誌銘)에는 청빈하고 소탈한 성격, 문학과 고예술품(古藝術品)을 사랑하는 태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서체(書體)에 능통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산수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으며, 산수화는 명대(明代) 심주(沈周)의 양식을 따랐다. 지금 전하는 그의 그림들은 명대 오파(吳派) 또는 미가(米家, 중국 송대의 문인화가 미불, 미우인 부자를 일컬음) 산수 양식의 특징을 보이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남종화(南宗畵)라고 할 수 있다. 남종화는 산수화를 의미하고, 문인화는 산수화 외에 사군자(四君子), 화조화(花鳥畵) 등 좀더 넓은 범위를 가리킨다. 허칠의 저서로는 '선사창수록(仙槎唱酬錄)'과 '연객유고(烟客遺稿)'가 있다.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창시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서화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도 죽서루도를 남겼다. 그는 죽서루도를 그린 다음 중국 북송(北宋) 대 시인 왕우칭(王禹稱, 954~1001)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를 병기했다. 

 

 

이광사의 죽서루도

 

 

이광사가 쓴 왕우칭(王禹稱)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글씨

 

 

黃州竹樓記(황주죽루기) - 황주의 죽루기(왕우칭)

 

黃岡之地多竹 大者如椽. 竹工破之 刳去其節 用代陶瓦. 比屋皆然 以其價廉而工省也. 子城西北隅 雉堞圮毁 蓁莽荒穢. 因作小樓二間 與月波樓通. 遠呑山光 平挹江瀨 幽闃遼夐 不可具狀. 夏宜急雨 有瀑布聲. 冬宜密雪 有碎玉聲. 宜鼓琴 琴調和暢. 宜詠詩 詩韻淸絶. 宜圍棋 子聲丁丁然. 宜投壺 矢聲錚錚然. 皆竹樓之所助也. 公退之暇 披鶴氅衣 戴華陽巾 手執周易一卷 焚香黙坐 消遣世慮. 江山之外 第見風帆沙鳥 煙雲竹樹而已. 待其酒力醒 茶煙歇 送夕陽 迎素月. 亦謫居之勝槪也. 彼齊雲落星 高則高矣 井幹麗譙 華則華矣. 止于貯妓女 藏歌舞 非騷人之事 吾所不取. 吾聞竹工 云竹之爲瓦僅十稔 若重覆之 得二十稔. 噫吾以至道乙未歲 自翰林出滁上 丙申移廣陵 丁酉又入西掖. 戊戌歲除日 有齊安之命 己亥閏三月到郡. 四年之間 奔走不暇. 未知明年又在何處 豈懼竹樓之易朽乎. 後之人與我同志 嗣而葺之 庶斯樓之不朽也. 咸平二年八月十五日記.[황강(黃岡, 지금의 후베이성 황강현) 지방에는 대나무가 많은데, 큰 것은 서까래만하다. 죽세공이 대나무를 쪼개 그 마디를 긁어내서 기와 대신으로 쓴다. 집집마다 그러하니 대나무가 값이 싸고 일하는 품이 덜 들기 때문이다. 황주성 본성 옆 작은 성 서북쪽 구석에는 성벽이 허물어져 잡초가 우거져 황량한 곳이 있었다. 거기에 두 칸짜리 작은 누대를 짓고 월파루(月波樓, 왕우칭이 세운 황강성 위쪽의 성루)와 통하게 했다. 멀리는 산빛을 삼키고 있는 듯하고, 잔잔한 강의 물결은 손으로 퍼낼 수 있을 듯 보이는데, 그윽하고 고요하며 멀고 아득한 조망은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다. 여름에는 소나기가 제격이어서, 그 소리가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소리 같다. 겨울이면 함박눈이 제격이어서, 마치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거문고를 타기에도 더없이 좋으니, 그 가락이 맑고 부드럽다. 시 읊기에도 좋으니 시의 운치가 비할 바 없이 맑다. 또 바둑 두기에도 좋으니 바둑돌 놓는 소리가 땅땅 울린다. 또 투호놀이 하기도 좋으니 화살소리가 쩡쩡 울린다. 이 모두 죽루가 흥취를 돋우기 때문이다. 공무가 끝나 퇴청한 뒤의 여가에는 학창의를 걸치고, 화양건을 쓰고서 손에는 '주역' 한 권을 들고 향을 태우며 조용히 앉아 있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 강산 저편으로는 바람을 안은 돛단배와 모래톱의 물새 떼,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구름과 대나무 숲만 보인다. 술이 깨 차 끓이는 연기가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며, 서산으로 지는 해를 보내고 동산에 떠오르는 밝은 달을 맞는다. 이 또한 귀양살이하는 사람의 더없는 즐거움이다. 저 제운루(齊雲樓, 당나라 조공왕이 오현에 새운 누각)나 낙성루(落星樓,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이 금릉에 세운 누각)는 높고, 정간루(井幹樓, 한무제가 건장궁에 세운 누각)나 위무제가 세웠다는 여초루(삼국시대 위나라 조조가 세운 누각)는 화려하다. 그러나 기녀들을 모아 노래하고 춤추게 하였을 뿐이니, 이런 것은 시인이 할 일이 아니므로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죽세공이 '대나무로 만든 기와는 겨우 십 년 가지만 만약 겹으로 덮으면 이십 년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아! 나는 송태종 지도 원년 을미년에 한림원에서 저주자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인 병신년에 광릉자사로 옮겨가고, 또 그 다음 해인 정유년에는 다시 중서성에 들어갔다. 그 다음 해인 무술년 섣달 그믐에 제안(齊安, 황주의 옛 이름)으로 가라는 칙명을 받았으며, 그 다음 해인 기해년 윤삼월에는 이 고을 황주에 이르렀다. 4년 동안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여가가 없었다. 내년이면 또 어디로 갈지 모르니 어찌 죽루의 지붕이 쉬이 썩는 것을 두려워하리요?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나와 같은 뜻을 가져 계속 지붕을 이어준다면 아마도 이 죽루가 썩지 않을 것이다. 함평 2년 8월 보름에 쓰다.]

 

'황주죽루기'는 중국 북송 때 후베이성(湖北省) 황주(黃州)로 좌천된 왕우칭이 그곳의 태수로 있으면서, 황주의 죽루(竹樓)에 대해서 쓴 기문(記文)이다. 그런데, 이광사는 무슨 연유로 죽서루도 옆에 왕우칭의 '황주죽루기'를 썼을까? 그림을 보면 죽서루에 학창의를 입고 화양건을 쓴 신선풍의 두 노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광사의 죽서루도에 왕우칭의 '황주죽루기'보다 더 어울리는 글은 없었을 것이다.  

 

이광사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 또는 수북(壽北)이다.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 李曔)의 왕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으로 호조 판서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의 현손(玄孫), 신임사화 때 소론으로 노론 축출에 가담했던 예조 판서 이진검(李眞儉)의 아들이다. 이광사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론 세력이 실각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1755년(영조 31) 50세의 이광사는 소론 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되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광사는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배웠다.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그는 특히 산수와 인물, 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畫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畫法)을 토대로 소박한 문인화풍을 고수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行書四言詩)', 1746년(영조 22)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臨摸)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高僧看畫圖)', '산수도' 등이 있다. 저서에는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이 있다.

 

1751년(영조 27) 7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중인(中人)의 무덤이 있는 산을 빼앗았다 하여 삼척에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채제공은 '獨登竹西樓(독등죽서루)', '月夜(월야)', '竹西樓歌(죽서루가)'를 지었다. 당시 삼척부사는 

옥호자(玉壺子) 정하언(

鄭夏彦, 1702∼1769)이었다. 

 

獨登竹西樓書懷(독등죽서루서회) - 홀로 죽서루에 올라 회포를 적다(채제공)

 

臨水登山新送歸(임수등산신송귀) 강가 산에 올라 새해 맞이하고 돌아오는데

竆途棲息欲誰依(궁도서식용수의) 궁하게 살고 있으니 누군가 의지하고 싶네

西樓寂寂孤臣在(서루적적고신재) 쓸쓸한 서루엔 버림받은 외로운 신하 있고

芳草茫茫北信稀(방초망망북신희) 방초는 아득한데 북쪽에서 오는 소식 없네

無恙蓮舟閒夕照(무양연주한석조) 평온한 연잎배 저녁 햇빛 한가로이 비치고

關心篁嶺黯春霏(관심황령암춘비) 황령에 마음 두니 흩날리는 봄비 구슬퍼라

歌姬悄向鈴齋道(가희초향영재도) 가희가 수령 집무실 향해 말하며 근심하니

 

往往殘碁落舊幃(왕왕잔기낙구위) 때때로 남은 바둑돌 묵은 향낭에 떨어지네

 

유배지 삼척의 죽서루에 올라 자신의 곤궁한 처지와 한양에서 자신의 유배가 풀리는 소식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심정을 읊은 시다. '臨水登山(임수등산)'은 등산임수(登山臨水)와 같은 말이다. 친지를 떠나보내는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때 쓰는 표현이다. '초사(楚辭)' <구변(九辯)>의 '登山臨水送將歸(산에 올라 멀리 강물을 바라보며 돌아가는 길손을 전송하네.)'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新送(신송)'은 영신송구(迎新送旧)의 준말로 '새 사람을 맞고 정든 사람을 보내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다'의 뜻이다. '無恙(무양)'은 '병이 없음, 몸에 병이나 탈이 없다'의 뜻이다. 무고(無故)로도 쓴다. 양(恙)이란 양충(恙蟲)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 마음을 파먹는 벌레를 가리킨다. '篁嶺(황령)'은 중국 장시성(江西省)의 옛 마을이다. '鈴齋(영재)'는 곧 영각(鈴閣)으로, 수령의 집무실, 지방장관이 관할하는 지역을 말한다. '

殘碁(잔기)'는 '다 두지 않은 바둑, 두다 남은 바둑'이다.  

   

 

月夜(월야) - 달밤(채제공)

 

仙區不賦楚人騷(선구불부초인소) 신선 세상에선 초사 이소를 읊지 않는데

春日逢君氣岸豪(춘일봉군기안호) 봄날 그대를 만나니 장한 기상 호기롭네

沙渚雪消初變柳(사저설소초변류) 물가 눈 녹자 버들가지 변하기 시작하고

海門風暖不驚濤(해문풍난불경도) 해협 바람 따뜻하니 큰 파도도 잠잠하네

三千大界西樓勝(삼천대계서루승) 삼천 대천 세계 중에서도 서루가 뛰어나

第一今年好月高(제일금년호월고) 올해 최고로 아름다운 달이 떠오를 걸세

珍重明湖佳約在(진중명호가약재) 파양호 같은 호수 아름다운 약속 있으니

 

畫船料理載官醪(화선요리재관료) 곱게 단청한 배에 요리와 관주를 싣게나

 

아름다운 달이 떠오르는 봄날 응벽담에 배를 띄우고 술잔치를 벌이자고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는 '同江陵任使君步登竹西樓, 拈韻共賦, 時, 玉壺公病未能偕, 約明日泛舟樓下.[강릉의 임 사군과 함께 죽서루에 걸어서 올라가 운을 따서 함께 읊었다. 이때 옥호공(정하언)의 병 때문에 함께 할 수 없어 다음날 죽서루 밑에서 배를 띄우기로 약속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채제공은 삼척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부사

 정하언과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죽서루 바위절벽에는 '吏隱鄭夏彦美仲樹杜株桂檀’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 우측 상단에는 채제공의 이름도 보인다.

 

'楚人騷(초인소)'는 전국시대 때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경(離騷經)'을 말한다. 굴원이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겼으나 임금이 간사한 자의 참소를 듣고 멀리하므로 이를 지었다고 한다. 슬프고 애닯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氣岸(기안)'은 기개와 같은 말이다. '三千大界(삼천대계)'는 무량무변한 세계, 광대무변한 세계를 말한다. '明湖(명호)'는 맑은 호수, 여산 옆의 파양호(鄱陽湖)를 말한다. '官醪(관료)'는 나라에서 녹으로 내린 술이다.

 

竹西樓歌送鄭玉壺還京(죽서루가송정옥호환경) - 채제공

한양으로 돌아가는 정 옥호를 송별하며 죽서루에서 노래하다

 

君是竹樓主(군시죽루주) 정하언 그대는 바로 이 죽서루의 주인이고

我是竹樓客(아시죽루객) 귀양살이 온 나는 이 죽서루의 손님이로세

 

主人餉客以竹樓(주인향객이죽루) 주인은 죽루에서 손에게 술과 밥 먹이고

客遷如歸樓上宿(객천여귀루상숙) 나그네는 자리 바꿔 누각 위에서 잠자네

樓上無論客與主(누상무론객여주) 누각 위에서도 주인과 손님 따지지 않고

往日之遊眞自得(왕일지유진자득) 지나간 날의 유람 정말 대단히 만족했네

東方日出便相呼(동방일출변상호) 동쪽에서 해 떠오르면 문득 서로 불러서

君以籃輿我桃竹(군이남여아도죽) 그대는 남여 타고 나는 대지팡이 짚으니

樓下澄江練影開(누하징강연영개) 누각 아래 강물에 익숙한 그림자 열리네

紋窓繡闥無纖埃(문창수달무섬애) 무늬와 수로 꾸민 창문엔 티끌조차 없고

席上烟茶美人擎(석상연다미인경) 모인 자리엔 미인이 담배를 받들고 있네

氷紈霧縠薰香來(빙환무각훈향래) 희고 얇은 비단에서 날리는 훈훈한 향기

半酣君詩已揮筆(반감군시이휘필) 거나해진 그대는 붓 휘둘러서 시를 쓰고

我亦豪吟倚樽罍(아역호음의준뢰) 나 또한 술잔에 기대 호기롭게 노래하네

有時爭棋閧如怒(유시쟁기홍여노) 바둑으로 대결할 때는 화난 듯 다투는데

聲氣當塲兩不摧(성기당장양불최) 목소리와 숨을 당장 서로 누르지 못하네

太乙畫舫泛中流(태을화방범중류) 천상의 멋진 놀잇배는 물 가운데 떠있고

相與拍肩無嫌猜(상여박견무혐시) 서로 어깨 쳐도 싫어하고 시기하지 않네

君將跌宕黑自首(군장질탕흑자수) 그대 흔쾌히 흑돌 들고 자수하려 하는데

我忘罪纍親墨綬(아망죄루친묵수) 나는 오품관과 친하게 지낸 죄를 잊었네

大魚能解時聽曲(대어능해시청곡) 큰 물고기는 노랫가락 알아듣는 것 같고

漚鳥同看小垂手(구조동간소수수) 갈매기는 소수수 춤사위를 보는 것 같네

人生此樂方未央(인생차락방미앙) 이런 삶의 즐거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如何西入終南堂(여하서입종남당) 어찌 서쪽서 시작 남당에서 끝난다 할까

惟有竹樓同我在(유유죽루동아재) 오로지 여기 죽루만이 나와 같이 있어서

卧聽江聲愁夜長(와청강성수야장) 누워 듣는 물소리에 수심도 깊어가는 밤

東華不可以久住(동화불가이구주) 한양의 조정에는 오래 머무를 수 없는데

紅塵撲面紛如霧(홍진박면분여무) 안개처럼 분분 날려 얼굴에 부딪는 홍진

使君無負竹樓約(사군무부죽루약) 사군은 부디 죽루의 약속 저버리지 말게

誰其證者雙白鷺(수기증자쌍백로) 그 누가 증인이리요 한 쌍의 갈매기라네

 

삼척부사직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정하언을 위한 송별시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정하언과 채제공은 죽서루에 자주 올라 시주를 나누거나 바둑도 두고, 뱃놀이도 하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시다.    

  

'桃竹(도죽)'은 대의 일종인데, 일명 도생(桃笙)이라고도 한다. '氷紈(빙환)'은 얼음같이 희고 매끄러운 비단이다. '霧縠(무곡)'은 가볍고 엷은 비단이다. '半酣(반감)'은 술에 반쯤 취한 것이다. '揮筆(휘필)'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樽罍(준뢰)'는 제사 때 술을 담는 그릇이다. '太乙(태을)'은 중국 철학에서 천지만물이 나고 이루어진 근원이다. '畫舫(화방)'은 아름답게 장식한 놀잇배다. '嫌猜(혐시)'는 싫어하여 꺼리거나 시기하고 의심함이다. '跌宕(질탕)'은 신이 나서 정도가 지나치게 흥에 겨워 노는 것이다. '墨綬(묵수)'는 동인묵수(銅印墨綬)의 준말이다. 고을 수령이 차는 까만 인끈을 말한다. 5품관이 찼다. '漚鳥(구조)'는 갈매기다. 漚는 鷗와 통한다. '小垂手(소수수)'는 전통 궁중무용에서 한 팔씩 들어 뒤로 뿌리는 춤사위다. '未央(미앙)'은 '아직 반에도 달하지 못하다, 아직 끝나지 않다'의 뜻이다. '東華(동화)'는 중국의 중앙 관서가 동화문(東華門), 즉 도성의 동문(東門) 안에 있었던 데서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송나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가 처음 임명되면 동화문으로 들어가 좌승천문(左承天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조선의 방물(方物)도 동화문을 통해서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紅塵(홍진)'은 번거롭고 어지러운 속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撲面(박면)'은 '얼굴에 확 스쳐오다, 얼굴을 덮어 오다'의 뜻이다. 
 
채제공의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다. 호는 번암 또는 번옹(樊翁)이다.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 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했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채제공은 정조의 탕평책을 상징하는 핵심 인물이다. 그는 소수파인 남인 정파, 특히 청남(淸南, 南人淸流)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을 상소했고, 사족 우위 및 적서의 구별을 엄격히 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또한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는 등 제도의 운영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다.
 
채제공은 청남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과 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그는 정범조(丁範祖), 이헌경(李獻慶), 신광수(申光洙), 정재원(丁載遠), 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했다. 최헌중(崔獻中),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은 그의 정치적 계승자들이다. 채제공의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와 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으로 이어진다. 그는 학문의 적통(嫡統)을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서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저서에는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 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과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799년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53년(영조 29) 4월 삼척부사로 부임한 율포(栗浦) 이협(李, 1696~1769)은 재임 중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樓(루), 流(류), 洲(주), 頭(두), 休(휴)다. 
 

竹西樓(죽서루) - 이협

 

七分仙子之高樓(칠분선자지고루) 동헌인 칠분당 신선의 높은 누대 죽서루

五十川來樓下流(오십천래루하류) 오십천 다가와 누각 바로 아래로 흐르네

龍臥千年留大壑(용와천년류대학) 용은 천년이나 누워 큰 골짜기 머무르고

鳳棲當日有長洲(봉서당일유장주) 봉황새 깃든 당일엔 긴 모래톱에 있었네

何須羽化遊天外(하수우화유천외) 어찌하면 신선 되어 하늘 밖에서 놀까나

且岸烏紗坐樓頭(차안오사좌루두) 강 언덕 벼슬아치 난간머리에 앉아 있네

一點塵氣看不得(일점진기간부득) 속세의 기운 보려도 조금도 뵈지 않으니

車君分別早宜休(차군분별조의휴) 차군께서 분별 있어 일찍 벼슬 버려셨지

 

우뚝 속은 죽서루와 유유히 흐르는 오십천을 바라보면서 신선의 경지에서 노닐고 싶다는 심경을 읊은 시다. '七分(칠분)'은 삼척부사가 공무를 보던 동헌(東軒)의 이름이다. '車君(차군)'은 벼슬에서 물러나 삼척에 와 머물던 차운로를 가리키는 듯하다. 차운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삼척에 와 머물 때 '竹西樓次韻贈主守(죽서루차운증주수)'란 시를 지었다. 이 시의 경련(頸聯)에 '江山獨領官居畔, 風月長留几案前(벼슬에서 물러나 강호 자연 홀로 즐기니, 청풍명월이 오래 의궤 안석 앞에 머무네)'이라고 했다.     

 

이협은 삼척부사로 있으면서 동헌 뒤에 각(閣)을 짓고 홍서대(紅犀帶, 민속자료 2호)를 봉안했다. 삼척 김씨 종중에 보관되어 있던 홍서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穆祖)의 외가가 있던 곳이라고 하여 1393년(태조 2) 삼척현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그 기념으로 하사한 것이다. 

 

1769년(영조 45)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군평(君平) 홍명한(洪名漢, 1724∼1774)은 삼척을 순시하다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오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운자는 春(춘), 親(친), 人(인)이다. 

 

竹西樓(죽서루) - 홍명한

 

十年重到屬三春(십년중도속삼춘) 십 년만에 다시 오니 꽃피는 삼월인데

層壁廻川故故親(층벽회천고고친) 층암절벽 도는 물굽이 모두 옛 벗일세

陟州白鷺如相語(척주백로여상어) 삼척 백로 서로 반겨 지껄이는 듯하고

倘記仙樓舊主人(당기선루구주인) 아직도 신선 누각 옛 주인 기억하는가

 

삼척부사로 왔다가 떠난 지 10년만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다시 오니 죽서루와 오십천, 물새들이 옛 벗인 양 반갑다고 노래한 시다. 신선 누각의 옛 주인은 바로 홍명한 자신을 가리킨다. 

 

홍명한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평이다. 참판 홍만종(洪萬鍾)의 증손, 승지 홍중하(洪重夏)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홍경보(洪景輔), 어머니는 심계량(沈季良)의 딸이다.

 

홍명한은 음사(陰仕) 벼슬길에 나아가 금부도사로 재직 중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임명된 뒤 정언, 수찬, 교리 등을 거쳐, 1758년에는 승지가 되었다. 1759년 삼척부사에 이어 1761년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간, 승지 등을 거쳐, 176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흉년으로 금주령이 내렸는데 부민(府民)이 이를 위반한 책임으로 파직당하였다가 곧 대사헌으로 복직되었으며,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관비를 절약하고 언로를 넓히며 능력있는 인재를 널리 구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1768년 승지, 형조 참판, 도승지를 거쳐 1769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당시 울릉도는 금령지로서 들어갈 수 없음에도 홍명한 집안의 무신인 삼척영장 홍우보(洪雨輔)가 몰래 사람들을 모아 수십 근의 인삼을 채취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홍명한은 강원도 관찰사에서 체차(遞差)되었다. 1771년 홍명한은 형조 판서를 지낸 뒤 개성유수가 되었다. 그는 영조의 문예진흥책의 하나인 편찬사업에 관여하여 1770년 감인당상(監印堂上)으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간행 책임을 맡았다.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935번지에 '府使洪 公名漢去思碑(부사홍공명한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거사비(去思碑)는 송덕비(頌德碑)와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