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정조 24) 영동지방(嶺東地方)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관보(寬甫) 조홍진(趙弘鎭, 1743∼?)은 삼척을 암행하다가 죽서루에 올라 처마에 걸려 있는 그의 조부 조석명의 시에서 차운한 제영 칠언율시 한 수를 지었다. 운자는 樓(루), 州(주), 浮(부), 愁(수), 遊(유)다.
竹西樓(죽서루) - 조홍진
管領名區屬依樓(관령명구속의루) 명승 맡아 주관하다 누대에 기대 섰는데
淸緣兩世在東州(청연양세재동주) 인연 많아 양대에 걸쳐 영동을 다스리네
七三分界仙居定(칠삼분계선거정) 속계를 떠나 조용한 신선의 거처 정하고
五十回流妓舫浮(오십회류기방부) 오십 번 굽이도는 물결에 놀잇배 띄웠네
玉節敢承宣化蹟(옥절감승선화적) 옥부절 받아 감히 교화의 발자취를 잇고
繡衣曾續察眉愁(수의회속찰미수) 어사또 벼슬 이어 눈가의 근심 살폈다네
春風謾擁笙歌解(춘풍만옹생가해) 봄바람 끼고 늦도록 풍악 소리 흩어지니
奇事傳家詑勝遊(기사전가이승유) 기이한 일과 놀이 집안에 전해 자랑하리
1714년(숙종 40)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조홍진의 조부 조석명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한 수를 남긴 바 있다. 조부에 이어 2대에 걸쳐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 나왔으니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조홍진의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조대수(趙大壽)의 증손, 조석명의 손자, 조재검(趙載儉)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한배주(韓配周)의 딸이다. 조재운(趙載運)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영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조홍진은 1783년(정조 7)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그해 원춘도(原春道, 지금의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염찰 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홍문관의 수찬과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인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그해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왕의 소명을 어긴 죄로 산청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785년 지제교(知製敎), 이듬해 홍문관 교리가 되어 수령들의 명예를 구하는 폐단을 금해야 한다는 소를 올려 이를 바로잡았다. 이어 교리로 대각(臺閣, 사헌부·사간원)의 정고(呈告, 소송장을 올림)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또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가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김우진(金宇鎭)을 탄핵했으며, 곧 이어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1788년 오익환(吳翼煥)의 옥사(獄事)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당했지만 1793년 조정의 경사로 죄가 풀려 시종(侍從)에 임명되었다. 행부사직(行副司直) 이병정(李秉鼎)의 탄핵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교리에 이어 수찬이 되어서는 그의 상소를 왕에게 전달하지 않은 대간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그 자신이 파직되었다. 1799년 승지가 되었고, 1800년 서유문(徐有聞)과 연명으로 죄인들의 사면에 대한 부당성을 상소하였다. 그해 영동지방에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다시 승지를 맡았다.
1804년(순조 4) 3월 12일 관동위유어사(關東慰諭御史)로 강원도에 파견되어 삼척에 들른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죽서루에 올라 제영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다. 위유어사는 지방의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중대한 환란이 있을 때에 왕명으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는 임시직 관원이다.
竹西樓(죽서루) - 홍석주
人間大觀盡滄溟(인간대관진창명) 인간 세상에 큰 볼거리 창해에서 다하고
目極扶桑萬里靑(목극부상만리청) 눈길이 저 부상에 이르니 끝없이 푸르네
却恐心神徒汗漫(각공심신도한만) 되려 마음과 정신 다 허황해질까 두려워
翛然歛作一溪亭(소연염작일계정) 모든 것 거두고 시냇가에 정자를 세웠네
큰 바다 수평선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허황해질까 두려워서 오십천변에 죽서루를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시다. '滄溟(창명)'은 넓고 큰 바다다. '扶桑(부상)'은 동쪽 바다의 해 뜨는 곳에 있다는 전설상의 신성한 나무를 말한다. 수평선, 일본을 가리키기도 한다. '汗漫(한만)'은 '공허하다, 물이 아득히 넓은 모양, 허황하다'의 뜻이다.
홍석주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이다.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우부승지 홍인모(洪仁謨)이다. 그는 약관에 모시(毛詩), 경례(經禮), 자사(子史), 육예백가(六藝百家)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했다. 학통상으로는 노론의 김창협(金昌協)과 김원행(金元行)을 이어받았다. 김창협과 김원행은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인물동성론(人物性同論)인 낙론(洛論)을 이끈 학자들이다. 홍석주는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중국 고증학(考證學)의 제창자이자 실학(實學)의 개척자 고염무(雇炎武)의 학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실학, 무실(務實)을 중심으로 한 박학을 강조했으나, 고증학에서 의리를 뒤로 미루는 것은 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주자학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해 춘당대 문과에 급제해 사옹원 직장을 제수받았다. 1797년 승정원 주서, 1799년 초계문신(抄啓文臣), 이듬해 검열, 1802년(순조2) 정언, 교리, 이듬해 사은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804년 3월 12일 강원감사 신헌조(申獻朝)가 '이 달 3일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 산불이 크게 번졌는데, 삼척과 강릉, 양양(襄陽), 간성(杆城), 고성(高城), 통천(通川) 등 바닷가 여섯 고을에서 민가(民家) 2천 6백여 호, 원우(院宇) 3곳, 사찰 6곳, 창사(倉舍) 1곳, 각종 곡식 6백 석, 배 12척, 염분(鹽盆) 27좌(坐)가 불에 타고 타죽은 사람이 61명이었다.'고 보고하자, 순조는 교리 홍석주를 위유어사로 강원도에 파견했다. 관동지방은 예로부터 큰 산불이 종종 발생했다. 1666년 2월 29일에도 강원도 영동에 큰 바람이 불고, 산불이 일어나 삼척은 2백 51호, 강릉은 1백 27호, 양양은 38호가 불에 탔고, 불에 타 죽은 사람 4명, 익사자 5명이 발생했다. 1672년 4월 5일에도 원양도(강원도)의 양양, 강릉, 삼척, 울진 등 네 고을에 산불이 일어나 거세게 번지는 바람에 하루 사이에 타버린 민가가 1천 9백여 채나 되었고, 강릉의 우계창(羽溪倉)과 삼척의 군기고가 모조리 불에 탔으며, 사망한 백성이 65명이었다. 1680년 3월 7일 통천 등 다섯 고을에 광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산불이 인가에 번져 불에 탄 집이 5백 36호에 이르렀다. 1697년 2월 8일에도 강릉부(江陵府)에 바람이 크게 불고 산불이 갑자기 일어나 대관령 아래 살고 있는 백성들의 집 65호가 불에 탔다.
홍석주는 이어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 1806년 동부승지, 1807년 이조 참의를 거쳐, 1808년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 참판이 되었다. 1810년에는 형조 참판, 부제학, 이듬해 한성부 좌윤, 1812년 대사간을 지낸 뒤 1815년 충청감사로 나갔다. 1819년 이조 참판, 1822년 전라감사, 1825년 좌부빈객,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1827년 형조 판서, 이듬해 좌우참찬, 1829년 예조와 공조 판서, 이듬해 병조 판서, 대사헌에 이어 1831년 사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832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1834년 이조 판서, 좌의정 겸 영경연사(領經筵事) 감춘추관사 세손부(世孫傅)를 제수받은 뒤 1842년에 세상을 떠났다.
홍석주의 저서에는 '연천집(淵泉集)', '학해(學海)',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동사세가(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다. 편서로는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상예회수(象藝薈粹)', '풍산세고(豊山世稿)', '대기지의(戴記志疑)', '마방통휘(麻方統彙)', '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순조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심공저(沈公著, 1741~?)는 1804년(순조 4) 7월 하순 이이의 시 '죽서루차운'에서 차운하여 '敬次栗谷先生板上韻(경차율곡선생판상운)'이란 시를 지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심공저의 '경차율곡선생판상운' 편액
敬次栗谷先生板上韻(경차율곡선생판상운) - 삼가 율곡 선생의 판상시에서 차운하다(심공저)
罨畵溪山起一樓(엄화계산기일루) 아름다운 강산에 누각 하나 우뚝 솟았는데
蒼凉洞氣四時秋(창량동기사시추) 서늘한 골짜기 기운 사시사철 가을 같구나
削成環壁參差聳(삭성환벽참치용) 깎아지른 듯한 환벽은 들쑥날쑥 솟아 있고
控引長川曲折流(공인장천곡절류) 잡아늘인 듯한 긴 냇물 구불구불 흘러가네
數牒題來無箇事(수첩제래무개사) 몇 장의 공문서 가져왔지만 별일도 아니니
百篇吟過寫閑愁(백편음과사한수) 노래하며 지내는 건 근심 없애기 위함일세
蓮舟未與仙人遌(연주미여선인악) 연밥 따는 일엽편주는 신선 만나지 못하여
江海幽期問白鷗(강해유기문백구) 강과 바다의 비밀한 기약 백구에게 묻누나
甲子孟秋下澣知府沈公著(갑자맹추하한지부심공저) 1804년 음력 7월 하순 부사 심공저
'罨畵(엄화)'는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한 그림이다. '參差(참치)'는 '길고 짧고 들쭉날쭉하여 같지 않음, 가지런하지 못하다, 들쑥날쑥하다' 등의 뜻이 있다. '環壁(환벽)'은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벽이다. '牒(첩)'은 '서찰, 계보(系譜), 공문서, 송사(訟辭)' 등의 뜻이 있다.
'蓮舟(연주)'는 태을연엽주(太乙蓮葉舟)를 가리킨다. 응벽헌의 서쪽 모퉁이에 나 있는 돌길을 따라 오십천으로 내려서면 태을연엽주라는 이름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배 이름은 중국 북송의 화가 이공린(李公隣)이 그린 '태일진인도(太一眞人圖)'의 화제에서 유래한다. 이 그림은 진인(眞人)이 연꽃 속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당시 최고의 문인 한구(韓駒)가 '태일진인연엽주(太一眞人蓮葉舟)'라는 화제를 써주었다. 하늘에는 갈매기들이 날고 맑은 강물에는 은어들이 노니는 것을 바라보면서 연꽃 모양의 태을연엽주를 타고 오십천 강물을 오르내리면 신선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甲子(갑자)'는 1804년, '孟秋(맹추)'는 음력 7월, '下澣(하한)'은 하순이다. 심공저는 1741년생이니 첫 번째 갑자년은 3세 때인 1744년, 두 번째 갑자년은 63세 때인 1804년이었다.
심공저의 자는 경회(景晦),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심공저는 1771년(영조 47) 진사시에 급제한 뒤 삼척부사와 봉화현감을 지냈다. 1804년(순조 4) 삼척부사로 있을 당시 심공저는 불에 타버린 삼척의 영은사(靈隱寺)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증수를 지원하였다.
경회(景晦)의 '회(晦)'는 '어둡다, 어리석다'의 뜻이다. 부족하다는 것이며 겸손의 의미가 있다. '경(景)'은 '밝다, 환하다'의 뜻이다. 두 글자를 합치면 어둡고 어리석은 것을 밝게 한다는 뜻이 되겠다. 주자학(朱子學)의 집대성자 주희(朱熹)의 자는 원회(元晦), 호는 회암(晦庵)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자신의 호에 '회(晦)'자나 '암(庵)'자를 쓴 것은 주희를 존숭하고 본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수양철학의 대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자신의 호를 회재(晦齋)라 짓고, 주희처럼 은둔한 채 홀로 학문에만 전념했다. 조선 중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성리학자 경회당(景晦堂) 정구(鄭逑, 1543∼1620)는 자신의 글에서 '회(晦)'자를 주희의 호와 자에서 따왔음을 밝혔다. 주자를 사모하고 그의 학문을 이어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였던 우암(尤庵) 송시열은 조선의 성리학자 중 가장 열렬한 주희 추종자였다. 그의 호 우암은 주희의 고향인 중국 저장성(浙江省) 우계(尤溪)의 '우(尤)'와 주희의 호 회암(晦庵)의 '암(庵)'을 따서 지은 것이다. 호로 볼 때 심공저도 주희의 추종자였을 가능성이 많다.
사문(士文) 박종정(朴宗正, 1755~?)은 삼척에 유람하러 왔다가 죽서루에 올라 제영 칠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그가 죽서루에 다녀간 때는 1808년(순조 9) 강릉부사로 내려와 있었을 때로 보인다. 운자는 樓(루), 悠(유), 遊(유), 浮(부), 流(류)다.
竹西樓(죽서루) - 박종정
五十灣頭百尺樓(오십만두백척루) 오십천 굽이진 물가 백척이나 솟은 누각
畵欄西望白雲悠(화란서망백운유) 멋진 난간에서 서쪽 보니 흰구름 두둥실
千秋不廢晴川句(천추불폐청천구) 천년 지나도록 맑은 물 싯구 그대로인데
四月還爲赤壁遊(사월환위적벽유) 사월에 또 다시 적벽에서 놀이를 즐기네
彩鷁備將歌管在(채익비장가관재) 화려한 배에 기생과 악기 한가득 싣고서
輕鷗偏拂酒筵浮(경구편불주연부) 날쌘 갈매기 스치는 술자리 물위에 떴네
蒼凉暝色烏紗岸(창량명색오사안) 서늘한 땅거미는 어둠 속 물가에 지는데
分付梢工更溯流(분부초공갱소류) 사공에 명하여 다시 물결 거슬러 오르네
죽서루 앞 응벽담에서 뱃놀이를 하는 흥취를 노래한 시다. '彩鷁(채익)'은 뱃놀이에 사용하는 호화로운 배를 말한다. 익(鷁)은 백로와 비슷한 큰 물새로 그 새가 풍파를 잘 견딘다 하여 그 모양을 뱃머리에 장식한다. '暝色(명색)'은 '모색(暮色), 황혼의 하늘빛'이다. '烏紗(오사)'는 검은 깁이다. '分付(분부)'는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梢工(초공)'은 사공(沙工)이라고도 하며, 배를 부리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박종정의 본관은 반남(潘南), 거주지는 한성(京)이었다. 증조부는 박필의(朴弼義), 조부는 박사철(朴師喆), 아버지는 박이원(朴履源)이다. 외조부(外祖父)는 이현구(李顯耉), 처부(妻父)는 이석기(李錫祺)다.
박종정은 1778년(정조 2)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갑과(甲科) 장원을 한 이후 지평, 정언, 흥양현감, 부교리 등을 지냈다. 1806년(순조 6) 사헌부 대사헌에 이어 1807년(순조 7)에는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다가 1808년(순조 9) 강릉부사로 나갔다. 1812년(순조 12)에 동지부사에 임명되었다.
'순조실록' 15권, 순조 12년 1월 1일 5번째 기사에 '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진하(陳賀) 때 대거(對擧)한 승지 박종정(朴宗正)과 김상휴(金相休)에게는 가의대부(嘉義大夫), 통례(通禮) 유하원(柳河源)과 한익진(韓翼鎭)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치사(致詞)를 받든 관원 이하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813년(순조 13) 11월 권태응(權太應, 1750~1816)이 삼척부사로 부임했다. 권태응은 죽서루에 올라 제영 칠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권태응
八景齊名以一樓(팔경제명이일루) 관동 팔경 이 누각으로 이름 높아졌으니
春宜登覽亦宜秋(춘의등람역의추) 봄에 올라와 바라보기 좋고 가을도 좋네
撑楹危壁千尋立(탱영위벽천심립) 기둥 받친 높다란 절벽은 천길로 서있고
抱檻淸川幾曲流(포함청천기곡류) 맑은 내는 죽서루 안고 구비구비 흐르네
遊客經過勞夢想(유객경과노몽상) 나그네 이곳 스쳐간 뒤 꿈속에도 그리워
騷人今古放詩愁(소인금고방시수) 시인들 예나 지금이나 노래로 근심 푸네
此來無復機心在(차래무부기심재) 이곳에 오니 기회를 엿보는 마음 사라져
烟渚斜陽友白鷗(연저사양우백구) 안개 낀 지녁 물가에서 갈매기와 벗하네
죽서루에 오니 부귀공명을 이루려는 마음도 사라지고 강호 자연에서 물새들과 벗하게 된다는 내용의 시다. '機心(기심)'은 기회를 보고 움직이는 마음이다.
권태응은 추증 참판 권약성(權若性)의 아들이다. 형은 권대응(權大應), 아우는 권비응(權丕應)이다. 권태응은 (1783, 정조 7) 증광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다. 그는 삼척부사로 내려왔다가 1816년(순조 16) 9월 1일 임지에서 죽었다.
양부 권태응을 따라 삼척에 왔던 경백(景伯) 권중청(權中淸, 1778~?)도 죽서루에 올라 제영 오언율시와 칠언율시 각각 한 수를 남겼다. 칠언율시의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권중청
日上竹西樓(일상죽서루) 날이면 날마다 죽서루에 오르니
笻痕遍沒苔(공흔편몰태) 지팡이 흔적에 이끼도 없어졌네
幽深天作地(유심천작지) 천지신명이 만드신 심원한 대지
危絶壁爲臺(위절벽위대) 깎아지른 절벽에 누각 만들었네
急灘魚龍吼(급탄어룡후) 급물살 여울엔 어룡이 울부짖고
淸風雁鶩迴(청풍안목회) 시원한 바람에 철새들 돌아오네
頭陀山影近(두타산영근) 두타산 그림자 가까이 다가오고
時送白雲來(시송백운래) 때때로 흰구름도 보내 오는구나
悉直遺墟敞一樓(실직유허창일루) 옛날 실직국의 터에 높다란 누각 있는데
畵閣西畔竹千秋(화각서반죽천추) 단청 누각 서쪽 가의 대나무는 오래됐네
觸雲老石威如怒(촉운노석위여노) 까마득한 바위들은 화난 듯이 솟아 있고
近水靑山勢欲流(근수청산세욕류) 물 가의 푸른 산세는 용솟음칠 듯하여라
朝往暮歸渾是興(조왕모귀혼시흥)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일 모두 즐거운데
昔聞今上更何愁(석문금상갱하수) 옛부터 듣다 지금 오르니 무얼 근심하랴
陶然醉倒無塵事(도연취도무진사) 흥겹게 취해 쓰러지니 속세의 일도 없고
踈雨晴天夢白鷗(소우청천몽백구) 비 그은 맑디맑은 하늘에 갈매기 꿈꾸네
권중청은 권대응의 둘째 아들인데, 아들이 없는 중부(仲父) 권태응(權太應)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1805년(순조 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 13) 증광시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냈다.
1815년(순조 15) 남이익(南履翼, 1757~?)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는 순시차 삼척에 들렀을 때 죽서루에 올라 제영 오언율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竹西樓(죽서루) - 남이익
高樓浮欲動(고루부욕동) 높은 누대 물 위에 흔들리는데
坐臥似乘船(좌와사승선) 앉았다 누우니 배를 탄 듯하네
境闢三千界(경벽삼천계) 여기는 불법의 세계가 열린 곳
山回五十川(산회오십천) 오십천은 산 구비 돌아 흐르네
火城星拱落(화성성공락) 불 켜진 마을에는 별이 기울고
金壁月初懸(금벽월초현) 황금빛 절벽에는 달이 막 떴네
太守其誰也(태수기수야) 삼척 고을 태수는 그 누구던가
羡君平地仙(이군평지선) 땅 위의 신선 그대가 부럽다네
달밤에 죽서루에 올라 오십천의 선경을 바라보면서 삼척부사를 부러워하는 내용의 시다. 삼척을 불법의 세계가 열린 곳, 삼척부사를 땅 위의 신선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남이익은 1789년(정조 13) 식년시에 문과에 급제하고, 1794년(정조 18) 지평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14년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1815년(순조 15)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 1827년 병조 판서를 지낸 뒤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사정(士靖) 이희연(李羲淵, 1755~1819)은 관동을 유람하다가 삼척의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오언율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그가 삼척에 온 때는 1800년대 초반으로 짐작된다.
竹西樓(죽서루) - 이희연
行到名區下(행도명구하) 가다 승지 이르러 말에서 내리니
松陰映綠苔(송음영록태) 솔 그림자는 푸른 이끼에 덮였네
策驢初入洞(책려초입동) 당나귀 몰아 골짜기 찾아 들어와
扶杖更登臺(부장갱등대) 지팡이 짚고 다시 누대에 올랐네
古壁千尋逈(고벽천심형) 오래된 절벽 천 길이나 아득한데
淸川百折回(청천백절회) 맑은 물은 수없이 휘돌아 흐르네
仙人應在此(선인응재차) 신선이 응당 이곳에 있을 터이니
笙鶴箇中來(생학개중래) 학 타고 내려와 어딘가에 있겠지
이희연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도정 이운영(李運永)이다.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2년 혜릉참봉에 이어 직장, 주부, 첨정 등을 거쳐 1808년(순조 8) 옥천군수를 지낸 뒤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이르렀다. 1819년 광주목사 재임 중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검소한 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관직에 있을 때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회갑에 부인이 명주옷 한 벌을 지어주니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 1764∼1848)는 조상의 발자취를 찾아 삼척에 들렀다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오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그가 삼척에 온 때는 18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竹西樓(죽서루) - 강필효
城角蒼岩起竹樓(성각창암기죽루) 성 모퉁이 푸른 바위에 세워진 죽서루
晴川還作一名區(청천환작일명구) 맑은 시냇물 둘러 이름난 승지 되었네
吾祖當年臨棨戟(오조당년임계극) 우리 선조 당시에 벼슬 받고 오르시어
至今詩篇揭楣頭(지금시편게미두) 지으신 시편 지금도 처마에 걸려 있네
강필효가 명승지 죽서루에 올라 처마에 걸려 있는 11대조 강징의 시를 발견하고 감격해하는 시다. 강징은 1506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죽서루를 찾아 '次(차)'를 지은 바 있었다. 강징의 6대손 강재숙과 강재항의 발문, 17대손 강신소의 발문까지 있었으니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棨戟(계극)'은 고대에 관리가 행차할 때 쓰이던, 적흑색의 비단으로 싼 나무창이다. 지방관이 행차할 때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의장용 창이다.
강필효의 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강세환(姜世煥),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 또는 법은(法隱)이다. 경북 봉화군 법전(法田) 출신이다. 아버지는 강식(姜植)이며, 어머니는 진성 이씨(眞城李氏) 이중연(李重延)의 딸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의 제자 강찬(姜酇)의 후손으로 윤광소(尹光紹)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강필효의 세계는 강식-강곽(姜漷)-강최일(姜最一)-강재주(姜再周)-강찬-강각(姜恪)-강윤조(姜胤祖)-강덕서(姜德瑞)-강억(姜億)-강징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강필효는 강징의 11대손, 강찬의 6대손이 된다.
강필효는 1800년(정조 24) 집 동쪽에 중국 창주(滄洲)에 있는 주희(朱熹)의 경의재(敬義齋)를 모방하여 서실(書室)을 짓고,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성혼(成渾)의 '우계서실의(牛溪書室儀)'를 써서 걸고, 윤증의 '획일도(畵一圖)'를 준칙(準則)으로 삼아 운영하였다. 그가 서실을 열자 사방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803년(순조 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842년(헌종 8)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 도사로 옮겼으며, 이듬해 통정대부로 승진,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등 성리서를 깊이 연구한 뒤 그는 천명(天命)은 이(理)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논하였다. 또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에 있어서 이선기후(理先氣後), 기선이후(氣先理後)가 모두 가능하며, 이기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는 이기론을 전개하였다. 저술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 '근사속록(近思續錄)', '소계회화록(素溪會話錄)', '석척록(夕惕錄)', '사유록(四遊錄)', '경서고이(經書考異)' 등이 있다. 문집에 '해은유고(海隱遺稿)'가 있다.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관호(觀湖) 엄치욱(嚴致郁, ?~?)은 남쪽에서 바라본 절벽 위의 누각을 당겨서 그린 죽서루도를 그렸다. 높고 웅장한 절벽 위에 세워진 죽서루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절벽의 정점에는 죽서루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고, 그 아래쪽으로 관아와 민가 등이 배치되어 있다.
엄치욱(?~?)의 '죽서루'(종이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죽서루 절벽 일대와 일엽편주를 제외한 주변 풍경들은 과감하게 생략했고, 하단은 마치 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실경이 아니라 선경을 그린 듯한 느낌이 든다. 나무 등을 묘사한 필치에서 김홍도의 화풍이 강하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821년(순조 21) 당시 삼척부사로 있던 이헌규(李憲圭)는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칠언절구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영담(影潭)이 중건한 운흥사(현 신흥사)는 1821년 이헌규가 중창하면서 신흥사(新興寺)로 개칭되었다.
竹西樓(죽서루) - 이헌규
一世人稱一邑宰(일세인칭일읍재)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한 고을 수령인데
腰金跨鶴上楊州(요금과학상양주) 금인을 차고 학에 올라 양주로 올라가네
金鶴從來皆外物(금학종래개외물) 금인과 선학은 예로부터 내 몸밖의 물건
竹西明月滿高樓(죽서명월만고루) 죽서루 밝은 달 높은 누각에 가득하구나
'跨鶴上楊州(과학상양주)'는 '腰纏十萬貫, 騎鶴上楊州'(淵鑑類函 卷420 鳥部3 鶴3)에서 유래한 구절이다. 네 사람이 각자 자기의 소원을 말했다. 한 사람은 양주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한 사람은 많은 재물을 얻기를 원하고, 한 사람은 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싶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 사람이 '나는 허리에 십만 관(貫)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서 양주로 날아가고 싶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이헌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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