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인 1921년(대한민국 임시정부 3) 4월 이학규(李鶴圭, 1852년 1월 8일 ~ ?)는 '죽서루중수기(竹西樓重修記)'를 지었다. 이학규는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쓴 기문(記文)을 인용한 뒤 삼척군수 이범기(李範綺)가 죽서루를 중수한 배경과 과정을 적었다.
이학규의 '죽서루중수기' 편액
竹西樓重修記(죽서루중수기) - 이학규
陟州之竹西樓 關東名樓也 古今之來游關東者 必先數八景 而此樓居八景之一 非爲結構之壯輪奐之美而然也 盖因其地之勝 西樓之名 亦著也 乖崖金守溫之記曰 北據大嶺 西臨巨川 川雲嶺月之間 其萬千之勝狀 槩可推知也 樓在千仞絶壁之上 俯臨五十川 水滙爲潭 徹底澄淸 游泳之魚 依欄而可數 儘絶景也 樓之刱造年代 文獻無徵 未得其詳 而年深歲久 上雨傍風 遂成摧棟敗椽 過者彷徨 州人咨嗟 李君範綺 熟鍊之才 被銓選之擧 出宰是郡 莅任未幾 百廢俱興 州之人士 告於李君曰 自明府下車之後 治成制定 百度修擧 而惟玆竹西樓依舊壞敗 盍於此時修繕而保存之 李君曰 保存勝蹟 雖知應行之事 而現今民力不敷 遽興土木 非所當爲 況此州之擅名 以江山之勝狀也 江山固自在 則一樓之興廢 何有也 州人事曰 玆樓之於玆州 猶人之有目 假使西施之美 若無盻兮之目 其可謂之佳人乎 玆州而無玆樓 殆同西施之無目 大爲江山之疵累 迨此民安無事之日 重修名樓 不亦可乎 李君 重違民情 乃許之 於是 各鳩略干金 仍舊結構 加以修繕 不日而工告訖 巍然畵閣 臨于川上 江山動色 草木增彩 仍說白日場於斯樓 與多士觴詠而落之 馳走千里 要余爲之記 余惟物之興廢 固有時也 此樓之壞敗 非一朝一夕 而今之州人士 前之宰是州者 非一人 而夫所謂重修者 寥寥無聞矣 今李君與民相孚 能行前人未能爲之事 而民情益呪 此樓之重新 似有待於今日矣 李君莅纔屬耳 能與民孚 非但此樓之重新 得見於今日 此州民風之重新 又當得見于他日也.[삼척 죽서루는 관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동에 놀러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팔경을 말하는데, 이 누각이 팔경의 하나로 들어간 것은 건물의 구조가 웅장하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대체로 누각이 위치한 지형의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죽서루의 명성도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괴애 김수온이 쓴 기문에 이르기를 '북쪽으로는 큰 산봉우리에 의지하고 서쪽으로는 큰 시내를 마주 대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시내 위에 떠있는 구름과 산봉우리에 걸려 있는 달 사이에 그 수많은 아름다운 경치는 대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누각이 아주 높은 절벽 위에 있어 오십천을 내려다보면 물이 돌아나가면서 소를 이루는데 물 속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를 난간에 기대서서도 헤아릴 수 있으니 매우 아름다운 경치이다. 누각을 창건한 연대는 찾아볼 문헌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지붕은 비를 맞고 벽은 바람을 받아 결국 마룻대가 부러지고 서까래가 썩게 되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방황하고 고을 주민들은 탄식해 왔다. 그런데 이범기가 숙련된 재주로 관리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는 삼척군수로 왔는데,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퇴한 것이 모두 다시 흥성해졌다. 이에 고을 인사들이 이군에게 이야기하기를 '군수님이 부임한 후부터 정치가 이루어지고 법도가 바로잡혀 온갖 제도가 나아져 훌륭하게 되었습니다만 오직 이 죽서루만 옛날 모습 그대로 무너져 허물어진 채 있으니 어찌 지금 수리하여 보존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군이 말하기를 '훌륭한 고적을 보존하는 것이 비록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은 알지만 지금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데 갑자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 고을이 크게 이름이 난 것은 강산의 뛰어난 경치 때문이다. 강산이 본래 모습 그대로 있으니 한 누각의 흥망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을 인사들이 말하기를 '이 고을에 이 누각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서시(西施)와 같은 미인이라도 만약 흘겨보는 아름다운 눈이 없다면 또한 미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고을에 이 누각이 없다면 서시가 눈이 없는 것과 같아 강산에 크게 흠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편안하고 아무 일이 없는 날을 틈타서 이 이름난 누각을 중수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군이 거듭 민심과 어긋난다고 하면서도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옛 모습대로 건물을 짓고 수리까지 하였는데 며칠 안되어 완공하였다. 우뚝 높이 솟은 아름다운 누각이 냇가에 자리잡고 있으니 강산의 경치가 변한 것 같고 초목의 빛깔이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이에 죽서루에서 백일장을 열어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시가를 읊으면서 준공식을 거행하였는데, 천리를 달려와 나에게 기문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만물의 흥망성쇠는 진실로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누각이 무너져 허물어진 것은 근래에 있은 것이 아니고 또 지금 고을의 인사와 이전에 이 고을 지방관을 지낸 자가 많은데도 중수 이야기는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지금 이군이 백성들과 더불어 서로 믿고 이전의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서 민심이 더욱더 희망적이 되었으니, 이 누각의 중수는 오늘을 기다린 것 같다. 이군의 지위는 겨우 하급 관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니 단지 이 누각의 중수를 오늘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고을 백성들의 습속이 거듭 새로워짐을 또한 마땅히 후일에 볼 수 있을 것이다.]
歲白鷄陽正之月 上澣 洪陽 李鶴圭記[신유년(1921) 음력 4월 상순 홍양(洪陽) 이학규(李鶴圭) 쓰다.]
이학규는 삼척군수 이범기에게 '군'이라 칭하고, 하급 관리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학규가 조선총독부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白鷄(백계)'는 신유년(辛酉年), 즉 1921년에 해당한다. '陽正之月(양정지월)'은 정양지월(正陽之月)과 같은 말로, 음력 4월이다. '上澣(상한)'은 상순(上旬)과 같은 말이다. 한 달 가운데 1일에서 10일까지다. '洪陽(홍양)'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洪城)의 옛 이름이다.
이학규(李鶴圭, 1852년 1월 8일 ~ ?)는 조선의 문신,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관료다. 총독부 관료 이석희(李錫僖)의 아버지이다. 이학규는 1883년 1월 규장각 검서관에 이어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임명되었으며, 1885년 1월 형조 정랑, 1890년 2월 내무부 주사로 각각 임명되었다. 1890년 3월 주차일본공사관 서기관, 1893년 8월 21일 교섭아문 주사, 1893년 12월 9일 총무사 주사, 1894년 6월 23일 외무아문 참의를 차례로 지냈다. 1894년 7월 18일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를 지낸 뒤, 1894년 8월 황해도와 평안도 선유사로 나갔다. 1894년 9월 평안도 숙천부사, 1896년 6월 5일부터 1899년 3월 1일까지 황해도 서흥군수를 지냈다. 1899년 10월 17일 평리원 검사, 1900년 2월 9일 시강원 첨사, 1902년 10월 8일부터 1904년 2월 22일까지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을 했다. 1904년 9월 17일 탁지부 사계주사, 1908년 1월 1일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로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이후인 1910년 10월 1일부터 1921년 2월 11일까지 강원도 참여관(도지사로 임명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직)을 지냈다. 1912년 8월 1일 이학규는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강원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 1921년 12월 유도진흥회 강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8년 11월 16일 쇼와 일왕 대례기념식에 참석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학규는 친일파 708인 명단의 도 참여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事典)' 수록자 명단의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그의 아들 이석희도 친일파 명단에 등재되었다. 이범기도 일제시대의 행적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 관료로 등재되어 있다.
1947년(임시정부 29) 음력 7월 16일 홍백련(洪百鍊)은 '죽서루중수기(竹西樓重修記)'를 지었다. '죽서루중수기'에는 1947년에 죽서루의 중수가 이루어졌다고 나와 있다. 홍백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홍백련의 '죽서루중수기' 편액
竹西樓重修記(죽서루중수기) - 홍백련
西樓 吾鄕舊物也 樓之刱 不知在何代 而自永樂癸未府使金孝孫修廢墟重起 至今丁亥 爲年凡五百四十五 重修凡十九 而今丁亥之役 沈基達金東錫沈基鴻池禹範朴熙昇李在鏞徐基煥之力最大 樓復翼然自如於千丈層岩蒼壁上 吾鄕愛古之心 不淺也 余嘗愛西樓之高古 月一再登登 輒不忍下 敬誦列聖朝御製及先正詩 令人心感怳然 若超嬴劉而在江沱汝漢之間 嗚呼 自眞珠觀(館之誤字)廢 不復登斯樓也 猶不忍決忘 常往來于中 沈基達李在鏞 叩蓬門曰 子記之 余何忍辭 遂書之爲竹西樓記.[죽서루는 우리 고을의 오래된 건물이다. 누각을 언제 창건했는지는 모르지만, 영락(永樂) 계미(癸未, 1403년)에 부사 김효손이 무너진 옛 터를 정비하여 다시 세운 이후 지금 정해년(丁亥年, 1947)까지 무려 545년이나 되었다. 그동안의 중수가 총 19번인데, 금년 정해년의 중수는 심기달(沈基達), 김동석(金東錫), 심기홍(沈基鴻), 지우범(池禹範), 박희승(朴熙昇), 이재용(李在鏞), 서기환(徐基煥) 등의 노력이 가장 컸다. 누각이 다시 날아갈 듯 높고 푸른 층암절벽 위에 옛 모습 그대로 솟았으니 우리 고을이 고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얕지 않다. 내가 항상 죽서루의 고상한 옛 풍취를 좋아하여 달마다 한두 번 올랐는데 번번이 차마 내려가지 못하여 역대 임금과 선현(先賢)들이 지은 시를 공경하여 읽으면 마음에 황홀감을 느끼니 마치 시대를 뛰어넘어 장강(長江, 장쑤성), 타강(沱江, 쓰촨성), 여수(汝水, 허난성), 한수(漢水, 산시성)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아! 슬프다. 진주관(眞珠館)이 허물어진 뒤로는 다시 이 누각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마 잊지 못하여 항상 누각을 오갔는데, 심기달과 이재용이 내 집을 찾아와 '자네가 기문을 쓰게'라고 하니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이에 마침내 죽서루기를 썼다.]
丁亥秋七月旣望 鄕人唐城洪百鍊記[정해년(1947) 가을 7월 기망(旣望, 매월 음력 16일) 삼척 사람 당성(唐城, 남양의 옛 이름) 홍백련(洪百鍊) 쓰다.]
'죽서루중수기'에는 1947년의 죽서루 중수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또 심기달과 이재용의 권유로 중수기를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홍백련이 '죽서루중수기'를 쓴 같은 날(1947년 음력 7월 16일) '죽서루중수기부금방명기(竹西樓重修寄附金芳名記)' 편액도 죽서루에 걸렸다. 방명기에는 죽서루 중수를 위해 기부금을 낸 사람의 이름과 단체명, 액수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당시 죽서루의 중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죽서루중수기부금방명기' 편액
가장 큰 액수인 2만원(円)을 기부한 사람은 김명수(金命壽), 최호(崔浩), 김금술(金今述), 임중식(林仲植), 김오경(金奧卿), 김두원(金斗元), 조인영(趙仁永) 등 8명이나 된다. 가장 적은 기부금은 김상률(金尙律)의 5백원이다. 기부금을 낸 단체나 회사는 삼척양조회사(만5천원), 세멘트공사, 동양화학(이상 만원), 근덕양곡조합(3천원), 삼우정미소, 근덕면 직원 일동(이상 2천원), 동아여관, 미로면 직원 일동(이상 천원) 등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촉발된 좌익과 우익의 이념 대립은 1947년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그해 3월 1일 서울 남대문에서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이 집회 도중 충돌하면서 38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제주 3·1절에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제주 3·1절 발포 사건은 1년 뒤 제주 4·3 민중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9월에는 극우 반공단체인 대동청년단(단장 지청천)이 결성되는 등 좌우의 이념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이처럼 나라 전체가 과도적 혼란기에 빠져 있었음에도 삼척의 주민들은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적인 죽서루를 중수하는 데 앞장섰다.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933년(임시정부 15) 8월부터 1937년(임시정부 19) 8월까지 삼척군수를 지냈던 윤승로(尹昇老, 1887~?)는 1961년 1월 1일 '題竹西樓(제죽서루)'를 지었다. 윤승로가 정작 삼척군수로 있었을 때는 시를 지을 만한 여가가 없었던 모양이다.
윤승노의 '제죽서루' 편액
題竹西樓(제죽서루) - 죽서루를 읊다(윤승로)
頭陀山落起高樓(두타산락기고루) 두타산 끝자락에 높은 누각 우뚝 솟았는데
樓下長江不盡流(누하장강부진류) 누각 아래로 긴 강은 끊임없이 흘러가누나
巖削二三層壁立(암삭이삼층벽립)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 병풍처럼 서 있고
魚廻五十谷川游(어회오십곡천유) 물고기는 오십 구비 냇물 따라 놀고 있구나
誇今棟宇千年史(과금동우천년사) 죽서루는 지금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懷舊文章七月舟(회구문장칠월주) 옛 글들은 초가을 뱃놀이를 생각나게 하네
古來賢達逍遙地(고래현달소요지) 예로부터 여기는 현인 달사가 놀던 곳인데
余亦當時百里憂(여역당시백리우) 나는 그때 삼척땅 다스릴 걱정만 하였구나
檀紀四二九四年一月一日, 前郡守, 尹昇老(단기 4294년 1월 1일 전군수 윤승로) 1961년 1월 1일 전 군수 윤승로
죽서루의 승경을 읊은 뒤 예로부터 현인 달사들이 소요하던 곳인데 정작 본인은 삼척군수로 있으면서 백 리 작은 땅을 다스릴 생각만 했다고 자탄하고 있다. 너무 현실에만 매몰되어 살아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다.
'賢達(현달)'은 현인(賢人)과 달사(達士)다. 현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있거나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逍遙(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속세를 벗어나 은일한 삶을 살아가는 은자의 모습이다. '百里(백리)'는 사방 백 리의 작은 부나 현을 말한다.
윤승로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고향인 통천의 양원면과 임남면 서기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다이쇼 3)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통천군에서 판임관견습에 임명되었다. 1916년(다이쇼 5) 조선총독부 서기로 임용된 윤승로는 강원도 통천군과 평강군, 양양군, 원주군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총독부 전매국 경성전매지국 금성출장소 근무를 겸하기도 하였다. 1928년(임시정부 10) 회양군 재무주임으로 승진하였고, 1930년부터는 강원도 세무과에서 근무했다. 1931년(임시정부 13)에 고등관 8등의 조선총독부 군수로 발탁되어 영월군수에 임명되었고, 1933년(임시정부 15) 8월부터는 삼척군수로 전임됐다.
1935년(임시정부 17) 윤승로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올라갔다. 1937년(임시정부 19) 8월에는 삼척군수에서 홍천군수로 전임되었으며, 그해 7월 중일전쟁(中日戰爭)의 발발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산하 홍천군연맹이 결성되었을 때, 홍천군수로서 이사장을 겸직했다. 1939년 현재 그는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윤승로는 1940년(임시정부 22) 5월 홍천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났다. 해방이 되어 고향 통천으로 돌아갔던 그는 복한에서 친일파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단신으로 월남했다. 윤승로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民族問題硏究所)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 관료 명단에 올라 있다.
1971년 송호(松湖) 홍종범(洪鍾凡, 1905~1991)은 죽서루를 중건하고 나서 '竹西樓重建上樑文(죽서루중건상량문)'을 지었다. 홍종범은 강원도 삼척 사람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화서학파 (華西學派)의 일원이다. 화서학파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조선의 고유문화 수호 및 구국운동에 큰 역할을 한 재야의 대표적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세력이다. 위정척사는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위정),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서 배격하는 보수적 유생들의 운동이었다. 홍종범은 1988년 10월 '당성사적비문(唐城史蹟碑文)'을 쓰기도 했다.
홍종범의 '죽서루중수상량문' 편액
竹西樓重建上樑文(죽서루중건상량문) -홍종범
興替有數 聿覩百尺華構重建之辰 平陂無關 固知千層岩壁自在之地 溪山依舊 風景如新 竊惟三陟西樓 九郡南阜 金使君修廢墟重起 亶在永樂元年 李居士次板韻尙傳 盖自勝國中葉 屛鳳凰高坮 而隔滄海之觀 自成一家 依葛夜古城 而案頭陀之雄 遠照三面 浮嵐積翠 岩峀杳冥 名勝無爭 膾炙聞三千里 群湍有力 屈折爲五十川 脩瀨灣回 綠波瀲灩 鳥時行而白沙成篆 魚或躍而碧浪破紋 雲漢逈昭 回於紗籠 烟霞幷品題於玉軸 四境無事 太守風流 古寺有傳 竹藏鐘磬 庾樓夕月 縢閣朝雲 雖在官衙城頭 如入蓬萊島上 然且有形而立 焉能無年而長 夫何降雨之隤 往在白狗之祀 鄕父老胥爲嗟惜 國道郡競乃佽相 肆諏吉辰重營土圭之定 一仍舊貫 僉同堂構之謀 杞梓여樟 乃斧乃鉅 甃甓磉礎 奚탁奚磨 不日告工 如子來父 今玆衆人眼前突兀 實自徐侯心上 經營助擧 虹梁式騰燕賀.[흥망성쇠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이에 높고 화려한 누각을 중건하는 날을 보게 되었지만, 누각이야 어떻든간에 상관없이 층암절벽이 기이하게 우뚝 솟아 있으니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지만 경치는 새로워졌음을 새삼 알겠다. 생각건대 삼척의 죽서루는 아홉 개 군 중 남쪽에 있는 높고 큰 누각이다. 김 부사(김효손)가 무너진 옛 터를 중건한 것은 1403년이었고, 이 거사(이승휴)의 현판시 차운시가 전해오고 있으니 대체로 고려 중엽부터 있었던 것 같다. 병풍처럼 둘러선 높은 봉황대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뒤쪽 갈야산 옛 성과 마주 보이는 두타산의 웅장함은 저 멀리 세 방향에서 빛나는데, 푸른 기운이 짙게 서려 있어 바위로 된 골짜기가 그윽하고 어둑하다. 이에 경치로는 죽서루와 겨룰 곳이 없다는 평판이 인구에 회자되어 전국에 알려졌다. 여러 급류가 굽이치면서 오십천을 이루고, 굽이굽이 돌아 흐르면서 여울을 만들며, 푸른 물결은 반짝반짝 빛난다. 새들은 모래톱을 거닐며 전서체 같은 글자를 찍고, 물고기는 간혹 뛰어올라 푸른 물결을 흩뜨린다. 은하수가 저 멀리서 밝게 빛나니 사롱(紗籠, 사롱등)에 둘러쌓인 것 같고, 연기와 노을은 아름다운 두루말이에다 품평하는 것 같다. 온 고을이 무사태평하면 태수가 풍류를 즐겼는데, 옛 절 죽장사의 종소리와 경쇠소리가 들리는 듯, 유루(庾樓, 유공루)에서 보는 달이 떠오르는 듯, 등왕각(滕王閣)에서 보는 아침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비록 몸은 관아의 성 부근에 있으나 봉래도(蓬萊島)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나 형체를 가지고 서 있는 것이 어찌 무한정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지난 번 흰 개를 잡아 제사를 지내던 날 조금 내린 비에도 무너져 내려 고을의 어른들이 모두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겼는데, 국도변의 여러 군들이 다투어 보조해 주었다. 이에 좋은 날을 택하여 중건을 시작하되 모두가 옛 모습 그대로 수리하는 것에 찬성하였으므로 좋은 목재를 마련하여 자르거나 깎고, 벽돌과 주춧돌을 깨거나 갈아서 며칠만에 완공하였다. 백성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공사를 도왔다.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 우뚝 높이 솟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서 군수(제17대 삼척군수 서명택)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공사를 함에 도와서 거들어 주었고, 들보를 올리는 의식에서는 축하의 글을 써 전해 주었다.]
抛梁東 鳳凰臺屹碧天東 自成一局元由此 桑海風波籠隔東
抛梁南 三樂亭墟草沒南 昔日鄕人兄弟會 洽如晉阮北而南
抛梁西 頭陀雄相遠臨西 凝然如涉石船坐 應是爾時來自西
抛梁北 古城葛夜鎭堅北 一時崔相遷移 略侵掠憂 深蒙古北
抛梁上 十二欄干碧落上 仙笛戞然 群鶴舞謠 民耕鑿渾忘上
抛梁下 長川五十始灣下 銀刀玉尺 浮沉穩 爰得所哉魚樂下
[동쪽 들보를 올리니 봉황대가 푸른 하늘 동쪽에 우뚝 솟았구나. 그곳이 스스로 하나의 형세를 이룬 것은 본래 이것 때문이니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풍파가 동쪽으로 보이지 않게 멀리 떨어져 있네. 남쪽 들보를 올리니 삼락정(三樂亭) 옛 터의 풀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여 누웠구나. 옛날 고을 사람들과 형제들의 모임에서 화목함이 남북으로 나뉘어 살던 진(晉)나라 완씨(阮氏) 집안 같았네. 서쪽 들보를 올리니 두타산의 웅장한 모습이 멀리 서쪽에 마주 보이는구나. 그 견고함이 석선(石船)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으니 마땅히 그 옛날 서쪽에서 왔을 것 같네. 북쪽 들보를 올리니 옛 성이 있는 갈야산이 북쪽에 진산(鎭山)으로서 굳게 서 있구나. 잠시 최 재상(宰相, 최우)이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침략의 근심을 줄이고 몽골을 북쪽으로 멀리 물러나게 하였네. 위쪽 들보를 올리니 열두 난간이 푸른 하늘에 떠 있구나. 신선의 피리소리 들리니 여러 학들이 춤추고 노래하는데 백성들은 농사일에 정신이 없네. 아래쪽 들보를 올리니 긴 오십천이 구비구비 돌아 흐르기 시작하는구나. 은도옥척(銀刀玉尺, 은빛과 옥빛을 띤 크고 작은 물고기)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면서도 평온하니 여기서 물고기들이 즐기기에 알맞은 장소를 얻었네.]
伏願上梁之後 海波不起 溪山永淸 四野農歌繼擊壤之餘韻 一聲絃誦 保鄒魯之遺風.[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바다에 파도가 일지 말고, 시내와 산이 영원히 맑아지고, 온 들녘에서 농부들이 계속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고, 오로지 거문고 타고 시 읊는 소리만이 울려 퍼져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지켜가도록 해주소서.]
唐城洪鍾凡 製. 檀紀四千三百四年辛亥四月二十六日巳時上樑.[당성(唐城) 홍종범(洪鍾凡) 지음. 단기 4304년(1971) 신해년(辛亥年) 4월 26일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 종도리를 올리다.]
'庾樓(유루)'는 유공루(庾公樓)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유량(庾亮)이 강주(江州, 지금의 후베이성) 무창(武昌)을 다스릴 때 지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설이다. 유량은 관료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와 같이 남루(南樓)에 올라가 달을 구경하고 날이 새도록 시를 읊고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문인들이 모여서 음영(吟詠)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世說新語 容止) '滕王閣(등왕각)'은 중국 장시 성(江西省) 난창(南昌)에 있는 누각이다. 웨양(岳阳)의 악양루(岳陽樓), 우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와 함께 강남의 3대 누각으로 불린다. 등왕각은 653년(영휘 4) 난창에 봉해진 당 고조의 22남 이원영(李元嬰)이 지었다. 이원영은 처음에 등현(滕縣, 산둥성 등주시)에 봉해졌기 때문에 등왕(滕王)으로 불렸다. 등왕이 지은 누각이라고 해서 등왕각이라고 불린다. '三樂亭(삼락정)'은 홍견(洪堅)과 홍확(洪確), 홍광(洪礦) 삼형제가 우애를 다지기 위해 삼척 남양리(南陽里) 속칭 사대에 지었다는 정자다. 홍견은 고향인 삼척시 근덕면 맹방리, 홍확과 홍광은 북평(北坪, 지금의 동해시 북평동)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는데, 그 중간 지점에 삼락정을 지었다고 한다. '晉阮北而南(진왕북이남)'은 위(魏)나라 완적(阮籍)의 조카 완함(阮咸)은 길 남쪽에 살고, 다른 여러 완씨는 길 북쪽에 살았는데, 북완은 부자였고 남완은 가난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완적의 아버지 완우(阮瑀)는 후한 헌제(獻帝)의 건안 연간(196~220)에 조조(曹操) 부자 밑에서 활약한 건안칠자(建安七子) 중 한 사람이다. 완적은 위(魏), 진(晉)의 정권교체기에 출현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고, 완적의 조카 완함(阮咸)도 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이다. '擊壤歌(격양가)'는 요임금 때의 태평성대를 기록한 '제왕세기(帝王世紀)'의 내용을 노인들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부른 노래(鼓腹擊壤)에서 유래했다. 백발노인들의 '고복격양'에서 요임금은 백성들이 왕의 존재를 잊고 있을 정도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평성대를 비유한 말이다. '上樑(상량)'은 목조 건축물의 가구(架構)에서 최상부 부재(部材)인 종도리(宗道里)를 올려 놓는 일, 또는 종도리 자체를 말한다.
1991년 12월 20일 통합 전 제4대 삼척시장 김광용(金光容)은 국한문 혼용체로 '重修記(중수기)'를 지었다. 서각(書刻)은 일죽(一竹) 홍태의(洪泰義)가 했다. 다음은 '중수기' 전문이다.
김광용의 '중수기' 편액
중수기(重修記) - 김광용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보물 제213호)는 오십천 푸른 물이 감돌아 흘러 수십 길 기암절벽에 어울려진 천혜의 단애(斷崖) 위에 터를 잡아 장관인데 옛부터 시인 묵객이 다투어 찾아와 시정(詩情)에 젖었던 유서깊은 곳으로 이 고장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이 충만한 이상적 역사의 현장으로써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관동의 제1루로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 당시 최규하 대통령(崔圭夏)께서 취임 직후 경내 확장을 칙지(勅旨)함에 따라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4일까지 2억 1백만 원을 들여 경내 면적을 3천 8백 1십 3평으로 확장하고 누각 개수, 화장실 신축, 평삼문(平三門) 개축, 담장 설치 등 대대적으로 중수함으로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는 누각과 수려한 주변 경관은 세계적인 명소로 불멸의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늦게나마 최규하 전 대통령께서 배려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삼척 시민의 뜻을 모아 이 중수기를 쓴다.
1991년 12월 20일
삼척시장 김광용(金光容) 근지(謹誌)
중수기에 따르면 죽서루는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14일까지 약 1년간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광용은 죽서루 중수를 가능하도록 도와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배려에 감사하는 삼척 시민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삼척에 오면 죽서루에 올라 오십천과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을 바라볼 것이다. 죽서루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보라. 죽서루 오십천이 고려와 조선의 문학과 역사 이야기를 은밀하게 들려줄 것이다. 인문학 여행은 사람의 영혼을 살지게 한다.
2018.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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