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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묵향을 찾아가는 여행 1 - 추사 연보

林 山 2018. 12. 3. 17:24

변산바람꽃을 만나러 가야산(伽倻山, 象王山, 678m)으로 들어가던 날, 충남(忠南) 예산군(禮山郡) 신암면(新巖面) 용궁리(龍宮里) 799-2번지에 자리잡은 추사고택(秋史古宅,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을 찾았다. 예당평야 낮은 구릉지 용산(龍山, 94m) 기슭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은 풍수가들 사이에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부드러운 언덕이 집터를 에워싸고 있어 문기(文氣)가 무르녹는 형상'이라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감도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고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1786년(정조 10) 6월 3일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37)과 어머니 기계 유씨(棋溪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곳이다. 기계 유씨는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낸 유준주(兪駿柱)의 딸이다. 추사고택을 지은 때는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 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용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추사고택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보(幼輔)다. 그의 가문은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의 해미 한다리(충남 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서 속칭 '한다리 가문'으로 불렸던 명문가였다. 김한신의 아버지는 영의정 김흥경(金興慶), 어머니는 황하영(黃夏英)의 딸이다. 


김한신은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고 한다. 1732년 김한신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이금(李昑, 1694~1776)의 둘째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에게 장가들어 월성위에 봉해졌고, 벼슬은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제용감 제조(濟用監提調)를 지냈다. 김한신은 특히 글씨체 중 팔분체(八分體)에 뛰어나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썼다. 또 전각(篆刻)에도 뛰어나 인보(印寶)를 전각하였다. 


영조와 정빈 이씨(靖嬪李氏, 1694~1721)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는 조선의 왕녀 중 유일하게 열녀(烈女)로 지정되었다. 동복 형제로는 오빠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와 언니 화억옹주(和億翁主, 1717~1718)가 있었으나 둘 다 일찍 죽었다. 서장녀 화억옹주가 너무 일찍 죽었기에 화순옹주가 장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1725년(영조 1) 2월 18일 화순옹주로 봉해졌다. 1728년(영조 4)에 효장세자가 죽을 무렵 화순옹주도 홍진 및 하혈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효장세자를 독살했다고 추정되는 궁녀 순정(順正)이 벌인 일인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한양의 통의동(通義洞) 땅을 하사해서 월성위궁(月城尉宮)을 지어 김한신과 화순옹주 부부를 살게 했다. 그리고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오석산(烏石山) 일명 용산(龍山) 동쪽 기슭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 충청도의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의 건립 비용을 염출해 53칸의 추사고택을 지어주었다. 이때부터 김한신 가문은 서산에서 예산으로 터전을 옮겨 대대로 살게 되었다. 지금의 추사고택은 1977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1758년 김한신이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와 말다툼 끝에 벼루를 머리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격분한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었다. 당시 이복 여동생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1808)도 과부가 되었는데, 영조는 그녀가 부담을 가질까 염려했던 때문인지 화순옹주의 행동을 나무라며 단식을 만류했다.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화순옹주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화순옹주는 식음을 전폐한 지 14일만인 1월 17일 마침내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딸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자신의 뜻을 저버린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이산(李祘, 1752~1800)은 화순옹주를 열녀로 봉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무덤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으며, 이곳 묘막터에는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유형문화재 제45호)이 세워져 있다.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화순옹주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른 설도 있다. 화순옹주는 어린 시절에 동복 형제들과 어머니를 잃어서인지 혈육에 큰 애착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에서 홀로 외롭게 자라다 혼인하여 출가한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과 유독 금슬이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을 가지지 못했다. 이후 남편마저 죽어서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어진 화순옹주는 여생을 외롭게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음식을 먹었다가 토해 버렸다는 기록은 거식증 증세와 유사하다.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었기에 김한신의 조카 김이주(金頤柱, ?~1797)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외조부 영조의 총애로 김이주는 승지, 광주부 윤, 대사간, 대사헌, 형조 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 김이주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은 넷째 아들이었다. 기계 유씨가 추사를 임신했을 때 한양에 전염병이 돌자 한양 통의동 집을 떠나 예산의 향저에 내려오면서 추사는 예산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水拈筆)'에 추사는 임신한 지 24개월, 추사의 아우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1788∼1857)는 18개월, 막내아우 금미(琴眉) 김상희(金相喜, 1794~1861)는 12개월만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계 유씨의 임신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었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의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와 완당 외에도 노완(老阮),·승련노인(勝蓮老人), 예당(禮堂), 시암(詩庵), 즉과(卽果), 과노(果老), 과파(果坡), 노과(老果), 병과(病果), 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 칠십이구초당(七十二鷗草堂) 등 매우 많다. 


1791년(정조 15) 6세의 추사는 집 대문에 '立春大吉(입춘대길)'이라는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였다. 추사의 집 앞을 지나다가 입춘첩을 본 북학파(北學派)의 거두 박제가(朴齊家, 1750~ 1805)는 추사의 부친을 만나 '이 아이는 장차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앞으로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제가는 스승이었지만 서출이었기 때문에 대가집 자제인 추사를 매우 정중히 대했다. 칭(淸)나라 수도 옌징(北京, 베이징)을 네 차례나 다녀온 뒤 견문록(見聞錄) '북학의(北學議)'를 쓴 박제가는 추사에게 칭나라의 선진 문물과 학자들의 학문, 예술 활동을 소개하였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공리공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 실학(實學)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으로 이어지는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칭나라와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신경향이었다. 그러나 홍지(弘之) 홍대용(洪大容, 1731∼178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박제가 등 북학파들은 조선의 실학 같은 신사상적 기류가 칭나라에서는 이미 고증학(考證學)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치엔룽(乾隆) 연간(1662∼1795)에 총 3,503종 7만 9,337권에 이르는 쓰쿠취엔수(四庫全書)의 편찬도 미증유의 학술 사업이 되어 칭나라 전국의 학자들이 옌징에 모여 학술을 대거 진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쓰쿠취엔수 편찬의 총책임자였던 춘판(春帆) 지윈(紀昀, 1724∼1805)은 박제가와 친했으며, 훗날 추사의 평생 스승이 되는 탄시(覃溪) 웡팡깡(翁方綱, 1733~1818)도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박제가는 또 칭나라 화가 둔푸(遯夫) 뤄핀(羅聘, 1733~1799)과도 교유했다. 박제가로부터 옌징의 선진 문물을 전해 듣고, 칭나라 학자와 화가들의 동향을 접한 추사는 이때부터 학문과 예술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김이주의 장남 김노영(金魯永, 1747~?)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1793년 김노영은 8살의 추사를 양자로 들여서 대를 이었다. 그래서 추사는 김한신과 화순옹주 부부의 장증손자가 되었다. 추사의 세계는 김홍욱(金弘郁)으로부터 김세진(金世珍)-김두성(金斗星)-김흥경-월성위 김한신-김이주-김노영-김정희로 이어진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의 세계는 김홍욱으로부터 김계진(金季珍)-김두광(金斗光)-김선경(金選慶)-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김귀주(金龜柱)-정순왕후로 이어진다. 세계를 보면 김이주와 김귀주가 10촌 형제간이니 정순왕후는 추사에게 12촌 대고모였다. 이처럼 추사는 비록 멀기는 하지만 조선 왕실과 이중 외척 관계에 있었다.   


조선시대 역대 인물들의 전기나 일화들을 뽑아 엮은 강효석(姜斅錫)의 '대동기문(大東奇聞, 1926)'에도 남인(南人)의 영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추사의 일화가 실려 있다. 채제공은 남인 노장파의 영수, 추사의 가문은 골수 노론(老論)의 벽파(僻派)였기에 서로 만나지 않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채제공이 월성위궁 대문에 추사가 써 붙인 입춘첩을 보고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김노영은 깜짝 놀라면서 그를 맞이했다. 채제공은 김노영에게 추사가 글씨로 이름을 드날릴 것이라 예언했다. 그는 또 추사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면 반드시 크고 귀하게 되겠지만, 글씨를 잘 쓰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붓을 잡게 하지 말라고 일렀다. 


추사가 8세 때 생부에게 쓴 편지


1793년 8살의 추사는 그리운 생부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伏不審潦炎氣候若何. 伏慕區區. 子侍讀一安伏幸. 伯父主行次, 今方離發雨意未己, 日熱如此, 伏悶伏悶. 命弟幼妹亦好在否? 餘不備. 伏惟下監. 上白是. 癸丑流月初十日. 子正喜 白是.(무더위에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매우 보고 싶습니다. 저는 다행스럽게 별 탈 없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큰아버님이 이제 막 떠나셨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날씨가 이렇게 후덥지근하니 참으로 염려됩니다. 동생 명희와 어린 여동생들도 잘 있는지요? 이만 줄입니다. 계축년 유월 십일 아들 정희 올림)'라고 썼다. 8살의 어린 나이답지 않은 매우 성숙한 편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추사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1797년 추사의 양아버지 김노영이 세상을 떠났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난 해 15세의 추사는 이희민(李羲民)의 딸인 동갑의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결혼했다. 그해 추사는 대학자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칭나라 고증학과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을 연구했다. 1801년(순조 1) 어머니 기계 유씨가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스승 박제가는 윤가기(尹可基)가 주모한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뒤 함경도(咸鏡道) 종성(鐘城)으로 유배되었다. 1805년에는 친아버지 김노경이 문과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다. 하지만 추사의 부인 한산 이씨가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스승 박제가도 유배에서 돌아오자마자 세상을 떠나는 슬픈 일도 겪었다. 박제가가 세상을 떠나자 추사는 나라 안에서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을 수 없었다. 


1806년 추사의 양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별세했다. 1808년 23세 때 추사는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재혼했다. 1809년 24세의 추사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서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해 겨울 호조 참판으로 있던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사 겸 사은사(冬至使兼謝恩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옌징으로 떠나게 되자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수행했다. 옌징으로 가던 중 지금의 랴오닝셩(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 잉청쯔(英城子)에 있던 안시성(安市城)을 지날 때, 추사는 고구려의 양만춘(楊萬春)이 탕(唐) 타이중(太宗) 리싀민(李世民)을 물리쳤던 일을 떠올리며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安市城(안시성) - 김정희 


群峰束立野鋪張(군봉속립야포장) 뭇 봉우리들 곁으로 드넓은 들판 열렸고

車鐸連聲度大荒(거탁련성도대황) 방울소리 울리며 거친 벌판 질러서 가네

城上至今唐代月(성상지금당대월) 성 위로는 지금도 당나라 때의 달이 떠서

半分虧得照餘光(반분휴득조여광) 반쯤 이지러진 달빛 희미하게 비춰 주네


1810년 1월 25세의 추사는 옌징에서 쟈칭띠(嘉慶帝)의 비서 차오쟝(曹江, 1781~?), 역사가 시숭(徐松, 1781~1848)과 교유를 시작했다. 추사는 차오쟝, 시숭을 통해서 평생의 스승 웡팡깡과 윈타이(芸臺) 롼위안(阮元, 1764~1849)을 만나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고 금석학(金石學)과 서체(書體) 등을 배웠다. 당시 78세의 웡팡깡은 칭대(淸代) 최고의 서예가이자 문학가, 금석학자였다. 당시 웡팡깡의 서재 싀모수러우(石墨書樓)에는 8만여 점에 이르는 희귀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47세의 롼위안은 칭나라 고증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였다. 롼위안을 방문한 추사는 그의 서재 타이화솽뻬이즈꽌(泰華雙碑之館)에서 룽퇀셩쉬에(龍團勝雪)이라는 명차를 대접받았다. 


'루구추신(入古出新)'의 정신에서 새로운 글씨를 추구한 웡팡깡은 싀안(石庵) 류융(劉墉, 1719~1805), 산저우(山舟) 량통수(梁同書, 1723~1815), 멍러우(夢樓) 왕원즈(王文治, 1730~1802)와 함께 치엔롱(乾隆) 4대가(四大家)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고전(古典)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는 뜻을 가진 '입고출신'은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한편 추사를 만난 롼위안은 그의 천재성과 높은 학문적 수준을 접하고 크게 기뻐했다. 그는 자신이 편찬 책임자로 참여한 '싀산징쭈수쟈오칸지(十三經注疏校勘記)' 한 질을 추사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에 감동한 추사는 롼위안을 존경하는 뜻에서 '롼위안(阮元)'에서 '롼(阮)'자를 따와 호를 완당(阮堂)이라 지었다. 일설에는 롼위안이 추사에게 완당이란 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롼위안은 40여 년에 가까운 교류를 통해 추사의 삶과 철학, 학문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김정희는 추사란 호보다 완당이란 호를 즐겨 사용했다.


칭나라 학계를 휩쓸던 롼위안은 서론가(書論家)로서도 저명했다. 롼위안은 '뻬이베이난티에룬(北碑南帖論)', '난뻬이수파이룬(南北書派論)'을 주창했다. '뻬이베이(北碑)'는 뻬이차오(北朝) 특히 뻬이웨이(北魏)의 비의 한험(寒險)한 서풍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을 배우는 것을 '뻬이파이(北派)'라 한다. '난티에(南帖)'는 난차오(南朝)의 왕시지(王羲之, 321~379) 계열의 온윤(溫潤)한 서풍을 말하는데, 이것을 배우는 것을 '난파이(南派)'라고 한다. 롼위안의 '뻬이베이난티에룬'과 '난뻬이수파이룬'은 글씨의 고전적 가치를 뒤집어 놓았다. 롼위안은 '진탕(晉唐)의 고법'으로 존숭된 법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그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뻬이웨이의 비판(碑版)들이 육조인(六朝人)의 필치를 동시대에 새겨서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므로 반드시 뻬이베이를 배워서 그 힘을 얻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육조풍을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핑수티에(評書)'을 쓴 칭나라 량이안(梁巘)은 중궈 2천 년 서예사를 '晉尙韻 唐尙法 宋尙意 元明尙態(진나라는 운을 숭상하고, 탕나라는 법을 숭상하고, 숭나라는 의를 숭상하고, 위안나라, 밍나라는 태를 숭상했다'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진(晉)나라 왕시지 시대 글씨에는 신운(神韻)이 감돌고, 탕(唐)나라 신뻔(信本) 우양쉰(歐陽詢, 557~641) 시대 글씨에는 법도가 있으며, 숭(宋)나라 뚱파(東坡) 수싀(蘇軾, 1036~1101) 시대 글씨에는 의취가 있고, 위안(元)나라 숭쉬에(松雪) 짜오멍푸(趙孟頫, 1254~1322)와 밍(明)나라 스빠이(思白) 둥치창(董其昌, 1555~1636) 시대 글씨는 자태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러나, 칭나라 초기의 글씨는 밍나라 말기 둥치창 시대의 아름다운 글씨를 모방하는 데 급급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루지 못했다. 이 답답하고 구태의연한 글씨를 돌파한 사람들이 진농(金農), 뤄핀(羅聘), 정시에(鄭燮), 리산(李鱓), 왕싀셴(汪士慎), 리팡잉(李方膺), 까오펑한(高鳳翰), 황셴(黄慎), 민쩬(閔貞) 외에 까오샹(高翔), 화옌(華嚴)을 더해 일명 양저우빠과이(揚州八怪)라고 불리는 개성적인 서화가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캉여우웨이(康有爲, 1858~1927)가 '광이저우솽지(廣藝舟雙楫)'에서 말했듯이 변화를 구하려고만 했지 진정한 변화의 의미를 몰라서 괴이한 데로 빠지고 말았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고증학의 정신에 입각해 고비를 연구하는 금석학이 크게 일어나고, 마침내 롼위안의 '뻬이베이난티에룬'이 나오면서 '루구추신'의 글씨를 지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석학에 바탕을 둔 웡팡깡의 '루구추신'의 정신과 롼위안의 '뻬이베이난티에룬'은 이후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롼위안을 만난 추사는 1월 29일 웡팡깡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나눴다. 웡팡깡은 칭대 다른 학자들처럼 한대의 경학(經學)에 치중하지 않고 한송절충론(漢宋折衷論) 또는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입장에서 숭대 경학에 비중을 두고 연구했다. 추사를 비롯한 조선의 학자들도 후이안(晦庵) 쭈시(朱熹, 1130~1200)를 비롯한 숭대 성리학(性理學)에 경도되어 있었기에 웡팡깡은 추사의 이런 학문적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웡팡깡은 추사의 높은 학문과 철학, 예술의 경지에 놀랐다. 그는 추사를 '징수원장하이둥티이(經術文章海東題一)'라고 칭찬하면서 탕나라 초기의 서예가 어우양쉰 글씨의 진수로 일컬어지는 '화두수베이(化度寺碑)' 진본(眞本)을 보여주고, 그 모각본(模刻本)을 선물하는 등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추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탕숭팔대가 중 한 사람인 수싀를 흠모했던 웡팡깡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수싀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란 뜻의 빠오수짜이(寶齋)라고 지은 것을 보고 추사도 '탄시 웡팡깡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라고 짓고, 별호로 사용했다. 웡팡깡과의 만남은 추사가 귀국한 뒤에도 보담재 외에 보담재주인(寶覃齋主人), 보담재인(寶覃齋人) 등의 호를 사용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보담재는 추사나 완당과 함께 추사를 대표하는 호라고 할 수 있다.    


옌징에서 두 달 정도 머무는 동안 추사는 차오쟝과 시숭 외에도 웡팡깡의 제자로 화가였던 주허니엔(朱鶴年, 1760~1834), '싀류큐지(史琉球記, 1802)'의 저자 리딩위안(李鼎元, 1749-1812), 월팡깡의 아들로 화폐 감식에 뛰어났던 웡수페이(翁樹培, 1764~1811), 웡팡깡의 막내아들 웡수쿤(翁樹崑, 1786~1815), '이위안싀텅(亦園詩謄)'의 저자 셰쉬에총(謝學崇, ?~?), 학자 리린숭(李林松, 1770~1827) 등 옌징의 쟁쟁한 인물들과도 사겼다. 추사의 옌징행은 조선에 일대 바람을 일으켜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동리(東籬) 김경연(金敬淵, 1778~1820)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1850)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默, 1792∼1840), 추사의 아우 산천 김명희 등도 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바탕을 둔 신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1815년 추사는 웡팡깡으로부터 편지로 연경지도(硏經指導)를 받았으며, 칭나라의 문인이자 금석학자인 예즈셴(葉志詵, 1779 ~ 1863)과도 알게 되어 편지로 교류하였다. 예즈셴은 웡팡깡의 제자 중 금석학의 제일인자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 현판은 예즈셴, 대청마루 앞 주련 글씨는 웡팡깡, 후원 상량전(上凉亭) 현판은 웡수쿤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한편 추사는 시인이자 다인(茶人) 승려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과도 절친한 벗이 되었다. 추사와 초의는 동갑이었다. 초의는 전라도 강진에 유배 와 있던 정약용을 만나 유학과 실학을 접한 뒤 그의 제자가 되었다. 초의는 다산에게 차를 배웠고,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 다산과 추사를 통해서 초의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가 되었다. 


1816년 추사는 심상규(沈象奎)가 지은 '이위정기(以威亭記)'를 쓰고,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다. 7월에는 친구인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北漢山) 비봉(碑峰)에 올라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婢, 북한산비)'를 발견하고 탁본을 떴다. 이 비석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한양 도읍터를 찾기 위해 북한산에 올라오니 한 비석에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오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놀랐다는 전설이다.   


1817년 추사는 경주에 가서 '무장사비(䥐藏寺碑)'를 찾았다. 그는 '무장사비' 비편에 제기(題記)를 썼다. 6월 과거시험 동방(同榜) 조인영, 탁본 전문가와 함께 북한산비의 남아 있는 비자(碑字) 68자를 자세하게 조사하여 확정했다. 이때서야 추사는 이 비석이 놀랍게도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격한 나머지 추사는 북한산비 발견을 기념하여 비석 옆면에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오다.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고 새겨 놓았다. 그해 추사와 기생첩 초생 사이에 아들 김상우(金商佑, 1817~1884)가 태어났다. 김상우는 재주가 총명했으나 신분적 한계 때문에 출사하지 못했다. 


1818년 33세의 추사는 '합천해인사소장대적광전중건상량문(陜川海印寺所藏大寂光殿重建上樑文)'을 썼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추사의 부친 김노경이 해인사 중건에 관여하였는데, 이때 추사가 해인사 중창을 위한 '권선문(勸善文)'과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상량문'은 추사 해서체의 최고 명작이자 기준작이다. 그해 예즈셴이 '리치베이(禮器碑)'를 비롯해서 많은 금석문 탁본 자료를 보내주었다. 그해 스승 웡팡깡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 참판을 제수받았다. 


1819년 김노경은 예조 판서에 올랐고, 추사는 문과에 급제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예즈셴이 옌징에서 탁본 자료를 또 보내왔다. 절친한 벗 권돈인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옌징에 파견되었다. 1820년 예즈셴이 서화(書畵) 및 서책(書冊), 비첩(碑帖) 등을 보내왔다. 그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태어났다. 그 이듬해 예즈셴이 또 서책과 비첩 등을 보내왔다. 김노경은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22년 김노경은 형조 판서에 이어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옌징에 파견되었다. 이때는 추사의 동생 김명희가 자제군관이 되어 아버지 김노경을 수행했다. 김노경은 칭나라 비학파(碑學派)의 거두이자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 대련을 쓴 유명한 서예가 완바이산렌(完白山人) 떵싀루(鄧石如, 1743~1805)의 아들인 떵촨미(鄧傳密)와 친교를 맺었다. 떵촨미는 부친 떵싀루의 비문을 김노경에게 부탁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김명희는 칭나라의 금석학자 류시하이(劉喜海,1793~1852), 첸난수(陳南淑), 우숭량(吳嵩梁, 1766~1834), 리장위(李璋煜) 등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류시하이에게 조선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하이둥진싀위안(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이둥진싀위안'은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해서 평백제비(平百濟碑)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 무장사비 단편 등 조선의 고비(古碑), 고종(古鐘)의 금석 탁본 중 유명하고 오래된 것은 거의 다 망라한 기념비적 편찬이다. 김명희는 소해(小楷)에 능하고, 감식에도 뛰어났지만 추사의 명성이 워낙 높아 빛을 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듬해 예즈셴이 또 비첩과 서책, 서화 등을 보내주었다. 추사는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를 제수받았다. 


'好古硏經(호고연경)' 예서 대련


1824년 칭나라에서 리장위(李璋煜)와 왕시순(汪喜孫, 1786~1847)이 서책 및 비첩을 보내왔다. 그해 추사는 '好古有時搜斷碣(호고유시수단갈), 硏經屢日罷吟詩(연경루일파음시)' 대련(對聯)을 쓰고, '無垢淨光大多羅尼經(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고증했다. 1825년 김노경은 대사헌에 이어 병조 판서가 되었다. 


1826년 예즈셴이 또 서책, 서화 등을 보내왔다. 김노경은 판의금부사를 제수받고, 그해 12월 27일 회갑을 맞았다. 추사는 충청우도(지금의 충청남도)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오리 비인현감(庇仁縣監) 안동 김씨 김우명(金遇明)을 봉고파직(封庫罷職)했다. 이후 추사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표적이 되었다. 1827년 리장위와 예즈셴이 또 서책과 서화를 보내왔다. 그해 5월 17일 추사는 의정부 검상(檢詳)에 이어 10월 4일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공(李玜, 1790∼1834)은 중풍에 걸리자 19세의 효명세자(孝明世子) 이영(李旲, 1809~1830)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했다. 효명세자는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 1789 ~1857)의 아버지로 노론(老論) 시파(時派)였던 김조순(金祖淳, 1765~1832) 등 안동 김씨 세력을 배척하고 자신의 측근 세력을 육성하면서 왕권을 확립했다. 효명세자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등과 각별히 지내면서 정치와 제도의 개혁을 추구했다.


1828년 김노경은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부친을 따라 평양에 머물던 추사는 중궈에서 돌아오는 사신에게 얻은 수선화를 유배에서 풀려나 남양주 여유당(與猶堂)에 머물던 정약용에게 보냈다. 정약용은 고마운 나머지 '仙風道骨水仙花 三十年過到我家(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네)'로 시작되는 '水仙花(수선화)'란 시를 지었다. 정약용은 시의 부제로 '秋晚 金友喜香閣 寄水仙花一本 其盆高麗古器也(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평양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였다)'고 적었다. 추사는 정약용으로부터 배움을 구하며 학문의 세계를 넓혀 나갔다. 추사는 노론 벽파, 정약용은 남인 소장파의 영수였음에도 두 석학은 당파를 뛰어넘어 교류를 이어갔다. 


1829년 대홍수로 평양성(平壤城)이 무너졌을 때 성벽의 돌에서 흐릿하게 남은 글자가 발견되었다. 추사는 그 글자의 탁본을 얻어 옌징의 류시하이에게 보내 함께 고증한 결과 고구려 장수왕 때인 기유년(469)이라고 판명되었다. 이는 후에 병술(446)이라 새겨진 글자가 나옴으로써 기축년(449)으로 정정되었다. 기축명(己丑銘) 평양성벽 돌은 조선 최고의 골동 서화수집가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입수하여 그의 아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소장해 오다가 지금은 이화여대 박물관에 있다. 그해 옌징에서 예즈셴이 서책을 보내왔다. 추사는 내각 검교대교(檢校待敎) 겸 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자 그가 주장하던 개혁의 바람은 잠잠해지고 말았다. 순조를 앞세워 다시 정권을 잡은 김조순 가문은 효명세자의 죽음에 대해 김노경, 김노(金潞), 홍기섭(洪起燮), 이인부 등 이른바 '익종(翼宗) 4간신'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탄핵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부사과(副司果) 김우명은 비인현감 시절 암행어사였던 추사에게 봉고파직당한 구원(舊怨)을 앙갚음하려고 거짓 상소를 올렸다가 되레 순조의 분노를 사서 관작을 삭탈당했다. 김우명이 관직을 삭탈당하자 안동 김씨 일파가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이틀 뒤 부사과 윤상도(尹尙度, 1768∼1840)는 호조 판서 박종훈(朴宗薰), 전 유수 신위(申緯), 어영대장 유상량(柳相亮)을 탐관오리로 탄핵하면서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도리어 군신 사이를 이간한다는 이유로 윤상도는 추자도(楸子島)로 유배되었다. 


김우명의 상소로 시작된 권력투쟁의 여파는 김노경에게도 닥쳐왔다. 10월 8일 순조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김노경은 윤상도를 배후조종한 혐의로 관작(官爵)을 삭탈당하고 전라도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 그해 옌징에서 롼창셩(阮常生)이 '싀구원린뻔(石鼓文臨本)', 류시하이(劉喜海)가 '빠이싀셴준베이(白石神君碑)' 탁본을 보내왔다. 이듬해 평양의 명필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 1772∼1840)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1832년 추사의 벗 권돈인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추사는 권돈인에게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黃草嶺眞興王巡狩碑, 황초령비)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그의 대표적인 논고인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서 북한산비와 황초령비 비문을 성세하게 고증했다. 1833년 김노경은 고금도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추사는 '정부인광산김씨지묘(貞夫人光山金氏之墓)'의 전면 글씨를 썼다. 이듬해 예즈셴이 옌징에서 서화 및 붓, 먹, 벼루 등을 보내왔다. 


1834년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공(李玜, 1790∼1834)이 죽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 재위 1834∼1849) 이환(李奐, 1827∼1849)이 즉위했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의 빈인 풍양 조씨(豊壤趙氏) 가문의 협조와 견제 속에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는 노론 벽파를 철저히 숙청하기 시작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1835년(헌종 1) 김노경은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강진으로 정약용을 만나러 가는 길에 초의는 남종화(南宗畵)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9∼1892)의 그림 한 폭을 가져다가 추사에게 보여줬다. 한눈에 그림을 알아본 추사는 허련을 한양으로 불러올렸다.  


1836년 4월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어 7월에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 이듬해 옌징에서 왕시순이 많은 서책을 보내왔다. 1838년 추사 나이 53세 때 생부 김노경이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복상(服喪)을 위해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이듬해 5월 25일 추사는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8월 허련은 초의의 주선으로 월성위궁으로 추사를 찾아뵙고, 그의 문하에서 체계적인 서화 수업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허련은 대둔사(大芚寺, 지금의 대흥사)로 초의를 찾아뵈었다.  

 

1840년 6월 병조 참판으로 있던 추사는 동지부사(冬至副使)를 제수받았다. 하지만 대사간 김우명  등 안동 김씨 일파가 사간원과 사헌부 양사(兩司)를 장악하자 10년 전의 '윤상도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 이미 고인이 된 김노경을 공격하고 나섰다. 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순원왕후 대비 김씨(大妃金氏)도 경주 김씨를 대표하는 추사의 제거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대비 김씨의 명으로 추자도에 유배된 윤상도는 다시 끌려와 국문을 당했다. 윤상도는 전 승지 허성(許晟)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했고, 허성은 안동 김씨 김양순(金陽淳, 1776~1840)의 위협과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했다. 궁지에 몰린 김양순은 추사가 윤상도 부자의 상소문 초안을 잡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추사와의 대질심문에서 거짓말임이 드러나자 김양순은 다시 죽은 이화면(李華冕)을 끌어들이는 등 집요하게 추사를 공격하다가 8월 27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윤상도 부자는 역적모의에 참여한 죄목으로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을 당했고, 허성도 처형되었다. 탄핵 대상과 탄핵 주체가 함께 처벌을 받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윤상도 사건'의 배후에 오히려 안동 김씨 일파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급하게 마무리되는 국면을 맞이했다. '윤상도 사건'은 안동 김씨 일파가 당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추사와 그의 벗인 우의정 조인영, 형조 판서 권돈인 등을 숙청하기 위해 벌인 정치공작임이 드러났다. 추사도 무려 6차례의 국문에서 36대의 곤장을 맞아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 오랜 벗인 판돈녕부사 김유근은 김조순의 아들이자 순원왕후의 오빠였기에 추사를 구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당시에는 중풍으로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또 다른 벗인 우의정 조인영이 '관련자들이 모두 죽고 없는 상황에서 고문은 잘못이다.'라고 상소하여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다. 


추사는 1840년 9월 기약없는 유배길에 올라 제주(濟州) 대정(大靜)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죽은 생부 김노경은 관작 추탈(追奪)되었다.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면서 벗 권돈인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모질도(耄耋圖)'를 그려 주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정면을 응시한 고양이 그림이다. 부릅뜬 눈과 살짝 들어올린 꼬리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눈썹은 위를 향해서 곧게 곤두섰고, 수염은 옆으로 곧게 뻗어나갔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 또한 범상치 않다. 입과 이마에는 쥐를 잡아먹었는지 진한 색칠이 되어 있다. 불굴의 기개와 의지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추사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탄압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는 곤경에 처해서도 이에 굴하지 않는 기개와 의지를 고양이에 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드러내놓고 표현하면 자칫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고양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수단을 통해서 자신을 박해하는 세력에 던지는 강력한 경고와 저항의 메시지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 고양이는 바로 추사 자신이다. 


'모질도(耄耋圖, 출처 세계일보)'


'추사 코드'의 작가 이성현도 추사를 예술가보다는 정치가에 중점을 두고 '모질도'에서 코드를 읽어내고 있다. 그는 화제의 내용, 고양이가 늙었고, 피가 묻은 듯한 주둥이가 쥐(안동 김씨 세도정권, 또는 간신의 은유)를 잡아먹은 모습이며, 쉰이 넘은 나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귀양길에 오른 상황에서 그렸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정치적 탄압에 대한 추사의 복수심을 모질도를 통해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耄)는 나이가 80〜90세, 질(耋)은 70~80세 노인을 말한다. 중국어로 耄[mào]는 고양이 貓[māo], 耋[dié]는 나비 蝶[dié]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고양이와 나비 그림은 장수를 축수하는 의미가 있다. 화제는 '作於帶方道中(대방의 길에서 모질도를 그리다)'이라 적혀 있다. 이 그림은 일제시대 미술품 대수집가 장택상(張澤相)이 소장하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 사진은 일제시대 경매 도록에 실린 것이다.


대방(帶方)은 어디일까?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여지승람'에서 대방은 낙랑국(樂浪國)의 남쪽에서 백제(百濟)와의 사이에 있던 대방국(帶方國)으로 비정하고 있다지금의 황해도(黃海道) 사리원(沙里院)과 봉산(鳳山) 일대의 지역이다. 북대방(北帶方)은 지금의 평안북도 지방을 일컫다는 것이다. 남대방(南帶方)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 탕나라에서 남원(南原) 일대에 성을 쌓고 대방성(帶方城)이라 했고,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에 남원에 대방소경(帶方小京)을 설치한 적이 있으므로, 남원의 고호(古號)를 남대방이라 이른다고 했다. 대방에 대해 유홍준은 전라도 남원, 이상국은 황해도 사리원이라고 각각 주장했다.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모질도'에 대해 '완당이 유배가는 도중 남원을 지나면서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추사는 1840년 9월 2일 윤상도의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유홍준의 견해에 따르면 '모질도'의 제작 시기는 1940년 9월~12월이라고 봐야 한다. '추사정혼(秋史精魂)'의 공동저자 이영재와 이용수는 '모질도'의 제작 시기를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올라오는 1848~1849년으로 보고 있다. 이상국의 견해에 따르면 '모질도'의 제작 시기는 권돈인의 진종조례론(眞宗弔禮論)의 배후조종자로 찍혀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를 떠난 1851년 무렵이다. 추사는 유배 가는 길에 들른 황해도 사리원을 대방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학자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지리고(地理考)’ 중 ‘남대방주고(南帶方州考)’에서 남대방(南帶方)은 지금의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이라고 했다. 남원을 대방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여지승람'의 오류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정복의 견해가 옳다고 본 서예가 노재준은 당시 남원은 유배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대방을 나주로 확정했다. 추사는 유배 가는 도중에 나주를 지날 때 '모질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無量壽閣(무량수각)' 편액(출처 지리99)


제주도를 향해서 가다가 대둔사에 들른 추사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을 내리게 한 다음 자신이 써준 '大雄寶殿' 편액을 걸게 하였다. 그는 이때 '量壽閣(무량수각)' 현판 글씨도 써주었다. 무량수각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고도 한다.


1841년 2월 허련은 대둔사에 들렀다가 제주도 대정으로 추사를 찾아뵈었다. 6월 허련은 중부(仲父)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에서 나올 때 추사가 쓴 '一爐香室(일로향실)' 글씨를 가지고 나와 대둔사의 초의에게 전해주었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추사는 그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추사가 서예에 입문한 처음에는 둥치창체(董其昌體)를 익히다가 서법의 근원을 한대의 예서체에 두고 이를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였다. 나아가 중궈와 조선 비문의 서체를 연구하고 재해석하여 마침내 독창적이며 독보적인 추사체를 창안했던 것이다.  


1842년 11월 13일 추사의 재혼 부인 예안 이씨(禮安李氏)가 예산 향리에서 55세로 별세했다. 1843년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옌징에서 꾸이푸(桂馥)의 '완쉬에지(晩學集)'와 윈징(惲敬)의 '따윈산팡지(大雲山房集)'를 구해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초의와 허련은 제주도에 가서 추사의 부인상에 조문했다. 그해에 '伴圃遺稿習遺序(반포유고습유서)'를 썼다. 이듬해 봄에 허련은 제주도에서 나오고, 추사는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를 그려서 이상적에게 주었다. 1845년 이상적은 옌징에 갈 때 '세한도'를 가지고 가서 칭나라 명사(名士) 16인의 제사(題辭)를 받았다. 


추사는 유배지 제주에서 '水仙花(수선화)'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수선화는 신비, 자존심, 고결을 상징하는 꽃이다. 추사는 칭나라 옌징에서 수선화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흔히 자라는 수선화에서 자존심 하나로 귀양살이를 견디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水仙花(수선화) - 김정희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한 떨기 겨울의 정령인가 송이송이 둥글고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그윽하고 담백한 그 성품 차갑게 빼어났네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이정체) 매화 고상타 하지만 뜨락을 못 벗어나는데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해탈한 신선을 맑은 물에서 정말로 보누나


1846년 6월 3일 추사는 회갑을 맞았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김상무(金商懋, 1819~1865)를 양자로 들였다. 추사로부터 서체를 배운 김상무는 글씨를 잘 썼다. 그해 9월 고향 예산에 있는 추사 가문의 원찰 화암사(華巖寺)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추사는 이를 기념하여 '無量壽閣(무량수각)', '詩境樓(시경루)' 등의 글씨를 써서 화암사에 보냈다.


예산 오석산(烏石山, 용산) 화암사


1847년 봄 허련은 제주도로 스승 추사를 찾아뵈었다. 1848년 12월 6일 추사는 63세가 되어서야 마침내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났다. 장장 8년 3개월의 기나긴 귀양살이였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둔사 들른 추사는 자신이 내리게 했던 이광사의 '大雄寶殿' 편액을 다시 가져와서 걸게 했다. 추사는 제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많은 반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강릉김씨묘비(江陵金氏墓碑)' 전면에 글씨를 썼다. 1849년 유배에서 돌아온 추사는 예산의 가산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용산 한강변의 마루도 없는 집에서 기거했다. 추사의 집에서는 한강 건너 노량진과 강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갈매기들이 바라다보였다. 강상(江上) 시절 추사는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란 작품을 남겼다.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 개인 소장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는 추사의 서재 이름이다. '殘書(잔서)'는 '남아 있는 글씨', '頑石(완석)'은 '고집스러운 돌, 무뚝뚝한 돌'이다. '頑(완)'은 ‘둔하다, 어리석다’는 뜻이다. 추사 연구가들은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를 '희미한 글씨가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돌이 있는 누각 또는 고비(古碑)의 파편을 모아둔 서재'로 출이하고 있다.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는 추사체의 멋과 개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명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위쪽은 가로획을 가지런하게 정렬하여 단정함을 나타냈고, 아래쪽은 세로획을 들쭉날쭉 자유분방하게 운필하고 있다. 유홍준의 표현을 빌자면 '빨래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축축 늘어진듯한 분방한 리듬이 있으며, 중후하면서도 호쾌하고 멋스러우면서 기발한 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빨래줄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제멋대로 휘날리는 듯한 변화를 주고 있어 산만한 듯하지만 전체적인 조화는 잘 이루어진 매우 기발한 작품이다. 서체의 모든 필법이 다 갖춰져 있어 중후하면서도 호쾌한 느낌을 주는 멋진 글씨다. 


낙관은 ‘三十六鷗主人(36구주인)’으로 되어 있다.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던 추사는 '三十六(36)'에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 36은 9의 배수이다. '주역'에서는 9를 불안정한 노양수(老陽數)로 본다. 9수를 얻으면 양(陽)의 동효(動爻)가 되고, 이는 음효(陰爻)로 바뀌기 때문이다. 즉 꽃이 활짝 피듯 다 이뤘으니 이제 떨어질 일만 남은 것이다. 


작가 강희진도 '추사 김정희'에서 36이 9의 배수임을 전제하고 '주역에서 이 9를 경계하기를 나서지도 말고, 벌리지도 말고, 대들지도 말기를 권한다. 부중주정(不中不正)하여 더 나갈 바가 없으니 나아가면 뉘우침만 남는다. 9는 이런 항룡(亢龍)의 수로 늙은 용은 힘을 쓸 수 없는 의미로 회한을 나타냄으로써 여기서는 자조적인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강제된 은퇴에 대한 역설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화가 이성현은 '殘書頑石樓(잔서완석루)'에 정적의 눈을 피해 세도정치를 비판한 추사의 개혁사상을 담은 코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글씨를 ‘왕가의 족보를 꿰어 맞춰(殘書) 아둔한 종친(頑石)을 왕(강화도령, 철종)으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대왕대비의 치맛바람(樓)으로 세 번만에 성사되었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 전거로 '숭싀(宋史)'와 '싀징(詩經)'을 들고 있다. 이성현은 '숭싀'에서 '잔서(殘書)'는 '상대를 설 득하기 위해 옛 자료를 모아 작성한 글'이라고 풀이했다. '書'자의 아래에 '가로 曰' 대신 '사람 者'를 채우고, '者'의 대각선 획을 세 번에 걸쳐 완성한 것은 세 번만에 왕위 계승권자로 결정되었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그는 '싀징'에서 바위(岩)나 돌(石)은 천자의 종친이란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예를 들어 '완석(頑石)'이 '아둔하고 고집 센 종친'을 지칭한다고 주장했다. '石'자를 보면,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은 대각선 획이 두 번에 걸쳐 이어 붙였는데, 이는 안동 김씨들이 종친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대비의 치맛바람을 빌려 세 번만에 성사시킨 것을 의미한다는 풀이다. 이성현은 또 '누각 樓'자 우측 아래의 '여자 女'를 3획으로 그린 뒤 가필을 하여 획을 이어 붙인 것도 추사가 '치마를 휘젓고 있는 계집'이란 뜻을 그려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철종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친정식구들에게 권력을 몰아주던 대비의 치맛바람을 ‘樓’자에 담아내기 위해 추사는 특별한 모양의 '女'자가 필요했다는 분석이다. 상당히 기발하면서도 득특한 풀이다. 추사가 실제로 그런 코드를 숨겼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해 1월 허련은 신관호(申觀浩)의 인도로 헌종(憲宗, 재위 1834∼1849) 이환(李奐, 1827∼1849)을 알현했다. 이환이 안부를 묻자 허련은 추사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본 대로 아는 대로 전했다. 6월부터 7월까지 추사는 김수철(金秀哲), 허유(許維), 이한철(李漢喆), 전기(田琦), 유숙(劉淑), 유재소(劉在韶), 김계술(金繼述) 등의 제자들을 지도한 뒤 이들의 그림과 글씨를 품평한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을 썼다. 


1849년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안동 김씨의 옹립으로 강화도령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이변(李昪, 1831~1863)이 즉위했다.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철종의 배후에서 안동 김씨 일파는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1850년(철종 1) 경 추사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경북 영천시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주지 혼허 지조(混虛智照)의 부탁을 받고 일주문(一柱門)의 '銀海寺' 현판을 비롯해서 금당(金堂)의 '大雄殿(대웅전)', 종루(鐘樓)의 '寶華樓(보화루)', 불광각(佛光閣)의 '佛光(불광)', 다실인 '一爐香閣(일로향각)' 현판과 은해사 산내암자인 백흥암(百興庵)의 '山海崇深(산해숭심)', '十笏方丈(시홀방장)' 편액과 여섯 폭 주련(柱聯)을 썼다. 


은해사 보화루


은해사는 1847년에 큰불이 나서 모든 전각이 불에 탔다. 혼허 주지는 3년 동안 큰 불사를 벌인 끝에 불에 탄 전각들을 다시 세운 뒤 현판 글씨를 추사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銀海寺' 현판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가 풀려 돌아온 1849년 정월에서 다시 1851년 가을 북청으로 유배 갈 때까지 약 2년 동안 한양에서 살 때 쓴 것으로 보인다. 


1851년 6월 철종의 4대조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형인 진종(眞宗,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신주를 종묘(宗廟)의 정전(正殿)에서 영녕전(永寧殿)으로 조천(祧遷)하는 문제를 두고 좌의정 김흥근(金興根), 좨주(祭酒) 홍직필(洪直弼) 등 친(親) 안동 김씨 세력과 영의정 권돈인, 추사 등 반(反) 안동 김씨 세력 사이에 또다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정치집단 간 권력투쟁이었던 이 예송(禮訟)을 이른바 신해조천의(辛亥祧遷議) 또는 신해조천예론(辛亥祧遷禮論)이라고 한다. 김흥근은 안동 김씨 세도가의 수장, 홍직필은 노론(老論), 추사는 조부 김이주와 부친 김노경에 이어 노론의 벽파였다. 권돈인과 추사 등은 진종이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종묘에서 조천할 수 없다는 불천론(不遷論), 김흥근과 홍직필 등은 제왕가에서는 왕위의 승통을 중시하므로 헌종과 철종 사이에는 부자의 도리가 있고, 진종은 4대의 제사 대수를 넘었으므로 마땅히 조천해야 한다는 조천론(祧遷論)을 주장하였다. 조천론이 승리하자 권돈인은 파직을 당하고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되었으며, 추사도 7월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침계(梣溪)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1852년 6월 '황초령진흥왕순수비이건비문(黃草嶺眞興王巡狩碑移建碑文)'을 쓴 추사는 8월 13일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果川) 주암리(住岩里)로 돌아와 과지초당(瓜芝草堂)에 은거(隱居)한 채 학문과 예술에 전념했다. 그해 12월 윤정현은 함경도 관찰사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68세의 추사는 '여석파흥선대원군(與石坡興宣大院君)', '제석파난권(題石坡蘭券)'을 썼다.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1855년 봄 허련은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70세의 추사를 찾아뵈었다. 그해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성담 의전(聖覃倚琠)의 진영을 찬한 '성담상게(聖覃像偈)', '정문공김수근묘표음기(正文公金洙根墓表陰記)', 전북 고창 선운사(禪雲寺)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전북 임실군 임실읍 효충서원(孝忠書院)의 '朝鮮孝子贈敎官金公箕鍾旌閭碑(조선효자증교관김공기종정려비)'와 '朝鮮孝子贈參判金公福奎旌閭碑(조선효자증참판김공복규정려비)'를 썼다. 


1856년 늦은 봄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은 몇 사람과 함께 한양의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던 71세의 추사를 찾아 뵙고 그 정황을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로 남겼다. 그해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여손)' 대련 글씨를 썼다. 


봉은사 '板殿(판전)' 편액


10월 7일 추사는 봉은사(奉恩寺) 경판전(經板殿)을 위한 '板殿(판전)' 편액 글씨를 썼다. 고졸미(古拙美)와 무심(無心)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 명작은 추사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板殿(판전)' 편액 글씨를 3일 뒤인 10월 10일 추사는 세상을 떠났다. 1858년 추사가 찬하고 쓴 백파율사비가 선운사에 세워졌다.


1857년 추사의 제자이자 조선 후기 천문학의 일인자였던 육일재(六一齋)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은 추사의 서간문 모음집 '완당척독(阮堂尺牘)' 2권 2책, 시집 '담연재시고(覃揅齋詩藁)' 7권 2책을 펴냈다. 1868년(고종 5) 남병길, 민규호(閔奎鎬)가 산정(刪定)한 추사의 문집 '완당집(阮堂集)' 5권 5책이 간행되었다. 1934년 추사의 동생 김상희의 현손 김익환(金翊煥)이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 10권 5책을 간행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추사만큼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인물도 드물다. 추사는 단순한 예술가나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살았던 신지식인이었으며, 신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라는 구문화 체제에서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케 한 선각자였다.


추사는 조선의 실학(實學)과 칭나라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經學)과 금석학(金石學), 불교학(佛敎學)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역서변(易筮辨)' 등의 글에는 경학자(經學者)로서 추사의 진면목이 나타나 있다. 니혼(日本)의 동양철학자(東洋哲學者)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는 추사를 '조선의 청조학(淸朝學) 제일인자(第一人者)'라고 꼽았다. 


추사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우러 추사체를 창안했으며,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년∼1584),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 추사를 조선시대 4대 명필이라고 한다. 4대 명필 중에서도 추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추사는 시문(詩文)에 있어서도 대가였다. 시인 위사(韋史) 신석희(申錫禧, 1808~1873)는 '추사는 원래 시문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이 천하에 떨치게 됨으로써 그것이 가려지게 되었다'고 평했다.


추사는 불교 교리에도 밝아 해동(海東)의 유마거사라고도 불렸다. 유마(維摩)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재가 제자이자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이다. 당시 승단이 교권을 장악하고 승원(僧院)에 안주하며 학문적인 연구에만 몰두하자 유마거사, 승만부인(勝鬘夫人) 등 재가신도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출가승단을 비판하면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났다. 출가승려들보다 불교 교리에 뛰어났다고 알려진 유마거사나 승만부인처럼 추사가 그랬다. 추사는 초의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백파 같은 대선사와는 일대 (禪)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추사의 시와 글씨, 그림에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녹아들어 있다. 불교학자 신암(薪菴) 김약슬(金約瑟, 1913~1971)은'추사의 선학변(禪學辨)'이라는 논문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그 핵심이 모두 불교에 있다고 주장했다.  


추사는 제자복이 많다는 말을 들을 만큼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다. 이는 추사가 당시로서는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인재관(人材觀)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추사는 '인재설(人材說)'에서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는 애당초 남북이나 귀천의 차이가 없다'고 천명했다. 추사가 중시한 것은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그는 또 견문을 넓혀야 함을 강조했다. 


추사의 주요 제자들 중 양반 가문 출신의 문인에는 철종과 고종 연간 의정부 우참찬, 대사헌, 예조 판서 등 고위직을 지낸 이재(頤齋) 유장환(兪章煥, 1798~1872), 추사의 조카사위로 당대 저명한 시인 이당(怡堂) 조면호(趙冕鎬, 1803~1887),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외교가 위당(威堂) 신헌(, 1811~1884), 조선 후기 천문학의 일인자 유재(留齋) 남병길(南秉吉, 1820~1869), 조선 후기 3대 시인이자 금석학자 자기(慈屺) 강위(姜瑋, 1820~1884),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이희(李熙, 1852~1919)의 생부로 묵란(墨蘭)에 능했던 흥선대원군 석파(石坡) 이하응, 온건개화파 문신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이끈 추당(秋堂) 서상우(徐相雨, 1831~1903), 친일개화파와는 달리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개화정책을 추진한 문신이자 서예가 표정(杓庭) 민태호(閔台鎬, 1834~1884) 등이 있다. 


역관(譯官) 출신 제자에는 이상적을 비롯해서 박규수, 유대치(劉大致)와 함께 조선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서화가이자 금석학자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추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서예가이자 시인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1831~1915) 등이 있다. 이들은 추사와 옌징 학계의 교류를 이어주었다.  


추사의 제자 출신 서화가(書畵家), 특히 화가(畵家)들은 대부분 스승을 따라 격조 높은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추구하였다. 이들 제자에는 추사댁 사랑에 머물면서 그림을 배워 남종화(南宗畵)를 토착화한 선비화가 허련을 비롯해서 독자적인 남종화의 세계를 이룩한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37), 조선 후기 묵매화(墨梅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 1789~1866), 19세기 대표적인 초상화가(肖像畵家)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 1808~?), 추사가 가장 아꼈던 제자였으나 스물아홉에 요절한 문인화가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1854), 인물화와 풍속화, 산수화에 두루 능했던 도화서(圖畵署) 화원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1873), 남종화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던 서화가 학석(鶴石) 유재소(劉在韶, 1829~1911), 조선 후기 이색화풍의 대표적인 화가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 ?~?) 등이 있다.  


추사는 스스로 '내 70평생 10개의 벼루를 구멍내고, 붓 1,000자루를 닳게 했다'고 말했다. 보통사람들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공력이다. 추사의 예술혼은 이 말 한 마디에 다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더이상 무슨 사족이 필요하리요! 추사는 혼신의 힘을 다한 절차탁마(切磋琢磨)로 예술혼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생을 마감한 실학자요 서화가였다.      


2014. 3.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