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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역사를 찾아서 떠나는 정자 기행 - 관동제일루 삼척 죽서루 15

林 山 2018. 10. 6. 10:40

1823년(순조 23) 경 위항시인(委巷詩人)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함경도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을 떠나는 길에 삼척의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칠언절구 한 수를 지어 읊었다. 


竹西樓(죽서루) - 조수삼 


三陟西樓大海經(삼척서루대해경) 관동의 삼척 죽서루 큰 바다에 걸렸는데

石屛風竹共亭亭(석병풍죽공정정) 병풍바위 바람 이는 대나무 모두 우뚝해

秋娘唱罷關東曲(추랑창파관동곡) 추랑이 정철 선생의 관동곡 노래 마치자

十二欄頭遠峀靑(십이난두원수청) 열두 난간 머리에 아득한 봉우리 푸르네


'秋娘(추랑)'은 '옛날 미인이었던 사추랑(謝秋娘)과 두추랑(杜秋娘), 늙어서 파리해진 여자, 노처녀, 일반적으로 미녀나 기녀' 등의 뜻이 있다. '關東曲(관동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을 말한다. 


조수삼의 본관은 한양, 초명은 경유(景濰), 자는 지원(芝園) 또는 자익(子翼)이다. 호는 추재 또는 경원(景畹)이다. 조원문(元文)의 아들이며, 위항시인 조경렴의 동생이다.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역과중인(譯科中人)이라는 신분 때문에 1844년(헌종 10) 83세가 되어서야 진사시에 합격했다. 강진, 조희룡 등의 위항시인들과 사겼다. 김정희, 한치원, 조인영 등 당대 사대부·세도가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청나라를 여섯 차례나 다녀왔으며,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자연과 풍물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역사와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편시도 남겼는데 홍경래의 난을 다룬 장편 오언고시 '서구도올(西寇檮杌)', 1823년 경 61세에 함경도 지방을 여행하면서 민중들의 고난을 담은 '북행백절(北行百絶)' 등이 유명하다. 도시인의 생활을 산문으로 쓴 뒤 칠언절구를 덧붙인 '추재기이(秋齋紀異)',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짧은 산문과 시로 구성된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등은 당대를 살아간 민중의 생활상과 지식인의 의식 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추재집(秋齋集)' 8권 4책이 전한다.


작자 미상의 이 죽서루도는 1827년(순조 27)에 제작된 '관동팔경첩(關東八景帖, 국립춘천박물관 소장)'에 실려 있다. 이 그림은 죽서루를 북쪽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렸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드론을 띄워서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시점이다.   


작자 미상의 죽서루도(종이에 엷은 색, 48.7 × 37.3cm, 관동팔경첩,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죽서루 곁에 있는 두 그루의 구부정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관아 북서쪽 바로 옆에는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고, 오십천에는 물오리들이 한가로이 헤엄을 치고 있다. 어린이를 앞세운 선비풍의 사람이 오십천에 놓인 섶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죽서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절벽 위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은 오십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뒤로 봉황산을 원경으로 그려 넣었다. 1800년대에는 죽서루 앞 오십천에 섶다리가 놓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직한 해서체로 운필한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편액은 1837년(헌종 3)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의 작품이다. 바다의 신선(神仙)이 노닐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규헌은 죽서루에 올라 마치 자신이 신선이 된 듯한 감흥을 붓글씨로 표현하였다.


죽서루 '해선유희지소' 편액


이규헌은 1835년(헌종 1) 7월에 삼척부사로 왔다가 1839년(헌종 5)에 능주목사(綾州牧使)로 옮겨갔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부세(賦稅) 감면, 유생 교육, 백성 교화에 노력하는 등 선정(善政)을 펼쳤다고 한다. 이규헌이 떠난 뒤 삼척주민들은 그를 위해 선정비(善政碑)와 흥학비(興學碑)를 세웠다. 


1846년(헌종 12) 삼척부사로 부임한 명원(明遠) 서호순(徐灝淳, 1789~1848)은 그 이듬해(1847년) 죽서루에 걸려 있는 선조 서성의 시 '차', '화운정부백'에서 운자를 빌어 '敬次藥峯先祖板上韻(경차약봉선조판상운)'을 지었다. 운자는 서성의 시 '차'에서 딴 官(관), 閑(한), 間(간), 巒(만), 山(산)과 정추의 '차삼척죽서루운'에서 딴 流(류), 樓(루), 留(류), 鷗(구), 州(주)다. 


서호순의 '경차약봉선조판상운' 편액


敬次藥峯先祖板上韻(경차약봉선조판상운) - 삼가 약봉 선조의 판상시에서 차운하다(서호순)


自憐潦到未休官(자련요도미휴관) 늙어서도 벼슬 그만두지 못한 것 서글펐는데

晩着名區特地閒(만착명구특지한) 늘그막에 경치 좋은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네

百尺樓臨湖海上(백척루임호해상) 까마득한 누각 호수와 바닷가에 다가서 있고

四時人在宕台間(사시인재탕대간) 사계절 내내 사람들은 오재공의 터에 있나니

川流自位逢層壁(천류자위봉층벽) 냇물은 저절로 흘러 높다란 절벽에 부딪히고

蜃氣休侵障列巒(신기유침장열만) 신기루는 늘어선 산들에 막혀 침범하지 않네

先蹟猶傳棠下詠(선적유전당하영) 선조의 자취 외려 당하제명기 읊음에 전하고

後孫空醉孟陽山(후손공취맹양산) 후손은 맹양산에서 괜스레 술에 취해 있구나


宦跡圻湖舊俗流(환적기호구속류) 벼슬살이의 자취는 기호의 옛 풍속에 흐르고

栖遲天餉七分樓(서지천향칠분루) 편히 쉬라고 하늘이 칠분루 고을에 보내셨네

緬惟吾祖襜帷駐(면유오조첨유주) 돌아보면 우리 선조의 수레 머물렀던 곳인데

非直當年麗藻留(비직당년려조류) 그때의 아름다운 글만 남아있는 것이 아닐세

坐對空溕渾是畵(좌대공몽혼시화) 앉아서 안개 바라보자니 온 천지가 그림같고

俯臨澄碧自疑鷗(부림징벽자의구) 푸르른 오십천 내려다보니 갈매기라도 된 듯

丹砂未必求句漏(단사미필구구루) 단사를 꼭 구루산에서만 구할 필요가 있을까

白首眞堪寄此州(백수진감기차주) 늙었어도 이 고을에서 벼슬살이 할 만하구나


丁未孟冬後孫灝淳(정미맹동후손호순) 1847년 음력 10월 후손 호순 


교통이 불편했던 조선시대만 해도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삼척으로 벼슬살이하러 떠날 때는 유배라도 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삼척에 부임하면 산도 좋고 물도 좋아 별유천지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한양에서도 너무 멀고 외진 곳이라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니 풍류를 즐기는 자유를 만끽했을 것이다. 이 시는 나이 들어 삼척에 수령으로 부임한 것을 행운으로 여기면서 죽서루에서 선조 서성의 시판을 발견하고 느낀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自憐(자련)'은 '스스로 불쌍히 또는 가엾이 여기다.'의 뜻이다. '潦到(요도)'는 노쇠하여 거동이 완만한 모양이다. '宕(탕)'은 오재(悟齊) 이탕(李宕, 1507~1584)이라는 설도 있다. 이탕은 월성군(月城君) 이천(李薦)의 8대손,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이달존(李達尊)의 아들이다. 동몽교관(童蒙敎官), 강릉참봉(江陵參奉), 직장(直長), 평시서 령(平市署令), 사직서 령(司直令) 등을 지냈다. 이탕이 강릉참봉을 지내기는 했지만 그가 죽서루, 서성 또는 서호순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蜃氣(신기)'는 이무기가 토해 낸 기운이다. '본초(本草)'에 '이무기는 뱀 같으면서도 더 크고 뿔이 있어 용과 같으며, 갈기와 허리 이하에는 비늘이 거꾸로 되었고 제비를 즐겨 먹으며, 비가 오려면 기운을 토해 내어 누대(樓臺)와 성곽(城廓)의 모양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신기루(蜃氣樓)라는 말이 나왔다. '棠下(당하)'는 '당하제명기(棠下題名記)'이다. 1425년(세종 7)부터 작성하기 시작한 역대 경상도 관찰사의 인명록이다. 서성도 등재되어 있다. '당하제명기'는 경상도 관찰사의 활동과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당하'는 또 중국 고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 소공(召公)이 남국을 순행할 때 팥배나무(棠) 아래서 송사(訟事)를 처리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선정을 사모하여 감히 그 나무를 자르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하다. 어진 방백(方伯)의 선정(善政)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孟陽(맹양)'은 진(晉)나라 때의 문장가 장재(張載)의 자다. 장재는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자기 부친이 촉군태수(蜀郡太守)로 있을 때 촉군에 가서 부친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검각산劍閣山)을 지나다가, 험고함을 믿고 난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촉군 사람들을 두고 명문(銘文)을 지어 경계로 삼게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그 명문이 워낙 훌륭하여 진무제(武帝)의 명에 의해 검각산에 새겨졌다고 한다.(晉書 卷五十五) '圻湖(기호)'는 기호(畿湖)와 같은 말이다. 경기, 충청 지방을 가리킨다. '栖遲(서지)'는 '관직 따위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쉬는 일, 편안히 놀며 지냄, 은퇴하여 살아감,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여 시골에서 삶' 등의 뜻이 있다. 天餉(천향)'은 '하늘이 내려주는 양식, 하늘이 내리는 선물'이다. '七分樓(칠분루)'는 삼척부사가 공무를 보았던 동헌인 칠분당(七分堂)을 말한다. 칠분당의 옛 이름은 매죽각(梅竹閣) 또는 역근당(易近堂)이다. 지금은 도시계획에 의해 헐리고 없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緬惟(면유)'는 '아득히 생각건대'의 뜻이다. '襜帷(첨유)'는 가마나 수레에 치는 휘장이다. '麗藻(여조)'는 아름답게 지은 시문(詩文)이다. 홍필여조(鴻筆麗藻)는 시문이나 필력이 웅건하고 화려함을 가리킨다. '非直(비직)'은 비단(非但)이나 비특(非特)과 같다. 이때 '直(직)'은 '그저, 단순히'란 뜻이다. '澄碧(징벽)'은 맑고 푸른 빛이 도는 물이다. '丹砂(단사)'는 연단(鍊丹)을 해서 단약(丹藥)을 만들어 내는 광물의 이름이다. '句漏(구루)'는 '진서 권72(晉書 卷72)' <갈홍열전(葛洪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나라의 선인(仙人) 갈홍(葛洪)은 구루 지방에 좋은 단사가 난다는 말을 듣고 선약(仙藥)을 만들기 위해 구루의 영(令)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대림(大臨) 한진계(韓鎭棨, 1814~?)는 삼척을 유람하다가 죽서루에 올라 제영 칠언율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開(개), 徊(회), 來(래), 盃(배), 回(회)다. 그가 삼척에 다녀간 시기는 1868년 경 강원도 춘천부사로 나가 있을 때로 추정된다. 


竹西樓(죽서루) - 한진계


欄檻崔嵬逈壁開(난함최외형벽개) 난간은 높이 솟고 아득한 절벽 펼쳐지니

登臨作意一徘徊(등림작의일배회) 누각에 올라가서 한 번 거닐고 싶어지네

千年悉直灘聲在(천년실직탄성재) 천년의 실직국은 여울 소리 속에 있는데

五月頭陀爽氣來(오월두타상기래) 오월 두타산에 상쾌한 기운이 실려 오네

返照飜成樓上畵(반조번성루상화) 되비치는 빛은 누대 위에 그림을 이루고

奇雲忽入掌中盃(기운홀입장중배) 기이한 구름은 홀연 잔 속으로 스며드네

綠灣更欲探眞面(녹만갱욕탐진면) 푸른 물굽이에서 다시 진면목 찾고 싶어

小艇鳴檣傍岸回(소정명장방안회) 거룻배 노 젓는 소리 낭떠러지에 맴도네


거룻배를 타고 오십천을 유람하면서 근경과 원경을 읊은 뒤 죽서루에 올라가 거닐고 싶다는 심경을 읊은 시다. 천년 실직국의 역사와 함께 두타산의 의연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진계의 본관은 청주(淸州), 거주지는 경기도 용인(龍仁)이다. 고조는 한종집(韓宗集), 증조부는 한세녕(韓世寧), 조부는 한광악(韓光岳)이다. 부친은 한치준(韓致駿), 외조부는 박동선(朴東善)이다. 부인은 정의진(丁義晉)의 딸이다.


1849년(헌종 15) 한진계는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이강준(李綱峻), 강장환(姜長煥), 이현문(李玄文), 이응정(李應貞) 등과 함께 관록(館錄)에 선발되었고, 같은 해 임백능(任百能), 유세환(兪世煥), 이강준, 강장환 등과 함께 도당록(都堂錄)에 이름이 올랐다. 1859년(철종 10)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정재영(丁載榮)의 소에 의해 논죄를 받아 간삭(刊削)의 형을 받았으며, 함경감사 윤치수(尹致秀)의 논계(論啓)로 인해 죄를 받았다. 이후 교리, 집준(執尊)등을 역임하였는데, 1867년(고종 4) 9월 헌릉(獻陵)과 목릉(穆陵), 인릉(仁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제사를 지낼 때 집준으로 참여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다. 이후 춘천부사, 은산현감(殷山縣監), 금천군수(金川郡守) 등을 지냈다. 


1870년(고종 7) 3월 삼척부사로 부임한 서증보(徐曾輔, 1813~?)는 죽서루에 올라 선조 서성의 시 '차'에서 차운한 '敬次忠肅先祖板上韻(경차충숙선조판상운)', 이이의 '죽서루차운'에서 차운한 '敬次李文成公板上韻(경차이문성공판상운)', '辛未孟夏有吟(신미맹하유음)'을 지었다. 서증보는 서호순보다 항렬이 하나 더 위다. 이준민의 가문처럼 서성의 가문도 삼척과 인연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서증보의 '경차충숙공선조판상운' 편액


 敬次忠肅先祖板上韻(경차충숙선조판상운) - 삼가 선조 충숙공의 판상시를 차운하다(서증보)


海上猶能做好官(해상유능주호관) 바닷가에 있는 고을의 좋은 관리가 되어

竹樓公退讀書閒(죽루공퇴독서한) 공무 끝내고 죽서루에서 한가히 책 읽네

仙居弱水三千里(선거약수삼천리) 오십천은 신선들 사는 삼천리 약수 같고

梵宇淸風五百間(범우청풍오백간) 누각은 바람 시원한 오백 칸 범왕궁일세

逝者如斯無晝夜(서자여사무주야) 흐르는 물은 이처럼 밤낮으로 쉬지 않고

望之尤美幾峯巒(망지우미기봉만) 바라보매 더 멋진 산봉우리 그 몇이던가

己拚先祖詩多感(기분선조시다감) 선조의 시판을 닦으니 감회 더욱 새롭고

王考遺碑似峴山(왕고유비사현산) 왕고가 남긴 현산비 같아 눈물이 나누나


궁벽하지만 산자수명한 바닷가 고을 삼척에서 벼슬살이하는 즐거움과 죽서루에 걸린 선조 서성의 시판을 깨끗이 닦으면서 그 감회를 읊은 시다. 운자는 官(관), 閑(한), 間(간), 巒(만), 山(산)이다. 


'做好(주호)'는 '(일을) 해내다, 해 놓다, 자선을 행하다, 이루다' 등의 뜻이 있다. '好官(호관)'은 높고 중요한 벼슬자리를 말한다. '弱水(약수)'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부의 전설적인 강이다. '梵宇(범우)'는 승려가 불상을 모셔 놓고 불도를 수행하여 교법을 펴는 장소다. 범왕궁(梵王宮)과 같은 말이다. 범왕궁은 사바세계를 지키는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대범천왕(大梵天王)의 궁전인데, 절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逝者如斯無晝夜(서자여사무주야)'는 '논어' <자한(子罕)>편의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는도다.)'를 인용한 것이다. 중단 없는 공부를 강조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만물의 무상함을 탄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王考(왕고)'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이르는 말이다. '峴山(현산)'은 현수산(峴首山)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양번(襄樊)의 성(城) 남쪽에 있는 산인데, 동쪽으로 한수(漢水)를 굽어보고 있다. 타루비(墮淚碑, 눈물을 흘리는 비석)로 유명한 진나라 양호(羊祜)의 현산비(峴山碑)가 양양현(襄陽縣) 남쪽의 현수산에 있다. 타루비는 양호가 양양의 총독(總督)으로 있을 때에 덕정(德政)을 베풀었으므로 뒤에 양양의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현산에 비를 세우고, 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데서 유래한다. 


敬次李文成公板上韻(경차이문성공판상운) - 삼가 문성공의 판상시를 차운하다(서증보)


嶺東名擅竹西樓(영동명천죽서루) 대관령 동쪽 지방에서도 저 이름난 죽서루

石氣川光夏亦秋(석기천광하역추) 바위기운과 물빛 때문에 여름도 가을 같네

含白山中雲自出(함백산중운자출) 함백산 그 속에서 구름이 절로 피어오르고

鳳凰臺下水空流(봉황대하수공류) 봉황대 아래 오십천은 쓸쓸히 흘러서 가네

臨風每有飄飄興(임풍매유표표흥) 바람을 쐴 적마다 흥취가 초연히 일다가도

落日還生渺渺愁(낙일환생묘묘수) 해가 지면 도리어 근심이 아득히 밀려오네

回首蓬萊千里隔(회수봉래천리격) 머리 돌려 바라보는 봉래산 천리나 되는데

二年滄海狎眠鷗(이년창해압면구) 이년 동안 바닷가 한가한 갈매기와 친했네


아름다운 산수가 어우러진 죽서루의 경치를 노래하면서 함백산(含白山, 1,572.3m)이라는 원경을 제시하고 있다. 해가 지면 근심히 아득하게 밀려온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문성공은 이이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含白山(함백산)'은 태백산(1,567m)과 소백산(1,440m)을 포함한다는 뜻이 있다. '鳳凰臺(봉황대)'는 정라동(汀羅洞) 오십천 북쪽의 봉황산(鳳凰山, 149m) 정상부에 그 옛터가 남아 있다. 허목의 '척주지'를 보면 옛날에는 봉황산을 호악(虎岳)이라고 했다. 오십천이 휘돌아치면서 큰 소를 이룬 곳을 봉황지(鳳凰池) 또는 봉황담(鳳凰潭)이라고 했다. 봉황산이라는 이름이 봉황대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飄飄(표표)'는 '펄펄 나부끼다, 초연하다, 떠돌다', '渺渺(묘묘)'는 '일망무제하다, 그지없이 넓고 아득하다'의 뜻이다.


辛未孟夏有吟(신미맹하유음) - 신미년 음력 4월에 읊다(서증보)


海上遲遲獨倚樓(해상지지독의루) 바닷가 천천히 걸어와 누각에 홀로 기대

隨時景物一搔頭(수시경물일소두) 철따라 바뀌는 경치에 한 생각 잠기노라

白雲黃鶴今何在(백운황학금하재) 흰 구름속의 황학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大澤名山舊遠遊(대택명산구원유) 큰 호수와 명산은 예전에 놀던 벗들인데

擧目總非吾土美(거목총비오토미) 내가 머물기에 모두 멋진 곳은 아니지만

怡心還忘異鄕留(이심환망이향류) 마음 즐거우니 타향에 있는 것도 잊겠네

登臨杳有千年恨(등림묘유천년한) 누각에 오르자 천년 한 아득히 서렸는데

夕照蒼然兩鬢秋(석조창연양빈추) 저녁 햇살에 내 양쪽 귀밑머리 창연하네

碧海無東太白西(벽해무동태백서) 동쪽엔 끝없는 푸른 바다 서쪽엔 태백산

竹樓高興遠雲齊(죽루고흥원운제) 죽서루 높이 솟아 멀리 구름에 닿았구나

蒼茫悉直千年事(창망실직천년사) 실직국의 천 년 사적 아득하고 망망한데

五十川頭夕日低(오십천두석일저) 오십천 물가엔 저녁 노을 낮게 드리웠네

古竹藏西竹嶺東(고죽장서죽령동) 죽장사 터 서쪽에 있고 댓재는 동쪽인데

飛樓縹緲白雲中(비루표묘백운중) 죽서루는 아득히 구름 속에 높이 솟았네

如聞笙鶴來蓬島(여문생학래봉도) 봉도로 가는 생학의 울음소리 들리는 듯

五十川回碧海通(오십천회벽해통) 오십천 휘휘 돌아 푸른 바다로 흘러가네

樓臨無地水粼粼(누림무지수린린) 누각에 임하니 땅은 안보이나 물은 맑고

壁立超然出世塵(벽립초연출세진) 절벽은 높이 솟아 올라 세속을 벗어났네

隱約靑山多秀氣(은약청산다수기) 희미한 청산은 빼어난 기운 가득 품었고

此中如見採芝人(차중여견채지인) 산속에서 채약하는 은자 만날 것도 같아

雪晴月白五更風(설청월백오경풍) 눈발 그쳐 휘영청 새벽녘에 바람이 부니

一色乾坤萬里(일색건곤만리공) 만리 천지가 한 가지 색깔뿐 적막하구나

吟望玉京依北斗(음망옥경의북두) 시 읊으며 북두에 기댄 옥경을 바라보니

此樓疑是廣寒宮(차루의시광한궁) 이 죽서루가 바로 광한궁이 아닌가 싶네


선경과도 같은 죽서루에 오르니 여기가 곧 달 속에 있다는 상상 속의 광한궁 같다고 찬탄하고 있다. 죽서루에 올라 오십천과 백두대간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 


'辛未(신미)'는 1871년(고종 8), '孟夏(맹하)'는 음력 4월이다. '搔頭(소두)'는 '여자가 머리를 쪽을 찔 때, 말아 올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꽂아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장신구, 머리를 긁다, 비녀의 다른 이름, 사색하다, 생각에 잠기다.' 등의 뜻이 있다. '悉直(실직)'은 삼국시대 이전에 강원도 삼척군 지역에 있었던 부족국가다. '縹緲(표묘)'는 '멀고 어렴풋하다, 소리가 연하고 길게 이끌리는 모양, 가물가물하고 희미하다.'의 뜻이다. '笙鶴(생학)'은 신선이 타는 선학(仙鶴)을 말한다.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으로, 생황을 불기를 좋아하였는데, 봉새가 우는 소리가 났다.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도사(道士) 부구생(浮丘生)이 진을 인도하여 숭고산(嵩高山)에 올라간 지 30여 년에 환량(桓良)을 보고 "7월 7일 나를 구씨산에서 기다리라고 우리집에 고하라."고 하였다. 그날이 되자 과연 백학을 타고 산봉우리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蓬島(봉도)'는 영주산, 방장산과 함께 중국 전설상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로 동해 봉래산(蓬萊山)을 가리킨다. '粼粼(린린)'은 '맑고 깨끗하다.'의 뜻이다. '隱約(은약)'은 '말이 간략하나 뜻이 깊음, 은약하다, 분명하지 않다, 은은하다, 희미하다.' 등의 뜻이 있다. '雪晴(설청)'은 눈이 그치고 하늘이 갬이다. '廣寒宮(광한궁)'은 달 속에 있다는 상상 속의 궁전이다.


서증보는 서성-서경주(徐景霌)-서진리(徐晋履)-서문택(徐文澤)-서종엽(徐宗曄)-서명전(徐命全)-서정수(徐鼎修)-계(系) 서유준(徐有準)-서증보의 계보에서 보는 것처럼 서성의 8대손이 된다. 서호순은 서성-서경주-서진리-서문택-서종집(徐宗集)-서명관(徐命寬)-서열수(徐悅修)-계(系) 서유능(徐有能)-서정보(徐鼎輔)-계(系) 서호순(徐頀淳)의 계보에서 보듯이 서성의 9대손이 된다. 서증보와 서호순은 11촌 간이다. 


1875년(고종 12) 9월 삼척부사로 부임한 종산(鐘山) 심영경(沈英慶, 1829~?) 은 죽서루에 올라 그 빼어난 모습에 감탄하여 '次竹西樓板上韻(차죽서루판상운)'이란 시를 지었다. 누구의 시에서 차운했는지는 모른다. 운자는 樓(루), 流(류), 舟(주), 遊(유), 류(留)다


심영경의 '차죽서루판상운' 편액


次竹西樓板上韻(차죽서루판상운) - 죽서루에서 판상시를 차운하다(심영경)


關東第一竹西樓(관동제일죽서루) 대관령 동쪽에서 제일 가는 누각 죽서루

樓下溶溶碧玉流(누하용용벽옥류) 누각 아래로 푸른 물 도도히 흐르는구나

山靜鳥啼叢桂樹(산정조제총계수) 고요한 산 계수나무 숲에선 새들이 울고

月明人語木蘭舟(월명인어목란주) 달 밝고 거룻배에선 사람 말소리 들리네

百年泉石如相待(백년천석여상대) 백년토록 샘과 바위 나를 기다린 듯한데

千古文章不盡遊(천고문장부진유) 천고의 문장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구나

采采瓊華生遠思(채채경화생원사) 아름다운 꽃들 옛 추억 떠오르게 하는데

白雲歸駕故掩留(백운귀가고엄류) 흰구름 보고 돌아가는 수레 잠시 멈추네


죽서루와 오십천의 경치에 대해 관동에서 제일가는 누각으로 천고의 문장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고 예찬한 시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을 바라보면서 심영경이 떠올린 옛 추억은 무엇이었을까?


'桂樹(계수)'는 목서(木犀)다. '조선왕조실록'에 1483년(성종 14) 중국 사신 갈귀(葛貴)가 임금에게 '늦가을 좋은 경치에, 계수나무 향기가 자리에 가득하네'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늦가을에 꽃이 피어 강한 향기를 내는 나무는 따뜻한 지방에 정원수로 흔히 심는 목서라는 나무 밖에 없다. 중국 계림(桂林)에서 자라는 계수나무가 바로 이 목서다. 중국인들은 목서를 금계(金桂), 은계(銀桂), 단계(丹桂) 등으로 부른다. 옛 사람들이 말하는 계수나무와 가장 가까운 나무는 목서다. 또 15세기 명나라 화가 여기(呂紀)의 '계국산금도(桂菊山禽圖)' 등 중국의 옛 그림에 나오는 계수나무를 봐도 목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木蘭舟(목란주)'는 난주(蘭舟)라고도 한다. 보통 작은 거룻배를 가리킬 때 쓰는 시어(詩語)다. '泉石(천석)'은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의 경치, 산수(山水)를 말한다. '采采(채채)'는 '무성하여 많은 모양, 색채가 화려한 모양, 눈부신 모양'의 뜻이다. '掩留(엄류)'는 길을 가다가 멈춰서 머무르는 것이다. 


만포(晩圃) 최달식(崔達植)은 심영경의 '차죽서루판상운'에서 차운한 시를 지었다. 최달식은 삼척향교의 전교(典敎)를 지낸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시를 지은 연대는 심영경이 '차죽서루판상운'을 지은 1875년 이후가 될 것이다. 


최달식의 '경차심후종산판상운' 편액


敬次沈侯鍾山板上韻(경차심후종산판상운) - 삼가 심후 종산이 쓴 판상시를 차운하다(최달식)  


有名陟府有名樓(유명척부유명루) 저 유명한 삼척부에서도 이름 난 죽서루

樓下長川不盡流(누하장천부진류) 누각 아래 긴 오십천은 끝없이 흘러가네

古渡煙濃迷遠樹(고도연농미원수) 나루터에 안개 끼니 먼 나무들 흐릿하고

虹橋雲斷罷行舟(홍교운단파행주) 홍교에 조각 구름 걸리자 뱃놀이 멈추네

歌娥舞袖隨時出(가아무수수시출) 미인 가수 춤추는 소매 때때로 휘날리고

騷客吟唇暇日遊(소객음순가일유) 시인은 노래하며 한가한 날 즐기고 있네

一目難收千萬景(일목난수천만경) 한 번에 감상하기 어려운 수많은 절경들

十登無厭久淹留(십등무염구엄류) 수없이 올라도 싫지 않아 오래 머무르네


晩圃崔達植謹稿(만포최달식근고) 만포 최달식 삼가 쓰다


죽서루와 오십천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미인 가수는 소맷자락 휘날리며 춤을 추고, 시인은 한가하게 시를 읊는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 옛날 벼슬아치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시다.


'古渡(고도)'는 옛날의 나루터다. '虹橋(홍교)'는 양끝은 처지고 가운데는 둥글고 높이 솟아서 무지개처럼 보이는 다리, 무지개다리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이 죽서루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강산도권(金剛山圖卷)'에 실려 있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죽서루도 임모작(臨模作)으로 보인다.       


작자 미상의 죽서루도(30.5 x 43.8cm, 금강산도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과 김홍도의 죽서루도를 비교하면 구도와 경물 배치가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금강산도권'은 금강산과 관동지방의 명승지 75점을 그린 작자 미상의 장축 두루마리다.  


작자 미상의 죽서루도(28.0 × 36.7㎝, 금강산도화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이 죽서루도는 바위절벽을 다소 거칠게 표현한 강세황의 죽서루도 화풍을 연상케 한다. 건물의 배치는 김홍도의 죽서루도와 거의 같다. 정선의 죽서루도에는 응벽헌에서 이어지는 오솔길이 모호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오솔길과 사다리가 보다 또렷하게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