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0년(영조 46) 삼척부사로 있던 풍서(豊墅) 이민보(李敏輔, 1720∼1799)는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칠언율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운자는 樓(루), 秋(추), 流(류), 愁(수), 鷗(구)다.
竹西樓(죽서루) - 이민보
峽坼以來起此樓(협탁이래기차루) 골짜기 갈라진 이래 이 누각 세웠으니
洞天笙鶴歷幾秋(동천생학역기추) 하늘 학 타고 내려와 얼마나 지났을까
岩臨蛇窟張屛立(암림사굴장병립) 이무기 굴 절벽은 병풍처럼 벌려 있고
海動鯨濤隔坨流(해동경도격타류) 바다 뒤흔드는 파도 언덕 너머 흐르네
桂棹堪爲乘月飮(계도감위승월음) 계수나무 노 저어 달빛 타고 술마시니
仙區何必望鄕愁(선구하필망향수) 선향에서 하필 고향 향해 향수에 젖나
踈衿偶作烟霞主(소금우작연하주) 옷깃 헤치고 안개와 노을 주인이 되니
還愧靑緺襯白鷗(환괴청왜친백구) 외려 벼슬 창피해 갈매기 가까이 하네
선경과도 같은 명승지 죽서루 오십천에서 달밤에 술을 마시며 즐겁게 뱃놀이를 해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는 내용의 시다. 자연을 벗삼아 지내다 보니 벼슬살이도 부끄럽다는 심경을 읊고 있다. '靑緺(청왜)'는 인장을 매다는 푸른색의 인끈으로 한나라 때 지방관으로 나가는 사람이 차던 것이다. 전하여 지방 고을의 수령이 되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민보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눌(伯訥), 호는 풍서 또는 상와(常窩)다.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증손, 이조 참판 이희조(李喜朝)의 손자다. 아버지는 대사간 이양신(李亮臣)이다. 당파는 노론에 속했다.
이민보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시강원의 동궁요속(東宮僚屬)에 임명되었고, 장악원 정을 거쳐 1788년(정조 12)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1790년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791년 공조 판서로 장악원 제조를 겸임하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의 종묘악장(宗廟樂章)을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1791년 조흘강시관(照訖講試官) 윤영희(尹永僖)가 과거 시험 부정에 개입한 혐의로 의금부에 하옥되었을 때, 의금부 당상으로서 치죄를 잘못했다 하여 파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도총관을 거쳐 1795년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음관(蔭官)으로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조선 초 황희(黃喜)의 아들 황수신(黃守身)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그 뒤 노인직으로 판돈녕부사,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 충렬서원(忠烈書院)의 제35대 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풍서집(豊墅集)' 18권과 '상와고(常窩稿)', 노론의 시각에서 당쟁을 논한 '충역변(忠逆辨)'이 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곡리 영서마을에 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1780년(정조 4) 삼척부사에 임명된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은 죽서루에 올라 제영시 오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재주가 뛰어났던 그는 6, 7세에 벌써 문장을 이루었다는 평을 들었다.
竹西樓(죽서루) - 이헌경
坐倂高樓起(좌병고루기) 치솟은 누각에 홀로 앉아 앉노라니
垂垂星倒看(수수성도간) 별빛 서서히 내려와 물위에 비치네
長江隱檻底(장강은함저) 난간 아래 흐르는 장강은 은은한데
列峀讓簷端(열수양첨단) 별려선 여러 산들 처마끝에 걸렸네
浩劫穹岩火(호겁궁암화) 오래된 바위는 하늘로 솟아 붉은데
熱天風竹寒(열천풍죽한) 날씨 덥지만 바람맞는 대나무 차네
愁時任滄海(수시임창해) 근심 생기면 푸른 바다에 맡기나니
直北望長安(직북망장안) 곧바로 북쪽 향해 장안을 바라보네
이헌경의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성경(李星慶), 자는 몽서(夢瑞)다. 이제화(李齊華)의 아들이다. 1743년(영조 19) 진사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1751년 정언이 되었고, 그 뒤 사서, 지평을 지냈으며, 1763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곧 사헌부 집의에 올랐다. 1766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교리로 옮겼으며, 시독관(侍讀官)을 겸임하였다. 1777년(정조 1) 동부승지에 발탁된 뒤 참찬관 등을 거쳐 1780년 삼척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784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1788년 고령을 핑계로 은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1790년 한성부 판윤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간옹집(艮翁集)' 24권이 있다.
창암(蒼巖) 박사해(朴師海, 1711∼?)도 죽서루에 올라 제영 오언율시 2수를 남겼다. 그가 삼척에 온 시기는 1775년(영조 51) 이조 참의에서 파직되었을 때나 관직에서 은퇴한 이후가 아닐까 추정된다.
竹西樓(죽서루) - 박사해
十年勞夢想(십년노몽상) 십년 동안 꿈속에서 그리다
白首訪名區(백수방명구) 늙어서 소문난 땅 찾았다네
水拍蒼崖去(수박창애거) 물은 절벽을 치면서 흐르고
樓將碧苔浮(누장벽태부) 누각은 푸른 이끼에 떠있네
遠遊千里客(원유천리객) 멀리 천리길 떠도는 나그네
獨立萬山秋(독립만산추) 나홀로 가을산 위에 서있네
賴有同庚友(뇌유동경우) 다행히 동갑내기 벗이 있어
相携泛畵舟(상휴범화주) 아름다운 배 띄워서 따르네
儼若群峯挹(엄약군봉읍) 봉우리들 공손히 읍하는 듯
蒼然遠野浮(창연원야부) 아스라이 먼 들판에 떠있네
七分仙太守(칠분선태수) 칠분당의 태수는 신선 같고
九郡一高樓(구군일고루) 아홉군에서 제일 높은 누각
星斗窓間宿(성두창간숙) 북두성 창가에 잠이 드는데
風灘枕下流(풍탄침하류) 바람여울 베개 밑에 흐르네
雲岑秋入夢(운잠추입몽) 구름산은 가을 꿈속에 드니
明日又龍湫(명일우용추) 내일은 또 용추에서 노닐리
가을에 오랫동안 그리던 죽서루를 찾아 동갑내기 벗과 뱃놀이를 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시다. 동갑내기 벗은 삼척부사였을까? 1763년 박사해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 이헌경은 사헌부 집의로 조정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박사해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함(仲涵)이다. 박세헌(朴世櫶)의 증손, 박태창(朴泰昌)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박필기(朴弼琦)이며, 어머니는 이홍조(李弘肇)의 딸이다. 1755년(영조 31)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1760년 지평, 이듬해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1762년 옥당(玉堂)에 들어갔고, 1763년 부수찬, 교리, 수찬 등을 지낸 뒤 1764년 다시 지평이 되었다. 결성(結城)의 안핵어사(按覈御使)가 되어 홍양해(洪量海)의 산송사건(山訟事件)을 해결했다. 1766년 대사간, 1772년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5년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무사안일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었다. 박사해는 그림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당시 화단에서 '시서화 삼절', '예원의 총수'로 불렸던 첨재(忝齋)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아들 강인(姜亻寅)이 1788년 8월 경 강원도 금강산(金剛山) 부근의 회양부사로 부임했다. 76세의 강세황은 아들의 치소에서 머무르다 정조(正祖)의 어명을 받은 제자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 1742~1789)과 함께 금강산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유람하고 '풍악장유첩(風嶽壯遊帖)'을 그렸다. 강세황의 '죽서루'는 '풍악장유첩'에 들어 있다. 이때 김홍도도 스승과 함께 죽서루도를 그렸다. '풍악장유첩'에는 시와 유람기(遊覽記) 7편, '죽서루'를 비롯해서 '백산(栢山)', '회양 관아(淮陽官衙)', '학소대(鶴巢臺)', '의관령(義館嶺)', '청간정', '월송정' 등 7점의 그림이 실려 있다.
강세황의 '죽서루'(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정선의 죽서루도보다 시점을 더 멀리서 잡았다. 절벽 위의 죽서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갈야산, 오른쪽에는 봉황산(鳳凰山, 146.7m)을 배치했다. 정선의 죽서루도와 비교할 때 북서쪽의 응벽헌은 그대로인데, 남동쪽의 연근당은 보이지 않는다. 응벽헌 북동쪽의 기와지붕 건물들은 지붕만 보인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는 풍경임을 알 수 있다. S자로 휘돌아가는 오십천에는 일엽편주 한 척이 외로이 떠 있다. 아련하면서도 다소 정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강세황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광지(光之)다. 호는 첨재 외에도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노죽(露竹), 표암(豹菴), 표옹(豹翁), 해산정(海山亭), 무한경루(無限景樓), 홍엽상서(紅葉尙書) 등 다양하다. 시호는 헌정(憲靖)이다. 강세황은 1713년(숙종 39) 한양에서 아버지 강현(姜鋧)과 생모 광주 이씨 사이의 3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후손으로는 부인 진주 유씨(晉州柳氏) 소생인 강인, 강흔(姜俒), 강관(姜亻寬), 강빈(姜儐)과 나주 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이 있다. 강신과 그의 아들 강이오(姜彛五), 강흔의 손자 강진(姜晉)도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다.
강세황은 8세에 시를 지었는데, 그가 13~14세에 쓴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2세 때 안산(安山)에 이주하여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였으며, 이때 김홍도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영조의 배려로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 정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관직으로는 영릉 참봉(英陵 參奉), 사포 별제(司圃別提),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 등을 지냈다. 1784년 71세 때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가서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76세 때는 금강산 유람을 하면서 기행문과 실경 사생 등을 남겼다.
강세황은 왕희지(王羲之), 미불, 조맹부(趙孟頫) 등 중국 명필들의 글씨체를 본받아 해서(楷書)와 초서(草書), 예서(隷書), 전서(篆書) 등 각 서체에서 모두 뛰어났다. 그림은 산수와 사군자, 화조화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중국의 원 말 사대가(元末 四大家) 또는 오파(吳派)의 양식을 답습한 전형적인 남종산수화(南宗山水畵)를 즐겨 그렸다. 조선 후기에는 당시 유행한 진경산수화도 그렸다. 또 그는 당대 회화의 비평에도 능하여 김홍도와 심사정(沈師正)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많은 화평(畵評)을 남겼다. 강세황은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화평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강세황은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의 발전과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세황의 저서에는 자서전 '표옹자지(豹翁自誌)'와 문집 '표암유고(豹菴遺稿)'가 전한다. 그의 작품에는 진경산수화인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비롯해서 '자화상',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忝齋畵譜)', '삼청도(三淸圖)',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난죽도(蘭竹圖)' 등이 있다. '표옹자지'에는 2폭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폭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강세황의 자화상 '강세황자필본'은 보물 제59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세황의 묘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있다.
김홍도의 '죽서루'(30.4 x 43.7㎝, 개인 소장)
김홍도는 1788년 8월 경 스승 강세황과 함께 한양(漢陽)을 떠나 영동 9군(嶺東 9郡), 회양(淮陽)을 거쳐 내금강(內金剛)과 외금강(外金剛)을 돌아보고 60폭의 실경산수화를 그린 화첩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을 남겼다. 이 그림은 그의 '금강사군첩'에 실려 있다. '금강사군첩'은 관동지방의 실경을 보고 싶어했던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이산(李祘, 1752~1800)의 명으로 그린 것이다. '금강사군첩'이라는 명칭은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나오는 '명사금강사군산수(命寫金剛四郡山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금강사군첩'은 4개 군(郡)뿐만 아니라 남으로 평해(平海) 월송정에서 북으로 안변(安邊) 가학정(駕鶴亭), 그리고 금강산 접경지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화첩의 명칭은 '김홍도필 금강산화첩(金弘道筆金剛山畵帖)'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조선시대에는 '해산첩(海山帖)'이라고도 불렀다.
어명을 의식한 듯 김홍도의 죽서루도는 한층 치밀한 필치로 그렸다. 김홍도의 죽서루도에도 갈야산과 봉황산이 등장한다. 정선과 강세황의 그림에 비해 주변의 숲이 한층 우거진 모습이다. 강세황의 죽서루도에는 보이지 않는 연근당이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되살아났다. 왼쪽 모래톱에는 해오라기 세 마리가 먹이를 찾아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일엽편주는 이 그림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산수화에서 일엽편주가 빠진다면 무미건조한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이 그림은 실경산수화라고는 하지만 실제의 풍경을 상당히 왜곡해서 그렸다. 아마도 오십천 물길의 흐름을 보다 역동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의 그림에는 죽서루에서 도르래를 이용해서 응벽담 맞은편 백사장으로 내려온 밧줄이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에서 과거시험으로 보는 향시(鄕試) 제도가 있었다. 삼척에서는 죽서루 맞은편 백사장에서 향시를 치렀다. 유생들은 답안지를 제출할 때 밧줄을 이용해서 시관들이 있는 죽서루로 올려보냈다. 오십천변 백사장에서는 또 선비들이 모여 백일장을 열기도 했다. 심사는 죽서루에서 했기 때문에 글이나 시를 쓴 종이를 도르래를 이용해서 올려보냈다. 잔치를 베풀 때도 밧줄을 이용해서 음식을 내려주었다. 김홍도에게는 저 밧줄이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음이 틀림없다. 지금도 죽서루 기둥에는 줄을 맸던 자국이 남아 있다.
강세황과 김홍도의 죽서루도를 비교하면 화풍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강세황의 그림이 사적이고 전형적인 문인화의 특성을 지녔다면, 어명으로 정조에게 바쳐야 하는 김홍도의 그림은 보다 사실적이고 공적인 화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이다. 호는 단원을 비롯해서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畫士), 첩취옹(輒醉翁) 등 다양하다. 만호를 지낸 김진창(金震昌)의 종손, 김석무(金錫武)의 아들이다. 강세황의 제자다. 김홍도는 스승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畫署畫員)이 되었다. 그는 산수와 도석(道釋), 인물, 풍속, 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금세(今世)의 조선 신필(神筆)'이라고 극찬했다.
1773년(영조 49) 29세 때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렸다.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년)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 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畫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었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50세 전까지 김홍도의 산수화는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 1778)'에서 보듯이, 주로 화보(畫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北宗院體畫)의 경향이 나타나 있다. 50세 이후에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만년에는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다. 이러한 사경(寫景) 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홍도를 회화사적으로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린 풍속화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김홍도의 화풍은 그의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김득신(金得臣), 김석신(金碩臣), 이명기(李命基),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유운홍(劉運弘), 엄치욱(嚴致郁), 이한철(李漢喆), 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섭우도(涉牛圖)', '기노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 '단원화첩(檀園畵帖)',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군선도병(群仙圖屛)' 등이 있다.
정조는 김홍도의 죽서루도를 보고 난 뒤 그 소감을 담아 시 한 수를 지었다. 정조는 죽서루가 바닷가 바위벼랑 위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다. 편액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김충현의 정조 '어제' 편액(위)
정조 어제(正祖御製)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바위 쪼고 절벽 깎아 누각을 세웠는데
樓邊滄海海邊鷗(루변창해해변구) 누각 옆 푸른 바닷가에 갈매기 노니네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루 있는 고을 태수 뉘집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새 뱃놀이 하겠네
한양의 조정을 함부로 비울 수 없는 정조는 죽서루와 오십천의 절경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녀를 가득 싣고 밤이 새도록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삼척부사가 부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조는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학자들을 등용하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인물 위주로 등용하는 준론탕평책(峻論蕩平策)을 펼쳐 관료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전제 개혁 등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고,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해 군문을 정비했다. 재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북학파를 중시해 재화를 늘리도록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을 해나갔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백운(白雲) 심동윤(沈東潤, 1759~1813)도 죽서루도를 남겼다. 심동윤의 죽서루도는 가톨릭 관동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운화첩(白雲畵帖)'에 실려 있다. '백운화첩'에는 금강산도 8폭, 소상팔경도 8폭, 관동팔경도 8폭 등 모두 24점의 산수화가 실려 있다.
심동윤의 죽서루도(종이에 엷은 색, 가톨릭 관동대 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과 수면에 비친 풍경을 도식적으로 표현한 점이 특이하다. 우측 상단에는 숙종이 지은 시 일부를 빌어와 적었다. 이 그림에는 산수화의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일엽편주가 빠져 있어 다소 공허한 느낌을 준다. 화제(畵題) '硉兀層崖百尺樓, 朝雲夕月影淸流'는 숙종의 어제시 중 앞 두 구절이다.
기야(箕埜) 이방운(李昉運, 1761∼1815)이 그린 죽서루도는 남쪽에서 바라본 시점에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근경의 절벽과 원경의 산들이 다소 왜곡되어 있다. 이방운이 실제로 죽서루를 와서 보고 그린 그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방운이 실제로 죽서루에 다녀갔다면 그 시기는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 사이로 추정된다.
이방운의 죽서루도(61.7 x 35.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에는 두 척의 일엽편주가 떠 있는데, 돛단배는 어딘지 모르게 오십천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정선의 죽서루도에는 사다리가 응벽헌 근처에 배치되어 있는 반면에 이방운의 그림에는 죽서루에서 곧바로 오십천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에 배치되어 있다.
이방운의 자는 명고(明考), 호는 기야(箕埜)를 비롯해서 기야(箕野), 심재(心齋), 사명(四眀), 화하(華下), 희설(喜雪), 순재(淳齋), 월음(月陰), 심옹(心翁), 순옹(淳翁), 운소(韻韶), 기로(箕老), 유연(遊蓮), 연옹(蓮翁), 명고(明考), 취향(醉鄕), 심로(心老), 기옹(箕翁), 청소(聽韶) 등 매우 많다. 첨사(僉使)를 지낸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화가인 심사정(沈師正), 김기서(金箕書)는 이방운과 인척 관계였고, 조선 후기 문신으로 서화에 조예가 깊었던 남공철(南公轍), 서얼 출신의 문신 성대중(成大中), 문인 최승우(崔昇羽) 등과 시서화, 금(琴)을 매개로 교유하였다.
이방운은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등을 잘 그린 다재다능한 화가로 그의 화풍은 정선, 심사정, 강세황 등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의 남종화풍과 맥을 같이 한다. 특히 소략한 형태 묘사와 섬약하면서 재빠른 필선, 청(靑), 록(綠), 황(黃) 등의 투명한 채색을 사용하여 산뜻하고 감각적인 화면으로 개성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산수도에서는 당시의도(唐詩意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무릉도원도(武陵桃源圖) 등의 정형산수화(定型山水畵) 뿐만 아니라 진경산수화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이방운은 또 원사대가(元四大家)의 필법을 모방하여 다양한 화풍을 구사했다. '산수도첩(山水圖帖)' 8폭 중 제6폭 '산수도(山水圖)'는 근경에 몇 그루의 활엽수와 빈 정자가 있고 물 건너 원경이 횡으로 펼쳐진 전형적인 예찬(倪瓚)의 구도를 모방한 것이며,'산정독서도(山亭讀書圖)'는 황공망(黃公望)의'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의 구성과 필법을 모방해서 그린 것이다. 또 '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는 중국의 산수판화 '명산도(名山圖)' 중 '악양도(岳陽圖)'를 임모한 것이다. 이방운은 진경산수화에 있어서도 개성적인 화풍을 이루었는데, 충청도 지역을 유람하고 그린 서화첩 '사군강산참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이 대표적이다.
이방운은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비롯한 다양한 고사인물화와 화조화를 그렸다. 인물 표현은 가벼운 필치로 소략하게 묘사하고 감각적 채색감을 드러낸 특유의 개성을 보여 준다. 특히 유려한 필묵법과 산뜻한 담채를 사용한 이방운의 감각적인 화풍은 김수철(金秀哲), 김창수(金昌秀) 등 조선 말기의 이색적인 화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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