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4 - 김인후 소쇄원 48경을 노래하다

林 山 2018. 7. 2. 14:57

계원 구역은 북쪽 담 아래에 뚫린 오곡문 바로 옆 수문으로부터 남서쪽 대숲 사이 계곡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말한다. 계곡을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는 소쇄원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쇄원 계원 구역


예로부터 사람들은 물을 좋아했다. 흘러가는 물에서 도(道)의 근원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에서 공자(孔子)는 강변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도다. 낮에도 밤에도 멈추지 않는도다!)'라고 했던 것이다. 노담(老聃)도 '노자(老子)' 8장에서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을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말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 그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라고 했다. 


계류가 흘러 들어오는 수문 한가운데에는 5개의 돌을 쌓아 담장을 지탱하고 있다. 담장을 괸 이 5개의 돌은 선녀가 베틀을 짜던 베틀바위(支機石) 또는 지석(支石)이라 하여 소쇄원 사람들이 매우 신성시했다. 지석리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수문의 축조는 계류 공간에 낭만적인 멋을 더해준다. 수문 기법은 고려시대(高麗時代) 이실충(李實忠)이 세운 경기도 부천의 척서정(滌暑亭)에서도 볼 수 있다.


오곡류와 조담


수문으로 흘러들어온 계곡물은 넓은 암반 위를 다섯 번 굽이쳐 흐른 다음 자그마한 연못 조담(槽潭)에 잠시 머물렀다가 소폭(小瀑)인 십장폭포(十丈爆布)로 떨어진다. 소정과 광풍각 중간쯤 계류와 접해 있는 곳에는 탑암(榻巖), 즉 걸상바위가 있다. 양쪽 축대 사이를 관통한 계곡물은 대숲을 빠져나가 증암천으로 흘러든다. 제15영은 암반의 오곡류(五曲流), 제19영은 걸상바위, 제25영은 조담, 제31영은 축대의 벼랑에 깃든 새를 노래한 시다.


제15영 杏陰曲流(행음곡류) - 살구나무 그늘에서 굽이도는 물


咫尺潺湲池(지척잔원지) 지척에서 연못으로 졸졸 흐르는 물

分明五曲流(분명오곡류) 분명 다섯 구비로 돌아 흘러내리네
當年川上意(당년천상의) 바로 그해 냇가에서 말씀하신 뜻을
今日杏邊求(금일행변구) 오늘은 살구나무 곁에서 구하는구나


살구나무는 애양단 구역에서 외나무다리(略彴)를 건너기 전 오곡류 바로 옆에 있었다. 소쇄원도에는 애양단 입구에 행정(杏亭)이 있는데, 이곳의 행(杏)은 은행나무다. 살구나무라면 중국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한의사 동봉(董奉)이 유명하다. 동봉은 화타(華陀), 장중경(張仲景)과 함께 건안삼신의(建安三神医)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그는 병을 고쳐주고도 돈이나 물건을 받지 않았다. 대신 중병자에게는 살구나무 5그루, 경병자에게는 살구나무 1그루를 심게 했다. 몇 년이 지나자 살구나무는 10만 그루 이상이 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이후 살구나무숲을 뜻하는 행림(杏林)은 한의사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천상의(川上意)'는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말이다. <자한>편에 '子在川上曰逝者如斯夫不舍晝夜(공자가 냇가에서 말했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세월이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제19영 榻巖靜坐(탑암정좌) - 걸상바위에 고요히 앉아


懸崖虛坐久(현애허좌구) 가파른 언덕에 오래 앉았노라니

淨掃流溪風(정소유계풍) 계곡 바람이 깨끗이 쓸어주누나

不怕穿當膝(불파천당슬) 무릎에는 구멍이 나던지 말던지

偏宜觀物翁(편의관물옹) 관물하는 늙은이에게 가장 좋네


'허좌(虛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속을 비운 채 앉아 있는 것이다. '관물옹(觀物翁)'은 관물(觀物)하는 늙은이, 즉 송나라의 안빅낙도하던 요윤공(堯允恭)을 일컬는다. 요윤공은 성리학자로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명지리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관물노인(觀物老人)이라 자호하고, 덕안(德安)이라는 서실을 두었다. '관물'은 격물치지(格物致知)다. 주희는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가면 앎에 이른다.'고 했고, 왕양명(王陽明)은 '마음을 바로잡으면 양지(良知)에 이른다.'고 했다.    


제25영 槽潭放浴(조담방욕) - 조담에서 미역을 감고


潭淸深見底(담청심견저) 연못이 맑아 깊어도 바닥이 보여

浴罷碧粼粼(욕파벽린린) 목욕 마쳐도 맑은 빛이 어른어른

不信人間世(불신인간세) 사람들 사는 세상을 믿지 못해서

炎程脚沒塵(염정각몰진) 한여름 걷다가 묻은 먼지를 씻네


제25영은 '논어(論語)'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공자의 물음에 대한 증석(曾晳)의 대답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공자가 '만일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묻자 증석은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증석과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공자와 증석은 속세를 떠난 진정한 풍류의 도를 추구했던 것이다. 김인후도 이들과 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  


'조담槽潭'은 말 구유통처럼 생긴 연못이다. '인린(粼粼)'은 물이 맑아서 바닥의 돌이 보이는 모양이다. '염정(炎程)'은 찌는 듯한 여름날에 걸어가는 길이다.


제31영 絶崖巢禽(절애소금) - 벼랑에 깃든 새


翩翩崖際鳥(편편애제조) 낭떠러지 사이를 훨훨 나는 새들

時下水中遊(시하수중유) 종종 날아 내려와 물에서도 노네

飮啄隨心性(음탁수심성) 제 심성을 따라서 마시고 쪼으니

相忘抵白鷗(상망저백구) 백구와 부딪는 것도 서로 잊었네


천성대로 계곡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를 통해서 초야에 묻혀 유유자적 살아가는 양산보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즐거움이 오롯이 나타나 있다.   


제16영 假山草樹(가산초수) - 가산의 풀과 나무


爲山不費人(위산불비인) 산을 만들되 사람 품을 안들이고

造物還爲假(조물환위가) 조물주 되려 가산 만들어 놓았네

隨勢起叢林(수세기총림) 형세를 따라서 초목 숲 일어나니

依然是山野(의연시산야) 진산과 꼭 다름없는 산과 들일세


제16영은 석가산(石假山)을 읊은 시다. 광풍각 아래 물가의 암반에는 석가산이 있었다. 여기에 화초와 나무를 심어 산처럼 꾸몄다. 자연을 축소시킨 가산을 정원에 들여놓고 감상하는 것은 옛날 선비들의 취미였다.


제월당의 '소쇄원 48영' 편액


'소쇄원 48영' 중 제3영, 제13영, 제14영, 제16영, 제18영, 제20영~제22영, 제33영, 제34영, 제38영, 제44영은 계원 구역을 읊은 시다. 김인후의 시선을 따라서 계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제3영 危巖展流(위암전류) - 가파른 바위에 펼쳐진 계류


溪流漱石來(계류수석래) 계곡 물은 바위 씻으며 내려오고
一石通全壑(일석통전학) 골짜기는 모두 한 바위로 통하니
匹練展中間(필련전중간) 흰 비단을 한가운데 펼쳐놓은 듯

傾崖天所削(경애천소삭) 비탈 기슭은 하늘이 깎아놓은 듯


제13영 廣石臥月(광석와월) - 너른바위에 누워 달맞이


露臥靑天月(로와청천월) 맑은 하늘 달빛 아래 누웠으니

端將石作筵(단장석잔연) 정녕 넓은 돌도 대자리 되었네

長林散靑影(장림산천영) 긴 숲에 맑은 그림자 흩날리니

深夜未能眠(심야미능면) 밤이 깊어도 잠을 못 이루겠네


계류의 너른바위에 누워 밝은 달을 바라본다. 야경의 운치가 너무나 좋아서 잠도 오지 않는다.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제14영 垣竅透流(원규투류) - 담장 구멍으로 흐르는 물


步步看波去(보보간파거) 걷는 걸음마다 물결 보고 지나며

行吟思轉幽(행음사전유) 시 읊조리니 생각 더욱 그윽하네

眞源人未泝(진원인미소) 사람들 진원 궁구해 보지도 않고

空見透墻流(공견투장류) 공연히 담장에 흐르는 물만 보네


제18영 遍石蒼蘚(편석창선) - 바위를 덮은 푸른 이끼


石老雲煙濕(석노운연습) 바위 오랠수록 구름 안개에 젖어

蒼蒼蘚作花(창창선작화) 푸르디 푸른 이끼 꽃이 되었구나

一般丘壑性(일반구학성) 언덕과 골짝 즐기는 본성은 같아

絶意向繁華(절의향번화) 번화함 추구할 뜻이 전혀 없구나


 제20영 玉湫橫琴(옥추횡금) - 옥추에서 거문고 비껴 안고


瑤琴不易彈(요금불이탄) 좋은 거문고 타기가 쉽지 않으니
擧世無種子(거세무종자) 이 세상에 종자기 죽고 없어서네
一曲響泓澄(일곡향홍징) 한 곡조 맑디맑은 물가에 울리면
相知心與耳(상지심여이) 서로 알아주는 마음과 귀 있으리


'종자(種子)'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 종자기(種子期)를 말한다. 종자기는 거문고의 달인 유백아(伯牙)의 연주를 알아주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종자기가 죽자 유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김인후는 종자기와 유백아의 사귐처럼 양산보와의 사귐도 진실하며 고귀하다고 노래한 시다. 


제21영 洑流傳盃(복류전배) - 돌아 흐르는 물에 술잔 보내며


列坐石渦邊(열좌석와변) 물살 치는 바위 가에 둘러앉으니

盤蔬隨意足(반소수의족) 소반에 나물 안주도 뜻에 족하네

洄波自去來(회파자거래) 굽이쳐 도는 물결이 절로 오가니

盞斝閑相屬(잔가한상속) 물에 뜬 술잔 한가로이 부딪치네


조담과 폭포 사이에서 계류가 소용돌이치면서 돌아흐르는 곳이 있다. 경주 포석정(鮑石亭)처럼 지기(知己)들과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 물길을 따라 저절로 한 바퀴 빙 돌아간다. 풍류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제22영 床巖對琪(상암대기) 평상바위에서 바둑을 두니


石岸稍寬平(석안초관평) 바위 기슭은 조금 넓고 평평하나

竹林居一半(죽림거일반) 대숲이 그 절반 가까이 차지했네

賓來一局碁(빈래일국기) 손님이 와서 바둑 한판 벌이는데

亂雹空中散(난박공중산) 갑자기 내린 우박 사방에 흩지네


수문에서 이어지는 암반은 넓고 평평해서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다. 소쇄원도에는 암반의 평상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상암(床巖)'은 폭포 서쪽, 광풍각 바로 위 바위에 얹혀 있는 네모반듯한 평상 모양의 바위다. 김인후는 마치 자신이 소쇄원의 주인인 양 시를 쓰고 있다. 김인후가 소쇄원에 자주 들러 양산보와 함께 거의 붙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亂雹空中散(난박공중산)'은 실제로 갑자기 우박이 내린 것일 수도 있고, 바둑판 위에 바둑돌 놓는 소리를 우뢰로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바둑을 일러 신선놀음이라고 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말도 있잖은가! 소쇄원의 신선 같은 한가롭고 즐거운 삶을 노래한 시다.


제33영 壑底眠鴨(학저면압) - 도랑에서 졸고 있는 오리


天付幽人計(천부유인계) 하늘이 은자에게 주신 계책이란 건

淸冷一澗泉(청냉일간천) 시원한 한 줄기 산골의 샘물이라네

下流渾不管(하류혼불관) 아래로 흐르는 물 섞이든 상관없이

分與鴨閒眠(분여압한면) 나눠준 오리 한가로이 졸고 있구나


소쇄원 계류 공간의 한가한 정취가 잘 나타나 있는 시다. 물의 흐름은 도(道)의 흐름을 상징한다. 한가하게 조는 오리를 통해서 자연과의 도와 혼연일체가 된 경지를 읊고 있다. '유인(幽人)'은 속세를 떠나서 자연에 숨어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은자(隱者)를 말한다. 


재34영 激湍菖蒲(격단창포) - 세찬 여울가의 창포


聞說溪傍草(문설계방초) 어디서 듣자하니 개울가의 풀은

能含九節香(능함구절향) 아홉 마디마다 향기 머금었다네

飛湍日噴薄(비단일분박) 날리는 여울물 날마다 뿜어대니

一色貫炎凉(일색관염량) 이 한가지로 염량을 꿰뚫는다오


'격단(激湍)', '계방(溪傍)', '비단(飛湍)' 등으로 보아 창포는 폭포 하류 바위틈에 심었을 것으로 보인다. '염량(炎凉)'은 '더위와 서늘함, 대하는 사람의 처지에 따른 태도의 따뜻함과 냉담함, 기후의 변화, 사리를 분별함' 등의 뜻이 있다. '속세의 근심'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십장폭포


제38영 梧陰瀉瀑(오음사폭) - 벽오동 그늘 아래로 쏟아지는 폭포


扶疎綠葉陰(부소록엽음) 무성히 우거진 푸른 나뭇잎 그늘

昨夜溪邊雨(작야계변우) 어제 밤 시냇가엔 비가 내렸는지

亂瀑瀉枝間(난폭사지간) 폭포가 가지 새로 콸콸 쏟아지네

還疑白鳳舞(환의백봉무) 하이얀 봉황이 춤이라도 추는 듯


제38영의 '동(梧)'도 '백봉(白鳳)'과 의미 관련해서 벽오동으로 해석해야 한다. 봉황은 벽오동나무에만 내려앉으며,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학문과 도의 전통을 상징한다. 도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니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폭포의 물줄기가 마치 봉황이 춤추는 것 같다는 것이다.   


제44영 映壑丹楓(영학단풍) - 산골짜기에 물든 단풍


秋來巖壑冷(추래암학랭) 가을 오니 바위 골짜기 냉랭하고

楓葉早驚霜(풍엽조경상) 단풍은 서리에 놀라 벌써 물드네

寂歷搖霞彩(적력요하채) 고요히 고운 놀 빛으로 나부끼니

婆娑照鏡光(파사조경광) 춤추는 듯한 단풍 거울에 비치네


제44영과 소쇄원도를 참조하면 단풍나무는 도오의 북쪽 개울가에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이 수면에 비친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 가을 서리에 소쇄원을 붉게 물들인 단풍은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왔을 것이다.


매대


오곡문에서 제월대에 이르는 길 위에는 두 화계(花階)로 조성한 매대(梅臺)가 있다. 매대 담벽에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소쇄처사 양공의 조촐한 집)'라고 쓴 판이 박혀 있다. 이 글씨는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가 송시열에게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글씨와 함께 받아온 것이라고 한다. 화계를 노래한 시가 제5영, 제12영, 제24영, 제27영, 제28영, 제46영 등이다.


제5영 石逕攀危(석경반위) - 돌길을 위태로이 오르며


一逕連三益(일경연삼익) 오솔길에 매화 대나무 돌 이어져
攀閑不見危(반한불견위) 한가히 잡고 오르니 험하지 않네
塵蹤元自絶(진종원자절) 속인의 발길 애초부터 절로 끊겨

苔色踐還滋(태색천환자) 이끼 빛깔 밟아도 외려 무성하네


'삼익(三益)'은 삼익우(三益友)다. 곧 심성이 곧은 벗, 믿음직한 벗, 견문이 넓은 벗 등 사귀어서 이로운 세 가지 벗을 이른다. 여기서는 매화(梅), 대나무(竹), 돌(石) 등 세 가지를 말한다. 


제12영 梅臺邀月(매대요월) - 매대의 달맞이


林斷臺仍豁(임단대잉할) 숲이 끊어져 매대가 훤히 트이니

偏宜月上時(편의월상시) 달이 떠오를 때 가장 아름다와라

最憐雲散盡(최련운산진) 어여뻐라 검은 구름도 다 흩어져

寒夜暎氷姿(한야영빙자) 차가운 밤 고운 매화 어리비치네


제24영 倚睡槐石(의수괴석) - 회화나무 바위에 기대 졸다가


自掃槐邊石(자소괴변석) 몸소 회화나무 곁 바위를 쓸고서

無人獨坐時(무인독좌시) 아무도 없이 홀로 앉아있을 때에

睡來驚起立(수래경기립) 졸다가 놀라서 깨어 일어난 것은

恐被蟻王知(공피의왕지) 개미 왕이 행여 알까 두려워서네


제12영의 '빙자(氷姿)'는 매화의 깨끗하고 고운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제24영의 '의왕(蟻王)'은 당나라 이공좌(李公左)의 '남가기(南柯記)' 고사에 나오는 개미의 왕을 말한다. 중국 당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자기 집 남쪽에 있는 늙은 회화나무 밑에서 술에 취하여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남가군(南柯郡)을 20여 년 동안이나 다스리며 부귀를 누리다가 깨어났다. 꿈에서 깬 뒤 회화나무 아래 굴을 찾아보니 성 모양을 한 개미집이 있었다. 개미집은 곧 그가 꿈속에서 본 대괴안국(大槐安國)의 왕궁이었다. 이른바 남가일몽 (南柯一夢)이다. 소쇄원에는 현재 회화나무는 보이지 않고 느티나무만 자라고 있다. 따라서 '괴(槐)'는 회화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일 수도 있다.  


제28영 石趺孤梅(석부고매) - 돌받침 위에 외로이 핀 매화


直欲論奇絶(직욕논기절) 진기 절묘함을 곧 논하고 싶거든

須看揷石根(수간삽석근) 반드시 바위에 박힌 뿌리를 보게

兼將淸淺水(겸장청천수) 거기에 맑고 얕은 물도 겸했으니

疎影入黃昏(소영입황혼) 황혼 무렵 성긴 그림자 드리우네


제12영 '매대요월'과 제28영 '석부고매'에서 보듯이 매화나무는 매대에 줄을 지어 심었고, 제월당과 고암정사, 조담 옆에도 여기저기 심었다. 매화는 청초하고 고결한 품성을 기려 청우(淸友), 청객(淸客), 옥골(玉骨), 일지춘(一枝春), 은일사(隱逸士)라고도 일컫는다. 그래서 옛날 선비들은 정원에 매화나무를 심어 그 품성을 본받고자 했다. 제28영은 매화의 굳은 절조를 노래한 시다.  


제46영 帶雪紅梔(대설홍치) - 눈에 덮인 붉은 치자


曾聞花六出(증문화육출) 꽃이 여섯 잎으로 핀다 들었는데

人道滿林香(인도만림향) 사람들 숲에 향기 가득하다 하네

絳實交靑葉(강실교청엽) 짓붉은 열매와 푸른 잎이 섞여서

淸姸在雪霜(청연재설상) 눈 서리에도 맑고 곱기만 하구나


제45영에 이어 제46영도 겨울이 배경이다. 치자꽃과 향기, 열매와 잎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다. 치자꽃의 꽃말은 '순결, 행복, 한없는 즐거움'이다. 꽃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좋은 꽃말을 가지고 있다. 눈서리가 내려앉은 치자의 붉은 열매는 일편단심 선비의 절조를 상징한다. 치자 열매는 한약재로도 많이 쓰인다. 청열사화(淸熱瀉火)의 효능이 있어 고열을 동반한 황달, 임병, 각종 출혈증 등을 치료한다. 


소쇄원도에는 치자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옛 사람들은 동쪽에 복사나무와 버드나무, 서쪽에 치자나무와 느릅나무, 남쪽에 매화나무와 대추나무, 북쪽에 사과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면 명당이 된다고 믿었다. 또 치자나무가 햇빛을 싫어하는 특징을 고려하면 제월당 앞마당의 서쪽 음지에 치자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난대성 식물인 치자나무가 눈, 서리에도 곱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소쇄원은 겨울에도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매대 화계와 그 주변에는 매화, 회화나무, 소나무, 치자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왜철쭉(영산홍)도 있었다. 매대에는 지금도 영산홍이 심어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영산홍은 당시 매대나 그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대에는 또 선측백나무, 측백나무, 산수유나무가 심어져 있다. 김인후는 철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흥을 한시를 통해서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