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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양산보의 소쇄원을 찾아서 2 - 소쇄원을 조영하다

林 山 2018. 6. 29. 10:56

1526년(중종 21) 17세의 김인후는 담양에 있는 송순을 찾아와 수학했고, 그 이듬해부터는 기묘사화로 동복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같은 해 양산보의 세째 아들 지암(支岩) 양자정(子渟, 1527~1597)이 태어났다. 하지만 김윤덕은 자정을 낳은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산보의 나이 25세였다.  


김인후는 스승 송순을 따라 창암촌(蒼岩村)에 들른 이후 양산보를 자주 찾았다. 양산보의 4종매(四從妹)는 임억령의 부인이 되었고,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은 임억령의 사위가 되었다. 김성원은 김윤제의 당질(堂姪),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다. 그러니까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이 된다.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從甥姪女) 사위다. 이처럼 소쇄원과 면앙정, 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송강정의 주인들은 혈연과 혼맥으로 이어져 있었다. 


낙향한 뒤 소쇄정(瀟灑亭)이라는 초정(草亭)만 짓고 지내던 양산보는 26세 때인 1528년(중종 23)부터 원림을 가꾸며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바리봉(鉢裏峰, 187m) 남쪽 기슭에 별서정원(別墅庭苑)인 소쇄원을 조영하기 시작했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지은 뜻은 양팽손의 '학포유집'에도 나오듯이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류의 맑은 물에 마음의 때를 씻고, 바람에 스치는 댓잎 소리에 정신을 청정하게 다잡으면서 도학에 정진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소쇄원은 건립 초기부터 도학의 원림, 철학의 원림이 될 운명이었다. 


소쇄원 입구 계곡의 물오리


같은 해 김인후는 소쇄정에 올라 대숲 너머 부는 바람과 시냇가의 밝은 달을 노래한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를 지었다. 이 시를 보면 소쇄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소쇄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정은 작은 정자라 하여 소정(小亭), 지붕을 풀로 덮었다 하여 초정(草亭)이라고도 했다. 어린 시절 양산보는 지석 마을 뒤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를 따라서 기암괴석과 작은 폭포수가 쏟아지는 경치가 빼어난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그때 '언젠가는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주차장에서 소쇄원으로 올라가다 보면 계곡에서 노니는 물오리를 볼 수 있다. 


1533년(중종 27) 최산두는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송순은 김안로가 권세를 부리자 사간(司諫)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인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로 낙향하여 면앙정을 지었다. 그해 임억령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 해남에서 가까운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자청하여 내려왔다. 1534년(중종 28) 송순은 소쇄원에 들러 '제외제양처사언진산보소쇄정(題外弟梁處士彦鎭山甫瀟灑亭)' 4수를 지었다. 이 시는 원림으로 조성되기 이전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제외제양처사언진산보소쇄정(題外弟梁處士彦鎭山甫瀟灑亭)

고종사촌동생 처사 양언진 산보의 소쇄정에서 읊다 - 송순


小閣玲瓏起(소각영롱기) 아담한 누각 멋지게 세워져 있어

坐來生隱心(좌래생은심) 앉아 있으니 숨어살 마음 생기네

池魚依竹影(지어의죽영) 못의 물고기 대 그림자에 노닐고

山瀑瀉梧陰(산폭사오음) 오동 그늘 밑으로 폭포 떨어지네

愛石頻回步(애석빈회보) 사랑스런 돌길 바삐 돌아 걸으며

憐梅累送吟(련매루송음) 가련한 매화 나도 몰래 한숨짓네

欲知幽意熟(욕지유의숙) 숨어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看取近床禽(간취근상금) 날지 않는 새 가까이 들여다보네 


緣崖開一逕(연애개일경) 벼랑을 따라서 오솔길 나 있는데

臨澗閉雙扉(임간폐쌍비) 시냇가의 사립문은 닫힌 채 있네

巖老苔平鋪(암노태평포) 바위엔 묵은 이끼 가득 끼어있고

亭深竹亂圍(정심죽난위) 대숲 둘러싼 정자는 깊어 보이네

風來高枕滿(풍래고침만) 바람은 베개 높이 가득 불어오나

人到小橋稀(인도소교희) 작은 다리 건너는 사람도 없구나

寂寂看花處(적적간화처) 홀로 고요히 꽃을 보고 있노라니

閑雲下翠微(한운하취미) 산 중허리 아래 구름도 한가하네


偶入方壺境(우입방호경) 우연히 방장의 경계 들어가 보니

無端洗俗心(무단세속심) 끝없이 속된 마음 깨끗이 씻기네

溪圍雙砌響(계위쌍체향) 계류는 두 섬돌을 돌돌돌 감돌고

竹覆一墻陰(죽부일장음) 대숲은 온 담장에 그늘 드리웠네

地淨寧容唾(지정영용타) 깨끗한 땅이라 어찌 침 뱉으리요

軒幽可着吟(헌유가착음) 정자 그윽하니 노래 절로 나오네

塵冠彈未了(진관탄미료) 갓에 앉은 먼지 털어내기도 전에

高樹有嘲禽(고수유조금) 새가 높은 나무에서 조롱을 하네


世故違芳約(세고위방약) 세상일 때문에 좋은 약속 어기어

經春始叩扉(경춘시고비) 새봄 다 지나서 사립문 두드렸네

笑談開寸抱(소담개촌포) 담소 나누며 작은 회포 풀어보고

愁恨破重圍(수한파중위) 쌓인 근심과 한을 깨트려 보노라

境遠塵常絶(경원진상절) 속세 멀어 티끌조차 끊어진 이곳

心閑事亦稀(심한사역희) 마음 한가하여 일 또한 드물다네

臨溪仍待月(임계잉대월) 냇가에 나와 달 뜨기를 기다리니

雲外暮鐘微(운외모종미) 구름 너머 저녁 종소리 은은하네


시에 소각(小閣), 정자(亭子), 소교(小橋), 연못, 오동나무, 매화, 대나무, 사립문, 담장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534년 당시 소쇄정은 꽤 확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원림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면앙정에 걸려 있는 소쇄처사 양산보의 '차면앙정운' 편액


양산보도 면앙정에 들러 송순의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1수의 운자 '만(巒), 만(漫), 건(乾), 간(干)', 2수의 운자 '전(前), 연(連), 연(烟), 전(傳)'을 차운한 시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을 지었다. 면앙정에는 이 시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면앙정제영에서 차운하다(양산보)


崱崱群山混混川(측측군산혼혼천) 큼직한 뭇 산들에 출렁대는 시내까지

悠然瞻後忽瞻前(유연첨후홀첨전) 느긋하게 뒤를 보다가 앞쪽도 보나니

田墟曠蕩亭欄斷(전허광탕정난단) 정자의 난간은 드넓은 들판을 향하고

松逕逶迤屋砌連(송경위이옥체련) 구불구불한 솔숲 길로 섬돌 이어졌네

大野燈張皆我月(대야등장개아월) 들판의 등불들은 모두가 나의 달같고

長天雲起摠人煙(장천운기총인연) 하늘에 이는 구름은 인가의 연기라네

淸平勝界堪收享(청평승계감수향) 청평의 뛰어난 경치는 누려볼 만한데

綠野東山笑漫傳(녹야동산소만전) 우습구나 녹야 동산이 더 알려졌다니

 

丹丘何恨訪尋難(단구하한방심난) 선경을 찾기 어렵다고 뭐 한탄하리요

眞界分明此一巒(진계분명차일만) 선계도 분명히 이같은 산하일 것인데

曠占乾坤寬納納(광점건곤관납납) 천지간 넓게 차지하여 넉넉히 들이고

恢收山水引漫漫(회수산수인만만) 산수도 널리 거두어 넘치게 이끌었네

風霜幾歲松筠老(풍상기세송균노) 여러 해 서리바람에 송죽도 늙어가고

詩酒當年筆硯乾(시주당년필연건) 그해 풍류는 붓과 벼루처럼 말라버려

徒倚曲欄流顧眄(도의곡난류고면) 그저 난간에 기대 하염없이 돌아보니

 世緣消息絶來干(세연소식절래간) 세상사 소식도 끊어져 오질 않네그려 


면앙정과 주변의 승경이 선선이 사는 별유천지 못지 않으며, 그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면앙정 주인의 즐거움을 예찬한 시다. 세상사 소식조차 끊어진 이곳이 바로 이상향 은둔처라는 것이다. 


1536년(중종 31) 한양의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정철은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과 죽산 안씨(竹山安氏) 사이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철은 훗날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이라는 시에서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웠으니, 사람이 가고 머물고 마흔 해로세.'라고 읊었다. 정철의 시에 의하면 소쇄정은 자신이 태어나던 해인 1536년(중종 31)에 세워졌다고 했지만 이는 착오다. 소쇄정은 이미 1528년에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철은 또 시에서 소쇄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소쇄원은 상당한 규모로 확충되기는 했지만, 원림의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원림이 조성된 뒤의 시점에서 예전의 일을 소급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다. 


1537년(중종 32) 문정왕후는 밀명으로 윤안임(尹安任), 대사헌 양연(梁淵), 윤안인(尹安仁) 등을 시켜 김안로 일파가 왕후를 폐위시키려 한다고 밀고케 하여 이들을 제거했다. 10월 27일 김안로가 사사되자 기묘사화 이후 중앙정계에서 사라진 사림파가 서서히 요직에 등용되기 시작했다. 송순도 다시 관직에 나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제수받았다. 


1542년(중종 37) 송순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외제(外弟, 고종사촌동생) 양산보가 소쇄원을 확장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송순은 관찰사로서 소쇄원 증축에 필요한 자재를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소쇄원은 작은 정자 수준을 넘어 상당한 규모를 갖춘 원림으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소쇄원은 한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중수와 확장 공사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이란 명칭도 15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소쇄원은 완공 후 양산보의 원림이라 하여 양원(梁園)이라고도 불렸다. 이때부터 소쇄원은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송순도 전라도 관찰사로서 순시차 소쇄원에 들러 '소쇄원소우방매(瀟灑園疏雨訪梅)'란 시를 남겼다.


소쇄원소우방매(瀟灑園疏雨訪梅) - 소쇄원에서 보슬비 맞으며 매화를 찾다(송순)


疏竹溪邊爲爾來(소죽계변위이래) 시냇가 성근 대는 그때 이래 여전하고

詩情雨意似相催(시정우의사상최) 시정과 비올 기운은 서로 재촉하는 듯

一生契分推兄列(일생계분추형렬) 형이 되어 일생 두터운 정분 맺었으니

莫負年年趁雪開(막부연년진설개) 해마다 눈을 좇아 핌을 저버리지 마소


송순은 이 시에서 소쇄원이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다. 사돈 간인 김인후도 소쇄원 조영에 도움을 주었다.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지내고 낙향한 터라 재력이 막강했던 처남 김윤제도 많은 후원을 했다.   


같은 해 이조 판서 이언적(李彦迪)은 천거제의 부활과 기묘년 현량과 출신의 서용을 주청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과 지방에 유일(遺逸)을 추천하라는 전교가 내려갔다. 양산보도 현령(縣令)인 이수(李洙)에 의해 유일로 천거되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극력 사양했다. 1543년(중종 38)에는 검토관(檢討官) 김인후가 경연(經筵)에서 기묘사류의 신원(伸寃)과 함께 소학과 향학의 장려를 주청하였다. 김인후는 사족 중심의 자치규범인 향약(鄕約) 시행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조광조 계열의 사림파가 부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기묘사림이 다시 관직에 임명되면서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다. 1544년(중종 34)에는 조광조의 신원 문제가 거론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재연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조여충(曹如忠)은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353번지에 관수정(觀水亭)을 지었다.


1545년(인종 원년, 명종 즉위년) 인종이 즉위한 지 1년도 못 되어 병사하고 명종(明宗)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윤원로윤원형 형제 등 소윤파(小尹派)를 시켜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 명종)으로 세자(인종)를 교체하려고 기도하면서 세자의 외삼촌인 윤임(尹任) 등 대윤파(大尹派)와 사생결단의 충돌이 벌어졌다. 결국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왕을 보위한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등 대윤파를 제거했다. 홍문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三司)의 사림파 관리들이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이들을 파직시키고, 윤임 등 대윤파와 정철의 매형인 종친 계림군(桂林君)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을사사화로 정철의 가문도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으며, 결국 정철은 부친 정유침(鄭惟沈)을 따라 조부의 산소가 있는 창평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기묘사화, 신사무옥에 이어 을사사화로 사림파가 대거 사사되거나 유배되고 척신(戚臣)들이 집권하는 것을 목격한 양산보는 척신들을 간악한 무리로 규정했다. 그는 특히 김안로, 문정왕후,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삼촌 이량(李樑) 등을 척신정치를 자행한 가장 간악한 인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척신들이 득세하는 것을 지켜본 양산보는 애초의 은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瀟灑院)'이라고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소쇄(瀟灑)'는 중국 남조 제(齊)나라 공치규(孔稚珪, 447~501)가 지식인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이다. 공치규는 이 글에서 '은자는 속됨을 털어낸 밝은 의표와 세속의 더러움을 벗어난 소쇄한 생각으로 백설을 헤아려 깨끗함을 겨루고 푸른 구름 위로 곧바로 올라가야 함을 이제야 알겠구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소쇄'에는 더러운 세상을 피하여 맑고 깨끗한 이상향을 추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양산보는 소쇄원을 지키는 주인이라는 뜻에서 소쇄옹(瀟灑翁)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왕실에서 조성한 궁원(宮園)과 지방의 관리들이 조성한 향원(鄕園), 그리고 민간정원(民間庭園)으로 나눌 수 있다. 정원의 성격에 따라서는 별서정원(別墅庭園)과 산수정원(山水庭園)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궁원은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 향원 가운데 으뜸은 남원의 광한루(廣寒樓)다. 별서정원은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낙향한 선비가 자연에 귀의해 은일자(隱逸者)로서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려고 지은 정원으로 별업(別業)이라고도 불렀다. 요즘의 별장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정원은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한 소쇄원과 보길도(甫吉島)에 있는 윤선도의 부용동(芙蓉洞) 등이다. 산수정원은 관동팔경의 정자들처럼 자연을 감상하기 위하여 만든 정자다.


소쇄원 전경


소쇄원은 크게 내원(內園)과 외원(外園)으로 나눌 수 있다. 1,400여 평(4,958.7m²)에 이르는 소쇄원 내원은 옹정봉에서 발원하여 고암동으로 흘러내리는 계류(溪流)를 중심으로 동쪽의 전원(前園)과 한가운데의 계원(溪園), 그리고 서쪽의 누원(樓園)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계류 양쪽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올려 집터와 정원, 연못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전원은 계원의 동쪽 상하지(上下池)와 대봉대(待鳳臺), 애양단(愛陽壇) 구역, 계원은 오곡문(五曲門) 바로 옆 수문에서 십장폭포(十丈瀑布)를 거쳐 대숲의 계곡으로 이어지는 구역, 누원은 계원의 서쪽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 구역이다. 누원은 다시 광풍각 구역과 제월당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소쇄원의 남서쪽은 대숲, 북서쪽은 바리봉, 북동쪽과 남동쪽은 흙으로 새 메움을 한 기와지붕의 ㄱ자형의 흙돌담장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다. 이 흙돌담장이 사실상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소쇄원 담장은 음양석(陰陽石)으로 제주도 역정(役丁)들이 쌓았다고 한다. 


소쇄원이 완성되자 어린 나의의 최경창(崔慶昌)은 양산보를 노선생으로 칭하면서 '늙으막에 소쇄원을 이룩하셨으니 만사를 모두 잊고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십시오.'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 1548년(명종3)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백방산(栢芳山, 668m) 기슭의 정암촌에 우거하고 있던 김인후는 소쇄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쇄원 48제영(瀟灑園四十八題詠, 소쇄원 48영)'을 지었다'소쇄원 48영'은 소쇄원의 낙성식(落成式)을 위한 기념시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소쇄원 48영'에는 내원의 모습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김인후는 이 시에서 정자 등 건물과 오솔길, 다리, 연못, 물레방아, 석가산(石假山), 바위, 계류, 조담(槽潭) 등 소쇄원의 구성 요소를 노래하는 한편 대숲의 바람, 엷은 그늘, 밝은 달 등 계절의 흥취와 날씨, 밤과 낮의 변화무쌍한 자연의 변화까지도 포착했다. '소쇄원 48영'에는 또 대나무와 버드나무, 순채, 오동나무, 연꽃, 자미화(배롱꽃), 소나무, 만년화(이끼), 살구나무, 창포, 단풍나무, 매화, 회화나무, 국화, 치자, 파초, 사계화(월계화), 복사나무 등이 등장한다. 김인후는 소쇄원에 펼쳐진 이러한 경물을 통해서 도학사상(道學思想)을 펼치고자 했다. 


매란국죽(梅蘭菊竹) 또는 매란송죽(梅蘭松竹)은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四君子), 매송국죽(梅松菊竹) 사절우(四節友)라 하여 선비들이 즐겨 심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소나무를 모든 나무들의 으뜸이라 하여 공(公), 측백나무를 백(伯)이라 하여 소나무 다음 가는 작위에 비유했다. 중국 주(周)나라 때 군주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에는 측백나무를 심었다. 측백나무는 또 주나라 왕자의 기념식수로 심기도 했다. 한(漢)나라에서는 측백나무를 선장군(先將軍)에 봉했다. 촉한(蜀漢) 유비(劉備)의 책사(策師) 제갈량(諸葛亮)의 사당에도 측백나무가 있다. 당(唐)나라 무제(武帝)는 측백나무를 대부(大夫)에 봉했다. 청(淸)나라 황제가 머물던 자금성(紫禁城)에도 측백나무를 심은 흔적이 있다. 이처럼 측백나무는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당나라 때 조주선사(趙州禪師)는 제자들이 인도의 달마(達摩)가 중국에 온 까닭을 묻자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라고 답함으로써 선(禪)의 의미를 측백나무로 보여 주었다. 조주선사가 머물렀던 백림선사(柏林禪寺) 관음전(觀音殿)에는 지금도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잇다. 도가(道家)의 도사들은 측백나무 열매인 백자인(柏子仁)이 불로장생하는 약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측백나무의 잎과 열매를 달여서 장복했다. 우리나라의 사찰이나 문묘에 측백나무를 심은 것도 중국의 예를 본받은 것이다. 


주나라 때는 조정 앞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조정을 괴정(槐庭)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나라에서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를 삼공(三公)이라고 했는데, 삼공을 삼괴(三槐)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주나라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은 회화나무를 기념식수로 심었다. 괴(槐)는 바로 회화나무다. 주나라 사(士)의 무덤에도 회화나무를 심었다. 이후 회화나무를 학자수(學者樹)라 부르게 되었다. 


한나라 궁정에도 회화나무 노거수(老巨樹)가 있었다. 그래서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괴신(槐宸), 도읍인 장안(長安)의 거리를 괴로(槐路)라 불렀다. 장안에는 괴시(槐市)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도 있었다.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자신의 고향 경북 영덕군 영해면 호지촌(濠池村)의 지형이 중국 괴시와 닮았다고 해서 괴시촌(槐市村)이라 불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음력 7월경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 진사시(進士試)를 치렀다. 그래서 이 시기를 괴추(槐秋)라 불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과거를 보러 가거나 합격했을 때 집 앞에 회화나무를 심었다. 과거 급제자에게는 왕이 회화나무 한 그루씩 하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선도의 녹우당(綠雨堂),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이언적(李彥迪)의 옥산서원(玉山書院), 해미읍성 등 우리나라 유교 관련 유적지에서는 회화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陶山書院)에도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또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承文院) 앞에도 회화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승문원을 괴원(槐院)이라고도 한다.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 부근에도 세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 경주시 강동면 다산리에는 주나라의 관례를 모방한 삼괴정(三槐亭)이 있다. 


회화나무 괴(槐)자를 파자하면 '나무 목(木)'자와 '귀신 귀(鬼)'자가 된다. 회화나무는 이른바 귀신을 쫓는 나무다. 그래서 예로부터 궁궐이나 관아에서 잡귀를 쫓기 위해 회화나무를 많이 심었다. 또 선비가에서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학문에 대성하고 벼슬길에서도 승승장구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양산보도 이런 뜻에서 소쇄원에 회화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