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8년(선조 1) 3월 9일 김성원의 장인 임억령이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문암재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억령은 해남 명봉산(鳴鳳山, 지금의 금강산) 중턱 기좌(己坐)에 묻혔다. 고경명과 백광훈은 만시(輓詩)를 지어 스승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희춘은 해남의 마포 명봉산 근처 임억령의 제청(祭廳)을 찾아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제물을 올려 망자를 조상하였다.
1570년(선조 3) 12월 8일 조선 유학의 거두이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세상을 떠났다. 1571년 3월 21일 이황의 백일장(百日葬)을 치르는 날 조선 유학의 거두이자 호남학파의 태두였던 기대승은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 규봉(圭峯)에 올라 극진한 예로 조문했다.
식영정
이튿날 기대승은 무둥산에서 내려와 식영정에 들렀다. 세상을 떠난 임억령 대신 사위 김성원이 기대승 일행을 맞았다. 이 자리에는 고경명도 있었다. 김성원은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이란 제목의 오언사운(五言四韻) 세 수를 지었다.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
식영정에서 술 취한 뒤 고제봉, 김상사 경생과 더불어 운자를 부르다
物外情難盡(물외정난진) 물외는 정 다하기 어려운데
人間事或乖(인간사혹괴) 인간사는 혹 일도 어긋나네
杯盤賓主共(배반빈주공) 주안상을 주객이 함께 받고
談笑古今偕(담소고금해) 고금의 이야기 함께 나눴네
酒味傾還喜(주미경환희) 술잔을 기울이면 더 기쁘고
歌聲聽卽佳(가성청즉가) 노래 소리 아름답게 들리네
星山此夜會(성산차야회) 별뫼의 오늘 밤 모임에서는
消遣百年懷(소견백년회) 백년의 회포를 풀어 보리라
瑞石纔探歷(서석재탐력) 서석을 겨우 탐승하고 나니
松間意不乖(송간의불괴) 소나무 간에 뜻이 어울리네
酒多情自放(주다정자방) 술 많으니 정도 호탕해지고
吟苦笑兼偕(음고소겸해) 괴롭게 읊으나 웃음 겸했네
長笛風前好(장저풍전호) 대피리소리 바람 앞에 좋고
華燈夜亦佳(화등야역가) 등잔불 밤 되니 아름다워라
棲霞成一宿(서하성일숙) 서하당에서 긴 밤을 보내니
明發有餘懷(명발유여회) 날이 밝아도 회포는 남았네
夜色深深好(야색심심호) 밤 빛일랑 깊을수록 좋은데
往言事事乖(왕언사사괴) 오가는 말 일마다 어긋났네
酒來曾不讓(주래증불양) 술이 오면 사양치 아니하고
醉去宿能偕(취거숙능해) 취해 가면서도 함께 하노라
爛爛情何極(란란정하극) 무르익은 정 다함이 있을까
追隨意更佳(추수의갱가) 서로 따르는 뜻 아름다워라
風煙迷洞壑(풍영미동학) 안개 바람 골짝에 가득하니
春酌遣幽懷(춘작견유회) 봄술로 그윽한 회포 보내리
기대승은 고경명과 김성원이 운자를 주고받는 자리에는 함께 하지 않은 듯하다. 대신 그의 제자인 김경생(金景生, 1549~?)이 자리를 함께 했다. 기대승과 고경명은 이량(李樑, 1519~1582)의 당 사건 때의 악연 때문에 서로 불편한 사이였기 때문일까? '人間事或乖(인간사혹괴)', '往言事事乖(왕언사사괴)'에서 보듯이 김성원의 시에서도 이를 의식한 듯한 표현이 보인다. 운림(雲林)의 누정에 벗이 있고 시가 있는데 어찌 곡차가 빠질 수 있으랴! 이들은 밤이 새도록 시주를 나눴을 것이다.
이량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대손, 율원군(栗原君) 이종(李徖)의 증손, 여양군(呂陽君) 이자겸(李子謙) 손자, 전성군(全城君) 이대(李薱)의 아들이다. 정사룡(鄭士龍)의 문인이었던 이량은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1552년(명종 7) 정사룡이 고시관이 되자 성균관 유생 이량은 스승의 후원으로 곧바로 식년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가 된 이후 승승장구를 계속한 이량은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견제하려는 명종에게 중용되어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예조 참판, 동지중추부사, 이조 참판, 동지성균관사에 올랐다. 과거에 급제한 지 8년만에 당상관에 오르는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 명종의 신임을 믿고 이량은 김홍도(金弘度), 김계휘(金繼輝) 등과 교유하면서 이감(李戡), 신사헌(愼思獻), 권신(權信), 윤백원(尹百源) 등과 당을 만들어 정치를 농단하였다. 그는 자당의 김명윤(金命胤)을 재상으로 만들기 위해 우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사직을 상소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량을 윤원형, 심통원(沈通源)과 더불어 3흉(凶)이라 불렀다.
한때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던 이량은 1562년 다시 재기하여 공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에 중용되고,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 의정부 우참찬, 공조 판서, 이조 판서에 오르면서 그의 세도는 절정에 달했다. 이에 사림파(士林派)는 이량의 비리와 전횡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1563년 이량은 정유길(鄭惟吉), 고경명의 아버지 고맹영(高孟英), 이령(李翎),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金百鈞) 등 자신의 당과 모의해 이조전랑으로 추천된 아들 이정빈(李定賓)이 상피제(相避制)로 갈리면서 후임으로 부임한 이정빈의 친구 유영길(柳永吉)의 임명을 반대하던 기대승, 박소립(朴素立), 허엽(許曄),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이산해(李山海) 등 사림파를 제거하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조카인 심의겸(沈義謙)에게 발각되고, 기대승의 종형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으로 이량은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고맹영, 김백균 등 이량의 당원들도 삭탈관직되어 쫓겨났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경명도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바로 파직되었다.
이량의 당 사건으로 기대승과 고경명은 악연이 되었지만 오늘만큼은 이황의 장례일을 맞아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털어버리고 술이나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자는 것이다. 김성원은 기대승과 고경명을 진심으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1572년 정월 벼슬에서 물러난 뒤 환벽당으로 낙향하여 시와 술, 거문고와 노래로 세월을 보내던 김윤제가 세상을 떠나 무등산 기슭에 묻혔다. 이때 정철은 부친상을 당해 2년 전부터 경기도 고양의 신원에서 시묘살이를 하다가 1572년 7월이 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김윤제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정철은 '제벽간당(題碧澗堂)'이란 시를 지어 김윤제를 추모했다.
제벽간당(題碧澗堂)-벽간당에 제하다(정철)
碧澗冷冷瀉玉聲(벽간냉냉사옥성) 벽간당 냇물 돌돌 흐르는 구슬소리에
五更秋枕酒初醒(오경추침주초성) 가을 새벽 베개머리에서 술이 갓 깨네
沙翁去後增嗚咽(사옹거후증명인) 사촌옹이 떠나신 후엔 더욱 목이 메어
風樹興懷不忍聽(풍수흥회불인청) 풍수탄 감회 일어 차마 듣지 못하겠네
김윤제는 정철에게 처외조부이자 대스승이었다. 또 그에게는 인자한 할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 김윤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슬픔이 진하게 드러난 시다. 이 시에는 '沙村翁小草廬,在雙溪之上瑞石之下,一日翁以手筆題廬之北壁曰碧澗堂,翁去後,其子孫追慕請詩,惻然悲吟,書與師古,師古,其孫也(사촌옹의 작은 초가가 쌍계 위 서석봉의 아래에 있는데 하루는 옹이 손수 벽간당이라고 써서 초가집 북쪽 벽에 붙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신 뒤에 그 후손이 추모하여 시를 청하므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사고에게 써 주었다. 사고는 그 자손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풍수(風樹)'는 한영(韓嬰)이 지은 ‘한시외전(韓詩外傳)' 권9에 나오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제(齊)나라로 들어가다가 길에서 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 일행이 가서 보니. 고어(皐魚)란 사람이 상(喪)을 당하지도 않았는데도 거친 베옷을 입고 꺼이꺼이 통곡하고 있었다. 공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고어는 '내가 잘못한 것이 셋 있다. 젊어서 제후에게 공부하면서 부모를 돌보지 않은 점, 나의 뜻을 높이 세웠지만 군주를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한 점, 친구와 친하게 지내다 조금 사이가 끊어진 점 등 세 가지다. 나무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나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가도 만날 수 없는 것이 부모다’ 라고 하였다. 즉 '풍수'는 부모가 죽어 봉양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친부 정유침에 이어 처외조부 김윤제마저 잃은 정철은 생전에 좀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가슴에 풍수지탄으로 사무쳤을 것이다.
김성원도 정철의 '제벽간당'에서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스승이자 당숙인 김윤제를 잃은 김성원의 슬픔도 정철 못지 않았을 것이다.
차제벽간당(次題碧澗堂韻)-제벽간당에서 차운하다(김성원)
席上鳴灘是舊聲(석상명탄시구성) 이 자리서 들리는 여울물 소린 옛 그대론데
醉魂偏向此中醒(취혼편향차중성) 취한 넋이 쏠려가자 이 속에서 술이 깨누나
沙翁已逝松翁遠(사옹이서송옹원) 사촌 선생 돌아가시고 송강마저 멀어졌으니
舊耳那堪獨自聽(구이나감독자청) 옛날 같이 귀 기울여 어이 나만 홀로 듣느뇨
김윤제도 세상을 떠나고, 동무처럼 지내던 정철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어 한양에 가 있으니 옛날에 함께 듣던 시냇물 소리를 지금은 홀로 듣고 있다. 홀로 남은 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다. 세월의 무상함과 쓸쓸함이 짙게 배어 있는 시다.
서하당과 부용당
1574년 음력 4월 20일 고경명은 광주목사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 일행과 함께 증심사(證心寺)에서 출발하여 24일까지 5일 동안 무등산을 유람한 뒤 마지막 날 식영정에 들렀다가 서하당에서 술을 마신다. 이때 부안(扶安)의 명기(名妓) 매창(梅窓)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도 임훈과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은 식영정에 올라 전 사람이 써 놓은 '성(星)'자를 차운한 싯구를 남겼다.
竹葉朝傾露(죽엽조경로)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松梢曉掛星(송초효괘성) 솔가지엔 새벽 별이 걸렸네
'성수시화'에서 허균은 '劉希慶者 本賤隷也. 爲人淸愼 事主忠事親孝 大夫士多愛之 能詩甚純熟. 小日 從林葛川薰 在光州登石川墅 押其樓題星字曰 <竹葉朝傾露, 松梢曉掛星> 梁松川見而亟稱之.[유희경이란 사람은 천한 계급 출신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매우 능수능란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 사람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라 하니, 양송천(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라고 썼다.
운자 '성(星)'으로 보아 유희경은 김성원의 '식영정원운시', 송순의 '차김상사성원식영정운', 김언거나 기대승, 정철의 '차식영정운'에서 차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들 시의 운자가 '정(亭), 성(星), 정(庭), 경(扃)’이기 때문이다.
고경명은 무등산 기행문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서석은 무등산의 옛이름이다. '유서석록' 식영정 조에는 '해질 무렵에야 식영정에 당도하였다. 식영정은 일행인 강숙(剛叔, 김성원)이 지은 별장이다. 임 선생(임훈)은 난간에 기대어 조용한 풍경을 뜻있게 감상하였다. 밤이 되자 주인 강숙이 촛불을 켜들고 나와 정성껏 환대해 주어서 흥겹게 놀다 파하니 이 또한 한때의 즐거움이었다. '식영(息影)'과 '서하(棲霞)' 두 편액은 모두 박영(朴詠)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八分體), 서하는 전자체(篆字體 )로 쓰여져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임억령)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詠)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은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 주고 있다. 서하당 북쪽 모퉁이에는 네모진 연못이 반 이랑쯤 되는데 여기에 백련(白蓮)이 너댓 그루 심어져 있고, 샘물은 대나무 홈통을 타고 층계 밑을 지나 못으로 흐르도록 해 놓았다. 못 남쪽에는 벽도(碧桃)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서쪽에는 석류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가지가 담장 위로 높이 뻗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75년 조정에서는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의 권력 투쟁이 점차 격화되고 있었다. 동인과의 대립에 앞장서던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은 신료들의 분열을 중재하려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7~1584)에게 불만을 품고 벼슬을 내던진 채 창평으로 낙향했다. 창평에서 정철은 서하당을 오가며 김성원과 어울려 지냄으로써 울분과 시름을 달랬다. 정철은 서하당에 올라 마당의 벽오동을 보고 '번곡제하당벽오(飜曲題霞堂碧梧)'란 시를 지었다.
飜曲題霞堂碧梧(번곡제하당벽오)-하당의 벽오동을 번곡하여 적다(정철)
樓外碧梧樹(루외벽오수) 누각 마당에 벽오동나무 있건만
鳳兮何不來(봉혜하불래) 봉황은 어찌하여 오지를 않는가
無心一片月(무심일편월) 허공엔 한 조각 달빛만 무심한데
中夜獨徘徊 (중야독배회) 한밤중에 나만 홀로 배회하노라
정철은 마당의 벽오동나무에 전설 속의 길조 봉황이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로부터 봉황이 출현하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고, 군자가 천자의 지위에 오른다고 했다. 정철이 봉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선조가 다시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뜰을 서성이는 정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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