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엽 이후 호남 지역의 사림을 중심으로 시가문학(詩歌文學)의 창작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는데, 이들을 일러 호남가단(湖南歌壇)이라고 한다. 호남가단은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3)의 면앙정(俛仰亭),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식영정(息影亭),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의 서하당(棲霞堂)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담양(潭陽)의 면앙정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에서 시작된 호남가단은 식영정, 소쇄원, 서하당을 중심으로 한 성산가단(星山歌壇)으로 확대되면서 문예부흥의 꽃을 피웠다.
성산호에서 바라본 성산 까치봉과 장원봉
임억령, 김성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등 식영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들을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이라고 부른다. 식영정 4선은 송순, 양산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등과 함께 성산가단을 형성했다. 성산가단을 일명 식영정가단(息影亭歌壇)이라고도 한다. 식영정 4선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하당의 주인으로 알려진 김성원을 찾아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식영정에서 바라본 서하당과 부용당
만덕산(萬德山, 575m)을 지나 내려오던 호남정맥(湖南正脈)은 수양산(首陽山, 593.9m)에 이르기 직전 서쪽의 국수봉(453m)으로 꺾인 다음 남서쪽의 까치봉(424m)을 지나 남쪽의 무등산(無等山, 1,187m)으로 이어진다. 까치봉에 이르기 전 옹정봉(瓮井峰, 493m)에서 서쪽의 성산호(星山湖, 광주호)를 향해 뻗어간 산줄기에는 장원봉(壯元峰, 342m)이 솟아 있고, 장원봉 바로 남쪽에는 성산(星山, 별뫼, 240m)이 솟아 있다. 성산에서 성산호 상류를 향해 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 끄트머리 언덕 위 소나무와 배롱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식영정이 있고, 그 바로 동쪽 옆 골짜기에 서하당과 부용당(芙蓉堂)이 자리잡고 있다.
부용당 바로 앞에는 부용당(芙蓉塘)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蓮)의 다른 이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부용당 연못에는 백련(白蓮)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식영정 4선도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에서 '부용당(芙蓉塘)'을 노래하고 있다. 임억령과 고경명, 정철의 '부용당'을 들어보자.
부용당(芙蓉塘) - 연꽃 연못(임억령)
白露凝仙掌(백로응선장) 흰 이슬 연잎에 맺혔는데
淸風動麝臍(청풍동사제) 맑은 바람 사향내 감도네
微詩可以削(미시가이삭) 졸시는 다듬을 수 있지만
妙語有濂溪(묘어유염계) 묘한 말은 염계에 있구나
암억령은 부용당의 연잎에 맺힌 이슬과 사향내를 머금은 맑은 바람을 노래하면서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을 신묘한 말이라고 감탄하고 있다. '선장(仙掌)'은 연잎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염계(濂溪)'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도현(道縣)에 있으며, 소수(瀟水)로 흘러 들어가는 시냇물이다. 주돈이는 그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애련설'에서 주돈이는 연꽃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기에 군자의 꽃이라고 극찬했다.
芙蓉塘(부용당) - 고경명
葉卷弓彎袖(엽권궁만수) 접힌 잎은 휘청휘청 궁만무를 추고
花明照夜齊(화명조야제) 꽃이 피어나니 밤에도 환하게 밝네
香風傳谷口(향풍전곡구) 향기로운 바람 골 어귀에 전해지니
乘月訪耶溪(승월방야계) 달을 타고서 저 약야계나 찾아볼까
'궁만(弓彎)'은 소매를 마치 활등처럼 구부려 추는 춤을 말한다. '이문록(異聞錄)'에 '어느 미인이 노래하기를 "장안의 소녀가 봄 경치를 좋아하노니 어느 곳 봄 경치인들 애가 끊이지 않으랴만 춤추는 소매 궁만의 모양 모두 망각하고서 비단 휘장 안에 공연히 구추를 보낸다오.(長安少女翫春陽 何處春陽不斷腸 舞袖弓彎渾忘却 羅帷空度九秋霜)"라고 하였다. 그러자 누가 궁만(弓彎)에 대해 묻자, 그 미인이 즉시 일어나 소매를 벌려 두어 박자 춤을 추면서 마치 활등처럼 굽은 모양을 지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곡구(谷口)'는 골짜기 입구, 서한(西漢)의 은사 정박(鄭璞)의 호, 또는 정박이 도를 닦던 산시성(陝西省) 리취안현(醴泉縣) 동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중의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야계(耶溪)'는 소흥(紹興)의 약야산(若耶山)에서 나오는 약야계(若耶溪)를 말한다. 예로부터 연꽃으로 유명한 곳이다,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가 여기서 비단을 빨았다고 하여 일명 완사계(浣紗溪)라고도 한다. 이백(李白)은 '채련곡(採蓮曲)'에서 '약야계 가에 모여 연꽃 따는 아가씨들, 연꽃을 사이에 두고 서로 웃고 얘기 나누니, 해는 화장한 얼굴을 비춰 물속에 환히 비치고, 바람은 향기론 소매에 불어 공중에 펄럭이네(若耶溪傍採蓮女 笑隔荷花共人語 日照新粧水底明 風飄香袖空中擧).'라고 읊었다
芙蓉塘(부용당) - 정철
龍若閟玆水(용약비자수) 용이 연못에 숨어 나오지 않으면
如今應噬臍(여금응서제) 이제 와서는 응당 후회할 것이라
芙蓉爛紅白(부용란홍백) 희고 또 붉은 연꽃 흐드러졌으니
車馬簇前溪(거마주전계) 말과 수레 시내 앞으로 모여드네
연꽃이 흐드러지게 핀 부용당의 정경을 노래한 시다. 7~8월 경 부용당에 갔을 때는 연꽃이 보이지 않았다. 부용당에 정작 연꽃이 없으니 정자와 연못 이름이 무색하다.
서하당 앞 '송강 정철 가사의 터' 비
김성원은 1525년 무등산(無等山, 1,187m) 북쪽 기슭의 석저촌(石低村),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김홍익(金弘翼),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 장사랑(將仕郞) 최한종(崔漢宗)의 딸이다. 자는 강숙(剛叔), 호는 서하당(棲霞堂) 또는 인재(忍齋)이다.
김성원은 6세 때인 1531년(중종 26)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나주목사를 지낸 당숙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에게 글을 배웠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해인 1545(인종 1, 명종 즉위년) 서산 유씨(瑞山柳氏) 유사(柳泗)의 딸과 결혼했다.
서하당(오른쪽)과 부용당(왼쪽)
을사사화는 명종의 수렴청정(垂簾聽政) 여왕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尹氏)의 사주를 받은 윤원형(尹元衡), 임백령(林百齡),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등 소윤(小尹) 일파가 '인종이 사망했을 때 윤임(尹任)이 계림군(桂林君)을 추대하려 했다.'면서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 대윤(大尹) 일파를 역적으로 몰아 제거한 사건이었다. 계림군 이유(李瑠)도 한양으로 압송되어 능지형(凌遲刑)을 당했다. 계림군의 부인은 바로 정철의 막내누이였다. 을사사화의 피바람은 정철 가문에도 불어닥쳤다.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鄭惟沈)은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고, 맏형 정자(鄭滋)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유배되었다.
정치공작 을사사화를 일으켜 공신이 된 임백령은 임억령의 아우였다. 중앙 정치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환멸을 느낀 임억령은 벼슬을 내던지고 고향 해남(海南)으로 돌아왔다. 임억령은 측실(側室)로 맞은 양씨 부인을 위해서 담양 창평현(昌平縣) 성산에 별서(別墅) 서하당과 부용당을 지었다. 양씨 부인은 양산보의 4종매(四從妹)라고 알려져 있다.
서하당에서 바라본 성산호
1547년(명종 2) 9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났다.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에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명종에게 바쳤다. 혹은 문정왕후에세 바쳤다는 설도 있다. '여주'는 문정왕후를 뜻했다. 윤원형, 이기, 허자, 정순붕, 윤인경(尹仁鏡) 등 소윤파의 주청으로 명종은 윤원형을 탄핵했던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賜死)했다. 그리고,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백인걸(白仁傑), 정철의 형인 정자와 정황(鄭熿),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 김만상(金彎祥), 권응정(權應挺), 권응창(權應昌), 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중종의 아들 봉성군(鳳城君) 완(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른바 정미사화(丁未士禍)이다. 양재역벽서사건은 소윤 일파가 대윤 일파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정치공작이었다.
정미사화로 정철의 아버지 정유침은 다시 경상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다. 정철도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전전했다. 전라도 광양에 유배되었던 정자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경원(慶源)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도중 장독이 도져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정철의 둘째 형 정소(鄭沼)는 맏형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자 벼슬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과거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내려가 은거한 채 학문과 수양으로 세월을 보냈다. 정철의 셋째 형 정황(鄭熿)은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김제군수와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에 올라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황의 딸은 나중에 선조의 후궁 귀인 정씨(貴人鄭氏)가 되었다.
서하당
서하당 편액
1551년(명종 6) 김성원은 향시(鄕試)에서 일등을 하였다. 그해 정철은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창평의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정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창평에서 10여 년을 보냈다.
정철은 이때 김성원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창계천(蒼溪川, 자미탄, 증암천) 가에 있는 환벽당(環碧堂)의 주인 김윤제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2년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이자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외동딸과 결혼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이 되었다. 김성원과 정철은 김윤제의 문하에서 '근사록(近思錄)', '주역(周易)' 등을 공부하였다.
1557년(명종 12) 32세의 김성원은 당시 담양부사로 있던 임억령의 문하에서 한시(漢詩), 김인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듬해에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이 무렵 임억령과 양씨 부인에게서 난 서녀(庶女) 둘째 딸이 김성원에게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김성원은 이미 유사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다. 조선 시대 서녀는 양반가의 측실이 되거나 기생(妓生)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1559년(명종 14) 7월 27일 임억령은 담양부사에서 물러났다. 담양부사에서 물러난 임억령은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갔다. 그는 사위 김성원에게 송별시를 남기고 해남의 본가를 향해 떠나갔다.
산과 물 좋아하여 난간에 올라도 보고, 소나무 사랑하여 뜰에서 또 서성였네
돌아오는 봄에 다시 만나고자 하니, 나를 위해 이 바위경치나 다스려 주시게
성산의 아름다운 암경(岩景)을 보러 내년 봄에 다시 올 것이니, 사위에게 서하당의 정자원림 관리를 부탁한다는 시다. 김성원은 장인을 배웅하면서 답시를 지어 읊었다.
가시덤불 벤 언덕엔 난초 자라나고, 오동을 심은 뜰엔 봉황이 내려앉겠지요
우의를 머물게 하여도 붙잡을 수 없으니, 긴 창문 밖에 가을비만 내리는군요
벽오동을 심은 뜻은 봉황을 보고자 한 것이다. 봉황은 바로 선산 임씨가 낳은 당대 최고의 스타 시인 임억령이었다. 가을비가 정든 장인과의 이별을 더욱 구슬프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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