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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 선생의 59주기를 맞아|

林 山 2018. 8. 1. 14:35

2018년 7월 31일은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선생의 59주기가 되는 날이다. 조봉암 선생은 1959년 7월 31일 11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승만 독재정권이 저지른 사법살인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인천 강화도에서 태어난 조봉암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공산당을 창당해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간 조봉암 선생은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에서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을 탈당한 조봉암 선생은 1948년 제헌의회 의원,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초대 농림부장관과 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농림부장관 재직시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정부가 양곡을 매입하고 배급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농촌개혁을 이끌 농민조직 결성을 주도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장기집권의 마수를 드러내자 조봉암 선생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와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의 자유당 보수 세력에 맞서기 위해 1956년 평화통일과 사회민주주의를 주요 강령으로 한 진보당을 창당하고,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30%를 웃도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진보당의 노선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를 강령으로 내건 오늘날의 진보 개혁적인 정당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 


진보당과 조봉암 선생은 곧 독재자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떠올랐다. 위협을 느낀 자유당과 이승만 독재정권은 북한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조봉암 선생을 사형에 처하는 천인공노할 사법살인을 자행했다. 하지만 2011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심을 수용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비로소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19년 7월 31일은 조봉암 선생 탄생 120주년, 서거 60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 서거 60주기에는 반드시 조봉암 선생에게 건국훈장과 독립유공자 훈장이 추서되어야 된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지 않았더라면 조봉암 선생은 벌써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감옥살이까지 한 조봉암 선생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제대로된 나라가 아니다. 


조봉암 선생은 처형을 당하기 전 '나는 이(승만)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을 헛되이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봉암 선생의 유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8.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