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황당했던 시골 소년 상경기

林 山 2019. 10. 4. 12:08

일단 소년이라고 자칭한 것부터 미리 사과해야겠다. 하지만 나는 늘 소년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기에 그런 표현을 쓴 것이다.


서울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성북구 혜곡 최순우 옛집에 있다는 추사 김정희의 '梅心舍(매심사)', '梅竹水仙齋(매죽수선재)', 최순우가 단원 김홍도의 화첩에서 따온 '午睡堂(오수당)', 최순우의 '杜門卽是深山(두문즉시심산)'이란 글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18호 태풍 미탁이 동해로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 앞유리의 빗물을 닦기 위해서 세정액을 쏘았다. 그런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세정액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여주휴게소에 들러 만물상에서 세정액 한 병을 샀다. 세정액을 사본 지 몇 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세정액 병을 보니 큰 글씨로 '에탄올'이라고 표기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에게 물었다.


나: 아니, 이거 술 만드는 알콜이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요?

주인: 맞아요.

나: 이거 세정액 맞아요?

주인: 맞다니까요?

나: 세정액에 알콜이 들어가는 게 정말 맞아요?

주인: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메탄올에서 에탄올로 바뀐 지 꽤 됐어요.


검색을 해보니 2018년 1월부터 메탄올 세정액은 판매, 제조,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고 한다. 기존 세정액에는 90% 가량이 독성물질로 알려진 메탄올이 주성분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에탄올 세정액 관련 규정이 없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다가 2018년 1월부터 메탄올 세정액이 전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차량 관리는 함께 일하는 동생이 틈틈이 해주는 터라 그동안 운전대만 잡았을 뿐 차량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세정액을 넣어본 기억도 거의 없다. 세정액에 메탄올이 들어있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정액을 보충하기 위해 보닛을 여는데 이게 왠 일인가? 아무리해도 보닛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기억으로는 운전대 좌측 하단 무릎 높이에 있는 있는 보턴이 보닛 여는 것이었는데 이상했다.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알려주는 대로 해도 보닛은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여주휴게소 내 주유소로 차를 끌고 가서 세정액을 한 병 더 사면서 보닛을 여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그러니 대신 좀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젊은 주유소 직원은 아까 만물상 주인보다 더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보닛도 못 여는 사람이 어떻게 차를 끌고 나왔을까?'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주유소 직원은 운전석 차문을 열더니 내가 열심히 눌렀던 그 보턴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아래에 있는 빨간색(주황색이던가?) 레버를 당겼다. 순간 보닛이 '덜컹' 하고 아주 쉽게 열렸다. 그제서야 보닛 레버가 왼쪽 저 아래 깊숙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주유소 직원이 세정액을 얼마 넣지도 않았는데 금방 넘쳐났다. 세정액은 이미 가득 들어 있었다. 주유소에서 새로 산 세정액을 도로 갖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직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보닛을 닫고 다시 세정액 보턴을 눌렀다. 하지만 세정액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세정액 보턴을 계속 눌렀다. 한참만에 세정액이 분수처럼 솟구쳐 나왔다. 한동안 세정액을 사용하지 않아 뭐가 말라붙은 것이 통로를 막았던 것 같았다.


잠시 운전석에 앉아 자아비판의 시간을 가졌다. 차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깜빡깜빡하는 이놈의 건망증이 문제였다.


여주휴게소 상행선 주유소 직원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주유소 직원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고, 또 건강하기를 천지신명님께 기원한다.


2019.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