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 시 한 수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시, 김성장 서

林 山 2019. 10. 29. 17:53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시, 김성장 서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어머니 그 먼 나라.....'는 신석정(辛夕汀)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시대인 1932년 5월 '삼천리'에 처음 발표한 시다. 1939년 11월 28일 인문사(人文社)에서 발행한 그의 첫 시집 '촛불'에도 실려 있다.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패망이 가까워오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식민지 백성들에게 굴종과 변절을 강요했다. 조선의 문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많은 문인들이 일제의 집요한 강요에 못이겨 변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일황과 조선총독부에 아부하면서 변절의 길을 걸어간 문인도 많았다. 


최남선, 이광수, 김동인, 김동환, 김억,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유진오, 이원수, 정비석, 주요한, 채만식, 유치진, 최재서, 백철 등 많은 문인들이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면서 변절의 길을 걸어갔지만 신석정은 일제 치하에서 자신을 꼿꼿이 지키기 위해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일종의 절필이었다. 그의 절필은 일제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비로소 벽장 속에 숨겨 두었던 미발표 시들을 꺼내 한 권의 시집으로 펴냈다.


이쯤 되면 '그 먼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석정에게 '그 먼 나라'는 바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사라진 세상이다. '먼 나라'이기에 쉽게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먼 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 조국은 '흰 물새 날고', '염소 한가히 풀 뜯고', '비둘기 멀리 날고',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고,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세상이다.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목가적인 이상향이다. 타오위안밍(陶淵明)의 '타오화위안지(桃花源記)'에 나오는 우링타오위안(武陵桃源),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노래한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에 나오는 이니스프리이다.


'그 먼 나라'는 혼자서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가는 곳이다. 여럿이 함께 가야 할 세상이다. 민중이 함께 만들고 함께 누려야 할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함께 비둘기를 키우고, 함께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오고, 함께 새빨간 사과를 따자고 제안한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세상이다. 그 세상은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평등하게 살아가는 대동세상(大同世上)이다.


일본이 물러간 '그 먼 나라'엔 미군이 들어왔다. '그 먼 나라'는 해방이 되고 독립은 되었다. 하지만 '그 먼 나라'는 과연 신석정이 꿈꾸던 그런 세상이었을까?


글씨는 김성장이 신영복 민체로 썼다. 그런데, 글씨체가 재미있다. 가로획이나 세로획의 형태가 모두 비슷하다. 같은 형태의 획으로 작품을 완성한 재미있는 글씨다.


2019. 10. 29.